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라기우스 (4세기)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펠라기우스는 4세기 후반에 활동한 브리타니아 또는 아일랜드 출신의 기독교 신학자이다. 그는 인간의 자유 의지를 강조하고, 인간은 본래 선하며 죄를 짓지 않을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성선설을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성악설과 대립되었으며, 펠라기우스는 원죄와 유아 세례를 부정하여 이단으로 정죄받았다. 펠라기우스는 로마를 거쳐 카르타고, 팔레스타인으로 이동하며 자신의 사상을 전파했으나, 디오스폴리스 공의회에서 한 차례 무죄 판결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418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최종 단죄되었다. 펠라기우스의 사상은 펠라기우스주의로 발전하여 후대에 영향을 미쳤으며, 현대에는 그의 사상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418년 사망 - 교황 조시모
교황 조시모는 417년부터 418년까지 재위했으며, 갈리아 지역의 교회 관할권을 강화하고 펠라기우스주의를 단죄했으며, 아프리카 교회와 갈등을 빚기도 했고, 성직자 관련 칙령을 내렸으며 성 라우렌시오 성당에 묻혔다. - 금욕주의자 - 알라라 칼라마
알라라 칼라마는 석가모니가 출가했을 당시 싯다르타에게 무소유처를 가르쳤으나, 싯다르타는 그의 가르침이 해탈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떠난 명상 스승이었다. - 금욕주의자 - 파라마한사 요가난다
파라마한사 요가난다는 크리야 요가 수행의 부흥을 이끈 인도의 요가 수행자이자 구루로, 요고다 삿상가 협회와 자기 실현 동지회를 설립하여 서양에 크리야 요가를 전파했으며, 대표 저서로 자서전인 『어느 요기의 자서전』이 있다. - 5세기 철학자 - 보이티우스
보이티우스는 로마 귀족 출신으로 동고트 왕국에서 활동하다 반역죄로 처형되었으며, 옥중에서 저술한 《철학의 위안》을 통해 스콜라 철학에 영향을 미쳤고, 중세 시대에 큰 영향을 준 기독교 순교자이다. - 5세기 철학자 - 프로클로스
프로클로스는 후기 고대 신플라톤주의 철학자로 플라톤 철학 주석과 독자적인 철학 체계를 구축했으며, 그의 저작은 중세 철학과 르네상스 시대 플라톤 철학 부흥에 영향을 미쳤다.
펠라기우스 (4세기) |
---|
2. 생애
펠라기우스는 390년경부터 418년경까지 활동한 켈트족계 신학자이다.[4]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 등 동시대인들은 펠라기우스를 브리튼 출신으로, 제롬은 아일랜드 출신으로 보았다.[4][5] 펠라기우스는 "아일랜드 죽으로 가득 차 있다"(Scotorum pultibus praegravatusla)는 제롬의 언급처럼[5] 키가 크고 풍채가 좋았으며, 라틴어와 그리스어에 능통하고 신학에 정통했다. 그의 이름은 웨일스어 이름 모건("바다에서 태어난"을 의미) 또는 다른 켈트어에서 유래된 그리스식 형태(, "바다"에서 유래)로 이해된다.[6]
380년경 로마로 이주한 펠라기우스는[7] 엄격한 생활로 명성을 얻고 놀라의 바울리누스와 서신을 주고받았다.[8] 410년 알라릭 1세가 로마를 약탈하자 펠라기우스와 켈레스티우스는 카르타고로 피신했다.[7] 이후 펠라기우스는 팔레스타인으로 이동하여 히에로니무스와 논쟁을 벌였다. 415년 예루살렘과 디오스폴리스에서 공의회가 열렸으나 펠라기우스주의는 이단으로 정죄되지 않았다. 펠라기우스는 조시무스 교황에게 서신을 보내 무죄를 주장했고, 교황은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418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펠라기우스주의는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이후 펠라기우스의 최후는 알려지지 않았다.
