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피에르 푸자드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피에르 푸자드는 프랑스의 정치인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필리프 페탱의 국가 혁명을 지지하고 자유 프랑스군에 합류했다. 전후에는 서점과 문구점을 운영하며 소시민으로 살다가, 1953년 세금 저항 운동을 시작하여 '상인 및 장인 방어 연합'(UDCA)을 창설하고, 이 운동은 '푸자드주의'로 불리며 프랑스 제4공화국 말기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푸자드주의는 소규모 사업체의 경제적 이익과 불만을 대변하며, 반의회주의, 반지성주의, 외국인 혐오, 반유대주의적 성향을 보였다. 1956년 총선에서 UDCA는 52석을 얻었으나, 샤를 드골의 제5공화국 수립 이후 쇠퇴했다. 현대에는 조세 저항, 포퓰리즘적 성향을 보이는 정치 운동과 비교되기도 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로트주 출신 - 프랑수아즈 사강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프랑수아즈 사강은 데뷔작 『슬픔이여 안녕』으로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자유분방한 삶과 세련된 문체로 20세기 후반 프랑스 문학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 로트주 출신 - 장바티스트 베시에르
    장바티스트 베시에는 프랑스 혁명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에서 활약하고 나폴레옹 1세에 의해 프랑스 원수로 임명된 군인으로, 나폴레옹의 신임을 얻어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웠으나 독립적인 지휘 능력은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뤼첸 전투 직전 전사했다.
  • 프랑스의 보수주의 - 샤를 드골
    샤를 드골은 프랑스의 장군이자 정치가로서, 제2차 세계 대전 중 자유 프랑스 운동을 이끌고 전후 제5공화국 초대 대통령을 역임하며 프랑스 해방과 재건에 기여했으나, 독단적인 성격과 국수주의적 경향으로 논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 프랑스의 보수주의 - 샤를 모라스
    샤를 모라스는 프랑스의 정치 이론가이자 작가로, 반근대주의와 민족주의 사상을 주창하며 액시옹 프랑세즈를 통해 오를레앙 왕조 부활, 반유대주의, 대독 강경 노선을 선전하다가 비시 정권에 협력하여 옥중에서 사망했다.
  • 프랑스의 정치인 - 샤를 드골
    샤를 드골은 프랑스의 장군이자 정치가로서, 제2차 세계 대전 중 자유 프랑스 운동을 이끌고 전후 제5공화국 초대 대통령을 역임하며 프랑스 해방과 재건에 기여했으나, 독단적인 성격과 국수주의적 경향으로 논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 프랑스의 정치인 - 에두아르 에리오
    에두아르 에리오는 프랑스의 급진사회당 정치인으로, 리옹 시장과 세 차례의 총리를 역임하며 초기에는 독일과의 협력, 소비에트 연방과의 외교 관계 강화를 추구했고, 인민전선에 참여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 비시 정권의 협력 제안을 거부하고 제4공화국에서 국민의회 의장을 맡기도 했다.
피에르 푸자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피에르 푸자드
출생일1920년 12월 1일
출생지생세레, 프랑스
사망일2003년 8월 27일 (향년 82세)
사망지라 바스티드 레베크, 프랑스
국적프랑스
배우자이베트 세바
자녀5명
직업
직업정치인
경력
정당푸자드주의

2. 생애

피에르 푸자드는 프랑스 생세레에서 태어났으며, 로마 가톨릭 사립학교인 오리약의 생-외젠 칼리지에서 공부했다.[1] 건축가였던 아버지의 1928년 사망 이후, 그는 학비를 낼 수 없어 학교를 그만두고 육체 노동자로 일했다.[1] 십 대 시절 푸자드는 자크 도리오의 프랑스 인민당(PPF)에 가입했다.[1]

1940년부터 1942년까지 푸자드는 필리프 페탱의 국가 혁명을 지지했다.[1] 독일군에 의한 자유 구역 침공 이후, 그는 알제에서 자유 프랑스군에 합류했고, 그곳에서 훗날 아내가 된 이베트 세바를 만나 다섯 자녀를 두었다.[1]

전쟁이 끝난 후, 푸자드는 고향으로 돌아와 서점과 문구점을 운영하며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았다.[1]

2. 1. 초기 생애

피에르 푸자드는 프랑스 생세레에서 태어났으며, 로마 가톨릭 사립학교인 오리약의 생-외젠 칼리지에서 공부했다.[1] 건축가였던 아버지의 1928년 사망 이후, 그는 학비를 낼 수 없어 학교를 그만두고 육체 노동자로 일했다.[1] 십 대 시절 푸자드는 자크 도리오의 프랑스 인민당(PPF)에 가입했다.[1]

