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상륙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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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인천 상륙 작전은 1950년 9월 15일, 한국 전쟁의 전세를 뒤집기 위해 유엔군이 인천에 감행한 상륙 작전이다. 조선인민군의 낙동강 방어선 공세가 교착 상태에 이르자, 유엔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는 인민군 후방에 상륙하여 서울을 탈환하는 작전을 계획했다. 맥아더는 인천의 불리한 지형 조건에도 불구하고 기습 효과를 노려 상륙 지점으로 선정했고, 미 해병 제1사단과 제7보병사단을 주축으로 한국군, 해군, 공군을 포함한 대규모 연합군을 투입했다. 13일부터 시작된 함포 사격과 공습 이후, 15일 월미도에 상륙한 유엔군은 인천을 점령하고 서울 탈환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 작전은 서울 수복으로 이어져 전쟁의 흐름을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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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상륙 작전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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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분쟁 | 인천 상륙 작전 |
전체 | 한국 전쟁 |
![]() | |
날짜 | 1950년 9월 10일 - 9월 19일 |
장소 | 경기도 인천시 |
결과 | 국군과 유엔군의 승리 인천 수복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 계기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서의 전세 역전 서울 수복의 발판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해군) 호주 (해군) (해군) (해군) (해군) (해군) |
지휘관 | |
지휘관 1 | 더글러스 맥아더 아서 듀이 스트러블 올리버 P. 스미스 로버트 싱크 에드워드 알몬드 손원일 신현준 백인엽 백선엽 |
지휘관 2 | 김일성 최용건 남일 |
병력 | |
병력 1 | 군사 40,000명 항공기 F4U 콜세어 순양함 4척 구축함 7척 제7합동기동부대 약 260척 |
병력 2 | 항공기 19대 요새 1개 경비정 1척 구축함 1척 전투함 20척 경비병 17명 주둔군 2,000명 지원군 1,400명 |
사상자 | |
사상자 1 | 222명 |
사상자 2 | 1,350명 |
일본어 정보 | |
작전명 (일본어) | 仁川上陸作戦 |
작전명 (로마자) | Incheon Sangnyuk Jakjeon |
![]() | |
날짜 (일본어) | 1950년9월 15일 - 동년9월 26일 |
장소 (일본어) | 한국 인천、서울 부근 |
결과 (일본어) | 국련군의 결정적인 승리, 서울 탈환 |
전투 참가 세력 1 (일본어) | |
지휘관 1 (일본어) | 더글러스 맥아더 아서 D. 스트러블 에드워드 아몬드 백인엽 손원일 신현준 |
지휘관 2 (일본어) | 김일성 최용건 김책 김웅 남일 |
병력 1 (일본어) | 함정 261척, 75,000명 |
병력 2 (일본어) | 125,000명 |
사상자 1 (일본어) | 작전 초반: 70명 전사, 470명 부상, 5명 행방불명 서울: 600명 전사, 2,750명 부상, 65명 행방불명 |
사상자 2 (일본어) | 14,000명 전사, 7,000명 부상 |
영문 정보 | |
전투명 (영문) | Battle of Inchon |
작전명 (영문) | Operation Chromite |
위치 (영문) | Inchon, South Korea and the Yellow Sea |
날짜 (영문) | 1950년 9월 10일–19일 |
결과 (영문) | 유엔 승리 북한군의 남한 철수 시작 북한 침공 시작 |
교전 세력 1 (영문) | |
지휘관 1 (영문) | 더글러스 맥아더 아서 듀이 스트러블}} 에드워드 M. 아몬드 올리버 P. 스미스}} 손원일 신현준 백인엽 |
지휘관 2 (영문) | 김일성 최용건 월기찬 완용 |
병력 1 (영문) | 약 40,000명 보병 순양함 4척 구축함 7척 제7합동기동부대 약 260척 |
병력 2 (영문) | 약 6,500명 보병 항공기 19대 요새 1개 경비정 1척 포병 미상 |
사상자 1 (영문) | 224명 사망 809명 부상 순양함 2척 파손 구축함 3척 파손 LST 1척 손실, 3척 파손 항공기 1대 파괴 |
사상자 2 (영문) | 1,350명 사망 요새 1개 파손 경비정 1척 침몰 항공기 1대 파괴 |
2. 작전의 배경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 발발 이후, 조선인민군(북한군)은 남진을 계속하였고, 대한민국 국군(한국군)과 미국군은 후퇴를 거듭했다. 7월 31일 미 제8군은 방어 전선을 축소하기 위해 서남부 전선을 포기하고, 조선반도 동남단의 부산 주변, 부산교두보(낙동강 방어선)에 몰려 있었다.
