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트로 2세 오르세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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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피에트로 2세 오르세올로는 991년부터 1009년까지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였다. 그는 비잔티움 제국과의 조약을 통해 베네치아 상인들의 콘스탄티노폴리스 통상 특권을 확보하고 아드리아 해 방위를 맡았으며, 신성 로마 제국과의 관계를 통해 정치적 균형을 유지했다. 또한 달마티아를 정벌하고 해적을 소탕하여 아드리아 해의 안전을 확보했으며, 1000년에는 비잔티움 황제로부터 달마티아 공작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승리는 베네치아의 승천 축제의 기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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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트로 2세 오르세올로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피에트로 2세 오르세올로 |
원어 이름 | Pietro II Orseolo |
설명 | 991년부터 1009년까지 베네치아의 도제 |
직책 | |
직위 | 베네치아의 도제 |
재임 시작 | 991년 |
재임 종료 | 1009년 |
이전 | 트리부노 멤모 |
계승 | 오토네 오르세올로 |
가문 | 오르세올로 가 |
개인 정보 | |
출생 | 961년 |
출생지 | 베네치아 |
사망 | 1009년 (48세) |
사망지 | 베네치아, 베네치아 공화국 |
배우자 | 알려진 정보 없음 |
자녀 | 오토네 오르세올로 |
아버지 | 피에트로 1세 오르세올로 |
어머니 | 펠리치아 말리피에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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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그는 961년 피에트로 오르세올로 1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피에트로가 15세 되던 무렵 아버지가 도제로 선출되었으나 불과 2년 만에 사임하였다. 피에트로는 13년 뒤인 991년에 도제로 선출되었다. 그는 해적을 몰아내기 위해 992년 비잔티움 제국의 바실리우스 2세 불가토록누스와 조약을 맺어 비잔티움 영내에서 베네치아인의 자유로운 통상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항하는 베네치아 상선은 입항할 때 2USD를, 출항할 때 15USD를 지불하는 것을 보장받았다. 대신 아드리아 해의 방위를 베네치아가 부담하게 되자 오르세올로 2세는 신성로마제국과 조약을 맺고 996년에 장남 오토 오르세올로의 대부를 황제 오토 3세로 하였다. 998년 그는 자라에서 달마티아 도시들의 보호자가 되었고 해적을 소탕하여 아드리아해에서 몰아내자 1000년 바실리우스 황제는 피에트로 오르세올로 2세를 달마티아 공작으로 임명했다. 오르세올로는 1009년에 사망했고 아들 오토 오르세올로가 후임 도제가 되었다.
991년 피에트로 오르세올로 1세의 아들로 태어난 피에트로 오르세올로 2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로 선출되었다. 그는 해적을 몰아내기 위해 노력하였고, 비잔티움 제국과 신성 로마 제국 양쪽과 조약을 맺으며 베네치아의 세력을 확장했다. 1009년에 사망했고 아들 오토 오르세올로가 후임 도제가 되었다.
3.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
3. 1. 비잔티움 제국과의 관계
그는 992년 비잔티움 제국의 바실리우스 2세 불가토록누스와 조약을 맺어 비잔티움 영내에서 베네치아인의 자유로운 통상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항하는 베네치아 상선은 입항할 때 2솔리두스를, 출항할 때 15솔리두스를 지불하는 것을 보장받았다.[1] 같은 해, 바실 2세와 조약을 맺어 비잔틴 군대를 수송하는 대가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상업 특권을 얻었다.[1]
1000년 바실리우스 황제는 피에트로 오르세올로 2세를 달마티아 공작으로 임명했다.
3. 2. 신성 로마 제국과의 관계
996년 오르세올로 2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3세를 장남 오토 오르세올로의 대부로 정하는 조약을 맺었다.
3. 3. 달마티아 정벌과 해적 소탕
998년 피에트로 2세는 자라에서 달마티아 도시들의 보호자가 되었고, 아드리아해의 해적을 소탕하였다. 1000년 바실리우스 2세 황제는 피에트로 오르세올로 2세를 달마티아 공작으로 임명했다.[3]
1000년 5월 9일, 피에트로 2세는 크로아티아-불가리아 전쟁 기간 동안 크로아티아인과 네렌트인들을 평정하여 베네치아 무역 식민지와 로마화된 달마티아인들의 이익을 보호하기로 결정했다. 6척의 함대로 이루어진 그의 함대는 어렵지 않게 아드리아 해안 동쪽 절반을 초토화시켰으며, 네레트비아인들만이 저항했다. 네레트비아인들이 자다르에서 상품을 훔치고 40명의 상인을 포획한 후, 도제는 10척의 배를 파견하여 카차 섬 근처에서 네레트비아인들을 붙잡았다. 그는 그들을 모두 포획하여 스플리트로 개선했다. 그곳에서 네레트비아 사절들은 포로 석방을 요청했고, 피에트로 2세는 네레트비아 아르콘 자신이 그 앞에서 굴복하겠다는 데 동의하는 조건으로 동의했다. 게다가 네레트비아인들은 948년부터 베네치아가 지불해야 했던 옛 세금을 포기하고, 아드리아 해에서 베네치아 선박의 안전한 통행을 보장해야 했다.
피에트로 2세는 6명의 네렌트인을 인질로 남겨두고 모든 포로를 석방했다. 그리하여 본토 네렌트인들은 평정되었고, 코르출라 시민들은 오르세올로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기로 결정했지만 결국 정복되었다. 하지만 라스토보는 베네치아의 침략에 계속 저항했다. 이 섬은 해적 소굴로 악명이 높았다. 피에트로 2세는 더 이상의 반대를 결정적으로 잠재우기 위해 섬 도시의 철수를 명령했다. 그는 계속되는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라스토보를 초토화시켰다.[3]
4. 가족 관계
피에트로 2세 오르세올로는 피에트로 오르세올로 1세의 아들이다. 그의 아들 오토 오르세올로는 996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오토 3세를 대부로 삼았다.
5. 유산
그의 승리일은 베네치아에서 가장 오래된 축제인 페스타 델라 센사가 되었다. 이는 도제와 올리볼로 주교가 리도를 지나 물을 축복하며 베네치아 해군의 행운을 기원하는 것으로 기념되었다.
참조
[1]
서적
Byzantium: The Apogee
[2]
웹사이트
The dogaressas of Venice : The wives of the doges
https://archive.org/[...]
[3]
서적
The dogaressas of Venice : The wives of the doges
https://archive.org/[...]
T. W. Laurie
[4]
간행물
Orseole s.v. Pietro Orseole II
EB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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