태합검지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태합검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 통일 과정에서 실시한 토지 측량 사업이다. 복잡한 중세 시대 토지 소유 관계를 정리하고, 하나의 토지에 한 명의 경작자를 원칙으로 했다. 석고제를 도입하여 단위 통일을 이루었으며, 토지의 면적과 수확량을 실제 측량하여 파악하려 했다. 1582년부터 1598년까지 일본 전국에서 순차적으로 시행되었으며, 도요토미 정권의 중앙 집권 강화, 농민 지배 강화, 에도 막부 토지 제도의 기초 확립에 영향을 미쳤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태합검지 | |
---|---|
태합검지 | |
![]() | |
개요 | |
별칭 | 덴쇼의 대검지 (天正の太閤検地, Tenshō no taikō kenchi) |
목적 | 전국 통일의 기반 마련 조세 수입 확보 |
실시 시기 | 1582년 ~ 1598년 (덴쇼 10년 ~ 게이초 3년) |
주요 내용 | 토지 면적 및 품질 조사 경작자 확인 및 등록 새로운 토지 단위 (간, 분, 묘) 사용 검지 장부 작성 |
배경 | |
이전 검지 | 간무덴의 검지, 오다 노부나가의 검지 등 |
필요성 | 전국 통일 과정에서 토지 지배 명확화 군역 및 조세 부과의 기준 확립 농민 지배 강화 |
방법 | |
단위 | 간 (間, ken), 분 (分, bun), 묘 (畝, myō) 등의 새로운 토지 단위 사용 |
도량형 | 통일된 도량형 사용 |
장부 | 검지 장부 (検地帳, kenchichō) 작성 |
경작자 | 경작자를 기준으로 토지 파악 (一地一作人, Itchi Issakunin) |
태합승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검지 증명 |
영향 | |
정치 | 중앙 집권 체제 강화 다이묘 지배력 약화 |
경제 | 조세 수입 증가 농민 경제 안정 |
사회 | 신분제 확립 병농분리 가속화 |
평가 | |
긍정적 평가 | 전국 통일 기반 마련 조세 제도 확립 |
부정적 평가 | 농민 수탈 강화 신분제 고착화 |
기타 | |
관련 인물 | 도요토미 히데요시 |
관련 용어 | 검지, 도수령, 병농분리 |
2. 역사적 배경
일본 전국 시대 이전에는 각 영주가 자신의 영지 내에서 세금을 매길 때 그 기준이 되는 자료, 즉 영지 내의 토지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영주 밑의 가신이나 유력 일족들의 반발이 커서 실제로 토지 조사를 실시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호조 소운으로부터 시작되는 전국 다이묘(전국 대명)의 등장으로, 자신의 군사력과 재판권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영지 지배권을 행사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러한 권한 행사의 한 예가 바로 검지였다.
오다 노부나가도 검지를 실시했지만(이를 노부나가 검지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때 실무를 담당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당시 기노시타 도키치로)는 이미 검지의 중요성을 파악하고 있었다.[1] 1582년 혼노지의 변 이후, 히데요시는 아케치 미쓰히데를 야마자키 전투에서 토벌하고 야마자키 주변 사찰의 토지 대장을 모아 권리 관계를 확인하는 등 검지를 본격화했다. 히데요시가 1591년 태합을 자칭하기 이전부터의 것을 포함하여, 히데요시가 관련된 검지를 '''태합 검지'''라고 부른다.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1604년에 단위를 국에서 향(郷)으로 바꿔 고젠초와 국 그림을 징수했다(게이쵸 고젠초).
