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일후크 스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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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테일후크 스캔들은 1991년 미국 해군 항공 심포지엄에서 발생한 성추행 사건을 말한다. 해군 및 해병대 조종사들의 사교 클럽인 테일후크 협회는 매년 컨벤션을 열었는데, 이 자리에서 과도한 음주, 성적 괴롭힘 등의 문제가 발생했다. 1991년 심포지엄에서는 여성에 대한 조롱과 성추행 사건이 벌어졌고, 이에 대한 해군과 국방부의 조사, 징계 및 군사 재판이 진행되었다. 이 사건은 미국 군대 내 성희롱 문제에 대한 관심을 높였으며, 여성의 전투 참여 금지 해제, 성희롱 예방 정책 강화 등의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징계의 불공정성, 이중 잣대 적용 등의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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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일후크 스캔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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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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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일 | 1991년 9월 5일 ~ 8일 |
발생 장소 | 라스베이거스, 네바다 주, 미국 |
사건 개요 | |
사건 | 테일후크 스캔들 |
발생 시기 | 1991년 |
장소 | 라스베이거스 힐튼 호텔 |
원인 | 해군과 해병대 항공기 조종사들의 연례 모임에서 발생한 성추행 및 직권 남용 사건 |
결과 | 다수의 장교 징계 해군 장관 사임 여성의 군 복무에 대한 광범위한 논의 |
스캔들 조사 및 결과 | |
조사 주체 | 국방부 감사관실 |
조사 결과 | 100명 이상의 해군과 해병대 장교들이 부적절한 행위 연루 성추행, 폭행, 공공 음란 행위 등 다양한 혐의 사건 은폐 시도 |
파장 및 영향 | |
정치적 파장 | 해군 장관 사임 의회 청문회 개최 군대 내 성폭력 문제에 대한 인식 제고 |
군사적 영향 | 해군과 해병대의 문화 변화 시도 성추행 예방 교육 강화 여성의 군 복무 기회 확대 |
관련 인물 | |
핵심 인물 | H. 로렌스 개럿 3세 (해군 장관, 사임) 존 덜리 (해군 소장, 징계) |
피해자 | 폴라 코프린 (해군 대위) 다수의 여성 해군 및 해병대 장교 |
2. 테일후크 협회와 스캔들의 배경
테일후크 협회는 1956년 해군 및 해병대 조종사(조종사와 항공 승무원)들의 비공식 클럽으로 시작되어 매년 한 번씩 만나 사교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2] 1963년까지 연례 행사는 인기가 높아져 라스베이거스의 샌즈 호텔 앤 카지노로 장소를 옮겼고, 1968년에는 라스베이거스 힐튼으로 옮겨져 1991년까지 개최되었다.[2]
시간이 흐르면서 테일후크 협회는 미군과 준 공식적인 관계를 맺게 되었고, 해병대 항공 기지 미라마에 사무실을 무상으로 제공받기도 했다.[3] 연례 컨벤션에서는 군사 항공 및 작전에 대한 포럼, 발표, 심포지엄이 열렸다. 장교들은 휴가가 아닌 공식 임무("임시 임무")로 참석할 수 있었지만, 사복을 입었다.[3] 제독, 방위 계약업체는 물론, 고위 장교와 미국 국방부(DoD) 관계자들도 정기적으로 참석했다. 국방부는 종종 참석자들이 회의에 참석할 수 있도록 군용기를 제공했다.[3] 1991년 테일후크 협회 회원 14,000명 중 96%가 남성이었는데, 이는 해군 항공 함대의 숫자를 반영한 것으로, 조종사와 항공 승무원 9,419명 중 여성은 177명이었고, 그 중 제트 항공기를 조종하는 사람은 27명에 불과했다.[4]
2. 1. 초기 역사와 발전
테일후크 협회는 1956년 해군 및 해병대 조종사(조종사와 항공 승무원)들의 비공식 클럽으로 시작되어 매년 한 번씩 만나 사교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2] 1963년까지 연례 행사는 인기가 높아져 라스베이거스의 샌즈 호텔 앤 카지노로 장소를 옮겼고, 1968년에는 라스베이거스 힐튼으로 옮겨져 1991년까지 개최되었다.[2]시간이 흐르면서 테일후크 협회는 미군과 준 공식적인 관계를 맺게 되었고, 해병대 항공 기지 미라마에 사무실을 무상으로 제공받기도 했다.[3] 연례 컨벤션에서는 군사 항공 및 작전에 대한 포럼, 발표, 심포지엄이 열렸다. 장교들은 휴가가 아닌 공식 임무("임시 임무")로 참석할 수 있었지만, 사복을 입었다.[3] 제독, 방위 계약업체는 물론, 고위 장교와 미국 국방부(DoD) 관계자들도 정기적으로 참석했다. 국방부는 종종 참석자들이 회의에 참석할 수 있도록 군용기를 제공했다.[3] 1991년 테일후크 협회 회원 14,000명 중 96%가 남성이었는데, 이는 해군 항공 함대의 숫자를 반영한 것으로, 조종사와 항공 승무원 9,419명 중 여성은 177명이었고, 그 중 제트 항공기를 조종하는 사람은 27명에 불과했다.[4]
2. 2. 문제 행동에 대한 우려
이 컨벤션은 만연한 흥청거리는 분위기로 잘 알려져 있었으며, 과도한 음주, 공공장소에서의 나체, 공격적인 성적 접근 등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해군 및 해병대 비행 편대는 힐튼 호텔에서 환대 스위트를 주최했는데, 이 중 많은 곳에서 음주를 조장하고 스트리퍼의 공연과 같은 성적으로 지향적인 활동과 발표를 선보였다.
1985년 컨벤션 이후, 듀크 커닝햄(Duke Cunningham) 해군 제독, 제임스 E. 서비스(James E. Service) 해군 소장, 에드워드 H. 마틴(Edward H. Martin) 해군 중장 등 테일후크 이사회의 여러 고위 참석자들은 자신들이 목격한 술에 취한 난동이 도를 넘었다고 공식적으로 불만을 제기했다. 해군 관계자로부터 공식 후원이 철회될 수 있다는 위협에 대응하여 테일후크 협회는 이후 컨벤션에서의 행동에 대한 제한을 가했다. 그러나 이후 컨벤션에서도 과도한 음주, 성적으로 노골적인 발표 및 활동, 참석자들의 저속한 행동이 계속되었다.
