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오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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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지 오웰(George Orwell, 본명: 에릭 아서 블레어, Eric Arthur Blair, 1903년 6월 25일 ~ 1950년 1월 21일)은 영국의 소설가, 언론인, 비평가이다. 그는 인도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교육받았으며, 버마에서 경찰로 근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작품을 썼다. 1930년대에는 파리와 런던의 빈민 생활을 르포르타주로 묘사했으며,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여 사회주의 사상을 정립했다. 그는 전체주의를 비판하며 민주적 사회주의를 옹호했으며, 대표작으로는 소설 《동물 농장》과 《1984년》이 있다. 오웰은 에세이, 서평, 칼럼 등 다양한 저널리즘 활동을 통해 사회 문제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통찰력을 보여주었으며, 그의 작품은 현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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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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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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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에릭 아서 블레어 |
출생일 | 1903년 6월 25일 |
출생지 | 영국령 인도 벵골 관구 모티하리 |
사망일 | 1950년 1월 21일 |
사망지 | 런던, 잉글랜드 |
안장 장소 | 옥스퍼드셔 서튼 커트니의 모든 성인 교회 |
직업 | 소설가 수필가 언론인 문학 평론가 |
교육 | 이튼 칼리지 |
배우자 | 에일린 오쇼너시 (1936년–1945년 사망) 소니아 브라우넬 (1949년 결혼) |
자녀 | 리처드 블레어 (입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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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정보 | |
필명 | 조지 오웰 |
다른 필명 | 존 프리먼 |
활동 언어 | 영어 |
활동 기간 | 1928년–1949년 |
장르 | 디스토피아 로망 아 클레프 풍자 문학 비평 논쟁 의견 저널리즘 |
주제 | 반파시즘 반스탈린주의 무정부주의 민주사회주의 |
주요 작품 |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1933) 위건 부두로 가는 길 (1937) 카탈로니아 찬가 (1938) 동물 농장 (1945) 1984년 (1949) |
정치 | |
소속 정당 | 독립노동당 (1938년부터) |
기타 | |
영향 | 존 리드 |
데뷔 작품 |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
2. 성장기
1903년 6월 25일, 에릭 아서 블레어는 영국령 인도 벵갈(오늘날 비하르 주)에서 태어났다.[351] 증조부 찰스 블레어는 젠트리 출신으로 토머스 페인 백작의 딸과 결혼하여 자메이카 플랜테이션 농장이 주요 수입원이었다.[352] 할아버지 토머스 리처드 아서 블레어는 성직자였다.[353] 젠트리 신분은 세대를 걸쳐 상속되었으나 재산은 그렇지 못하여 에릭은 자신의 집안을 "상류 중산층의 하층"이라고 표현하였다.[354] 아버지 리처드 월머슬리 블레어는 인도 식민국 공무원이었다.[355]
에릭은 어머니 이다 블레어와 함께 옥스포드셔의 헨리온템즈에 정착하였다. 1907년 아버지가 3개월 간 영국에 온 것을 제외하면,[358] 1912년까지 가족들은 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353] 에릭에게는 마조리라는 누나와 에이브릴이라는 여동생이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전, 가족은 옥스포드셔의 십레이크로 이주하였고, 에릭은 버디컴 집안과 어울렸는데 특히 딸 제신타 버디컴과 친하게 지냈다.[359]
다섯 살 때 헨리온템즈의 수녀원 부속 학교에 입학한 에릭은, 어머니의 형제인 찰스 리무진의 추천으로 이스트서식스에 있는 세인트 시프리언즈 스쿨에 학비 절반의 장학금을 받고 입학하였다.[353] 1911년 세인트 시프리언즈 스쿨에 입학하여 기숙사 생활을 했고, 방학 때만 집에 갔다. 훗날 에릭은 〈정말, 정말 좋았지〉에서 학교가 싫었다고 썼다.[363] 이 학교에서 훗날 작가가 된 시릴 코널리를 만났고, 코널리는 훗날 《호라이즌》의 편집장이 되어 조지 오웰의 여러 에세이를 게재했다.
세인트 시프리언즈 스쿨에 다니는 동안 에릭은 《헨리 앤 사우스 옥스퍼드셔 스탠다드》에 두 편의 시를 발표했다.[364][365] 할로우 스쿨 역사 장학금 시험에서 코널리에 이어 2등을 차지했고, 웰링턴 스쿨과 이튼 스쿨에 장학금을 받을 자격을 얻었다. 1916년 12월까지 세인트 시프리언즈에 남았다.[353]
1917년 1월, 웰링턴 스쿨로 옮겼다가 5월에 이튼 스쿨에서 입학 허가를 받고 이튼으로 옮겼다. 1921년까지 이튼 스쿨에 다녔다. 그는 어린 시절 친구 버디컴에게 웰링턴은 "더럽다"고 말했고, 이튼은 "흥미롭고 행복한 곳"이라고 평가했다.[366] 당시 이튼 스쿨 교장이었던 A. S. F. 고우는 에릭의 진로를 조언해주는 편지를 써 주었다.[353] 에릭은 올더스 헉슬리에게 프랑스어를 배웠고,[367] 스티븐 런시맨과 같은 이들과 교류했다.
이튼에서의 학업 평가는 엇갈렸지만, 〈정말, 정말 좋았지〉에서 에릭은 학교 교육이 암기식 수업이며 계급 차별로 인한 따돌림을 당했다고 비판했다.[369] 이튼을 졸업할 무렵, 에릭의 성적은 좋지 않았다. 로저 마이너스와 함께 대학 잡지를 편집했지만, 대학 진학 선발 시험인 킹스 스콜라를 통과하지 못했고, 부모의 형편 때문에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 이튼에서 싸이릴 코놀리와 같은 친구들을 사귀었고, 코놀리는 훗날 오웰의 에세이 대부분을 출간해주었다.