2. 1. 초기 생애와 로마 활동
펠라기우스는 4세기 후반부터 5세기 초반(390년경 ~ 418년)에 활동한 신학자이다.[4]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롯한 동시대 사람들은 그를 켈트 브리튼 출신으로 여겼다.[4] 제롬은 펠라기우스를 아일랜드 출신으로 보았고, "아일랜드 죽으로 가득 차 있다"(Scotorum pultibus praegravatusla)고 표현했다.[5] 펠라기우스는 키가 크고 풍채가 좋았으며, 라틴어와 그리스어에 모두 능통하고 신학 지식도 풍부한, 고등 교육을 받은 인물이었다. 그의 이름은 웨일스어 이름 모건(Morgan, "바다에서 태어난"이라는 뜻) 또는 다른 켈트어 이름을 그리스식으로 바꾼 형태(, "바다"에서 유래)로 추정된다.[6]380년경 펠라기우스는 로마로 이주하여 금욕적인 생활과 활발한 전도 활동으로 명성을 얻었다.[7] 놀라의 바울리누스와 서신을 주고받을 정도로 로마에서 인정받는 인물이었다.[8] 그는 로마 사회의 도덕적 타락에 경종을 울리고,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롯한 많은 교부들이 주장하는 "신의 은총에 몸을 맡긴다"는 태도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405년경, 펠라기우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서 "고백록"을 접하고 인간 존재에 대한 그의 인식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펠라기우스가 ''고백록''(397-401)에 나오는 "명령하시는 것을 주시고, 원하시는 것을 명령하소서"라는 구절이 인간의 책임을 약화시킨다고 강하게 비판했다고 25년 뒤에 회고했다. 그러나 학자들은 이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2. 2. 카르타고와 팔레스타인 피신
410년 서고트족의 알라릭 1세에 의한 로마 약탈 이후, 펠라기우스는 제자 켈레스티우스와 함께 카르타고로 피신했다.[8] 이 때 펠라기우스는 아우구스티누스와 직접 만나기도 했다고 한다. 카르타고에서 펠라기우스의 가르침은 빠르게 확산되었다. 그러나 펠라기우스의 교리는 기존 교회의 교리와 달랐으며, 특히 원죄와 구원에 관해서는 큰 차이를 보였다. 이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원죄를 강조하고, 유아 세례의 필요성을 설파하며, 그리스도 없이는 죄 없는 인생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며 펠라기우스주의에 반박했다. 이는 일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설교였으며, 펠라기우스를 직접 지목한 논쟁은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펠라기우스와 켈레스티우스는 팔레스타인으로 도망쳤다.[8]2. 3. 팔레스타인에서의 논쟁과 디오스폴리스 공의회
펠라기우스는 팔레스타인으로 가서 그곳 주교들과 친분을 맺었다. 그곳에 살던 히에로니무스 역시 이 논쟁에 연루되었다. 펠라기우스는 히에로니무스의 에페소서 주석을 비판했었고,[8] 히에로니무스는 펠라기우스를 반대하는 서신인 《크테시폰에게 보내는 편지》와 Dialogus contra Pelagianosla(펠라기우스 반박 대화)를 썼다. 당시 히에로니무스와 함께 있던 오로시우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제자로, 펠라기우스주의의 위험성에 대해 비슷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함께 펠라기우스를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펠라기우스의 친구였던 예루살렘의 요한 2세 주교는 415년 7월에 공의회를 소집했다. 교회 기록에 따르면, 오로시우스는 그리스어 구사 능력이 부족하여 설득력이 떨어졌고, 요한은 동방 출신이어서 인간이 본질적인 죄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을 더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공의회는 판결을 내리지 않고 논쟁을 라틴 교회로 넘겼다.415년 12월, 디오스폴리스 공의회(룻다)에서 카이사레아의 주교에 의해 공의회가 소집되었다. 이는 성지로 온 두 명의 면직된 주교에 의한 것이었다. 관련 없는 이유로, 두 주교 모두 참석하지 않았고, 오로시우스는 요한 주교와 상의한 후 떠났다. 펠라기우스는 공의회에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필요하다고 믿는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한 켈레스티우스의 많은 작품들이 자신의 견해를 대변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를 포함한 다른 권위자들의 추천서를 보여주었는데, 아우구스티누스는 펠라기우스의 성품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
디오스폴리스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결론 내렸다. "이제 우리는 수도사 펠라기우스에 대한 혐의에 대해 그의 출석 하에 만족을 얻었고, 그가 건전한 교리에 동의하고 교회의 믿음에 반하는 자들을 정죄하고 파문하므로, 우리는 그를 가톨릭 교회의 교제에 속한다고 판결한다."[9]
2. 4. 이단 정죄와 최후
펠라기우스는 자신의 유죄 판결을 뒤집고자 교황 조시무스에게 편지와 신앙 고백서를 보내 자신이 정통이라고 주장했다. 조시무스는 켈레스티우스의 설득으로 이 사건을 재심사했지만, 아프리카 주교들과 황제 호노리우스의 압력으로 418년에 켈레스티우스와 펠라기우스를 파문했다.[4]418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펠라기우스주의는 이단으로 정죄되었다.[12] 아우구스티누스는 펠라기우스와 켈레스티우스가 이단으로 규정되지 않은 것에 충격을 받아 이 공의회를 소집했다.
