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케하자마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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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케하자마 전투는 1560년 일본 센고쿠 시대에 오다 노부나가와 이마가와 요시모토 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교토를 향해 진군했지만, 오다 노부나가는 2,000~3,000명의 병력으로 기습하여 이마가와 군을 격파하고 요시모토를 전사시켰다. 이 전투는 이마가와 가문의 몰락과 오다 노부나가의 세력 확대를 가져왔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많은 사무라이들의 운명에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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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하자마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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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정보 | |
기본 정보 | |
전투 이름 | 오케하자마 전투 |
로마자 표기 | Okehazama-no-tatakai |
![]() | |
전투 시기 | 1560년 6월 12일 |
전투 장소 | 오와리 국 덴가쿠하자마 (현재 아이치현 도요아케시) |
관련 시대 | 센고쿠 시대 |
전투 결과 | 오다 씨의 승리,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전사 |
교전 세력 | |
교전 세력 1 | 오다 씨 |
교전 세력 2 | 이마가와 씨, 마쓰다이라 씨 |
지휘관 | |
지휘관 1 | 오다 노부나가 모리 가쓰나리 가와지리 히데타카 사쿠마 노부모리 센추 스에타다 마에다 도시이에 시바타 가쓰이에 이케다 쓰네오키 사사 마사쓰구 |
지휘관 2 | 이마가와 요시모토 마쓰이 무네노부 이이 노리쓰라 이이 나오모리 오카베 모토노부 우도노 나가테루 마쓰다이라 모토야스 (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 |
병력 규모 | |
병력 1 | 2,000명 ~ 3,000명 (일부 자료에선 4,000명) |
병력 2 | 25,000명 (여러 설이 있음, 직접 대치한 병력은 5,000~6,000명) |
사상자 | |
사상자 1 | 기록된 정확한 수치는 없음 |
사상자 2 | 3,000명 이상 (《신초공기》, 《무덕편년집성》) 2,500명 (《낙수집》, 《무덕대성기》) 3,907명 (《개정미카와후도키》) 이마가와 요시모토 및 유력 무장 다수 전사 |
기타 정보 | |
주요 결과 | 오다 씨의 생존 확보, 이마가와 세력의 위협 제거 |
관련 전투 | 아카쓰카 전투 기요스 성 전투 무라키 성 전투 이노 전투 나가라 강 전투 우키노 전투 데라베 전투 마루네 전투 이나바야마 성 전투 조코지 전투 가네가사키 전투 (1570) 아네가와 전투 이시야마 혼간지 전투 히에이 산 포위전 나가시마 포위전 미카타가하라 전투 히키다 성 전투 오다니 성 전투 이치조다니 성 전투 이타미 포위전 (1574) 나가시노 전투 미쓰지 포위전 기즈가와구치 전투 시기 산 포위전 데도리가와 전투 다카텐진 포위전 (1581) 돗토리 포위전 히지야마 포위전 다카토 포위전 (1582) 덴모쿠잔 전투 우오즈 포위전 혼노지의 변 |
관련 인물 | 도쿠가와 이에야스 |
2. 배경
1560년,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아시카가 막부를 장악하기 위해 2만 5천 명의 군대를 이끌고 교토로 진군했다. 이마가와 군은 동해도를 따라 미카와에서 오와리로 진입했는데, 오와리는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통일된 곳이었다.
2. 1. 오와리와 미카와의 정세
오다 노부나가의 아버지 노부히데 대부터 오다씨와 이마가와씨는 미카와, 오와리 양국의 국경 지대 지배권을 두고 오랫동안 다투고 있었다. 미카와 서부를 지배하던 마쓰다이라씨는 젊은 당주들이 연이어 사망하면서 가문의 힘이 약해져 이마가와 씨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51] 처음에는 오다 씨가 우세하여 전투는 미카와 국내에서 벌어졌지만, 1542년 제1차 아즈키자카 전투에서는 이마가와 씨가 승리하여 이후 이마가와 씨가 우세하게 되었다.[51] 그러나 오다 씨는 다시 역습을 시작해 오와리 국내의 이마가와 씨 측 성인 나루미성 등 몇몇 성을 포위하여 고립시켰다.[51]15세기 말, 스루가국의 이마가와 우지치카는 세력을 확장하여 스루가와 도토미에 영토를 형성했다. 그의 아들 이마가와 우지테루 사후, 하나쿠라의 난이라 불리는 내분이 발생했지만,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이를 진압하고 이마가와 가문을 계승했다. 오와리 국에서는 수호인 스바씨의 가신이자 기슈 오다 씨의 가로인 오다 단조 가문이 성장했다. 오다 노부사다가 토지를 점거하고, 교역 거점인 쓰시마를 지배하여 경제력을 높였고, 다음 세대 오다 노부히데(노부나가의 아버지)가 지배 지역을 확장했다.