에릭은 제국주의와 영국의 식민 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을 가지지 못한채, 아버지처럼 식민 관료의 길을 선택했고, 동양에 대한 낭만적인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367]
2. 1. 인도에서의 출생과 영국으로의 귀환
1903년 6월 25일 에릭 아서 블레어는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영국령 인도 벵갈(오늘날 비하르 주)에서 태어났다.[351] 그의 증조부 찰스 블레어는 젠트리 출신으로 토머스 페인 백작의 딸과 결혼하였고, 자메이카의 플랜테이션 농장이 주요 수입원이었다.[352] 그의 할아버지 토머스 리처드 아서 블레어는 성직자였다.[353] 젠트리 신분은 세대를 걸쳐 상속되었으나 재산은 그렇지 못하여 에릭은 자신의 집안을 "상류 중산층의 하층"이라고 표현하였다.[354] 에릭의 아버지인 리처드 월머슬리 블레어는 인도 식민국 공무원으로 근무하고 있었고,[355] 어머니 이다 블레어는 에릭이 두 살이 되던 해 그와 함께 영국으로 돌아왔다.[356]
에릭은 어머니 이다와 함께 옥스포드셔의 헨리온템즈에 정착하였다. 아버지가 3개월 간 영국에 돌아왔던 1907년을 제외하면[358] 1912년까지 가족들은 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353] 에릭에게는 마조리라는 이름의 누나와 에이브릴이라는 이름의 여동생이 있었다. 그의 생가는 비하르 주의 역사 유적으로 지정되었다.[357]
2. 2. 영국에서의 유년 시절과 교육
1903년 6월 25일,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영국령 인도의 벵갈(오늘날 비하르 주)에서 에릭 아서 블레어가 태어났다.[351] 그의 증조부 찰스 블레어는 부유한 젠트리였고, 할아버지 토머스 리처드 아서 블레어는 성직자였다.[353] 에릭의 집안은 상류 중산층에 속했지만, 재산은 많지 않아 스스로 "상류 중산층의 하층"이라고 표현했다.[354]에릭의 아버지 리처드 월머슬리 블레어는 인도 식민지 공무원이었고,[355] 어머니 이다 블레어는 에릭이 두 살 때 영국으로 돌아왔다.[356] 에릭은 어머니와 함께 옥스포드셔의 헨리온템즈에 정착했다. 아버지는 1907년에 3개월, 그리고 1912년에 다시 가족들을 방문했다.[358][353] 에릭에게는 마조리라는 누나와 에이브릴이라는 여동생이 있었다.
에릭은 다섯 살 때 헨리온템즈의 수녀원 부속 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는 프랑스에서 건너온 우르술라 수녀회가 운영하는 로마 가톨릭 계열 학교였다.[360] 어머니는 에릭을 퍼블릭 스쿨에 보내고 싶었지만 학비가 비쌌다. 어머니의 형제인 찰스 리무진의 추천으로 에릭은 이스트서식스에 있는 세인트 시프리언즈 스쿨에 학비 절반의 장학금을 받고 입학하게 되었다.[353] 1911년부터 세인트 시프리언즈 스쿨에서 기숙사 생활을 했고, 방학 때만 집에 돌아갔다. 그는 자신이 "가난한 집안" 출신이라는 것을 곧 알게 되었고,[362] 훗날 〈정말, 정말 좋았지〉라는 회고록에서 학교 생활이 싫었다고 썼다.[363] 이 학교에서 에릭은 훗날 작가가 된 시릴 코널리를 만났고, 코널리는 훗날 《호라이즌》의 편집장이 되어 조지 오웰의 여러 에세이를 게재했다.[17]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가족은 옥스퍼드셔 십레이크로 이사했고, 에릭은 버디컴 집안, 특히 딸 제신타 버디컴과 친해졌다. 제신타와 함께 시를 읽고 쓰며 작가의 꿈을 키웠다.
세인트 시프리언즈 스쿨에 다니는 동안 에릭은 《헨리 앤 사우스 옥스퍼드셔 스탠다드》에 두 편의 시를 발표했다.[364][365] 할로우 스쿨 역사 장학금 시험에서 코널리에 이어 2등을 차지했고, 웰링턴 스쿨과 이튼 스쿨에 장학금을 받을 자격을 얻었다. 하지만 이튼 스쿨 자리가 바로 나지 않아 1916년 12월까지 세인트 시프리언즈에 남았다.[353]

1917년 1월, 에릭은 웰링턴 스쿨로 옮겼다가 5월에 이튼 스쿨에서 입학 허가를 받고 이튼으로 옮겼다. 1921년까지 이튼 스쿨에 다녔다. 그는 어린 시절 친구 버디컴에게 웰링턴은 "더럽다"고 말했고, 이튼은 "흥미롭고 행복한 곳"이라고 평가했다.[366] 당시 이튼 스쿨 교장이었던 A. S. F. 고우는 에릭의 진로를 조언해주는 편지를 써 주었다.[353] 에릭은 올더스 헉슬리에게 프랑스어를 배웠고,[367] 스티븐 런시맨과 같은 이들과 교류했다.
이튼에서의 학업 평가는 엇갈렸지만, 〈정말, 정말 좋았지〉에서 에릭은 학교 교육이 암기식 수업이며 계급 차별로 인한 따돌림을 당했다고 비판했다.[369] 그는 스스로를 실패한 인생으로 생각했고, 이러한 감정은 평생 동안 지속되었다.
이튼을 졸업할 무렵, 에릭의 성적은 좋지 않았다. 로저 마이너스와 함께 대학 잡지를 편집했지만, 대학 진학 선발 시험인 킹스 스콜라를 통과하지 못했고, 부모의 형편 때문에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튼에서 싸이릴 코놀리와 같은 친구들을 사귀었고, 코놀리는 훗날 오웰의 에세이 대부분을 출간해주었다.