맥아더가 기획한 크로마이트 작전(Operation Chromite)은 서울 근교의 인천에 기습 상륙하여 북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부산을 사수하고 있는 제8군을 진격시켜 남북에서 북한군 부대를 포위 섬멸하는 작전이었다. 이 상륙 작전은 9월 15일에 실시되었고, 유엔군은 인천을 확보한 후, 잇달아 서울을 북한군으로부터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조선반도 남부로의 대공세로 피폐해 있던 북한군은 보급로가 끊기자, 9월 23일에는 모든 부대에 북위 38선 이북으로의 후퇴를 명령했다. 전장 이탈에 실패한 북한군은 부대 행동에 심각한 혼란이 발생하였고, 그때까지 수세였던 유엔군이 공세로 전환하게 되었다. 따라서 한국 전쟁 초기의 중대한 전환점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149]
2. 1.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린 UN군
1950년 6월 2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한국 전쟁이 시작되었다. 조선인민군(북한군)은 병력과 무기 면에서 유엔군과 대한민국 국군(한국군)을 압도하며 빠르게 남쪽으로 진격했다.[149]

초기 북한군의 전략은 아군을 양쪽 측면에서 포위하고 공격하여 섬멸하는 포위섬멸 작전이었다. 이 방식은 전쟁 초기부터 8월 초까지 매우 효과적이었다.[149] 유엔군과 한국군은 계속해서 패배했고, 북한군은 계속 진격했다.
8월 초, 유엔군과 한국군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이에 유엔군은 낙동강을 따라 방어선을 구축하고, 이를 최후의 보루로 삼아 낙동강 방어선 전투를 시작했다. 이 방어선에서는 북쪽과 서쪽, 두 방향만 방어하면 되었기 때문에 북한군의 포위 전략은 더 이상 효과를 발휘할 수 없었다. 또한, 유엔군은 부산항과 비행장을 통해 병력, 무기, 물자를 신속하게 보급받아 전력을 회복했다. 반면 북한군은 전쟁 초기에 누렸던 병력과 무기의 우위를 점차 잃게 되었다.[149]
2. 1. 1. 조선인민군의 8월 공세
1950년 8월 5일, 조선인민군은 낙동강 방어선에서 이전과 같은 전술을 다시 사용하고자 4개의 공격축을 설정하고 전투를 벌였다. 이는 낙동강 방어선 전투로 이어진다. 마산,[142] 전투산, 낙동강 일대,[143] 대구,[144] 칠곡 등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포항 전투에서는 대한민국 국군이 조선인민군 3개 사단을 격퇴했다.[145] 조선인민군의 공격은 유엔군과 대한민국 국군에 의해 효과적으로 저지되었고, 조선인민군의 8월 공세는 시간을 끌게 되었다.[146] 이로써 조선인민군의 전략은 한국 전쟁에서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이 명백히 드러났다.2. 1. 2. 조선인민군의 9월 공세
8월 말, 조선인민군은 병력 손실이 크고 보급 문제까지 겹쳐 어려움을 겪었다.[147][148]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인민군은 9월 공세를 준비하여 병사들의 사기를 유지시켰다.[149]9월 1일, 조선인민군은 낙동강 대공세를 감행했다. 5개의 공격축을 설정하여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려 했다.[150] 이 공격에 유엔군은 허를 찔렸다. 조선인민군은 경주를 공격하고,[151] 대구와 가산을 포위했으며,[152] 낙동강을 다시 건너 영산으로 진격했고,[153] 남강과 함안을 통해 마산 점령을 시도했다.[154]
그러나 이 공세는 유엔군과 대한민국 국군의 효과적인 방어로 실패했다. 두 번의 공세 실패로 조선인민군은 병력과 자원이 급감하여 공세 위주 전략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3. 상황을 타계할 상륙 작전 계획
1950년 6월 29일, 더글러스 맥아더는 한강 남안 최전선을 시찰하던 중 인천 상륙 작전을 구상했다.[76] 그는 태평양 전쟁에서 다수의 상륙 작전을 지휘한 경험을 바탕으로, 우세한 해·공군력을 이용하여 북한군의 후방을 급습, 보급선을 차단하고 남북에서 포위하는 작전 방침을 세웠다.[77]
