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 특수임무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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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페이스 특수임무부대는 1950년 8월 한국 전쟁 중 리처드 P. 오븐샤인 대령의 지휘 하에 창설된 제31연대 전투단이다. 인천 상륙 작전, 부산 탈환 작전, 유엔군의 북진 작전에 참여했으며, 특히 1950년 11월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에 맞서 격전을 치렀다. 장진호 전투에서 부대는 심각한 피해를 입고 궤멸되었으며, 생존자들은 흥남 철수를 통해 탈출했다. 장진호 전투 이후 전사자 및 실종자들의 유해가 수습되었으며, 일부 장병들은 명예 훈장 및 수훈 십자 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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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 특수임무부대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 |
---|---|
개요 | |
국가 | 미국 |
종류 | 연대 전투단 |
소속 | 미국 육군 제7보병사단 |
참전 | 한국 전쟁 / 냉전 크로마이트 작전 수원비행장 점령 92 고지, 113 고지 부산 해방 테일보드 작전 장진호 전투 흥남 철수 |
해체 | 1950년 8월 ~ 1950년 12월 |
지휘부 | |
상위 부대 | 유엔군 사령부 |
군단 | 제10군단 |
사단 | 제7보병사단 |
주요 지휘관 | 대령 리처드 P. 오벤샤인 대령 앨런 D. 맥클린 대령 돈 C. 페이스 대령 존 A. 개빈 |
페이스 특수임무부대 전투 | |
분쟁 | 페이스 특수임무부대 |
일부 | 장진호 전투 |
날짜 | 1950년 11월 27일 ~ 1950년 12월 2일 |
장소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함경남도 장진호 |
결과 | 중공군 승리 |
교전 세력 1 | 미국 대한민국 |
교전 세력 2 | 중화인민공화국 |
지휘관 1 | 앨런 D. 맥클린 돈 C. 페이스 |
지휘관 2 | 펑더화이 |
병력 1 | 2개 연대에서 차출, 3,000여 명 |
병력 2 | 6개 보병연대, 15,000 ~ 20,000여 명 |
사상자 1 | 사망 1,000명 (미국 기록) 사상 1,400명, 포로 300명 (중국 기록) |
사상자 2 | 사망 7,000 ~ 10,000명 (미국 추정치) 사상 4,300명 (중국 기록) |
2. 편성
1950년 8월 일본 캠프 크로포드에서 리처드 P. 오븐샤인 대령의 지휘 아래 제31연대전투단이 창설되었다.[1] 초기에는 제31보병연대, 제57야전포병대대, 제13공병전투대대 C중대로 구성되었다.[1]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직후, 미국은 북한군의 남침에 맞서 대한민국을 지원하기 위해 참전했다. 페이스 특수임무부대(RCT-31)는 이 과정에서 인천 상륙 작전, 부산 교두보 전투, 유엔군의 북진 등 주요 전투에 참여했다.
3. 한국 전쟁 참전
특히, 장진호 전투에서는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혹독한 추위와 압도적인 병력 차이, 그리고 지휘관의 오판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고 괴멸되었다.