2. 2. 제2차 세계 대전

피에르 푸자드는 1940년부터 1942년까지 필리프 페탱의 국가 혁명을 지지했다.[1] 독일군에 의한 자유 구역 침공 이후, 그는 알제에서 자유 프랑스군에 합류했고, 그곳에서 훗날 아내가 된 이베트 세바를 만나 다섯 자녀를 두었다.[1]

2. 3. 전후 활동

전쟁이 끝난 후, 푸자드는 고향으로 돌아와 서점과 문구점을 운영하며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았다.[1]

3. 푸자드주의의 등장과 발전

단체 로고


피에르 푸자드는 전쟁 후 서점 및 문구점을 소유했다.[2] 1953년 7월 23일, 푸자드는 약 20명의 사람들과 함께 세무 조사관들이 다른 상인의 소득을 확인하는 것을 막았다. 이는 처음에는 로 데파르트망에서 시작하여 아베롱 데파르트망, 그리고 마침내 중앙 산괴 남부 전체로 확산된 상인들의 세금 저항 운동의 시작이었다.[2]

1953년 11월 29일, 피에르 푸자드는 세금 시위자들을 조직하기 위해 ''상인 및 장인 방어 연합''(UDCA; Union de Défense des Commerçants et Artisans)을 창설했다. 이 운동은 곧 "'''푸자드주의'''"(프랑스어: ''Poujadisme'')라고 불리게 되었다.[2] 푸자드주의는 제4공화국 말년에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으며, 경제적, 사회적 변화에 직면한 상인 및 기타 소규모 사업체의 소유주-경영자의 경제적 이익과 불만을 분명히 드러냈다. 푸자드주의의 주요 주제는 엘리트에 맞선 평민의 방어에 관한 것이었다.[2]

푸자드주의는 앙투안 피네 재무 장관이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부과한 소득세와 가격 통제에 대한 항의 외에도, 산업화, 도시화, 그리고 프랑스 농촌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것으로 인식된 미국식 현대화 이론에 반대했다.[3] 푸자드주의는 프랑스 국가를 "rapetout et inhumain" ("도둑질하고 비인간적")이라고 비난했다.

이 운동의 "평민" 포퓰리즘은 반의회주의로 이어졌고 (푸자드는 국민 의회를 "파리에서 가장 큰 사창가"라고 불렀으며, 의원들을 "쓰레기 더미"와 "소아성애자"라고 불렀다), 강력한 반지성주의로 이어졌다 (푸자드는 에콜 폴리테크니크 졸업생들을 1950년대 프랑스의 고난의 주요 원인으로 비난하고, 자신이 책을 통해 배운 것이 없다고 자랑했다), 외국인 혐오증, 그리고 특히 유대인 총리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를 겨냥한 반유대주의로 이어졌으며, 푸자드는 "망데스는 그의 이름에 단어가 추가된 것처럼 프랑스인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망데스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상실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다.[4] 푸자드주의는 또한 프랑스령 알제리의 대의를 지지했다.[5]

3. 1. 상인 및 장인 방어 연합 (UDCA)

피에르 푸자드는 전쟁 후 서점 및 문구점을 소유했다.[2] 1953년 7월 23일, 푸자드는 세무 조사관들이 다른 상인의 소득을 확인하는 것을 막으면서 세금 저항 운동을 시작했다.[2] 이는 로 데파르트망에서 시작하여 아베롱 데파르트망, 그리고 중앙 산괴 남부 전체로 확산되었다.[2]

1953년 11월 29일, 푸자드는 세금 시위자들을 조직하기 위해 '''상인 및 장인 방어 연합'''(UDCA; Union de Défense des Commerçants et Artisans)을 창설했다.[2] 이 운동은 "'''푸자드주의'''"(프랑스어: ''Poujadisme'')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제4공화국 말년에 경제적, 사회적 변화에 직면한 소규모 사업체 소유주-경영자의 경제적 이익과 불만을 대변했다.[2] 푸자드주의는 엘리트에 맞선 평민의 방어를 주요 주제로 삼았다.[2]

푸자드주의는 앙투안 피네 재무 장관의 소득세 및 가격 통제에 대한 항의 외에도, 산업화, 도시화, 미국식 현대화 이론에 반대했다.[3] 프랑스 국가를 "도둑질하고 비인간적"이라고 비난했다.