2. 1. 오다 노부나가의 검지
오다 노부나가도 검지를 실시했는데(이것을 노부나가 검지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다), 이때 봉행인이었던 기노시타 토키치로(후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이미 실무를 담당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중요성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2. 2.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태합 검지
1582년, 혼노지의 변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아케치 미쓰히데를 야마자키 전투에서 토벌하고 권력을 장악하면서 야마자키 주변 사찰지에서 검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1] 히데요시는 검지 결과를 바탕으로 '덴쇼 고젠초(天正御前帳)'를 작성하여, 각 국의 석고(石高)를 중앙 정부에 보고하도록 했다. 태합 검지는 권리 관계 정리와 단위 통일을 도모한 혁신적인 의미를 가질 뿐만 아니라, 농민에 대한 연공 부과, 다이묘나 가신에 대한 지행(知行) 지급, 군역 부과, 가격 등 이후의 제도, 경제, 문화의 기초가 되는 정확한 정보를 중앙에 집권적으로 파악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3. 주요 특징
태합검지는 토지 소유 관계를 명확히 하고자 했다. 중세 일본의 복잡한 토지 소유 관계를 정리하고, 하나의 토지에 한 명의 경작자(납세자)를 정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2]
또한, 태합검지를 통해 일본 전국의 토지 단위가 통일되었다. 길이 단위는 6척 3촌을 1간(약 191cm)으로 정하고, 1간 사방(1간 × 1간)을 1보, 30보를 1이랑, 10이랑을 1정으로 하였다. 밭과 논은 상, 중, 하, 하하의 4등급으로 나누었으며, 되는 경되를 사용했다.[3]
태합검지에서는 이전까지 농촌에서 자기 신고하는 형식의 검지가 많았던 것과 달리, 많은 전답이 실제로 측량되었다(장량 검지). 이를 통해 보다 정확한 수치를 얻을 수 있었다. 다만, 일부 지역에서는 실제로 측량하지 않은 예도 있었다.[3]
3. 1. 토지 권리 관계 정리
태합검지는 중세 일본의 복잡한 토지 소유 관계(지하청(地下請))를 정리하고자 했다. 지하청 체제에서는 하나의 마을이 여러 영주에게 공납을 바치거나, 농민이 유력 농민에게 공납을 바치고 다시 영주에게 공납이 바쳐지는 등 권리 관계가 복잡했다.[2]태합검지는 하나의 토지에 한 명의 경작자(납세자)를 정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농촌 내에 다양한 권리 관계가 여전히 존재했으며, 공식적인 장부와는 별도로 마을 내부에서 실태에 맞는 장부가 작성되기도 했다.[2]
3. 2. 단위 통일
태합검지는 다음과 같은 기준으로 실시되었다.- 석고제로 결과를 계산한다.
- 길이 단위
- * 6척 3촌 = 1간 (약 191cm)
- * 1간 사방(1간 × 1간) = 1보
- * 30보 = 1이랑
- * 10이랑 = 1정
- 밭과 논은 상, 중, 하, 하하의 4등급으로 나눈다.
- 되는 경되를 사용한다.
이에 따라 일본 국내에서 토지에 사용하는 단위가 대략 통일되었다.[3]
3. 3. 수치의 정확성
전국 시대까지는 농촌에서 자기 신고하는 형식의 검지(지적 검지)가 많았지만, 태합 검지에서는 많은 전답이 실제로 측량되었다(장량 검지). 다만, 에치고 국의 우에스기 씨 영지와 같이, 실제로 측량하지 않은 예도 많이 존재한다.[3]"이전까지의 석고는 연공을 나타내고 있었던 것에 대해, 태합 검지의 석고는 생산량을 나타내고 있다"라고 설명되는 경우가 일반적이지만, 이것은 오류라고도 한다. 태합 검지에서의 두대·분미가 가마쿠라 시대의 쇼엔제의 그것과 거의 유사하다는 점을 지적하며, 대부분의 경우 이 석고에서 '면'(연공의 일정액 면제)이 공제된 후에 연공이 납부되었다. 이 사실은 석고가 생산량이 아니라 연공고로 인식되고 있었던 것을 증명한다.[4]
다만, 데와 국의 석고는 명백히 이상하고, 극단적으로 과소하다.[5](오키타마 군만으로 18만 석 이상 있어 데와 국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4. 검지 시행 지역 및 연도별 추이
연도 | 국 수 |
---|---|
1582년 | 3 |
1583년 | 4 |
1584년 | 7 |
1585년 | 5 |
1586년 | 2 |
1587년 | 6 |
1588년 | 8 |
1589년 | 16 |
1590년 | 19 |
1591년 | 20 |
1592년 | 10 |
1593년 | 9 |
1594년 | 14 |
1595년 | 20 |
1596년 | 8 |
1597년 | 5 |
1598년 | 10 |
출전: [6] |
태합 검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직전인 1598년까지 일본 전국에서 순차적으로 시행되었다. 연도별 검지 시행 국 수는 1589년(16개국), 1590년(19개국), 1591년(20개국), 1595년(20개국)에 가장 많았다.