6월 30일,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미군 지상군 투입을 발표했고,[78] 7월 4일, 에드워드 아몬드 소장[79] 등이 기획한 "블루 하트 계획" 준비 명령이 제1기병사단에 하달되었다. 이 작전은 7월 22일경 인천 상륙을 목표로 했으나,[80] 전황 악화로 7월 10일 취소되었고, 제1기병사단은 포항으로 상륙해 방어전에 투입되었다.[83][84]
맥아더는 블루 하트 계획을 폐기한 후에도 상륙 작전 전문가들을 모아 작전 기획을 계속 진행, 7월 23일 "크로마이트 계획"을 발표했다. 이 계획은 9월 중순에 제1해병여단(제5해병연대 기반)과 제2보병사단을 인천, 군산, 주문진 중 한 곳에 상륙시키는 계획이었다.[85][86]
8월 5일, 부산 교두보 전투에서 북한군의 대공세로 인해 상륙 예정 병력이 부산으로 증원되었으나, 상륙 작전은 연기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 부산 교두보 방어전이 장기화되면 미8군이 전선에서 돌파될 위험이 커진다.
# 인천에 대량의 기뢰가 매설되면 상륙 작전이 불가능해진다.
# 10월까지 한반도 남부의 경작지를 탈환하지 못하면 북한군이 많은 농작물을 확보하게 된다.[87][88]
8월 12일, 맥아더는 크로마이트 100-B 계획(인천 상륙 작전) 발동을 명령했다. 상륙 예정일은 9월 15일, 상륙 부대는 제1해병사단, 제7보병사단, 한국군 일부로 구성되었고, 공격 목표는 인천-서울 지역이었다. 8월 15일에는 제10군단 사령부가 편성되었고, 8월 26일 아몬드 소장의 지휘권 발동이 공식 명령되었다.[89][90]
미 해병대는 빠른 동원을 위해 제2해병사단과 유럽 등에서 정규병을 제1해병사단으로 전속시켰고, 예비역 1만 명 이상이 소집되었다. 제7해병연대 제3대대는 8월 16일 크레타 섬을 출발하여 9월 9일 부산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제7보병사단은 인원 부족을 부산에서 모집된 8,000명의 한국군 병사[91]로 보충하여[92] 훈련을 실시했다.[93]
8월 23일, 극동해군사령관 C. 터너 조이 중장은 인천 상륙 작전 실행 부대인 제7합동임무부대(JTF-7)를 편성했다.[117] 제7합동임무부대는 제7함대(기함 로체스터)를 중심으로 한국, 영국, 프랑스 등 8개국 함정 260여 척으로 구성되었다. 한국에서는 초계정 4척, 소해정 7척이 참가했다.[118][114] 아서 D. 스트러블 중장은 8월 25일 인천 상륙 작전 실행 명령을 받고,[119] 9월 3일 “JTF-7 작전 계획 9-50 기본 계획”을 하달했다.[121]
제7합동임무부대 (Joint Task Force 7) 스트라블 중장 | 제90임무부대 (TF-90) | 공격부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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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임무부대 (TF-92) | 상륙부대 (제10군단) | | |
제91임무부대 (TF-91) | 저지·원호부대 | | |
제99임무부대 (TF-99) | 초계정찰부대 | | |
제77임무부대 (TF-77) | 고속항공모함부대 | | |
제79임무부대 (TF-79) | 병참지원부대 | | |
8월 말, APA(공격수송함), LST(전차상륙함) 등 상륙함들이 일본 각지에 모였다. 제1해병사단 주력은 고베에, 제7보병사단은 요코하마에, 제10군단 사령부는 사세보에 집결했다. 상륙 부대는 9월 10일경부터 순차적으로 출항했다.[124]
한편, 1950년 8월 17일부터 대한민국 해군 정보부대는 X-ray 작전을 통해 연흥도와 덕적도에서 정보를 수집했다.[28] 9월 1일에는 UN 정찰팀(미군 정보부대원, KLO 등 포함)이 연흥도에 잠입하여 정보를 수집했다.[29][30][31][32] 유진 F. 클라크 중위[33]가 이끈 이 팀은 월미도의 북한군 방어 시설에 대한 상세한 보고서를 제공했다. 또한, ‘트루디 잭슨 작전’[34]을 통해 윤정 전 해군 중위와 계인주 전 육군 대령이 인천에 파견되어 추가 정보를 수집했다.