이튼 생활에 분개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에릭은 제국주의와 영국의 식민 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을 가지지 못했다. 그는 아버지처럼 식민 관료의 길을 선택했고, 동양에 대한 낭만적인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367] 에릭의 아버지는 서퍽의 사우스월드에서 퇴임했고, 가족은 에릭이 인도의 제국 경찰이 되기를 희망했다.[370]
2. 3. 제국 경찰 근무와 작가의 길
1922년 영국을 떠나 만달레이의 인도 경찰 훈련소에 입소한 오웰은 5년간 버마의 여러 지역에서 근무했다. 그러나 제국주의의 일익을 담당하는 경찰이라는 직업에 깊은 혐오감을 느낀 그는 1927년 휴가를 얻어 영국으로 돌아와 사표를 제출하고 다시는 버마로 돌아가지 않았다.[374] 1934년에 출판한 소설 『버마 시절』(Burmese Days)에서는 현지인을 멸시하는 영국인의 모습을 인종차별주의자 에리스를 통해 묘사했고, 반자전적 단편 『코끼리를 쏘다』(Shooting an Elephant)와 『교수형』(A Hanging)에서는 대영제국 관리의 시각에서 식민 지배의 허무함과 비인간성을 비판적으로 그렸다.[374]3. 초기 문학 활동
블레어는 소설 《목사의 딸》을 쓰기 시작했다. 소설에서 교사 생활의 경험과 사우스월드에서의 삶을 담았다. 그해 사우스월드에 사는 동안 블레어는 아버지와 함께 공공 농장에서 일했다. 10월, 《목사의 딸》 원고를 무어에게 보냈다.[399] 《목사의 딸》은 교구 목사관이나 여학교의 일상에 대해 사회학적인 분석에 가까운 묘사가 담겨있다. 출간 당시 감상적인 중류계급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훗날 스스로 '어리석은 돈벌이를 목적으로 쓴 창작품'이라고 혹평했지만 판매고는 그의 다른 책들보다 나은 편이었다.
1934년 10월, 블레어는 이모 넬리 리무진이 구해준 일자리를 찾아 런던으로 갔다. 새 직장은 프란시스 웨스트로프와 마이팬위 웨스트로프 부부가 운영하는 중고 서점 '애서가 코너'였고, 시간제 점원으로 일했다. 블레어는 오전에 집필 활동을 하고 오후에는 서점에서 일했다. 이 시기의 경험은 1936년에 출간된 소설 《엽란을 날려라》의 배경이 되었으며,[400] 《서점의 회상》, 《책값 대 담뱃값》, 《좋으면서 나쁜 책》 등의 에세이에서도 회상했다.
1935년 초 블레어는 워윅 맨션을 나와 팔리어맨트힐의 아파트로 옮겼다. 《목사의 딸》은 1935년 3월 11일 출간되었다. 6월에는 《버마 시절》이 출간되었고, 오랜 친구인 사이릴 코널리가 《뉴 스테이트먼》에 서평을 기고하여 블레어는 코널리와 오랜만에 재회하였다. 8월, 켄티쉬 타운의 아파트로 이사하여 마이클 세이어스, 레이너 헤픈스털과 방을 나누어 썼다. 이 인연은 레이너 헤픈스털과 함께 BBC에 근무하는 동안에도 이어졌다.[402] 10월, 룸메이트들이 아파트를 나가자 블레어는 혼자 임차료를 감당해야 했다. 1936년 1월 말 블레어는 서점 일을 그만두었다.
1935년, 오웰은 《엽란을 날려라》를 썼다. 서점 근무 경험과 엘리노어와의 사랑을 소재로 한 이 소설은 재능은 있지만 성공하지 못한 시인 고든 콤스톡을 등장시켜 거의 자신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는 가난이 개인의 자존감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 자세히 묘사하며, 가난 분석가 또는 가난 이론가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의 분석을 시도한다.
3. 1.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에릭 블레어는 1927년 런던으로 거처를 옮겼다.[376] 가족과 안면이 있던 시인 러스 피터가 숙소를 잡아 주었고, 블레어는 그 해 말 노팅힐의 포르토벨로 가에 방을 얻었다.[377] 이 집에는 조지 오웰을 기념하는 블루 플래크가 부착되어 있다.[378] 블레어는 경험을 쌓기 위해 이스트엔드오브런던의 생활상을 살폈다.[379] 그는 스스로 가난한 계층의 사람인양 차려입고서 이스트런던의 라임하우스코스웨이에 있는 하숙집을 빌렸다. 에릭 블레어는 이 시기 겪은 일을 정리하여 1931년 첫 수필 〈스파이크〉를 발표하였다.[380]
1928년 초 그는 파리로 이주하여 노동자들의 밀집 거주 지역이었던 파리 5구의 루두포드페(Rue du Pot-de-Fer)에 자리를 잡았다.[353] 그의 이모 넬리 리무진이 파리에 살고 있어서 필요한 사회적 지원과 경제적 도움을 주었다. 에릭 블레어는 프랑스의 국제 공산당 잡지인 《몽드》에 투고를 하면서 작가로서 보다는 언론인으로서 더 알려지게 되었다.
1929년 2월 에릭 블레어는 중병이 걸려 파리 14구의 코신 병원에 입원하였다. 이 병원은 의대 학생의 교육을 위해 운영되어 무료로 진료를 하였다. 당시의 경험은 1946년에 발표된 〈빈자가 죽는 법〉(How the Poor Die)[384]의 바탕이 되었다. 그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 사이 하숙방에 도둑이 들어 가진 돈을 모두 훔쳤다. 블레어는 생계를 위해 뤼드리볼리 가의 호텔에서 접시를 닦아야 했다.