테일후크 협회 지도자들은 1980년대 후반에 시작되어 이후 컨벤션에서 관습이 된 "건틀릿(gauntlet)"이라 불리는 행위에 대해 특히 우려했다.
3. 1991년 테일후크 심포지엄
1991년 테일후크 컨벤션은 공식적으로 "제35회 해군 항공 심포지엄"으로 명명되었으며, 라스베이거스 힐튼 호텔에서 9월 5일부터 8일까지 열릴 예정이었다. 걸프 전쟁이 그해 초에 일어났고, 4,000명의 참석자들을 위해 미 해군과 해병대 항공 작전에 관한 11시간 이상의 발표와 토론이 중심적으로 이루어질 예정이었다.[13] 해군 전체 고정익 항공모함 조종사의 3분의 1이 조금 넘는 인원이 참석할 것으로 예상되었다.[14]
9월 6일 금요일, 이라크에 의해 격추되어 포로로 잡힌 8명의 해군 및 해병대 조종사 중 3명이 그들의 경험에 대한 발표를 했다.[15] 그날 저녁, 해군 작전 참모총장(CNO) 프랭크 켈소가 참석자들을 위한 연회에서 연설했다.[16]
9월 7일 토요일 오후, "기수 패널"이라는 세션이 열렸고, 약 1,500명의 참석자가 모였다. 이 행사의 전통적인 부분으로, 기수 장교 패널이 참석자들의 모든 질문에 답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1991년 세션은 수석 해군 항공 조종사(공식적으로 해군 작전 참모차장(항공전)으로 명명됨) 리처드 던리비 중장이 의장을 맡았으며, 7명의 다른 제독과 1명의 해병대 장군이 동행했다. 패널은 테일후크 협회 회장인 프레데릭 루드비히 대령이 사회를 맡았다. 세션 중에 한 여성 참석자가 던리비에게 언제 여성들이 전투기에 탑승할 수 있느냐고 질문했다. 그녀의 질문에 객석에서는 야유와 조롱하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던리비는 "만약 의회가 해군 장관에게 자격을 갖춘 여성에게 전투기 비행을 허용하도록 지시한다면, 우리는 따를 것입니다."라고 대답했고, 이는 청중들로부터 더욱 거친 야유와 야유를 불러일으켰다.[17] 컨벤션의 공식 일정은 그날 저녁, 약 800명이 참석한 연회로 마무리되었으며, 이 자리에서 해군 장관(Secretary of the Navy) 헨리 L. 개럿 3세가 연설을 했다.[18]
3. 1. 주요 의제 및 행사
1991년 테일후크 컨벤션은 공식적으로 "제35회 해군 항공 심포지엄"으로 명명되었으며, 라스베이거스 힐튼 호텔에서 9월 5일부터 8일까지 열릴 예정이었다. 걸프 전쟁이 그해 초에 일어났고, 4,000명의 참석자들을 위해 미 해군과 해병대 항공 작전에 관한 11시간 이상의 발표와 토론이 중심적으로 이루어질 예정이었다.[13] 해군 전체 고정익 항공모함 조종사의 3분의 1이 조금 넘는 인원이 참석할 것으로 예상되었다.[14]9월 6일 금요일, 이라크에 의해 격추되어 포로로 잡힌 8명의 해군 및 해병대 조종사 중 3명이 그들의 경험에 대한 발표를 했다.[15] 그날 저녁, 해군 작전 참모총장(CNO) 프랭크 켈소가 참석자들을 위한 연회에서 연설했다.[16]
|thumb|1991년 테일후크 협회 심포지엄 의장, 리처드 던리비 중장]]
9월 7일 토요일 오후, "기수 패널"이라는 세션이 열렸고, 약 1,500명의 참석자가 모였다. 이 행사의 전통적인 부분으로, 기수 장교 패널이 참석자들의 모든 질문에 답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1991년 세션은 수석 해군 항공 조종사(공식적으로 해군 작전 참모차장(항공전)으로 명명됨) 리처드 던리비 중장이 의장을 맡았으며, 7명의 다른 제독과 1명의 해병대 장군이 동행했다. 패널은 테일후크 협회 회장인 프레데릭 루드비히 대령이 사회를 맡았다. 세션 중에 한 여성 참석자가 던리비에게 언제 여성들이 전투기에 탑승할 수 있느냐고 질문했다. 그녀의 질문에 객석에서는 야유와 조롱하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던리비는 "만약 의회가 해군 장관에게 자격을 갖춘 여성에게 전투기 비행을 허용하도록 지시한다면, 우리는 따를 것입니다."라고 대답했고, 이는 청중들로부터 더욱 거친 야유와 야유를 불러일으켰다.[17] 컨벤션의 공식 일정은 그날 저녁, 약 800명이 참석한 연회로 마무리되었으며, 이 자리에서 해군 장관(Secretary of the Navy) 헨리 L. 개럿 3세가 연설을 했다.[18]
3. 2. '건틀릿'과 기타 사건들
9월 7일 밤, 3층 복도에서는 여성을 붙잡고 희롱하는 '건틀릿'이라 불리는 가혹행위가 벌어졌다.[19] 복도 양쪽 끝의 남성들은 여성이 다가오면 신호를 보내고, 복도 중앙의 남성들은 여성들의 엉덩이, 사타구니, 가슴을 만지거나 셔츠, 블라우스를 잡아당기는 등의 행위를 했다.[19] 일부 여성들은 즐기는 듯 보였지만, 다른 여성들은 격렬하게 항의하며 저항했으나 무시당하거나 조롱당했다.[19][20]오후 11시 30분경, 폴라 코플린 해군 중위는 3층 복도에서 성추행을 당했다.[23] CH-53 헬리콥터 조종사이자 패턱센트 강 해군 항공 기지의 잭 스나이더 해군 준장(

같은 날 밤, 자정 직후에는 8층 방에 있던 참가자들이 "문잉"을 하다가 창문을 밀어 유리창이 수영장 주변 군중에게 떨어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한 여대생이 뇌진탕을 일으켰다.[26]
4. 초기 반응과 조사
코플린은 상관인 잭 스나이더 해군 준장에게 폭행 사실을 알렸으나, 스나이더는 "폴라, 그런 사람들하고 어울리는 짓은 그만둬야지. 술 취한 비행사들 틈에서 3층에서 그런 일을 겪을 거라고 예상해야지."라며 무관심한 반응을 보였다.[27] 이후 코플린은 해군 수사국(NIS)에 정식 조사를 요청했고, 조사는 1991년 10월 11일에 시작되었다.[28]
