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쿠라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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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나쿠라의 난은 1536년 이마가와 가문의 당주 이마가와 우지테루와 그의 동생 히코고로가 급사한 후, 가문의 후계자 자리를 둘러싸고 발생한 내분이다. 이마가와 우지치카의 정실 주케이니는 아들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옹립하려 했지만, 유력 가신 후쿠시마 씨는 우지치카의 측실 소생 겐코 에탄을 지지하며 대립했다. 에탄 지지 세력은 구시마 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요시모토가 고호조 씨의 지원을 받아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다케다 씨는 중립을 지켰고, 결국 요시모토가 가독을 상속받아 가문 내 권력을 강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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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쿠라의 난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전투 정보 | |
전투 이름 | 하나쿠라의 난 |
![]() | |
분쟁 | 이마가와 씨의 가독을 둘러싼 내란 |
시기 | 1536년 6월 13일 ~ 6월 28일 |
장소 | 스루가국슨푸 일대, 시다군 및 도토미국 일대 (현재 시즈오카현시즈오카시 내, 후지에다시・야이즈시, 시즈오카현 서부 지역) |
결과 | 센가쿠 쇼호 (이마가와 요시모토) 파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 1 | 센가쿠 쇼호 파 |
교전 2 | 겐코 에탄 파 |
지휘관 | |
지휘관 1 | 센가쿠 쇼호 |
지휘관 1-1 | 주케이니 |
지휘관 1-2 | 다이겐 셋사이 |
지휘관 1-3 | 오카베 지카쓰나 |
지휘관 1-4 | 오키쓰 기요후사 |
지원 | 호조 우지쓰나 |
지휘관 2 | 겐코 에탄 |
지휘관 2-1 | 후쿠시마 야시로 등 |
병력 규모 | |
병력 1 | 12000명 |
병력 2 | 3000명 |
피해 규모 | |
피해 1 | 불명 |
피해 2 | 괴멸 |
캠페인 | |
캠페인 정보 |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전투 |
2. 배경
분메이 8년(1476년) 도토미에서 이마가와 요시타다(今川義忠)가 전사한 뒤, 이마가와 집안은 가독 상속을 둘러싼 내부 분쟁을 겪었다. 호조 소운(北条早雲)으로 알려진 이세 모리토키(伊勢盛時)의 중재로 1487년 이마가와 우지치카(今川氏親)가 가독을 상속받았다.[4]
1536년 3월 17일, 이마가와 우지테루와 그의 동생 히코고로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4] 이마가와 가문은 후계자 자리를 두고 혼란에 빠졌다. 우지테루의 어머니 주케이니와 중신들은 승려였던 바이가쿠 쇼호(훗날의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환속시켜 가독을 잇게 하려 했다.
우지치카는 슈고다이(守護代)가 된 모리토키의 지원을 받아 이마가와 당주의 종주권 강화에 힘썼다. 그는 분국법(分国法)인 『이마가와 가나 목록』(今川仮名目録)을 제정하여 집안을 통솔하였다. 또한, 자신의 사후 내분을 방지하기 위해 적자 류오마루(龍王丸, 이마가와 우지테루)로의 가독 상속을 확정짓고, 1523년에는 다이겐 셋사이(太原雪斎)를 초빙하여 다섯째 아들 호키쿠마루(芳菊丸, 훗날의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양육하게 했다. 1525년에는 호키쿠마루를 출가시켜 젠토쿠지(善得寺)에 들어가게 했다. 이듬해인 1526년 우지치카가 사망하고 우지테루가 당주가 되었다.[4]
