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필리프 보울러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필리프 보울러는 바이에른 왕국 육군 장관의 아들로,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부상을 입고 2급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1922년 나치당에 입당하여 뮌헨 폭동에 가담했으며, 나치당 재건 후 국가비서지도자로 활동했다. 1933년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고, 친위대 중장으로 임명되어 나치당 국가지휘자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는 T4 작전의 감독을 맡아 장애인 안락사에 관여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는 헤르만 괴링의 반역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석방 후 미군에 체포되어 자살했다. 그의 아내 헬레네 마이어 또한 남편의 뒤를 따라 자살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독일의 경찰총수 - 비비아나 슈타인하우스
    비비아나 슈타인하우스는 독일 분데스리가 최초의 여성 주심으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심판의 길을 걸으며 FIFA 여자 월드컵 등 주요 국제 대회에서 활약하다가 분데스리가 1부 리그 주심으로 승격하여 유럽 주요 리그 최초의 여성 주심이 되었고, 성차별적 어려움 속에서도 여성 스포츠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 2급 1914년형 철십자장 수훈자 - 프리츠 바이에를라인
    프리츠 바이에를라인은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독일 군인으로, 하인츠 구데리안과 에르빈 롬멜의 참모로 북아프리카, 동부, 서부 전선에서 활약하며 기갑교도사단장 등을 역임했고 철십자훈장 기사십자장과 떡갈잎 및 검을 수여받았으며, 종전 후에는 전쟁 포로로 수감되었다가 석방되어 군사 관련 저술 활동을 했다.
  • 2급 1914년형 철십자장 수훈자 - 쿠르트 달루에게
    쿠르트 달루에게는 독일 군인이자 경찰, 나치 친위대 고위 간부로서, 나치당 입당 후 친위대에서 하인리히 힘러의 측근으로 활동하며 세력을 확장하고 질서경찰 총책임자, 보헤미아-모라비아 보호령 총독 대행을 역임하며 홀로코스트에 깊이 관여한 전범이다.
필리프 보울러 - [인물]에 관한 문서
이미지
1936년, SS-오베르그루펜퓌러 복장을 한 보울러
1936년, SS-오베르그루펜퓌러 복장을 한 보울러
기본 정보
이름필리프 보울러
출생일1899년 9월 11일
출생지독일 제국 바이에른 왕국 뮌헨
사망일1945년 5월 19일
사망지연합군 점령하 오스트리아 슈타이어마르크주 알타우제
사망 원인자살
배우자헬레네 마이어 (1934년 결혼, 1945년 사망)
교육철학
정치 경력
소속 정당나치당 (NSDAP)
이전 정당대독일 민족 공동체
국가지도자 임기 시작1933년 6월 2일
국가지도자 임기 종료1945년 4월 23일
국가지도자 나치당 총통 관저 장총통 관저장
총통 관저장 임기 시작1934년 11월 17일
총통 관저장 임기 종료1945년 4월 23일
국가지도자 국가지도부 당 검열 책임자국가지도부 당 검열 책임자
당 검열 책임자 임기 시작1936년 10월
당 검열 책임자 임기 종료1945년 4월 23일
T4 작전 책임자T4 작전 책임자
T4 작전 임기 시작1939년
T4 작전 임기 종료1941년
나치당 전국 사업 관리자나치당 전국 사업 관리자
전국 사업 관리자 임기 시작1925년 3월 27일
전국 사업 관리자 임기 종료1934년 11월 17일
국회의원국회의원
선거구18구 (베스트팔렌 서부 지역)
당선 횟수4회
국회의원 임기 시작1933년
국회의원 임기 종료1945년
군사 경력
충성독일 제국
군대독일 제국군
복무 기간1912년 ~ 1917년
계급육군 소위
부대제1 왕립 바이에른 도보 포병 연대
참전 전투제1차 세계 대전
아라스 전투 (부상)
훈장철십자 훈장 2급
기타 정보
소속 정당 (독일어)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국가지도자 (독일어)Reichsleiter
T4 작전 (독일어)Aktion T4
14f13 작전 (독일어)Aktion 14f13
특별 대우 (독일어)Sonderbehandlung

2. 생애

바이에른 왕국 육군성 장관을 지낸 에밀 보울러 대령의 아들로 1899년 뮌헨에서 태어났다.[1] 군인 가문 출신으로, 1912년부터 1916년까지 바이에른 사관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뒤 바이에른 제1 포병연대에 입대하여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1] 1917년 서부전선에서 큰 부상을 입고 소위로 제대했으며, 철십자 훈장 2급과 전상장을 받았다.