3. 1. 인천 상륙 작전 (1950년 9월)
1950년 9월 7일, RCT-31은 철도를 통해 요코하마 항구로 이동한 후, 한국 인천으로 향하는 수송선에 탑재되었다. 이들은 호송선단의 21번째 선박이었다.[1]
이동 중 RCT-31은 크로마이트 작전에 대한 브리핑을 받았다. 인천 해변 점령 후, 이들은 내륙으로 약 35.41km 떨어진 수원 비행장 점령 임무를 받았다. 이들은 며칠 동안 지도, 보고서, 계획을 연구하며 전술을 연습했다. 9월 19일 LST를 통해 인천에 상륙하여 수원으로 진격했다. 9월 30일, 92고지와 113고지와 함께 비행장을 점령했다. 이 과정에서 전사자 25명, 부상자 75명이 발생했지만, 적군 300명을 사살하고 500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탱크 14대와 대전차포 6문을 파괴했다. 리처드 P. 오븐샤인(Richard P. Ovenshine) 대령은 임무 수행 중 여러 장교를 잃은 후 지휘에서 해임되었다.[1] 오븐샤인은 “제7보병사단 제31보병연대장으로 복무하면서 적과의 전투에서 뚜렷한 용맹함과 용감성을 보여 실버 스타를 받았다…”[3]
3. 2. 부산 탈환 작전 (1950년 10월)
10월 한 달 동안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하는 동안, 앨런 D. 맥클린 대령이 지휘하는 RCT-31은 육로를 통해 약 321.87km 남쪽으로 이동하여 부산으로 향했다. 이들은 도시를 탈환하고, 포로를 석방하며, 잔존한 북한군을 사살하거나 포로로 잡는 임무를 수행했다. 부산에 도착한 후, RCT-31은 체력 단련, 산악전, 통신 및 통제, 화력 조정 및 통제, 장비 유지 관리에 중점을 두고 전투 효율성을 높이는 훈련을 받았다. 훈련을 하지 않을 때는 부산항에 정박한 USS 제너럴 M. M. 패트릭 (AP-150)에 머물렀다.[1]
3. 3. 유엔군의 북진 (1950년 10월 ~ 11월)
1950년 10월 25일, 중국 인민지원군은 압록강을 건너 북한으로 진입하여 온정 전투에서 유엔군을 공격했다. 제31연대 전투단은 "크리스마스 귀향 작전"에 유엔군에 합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1] 이들은 리원 해변에서 약 579.36km 북쪽으로 테일보드 작전이라는 또 다른 상륙 작전을 통해 상륙할 예정이었다.
RCT-31은 1950년 11월 3일 오후 2시에 리원(이원) 해변에 상륙했다. 이들은 17연대가 갑산군을 점령하는 동안, 부전호 방향의 산에서 17연대의 좌익을 방어하는 임무를 받았다.
RCT-31은 1950년 11월 15일 부전호에 도착하여 약 200명의 중공군과 교전하였고, 해병대 F4U 콜세어의 공습을 통해 격퇴했다. 해당 지역을 확보한 후, 영하 18°C까지 내려가는 혹독한 초겨울 추위를 견디며 다음 한 주 동안 교대 순찰을 실시했다. 11월 23일까지 RCT-31의 병사 83명이 동상으로 치료를 받았으며 33명이 후송되었다. 또한 해병대 조종사를 성공적으로 찾아 구조하는 수색 및 구조 작전을 수행했다.
3. 4. 장진호 전투 (1950년 11월 ~ 12월)
RCT-31은 1950년 11월 15일 부전호에 도착하여 약 200명의 중공군과 교전하였고, 해병대 F4U 콜세어의 공습으로 격퇴했다. 이후 영하 18°C까지 내려가는 혹독한 추위 속에 일주일간 순찰을 실시, 11월 23일까지 병사 83명이 동상 치료를 받고 33명이 후송되었다. 해병대 조종사 수색 및 구조 작전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4]
제7보병사단은 네드 알몬드 소장의 명령으로 해병대 동쪽(우익) 측면을 방어하기 위해 장진호 동쪽을 점령하고, 압록강까지 진격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험준한 지형과 열악한 도로망으로 인해 제7사단 부대들은 널리 흩어져 고립되었고, 해병대와 효과적인 작전 조율이 어려웠다.
11월 27일, RCT-31은 저수지 동쪽 16km 구간에 분리 배치되었다. 제3/31보병대대, 제1/32보병대대, 제57야전포병대대 포대 2개, 제15대공포병대대 D포대 1개 소대로 구성되었으나, 보병대대 1개와 전차 중대가 부족했다. 미군은 촘촘한 방어선을 구축하지 않았고, 앨런 맥클린 대령은 다음날 공격을 계획했다.[5]
이후의 자세한 전개는 하위 문단인 "== 중공군의 공격과 고립 ==" 과 "== 탈출 시도와 괴멸 ==" 에서 확인할 수 있다.
3. 4. 1. 중공군의 공격과 고립
1950년 11월 27일 밤, 중국군 부대가 장진호 동쪽에서 미 제7보병사단 예하 페이스 특수임무부대를 기습 공격했다. 이 부대는 앨런 맥클린 대령이 지휘했으며, 미군 2개 연대 병력 2,500명과 카투사 700명으로 구성되었다.[4] 중국군은 제80사단과 제81사단 제242연대로, 특수임무부대를 완전히 포위하고 남쪽으로의 퇴로를 차단했다.