우지테루는 가이의 다케다 씨와 화친하고, 유력 가신들의 합의제를 확립하여 분국 통치를 정비하였다. 그러나 미카와에서 마쓰다이라 씨의 세력이 강해지자, 우지테루는 미카와를 포기하고 가이 침공을 계획했다. 다이겐 셋사이와 함께 교토에서 수행하던 동생 바이가쿠 쇼호(栴岳承芳)를 불러들인 것도 이 무렵이었다.[4]
1536년 3월 17일, 이마가와 가의 당주 이마가와 우지테루와 그의 동생 히코고로(彦五郎)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4] 당주 우지테루의 생모이자 집안 내 영향력이 컸던 주케이니(寿桂尼)와 다이겐 셋사이 등은 바이가쿠 쇼호를 환속시켜 요시모토(義元)라 칭하게 했다.[4]
요시모토의 가독 상속에 반대한 것은 이마가와 집안의 유력 가신인 후쿠시마 씨(福島氏)였다. 후쿠시마 스케하루(福嶋助春)의 딸이 전임 당주 우지치카의 측실이었기에, 후쿠시마 집안은 이마가와 집안의 외척이었다. 이들은 측실 소생인 겐코 에탄(玄広恵探)을 당주로 옹립하여 요시모토에게 대항했다.[4]
1536년 5월 24일, 주케이니는 에탄을 지지하던 후쿠시마 에치젠노카미(福島越前守)를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했다.[5] 다음날 에탄 지지파는 구시마 성(久能城)에서 거병하여 이마가와 저택을 습격했으나 실패하고, 가타노카미 성(方ノ上城)과 하나쿠라 성(花倉城)을 거점으로 저항했다. 도토미 등지에서도 이에 동조하는 세력이 나타났다.[4]
요시모토는 사가미의 고호조 씨의 지원을 받아 1536년 6월 10일, 오카베 지카쓰나(岡部親綱)가 가타노카미 성을 함락시켰다. 이어 에탄이 농성하던 하나쿠라 성을 함락시켰고, 에탄은 도망쳐 세토야(瀬戸谷)의 보몬지(普門寺)에서 자결했다. 도토미에서의 전투도 마무리되면서 요시모토는 가독 상속을 확정짓고 종주권 강화에 힘쓰게 되었다.[4]
하나쿠라 성주 구시마 에치젠노카미는 이마가와 가의 가신이었지만, 겐코 에탄의 어머니가 구시마 일족의 딸이었기 때문에 겐코 에탄을 지지하며 다케다씨에 합세했다. 그러나 주케이니는 친아들 요시모토를 옹립했고, 다이겐 셋사이는 다케다 노부토라의 아들 다케다 하루노부와 산조 긴요리의 딸(후의 산조노 가타)의 혼인을 약속하며 다케다 가와의 맹약을 체결했다. 이로써 다케다 가는 전투에 개입하지 않았고, 결국 구시마 가는 멸망했다.[4]
3. 경과
하지만, 이마가와 가문의 유력 가신이었던 후쿠시마 씨는 이에 반대하며, 전 당주 우지치카의 측실 소생인 겐코 에탄을 옹립하여 요시모토에 대항했다. 후쿠시마 씨는 겐코 에탄의 외가였기 때문에, 에탄이 당주가 되면 가문의 세력이 커질 것을 기대했던 것이다.
5월 24일, 주케이니는 에탄을 지지하는 후쿠시마 에치젠노카미(후쿠시마 마사나리와 동일인물이라는 설이 있음)를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했다.[5] 다음 날인 25일, 에탄 지지파는 구시마 성에서 군사를 일으켜 스루가 후추(현재의 시즈오카시)의 이마가와 저택을 습격했다. 그러나 이마가와 저택의 수비가 견고하여 습격은 실패로 돌아갔고, 에탄 지지파는 가타노카미 성(현재의 야이즈시)과 하나쿠라 성(현재의 후지에다시)을 거점으로 저항했다. 도토미(현재의 시즈오카현 서부) 지역에서도 에탄 지지파에 동조하는 세력이 나타났다.
요시모토는 사가미(현재의 가나가와현)의 고호조 씨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6월 10일에는 오카베 지카쓰나가 가타노카미 성을 함락시켰다. 이어서 에탄이 농성하던 하나쿠라 성도 함락되었다. 에탄은 결국 지지 세력을 잃고 도망쳐 세토야의 보몬지에서 자결했다. 이로써 요시모토는 가독 상속을 확정짓고, 이마가와 가문의 종주권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3. 1. 다케다 가의 개입
분메이 8년(1476년) 이마가와 요시타다가 도토미에서 전사한 뒤, 이마가와 집안은 가독 상속을 둘러싼 분쟁으로 혼란에 빠졌으나, 호조 소운(이세 모리토키)의 중재로 1487년 이마가와 우지치카가 가독을 상속받았다.[4] 우지치카는 분국법인 『이마가와 가나 목록』을 제정하여 집안 통솔을 강화하고, 자신의 사후 내분을 막기 위해 적자 류오마루(이마가와 우지테루)에게 가독 상속을 확정지었다. 또한 다이겐 셋사이를 초빙하여 다섯째 아들 호키쿠마루(이마가와 요시모토)를 양육하게 하고, 1525년 출가시켜 젠토쿠지(善得寺)로 보냈다. 1526년 우지치카가 사망하고 우지테루가 당주가 되었다.