9월 19일, 스나이더의 참모장인 로버트 파킨슨 대위와 코플린은 팻턱슨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스나이더를 만났고, 코플린은 그에게 폭행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스나이더는 코플린에게 루드비히, 던리비, 그리고 그의 상관인 윌리엄 보우스 중장에게 전화해서 이 상황을 알리고, 그와 코플린이 자세한 편지를 작성하여 던리비에게 전달하겠다고 말했다. 9월 30일에 코플린은 아직 편지가 전달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녀는 해군 인력 참모장/해군 작전 부참모장 제러미 마이클 보르다 중장에게 편지 사본을 전달했다. 보르다는 던리비와 해군 작전 부참모장 제롬 L. 존슨에게 그 편지를 보여주었고, 그들은 해군 수사국(NIS) 사령관인 듀벌 윌리엄스 제독에게 형사 조사를 시작하라고 지시했다. 던리비는 코플린에게 전화를 걸어 정식 조사가 명령되었다고 알리고, 조사를 돕기 위해 워싱턴 D.C.로 전출될 것이라고 말했다.[28]
4. 1. 언론 보도와 정치권의 반응
1991년 10월 29일, ''샌디에이고 유니온''의 기자 그레고리 비스티카는 "해군 조종사들이 세미나에서 여성들을 학대했다는 보도"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테일후크 스캔들을 언론에 처음으로 알렸다.[30] 이 기사는 전국 뉴스 와이어와 AP 통신을 통해 미국 전역에 배포되었다.[30] 같은 날 오후, 존 매케인 상원의원은 상원 본회의에서 해군을 질타하며 즉각적인 고위급 조사를 촉구하고 해군이 테일후크 협회와의 관계를 종료할 것을 요구했다.[30] 매케인은 합참 의장 콜린 파월과 미국 국방부 장관 딕 체니에게 독립 위원회의 조사를 요청했지만, 국방부는 이를 거절했다.[30]헨리 L. 개릿 3세 해군 장관은 해군에 테일후크 협회와의 관계를 끊고 해군 감사관에게 해군과 테일후크 협회 간의 관계를 조사하도록 지시했다.[31] 또한, 해군 수사국(NIS)에 테일후크 조사에 더 많은 자원을 투입하도록 했다.[31]
한편, 1991년 10월 11일, 테일후크 협회 회장 루드비히는 심포지엄에 참여한 해군 및 해병대 비행대에 보낸 편지에서 "의심할 여지 없이, 지금까지 우리가 개최한 테일후크 행사 중 가장 크고 성공적인 행사였다."라고 평가했다.[29] 그러나 그는 3층의 '건틀릿'에서 발생한 여성들에 대한 언어적, 신체적, 성적 학대 사건을 언급하며, "가장 괴로운 점은 미성년 소녀가 심하게 취해서 건틀릿 멤버들에게 옷이 벗겨졌다는 사실이다."라고 덧붙였다.[29]
5. 해군 조사와 국방부 조사
데이비스 감찰관의 조사는 1992년 4월 28일에 완료되었다. 보고서는 특정 개인의 이름을 명시하여 비난하지는 않았지만, 조사관들이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지 못한 점을 지적하며, 면접에 응한 장교들에게서 "도덕적 용기와 개인적 정직성의 현저한 결여"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관련된 해군 장교들이 테일후크에 참석한 여성들이 그들이 받은 대우를 "예상하고 받아들였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해군 항공 부대 내에서 "오랫동안 지속된, 만연한 알코올 남용과 미화"가 있었다고 진술했다. 보고서는 컨벤션을 위해 군 수송기에 탑승하여 라스베이거스로 이동한 1,730명의 승객 중 단 100명만이 공식 명령에 따라 이동했는데, 이러한 종류의 여행에는 공식 명령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34]
해군 정보국(NIS) 조사 또한 1992년 4월 28일에 완료되었으며, 컨벤션에서 발생한 성폭행 피해자 25명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네 명의 용의자가 확인되었다: 코플린을 폭행한 해병대 대위 그레고리 보넘, 사법 방해 및 허위 공무 진술 혐의의 해병대 중령 마이클 S. 페이건, 가운트(gauntlet, 통과 의례)를 조직하는 데 도움을 준 해군 중위 마이클 클랜시, 여성의 엉덩이를 물었던(그러나 코플린 폭행과는 관련 없음) 로열 오스트레일리아 공군 장교 짐 이봇슨이었다.[35] 미국 정부가 그에 대한 혐의를 호주 당국에 알린 후, 이봇슨은 자살했다.[36]
국회의원인 샘 넌, 존 글렌, 바바라 복서, 팻 슈뢰더를 포함한 다수의 국회의원들은 NIS 조사의 제한적인 범위와 결과에 실망했으며, 이는 사령관이나 기타 고위 장교의 과실에 대한 조사를 피한 것으로 보였다. 슈뢰더는 특히 보고서가 발표된 후, 해병대 장군 로열 N. 무어 주니어가 해병대 항공 부대에 "권위 있는 테일후크 상" 후보를 추천해달라는 메시지를 보낸 것에 분노했다.[37] NIS 요원들은 환대 스위트를 운영한 비행대 사령관이나 컨벤션에 참석한 제독들을 인터뷰하지 않았다. 이에 대응하여 1992년 5월 27일, 미국 상원 군사 위원회(SASC)는 국방부에 관련 비행대 사령관들을 징계하고, 국방부가 테일후크에서 부적절한 행동을 한 모든 장교의 명단을 위원회에 제공할 때까지 해군과 해병대 장교의 모든 승진을 동결하도록 지시했다.[38]