네드 알몬드 장군은 중국군의 개입 증거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에게 북쪽으로 계속 공격하라고 독려했다.[6] 그러나 중국군의 공격은 거셌고, 특수임무부대는 여러 진지를 잃고 많은 사상자를 냈다. 중국군 포로들은 제80사단과 또 다른 부대(아마도 제81사단) 소속임을 밝혔다.
날씨가 급격히 악화되어 기온이 -34°C까지 떨어지고 폭설이 내려 이동을 방해했다. 가시거리가 낮았고, 병사들은 혹독한 추위로 고통받았다. 맥클린 대령은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선두 대대인 1/32 보병대를 남쪽으로 후퇴시키기로 결정했다.
1/32 보병대는 VMF-212, VMF-214, VMF-312, VMF(N)-513 및 헤드론-12에서 출격한 해병대 및 해군 항공기의 엄호 하에 이동했다. F4U 콜세어 전투 폭격기의 엄호와 공중 보급이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맥클린 대령은 중국군에게 포로로 잡혔고, 나흘 후 사망했다.[5] 돈 C. 페이스 주니어 중령이 지휘권을 이어받았다.
페이스 중령은 특수임무부대를 하나의 방어 경계선으로 통합했고, 해병대 항공 지원에 힘입어 이틀 더 중국군의 공격을 격퇴했다.
3. 4. 2. 탈출 시도와 괴멸
밤중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강력한 중국군이 특수임무부대와 해병대를 기습하여 심각한 사상자를 냈고, 계획된 공세는 연기되었다. 그러나 공세가 취소된 것은 아니었다. 다음 날 오후, 알몬드 장군과 그의 보좌관 알렉산더 헤이그 육군 소위는 RCT-31의 경계선 안으로 비행해 들어갔다. 알몬드는 대규모 중국군 개입 증거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에게 공세를 시작하라고 독려하며, "지금 여러분을 지연시키고 있는 적은 북쪽으로 도망가는 중국 사단의 잔당에 불과하다"라고 말했다.[6] 그는 "우리는 여전히 공격하고 있으며 압록강까지 진격할 것입니다. 중국의 세탁부 몇 명에게 막히지 마십시오."라고 덧붙였다.[6] 군단장은 RCT-31이 공격을 시작하고 방해하는 CCF 부대의 "잔당"을 처리할 만큼 충분히 강하다고 확신하고 하가루리 기지로 돌아갔다.[7]
중국군이 하루 종일 특수임무부대 진지 동쪽 언덕에서 남쪽으로 이동하는 모습이 많이 목격되었지만, 미군 장교들은 상황에 대한 견해를 바꾸지 않았다. 맥클린은 증원군, 즉 그의 두 번째 보병대대(2-31)와 제31 전차 중대를 기대했다.
하지만 증원군은 도착하지 않았다. 중국 인민해방군 제27군 예하의 제80사단과 제81사단 제242연대가 맥클린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특수임무부대를 완전히 포위하고 남쪽을 차단했다. 그들은 해병대 기지에서 북쪽으로 몇 마일 떨어진 하가루리의 파괴된 마을에 강력한 길목을 설치했다. 전차 중대가 저수지의 남쪽 끝에 도달하여 하가루리 북쪽으로 이동했을 때, 중국군 길목에 의해 저지당하여 적의 공격으로 전차 4대를 잃었다. 다음 날, 제31 보병대 및 제57 야전 포병대 본부 및 지원 부대에서 지원 병력을 받아 다시 시도했지만, 다시 격퇴되었다. 그 후 이 부대는 하가루리 북쪽 약 6.44km 떨어진 작은 버려진 마을인 후둥에 점령했던 진지로 돌아갔다. RCT-31에서는 남쪽으로 약 6.44km 떨어져 있었다.