전후 뮌헨 대학교에서 철학과 문학을 공부한 뒤, 1921년 나치당 기관지 판매원으로 활동하다 1922년 나치당에 입당했다(당원 번호 12).[1] 1923년 뮌헨 폭동에 가담했으며, 나치당 재건 후인 1925년 복당하여 1934년까지 당 사무국장을 맡았다.

나치당 집권 이후 1933년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고, 같은 해 친위대(SS)에 명예 지도자로 입대하여 1936년 친위대 대장(SS-Obergruppenführer)까지 승진했다.[1] 1934년 11월부터 아돌프 히틀러의 개인 업무를 처리하는 총통 관방의 장관으로 임명되어 전쟁 말기까지 재직했다.[1] 또한 1936년부터는 국가 사회주의 문학 검열 기구의 의장을 겸임했다.[1]

1939년 10월, 의사 카를 브란트와 함께 장애인과 정신질환자를 대상으로 한 안락사 프로그램인 T4 작전의 총책임자로 임명되어 1941년 8월까지 이를 감독했다.[1] 이 작전은 나치 정권 하에서 자행된 조직적인 대량 학살의 시초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인 1945년 4월, 헤르만 괴링의 반역 시도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히틀러 자살 후 석방되었다.[1] 그러나 1945년 5월 10일 미군에게 체포되어 포로 수용소에 수감되었고, 5월 19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2][3][4] 그의 아내 헬레나 마이어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투신 자살했다.[2][3][4]

2. 1. 제1차 세계 대전 참전과 나치당 입당

바이에른 왕국 육군성 장관 에밀 보울러 대령의 아들로 뮌헨에서 태어났다. 보울러 가문은 증조부 때부터 군인을 배출한 집안이었다. 뮌헨의 초등학교와 막시밀리안 김나지움을 거쳐 1912년부터 1916년까지 뮌헨의 바이에른 사관학교에서 수학했다.[1] 바이에른 제1 포병연대에 입대하여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으며, 1917년 서부전선에서 두 다리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1] 그는 1917년 7월 소위로 임관했고, 부상으로 독일 패전 시까지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제대 시 철십자 훈장 2급과 전상장 (흑장)을 수여받았다.[1]

전후인 1919년부터 1920년까지 뮌헨 대학교에서 철학과 문학을 공부했다.[1] 이후 1920년부터 1921년 10월까지 뮌헨의 모터스포츠 관련 출판사에서 근무하다가, 1921년 11월 나치당 기관지인 푈키셔 베오바흐터의 판매원이 되었다.[1] 이를 계기로 1922년 7월 나치당에 입당하여 당원 번호 12번을 받았다.[1] 같은 해 말에는 막스 아만 아래에서 나치당 부사무장이 되었다.[1]

1923년 11월에 발생한 뮌헨 폭동에 가담했으나 폭동은 실패로 돌아갔고 나치당은 해산되었다. 당이 금지된 동안 보울러는 뮌헨에 본부를 둔 나치 전위 조직인 대독일 민족 공동체의 사무장을 맡았다.[1] 1925년 2월 27일 나치당이 재건되자 즉시 복당하여 당원 번호 12번을 유지했으며, 같은 해 3월부터 나치당의 국가비서지도자(사무국장)로 임명되어 1934년 11월까지 활동하게 된다.[1] 역사가 이안 커쇼는 아돌프 히틀러가 행정 및 조직에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지칠 줄 모르고 굴종적"이지만 "내적으로 야심찬" 보울러와 같은 인물에게 의존했다고 평가한다.[1] 또한 역사가 클라우스 피셔는 "올빼미 같은 외모"의 보울러가 히틀러의 초기 측근 중 한 명으로, "수줍어하고 꼼꼼한 관료"로서 히틀러가 "아무리 기이한 명령이라도" 수행할 것이라 믿었다고 분석했다.[1]

