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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 심씨 문정공파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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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풍산 심씨 문정공파 묘역은 조선 중기의 문신 심정, 그의 아들 심사손, 심사순, 손자 심수경 등 풍산 심씨 가문의 묘 60여 기가 조성된 묘역이다. 심정은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에 녹훈되었으며, 기묘사화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으나 신묘삼간으로 지목되어 죽음을 맞았다. 심사손은 비변사 낭관으로 야인 정벌에 공을 세웠고, 심수경은 대사헌과 8도관찰사를 역임하고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삼도체찰사로 의병을 모집했다. 이 묘역은 조선 중기 묘제 및 석조 미술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으며, 심정, 심사순, 심사손과 부인, 심수경과 부인의 묘, 묘비, 상석, 문무인석, 신도비 등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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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 심씨 문정공파 묘역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묘역 정보
2017년 9월 풍산 심씨 문정공파 묘역 사진
2017년 9월
이름풍산 심씨 문정공파 묘역
한자 표기豊山 沈氏 文靖公派 墓域
국가대한민국
위치서울특별시 강서구 방화동 산152-5
유형유형문화재
지정번호77
지정일1991년 12월 24일
면적2,584m2
시대알 수 없음 (문서에 명시되지 않음)
소유자알 수 없음 (문서에 명시되지 않음)
참고사항알 수 없음 (문서에 명시되지 않음)
문화재청 ID21,00770000,11
꼬리표서울 방화동

2. 심정 (沈貞)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정지(貞之), 호는 소요정(逍遙亭)이다. 연산군과 중종 대에 걸쳐 활동했으며,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정국공신 3등에 오르기도 했다. 기묘사화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으나, 이후 경빈 박씨와의 관련 사실이 드러나 신묘삼간(辛卯三奸)으로 지목되어 죽음을 맞았다.

2. 1. 생애

심정(沈貞)의 자는 정지(貞之), 호는 소요정(逍遙亭)이며, 아버지는 적개공신(敵愾功臣)이었던 심응(沈膺)이다. 연산군 1년(1495) 생원시에 합격하고, 1502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이듬해 수찬이 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에 가담, 정국공신 3등에 녹훈되고 화천군(花川君)에 책봉되었다. 이듬해 지중추부사로서 사은사(謝恩使)에 임명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중종 4년(1509) 성천부사 등의 외직을 거쳐, 1515년 이조판서까지 승진하였으나 삼사(三司)의 탄핵으로 물러났다.

1518년에 다시 형조판서 물망에 올랐으나 조광조 등 사림의 반대로 임명되지 못하였다. 1519년 조광조 등이 위훈삭제(僞勳削除)를 요구하여 반정공신들로부터 심한 반발을 받게 되자, 경빈 박씨를 통하여 조씨전국(趙氏專國)의 말을 궁중에 퍼뜨리고 남곤․홍경주 등과 모의, 왕을 움직여 기묘사화를 일으켜 결국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경빈 박씨의 동궁저주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그와의 관련 사실이 드러나게 되어, 강서로 귀양갔다가 이항․김극핍과 함께 신묘삼간(辛卯三奸)으로 지목되어 죽음을 당하였다. 그는 형제간에 우의가 지극하여 곤경에 처한 동생 심의(沈義)를 끝까지 보살펴주었다고 하며, 교묘한 꾀를 잘 내어 지혜주머니[智囊]로 불렸다고 한다.

2. 2. 평가

형제간에 우애가 깊었다고 전해진다. 교묘한 꾀를 잘 내어 '지혜주머니[智囊]'로 불렸다. 신묘삼간(辛卯三奸)으로 지목되어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

3. 심사손 (沈思遜)

심정의 아들로, 자는 양경(讓卿)이다.

3. 1. 생애

심사손은 중종 8년(1513) 사마시에 합격하고, 1517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승문원을 거쳐 예문관에 들어가 사관(史官)으로 오래 근무하였다. 1523년 비변사 낭관으로 서북면의 야인 정벌에 공을 세웠고, 예조좌랑, 사간원 정언을 거쳐 병조정랑이 되어서는 군무에 숙달함을 인정받아 중요한 일은 도맡아 처리하였다. 홍문관에 들어가 수찬, 응교를 지내고, 1525년 경상우도어사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 전한(典翰), 직제학을 역임하였다. 1528년 36세의 나이에 서북 변경의 야인들의 준동이 다시 심해지자 만포진첨절제사가 되어 변방 방어에 정력을 쏟다가, 야인의 기습을 받고 살해되었다.