1932년 여름 학기가 끝나자 블레어는 부모님이 상속받은 재산으로 집을 구입한 사우스월드(Southwold)로 돌아왔다. 1932년 8월 블레어는 그의 실패한 투옥 경험담을 담은 〈유치장〉을 《뉴 아델피》에 기고하였다. 블레어는 다시 교사 생활을 시작했고 그 사이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의 출간을 준비하였다. 그는 가족들이 자신의 부랑자 생활을 알 게 될까 염려되어 새로운 필명을 고심하였다.[394] 블레어는 조지 오웰을 필명으로 선택했는데, 엘리너 자크에게 그 이유를 “부드럽게 들리는 영국 이름”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1933년 1월, 저자를 조지 오웰이라고 밝힌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이 빅토르 골란츠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396] 책은 평판이 좋았고, 뉴욕의 하퍼 앤 브라더스 출판사가 다음 판을 인쇄하였다.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에는 그의 접시닦이 생활, 구빈원에서의 생활 등이 생생하게 묘사되어있다. 첫 번째 저서임에도 불구하고 사회 모순들을 묘사함에 있어 매우 신랄한 필치를 구사하고 있다. 밑바닥 생활을 묘사하는 것 뿐 아니라 그 와중에 런던의 속어와 욕설을 정리해둔다거나 구빈원 시스템의 모순을 치밀하게 폭로하는 등 다층적이면서도 종합적인 글쓰기를 보여주었다. 잭 런던의 《밑바닥 사람들》(1903)로부터 영향받은 작품이다.
3. 2. 《버마 시절》과 《목사의 딸》
블레어는 소설 《목사의 딸》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소설에서 교사 생활의 경험과 사우스월드에서의 삶을 담았다. 그 해 사우스월드에 사는 동안 블레어는 아버지와 함께 공공 농장에서 일했다. 10월, 《목사의 딸》 원고를 무어에게 보냈다. 《목사의 딸》은 교구 목사관이나 여학교의 일상에 대해 사회학적인 분석에 가까운 묘사가 담겨있다. 출간 당시 감상적인 중류계급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훗날 스스로 '어리석은 돈벌이를 목적으로 쓴 창작품'이라고 혹평했지만 판매고는 그의 다른 책들보다 나은 편이었다.1935년 초 블레어는 워윅 맨션을 나와 마블 피어즈가 소개해 준 팔리어맨트힐의 아파트로 옮겼다. 《목사의 딸》은 1935년 3월 11일 출간되었다. 《버마 시절》의 출간을 기다리는 사이, 6월이 되자 《버마 시절》이 출간되었고, 그의 오랜 친구인 사이릴 코널리가 《뉴 스테이트먼》에 서평을 기고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블레어는 코널리를 오랜만에 재회하였다.
3. 3. 《엽란을 날려라》와 서점 점원 시절
블레어는 1934년 10월, 이모 넬리 리무진이 구해준 일자리를 찾아 런던으로 갔다. 새 직장은 프란시스 웨스트로프와 마이팬위 웨스트로프 부부가 운영하는 중고 서점 '애서가 코너'였고, 그는 시간제 점원으로 일했다.[399] 서점 주인 부부는 이모 넬리 리무진과 에스페란토 운동을 통해 알게 된 사이였다. 블레어는 서점 주인들과 친하게 지냈고, 폰드 가의 워윅 맨션이라는 편안한 하숙집에서 지낼 수 있었다. 함께 일하던 존 킴체는 언론인이자 역사가였으며, 훗날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블레어와 바르셀로나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399] 서점을 운영하던 웨스트로프와 킴체는 모두 노동당에서 분당한 독립노동당 당원이었지만, 블레어는 정치 활동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블레어는 오전에 집필 활동을 하고 오후에는 서점에서 일했다. 이 시기의 경험은 1936년에 출간된 소설 《엽란을 날려라》의 배경이 되었으며,[400] 《서점의 회상》, 《책값 대 담뱃값》, 《좋으면서 나쁜 책》 등의 에세이에서도 이 시기를 회상했다. 또한, 오웰은 시 창작에도 힘을 쏟아 《아델피》에 발표하여 좋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1935년에 오웰은 《엽란을 날려라》를 썼다. 이 소설은 서점에서의 근무 경험과 엘리노어와의 사랑을 소재로, 재능은 있지만 성공하지 못한 시인 고든 콤스톡을 등장시켜 거의 자신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는 가난이 개인의 자존감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 자세히 묘사하며, 가난 분석가 또는 가난 이론가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의 분석을 시도한다. 오웰은 잘 팔리는 작가가 아니었고 항상 가난에 시달렸으며, 이후 《동물농장》이 국제적인 성공을 거둔 후에야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엽란을 날려라》-《위건 부두로 가는 길》은 가난에 대한 그의 깊은 관심을 보여준다.