정죄 이후, 펠라기우스는 예루살렘에서 추방되었고, 알렉산드리아의 성 키릴로스는 그가 이집트에 정착하는 것을 허락했다. 그 이후 그의 소식은 들려오지 않는다.[4] 펠라기우스와 켈레스티우스는 431년 에페소스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선언되었다.[17]
3. 사상과 신학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본성, 죄, 은총에 대해 기존 교회와 다른 독자적인 신학을 펼쳤다. 그의 사상은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롯한 당대 신학자들과의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영국은 역사적으로 펠라기우스주의가 흥행한 곳으로, 카를 바르트는 영국을 펠라기우스주의자라고 부르기도 했다.[20]
마니교는 정신은 신이 창조했지만 물질은 부패하고 악하다고 주장했다. 신학자 제럴드 보너는 펠라기우스의 견해가 마니교에 대한 "과잉 반응"이라고 보았다. 펠라기우스는 신이 창조한 모든 것은 선하며, 인간을 타락한 존재로 만들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10]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아우구스티누스가 마니교 신학을 교회에 도입했다고 비난했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를 부인했다.[11]
380년경 로마로 간 펠라기우스는 고행과 전도로 알려졌으며, 당시 로마 사회의 윤리적 타락에 경종을 울리고, 아우구스티누스 등의 "신의 은총에 몸을 맡긴다"는 태도를 비판했다. 405년경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접한 펠라기우스는 인간 존재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인식에 강한 의문을 품었다. 당시 교회는 인간이 신의 은총에 의존하는 존재라고 가르쳤지만, 펠라기우스는 이러한 가르침에 반대했다.
410년 서고트족의 알라릭 1세에 의해 로마가 약탈당하자, 펠라기우스는 제자 켈레스티우스와 함께 카르타고로 피신했다. 카르타고에서 펠라기우스는 아우구스티누스와 만나기도 했으며, 그의 가르침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러나 펠라기우스의 교리는 원죄와 구원 등에서 기존 교회의 가르침과 달랐기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는 펠라기우스주의에 반대하는 주장을 펼쳤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원죄, 유아 세례의 필요성, 그리스도 없이는 죄 없는 인생이 불가능함을 강조했지만, 펠라기우스를 직접 지목하지는 않았다. 이후 펠라기우스와 켈레스티우스는 팔레스타인으로 도망쳤다.
팔레스티나에서 펠라기우스는 히에로니무스와 논쟁을 벌였다. 히에로니무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제자 오로시우스와 함께 펠라기우스를 비판했다. 415년 7월, 예루살렘의 주교 요한의 주도로 교회 회의가 열렸지만, 펠라기우스는 자신의 주장을 옹호하며 아우구스티누스를 포함한 여러 교회 중진들의 지지 서신을 공개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교리 해석에서는 펠라기우스와 의견을 달리했지만, 그의 인품은 높이 평가했다.
이 회의는 펠라기우스주의를 이단으로 단정할 권위가 없었기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와 주교들은 펠라기우스와 켈레스티우스를 제외하고 펠라기우스주의를 다시 비판하고, 인노켄티우스 1세 (로마 교황)에게 그의 교리를 이단으로 규정할 것을 요청하여 성공했다.
펠라기우스는 교황 조시무스에게 서신을 보내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하며 무죄 판결을 받기도 했지만, 418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펠라기우스주의는 명백히 부정되었다. 원죄, 유아 세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교리가 명확히 정의되면서 펠라기우스주의는 이탈리아에서 사라졌다.