인천의 조수 간만의 차는 평균 약 8.84m, 최대 약 10.97m로 세계에서 가장 큰 편에 속한다. 클라크는 2주 동안 인천의 조수를 관측하여 미국의 조석표는 부정확하지만 일본의 조석표는 매우 정확하다는 것을 발견했다.[35] 또한, 장기간의 간조 동안 북한 해상 기뢰를 발견하여 제거했지만, 북한군이 수로에 체계적으로 기뢰를 매설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고했다.[36] 북한군은 첩보원들의 상륙을 탐지하고 정크선을 이용해 공격했으나, 클라크는 삼판선에 기관총을 설치하여 격침시켰다.[37] 이에 대한 보복으로 북한군은 클라크를 도왔던 민간인 50명가량을 살해했다.[38]
3. 1. 상륙 지역 선정
미국 합동전략기획 및 작전단(JSPOG)은 상륙 작전명 '크로마이트(Chromite)'를 기획하면서 인천, 군산, 주문진을 상륙 후보지로 선정했다.[155] 이후 일본 도쿄에 있는 미국 극동군사령부는 상륙 지역을 인천으로 최종 결정했다.[155]7월 23일, "크로마이트 계획"이 발표되었는데, 이 계획은 북한군을 저지하고 있는 제8군과 연계하여 9월 중순에 제1해병여단(제5해병연대 기반)과 제2보병사단을 한국의 세 곳 중 한 곳에 상륙시키는 계획이었다. 세 가지 계획은 각각 인천 상륙을 "100-B 계획", 인천 남쪽 150km 군산 상륙을 "100-C 계획", 한국 동해안 주문진 상륙을 "100-D 계획"으로 명명되었다.[85][86]
그러나 8월 5일부터 시작된 부산 교두보 전투에서의 북한군 대공세(8월 공세)로 인해 제8군의 전력 부족이 심각해져 상륙 작전 예정 병력인 제1해병여단과 제2보병사단을 제8군 증원을 위해 부산으로 파견하게 되었다. 그러나 상륙 작전을 연기할 수는 없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 부산 교두보 전투가 장기화되면 제8군의 피로로 인해 전선이 돌파될 위험이 증대한다.
# 인천에 대량의 기뢰가 매설되면 상륙 작전이 불가능해진다.
# 미국의 수확기인 10월까지 한반도 남부의 비옥한 경작지를 탈환하지 않으면 북한군이 많은 농작물을 확보하게 된다.[87][88]
8월 12일, 맥아더는 크로마이트 100-B 계획, 즉 인천 상륙 작전 계획의 발동을 명령했다.
3. 2. 미 합동참모부의 인천 반대
미 합동참모부는 상륙 지역을 인천으로 하는 것에 반대했다. 그 이유는 인천의 조수, 수로, 해안 조건 때문이었다.[156]- 수로가 좁아 대규모 함정이 진입하기 어렵고, 적이 설치한 기뢰로 인해 큰 피해를 볼 수 있다.