4.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과 참여
1930년대 중반, 조지 오웰은 경제 불황으로 어려움을 겪던 북잉글랜드 지역의 사회상을 조사하라는 의뢰를 받았다. 그는 위건, 반즐리, 셰필드 등지를 돌아다니며 탄광 노동자들의 열악한 생활상을 직접 목격하고, 이를 바탕으로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을 출간했다.[405][406][409] 이 책에서 오웰은 자신이 사회주의자가 되어가는 과정을 밝히면서, 당시 사회주의 지식인들의 교조적인 태도와 소련 숭배를 비판하고, 파시즘의 부상을 경계했다.[410][414]
1936년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오웰은 공화파를 지지하며 참전했다. 마르크스주의 통일노동자당(POUM)의 민병대에 합류한 그는 카탈루냐 지방에서 노동자들이 주도하는 혁명적 분위기에 희망을 품었지만,[422] 공화파 내부의 갈등과 바르셀로나 5월 사건을 겪으며 환멸을 느끼기도 했다.[425][427] 전투 중 목에 총상을 입고 트로츠키파로 몰려 스페인을 탈출한[429] 오웰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카탈로니아 찬가》를 집필했다.[431] 이 책은 전쟁의 참상과 스페인 인민에 대한 애정을 담은 르포 문학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432]
4. 1. 《위건 부두로 가는 길》

1936년 초, 빅토르 골란츠는 오웰에게 경제 불황에 빠진 북잉글랜드의 사회상을 조사해 달라는 의뢰를 하였다.[403] 그보다 2년 전 존 보인턴 프리스틀리는 잉글랜드 북부 트렌트강 유역에 대한 르포를 출간하여 유명세를 탔었다. 골란츠는 민중의 생활상을 알리면 정부의 태도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으리라 여겼다.[404]
1931년 1월 31일 오웰은 맨체스터에 도착했다. 이후 3월까지 위건, 반즐리, 셰필드 등지를 옮겨 다니며 생활했다.[405] 조지 오웰은 1월 31일부터 3월 25일까지 일기를 썼고, 이는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의 토대가 되었다.[406]
1937년 골란츠는 자신이 주도하던 좌파 북클럽(Left Book Club)을 위해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을 출간하였다.[409] 오웰은 책의 1부 〈탄광지대 노동자의 밑바닥 생활〉에서 랭커셔와 요크셔의 광산 노동자 생활상을 포함한 취재 결과를 서술하였다. 2부 〈민주적 사회주의와 그 적들〉에서는 자신이 어떻게 사회주의자가 되어가고 있는가를 말하면서, 사회주의의 목표를 위해서 "오만하고 따분한" 사회주의 지식인과 행동 이데올로기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자가 어떻게 사회주의 운동의 장애물이 되고 있는 지를 비판하였다. 오웰은 사회주의자로서 사회주의를 보호하기 위해 "악마의 대변인"을 자처하였다.[410]
당시 영국의 좌파 지식인들은 노동운동보다는 공산당에 매몰되는 친소경향을 보였고, 일부 보수파들은 나치가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아줄 것이라는 순진한 기대를 하기도 했다. 특히 좌파 지식인들은 오웰이 나치와 스탈린을 모두 전체주의로 평가하는 것을 소련의 중앙유럽 '진출'과 나치의 '침략'을 혼동한다고 비판하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오웰의 현실 인식이 관념적이지 않고 정확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 스페인 내전에 참가하는 그의 행동에서 민중 중심적인 아나키즘이 드러났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오웰은 탁월한 현실 인식 능력을 가진 반권력 작가였다.
《위건 부두로 가는 길》에서 오웰은 북부의 석탄이 북부 사람들을 착취하여 남부에 부를 가져다주는 현실을 서술하였다. 또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마르크스주의를 비판 없이 맹신하는 교조적인 태도로 민중과 동료들을 비판하는 것을 지적하며, 그들의 맹목적인 소련 숭배를 비판한다. 조지 오웰은 직접 탄광의 막장으로 들어가 노동 현장을 보고, 함께 생활하며 그들의 삶을 목격하였다.
옥스퍼드 대학의 존 스티븐슨은 이 책을 “실업을 다룬 세미다큐멘터리의 위대한 고전”이라고 평가하였다.[412] 조지 오웰은 사회주의자들이 소련을 지나치게 숭배하면서 교조주의적 사고를 보이지만, 행동에서는 중산층의 태도를 고집하는 것이 사회주의가 대중적 지지를 잃게 되는 원인이라고 지적하며 당시 부상하고 있던 파시즘을 경계하였다.[414]
《위건 부두로 가는 길》에서 오웰은 위건의 탄광 노동자에 대한 묘사로 시작하여, 결국 계급 차이를 극복하고 전면적인 반파시즘 연대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 책의 원고를 넘긴 직후, 이를 실천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건너가게 된다.
4. 2. 스페인 내전 참전과 《카탈로니아 찬가》
1936년 겨울, 조지 오웰은 스페인 내전에 공화파를 지지하기 위해 참전했다.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그는 독립노동자당 간부였던 존 맥나이르에게 "파시즘에 대항해 싸우러 왔다"고 말했다.[418] 오웰은 마르크스주의 통일노동자당(POUM)의 레닌 부대에 배속되었는데, 이 부대는 일반적인 군대와 달리 독특한 편성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30명 가량의 반(班)이 기본 조직을 이루고, 100여 명이 모여 센트리아(Centria, 백인부대)를, 여러 센트리아가 모여 가장 큰 단위인 진(陣, Column)을 구성했다.[421]카탈루냐 지방은 공화파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고, 노동자의 나라 같은 분위기였다. 오웰은 이곳에서 인간에 대한 희망을 발견했다.[422] 의용군은 형편없는 장비를 가지고 있었지만, 장교에서 사병까지 누구나 똑같은 대우를 받았다.[423] 오웰은 4개월 이상 전투다운 전투를 하지 못한 채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렸다.[423]
1937년 4월, 오웰은 바르셀로나로 돌아갔지만, 그곳은 혁명적 기운이 사라지고 계급이 다시 형성되는 듯한 분위기였다.[425] 공화파 내부의 갈등은 심해졌고, 1937년 5월에는 바르셀로나 5월 사건이 발생했다.[427] 오웰은 국제 여단 참가를 포기하고 POUM 소속으로 전선에 복귀했지만, 동료들은 프랑코 측에 사로잡히거나 추방당했고, 민병대에는 다시 계급이 생겨 오웰은 소위가 되었다.[428]
전투에 참여한 지 10일 만에 오웰은 목에 총상을 입고 후송되었다. 그는 공산당으로부터 트로츠키파로 의심받았고, 아내와 함께 간신히 스페인을 탈출했다.[429]
오웰은 스페인에서 돌아오자마자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여러 곳에서 거부당했다. 1938년 카탈로니아 찬가는 군소 업체였던 세커앤워버그에서 출판되었으나, 오웰이 사망할 때까지 초판이 다 팔리지 않을 정도로 판매가 부진했다.[431]
《카탈로니아 찬가》는 전쟁의 어리석음과 스페인 인민들에 대한 애정이 담긴 르포문학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오웰은 스페인 내전 당시의 정치 상황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이 사건을 미시적, 거시적 관점으로 바라보게 했다. 역사학자 레이먼드 카는 오웰의 작품이 정치적 편향 없이 사실만을 전달하려 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했다.[432]
1938년 4월, 스페인 내전 경험을 그린 『카탈로니아 찬가』를 출판했다. 그의 생전에 초판 1500부 중 900부가 팔렸다고 한다.