1992년 6월, 해군 장관은 국방부 감사관실(DoDIG)과 그 산하 범죄 수사 부서인 국방부 범죄 수사국(DCIS)에 사건을 넘겼다.[42] 국방부 감사관 대행 데릭 J. 반더 샤프와 DCIS 수석 요원 도널드 만쿠소는 수사 요원들에게 광범위한 수사 범위를 부여하고 해군 수사관들보다 더 적극적으로 활동하도록 장려했다.[45]
1993년 4월 23일에 공개된 DoDIG 수사 보고서는 테일후크 '91에서 군 장교들이 저지른 일련의 범죄를 기록했는데, 여기에는 폭행, 노출, 외설적인 행위, 공공 음주 등이 포함되었다. 수사 결과, 83명의 여성과 7명의 남성이 컨퍼런스에서 성적으로 또는 기타 방식으로 폭행을 당했다. 보고서는 23명의 장교가 폭행에 연루되었고, 23명이 노출을 저질렀으며, 51명이 이후 수사관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보고했다.[52]
5. 1. 국방부 감사관실(DoDIG) 조사
1992년 6월, 해군 장관은 국방부 감사관실(DoDIG)과 그 산하 범죄 수사 부서인 국방부 범죄 수사국(DCIS)에 사건을 넘겼다.[42] 국방부 감사관 대행 데릭 J. 반더 샤프와 DCIS 수석 요원 도널드 만쿠소는 수사 요원들에게 광범위한 수사 범위를 부여하고 해군 수사관들보다 더 적극적으로 활동하도록 장려했다.[45]1993년 4월 23일에 공개된 DoDIG 수사 보고서는 테일후크 '91에서 군 장교들이 저지른 일련의 범죄를 기록했는데, 여기에는 폭행, 노출, 외설적인 행위, 공공 음주 등이 포함되었다. 수사 결과, 83명의 여성과 7명의 남성이 컨퍼런스에서 성적으로 또는 기타 방식으로 폭행을 당했다. 보고서는 23명의 장교가 폭행에 연루되었고, 23명이 노출을 저질렀으며, 51명이 이후 수사관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보고했다.[52]
6. 비사법적 조치와 군사 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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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말, 국방부 감찰관실(DoIG)의 조사가 진행되면서, 오키프는 "통합 처분 권한"(CDA) 제도를 통해 테일후크 스캔들 용의자들을 기소하는 것을 승인했다. 일반적으로 미국 군대에서 징계는 현지 지휘 계통에서 처리되지만, CDA 하에서는 특정 사건이나 문제에 대한 모든 기소는 동일한 소집 권한에 의해 처리된다. 그 목적은 처벌을 보다 일관되게 하고, 테일후크에 참석했던 고위 장교가 현지 지휘 계통에 포함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이해 상충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53]
해군성은 해군 및 해병대 장교에 대해 별도의 CDA를 설치했다. 1993년 1월 30일에 설립된 해군 CDA는 해군 대서양 해상전력 사령관 J. 폴 리즌 부제독이 이끌었다. 리즌의 법률팀은 해군 수륙 양용 기지 리틀 크릭에서 근무했으며, 청문회는 노퍽 해군 기지에서 열렸다.[53]
해병대 CDA는 1993년 2월 4일에 설립되었으며, 찰스 C. 크룰락 중장이 주재하고 해병대 콴티코 기지에 위치했다.[53]
1993년 2월 23일, 국방부 감찰관실의 조사가 공식적으로 종료되지 않았음에도, 국방부 감찰관실은 기소를 준비하기 위해 해군 변호사에게 테일후크 사건 파일을 전달하는 데 동의했다. 당시 국방부 감찰관실/국방부 범죄 수사국(DCIS)은 300명의 장교에 대한 파일을 수집했다. 국방부 감찰관실은 이 중 160건은 기소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여 1993년 5월에 해군에 넘기기 전까지 보류했다.[54] 2월에 파일이 넘겨진 나머지 140명의 용의자 중 118명은 해군 장교였고 22명은 해병대 장교였다. 국방부 감찰관실은 또한 테일후크 1991에 참석했던 장성급 장교 35명에 대한 파일도 다른 300건과 분리하여 보관했다.[55]
장성급 장교 35명 파일에 대한 행적은 보고에 따라 다르다. 만쿠소는 해당 파일이 켈소의 사무실(당시 해군 장관 대행)에 전달되었다고 진술했지만, 켈소의 참모들은 해당 파일이 국방장관 레스 아스핀의 사무실에 보관되었다고 주장했다. 장성급 장교 파일의 소재는 켈소가 관련된 사건이 포함되어 있어 민감한 문제였다.[55]
해군 변호사들은 기소하기에 너무 약하다며 12건의 사건을 신속하게 기각했다. 1993년 5월 10~11일, 리즌은 리틀 크릭의 검토 검찰팀으로부터 사건 브리핑을 받은 비 변호사 해군 대령(O-6)으로 구성된 집행 위원회로부터 나머지 106건의 사건에 대한 브리핑을 받았다.[56] 리즌은 설득력 있는 증거 부족을 이유로 약 50건의 사건에 대해 기소를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나머지 사건에 대해서는 성폭행 증거가 없는 장교들에게 제독 심판을 제안했다.[57]
42명의 장교들, 대부분이 볼워킹이나 스트리킹을 한 혐의(공식적으로 군사 통일 법전에 따라 "품위 손상 행위")와/또는 허위 공문서 작성 혐의로 기소되었으며, 제독 심판을 수락했다. 심판에서 2명은 무죄로 판결되었고 12명은 영구 기록에 남지 않는 비징계성 서신이나 상담을 받았다. 다른 28명의 장교는 500~2,000달러의 벌금을 부과받거나 영구적인 징계성 경고 또는 견책 서한을 받았다. 이는 승진 기회를 잃게 할 가능성이 높았다. 30명의 장교는 이후 진행 중인 미국 군사 재판에서 증인으로 활용하기를 희망한 해군 검찰로부터 면책을 받았다.[58]