-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10m로 매우 커, 썰물 때에는 해안에 2~5km의 넓은 갯벌이 드러나 상륙함이 접근하기 어렵다.[156]
소련은 한국 전쟁 발발 몇 주 만에 북한에 해안 방어용 기뢰를 제공했고, 소련의 기뢰전 전문가들이 북한군에게 기뢰 설치 및 사용 기술을 지도했다. 일부 기뢰는 인천으로 운송되었다.[46] 1950년 9월 초, 유엔군은 북한 해역에 기뢰가 설치된 것을 알지 못했고, 이는 인천 상륙 작전에 큰 어려움을 줄 수 있었다. 그러나 북한은 인천에 비교적 적고 정교하지 않은 기뢰를 설치했고, 상륙 작전 부대의 구축함들은 간조 시 수로에 있는 접촉식 기뢰를 발견하여 함포 사격으로 파괴했다. 상륙 부대는 만조 시 수로를 통과하여 상륙 해변에 상륙했고, 나머지 기뢰들은 아무런 문제없이 통과했다.[47]
3. 3. 맥아더가 겪은 태평양 전쟁

1942년 3월 17일, 맥아더는 작은 어뢰정을 타고 필리핀을 탈출하여 호주로 갔다. 이후 코레히도르 전투에서 일본군이 미군을 압도했고, 미군과 필리핀군 14만 명이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
당시 미국은 유럽과 태평양, 두 곳에서 전쟁을 동시에 치르기 어려웠다. 미 극동군 사령관이 된 맥아더에게 배정된 전쟁 물자는 유럽 전선에 있던 패튼 장군에게 배정된 물량의 5%에 불과했다.
이에 맥아더는 '개구리 뜀뛰기 전술'로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군을 압도했다. 이는 전선을 연결하여 안전하게 진격하는 대신, 개구리가 뛰듯이 주요 거점만 점령하는 과감한 전술이었다. 그 결과 맥아더는 필리핀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태평양 전쟁에서 총 87차례의 상륙작전을 지휘한 맥아더는 상륙작전에 대한 강한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157]
맥아더가 태평양 전쟁에서 펼친 상륙작전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였다.
- 일본군 주력 부대가 있는 섬 대신, 주변의 배후 섬을 공격한다.
- 배후 섬에 대한 사전 공격은 2~3시간 동안 최대한 강력하게 진행한다.
- 이후 전투기가 1시간가량 공습을 가한다.
- 일본군은 미군의 지속적인 포격과 공습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다.
- 이때, 미군은 기습적으로 상륙작전을 감행한다.
- 참호나 진지에 숨어도 미군의 포격과 공습에 죽을 것이라 생각한 일본군은 모든 작전을 무시하고 적진을 향해 반자이 돌격(Banzai charge)을 감행한다. (이는 어차피 죽을 바에야 싸우다 죽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 미군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는 일본군을 효과적으로 제압하고 섬을 점령한다.
- 일본군은 병력을 분산시켜 다른 섬으로 병력을 보낸다.
- 미군은 다시 섬을 공격, 점령하여 일본군의 보급로와 교통로를 차단한다.
3. 4. 미 합동참모본부의 최종 결정
1950년 8월 23일, 미국 육군참모총장과 해군참모총장은 도쿄 미국 극동군사령부에서 맥아더와 회의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맥아더는 인천 상륙 작전을 주장하며 다음과 같은 주요 내용을 브리핑했다.- 조선인민군 전투 부대는 모두 낙동강 방어선에서 미8군과 대치 중이다.
- 인민군의 병참선이 길게 늘어져 있어 후방인 서울에서 차단 가능하다. 따라서 서울과 가장 가까운 인천이 상륙 지점이 되어야 한다.
- 서울은 전략적, 정치적, 심리적 이유로 신속하게 탈환해야 한다.
- 인천 상륙 작전은 미8군이 망치, 미10군단이 모루가 되어 인민군을 분쇄할 수 있게 한다.
결국 8월 28일,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맥아더의 계획을 승인했다. 8월 30일에는 인천 상륙 작전 명령을 하달하고, 상륙 작전일을 9월 15일로 확정했다.[158]
4. 상륙 작전 준비
상륙 작전 준비 과정에서 대한민국 해병대 제3대대를 포함한 제5연대 전투단은 레드 비치에서 사다리를 이용해 해벽을 올랐다. 제5해병대장 레이먼드 L. 머레이 중령은 묘지 언덕(북쪽) 상단에서 내측 조수 지역(하단의 조수 지역 근처)까지 이르는 길이 약 2743.20m, 깊이 약 914.40m 지역을 확보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관측소 언덕이라고 불리는 중앙의 곶도 포함되었다.(https://web.archive.org/web/20110720062121/http://www.kmike.com/gifs/inchon.jpg 지도 참조) 제5해병대 제1대대는 묘지 언덕과 관측소 언덕 북쪽 절반을, 제5해병대 제2대대는 관측소 언덕 남쪽 절반과 내측 분지를 담당했다.[53]
1950년 9월 15일 오후 늦게 LST(상륙함)들이 레드 비치에 접근했고, 선두 함정들이 묘지 언덕에 있는 북한군 방어군의 집중적인 박격포와 기관총 사격을 받았다. 집중적인 사격에도 불구하고 상륙군을 상륙시키고 중요한 지원 장비를 하역했다. 또한, 함포는 레드 비치 우측 방어선에 있는 북한군 포대를 제압했다. 8척의 LST 중 3척(, , 및 ''LST 973'')이 박격포와 기관총 사격을 받아 선원 1명이 사망하고 몇 명이 부상을 입었다.[54] LST들은 9월 16일 이른 아침 고조 때 하역을 완료하고 해변을 떠났다.