해병대는 포위되어 맹렬한 공격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육군의 구원 작전에 도움을 줄 수 없었다. 맥클린이 기대했던 보병대대는 결코 장진호 지역에 도착하지 못했다. 맥클린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에드워드 스탬포드 대위(해병 항공 통제관)의 무전을 사용하여 상위 사령부와 통신하고 그의 상황을 보고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11월 28일 밤, 중국군은 다시 특수임무부대를 공격하여 여러 진지를 점령하고 많은 사상자를 냈다. 중국군 포로들은 제80사단과 또 다른 부대(아마도 제81사단)의 병력임을 밝혔다. 중국군은 1/32의 진지를 공격했지만, 포병과 공습으로 파괴되었다. 날씨가 급격히 악화되어 기온이 영하 약 -1.1°C까지 떨어지고 폭설이 내려 이동을 방해했다. 가시거리가 낮았고, 병사들은 혹독한 추위로 고통받았다(몇몇 병사들은 참호에서 얼어 죽었다). 맥클린 대령은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선두 대대인 1/32 보병대를 남쪽으로 몇 마일 떨어진 다른 부대의 경계선으로 후퇴시키기로 결정했다.
나머지 하루 동안 1/32는 VMF-212, VMF-214, VMF-312, VMF(N)-513 및 헤드론-12에서 출격한 해병대 및 해군 항공기의 엄호 하에 이동했다. 동시에, 인민해방군 제27군은 제81사단 제241연대를 투입했다. 남쪽으로 이동하는 수천 명의 적군은 훌륭한 표적이 되었다. F4U 콜세어 전투 폭격기에 의한 엄호 외에도, 절실히 필요한 물품이 공군 전투 화물 사령부에서 투하되었다. 때때로 스탬포드 대위는 화물기의 공중 투하와 근접 항공 지원을 같은 무선망에서 지휘해야 했다. 하늘은 화물기, 낙하산, 그리고 민첩한 콜세어로 가득했다.
40대의 해병대 항공기가 약 225발의 로켓, 18개의 네이팜탄 탱크, 10개의 500파운드 폭탄, 29개의 파편탄으로 적을 공격한 후 1/32는 사상자가 속출한 3/31에 합류했다. 이 탄약은 이른 아침부터 마지막 비행기가 1705에 기지를 떠날 때까지 투하되었다.
이 철수 과정에서 맥클린은 그가 오랫동안 기다려온 증원군을 보았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에게 접근했을 때 그들은 중국군이었고, 맥클린을 여러 번 쏘고 포로로 잡았다. 그는 나흘 후에 사망했다. 1/32의 지휘관인 돈 C. 페이스 주니어 중령이 지휘권을 이어받았다. 남쪽 진지에 도착하여 그는 특수임무부대를 하나의 방어 경계선으로 통합했고, 중국군은 공격을 강화했다. 스탬포드 대위가 전문적으로 조율한 해병대 항공 지원(없었다면 특수임무부대는 압도당했을 것이다)의 도움으로 RCT 31은 중국 인민해방군 제80사단과 제81사단의 맹렬한 공격을 이틀 더 격퇴했고, 공산군은 육군 진지 주변 눈 속에 수백 구의 시체를 남기고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그날 스탬포드는 38번의 출격을 지휘했고, 이것은 제1해병항공단의 주요 작전이 되었다. 0645부터 1830까지 해병대 항공기는 중국군을 공격하여 21개의 네이팜탄 탱크, 16개의 500파운드 폭탄, 21개의 파편탄을 투하하고 190발의 로켓을 발사했다. 경계선에 대한 모든 공격은 격퇴되었다.
미군은 탄약이 부족했고, 주요 지휘관을 포함하여 병력의 절반 이상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페이스는 포위되어 수적으로 열세임을 깨닫고, 해병대 방어선이 있는 남쪽으로 돌파를 시도하기로 결정했다. 상황이 매우 절박하여 최소한의 장비와 부상병을 수송할 차량만 챙겼고, 더 많은 병사들이 보병으로 싸울 수 있도록 했다. 나머지 장비는 마지막 포격을 가한 뒤 곡사포를 포함하여 현장에서 파괴되었다.
돌파는 12월 1일에 시작되었으며, 미 해병대의 F4U 콜세어와 해군 그루먼 F7F 타이거캣 쌍발 전투기의 엄호 사격과 폭격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 미군 호송대는 수백 명의 부상자를 싣고 끊임없이 공격을 받으며 장진호 동쪽의 자갈길을 따라 이동했다.