한국어판으로는 『카탈로니아 찬가』(Homage to Catalonia, 1938)는 다음과 같은 판본들이 있다.
- 하시구치 미노루 역, 치쿠마 쇼쇼, 1970년/치쿠마 가쿠게이 분코, 2002년
- 스즈키 타카시·야마우치 아키라 역, 게이다이 시초 신샤, 2008년 (초판 1966년)
- 신죠 테쓰오 역, 하야카와 문고 NF, 1984년
- 다카하타 후미오 역, 각카와 문고, 1984년
- 쓰즈키 츄지치 역, 이와나미 문고, 1992년
5. 제2차 세계 대전과 《동물 농장》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오웰은 국토방위군에 가입하여 파시즘에 대항하였다.[438] 전쟁 기간 동안 《사자와 일각수: 사회주의와 영국의 재능》, 《고래 뱃속에서》와 같은 에세이를 발표하였고, BBC에서 잠시 일하기도 하였다. 1943년부터는 좌파 잡지 《트리뷴》에서 편집자로 일하면서 〈나 좋을 대로〉와 같은 칼럼을 기고하였다.
전쟁 기간 동안 오웰은 아나키즘에 매료되었으며, 전체주의에 대한 혐오감을 키웠다. 이러한 사상은 1944년 2월에 탈고한 《동물 농장》에 반영되었다.[446] 《동물 농장》은 소련과 스탈린을 신랄하게 비유한 작품이었으나,[446] 소련을 비판하는 내용 때문에 출판에 어려움을 겪었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1945년 8월 17일에 출판되었다.
《동물 농장》은 파시즘에 반대하는 내용이었지만, 반공주의 소설로 해석되어 미국에서 널리 읽혔다. 최초의 외국어 번역은 한국어였으며, 1948년 미군정 시기 김길준에 의해 번역되었다.[450] 그러나 한국에서는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보다는 반공주의적 메시지에 초점이 맞춰져 오독되기도 했다.[451]
1944년 오웰과 아일린은 아들을 입양하였으나,[453] 1945년 아일린은 수술 중 사망하였다.[454]
5. 1. 제2차 세계 대전 발발과 전시 활동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오웰의 아내 아일린은 정보성 검열관으로 일하게 되었고, 오웰은 전쟁 복무자로 등록은 하였으나 건강 문제로 일할 수는 없었다.[435] 그는 농사를 지으며 에세이집 《고래 뱃속에서》를 탈고하였고[436], 영화 평론을 쓰며 생계를 유지했다.[437] 오웰은 파시즘에 대항하기 위해 국토방위군에 가입하였다.[438]1941년, 오웰은 에세이 《사자와 일각수: 사회주의와 영국의 재능》을 통해 애국심을 고취하고자 했다.[439] 사자와 일각수는 영국의 왕실 문장에 있는 상징이다.[440] 이 책은 파시즘에 대한 승리를 위해 영국의 고상함을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하여 전쟁 기간 동안 많이 팔렸다.[441] 1941년부터 BBC에서 대 인도 선전 방송을 맡았으나, 전시 검열과 제국주의적 태도로 인해 오래 일하지 못했다. BBC는 오웰의 목소리가 "매력 없다"는 이유로 해고하려 했다.[442] 오웰은 1943년 9월 BBC를 퇴사했다.[443]
1943년 11월, 오웰은 노동당을 지지하는 좌파 잡지 《트리뷴》의 문학 편집자로 일하며 80여 개의 서평을 썼고,[444] 1947년까지 정기 컬럼 〈나 좋을 대로〉(As I Please)를 집필하였다.[445] 이 시기 《동물 농장》을 집필하기 시작했고, 아내의 조언으로 해학적인 면이 많아졌다.[446] 1944년 2월에 탈고된 《동물 농장》은 소련과 스탈린을 신랄하게 비유했다.[446]
1944년 V-1 비행폭탄 폭격으로 집이 불탔지만, 오웰은 당시 아일린의 친정에 있어 화를 면했다.[447] 그는 1944년 6월 30일자 《트리뷴》의 〈나 좋을 대로〉 칼럼에서 비행 폭탄에 대한 경험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 어떤 무기건 그것이 자신에게 겨누어지면 싫기 마련이다. 하지만, 나는 무인 비행기나 비행 폭탄으로 불리는(정확한 이름이 무엇이건) 무기만큼 싫은 것도 없는데, 왜냐하면 다른 무기들과 달리 이것이 날아오는 동안에 생각할 시간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것이 날아오는 찢어지는 굉음을 듣는 순간 당신의 첫번째 반응은 무엇이겠는가? 결국 소음이 멈추지 않기를 그리하여 머리위로 안전하게 지나쳐서 멀리 떨어진 어딘가에서 터지기를 바라게 된다. 달리 말하면, 당신의 바램은 그것이 다른 누군가에게 떨어졌으면 하는 것이다.[448]
《동물 농장》은 출판에 어려움을 겪었고, 영국 정보국의 피터 스몰렛이 오웰의 동향을 묻기도 했다. 훗날 스몰렛은 소련의 스파이였다는 것이 밝혀졌다.[449] 《동물 농장》은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45년 8월 17일에 출판되었다.
《동물 농장》은 반공주의로 읽혀 미국에서 광범위하게 출판되었다. 최초의 외국어 번역은 한국어였는데, 1948년 미군정 공보처 관료였던 김길준이 번역하였다.[450] 한국에서는 반공주의 소설로 오독되기도 했다.[451] 당시 오웰은 아나키즘에 매료되어 있었다.
오웰은 전쟁 기간 중 적은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심정을 드러냈다.