1950년 9월 15일 밤, 레드 비치 부대는 인천의 북한군 방어선을 무력화하고 월미도로 가는 도로를 열어 제5해병대 제3대대와 그린 비치의 전차들이 인천 전투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인천상륙작전에는 조선반도의 지형을 잘 아는 일본인이 운항하는 상륙함(LST)이 크게 기여했다. 인천상륙작전에 사용된 LST의 6할이 일본인에 의해 운항되었고, 약 2,000명이 승선해 있었다.[138] 연합국 최고사령관 총사령부(GHQ)는 미국 해군을 통해 일본의 상선과 선원을 관리하고 있었지만,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했던 전 해병대원 로버트 와이슨은 “일본인들은 조선반도에 여러 번 다녀왔기 때문에 해안 지형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적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게이트를 열고, 하역 작업을 필사적으로 수행했습니다. 우리는 서로 협력하여 작전을 성공시켰습니다.”라고 하면서 LST 운항을 맡았던 일본인들의 존재 없이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이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138][139]
상륙 작전의 성공을 위해 첩보 수집, 양동작전 등 다양한 준비가 이루어졌다.
4. 1. 첩보수집
함명수 소령(해군참모총장 역임)이 지휘하는 대한민국 해군 첩보부대(총원 17명)는 1950년 8월 17일부터 9월 14일까지 영흥도와 덕적도를 거점으로 X-ray 작전을 수행하며 첩보를 수집했다.[159][160]이와 별도로, 유진 F. 클라크 대위(Lieutenant Eugene F. Clarke)가 이끄는 미 해군 첩보부대는 1950년 9월 1일 영흥도에 잠입했다. 이 부대에는 계인주 대령, 연정 대위 등 국군 출신 장교와 KLO부대원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영흥도를 중심으로 인천 앞바다 정보를 수집하여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에 타전하는 트루디 잭슨 작전(Operation Trudy Jackson)을 수행했다. 1950년 9월 15일 0시 50분에는 팔미도 등대를 점등했다.[161] 그러나 팔미도 등대 점등 주체를 두고 유진 F. 클라크 대위와 KLO부대원 최규봉의 주장이 서로 달라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162][163][164]
4. 2. 참가부대 구성
구분 | 부대명 | 지휘관 | 비고 |
---|---|---|---|
지상군 | 미 제10군단 | ||
미 제7보병사단 | 데이비드 G. 바 육군 소장 | ||
미 제1해병사단 | 올리버 스미스 해병대 소장 | ||
대한민국 | |||
육군 제17연대 | 백인엽 육군 대령 | 미 제7보병사단에 배속[165] | |
해병대 제1연대 | 신현준 해병 대령 | 미 제1해병사단 5연대에 배속[166] | |
경찰 화랑부대 | 박정준 총경 | 미 제7보병사단과 미 제1해병사단에 배속 | |
카투사, 재일학도의용군 | 미 제7보병사단에 배속 | ||
해군 | 제7합동기동부대 (Joint Task Force 7) - 지휘관: 아서 듀이 스트러블 해군 중장 | ||
미국 해군 | 225척 | ||
대한민국 해군 | 15척 | ||
영국 해군 | 12척 | ||
캐나다 해군 | 3척 | ||
오스트레일리아 해군 | 2척 | ||
뉴질랜드 해군 | 2척 | ||
프랑스 해군 | 1척 | ||
네덜란드 해군 | 1척 | ||
공군 | 미국 공군 | ||
오스트레일리아 공군 |
4. 3. 양동작전
5. 인천 상륙
9월 13일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의 명령에 의해 인천 상륙 작전이 개시되었다. 미국의 제임스 도일(James H. Doyle) 해군 소장이 유엔군 해군사령관으로서 작전을 지휘했다. 동원된 군함은 한국 15척, 미국 226척, 영국 12척, 캐나다 3척, 오스트레일리아 2척, 뉴질랜드 2척, 프랑스 1척, 도합 261척의 대선단이었다.[168] 13일부터 맹렬한 함포 사격이 시작되어 이틀이 지났다.