남쪽으로의 행군은 콜세어가 오폭으로 호송대 선두 소대에 네이팜탄을 투하하여 병사들을 죽이고 불태우면서 중단되었다. 네이팜탄 투하는 호송대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제31연대 전투단 선두가 근거리 사격에 맞서 전진하는 동안, 작은 계곡 건너편에서 쏟아지는 강력한 소화기 사격으로 인해 후위 병력의 많은 수가 트럭을 보호하는 대신 길 아래로 피신했다. 적의 사격은 이미 트럭에 타고 있던 사람들과 자살 행위로 여겼던 운전병들을 죽이거나 부상시켰다. 해가 지면서 페이스는 호송대를 다시 움직였지만 속도는 느렸고, 길을 내려다보는 1221고지에 접근할 때까지였다. 중국 인민해방군 제242연대 1개 대대가 고지에 강력한 방어 진지를 구축했고, 페이스의 후퇴를 막기 위해 그 아래에 길을 막았다. 여러 부대가 1221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공격했다. 페이스가 길을 막은 곳을 공격하다가 적의 수류탄에 맞아 크게 부상을 입었다.
3. 4. 3. 장진호 전투 이후
어둠이 짙어지면서 미 해병대의 호위 공중 지원이 종료되자, 중국군 보병의 공격은 더욱 대담해졌다. 제31연대 전투단(RCT-31)은 붕괴되기 시작했고, 거의 모든 장교가 사망하거나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많은 병사들이 부대로 복귀하는 대신 얼어붙은 저수지를 건너 남쪽의 해병대 진지로 향했다.[8]
허둥(Hudong) 북쪽에서 중국군의 바리케이드에 의해 호송대가 멈춰 섰다. 허둥을 점령하고 있던 미군과 전차들은 하가루리(Hagaru-ri)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받아 특수임무부대를 구할 기회를 잃었다(이 결정은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8]
중국군은 공격을 재개하여 트럭에 백린탄 수류탄을 던져 불을 질렀다.[8] 페이스 중령은 소총에 맞아 사망했고(사후 명예 훈장 수여), 제31보병 3대대 지휘관 하비 스톰스 소령도 전사했다. 탈출 시도는 실패했고, 남은 미군 병사들은 트럭을 버리고 개별적으로 탈출을 시도했다.[8]
이 전투에 참여한 중국군 장교와 병사들은 국제 분쟁에 익숙하지 않아, 항복한 미군을 풀어주는 경우가 있었다.[9][10] 제27군은 포로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페이스 특수임무부대 병사들이 탈출하여 다시 싸울 수 있게 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특수임무부대 생존자 중 385명은 임시 대대로 편성되어 해병대에 배속되었고, 장진호 전투의 나머지 기간 동안 제1해병사단의 돌파 작전에 참여했다. 이들은 장진호 동부 생존자뿐만 아니라 학동리와 하갈우리 부대 출신으로 구성되었다. 11월 30일 학동리에서 철수한 제31보병연대 전차 중대는 12월 6일부터 7일까지의 돌파 작전에서 후위 부대로 제5해병대에 배속되었다. 임시 대대( "31/7", 버리 K. 앤더슨 중령 지휘)는 두 개의 소규모 대대로 편성되었다. 제3/31대대(칼 위테 소령)는 I, K, L 중대로, 제1/32대대(로버트 존스 소령)는 A, B, C 중대로 구성되었다.
4. 장진호 전투 이후
장진호 전투 이후, 특수임무부대 생존자 중 건강한 385명은 임시 대대로 편성되어 해병대에 배속되었으며, 제1해병사단의 돌파 작전에 함께 참여했다. 이 부대는 장진호 동부 생존자뿐만 아니라 학동리와 하갈우리 부대 출신으로 구성되었다. 11월 30일 학동리에서 철수한 제31보병연대 전차 중대는 12월 6일부터 7일까지의 돌파 작전에서 후위 부대로 제5해병대에 배속되었다. 버리 K. 앤더슨 중령이 지휘한 "31/7" 임시 대대는 3개의 소총 중대로 구성된 두 개의 소규모 대대로 편성되었다. 제3/31대대(칼 위테 소령)는 I, K, L 중대로, 제1/32대대(로버트 존스 소령)는 A, B, C 중대로 구성되었다.