2. 2. 나치당 간부로서의 활동

1921년 11월 나치당 기관지 『푈키셔 베오바흐터』의 판매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1922년 7월에 나치당에 입당했다(당원 번호 12).[1] 1922년 말에는 막스 아만 밑에서 나치당 부사무장이 되었다. 1923년 11월 뮌헨 폭동에 가담했으며, 폭동 실패 후 나치당이 해산되자 뮌헨에 본부를 둔 나치 전위 조직인 대독일 민족 공동체의 사무장을 맡았다.

1925년 2월 27일 나치당이 재건되자 즉시 복당하여 당원 번호 12번을 유지했다. 1925년 3월부터 1934년 11월까지 나치당의 전국 사무장(Reichsgeschäftsführerde)으로 활동했다. 역사가 이안 커쇼는 아돌프 히틀러가 행정 및 조직에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지칠 줄 모르고 굴종적"이지만 "내적으로 야심 찬" 보울러와 같은 당 간부들에게 크게 의존했다고 분석했다. 역사가 클라우스 피셔는 "올빼미 같은 외모"의 보울러가 히틀러의 초기 측근 중 한 명이었으며, 히틀러는 "수줍고 꼼꼼한 관료"인 그가 "아무리 기이한 명령이라도" 수행할 것이라고 믿었다고 평가했다.

1933년 권력 장악 이후, 3월 5일 국회의원 선거에서 베스트팔렌 남부 선거구(18구)의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33년 6월 2일, 히틀러는 그를 나치당의 두 번째로 높은 정치 계급인 ''Reichsleiter''(전국 지도자)로 임명했다.

1933년 4월 20일에는 친위대 명예 지도자로서 친위대(SS)에 입대하여(대원 번호 54,932) SS-''Gruppenführer''(친위대 중장) 계급을 받았다. 이후 1936년 1월 30일에는 SS-''Obergruppenführer''(친위대 대장)으로 승진했다.

1934년 8월 말부터 10월 말까지 짧은 기간 동안 뮌헨 경찰청장을 지냈다. 이후 총통 관저에 배속되어, 1934년 11월 17일 히틀러의 당무 처리를 위해 특별히 신설된 총통 관방( Kanzlei des Führers der NSDAPde, KdF)의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이 직책을 1945년 4월 23일까지 유지했다. 총통 관방장으로서 보울러는 히틀러에게 보고될 비밀 칙령을 준비하고 내부 업무를 처리했으며, 히틀러의 개인 서신 및 대중의 민원 처리 등 광범위한 업무를 담당했다. 이를 통해 그는 "히틀러의 선전 시스템에서 주요 인물"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그의 개인 부관은 SS-''Sturmbannführer''(소령) 카를 프라이헤어 미셸 폰 튀슬링이었다.

1938년 10월 뮌헨. (왼쪽부터) 보울러, 아돌프 히틀러, 발두어 폰 쉬라흐, 헤르만 괴링, 요제프 괴벨스, 마르틴 보어만.


1939년 7월 뮌헨. (왼쪽부터) 보울러, 개인 부관 카를 프라이헤어 미셸 폰 튀슬링, 로베르트 라이와 그의 아내 잉게.