> 우리 시대 보다 더 천박한 도덕과 정서의 사례를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사실 우리는 이제 모두 덜하거나 더하거나 친 스탈린파인 것이다. 이 역겨운 살인자가 뜬금없이 우리 편이 되었고 추방 등등은 갑자기 잊혀졌다.[452]
1944년, 오웰 부부는 아이를 입양하여 리처드 호라리토 블레어라고 이름 지었다.[453] 전쟁이 끝날 무렵 오웰은 《옵저버》 특파원으로 파리와 쾰른에 다녀왔다. 그는 정부의 언론 탄압에 맞서 '자유방어위원회'에서 활동했다.
5. 2. 《동물 농장》 집필과 출간
1944년 2월에 탈고된 《동물 농장》은 소련과 스탈린에 대한 신랄한 비유로 가득 차 있었다.[446] 이 작품은 오웰의 아내 아일린의 여러 조언으로 이전 작품들과 달리 해학적인 면이 많아졌다.골란츠는 소련을 노골적으로 비판한다는 이유로 출판을 거절하였다. 다른 출판사를 알아보던 중 오웰의 집에 V-1 비행폭탄이 떨어져 집이 불탔지만, 다행히 가족들은 화를 면했다.[447] 오웰은 《동물 농장》의 출판을 위해 여러 출판인들과 상의하였으나 반응이 좋지 않았고, 영국 정보국의 피터 스몰렛이 오웰의 동향을 묻기도 하였다. 훗날 스몰렛은 소련의 스파이였다는 것이 밝혀졌다.[449] 오웰은 세커앤워버그와 출판 계약을 하였지만 책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인 1945년 8월 17일이 되어서야 출판되었다.
《동물 농장》은 파시즘에 반대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반공주의로 읽혀 미국에서 광범위하게 출판되었다. 최초의 외국어 번역은 한국어 번역이었는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가장 첨예하게 냉전이 벌어진 지역이 한반도였기 때문이다. 1948년 미군정 공보처 관료였던 김길준이 직접 번역하였다.[450] 조지 오웰은 《동물 농장》에 전체주의 전체에 대한 경멸과 조소를 담았지만, 한국에서는 반공주의로 단순화되어 스탈린 독제에 저항하는 반공소설로 오독되었다.[451] 《동물 농장》은 오늘날에도 종종 반공 동화로 분류되기도 한다.
5. 3. 아일린의 죽음과 전후 활동
제2차 세계 대전 중 아일린은 정보성 검열관으로 일했고, 오웰은 국토방위군에 가입했다.[438] 1941년, 오웰은 BBC에서 대 인도 선전 방송을 맡았으나, 전시 검열과 제국주의적 태도 때문에 오래 일하지 못하고 1943년 9월에 퇴사했다.[442][443]1943년 11월, 오웰은 노동당 지원을 받는 좌파 잡지 《트리뷴》의 문학 편집자로 일하며 80여 개의 서평을 쓰고, 〈나 좋을 대로〉(As I Please)라는 정기 칼럼을 집필했다.[444][445] 이 시기에 《동물 농장》을 집필했는데, 아내 아일린의 조언으로 해학적인 면이 더해졌다.[446] 1944년 2월에 완성된 《동물 농장》은 소련과 스탈린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내용이었다.[446]
1944년 6월 30일, 오웰은 《트리뷴》의 〈나 좋을 대로〉 칼럼에서 자신에게 겨누어진 무기에 대한 두려움과, 그 무기가 다른 사람에게 떨어지기를 바라는 심정에 대해 언급했다.[448] 《동물 농장》은 여러 출판사에서 출판을 거절당했고, 영국 정보국의 피터 스몰렛이 오웰의 동향을 묻기도 했는데, 훗날 스몰렛은 소련 스파이로 밝혀졌다.[449] 결국 《동물 농장》은 전쟁이 끝난 1945년 8월 17일에 출판되었다.
《동물 농장》은 반공주의 소설로 미국에서 널리 출판되었고, 최초의 외국어 번역은 한국어였다. 1948년 미군정 공보처 관료 김길준이 번역한 한국어판은 전체주의에 대한 경고를 담고 있었지만, 한국에서는 반공주의로 단순화되어 스탈린 독재에 저항하는 반공 소설로 오독되었다.[450][451]
1944년, 오웰 부부는 리처드 호라리토 블레어라는 아이를 입양했다.[453] 전쟁이 끝날 무렵, 오웰은 《옵저버》 특파원으로 파리와 쾰른에 다녀왔고, '자유방어위원회'에서 활동하며 언론 탄압에 맞섰다.