15일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의 지휘 아래 미 제1해병사단과 미 제7보병사단이 상륙하였고, 미 제1해병사단에 배속된 대한민국 해병대 연대급 부대[169]와 미 제7보병사단에 배속된 대한민국 육군 17보병연대 역시 상륙하여 인천을 탈환하는데 힘을 보탰다.[170]
낙동강 전선에서 유엔군과 대한민국 국군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김포 비행장은 당시 한국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비행장이었으며, 맥아더는 이곳을 조기에 점령할 것을 요구했다.[55] 김포 비행장이 확보되면 제5공군과 미 해병대 항공부대가 일본에서 전투기와 폭격기를 더욱 쉽게 북한으로 이동시켜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56]
제5해병대는 17일에 빠르게 진격하여 18시에 제2대대가 김포 비행장(Kimpo Airport) 가장자리에 도착했다. 이후 2시간 만에 대대는 비행장 남부 지역을 점령했다. 비효율적으로 방어하던 400~500명의 인민군 병사들은 놀란 듯했고, 활주로에 지뢰를 설치하지도 않았다. 18일 02시부터 새벽까지 여러 차례 소규모 적의 반격이 비행장 주변 지역을 타격했다. 해병대는 이러한 중대 규모의 반격을 격퇴하고 인민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으며, 인민군은 결국 북서쪽으로 도주했다. E중대와 지원 장갑차가 이 작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김포 비행장은 9월 18일 아침에 확보되었다.[57][58] 김포 비행장은 상태가 매우 좋았다. 북한군은 큰 규모의 파괴 작업을 할 시간이 없었다. 사실, 몇몇 북한군 항공기가 여전히 비행장에 남아 있었다. 김포 비행장은 이제 UN 육상 기반 항공 작전의 중심지가 될 것이었다.[59]
9월 19일, 미 육군 공병대(United States Army Corps of Engineers)는 내륙 약 12.87km까지의 철도를 수리했다. 김포 비행장 점령 후, 수송기들이 비행장에 주둔한 항공기의 가솔린과 탄약을 공수하기 시작했다. 해병대는 계속해서 보급품과 증원병을 하역했다. 9월 22일까지 6,629대의 차량과 53,882명의 병력, 그리고 약 20865255.00kg의 보급품을 하역했다.[60]
6. 서울 탈환
인천 상륙 작전의 신속한 승리와는 달리, 서울로의 진격은 느리고 격렬했다.
전투 전, 북한은 수도 남쪽에 대부분의 병력을 배치하고 서울에는 병력이 부족한 사단 하나만 배치했다.[61] 미군 제10(X)군단 사령관 앨먼드는 9월 21일 작전 지휘를 맡았고, 북한의 38선 침공 3개월째 되는 날인 9월 25일까지 서울을 탈환하려고 서둘렀다.[62] 9월 20일, 해병대가 서울에 진입했고, 양측이 시가전을 벌이면서 사상자가 늘어났다.
앨먼드는 9월 25일 저녁 서울을 해방했다고 선언했고, 맥아더는 다음 날 이를 반복했다. 그러나 앨먼드의 선언 당시에도 미 해병대는 여전히 시가전을 벌이고 있었고, 북한 인민군은 도시 대부분에 남아 있었다. 북한 인민군의 마지막 병력이 격퇴되거나 제거된 것은 9월 28일이 되어서였다.[63]
7. 전후 피해 보상
주어진 소스에는 인천 상륙 작전의 전후 피해 보상에 대한 내용이 없으므로, 해당 섹션에 작성할 내용이 없습니다.
8. 관련 작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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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인천상륙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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