4명의 해군 장교들은 1993년 5월 리즌이 제안한 제독 심판을 거부했다. 리즌은 법률팀으로부터 그레고리 피어스 사령관과 로버트 야켈리 사령관에 대한 사건이 재판 기소에 너무 약하다는 조언을 받았다. 두 사람에게 어떤 식으로든 처벌을 원했던 리즌은 새로운 해군 장관 존 하워드 달튼에게 징계 서한을 발부해 달라고 요청했다. 리즌은 또한 비사법적 처벌을 제안하지 않기로 결정했지만 법률팀에서 재판에 너무 약하다고 말한 다른 3명의 장교(프레데릭 루드비히, 로버트 E. 스텀프, 리처드 F. 브레이든)에 대해서도 징계 서한을 원했다. 피어스와 야켈리는 품위 손상 행위 혐의로, 브레이든은 개런티를 목격하고 개입하지 않은 혐의로, 스텀프는 그의 비행대 숙소에서 음란 행위를 허용한 혐의로, 루드비히는 컨벤션을 계획하고 지휘한 역할로 기소되었다. 그러나 켈소의 참모인 스탠 아서 제독은 리즌의 요청을 거부하고 그의 CDA 내에서 사건을 처리하도록 명령했다.[59]
이에 리즌은 5명 모두에게 2성 제독과 2명의 대령으로 구성된 "사실 조사 위원회"에 소집하여 사건을 재조사하고 조치를 권고하도록 명령했다. 위원회는 1993년 10월 말까지 5명 모두에게 잘못이 없다고 결론 내렸고 리즌으로부터 어떠한 징계 조치도 받지 않았다.[60]
해병대 청문회는 해병대 용어로 "업무 시간"이라고 불렸으며 1993년 6월 셋째 주에 콴티코의 크룰락과 함께 시작되었다. 해병대 검찰은 3건의 사건을 기각했다. 나머지 19건 중 2건은 군사 재판에 회부되었고 나머지는 비사법적 처벌을 받았다. 크룰락은 6명을 무죄로 판결하고 나머지 11명에게 벌금과 징계 서한을 부과했다.[61]
해군은 5명의 장교를 군사 재판에 회부했으나, 불법적인 지휘권 행사 등의 이유로 기소가 기각되었다.[65]
군사 재판에 회부된 인물 중 한 명인 그레고리 보남 해병 중위는 코플린을 폭행한 혐의를 받았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기각되었다.[62][63] 또 다른 해병 장교인 카스 D. 하웰 중령에 대한 혐의도 기각되었다.[64]
해군에서는 콜 카우덴 중위가 성폭행 및 장교 품위 손상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성폭행 혐의는 기각되었고 품위 손상 혐의는 변호사의 요청에 따라 윌리엄 윌리엄스 대위가 사건에서 실격 처리되면서 기각되었다.[66][67][68][69][70] 롤란도 디아즈 중위는 명령 불복종과 품위 손상 혐의를 받았는데, 관음증적인 활동을 주도하여 여성 참가자들의 다리 털을 면도한 혐의였다.[71][72] 디아즈는 제독의 징계를 받고 벌금과 징계 서신을 받았다.[73][74]
그레고리 트리트 사령관은 성추행, 허위 진술 등의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증인들의 진술 번복으로 폭행 혐의는 기각되었고 허위 진술 혐의만 남았다.[83] 토마스 밀러 사령관은 부적절한 행위, 사법 방해 등의 혐의로 기소되었는데, 대부분 면책 특권을 받은 부하의 증언에 의존했다. 데이비드 샘플스 중위는 허위 진술로 제독의 징계를 받았으나, 이후 폭행 혐의로 추가 기소되었다.[86]
1993년 10월 중순, 국방부 감찰관실/국방부 형사수사국(DoDIG/DCIS) 테일후크 조사 데이터베이스가 트릿, 밀러, 샘플스의 변호사에게 제공되었고 이를 통해 프랭크 켈소 해군참모총장이 사건 발생일에 현장에 있었다는 증언들이 나왔다.[83] 켈소는 이를 부인하였으나,[88] 34명의 증인들은 켈소를 토요일 밤에 스위트룸이나 수영장 파티 구역에서 보았다고 증언하거나 맹세 진술을 제공했다.[87] 재판장 윌리엄 T. 베스트 대위는 켈소가 자신의 연루를 은폐하기 위해 조사 과정을 조작했고, 불법적인 지휘권 행사가 있었다고 판결하며 밀러, 트릿, 샘플스에 대한 기소를 기각했다.[89][90]
증언의 설득력과 그러한 증언을 뒷받침하는 많은 사실 및 정황을 바탕으로, 이 법원은 켈소 제독이 토요일 저녁에 파티 구역을 방문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한다. 이 법원은 켈소 제독이 테일후크 91에 대한 자신의 개인적 연루를 은폐하기 위해 초기 조사 과정을 조작했다고 판단한다. 이 법원은 특히 이러한 불법 행위(고위 장교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지 않은 것)가 테일후크 91에 참석했던 고위 장교 및 해군부 고위 관계자의 연루 및 개인적 행위를 최소화하기 위한 계산된 노력의 일부였다고 판단한다. 군사 지휘관이 부하에게 부적절한 행위에 대해 책임을 묻기 위해 군사 재판을 소집하는 경우, 그는 동일하거나 관련 부적절한 행위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되었다는 의심을 받지 않아야 한다. 이것은 근본적인 공정성의 문제이다. |
윌리엄 T. 베스트 대령, 1994년 2월 8일[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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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 애스핀 국방장관은 테일후크 '91에 참석했던 35명의 제독에 관한 사건 파일을 존 달턴 해군 장관에게 이관했고, 달턴은 32명에게 공식적인 견책을 내릴 것을 권고했다.[81] 빌 클린턴 대통령과의 협의 후, 애스핀은 켈소를 해임하지 않고 켈소와 다른 장교 29명에게 징계가 아닌 "주의 서한"을 보냈다.[82]