1945년 3월, 아일린은 자궁 적출 수술 중 사망했다.[454]
6. 《1984년》과 말년
1946년 이후 말년까지 조지 오웰은 언론인으로서 《트리뷴》, 《옵저버》, 《맨체스터 이브닝 뉴스》 등에 칼럼을 기고하였고,[455] 전쟁 시기 발표하였던 에세이들을 모아 《비판적 에세이》를 발행하였다.[456]
오웰은 삶의 소박한 것들이 박탈된 근미래를 묘사하여 전체주의의 위험성을 경고하였다. 1943년 테헤란 회담을 통해 세계가 초강대국 중심으로 재편될 것을 직감했으며, 1948년에는 이를 "잊히지 않을 소설의 핵심에 각인"하였다고 회상하였다.[461]
6. 1. 《1984년》 집필과 출간
1946년에 스코틀랜드 주라 섬으로 이주한 오웰은 여동생 에이브릴의 도움으로 양아들 리처드를 키우면서 《1984년》을 집필하기 시작했다.[457] 1947년 말에 탈고했지만 폐결핵으로 한동안 요양해야 했다. 정맥류성 궤양을 앓고 있는 소설 속 주인공 윈스턴의 처지는 악화된 폐결핵으로 심신이 지쳐있던 오웰의 상황을 대변한다. 오웰은 '만약 병이 그렇게 심하지만 않았다면 이 소설도 그다지 어둡지 않았을 것'이라고 밝힐 정도로 《1984년》은 그의 저서 가운데 가장 위트가 없는 책이 되었다. 소냐 브라우넬의 이미지는 《1984년》의 줄리아로 표현되었다.[458] 1948년 11월에 최종 탈고한 오웰은 1948의 48을 뒤집어 1984년이라고 제목을 붙였다.[458]《1984년》은 출간 즉시 고전이 되었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오웰은 《1984년》에서 철저한 감시에 놓인 전체주의 사회를 비판하면서, 동시에 전체주의가 어떻게 언어를 통하여 상징을 조작하는지 주목하였다. 그는 책의 부록으로 〈신어의 원리〉를 설명하면서, 나치, 코민테른과 같은 축약어 사용에 대해 경고 하였다. 오웰은 코민테른(Comintern, Communist International)이라는 말에서 떠오르는 것은 엄격히 짜여진 단체, 명백히 정의된 강령체만이 떠오를 뿐이라고 비판하였다.[463]
《1984년》에는 언론인으로 겪은 그의 경험들이 녹아 있다. 예를 들어 101호실은 BBC에서 그가 근무하던 방의 번호에서 따왔다.[460] 또한, 그가 오랫동안 보고 겪었던 전쟁과 이데올로기의 참상에 대한 비판이 이야기 전체를 관통한다. 조지 오웰은 스페인 내전 당시 참전 경험에서 코민테른의 공산주의자들의 교조적 행동이 오히려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파시즘과 같은 전체주의적인 것을 발견하고 《카탈로니아 찬가》를 저술한 바 있다. 오웰은 자신이 겪었던 참호전, 식량 배급에 대한 경험과 스탈린의 강제 노동 수용소, 미국의 핵폭탄 투하 등을 보면서 냉전 세계에 대한 비관적 전망을 책에 담았다.[462]
6. 2. 소냐 브라우넬과의 결혼과 죽음
아일린이 사망한 뒤 오웰은 세 명에게 청혼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그 중에는 모리스 메를로퐁티와 연애를 했던 소냐 브라우넬도 있었다. 1946년 오웰은 주라 섬으로 이주했다.[457] 여동생 에이브릴의 도움으로 양자 리처드를 키우면서 《1984년》을 집필하기 시작했다.[458] 1947년 말에 탈고했지만 폐결핵으로 요양해야 했다. 1948년 11월에 최종 탈고한 오웰은 1948의 48을 뒤집어 1984년이라고 제목을 붙였다.[458]메를로퐁티와 어긋난 소냐는 오웰에게 돌아왔다. 오웰은 다시 폐결핵으로 입원했고 병상에서 1949년 10월에 소냐 브라우넬과 결혼하였다. 소냐의 간호를 받으며 회복되어 작품 활동을 하길 바랐지만 두 달 뒤에 숨을 거두었다.[459] --
7. 오웰 리스트
조지 오웰은 병상에 있을 때 친소주의 작가 명단을 작성하여 정보조사원 셀리아 커원을 통해 영국 정보연구국에 제출하였다.[449] 이 리스트에는 38명의 명단이 적혀 있었고, 영국은 이를 메카시즘 선전 활동에 활용하였다. 오웰 리스트는 54년간 비밀로 묶여 있다가 2003년에 일반에 공개되었다.[464] 오웰 리스트에 오른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실제 소련 KGB에 포섭된 친소파로 밝혀졌다.
오웰 리스트는 후일 격론을 불러일으켰다. 알렉산더 코번은 이를 "당치 않은 고자질"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465] 그러나 명단을 넘겨받은 셀리아 커원은 오웰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라고 옹호하였다.[449]
8. 저서
조지 오웰은 1945년 우화 소설 《동물농장》을 발표하여 처음으로 세속적인 명성과 막대한 수입을 얻었고[337], 1949년에는 대표작 《1984년》을 완성했다.
오웰의 주요 저서는 다음과 같다:
- 《버마의 나날들》(Burmese Days, 1934)
- 《목사의 딸》(A Clergyman's Daughter, 1935)
- 《엽란을 살랑거리게 하라》(Keep the Aspidistra Flying, 1936)
- 《공기를 찾아서》(Coming Up for Air, 1939)
- 《동물농장》(Animal Farm, 1945)
- 《1984년》(Nineteen Eighty-Four, 1949)
그 외 저서로는 오웰 소설 컬렉션(전5권, 정문사, 1984년)이 있다.
- 『파리·런던 밑바닥 생활』(Down and Out in Paris and London)
- 『버마의 나날들』(Burmese Days)
- 『목사의 딸』(A Clergyman's Daughter)
- 『엽란을 살랑거리게 하라』(Keep the Aspidistra Flying)
- 『공기를 찾아서』(Coming Up for Air)
8. 1. 단행본
(원제)Down and Out in Paris and London
김성태 역, 《파리 런던 방랑기》, 서당, 1992년
권자인 역, 《하얀 구름 외길》, 행림각, 1990년
Burmese Days
박경서 역, 《제국은 없다》, 서지원, 2002년
'A Clergymans Daughter''
Keep the Aspidistra Flying
The Road to Wigan Pier
김설자 역, 《위건 부두로 가는 길》, 부북스, 2013년
구세희 역, 《위건 부두로 가는 길》, 청하, 2011년
Homage to Catalonia
김영희, 김정은, 이진숙 역, 《카탈루냐 찬가》, 부북스, 2013년
정효석 역, 《카탈로니아 찬가》, 풀무질, 1995년
김옥수 역, 《카탈루냐 찬가》, 비꽃, 2017년
Coming Up for Air
Inside the Whale
The Lion and the Unicorn
Animal Farm
김길준 역, 《동물농장》, 정산미디어, 1948년(2015년 복간)
박경서 역, 《동물농장》, 열린책들, 2009년
Critical Essays
The English People
Nineteen Eighty-Four
박경서 역, 《1984년》, 열린책들, 2009년
권지아 역, 《1984년》, 을유문화사, 201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