4. 1. 전사자 및 실종자 (MIA/POW)
12월 1일 밤, 특수 임무 부대 생존자 수백 명이 장진호 남쪽 해가루리에 있는 해병대 진지에 도착했다. 그 다음 날 해병대 지프 순찰대에 의해 수백 명이 더 구조되었다. 중국군에게 포로로 잡힌 병사들 중 일부는 몇 시간 후에 풀려났다. 중국군의 저지선 북쪽에 갇힌 2,500명의 병력 중 약 1,500명이 결국 미군 진영으로 돌아왔으며, 그들 중 대다수는 부상을 입거나 심한 동상에 걸렸다. 제31연대 전투단(RCT-31)의 원래 병력의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1,000명 이상의 페이스 특수 임무 부대 병사들이 중국군의 포로로 죽거나 사망했다.[2]RCT-31은 이전에 서쪽에서 괴멸된 제8기병연대와, 역시 서쪽의 군우리 근처에서 3분의 1의 사상자로 인해 무력화된 제2보병사단을 제외하고는 파괴된 최대 규모의 미군 부대였다. 상대 중국 제80사단과 제81사단의 사상자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매우 심각했을 것으로 보인다. 두 사단 모두 1951년 4월 초까지 전장에서 다시 확인되지 않았다. 중국 측 기록에는 4,300명이 사망하고 중상을 입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수치에는 동계 의류 부족으로 동사한 많은 중국군 병사들은 포함되지 않았다.[2]
1950년 11월 27일부터 12월 2일까지 장진호에 배치된 RCT-31 소속 미국 군인 1,777명 중 12월 12일까지 1,392명이 미확인 전사자 또는 전쟁 포로로 실종되었다.[2][13][14]
군인 | 확인 날짜 | 회수 날짜 | 계획 | 부대 | 참고 자료 |
---|---|---|---|---|---|
돈 C. 페이스 주니어 | 2012년 10월 11일 | 2004년 | 제36차 합동 유해 발굴 작전 | 제31연대 전투단 지휘관 | [15] |
하우터만 주니어 상병 | 2016년 12월 14일 | 1954년 9월 15일 | 글로리 작전 | 제32보병연대 제1대대 의무 중대 | [16] |
멜빈 R. 힐 상병 | 2016년 10월 12일 | 1990년–1994년 | 북한 송환 | 제32보병연대 중박격포 중대 | [17] |
프레디 L. 헨슨 상병 | 2017년 4월 3일 | 2004년 | 제36차 합동 유해 발굴 작전 | 제57야전포병대대 A포대 | [18] |
루퍼스 L. 케첨 상사 | 2018년 4월 24일 | 2001년 9월 | 합동 유해 발굴 작전 | 제57야전포병대대 의무대 | [19] |
칼 H. 린드퀴스트 주임원사 | 2018년 8월 8일 | 1954년 | 글로리 작전 | 제31보병연대 제3대대 본부 중대 | [20] |
아놀드 피트만 중사 | 2014년 10월 7일 | 1954년 | 글로리 작전 | 제31보병연대 제3대대 L중대 | [21] |
제임스 W. 샤프 중사 | 2017년 1월 9일 | 2001년 | 제25차 합동 유해 발굴 작전 | 제57야전포병대대 B포대 | [22] |
조셉 M. 스녹 중사 | 2015년 1월 5일 | 1993년 | 북한 송환 | 제31보병연대 중박격포 중대 | [23] |
하비 H. 스톰스 소령 | 2019년 7월 30일 | 2018년 7월 27일 | 2018년 북미 정상회담 | 제31보병연대 제3대대 본부 행정 장교 | [24] |
니콜라스 J. 발렌타인 상사 | 2021년 3월 16일 | 2018년 7월 27일 | 2018년 북미 정상회담 | 제7보병사단 제57야전포병대대 B포대 | [25] |
아사 E. 밴스 상병 | 2019년 9월 10일 | 2018년 7월 27일 | 2018년 북미 정상회담 | 제7보병사단 제32보병연대 D중대 | [26] |
4. 2. 수훈
돈 C. 페이스 주니어 중령은 사후 명예 훈장을 수여받았다.[1]다음은 저수지 동쪽에서의 행동으로 수훈 십자 훈장을 수여받은 병사들이다.[1]
이름 | 계급 | 소속 | 비고 |
---|---|---|---|
앨런 D. 맥린 | 대령 | RCT-31 지휘관 | 사후 수여 |
조지 R. 코디 | 대위 | HMC 31 보병 | 사후 수여 |
제임스 H. 고드프리 | 상병 | D/32 보병 | |
해럴드 B. 호글랜드 | 하사 | D/15 AAA 대대 | 작전 중 실종 |
찰스 개리거스 | 하사 | 1/32 보병 | 사후 수여 |
로버트 E. 존스 | 소령 | 1/32 보병 S-3 | |
존 E. 그레이 | 중위 | M/31 보병 | |
얼 조던 | 대위 | M/31 보병 | |
로버트 G. 슈미트 | 중위 | M/31 보병 | |
스탠퍼드 O. 코너 | 하사 | Med/A/57 FAB |
5. 유산