6. 1. 해군 및 해병대 CDA
1992년 말, 국방부 감찰관실(DoIG)의 조사가 진행되면서, 오키프는 "통합 처분 권한"(CDA) 제도를 통해 테일후크 용의자들을 기소하는 것을 승인했다. 일반적으로 미국 군대에서 징계는 현지 지휘 계통에서 처리되지만, CDA 하에서는 특정 사건이나 문제에 대한 모든 기소는 동일한 소집 권한에 의해 처리된다. 그 목적은 처벌을 보다 일관되게 하고, 테일후크에 참석했던 고위 장교가 현지 지휘 계통에 포함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이해 상충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53]해군성은 해군 및 해병대 장교에 대해 별도의 CDA를 설치했다. 1993년 1월 30일에 설립된 해군 CDA는 해군 대서양 해상전력 사령관 J. 폴 리즌 부제독이 이끌었다. 리즌의 법률팀은 해군 수륙 양용 기지 리틀 크릭에서 근무했으며, 청문회는 노퍽 해군 기지에서 열렸다.[53] 해군 CDA는 J. 폴 리즌 제독이 이끌었다.[53]
해병대 CDA는 1993년 2월 4일에 설립되었으며, 찰스 C. 크룰락 중장이 주재하고 해병대 콴티코 기지에 위치했다.[53]
1993년 2월 23일, 국방부 감찰관실의 조사가 공식적으로 종료되지 않았음에도, 국방부 감찰관실은 기소를 준비하기 위해 해군 변호사에게 테일후크 사건 파일을 전달하는 데 동의했다. 당시 국방부 감찰관실/국방부 범죄 수사국(DCIS)은 300명의 장교에 대한 파일을 수집했다. 국방부 감찰관실은 이 중 160건은 기소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여 1993년 5월에 해군에 넘기기 전까지 보류했다.[54] 2월에 파일이 넘겨진 나머지 140명의 용의자 중 118명은 해군 장교였고 22명은 해병대 장교였다. 국방부 감찰관실은 또한 테일후크 1991에 참석했던 장성급 장교 35명에 대한 파일도 다른 300건과 분리하여 보관했다.[55]
장성급 장교 35명 파일에 대한 행적은 보고에 따라 다르다. 만쿠소는 해당 파일이 켈소의 사무실(당시 해군 장관 대행)에 전달되었다고 진술했지만, 켈소의 참모들은 해당 파일이 국방장관 레스 아스핀의 사무실에 보관되었다고 주장했다. 장성급 장교 파일의 소재는 켈소가 관련된 사건이 포함되어 있어 민감한 문제였다.[55]
해군 변호사들은 기소하기에 너무 약하다며 12건의 사건을 신속하게 기각했다. 1993년 5월 10~11일, 리즌은 리틀 크릭의 검토 검찰팀으로부터 사건 브리핑을 받은 비 변호사 해군 대령(O-6)으로 구성된 집행 위원회로부터 나머지 106건의 사건에 대한 브리핑을 받았다.[56] 리즌은 설득력 있는 증거 부족을 이유로 약 50건의 사건에 대해 기소를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나머지 사건에 대해서는 성폭행 증거가 없는 장교들에게 제독 심판을 제안했다.[57]
42명의 장교들, 대부분이 볼워킹이나 스트리킹을 한 혐의(공식적으로 군사 통일 법전에 따라 "품위 손상 행위")와/또는 허위 공문서 작성 혐의로 기소되었으며, 제독 심판을 수락했다. 심판에서 2명은 무죄로 판결되었고 12명은 영구 기록에 남지 않는 비징계성 서신이나 상담을 받았다. 다른 28명의 장교는 500~2,000달러의 벌금을 부과받거나 영구적인 징계성 경고 또는 견책 서한을 받았다. 이는 승진 기회를 잃게 할 가능성이 높았다. 30명의 장교는 이후 진행 중인 미국 군사 재판에서 증인으로 활용하기를 희망한 해군 검찰로부터 면책을 받았다.[58]
4명의 해군 장교들은 1993년 5월 리즌이 제안한 제독 심판을 거부했다. 리즌은 법률팀으로부터 그레고리 피어스 사령관과 로버트 야켈리 사령관에 대한 사건이 재판 기소에 너무 약하다는 조언을 받았다. 두 사람에게 어떤 식으로든 처벌을 원했던 리즌은 새로운 해군 장관 존 하워드 달튼에게 징계 서한을 발부해 달라고 요청했다. 리즌은 또한 비사법적 처벌을 제안하지 않기로 결정했지만 법률팀에서 재판에 너무 약하다고 말한 다른 3명의 장교(프레데릭 루드비히, 로버트 E. 스텀프, 리처드 F. 브레이든)에 대해서도 징계 서한을 원했다. 피어스와 야켈리는 품위 손상 행위 혐의로, 브레이든은 개런티를 목격하고 개입하지 않은 혐의로, 스텀프는 그의 비행대 숙소에서 음란 행위를 허용한 혐의로, 루드비히는 컨벤션을 계획하고 지휘한 역할로 기소되었다. 그러나 켈소의 참모인 스탠 아서 제독은 리즌의 요청을 거부하고 그의 CDA 내에서 사건을 처리하도록 명령했다.[59]
이에 리즌은 5명 모두에게 2성 제독과 2명의 대령으로 구성된 "사실 조사 위원회"에 소집하여 사건을 재조사하고 조치를 권고하도록 명령했다. 위원회는 1993년 10월 말까지 5명 모두에게 잘못이 없다고 결론 내렸고 리즌으로부터 어떠한 징계 조치도 받지 않았다.[60]
해병대 청문회는 해병대 용어로 "업무 시간"이라고 불렸으며 1993년 6월 셋째 주에 콴티코의 크룰락과 함께 시작되었다. 해병대 검찰은 3건의 사건을 기각했다. 나머지 19건 중 2건은 군사 재판에 회부되었고 나머지는 비사법적 처벌을 받았다. 크룰락은 6명을 무죄로 판결하고 나머지 11명에게 벌금과 징계 서한을 부과했다.[61]
6. 2. 기소 및 재판