1936년 1월에는 "국가 사회주의 독일 문학 보호를 위한 공식 당 검사 위원회"( Parteiamtliche Prüfungskommission zum Schutze des NS-Schrifttumsde) 의장을 겸임하여, 나치 이념에 부합하지 않는 서적을 검열하고 출판을 통제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 직위 역시 국회의원직과 함께 패전 때까지 유지했다.[1]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인 1939년 10월, 보울러는 의사 카를 브란트와 함께 장애인과 정신질환자를 대상으로 한 소위 "안락사" 프로그램인 T4 작전의 총책임자로 임명되었다.[1] 히틀러는 보울러와 브란트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문서에 서명하여 권한을 위임했다: "라이히 지도자 보울러와 의학 박사 브란트는 인간의 판단에 근거하여 치료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환자들이 신중한 진단 후에 자비로운 죽음(Gnadentodde)을 받을 수 있도록, 이름이 지정된 특정 의사의 권한을 확대할 책임을 맡는다." 이 문서는 법적 근거는 없었지만, T4 작전에 참여를 주저하던 의사들에게 일종의 면죄부를 제공하는 역할을 했다. 보울러는 베르너 블랑켄부르크와 빅토어 브라크 등에게 실무를 맡겨 베를린 티어가르텐슈트라세 4번가에 비밀 작전 본부를 운영하며 살해 행위를 의료 절차로 위장했다. T4 작전은 나치 정권이 자행한 반인륜적 범죄의 대표적인 사례로, 수많은 무고한 생명을 희생시켰다. 보울러는 1941년 8월에 공식적으로 T4 작전에서 손을 뗐다.[1]

이 외에도 1940년 5월부터는 학교 및 교육 문제 전국 사무국장을, 1942년 6월부터 1943년까지는 동아프리카 통치를 위한 인력 파견을 담당하는 "동아프리카 특별 관방국" 국장을 지냈다.[1] 그러나 1944년 무렵에는 총통 관방의 많은 기능이 마르틴 보어만이 장악한 당관방( Parteikanzleide)으로 넘어가면서 그의 영향력은 점차 축소되었다.

2. 3. T4 작전

1939년 10월, 보울러는 히틀러의 주치의 중 한 명이었던 카를 브란트와 함께 장애인과 정신질환자를 대상으로 한 안락사 프로그램, 이른바 T4 작전의 공동 책임자로 임명되었다.[1] 이는 1939년 9월 1일 자로 소급 적용된 히틀러의 비밀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히틀러는 보울러와 브란트에게 "인간적인 판단에 따라 치료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환자들이 신중한 진단 후에 Gnadentod|그나덴토트de(자비로운 죽음)를 맞이할 수 있도록 특정 의사들의 권한을 확대할 책임"을 부여했다. 히틀러의 개인 편지지에 작성된 이 명령은 법적 구속력은 없었지만, 안락사 실행에 참여하는 의사들에게 심리적 부담을 덜어주는 역할을 했다.

보울러는 이 작전의 행정 및 조직 운영을 총괄했으며, 실제 실행은 그의 부하인 친위대 상급대령 빅토어 브라크와 돌격대 상급대령 등에게 맡겼다.[1] 작전 초기에는 다운 증후군, 소두증, 수두증, 심각한 신체 기형, 뇌성 마비 등 유전 질환이나 장애를 가진 아동들이 주요 대상이었다. 해당 아동들의 의료 기록을 검토한 세 명의 의료 전문가가 서류상으로만 생사를 결정했으며, 실제 진찰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성인 환자들의 경우, 베를린의 티어가르텐슈트라세 4번지에 위치한 비밀 사무실에서 작전이 지휘되었으며, 여기서 프로그램의 명칭 'T4'가 유래했다. 안락사는 의료 행위로 위장되었고, 첫 안락사 시설은 오스트리아의 하르트하임 성에 마련되었다. 이후 독일 내 베른부르크, 그라페넥, 브란덴부르크, 존넨슈타인, 하다마르 등지에도 가스실을 갖춘 안락사 센터가 추가로 설립되었다. 1941년 8월까지 이 시설들에서 약 7만 명의 사람들이 일산화탄소 가스를 이용하여 조직적으로 살해되었다. 희생자들의 시신에서는 금니 등이 적출되었고, 이후 소각 처리되었다. 보울러는 1941년 8월에 공식적으로 T4 작전에서 손을 뗐다.[1]

1941년, 보울러는 친위대의 수장 하인리히 힘러와 함께 14f13 작전을 개시했다. 이 작전은 빅토르 브라크가 실무를 담당했으며, 강제 수용소 내 병약자, 노동 불능자, 또는 인종적·정치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분류된 수감자들을 선별하여 기존의 T4 안락사 시설에서 살해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14f13'은 친위대의 서류 분류 기호에서 유래한 암호명이었다.