3. 1. 인간의 자유 의지와 도덕적 책임
펠라기우스는 인간이 본래 선하다는 성선설을 주장했다. 그는 죄를 하나님에 대한 대적 행위로 보았으며, 인간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즉, 인간은 스스로 선한 행동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예수가 죄인을 구원할 필요가 없고, 단지 도덕적 모범을 보였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의 성악설과 반대되는 것이었다.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자율성과 자유 의지를 강조했으며,[12]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인간의 "도덕적 능력"을 《데메트리아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설명했다.[13] 그는 "은총"을 자유 의지, 모세의 율법, 그리고 예수의 가르침의 선물로 보았다.[14]
펠라기우스는 원죄 교리를 부정했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유아가 죄가 없기 때문에 유아 세례가 필요없다고 생각했다.[15] 펠라기우스의 제자였던 켈레스티우스 역시 원죄와 구원을 위한 유아 세례의 필요성을 부인했다.[16]
3. 2. 은총론
펠라기우스는 자유 의지, 모세의 율법, 예수의 가르침과 같은 선물을 은총으로 이해했다.[14] 그는 그리스도가 죄인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도덕적 모범을 보인 것이라고 주장했다.3. 3. 펠라기우스주의에 대한 반박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는 펠라기우스주의가 인간의 죄성과 하나님의 은총의 필요성을 간과한다고 비판했다.[8] 그는 원죄의 존재, 유아 세례의 필요성, 그리스도 없이는 죄 없는 삶이 불가능하다는 점, 그리고 그리스도의 은총의 필요성을 강조했다.[8] 히에로니무스 역시 펠라기우스를 반대하는 글을 썼다.[8]415년 7월, 예루살렘의 요한 주교가 소집한 공의회에서는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논쟁을 라틴 교회로 넘겼다.[9] 같은 해 12월, 디오스폴리스 공의회(룻다)에서 펠라기우스는 자신의 주장을 해명하고, 켈레스티우스의 저작 중 일부는 자신의 견해를 대변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여 무죄 판결을 받았다.[9]
그러나 418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펠라기우스주의는 이단으로 단죄되었다.[12]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공의회를 소집하여 원죄, 유아 세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교리를 명확히 정의했고, 이는 교회 전체의 기준으로 확립되었다. 펠라기우스는 교황 조시무스에게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서신을 보냈지만, 결국 418년에 켈레스티우스와 함께 정죄 및 파문되었다.[4]
4. 펠라기우스주의의 영향과 재평가
펠라기우스의 가르침은 410년 서고트족의 알라릭 1세에 의해 로마가 함락된 후, 카르타고로 피신하면서 빠르게 확산되었다. 그러나 그의 교리는 원죄와 구원 등에서 기존 교회의 가르침과 달라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롯한 교부들의 반발을 샀다.[4]
아우구스티누스는 원죄와 유아 세례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펠라기우스주의에 대응했다. 펠라기우스는 팔레스타인으로 피신했으나, 히에로니무스 등과 논쟁을 벌였다. 415년 예루살렘 교회 회의에서 자신의 주장을 옹호했지만, 결국 펠라기우스주의는 이단으로 규정되었다.[4]
이후 펠라기우스는 교황 조시무스에게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서신을 보내 무죄 판결을 받기도 했지만, 418년 카르타고 회의에서 펠라기우스주의는 다시 한번 부정되었고, 원죄, 유아 세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교리가 명확히 정의되었다.
4. 1. 후대에 미친 영향
펠라기우스는 단죄된 후 예루살렘에서 추방되었고, 알렉산드리아의 성 키릴로스는 그가 이집트에 정착하는 것을 허락했다. 그 이후 그의 소식은 들려오지 않는다.[4]펠라기우스가 죽은 후에도 그의 가르침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추종자들에 의해 수정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펠라기우스의 실제 가르침에 대한 정보는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그의 일부 교리는 어거스틴을 따르는 자들과 교회 지도부에 의해 수정되고 억압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펠라기우스와 켈레스티우스는 431년 에페소스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선언되었다.[17]
펠라기우스주의와 준펠라기우스주의는 이후 몇 세기 동안 영국, 팔레스타인, 북아프리카 등에서 널리 퍼져 있었다. 성 게르마누스는 429년경 영국을 방문하여 펠라기우스주의에 맞서 싸웠다. 웨일스에서는 성 다비드가 6세기에 펠라기우스의 추종자들에 맞서 브레피 시노드와 승리 시노드를 소집한 것으로 여겨진다.
4. 2. 현대적 재평가
펠라기우스는 5세기에 단죄를 받아 "가장 깊은 색채의 이단자"로 알려졌으나, 조르주 드 플린발의 1943년 전기가 출판된 후 평가가 바뀌었다. 최근 학자들은 펠라기우스를 정통 기독교 신학자로 보기도 한다.[4] 그의 바울 서신 주석은 중세 시대에 인기가 있었지만, 종종 다른 저자의 작품으로 여겨졌다.[4]펠라기우스와 그의 영향에 대한 객관적인 시각은 어렵다. 그의 이름은 수세기 동안 개신교와 가톨릭 모두에게 비난의 대상이었으며, 그를 옹호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초기 교회는 그의 사상을 비난했고, 종교 개혁은 로마 가톨릭이 그의 신념을 따랐다고 비난하며 펠라기우스와 가톨릭 교회를 모두 비난했다. 현대 학문은 펠라기우스가 그의 추종자들과 연관된 극단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고 본다.[18] 로널드 허튼은 그를 "일류 신학자"라고 묘사했다.[19]
신학자 캐롤 해리슨은 펠라기우스가 "인간, 인간의 책임과 자유, 윤리, 그리고 구원의 본질에 대한 서구적 이해에 근본적으로 다른 대안"을 제시했다고 평가했다. 해리슨에 따르면, "펠라기우스주의는 하나님의 정의를 보호하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 본성의 완전성과 완전한 의의 삶을 얻기 위한 인간의 의무, 책임, 능력을 보존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이는 인간의 나약함을 과소평가하고 "신의 은총의 작용을 단지 외부적인 것으로 제시"하는 결과를 낳았다. 학자 레베카 위버는 펠라기우스를 가장 구별하는 것은 "죄나 환경에 의해 변경될 수 없는, 하나님이 주신 무제한적인 선택의 자유에 대한 확신"이라고 평가했다.
