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종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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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목종은 고려 경종과 헌애왕후의 아들로, 성종 사후 즉위했으나 헌애왕후의 섭정을 받았다. 헌애왕후와 김치양의 권력 장악 시도와 동성애로 인한 후사 부재는 목종의 정치적 입지를 약화시켰다. 강조의 정변으로 폐위되어 유배를 가던 중 살해되었으며, 현종이 즉위한 후 '목종'으로 묘호가 정해졌다. 그의 사후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제2차 고려-거란 전쟁이 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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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종 (고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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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목종 (穆宗) |
칭호 | 국왕 |
왕조 | 고려 |
재위 기간 | 997년 11월 29일 - 1009년 3월 2일 |
출생 이름 | 왕송 (王誦) |
자 | 효신(孝伸) |
묘호 | 목종 (穆宗) |
시호 | 효사위혜극영정공선양대왕 (孝思威惠克英定恭宣讓大王) |
능묘 | 의릉 (義陵) |
생애 | |
출생일 | 980년 7월 5일 |
출생 장소 | 고려 개경 정전 |
사망일 | 1009년 3월 2일 (28세) |
사망 장소 | 고려 개성부 적성현 |
다른 이름 | 개령군(開寧君), 양국공(讓國公) |
가족 관계 | |
아버지 | 경종 |
어머니 | 헌애왕후 황보씨 |
배우자 | 선정왕후 유씨 |
후궁 | 요석녀 |
자녀 | 없음 |
즉위 정보 | |
즉위년도 | 997년 |
즉위 장소 | 개경, 고려 |
계승자 | 성종 |
후계자 | 현종 |
기타 정보 | |
매장지 | 공릉 (恭陵) → 의릉 (義陵) |
휘 | 왕송 (王誦) |
2. 생애
경종의 외아들로 태어난 목종(왕송)은, 부왕이 죽었을 때 너무 어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숙부인 성종이 즉위했다.[1] 997년 성종이 죽은 후 왕위에 올랐고, 어머니 헌애왕후가 섭정을 하였다.[1]
목종은 전시과(田柴科) 개혁, 군사 체제 재편, 평양성 재건을 통해 고려의 북방 방어를 강화했다.[2] 그러나 헌애왕후와 그의 연인 김치양이 목종을 몰아내고 그들의 아이를 왕위에 앉히려 했고, 목종은 왕씨(王氏) 고려 지배를 지키기 위해 이를 막으려 했다.[3][2] 목종의 동성애는 그가 후사를 두지 못하는 원인이 되었고, 그의 성 정체성은 결국 폐위의 구실로 사용되었다.[2]
목종은 헌애왕후와 김치양의 쿠데타를 막기 위해 강조 장군을 불렀으나, 강조는 거란 침략에 대한 국가 방어 소홀과 목종의 동성애를 "병"으로 규정하며 목종을 폐위시키고 충주로 유배보냈다.[4][2] 그러나 목종은 충주에 도착하기 전에 살해당했다.[1] 목종의 묘는 ''공릉''(恭陵)으로 알려져 있지만, 현재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2. 1. 즉위 이전
980년 5월 20일, 경종과 헌애왕후 황보씨의 외동 아들로 태어났다. 경종과 헌애왕후는 태조 왕건의 손자녀들로, 서로 사촌지간이다.981년 아버지 경종이 붕어하였으나 당시 목종의 나이가 한살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왕위는 경종의 사촌 동생이자 처남인 성종이 계승하였다.
990년 12월 7일, '''개령군'''(開寧君)으로 책봉되었다.
당시 성종은 아들 없이 딸만 두었는데, 조카인 왕송을 개령군에 봉하여 왕위계승자인 잠룡으로 두고, 993년 경종의 제4비이자 어머니 헌애왕후의 언니인 헌정왕후의 장례에서 감호를 맡기고 발상(發喪)하게 하였다.[9]
2. 2. 즉위 이후
성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목종은 어머니 천추태후의 섭정을 받았다. 천추태후는 김치양과 사통하여 아들을 낳았고, 이 아들을 왕위에 앉히려는 야심을 드러냈다.[1] 이러한 상황에서 목종은 한때 정치에 관심을 잃기도 했다.[10]목종은 치세 초기에 전시과를 개혁하고 군사 체제를 재편하는 등 국가 기틀을 다지는 데 힘썼다.[2] 또한, 평양의 성을 재건하여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는 등 북방 방어 강화에도 노력했다.[2]
2. 2. 1. 숭불 정책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실권을 장악하자, 목종은 한때 정치에 관심을 잃었다. 목종은 용모가 아름다운 유행간(庾行簡)과 동성애 관계를 맺었는데, 유행간은 왕의 총애를 믿고 교만하게 굴면서 문무백관을 마음대로 부려 신하들이 유행간을 왕을 대하듯이 하였다.[10]목종은 승려들을 우대하고 진관사(眞觀寺)를 지어 태후의 원찰로 삼았으며, 이후 숭교사(崇敎寺)를 창건하여 왕의 원찰로 삼았다. 1007년(목종 10년) 9월에는 진관사에 9층탑을 세웠다.