이 운동의 "평민" 포퓰리즘은 반의회주의(푸자드는 국민 의회를 "파리에서 가장 큰 사창가"라고 불렀으며, 의원들을 "쓰레기 더미"와 "소아성애자"라고 불렀다), 반지성주의, 외국인 혐오증, 반유대주의로 이어졌다.[4] 특히 유대인 총리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를 겨냥하여 "망데스는 그의 이름에 단어가 추가된 것처럼 프랑스인일 뿐"이라고 주장했다.[4]

1955년, UDCA는 40만 명의 회원을 확보했으며, 지지자들은 세금에 항의하고 국영 은행에서 예금을 인출하도록 권장되었다. 이 운동은 프랑스 정치 체제를 재건하기 위해 새로운 신분회를 소집할 것을 요구했고, 신문 ''프라테르니테 프랑세즈''(Fraternité Française)를 발행했다.

UDCA는 1956년 선거에서 52석을 확보했다.[5] 장마리 르 펜은 UDCA 청년 지부의 지도자로 최연소 국회의원이었다. 푸자드는 알제리 탈식민지화와 유럽 방위 공동체에 대해 비판적이었다.[7] 알제리 전쟁에 대한 지지를 정당화하기 위해, 푸자드는 1956년 ''타임''지에 "거대한 월 스트리트 신디케이트"가 사하라 사막유전을 발견하고도 이를 이용하지 않고 알제리인들을 프랑스에 대항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하며, 이는 프랑스를 해체하려는 계획의 일부라고 말했다.[2]

샤를 드골 대통령 아래에서 프랑스 제5공화국이 1958년에 수립된 후, 푸자드와 그의 정당은 대체로 잊혀졌다.[8]

3. 2. 푸자드주의의 이념



'''푸자드주의'''(프랑스어: ''Poujadisme'')는 제4공화국 말년에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정치 운동으로, 엘리트에 맞선 평민의 이익을 옹호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였다.[2] 1953년 11월 29일, 피에르 푸자드가 창설한 ''상인 및 장인 방어 연합''(UDCA; Union de Défense des Commerçants et Artisans)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2]

푸자드주의는 경제적, 사회적 변화에 직면한 상인 및 기타 소규모 사업체의 소유주-경영자의 경제적 이익과 불만을 대변했다.[2] 앙투안 피네 재무 장관의 소득세 및 가격 통제 정책에 대한 반발,[3] 그리고 산업화, 도시화, 미국식 현대화 이론 등 프랑스 농촌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요인에 대한 저항을 주요 동력으로 삼았다.[3] 프랑스 국가를 "rapetout et inhumain" ("도둑질하고 비인간적")이라고 비난하며 중앙집권적 관료주의와 과도한 세금에 대한 반대를 표명했다.

이러한 "평민" 중심의 포퓰리즘은 반의회주의적 성격을 띠었으며, 푸자드는 국민 의회를 "파리에서 가장 큰 사창가"라고 폄하하고 의원들을 "쓰레기 더미"와 "소아성애자"라고 맹비난했다.[4] 또한, 에콜 폴리테크니크 졸업생들을 1950년대 프랑스 문제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하는 등 강력한 반지성주의를 드러냈고, 자신이 책을 통해 배운 것이 없다고 자랑하기도 했다.[4] 외국인 혐오증과 더불어, 특히 유대인 총리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를 겨냥한 반유대주의적 주장을 펼쳤는데, 푸자드는 "망데스는 그의 이름에 단어가 추가된 것처럼 프랑스인일 뿐"이라고 주장하며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상실의 책임을 그에게 돌렸다.[4] 이외에도 프랑스령 알제리의 독립을 지지했다.[5]

3. 3. 정치적 영향력

1955년, UDCA는 40만 명의 회원을 둔 강력한 정치 운동으로, 세금 항의와 국영 은행 예금 인출을 권장했다.[5] 이들은 프랑스 정치 체제 재건을 위해 새로운 신분회 소집을 요구했고, ''프라테르니테 프랑세즈''라는 신문을 발행했다.