우지테루 시대에는 가이의 다케다 씨와 화친을 맺었으나, 미카와의 마쓰다이라 씨의 세력 확대로 수세에 몰리자 미카와를 포기하고 가이 침공을 계획했다. 이 무렵 다이겐 셋사이와 함께 교토에서 수행하던 동생 바이가쿠 쇼호(栴岳承芳, 훗날의 요시모토)를 불러들였다.
1536년 3월 17일, 이마가와 우지테루와 그의 동생 히코고로가 급사하자,[4] 우지치카의 정실 주케이니와 다이겐 셋사이 등은 바이가쿠 쇼호를 환속시켜 요시모토라 칭하고 가독을 잇게 했다. 그러나 이마가와 집안의 유력 가신이었던 후쿠시마 씨(福島氏)는 전 당주 우지치카의 측실 소생인 겐코 에탄(玄広恵探)을 옹립하며 반발했다.
주케이니는 에탄을 지지하던 구시마 에치젠노카미(후쿠시마 마사나리와 동일인물이라는 설도 있다)를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했고,[5] 다음날 에탄 지지파는 구시마 성(久能城)에서 거병하여 이마가와 저택을 습격했다. 그러나 수비가 견고하여 실패하고, 가타노카미 성(方ノ上城), 하나쿠라성(花倉城)을 거점으로 저항했다.
요시모토는 사가미의 고호조 씨의 지원을 받아 오카베 지카쓰나를 시켜 가타노카미 성을 함락시키고, 이어 하나쿠라 성을 함락시켰다. 에탄은 도망쳐 세토야(瀬戸谷)의 보몬지(普門寺)에서 자결했다. 이로써 요시모토는 가독 상속을 확정짓고 종주권 강화에 힘썼다.
구시마 에치젠노카미는 이마가와 가의 가신이었으나, 겐코 에탄의 어머니가 구시마 일족이었기 때문에 에탄을 후계자로 옹립하여 가문의 위상을 높이려 다케다 가에 가담했다. 그러나 주케이니는 친아들 요시모토를 옹립했고, 다이겐 셋사이는 다케다 노부토라의 아들 다케다 하루노부와 산조 긴요리의 딸 (산조노 가타)의 혼인을 주선하여 다케다 가와의 맹약을 성립시켰다. 이로써 다케다 가는 싸움에 개입하지 않았고, 결국 구시마 가는 멸망했다.
4. 결과 및 영향
1536년 6월 10일(6월 28일) 오카베 지카쓰나(岡部親綱)가 가타노카미 성(方ノ上城)을 함락시키고, 이어 겐코 에탄이 농성하던 하나쿠라 성(花倉城)을 함락시켰다. 에탄은 지지를 잃고 도망쳐 세토야(瀬戸谷)의 보몬지(普門寺)에서 자결하였다.[5] 도토미(遠江)에서의 전투도 마무리되어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자신의 가독 상속을 선언하고 종주권 강화에 힘쓰게 되었다.
하나쿠라 성의 성주 구시마 에치젠노카미는 이마가와 가의 가신이었지만 이마가와 가를 배신하고 다케다 씨(武田氏)에 합세했다. 그 이유는 이마가와 가 측실의 아들인 겐코 에탄의 어머니가 구시마 일족의 딸이었기 때문에, 겐코 에탄이 후계자가 되면 구시마 가의 위상이 높아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마가와 우지테루의 생모 주케이니는 친아들 바이가쿠 쇼호(이마가와 요시모토)를 옹립했고, 그 과정에서 승려인 다이겐 셋사이가 다케다 노부토라의 아들 다케다 하루노부를 공가(公家)인 산조 가(三条家) 당주 산조 긴요리의 딸(산조노 가타)과 결혼시켜 주겠다는 맹약을 다케다 가와 체결하였다. 이로써 맹약은 성립되었고 다케다 가는 싸움에 끼어들지 않고 원군도 보내지 않았다. 그 결과 구시마 가는 멸망했다.
5. 대중 문화
2007년 NHK 대하드라마 바람의 검심 제5화 "스루가 대란"에서 하나쿠라의 난을 다루었다.[1]
참조
[1]
서적
武田信虎 覆される「悪逆無道」説
戎光祥出版
[2]
서적
今川義元
吉川弘文館
[3]
간행물
今川義元
戎光祥出版
[4]
문서
[5]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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