2. 2. 2. 국방 강화
성종 대에 일어난 고려-거란 전쟁 및 송나라와 고려를 압박하는 거란의 확장에 경계태세를 갖추어 성을 수리하거나 새로 쌓았다. 목종은 그의 치세 초기에 군사 체제를 재편하며 평양의 성을 재건하여 고려의 북방 방어를 강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2]연도 | 사건 |
---|---|
1000년(목종 3년) | 덕주(德州)에 성을 쌓음 |
1001년(목종 4년) | 영풍진(永豐鎭), 평로진(平虜鎭)에 성을 쌓음 |
1003년(목종 7년) | 덕주(德州) · 가주(嘉州) · 위화(威化) · 광화(光化) 등 4개의 성을 쌓음 |
1005년(목종 8년) | 동여진이 등주(登州)를 침략하자 장수를 보내어 이를 막았으며 진명현(鎭溟縣), 금양현(金壤縣), 곽주(郭州)에 성을 쌓음 |
1006년(목종 9년) | 용진진(龍津鎭), 귀주(龜州)에 성을 쌓음 |
1007년(목종 10년) | 흥화진(興化鎭), 울진(蔚珍), 익령현(翼嶺縣)에 성을 쌓음 |
1008년(목종 11년) | 통주(通州), 등주(登州)에 성을 쌓음 |
2. 2. 3. 민생 안정
1001년(목종 4년) 11월, 목종은 중원부(中原府)에 행차하여 풍속을 순시하고, 왕이 지나간 주현(州縣)의 전조(田租)를 1년 동안 감해 주었다. 또한 왕의 행차를 접대한 주와 현의 전조를 절반으로 줄였다.[10]1002년(목종 5년) 5월, 목종은 교서를 내려 토목공사를 일으켜 군인과 역부에게 노역을 시킨 일과 불교 사원을 짓게 하는 등 국가를 방만하게 경영한 탓이 본인에게 있음을 말하며 스스로 반성하고 군사들을 위무하며 격려하였다.[12]
1006년(목종 9년), 흉년이 들자 미납된 공부를 면제해 주었다.[13]
2. 2. 4. 폐위 및 시해
1009년(목종 12년) 1월, 목종은 병에 걸려 몸이 약해지자, 자신의 후계를 당숙이자 이종 사촌동생인 대량원군에게 전하고자 하였다.[10] 목종은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손을 쓰기 전에 대량원군에게 양위할 것을 결심하고 채충순을 불러 서북면 순검사(西北面 巡檢使) 강조(康兆)를 불러 궁궐로 들어와 호위하게 하였다. 강조는 왕명을 받고 개경을 향하던 중, 조정에 깊은 원한을 품고 있던 위종정(魏從正)과 최창(崔昌)으로부터 "목종이 이미 죽고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정권을 장악했다"는 거짓 정보를 듣고 이를 믿어 개경으로 진군하였다. 평주에 이르러 목종이 죽지 않음을 알게 되었으나 돌이킬 수 없다고 여기고 정변을 일으켜 김치양 부자와 왕의 총애를 받던 유행간 등을 죽이고 천추태후의 측근들을 섬으로 유배보냈다.이후 2월 3일, 목종을 폐위시키고 태조의 손자인 대량원군(현종)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양국공(讓國公)에 봉해진 목종은 어머니 천추태후와 함께 충주로 유배를 가던 도중, 적성현에 이르렀을 때 강조가 김광보(金光甫)를 보내어 목종에게 독약을 먹게 하였는데, 목종이 이를 거부하자 안패(安霸)에 의해 살해되었다.[10] 고려에서 정변으로 인해 국왕이 폐위되고 시해당한 첫 사례가 되었다.