중국 측 문서와 해병대 메이저 패럿(Parrot)과 로이 애플먼(Roy Appleman) 역사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RCT-31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용감하게 싸웠고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다는 증거가 제시되었다. 2000년, 해군은 31연대 전투단의 노고를 인정하여 이 부대에 해군 대통령 부대 표창을 수여했다.[11][12]
참조
[1]
웹사이트
31st Infantry Regiment SITREP September to December 1950
https://www.koreanwa[...]
[2]
웹사이트
A PHANTOM FORCE-LOST TO HISTORY TASK FORCE MAC LEAN - FAITH
http://31rct.tripod.[...]
2000
[3]
웹사이트
Richard Ovenshine – Recipient
http://valor.militar[...]
2020-12-10
[4]
웹사이트
Nightmare at the Chosin Reservoir
https://armyhistory.[...]
2015-01-20
[5]
웹사이트
'"Nightmare at the Chosin Reservoir"'
http://www.armyhisto[...]
[6]
웹사이트
Staff Operations: The X Corps in Korea, December 1950
http://cgsc.leavenwo[...]
2007-01-12
[7]
웹사이트
The Korean War: The Chinese Intervention
https://history.army[...]
[8]
웹사이트
Hill 303 Massacre
http://www.rt66.com/[...]
[9]
서적
East of Chosin
Texas A&M University Press
[10]
서적
East of Chosin
Texas A&M University Press
[11]
서적
Respect and Recognition of the Finest Fighting Unit of this Country
https://books.google[...]
Trafford Publishing
2012
[12]
웹사이트
50 Years Later, the Battle of Chosin Ends
https://www.latimes.[...]
2000-06-25
[13]
웹사이트
Duty Calls: Korean War soldiers to be reunited at Saratoga National Cemetery
https://www.timesuni[...]
2021-09-19
[14]
웹사이트
New York National Guard funeral honors Korean War MIA
https://www.army.mil[...]
[15]
웹사이트
Soldier Missing From Korean War Identified (Faith)
https://www.dpaa.mil[...]
2013-04-10
[16]
웹사이트
Cpl Jules Hauterman Jr.
https://dpaa.secure.[...]
[17]
웹사이트
CPL MELVIN RANDELL HILL
https://dpaa.secure.[...]
[18]
웹사이트
Soldier Killed In Korean War Accounted For (Henson)
https://www.dpaa.mil[...]
2017-04-27
[19]
웹사이트
SFC RUFUS LLOYD KETCHUM
https://dpaa.secure.[...]
[20]
웹사이트
Soldier Accounted-For From The Korean War (Lindquist, C.)
https://www.dpaa.mil[...]
2018-11-30
[21]
웹사이트
SGT ARNOLD PITMAN
https://dpaa.secure.[...]
[22]
웹사이트
SGT JAMES WALTER SHARP
https://dpaa.secure.[...]
[23]
웹사이트
SGT JOSEPH MICHAEL SNOCK
https://dpaa.secure.[...]
[24]
웹사이트
Maj Harvey Harrell Storms
https://dpaa.secure.[...]
[25]
웹사이트
Army Sgt. 1st Class Nicholas J. Valentine
https://www.dpaa.mil[...]
[26]
웹사이트
U.S. Army Cpl. Asa E. Vance
https://www.dpaa.m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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