1956년 선거에서 UDCA는 52석을 확보하는 돌풍을 일으켰다.[5] ''더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The Saturday Evening Post)''는 "전문가들은 그가 6~8석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라고 썼다.[6] 당시 최연소 국회의원은 UDCA 청년 지부 지도자였던 장마리 르 펜이었다.[5] 푸자드는 알제리 탈식민지화와 유럽 방위 공동체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7]

푸자드는 알제리 전쟁 지지를 정당화하며 1956년 ''타임''지에 "거대한 월 스트리트 신디케이트가 사하라 사막에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풍부한 유전을 발견했지만, 그 발견을 이용하는 대신 유정을 막고 알제리인들을 우리에게 대항하게 만들었다... 이 모든 것은 프랑스를 해체하려는 엄청난 악마적인 계획이다."라고 주장하며, 반대자들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라고 말하며 여비까지 지불하겠다고 하는등 극단적이고 배타적인 민족주의적, 반유대주의적 언행을 보였다.[2]

샤를 드골 대통령 아래 프랑스 제5공화국이 수립된 1958년 이후, 푸자드와 그의 정당은 대체로 잊혀졌다.[8] 이후 푸자드는 1965년 대선에서 장 르카뉘에를 지지했고,[8] 1981년[9]과 1988년 대선에서는 프랑수아 미테랑을, 1995년에는 자크 시라크를 지지했다.[8] 1984년, 미테랑은 푸자드를 ''경제사회평의회''(Conseil économique et social)에 임명했으며, 푸자드는 이 직책을 통해 바이오 연료를 홍보했다.[10]

푸자드는 장마리 르 펜과 거리를 두었고, 2002년에는 그를 하원의원으로 만드는 것보다 차라리 자신의 다리를 부러뜨리는 것을 더 선호했을 것이라고 말했다.[11]

4. 푸자드주의 이후

4. 1. 제5공화국과 푸자드의 정치 활동

샤를 드골 대통령 아래에서 프랑스 제5공화국이 1958년에 수립된 후, 푸자드와 그의 정당은 대체로 잊혀졌다.[8] 1965년, 푸자드는 장 르카뉘에를 대통령으로 지지했다.[8]

1981년[9]과 1988년[8] 대선에서 푸자드는 프랑수아 미테랑을 지지했고, 1995년 선거에서는 자크 시라크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8] 1984년, 피에르 푸자드는 미테랑에 의해 ''경제사회평의회''(Conseil économique et social)에 임명되었다. 푸자드는 이 직책을 이용하여 바이오 연료를 홍보했다.[10] 푸자드는 장마리 르 펜과 거리를 두었고, 2002년에는 그를 하원의원으로 만드는 것보다 차라리 자신의 다리를 부러뜨리는 것을 더 선호했을 것이라고 선언했다.[11]

4. 2. 푸자드주의의 유산

UDCA는 영향력을 잃었지만, 푸자드주의의 일부 사상은 현대 프랑스 정치에 남아 있다.[13] 1969년, 제라르 니쿠는 푸자드의 운동과 유사한 조세 저항 운동인 CID-UNATI(''Comité Interprofessionnel de Défense-Union Nationale des Travailleurs Indépendants'')를 시작했다.[13]

최근 푸자드주의적 경향이 강한 정치 단체의 예로는 장마리 르펜의 국민전선(강력한 반조세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 크리스티앙 푸세가 이끄는 ''Comité de Défense des Commerçants et Artisans''(프랑스 상인들이 프랑스 사회 보장세를 피하기 위해 영국에서 사업을 신고하도록 장려), 그리고 ''Union des Contribuables Français''가 있다.[13] 니콜라 미게가 소유한 잡지 ''Le Cri du Contribuable'' 또한 푸자드주의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13]

프랑스에서, ''푸자드주의''는 종종 원래 푸자드주의의 반조세 또는 반지성적 측면이 부재하더라도, 스스로를 "반체제"라고 선언하거나 현재의 프랑스 정치 시스템 또는 정치 계급을 강하게 비판하는 모든 종류의 이데올로기를 비하하는 데 사용된다.

르 몽드 디플로마티크는 1990년대에 ''푸자도-마르크스주의'' 혐의를 받았다.

2012년에 재발행된 1990년 팜플렛에서,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 자신의 분수를 모르는 푸자드주의 여성"을 언급했는데, 이는 아마도 마거릿 대처와 그녀의 평범한 그랜섬 식료품점 딸 출신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14]

2010년 2월, ''뉴욕 타임스''의 논평가 로버트 자레츠키는 미국의 티 파티 운동을 푸자드주의와 비교했다.[15] 2016년 5월 사설에서, ''뉴욕 타임스'' 칼럼니스트 로스 도서트는 도널드 트럼프를 푸자드주의자로 규정했다.[16]