5. 태합 검지의 의의 및 영향
전국 다이묘(전국 대명)는 자신의 군사력과 재판권을 배경으로 독자적인 영지 고권을 행사했는데, 검지(檢地)가 그 예시 중 하나였다.
태합 검지는 권리 관계 정리와 단위 통일을 도모하여 혁신적인 의미를 가졌다. 또한 농민에게는 연공을 부과하고, 다이묘와 가신에게는 지행(知行)을 지급했으며, 군역 부과와 가격 등 이후 제도, 경제, 문화의 기초가 되는 정확한 정보를 중앙에서 집권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태합 검지를 참고하여 토지 조사를 실시했다.
5. 1. 도요토미 정권의 중앙 집권 강화
오다 노부나가도 검지를 실시했지만(이것을 노부나가 검지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다), 이때 봉행인이었던 기노시타 도키치로(후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이미 실무를 담당했던 것이 알려져 있으며, 그 중요성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 덴쇼 10년, 노부나가를 습격한 아케치 미쓰히데를 야마자키에서 토벌한 후에는, 야마자키 주변의 사찰지에서 대장을 모아 권리 관계를 확인하는 등 검지를 본격화해 나갔다. 이처럼 태합을 자칭한 덴쇼 19년 이전부터의 것을 포함하여, 히데요시가 관계된 검지를 '''태합검지'''라고 부른다.히데요시는 관백을 사임하고 태합이 된 후, 검지를 통해 얻어진 방대한 검지장을 기반으로, 국별로 히데요시가 슈인조(朱印状)로 인정한 석고(石高)를 그림을 첨부하여 제출하도록 명령하여 징수시켰다. 이것을 「덴쇼 고젠초(天正御前帳)」라고 한다. 태합 검지는 권리 관계 정리와 단위 통일을 도모한 혁신적인 의미를 가질 뿐만 아니라, 농민에 대한 연공 부과, 다이묘나 가신에 대한 지행(知行) 지급, 군역 부과, 가격 등 이후의 제도, 경제, 문화의 기초가 되는 정확한 정보를 중앙에 집권적으로 파악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5. 2. 에도 막부 토지 제도의 기초 확립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게이초 9년(1604년)에 전국 단위였던 것을 고(郷) 단위로 바꾸어 고젠초와 국 그림을 징수했다(게이초 고젠초).[1] 태합검지는 권리 관계 정리와 단위 통일을 도모하여 혁신적인 의미를 가졌다. 또한 농민에게는 연공을 부과하고, 다이묘와 가신에게는 지행(知行)을 지급하며, 군역 부과와 가격 책정 등 이후 제도, 경제, 문화의 기초가 되는 정확한 정보를 중앙에서 집권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참조
[1]
뉴스
秀吉「親類縁者でも見逃すな」 収税めぐる書状発見
http://www.asahi.com[...]
2015-07-11
[2]
서적
信長と石山合戦―中世の信仰と一揆
吉川弘文館
2008
[3]
서적
天下統一から鎖国へ
吉川弘文館
2009
[4]
서적
日本中近世移行期論
校倉書房
2012
[5]
간행물
慶長三年地検目録」「町歩下組帳
大日本租税志 中巻
1908
[6]
서적
社会科資料図解大事典〈日本歴史編〉
全国教育図書
1965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