T4 작전에서 사용된 대량 학살 기술과 운영 방식, 그리고 동원된 인력은 이후 홀로코스트, 특히 라인하르트 작전과 같은 유대인 절멸 계획에 직접적으로 활용되었다. 전후 재판 과정에서 브라크는 보울러의 지시에 따라 T4 작전 인력 중 상당수가 오딜로 글로보치니크가 지휘하는 루블린 지역으로 파견되어 절멸 수용소 건설 및 운영에 참여했다고 증언했다. 이는 T4 작전이 나치 독일의 조직적인 대량 학살 범죄의 시초이자 중요한 실험장이었음을 보여준다.

2. 4. 제2차 세계 대전과 몰락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된 후인 1939년 10월, 보울러는 카를 브란트와 함께 장애인과 병자를 안락사시키는 계획인 이른바 T4 작전의 감독을 맡았다. 보울러는 돌격대 상급대령 베르너 블랑켄부르크와 친위대 상급대령 빅토어 브라크에게 실무를 맡기고 1941년 8월에 이 계획에서 손을 뗐다. 1940년 5월부터는 학교 및 교육 문제 전국 사무국의 국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942년 6월부터 1943년까지는 동아프리카 통치를 위한 인원을 보내는 동아프리카 특별 관방국의 국장을 지냈다.[1]

대전 말기인 1945년 4월 23일, 헤르만 괴링의 "반역"에 한스 하인리히 라머스와 함께 관여했다는 혐의로 마르틴 보어만의 명령에 의해 베르히테스가덴에서 친위대원에게 체포되었다. 아돌프 히틀러가 자살한 후 석방되었지만, 1945년 5월 10일에 미국군에게 체포되어 다하우 근처에 있던 미군 포로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5월 19일에 수용소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보울러가 자살한 후 그의 아내였던 헬레나 마이어도 5월 말에 투신하여 자살했다.[2][3][4]

3. 주요 직책

1922년 7월 나치당에 입당(당원 번호 12)하여[1] 같은 해 말 막스 아만 아래에서 당 부사무장이 되었다. 뮌헨 폭동 실패 후 당이 해산되자 나치당의 전위 조직인 대독일 민족 공동체의 사무장을 맡았다.

1925년 2월 27일 나치당 재건과 함께 복당하여, 1925년 3월부터 1934년 11월까지 당의 전국 사무장(Reichsgeschäftsführerde)으로 활동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아돌프 히틀러의 신임을 얻으며 당내 입지를 다졌다.

1933년 3월 독일 국회 선거에서 베스트팔렌 남부 선거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나치 독일 패망 시점인 1945년까지 자리를 유지했다. 1933년 6월에는 나치당의 최고 정치 계급 중 하나인 전국지도자(Reichsleiterde)로 임명되었다. 또한, 1933년 4월 20일 친위대 명예 지도자로서 친위대에 입대(대원 번호 54,932)하여 SS-Gruppenführer 계급을 받았고, 1936년 1월 30일에는 SS-Obergruppenführer으로 승진했다.

1934년 8월부터 10월까지 짧은 기간 동안 뮌헨 경찰청장을 지냈으며, 같은 해 9월에는 독일 법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1934년 11월, 아돌프 히틀러의 개인적인 업무와 당 관련 비공개 업무 등을 처리하기 위해 신설된 총통 관방장(Chef der Kanzlei des Führersde)에 임명되어 1945년 4월 23일까지 재직했다. 이 직책은 히틀러에게 직접 보고하고 그의 지시, 심지어는 논란이 많은 명령까지 수행하는 핵심적인 위치였다.