1956년, 존 퍼거슨은 펠라기우스가 아우구스티누스보다 더 이단적인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펠라기우스의 잘못이 지나친 강조에 있지만, 그의 철학이 기독교 신앙과 양립할 수 없거나 신약의 관점에서 옹호할 수 없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5. 저작
- De fide Trinitatis libri IIIla ("삼위일체 신앙에 관하여: 3권")
- Eclogarum ex divinis Scripturis liber primusla ("성서 발췌: 1권")
- Commentarii in epistolas S. Paulila ("성 바울 서신 주석")[4]
펠라기우스의 저작 대부분은 반대자들의 인용문을 통해서만 전해진다. 펠라기우스에게 귀속될 수 있는 저작들이 확인된 것은 지난 세기에서야 이루어졌다.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의 『자연과 은총에 관하여』에 인용된 『자연에 관하여』의 일부, 아우구스티누스의 『그리스도의 은총에 관하여』에 인용된 『자유 의지 옹호』, 데메트리아스에게 보낸 편지와 다른 편지들의 단편들, 그리고 교황 조시무스에게 받아들여진 신앙 고백서가 전해진다.[4]
6. 대중문화 속의 펠라기우스
2004년에 제작된 영화 《킹 아서》에는 주인공 아르토리우스(아서 왕)의 정신적인 스승으로 펠라기우스가 등장한다. 영화에서 펠라기우스는 로마에서 살해당한 것으로 설정되어 있으며, 그 죽음을 알게 된 아르토리우스는 로마 제국에 대한 충성을 버리게 된다.
참조
[1]
웹사이트
Pelagius {{!}} Biography, Beliefs, & Facts {{!}} Britannica
https://www.britanni[...]
2021-12-02
[2]
웹사이트
Pelagianism {{!}} Description, History, & Beliefs {{!}} Britannica
https://www.britanni[...]
2021-12-02
[3]
웹사이트
CATHOLIC ENCYCLOPEDIA: Pelagius and Pelagianism
https://www.newadven[...]
2021-12-02
[4]
간행물
Pelagius (fl. c.390–418), theologian
http://www.oxforddnb[...]
Oxford University Press
2012-10-28
[5]
서적
Early Medieval Ireland 400–1200
2013
[6]
문서
Pelagius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11
[7]
서적
Who's Who in Roman Britain and Anglo-Saxon England
Shepheard-Walwyn
[8]
웹사이트
CATHOLIC ENCYCLOPEDIA: Pelagius and Pelagianism
http://www.newadvent[...]
2020-04-14
[9]
웹사이트
Pie_Pelagius_Synod_Lydda_415AD
http://www.seanmulti[...]
2020-04-14
[10]
서적
St. Augustine of Hippo: Life and Controversies
The Westminster Press
1963
[11]
웹사이트
CHURCH FATHERS: Against Two Letters of the Pelagians, Book II (Augustine)
https://www.newadven[...]
2021-12-02
[12]
웹사이트
St. Augustine and Pelagianism {{!}} Stephen N. Filippo {{!}} Ignatius Insight
http://www.ignatiusi[...]
2020-04-14
[13]
문서
A letter from Pelagius
https://epistolae.ct[...]
2021-02-19
[14]
문서
The Dynamics of Grace: Perspectives in Theological Anthropology
The Liturgical Press
1993
[15]
웹사이트
CHURCH FATHERS: Against Two Letters of the Pelagians, Book II (Augustine)
https://www.newadven[...]
[16]
웹사이트
Celestius {{!}} Pelagian theologian {{!}} Britannica
https://www.britanni[...]
2021-12-02
[17]
문서
The Seven Ecumenical Councils: Excursus on Pelagianism
http://www.ccel.org/[...]
[18]
웹사이트
Pelagius
http://americanphilo[...]
2011-10-06
[19]
서적
Pagan Britain
Yale University Press
[20]
웹인용
Pelagius - New World Encyclopedia
https://www.newworld[...]
2020-03-11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