해군은 5명의 장교를 군사 재판에 회부했으나, 불법적인 지휘권 행사 등의 이유로 기소가 기각되었다.[65]군사 재판에 회부된 인물 중 한 명인 그레고리 보남 해병 중위는 코플린을 폭행한 혐의를 받았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기각되었다.[62][63] 또 다른 해병 장교인 카스 D. 하웰 중령에 대한 혐의도 기각되었다.[64]
해군에서는 콜 카우덴 중위가 성폭행 및 장교 품위 손상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성폭행 혐의는 기각되었고 품위 손상 혐의는 변호사의 요청에 따라 윌리엄 윌리엄스 대위가 사건에서 실격 처리되면서 기각되었다.[66][67][68][69][70] 롤란도 디아즈 중위는 명령 불복종과 품위 손상 혐의를 받았는데, 관음증적인 활동을 주도하여 여성 참가자들의 다리 털을 면도한 혐의였다.[71][72] 디아즈는 제독의 징계를 받고 벌금과 징계 서신을 받았다.[73][74]
그레고리 트리트 사령관은 성추행, 허위 진술 등의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증인들의 진술 번복으로 폭행 혐의는 기각되었고 허위 진술 혐의만 남았다.[83] 토마스 밀러 사령관은 부적절한 행위, 사법 방해 등의 혐의로 기소되었는데, 대부분 면책 특권을 받은 부하의 증언에 의존했다. 데이비드 샘플스 중위는 허위 진술로 제독의 징계를 받았으나, 이후 폭행 혐의로 추가 기소되었다.[86]
1993년 10월 중순, 국방부 감찰관실/국방부 형사수사국(DoDIG/DCIS) 테일후크 조사 데이터베이스가 트릿, 밀러, 샘플스의 변호사에게 제공되었고 이를 통해 프랭크 켈소 해군참모총장이 사건 발생일에 현장에 있었다는 증언들이 나왔다.[83] 켈소는 이를 부인하였으나,[88] 34명의 증인들은 켈소를 토요일 밤에 스위트룸이나 수영장 파티 구역에서 보았다고 증언하거나 맹세 진술을 제공했다.[87] 재판장 윌리엄 T. 베스트 대위는 켈소가 자신의 연루를 은폐하기 위해 조사 과정을 조작했고, 불법적인 지휘권 행사가 있었다고 판결하며 밀러, 트릿, 샘플스에 대한 기소를 기각했다.[89][90]
레스 애스핀 국방장관은 테일후크 '91에 참석했던 35명의 제독에 관한 사건 파일을 존 달턴 해군 장관에게 이관했고, 달턴은 32명에게 공식적인 견책을 내릴 것을 권고했다.[81] 빌 클린턴 대통령과의 협의 후, 애스핀은 켈소를 해임하지 않고 켈소와 다른 장교 29명에게 징계가 아닌 "주의 서한"을 보냈다.[82]
7. 사건의 여파와 영향
7. 1. 인사 및 진급 문제
1994년 2월 15일, 프랭크 켈소는 두 달 일찍 해군에서 퇴임하겠다고 발표했다. 존 돌턴과 신임 국방장관인 윌리엄 페리는 켈소의 인품과 복무를 칭찬했고, 페리의 경우 베스트의 결정을 비판했다.[92] 미국 상원은 켈소가 4성 장군 계급을 유지하도록 허용하는 투표에서 54대 43으로 가결했으며, 그는 1994년 4월 30일 공식적으로 퇴역했다. 켈소의 마지막 공식 행위 중 하나는 해군의 새로운 64페이지 분량의 성희롱 인식, 예방 및 대처에 관한 정책 핸드북을 승인한 것이었다.[92] 디아즈와 샘플스와 같이 테일후크 관련 위법 행위로 징계를 받은 장교들 중 대부분이, 아니 거의 대부분이 1994년 기소 종료 후 1~2년 이내에 현역 해군 또는 해병대에서 전역했다.[95]1992년부터, 모든 야전 장교 O-4 이상 진급을 승인하는 상원 군사위원회(SASC)는 테일후크 '91 관련 진급 후보자에 대해 완전한 조사 문서를 포함하도록 해군과 해병대에 지시했다. SASC는 이후 해군에게 SASC가 장교의 승진을 허가할 때까지 해당 장교의 진급을 보류하도록 요청했으며, 때로는 1년 이상 진급이 지연되기도 했다. SASC의 이러한 조치는 해군이 테일후크 위반에 대해 장교들에게 적절한 책임을 물었는지 확인하려는 의회 의원들의 열망에 의해 동기가 부여되었을 수 있다.[99]
진급 기회를 잃은 무혐의 처리된 장교의 가장 공개적인 사례는 중령(O-5) 로버트 스텀프의 경우였다. 수훈 비행 십자장, 6개의 항공 훈장, 그리고 1986년 1986년 리비아 폭격과 1991년 걸프 전쟁 기간 동안 리비아를 상대로 수행한 전투 임무에 대한 3개의 해군 표창장을 받은 스텀프는 테일후크와 관련된 잘못이 없다는 판결을 받은 후 블루 엔젤스의 비행대장이라는 권위 있는 직책에 임명되었다. 스텀프는 1994년 5월 24일 대령(O-6)으로의 진급이 처음 승인되었다. 그러나 SASC는 테일후크 관련 사실을 알게 된 후, 스텀프의 기록을 완전히 조사할 때까지 진급을 연기해 달라고 해군에 요청했고, 해군은 이에 따랐다. 1995년 11월 13일, 달튼은 "승진 절차의 완전성을 유지하기 위해" 스텀프의 이름을 진급 명단에서 삭제했다는 사실을 SASC에 알렸다. 스텀프는 이 삭제에 대해 항소했지만 실패했고, 1996년 10월 해군에서 O-5로 퇴역했다.[100]

SASC가 스텀프와 같이 테일후크에 연루되었지만 무혐의 처리된 장교들의 진급 승인에 대해 완고한 태도를 보이는 것에 대해, 전 해군 장관 짐 웹과 ''월스트리트 저널'' 사설 위원회를 포함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SASC의 고위 멤버 중 한 명인 샘 넌은 1996년 3월 12일 청문회에서 이러한 비판에 격분하여 "내가 깊이 분개하는 것은 마치 맥카시 재판이 진행되는 것처럼 이 위원회가 절차에 대해 비난을 받은 것입니다."라고 말했다.[101] 아마도 이러한 비판 때문에 SASC는 장교들의 기록 검토를 서둘렀다. 1996년 7월까지 SASC는 테일후크 관련 장교 39명의 진급 추천을 검토하여, 31명을 승인하고 8명을 거부했다.[102]