영국의 역사가 티모시 가턴 애쉬는 영국의 유럽 연합 탈퇴 투표에 대해 논의하면서 푸자드를 언급했다. 2016년 6월 ''가디언''에 게재된 글에서 그는 브렉시트에 투표한 일부 사람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 그러한 사람들을 인종차별주의자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들의 우려는 광범위하고 진실하며 무시할 수 없다. 나이젤 파라지와 같은 포퓰리스트 외국인 혐오주의자들은 이러한 감정을 이용해, 그것을 지하의 영국 민족주의와 연결시키고, 승리의 순간에 "진짜 사람들, 평범한 사람들, 괜찮은 사람들"의 승리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것은 조지 오웰의 언어를 푸자드의 목적에 맞게 탈취한 것이다.[17]

5. 평가와 비판

5. 1. 긍정적 평가

5. 2. 부정적 평가

6. 현대적 관점

6. 1. 티 파티 운동과의 비교

미국의 보수주의 운동인 티 파티 운동은 종종 푸자드주의와 비교된다.[15] 두 운동 모두 조세 저항, 정부 개입 반대, 포퓰리즘적 성향 등에서 유사점을 보인다. 1969년, 제라르 니쿠는 푸자드의 운동과 유사한 조세 저항 운동인 CID-UNATI를 시작했다.[13] 최근 푸자드주의적 경향이 강한 정치 단체의 예로는 국민전선(강력한 반조세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 크리스티앙 푸세가 이끄는 ''Comité de Défense des Commerçants et Artisans''(프랑스 상인들이 프랑스 사회 보장세를 피하기 위해 영국에서 사업을 신고하도록 장려), 그리고 ''Union des Contribuables Français''가 있다. 니콜라 미게가 소유한 잡지 ''Le Cri du Contribuable'' 또한 푸자드주의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13]

프랑스에서, ''푸자드주의''는 종종 원래 푸자드주의의 반조세 또는 반지성적 측면이 부재하더라도, 스스로를 "반체제"라고 선언하거나 현재의 프랑스 정치 시스템 또는 정치 계급을 강하게 비판하는 모든 종류의 이데올로기를 비하하는 데 사용된다.

뉴욕 타임스 칼럼니스트 로스 도서트는 도널드 트럼프를 푸자드주의자로 규정했다.[16] 영국의 역사가 티모시 가턴 애쉬는 영국의 유럽 연합 탈퇴 투표에 대해 논의하면서 푸자드를 언급했다.[17]

6. 2. 도널드 트럼프와의 비교

6. 3. 브렉시트와의 연관성

참조

[1] 뉴스 Obituary – Pierre Poujade: Shooting star of a 1950s small traders' revolt https://www.theguard[...] 2016-01-29
[2] 간행물 Foreign News: An Ordinary Frenchman http://www.time.com/[...] 1956-03-19
[3] 웹사이트 23 juillet 1953 : Pierre Poujade lance le poujadisme sur le Lot, l'Aveyron puis la France rurale entière. Remarques sur le mouvement des commerçants et artisans http://www.prs12.com[...] Parti de Gauche: Midi-Pyrénées 2009-07-23
[4] Youtube Video of a speech of Poujade against Mendès-France http://www.dailymoti[...] unknown
[5] 뉴스 Pierre Poujade Dies at 82; Rallied France's Rightists https://www.nytimes.[...] 2016-01-29
[6] editorial France Needs Some Drastic Political Surgery https://archive.org/[...] 2020-03-24
[7] 뉴스 Pierre Poujade, Political campaigner of the French right https://www.independ[...] 2003-08-29
[8] 웹사이트 La mort de Pierre Poujade, précurseur d'un nouveau populisme http://www.droitcons[...] Le Monde 2003-08-28
[9] 웹사이트 Who will vote for Marine le Pen? The issues that could divide the Front National http://www.newstates[...] 2017-04-18
[10] 학술논문 L'alcool carburant et son économie http://www.persee.fr[...] 2016-01-29
[11] 뉴스 Le Pen's ex-mentor regrets rise of 'liar' https://www.theguard[...] 2016-01-29
[12] 웹사이트 " Poujade...il savait parler " https://www.ladepech[...] 2003-08-28
[13] 뉴스 French elections: what is the republican front – and will it head off National Rally? https://www.theguard[...] 2024-07-04
[14] 서적 The Monarchy: A Critique of Britain's Favourite Fetish Vintage Digital 2012-05-29
[15] 뉴스 The Tea Party Last Time https://www.nytimes.[...] 2017-02-19
[16] 뉴스 Make Family Policy Great Again https://www.nytimes.[...] 2017-02-19
[17] 웹사이트 As an English European, this is the biggest defeat of my political life https://www.theguard[...] 2016-06-26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