목종의 시체는 화장되어 의릉에 묻혔다. 강조가 올린 묘호는 민종(愍宗)이었으나 현종이 즉위한 후 '''목종'''(穆宗)으로 고쳤다. 시호는 '''효사위혜극영정공선양대왕'''(孝思威惠克英定恭宣讓大王)이다.[10]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삼아 고려와 거란 사이에 제2차 고려-거란 전쟁이 발생하였다.
2. 2. 5. 강조의 정변과 고려-거란 전쟁
1009년(목종 12년) 1월, 목종은 병으로 몸이 약해지자, 후계로 당숙이자 이종 사촌 동생인 대량원군을 지명하고자 했다. 목종은 채충순에게 태조의 후손은 대량원군(현종)뿐이므로, 그를 잘 보필하여 사직(社稷)이 다른 성씨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당부하였다.[1]목종은 서북면 순검사(西北面 巡檢使) 강조(康兆)를 불러 호위하게 했다. 강조는 왕명을 받고 개경으로 가던 중, 조정에 원한을 품은 위종정(魏從正)과 최창(崔昌)에게서 "목종이 이미 죽고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정권을 장악했다"는 거짓 정보를 들었다. 강조는 평주에서 목종이 죽지 않았음을 알았지만, 정변을 일으켜 김치양 부자와 유행간 등을 죽이고 천추태후 측근들을 유배보냈다.
1009년 2월 3일, 강조는 목종을 폐위하고 태조의 손자인 대량원군(현종)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폐위된 목종은 천추태후와 함께 충주로 유배를 가던 도중, 적성현에서 강조가 보낸 김광보(金光甫)와 안패(安霸)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는 고려에서 정변으로 인해 국왕이 폐위되고 시해당한 첫 사례였다.[1]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제2차 고려-거란 전쟁이 발발하였다.[4]
3. 가족 관계
부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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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
4. 기타
목종은 미소년을 좋아하여 유행간 등과 동성애 관계를 맺었다.[10]
4. 1. 동성애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실권을 장악하자, 목종은 정치에 관심을 잃었다. 목종은 용모가 아름다운 유행간(庾行簡)과 동성애(龍陽) 관계를 맺었는데, 유행간은 왕의 총애를 믿고 교만하게 굴면서 문무백관을 마음대로 부려 신하들이 유행간을 왕처럼 대하였다.[10] 목종의 동성애는 그가 후사를 두지 못하는 원인이 되었고, 이는 결국 그가 폐위되는 구실로 이용되었다.[2] 목종은 헌애왕후와 김치양의 쿠데타를 막기 위해 강조(康兆) 장군을 불렀지만, 강조는 거란의 침략으로 국가 방어를 소홀히 한 혐의와 목종의 동성애가 "병"이라는 혐의로 목종을 폐위하고 충주(忠州)로 강제 유배하였다.[4][2]5. 대중문화 속 목종
참조
[1]
웹사이트
목종[穆宗] - 비극적 결말에 가려진 12년의 치세
http://contents.hist[...]
2022-11-07
[2]
뉴스
고려 : 7대 목종, 게이의 슬픔
https://www.su-wan.c[...]
2020-02-25
[3]
뉴스
[Why] [이한우의 역사속의 Why] 고려 목종을 폐립시킨 강조
https://www.chosun.c[...]
2009-01-31
[4]
뉴스
Patriotism of Goryeo General Ha Gong-jin
https://www.koreatim[...]
2013-02-19
[5]
백과사전
South Korea (Taehan Min'guk)
https://web.archive.[...]
Continuum Publishing Company
2007-01-10
[6]
문서
고려사 열전 권1 후비 1
[7]
문서
穆宗五年六月 耽羅山開四孔 赤水湧出 五日而止 其水皆成瓦石
[8]
문서
十年 耽羅瑞山湧出海中 遣大學博士田拱之 往視之 耽羅人言 山之始出也 雲霧晦冥 地動如雷 凡七晝夜 始開霽 山高可百餘丈 周圍可四十餘里 無草木 烟氣羃 其上望之 如石硫黄 人恐懼不敢近 拱之躬至山下 圖其形以進
[9]
문서
현화사비
[10]
서적
고려사 열전 권36 폐행 1 유행간
[11]
서적
목종 선양대왕(穆宗宣讓大王)
[12]
서적
목종(穆宗) 5년(1002년) 5월
[13]
서적
지 권제34 식화3
[14]
문서
고려 태조의 손자이며 수명태자의 아들
[15]
문서
고려 광종의 딸이며 홍덕원군 사망 후 고려 성종과 재혼하여 성종의 왕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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