4. 심사순 (沈思順)

심사순은 심정의 아들이다.[1]

4. 1. 묘

심사순의 묘는 풍산 심씨 문정공파 묘역에 위치해 있다.[1]

5. 심수경 (沈守慶)

심수경(沈守慶, 1516~1599)은 심사손의 아들이며, 자는 희안(希安), 호는 청천당(聽天堂)이다.[1]

5. 1. 생애

심수경은 자가 희안(希安), 호는 청천당(聽天堂)이며 아버지는 심사손이다. 명종 1년(1546)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1552년 검상(檢詳)을 거쳐 직제학을 지냈다.[1] 1562년 중종의 능을 옮길 때 경기도관찰사로서 큰 상여가 한강을 건너는 선창(船艙)을 설치하지 않아 파직되었다.[1] 이후 대사헌과 8도 관찰사를 역임하였으며,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다.[1] 선조 23년(1590년) 우의정에 오르고 기로소에 들어갔다.[1]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도체찰사가 되어 의병을 모집하였으며, 이듬해 영중추부사가 되었다가 1598년 벼슬에서 물러났다.[1] 문장과 서예에도 능하였으며, 저서로는 ≪청천당시집≫․≪청천당유한록≫이 있다.[1]

5. 2. 저서

청천당시집·청천당유한록

5. 3. 평가

심수경은 문장과 서예에 능했으며, 저서로는 ≪청천당시집≫, ≪청천당유한록≫이 있다.[1]

6. 풍산 심씨 문정공파 묘역

'''풍산 심씨 문정공파 묘역'''은 조선 중기의 문신 심정의 묘를 비롯하여, 그의 아들 심사손, 심사순, 손자 심수경 등 풍산 심씨 가문의 묘 60여 기가 함께 조성되어 있는 곳이다.

심정은 자가 정지(貞之), 호는 소요정(逍遙亭)이며, 아버지는 적개공신(敵愾功臣)이었던 심응이다. 연산군 1년(1495) 생원시에 합격하고, 1502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이듬해 수찬이 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 3등에 녹훈되고 화천군(花川君)에 책봉되었다. 이듬해 지중추부사로서 사은사(謝恩使)에 임명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중종 4년(1509) 성천부사 등의 외직을 거쳐, 1515년 이조판서까지 승진하였으나 삼사(三司)의 탄핵으로 물러났다. 1518년에 형조판서 물망에 올랐으나 조광조 등 사림의 반대로 임명되지 못하였다. 1519년 조광조 등이 위훈삭제(僞勳削除)를 요구하자, 경빈 박씨를 통하여 조씨전국(趙氏專國)의 말을 궁중에 퍼뜨리고 남곤, 홍경주 등과 모의, 왕을 움직여 기묘사화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경빈 박씨의 동궁저주사건에 연루되어 강서로 귀양갔다가 이항, 김극핍과 함께 신묘삼간(辛卯三奸)으로 지목되어 죽음을 당하였다. 그는 형제간에 우애가 지극하여 곤경에 처한 동생 심의를 끝까지 보살펴주었다고 하며, 교묘한 꾀를 잘 내어 지혜주머니[智囊]로 불렸다고 한다.

심사손심정의 아들로, 자는 양경(讓卿)이며, 중종 8년(1513) 사마시에 합격하고, 1517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을 거쳐 예문관에 들어가 사관(史官)으로 오래 근무하였다. 1523년 비변사 낭관으로 서북면의 야인정벌에 공을 세우고, 예조좌랑·사간원정언을 거쳐 병조정랑이 되었다. 홍문관에서 수찬·응교를 지내고, 1525년 경상우도어사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 전한(典翰)·직제학을 역임하였다. 1528년 36세의 나이에 서북 변경의 야인들의 준동이 다시 심해지자 만포진첨절제사가 되어 변방 방어에 힘쓰다가, 야인의 기습을 받고 살해되었다.

심수경심사손의 아들이며, 자는 희안(希安), 호는 청천당(聽天堂)이다. 명종 1년(1546)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1552년 검상(檢詳)을 거쳐 직제학을 지냈다. 1562년 중종의 능을 옮길 때 경기관찰사로서 큰 상여가 한강을 건너는 선창(船艙)을 설치하지 않아 파직되었다. 뒤에 대사헌과 8도관찰사를 역임하였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선조 23년(1590) 우의정에 오르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도체찰사가 되어 의병을 모집하였으며, 이듬해 영중추부사가 되었다가 1598년 벼슬에서 물러났다. 문장과 서예에도 능하였으며, 저서로는 ≪청천당시집(聽天堂詩集)≫·≪청천당유한록(聽天堂遺閑錄)≫이 있다.

6. 1. 문화재



묘역에서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심정의 묘 1기, 심사순의 묘 1기, 심사손과 부인의 묘 2기, 심수경과 부인의 묘 2기와 묘비 5기, 상석 4기, 문무인석 4기, 신도비 1기 등이다. 조선 중기의 묘제 연구와 석조미술 연구에 기여할 수 있는 대표적인 예로 크게 주목되고 있다.

6. 2. 의의

풍산 심씨 문정공파 묘역은 조선 중기 묘제 연구와 석조 미술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묘역에는 심정, 심사순, 심사손과 부인, 심수경과 부인의 묘 2기, 묘비 5기, 상석 4기, 문무인석 4기, 신도비 1기 등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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