1936년 1월부터는 국가 사회주의 독일 문학 보호를 위한 공식 당 검사 위원회(Parteiamtlichen Prüfungskommission zum Schutze des NS-Schrifttumsde) 의장을 겸임하며 나치 이념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되는 출판물을 검열하고 통제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 직위 역시 1945년까지 유지했다.[1]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인 1939년 10월, 보울러는 카를 브란트와 함께 장애인과 정신질환자 등을 대상으로 한 안락사 프로그램인 T4 작전의 감독을 맡았다.[1] 그는 이 반인륜적 작전의 실행을 위해 히틀러의 공식적인 승인 문서를 받아내는 등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돌격대 상급대령 베르너 블랑켄부르크와 친위대 대령 빅토어 브라크 등에게 실무를 맡겨 1941년 8월까지 작전을 진행했다.[1]

이 외에도 1940년 5월부터 학교 및 교육 문제 전국 사무국장을 맡았으며, 1942년 6월부터 1943년까지는 동아프리카 식민 통치를 준비하기 위한 동아프리카 특별 관방국 국장을 지냈다.[1]

4. 저서

1938년에 나치 운동의 역사를 다룬 책인 Kampf um Deutschland|독일을 위한 투쟁deu을 저술했다. 1942년에는 Napoleon – Kometenbahn eines Genies|나폴레옹 – 천재의 혜성 궤도deu라는 책을 출판했는데, 이 책은 히틀러가 가장 좋아하는 책 중 하나가 되었다. 또한 전쟁 기간 동안에는 1939년 9월 1일부터 1942년 3월 15일까지 히틀러가 연설한 내용을 편집하여 3권으로 구성된 Der großdeutsche Freiheitskampf|대독일 자유 투쟁deu 시리즈를 출판했다.

5. 훈장


  • -- 2급 철십자 훈장 (1914년)
  • -- 부상장 (흑장)
  • -- 전선 전사 명예 십자장
  • 바이에른 전공장
    바이에른 전공장
  • -- 황금 당원 명예장
  • 혈맹 훈장
    혈맹 훈장
  • 당 근속장
  • -- 근속 25년 금장
  • 근속 15년 은장
    근속 15년 은장
  • 근속 10년 동장
    근속 10년 동장
  • 고참 투사 명예장
    고참 투사 명예장
  • 전공 십자장
  • 전공 십자장 1급
    1급
  • 전공 십자장 2급
    2급
  • -- 친위대 명예 링

6. 가족 관계

바이에른 왕국 육군성 장관이던 에밀 보울러 대령의 아들이다.

1934년 8월 18일, 헬레네 마이어(Helene Maierde)와 결혼했다. 그녀는 "총통 관저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으로 불릴 만큼 아름다웠다고 전해진다. 보울러 부부에게 자녀는 없었다. 헬레네는 남편 필리프 보울러가 미군 포로수용소에서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1945년 5월 말, 스위스 알프스 산맥의 피셔호른( Fiescherhornde )에서 투신하여 남편의 뒤를 따랐다.[2][3][4]

참조

[1] 서적 SS: Roll of Infamy 1997
[2] 웹인용 Bouhler, Philipp - Der grossdeutsche Freiheitskampf - Reden Adolf Hitlers vom 01.09.1939 bis 10.03.1940 (1940, 104 Doppels., Scan, Fraktur) : Free Download, Borrow, and Streaming : Internet Archive https://archive.org/[...] 2020-06-10
[3] 웹인용 Bouhler, Philipp - Der Grossdeutsche Freiheitskampf - Reden Adolf Hitlers - Band 2 (1941, 152 S.) : Free Download, Borrow, and Streaming : Internet Archive https://archive.org/[...] 2020-06-10
[4] 웹인용 Der grossdeutsche Freiheitskampf : Hitler, Adolf : Free Download, Borrow, and Streaming : Internet Archive https://archive.org/[...] 2020-06-10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