2002년 7월,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현재 페덱스의 조종사로 일하고 있는 스텀프에게 1995년 7월 1일자로 대령 진급을 수여하고, 소급 급여 및 업데이트된 퇴직 혜택을 지급하도록 명령했다. 스텀프는 소급 진급에 대해 "저와 제 가족은 해군의 결정에 매우 기쁩니다. 우리는 이것이 1993년 조사 이후 불명예스러운 정치적 히스테리 속에 유망한 경력이 조기에 종료된 수백 명의 해군 장교들에게 주어진 부당한 처우에 대한 신중한 재검토의 시작이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했다.[103]
7. 2. 정치적, 사회적 영향
테일후크 스캔들은 미국 군대 내 성희롱 및 성폭력 문제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119] 1992년은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가 있던 해였고, 클래런스 토마스 대법관 지명 청문회로 인해 성희롱이 주요 정치적 주제로 부상했다. 또한, 많은 정치인과 활동가들이 미국 군대 내 여성의 전투 참여 금지를 해제할 것을 요구했는데, 이는 테일후크 스캔들과 맞물려 여성에게 불평등한 지위를 부여하고 성희롱 및 차별을 조장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107]이에 따라 해군은 해군 및 해병대 여성에 관한 상임위원회를 만들어 여성 문제 해결을 위한 80가지 권고 사항을 승인했다.[108] 1991년 7월, 의회는 여성의 전투기 조종 금지 조항(여성 군 복무 통합법 제502조)을 해제했고,[109] 1993년 4월 28일, 국방장관은 전투 배제 정책을 폐지했다.[110] 해군은 ''에이브러햄 링컨''과 ''아이젠하워''를 여성 전투 조종사를 배치할 첫 항공모함으로 선정하고, 캐라 헐트그린과 캐리 로렌즈를 최초의 여성 해군 전투기 조종사로 선발했다.[111]

공군 또한 지니 리비트, 샤론 프레스즐러, 마사 맥샐리 등을 최초의 여성 전투기 조종사로 임명했다.[112] 1994년 11월 15일, ''아이젠하워''에서 두 명의 여성 F/A-18 조종사가 이라크 남부 비행 금지 구역을 순찰하는 첫 전투 임무를 수행했다.[113] 1994년에는 남녀 수병을 모두 수용하도록 설계된 최초의 군함인 USS 설리번스 (DDG-68)가 기공되어 1997년에 진수되었다.[114]
테일후크 스캔들은 미국 군대가 성희롱 및 성폭력 문제에 집중하도록 만들었다.[115] 1996년 국방부 조사에 따르면, 여성 군인의 55%가 성희롱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미국 군은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을 강화했다.[115] 그러나 일각에서는 테일후크 스캔들에 대한 민감성이 군의 의사 결정에 과도한 정치적 올바름 또는 "마녀 사냥"을 초래했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116]
테일후크 스캔들 이후, 여성 군인들이 제기한 성희롱 및 성폭력 관련 불만이 크게 증가했다. 이는 여성들이 학대에 대해 보고할 수 있는 자신감과 권한을 더 많이 느끼게 되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그러나 남성 군인들은 많은 불만이 허위이거나 과장된 것이라고 주장하며, 여성 동료를 피하는 등의 예방 조치를 취하는 경우도 있었다.[118] 1990년대 이후, 미국 군대는 주기적으로 성희롱 또는 성폭력 논란에 연루되었으며, 이러한 사건에 대한 언론 보도에서 테일후크 스캔들은 일반적으로 언급된다.[119]
7. 3. 비판과 이중 잣대 논란
국방부의 테일후크 스캔들 처리 방식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비판론자들은 이 사건과 관련된 가장 심각한 혐의인 성폭행에 대해 누구도 유죄 판결을 받거나 징계를 받지 않은 점을 지적했다. 또한 켈소와 같이 증언과 기타 증거를 통해 테일후크 컨벤션의 행동을 알고 있었고 이를 막기 위해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은 해군 및 해병대 고위 지도자 중 징계를 받거나 기소된 사람은 거의 없었다.[120]군인들과 외부 관찰자들은 해군이 테일후크 관련 문제 중 일부에 대해 이중 잣대를 적용했다고 비난했다. 고위 장교가 아닌 하급 장교에게 기소를 집중한 것 외에도, 조사에서 부적절한 행위를 했거나 수사관에게 거짓말을 한 것으로 밝혀진 세 명의 여성 장교 중 누구도 기소되거나 비사법적 처벌을 받지 않았다. 또한 해군 관계자들은 테일후크 사건 전까지 해군 지도부가 기지 내 장교 및 사병 클럽에서 스트리퍼와 기타 선정적이거나 성적인 오락을 허용했다고 지적했다. 더욱이 테일후크 사건 이후에도 기지 교환소에서는 음란물 잡지를 판매했고, 기지 신문에서는 기지 밖 스트립 클럽, 마사지 업소 및 유사한 유형의 사업체로부터 유료 광고를 받아 게재했다.[12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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