이마가와 씨는 오와리의 일부에도 세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1538년까지 오다 노부히데는 오와리 나고야성에 있던 이마가와 우지토요를 몰아내고 성을 빼앗아 이마가와 씨와의 대립이 시작되었다.[13] 두 세력 사이에 낀 미카와국에서는 기라씨, 마쓰다이라씨, 미즈노씨, 도다씨, 마키노 씨, 스가누마씨, 오쿠히라씨 등의 소규모 세력들이 싸움을 계속했지만, 곧 유력한 국인인 마쓰다이라 씨의 분가 중 하나인 안쇼 마쓰다이라 가가 오카자키성으로 거점을 옮기면서 성장하게 된다.
오다 단조 가문과 안쇼 마쓰다이라 가는 동오와리와 서미카와를 두고 항쟁을 벌였다. 그러나 마쓰다이라 기요야스는 동오와리 침공 중 가신에게 살해당했고(모리야마 붕괴), 그의 아들 마쓰다이라 히로타다도 요절하여 약화되어 이마가와 씨의 보호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이 때문에 오다 씨와 이마가와 씨는 동오와리와 서미카와에서 대치하게 되었다. 1542년의 제1차 아즈키사카 전투에서는 오다 군이 승리했다고 전해지지만, 1548년의 제2차 아즈키자카 전투에서는 이마가와 군이 승리했다.
당시 이마가와 씨는 가이국 다케다씨, 사가미국 호조 씨와 대치하고 있었고, 특히 1537년부터 1545년까지 계속된 가토의 난에서는 스루가 국 동부를 두고 호조 씨와 격렬하게 충돌했다. 이 때문에 이마가와 씨의 미카와 진출 본격화는 가토의 난 종결 이후라고 보는 견해가 등장하고 있으며, 제1차 아즈키자카 전투의 실재성과 이 시기 안쇼 마쓰다이라 가(후의 도쿠가와씨)의 정세에 대해 여러 가지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1549년, 이마가와 군이 오다 측의 미카와 진출 거점이었던 안쇼 성을 공략했고,[13] 오다 씨의 미카와 진출은 좌절되었다. 같은 해 후반에 노부히데는 병석에 눕는다. 1550년에 이마가와 씨는 대군으로 오와리에 침공했다. 오다 군은 어떻게든 국경 근처에서 버텼지만, 이마가와 군은 12월까지 지타 반도에 주둔했다(『정광사문서』). 동지의 오가와, 가리야를 지배하는 미즈노 가를 항복시킨 후 철수했다.
1551년에는 오다 노부히데가 병사했다. 그 후 오다 가의 가독을 둘러싸고 오다 노부나가와 그의 동생 노부카쓰(후의 오다 노부유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났다. 이 결과, 오와리, 미카와 국경 지대에서 오다 씨의 세력은 동요했고, 노부히데의 죽음을 전후하여 나루미 성, 가사데라 성(각각 나고야시 미도리 구, 미나미 구)을 지키던 야마구치 노리쓰구가 이마가와 군에 투항했다.
야마구치 씨의 책략에 의해 오와리 남동쪽의 오다카성(아이치현 나고야시 미도리구 오다카), 구쓰카케성(도요아케시 구쓰카케마치) 일대가 이마가와 군의 손에 떨어졌다. 이 4개의 성은 오와리 중심부와 지타반도를 분단하는 위치에 있었다. 아이치 용수 개통과 그것에 의한 농지 개발 이전의 지타 반도는 거의 전역이 작은 산과 계곡이 이어지는 구릉지대였고, 주요 하천이 없어 저수지에 의존하는 농업이 어려운 지역이었다.[17] 지타는 농업 생산성 및 병력 동원 능력에서는 오와리의 몇 분의 일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세만 동쪽 해안을 점하는 해운의 요충지이며, 상업 항구인 쓰시마를 지배하여 재정의 버팀목으로 삼고 있던 오다 가에게는 중대한 위협이 되고 있었다.
오와리 남서쪽의 니가노우에 성에 근거지를 둔 하토리 도모사다가 이마가와 군에 가담했고, 니가노우에 성에 가까운 가니에성이 1555년에 이마가와 군에 공격받았고,[13] 이세만의 제해권이 점차 이마가와 군에 침략당하고 있었다.
오다 노부나가도 이마가와 군의 진출 저지와 역습에 나섰다. 1554년에는 오다 노부나가가 지타의 영주인 미즈노씨를 지원하여 이마가와 군의 무라키 요새를 함락시켰다. 가사데라 성을 탈환한 외에도, 나루미 성 주변에는 단게 요새, 젠쇼지 요새, 나카지마 요새를, 오다카 성 주변에는 마루네 요새, 와시즈 요새를 쌓아 이마가와 군을 압박하고, 성 상호의 연락을 차단했다. 오와리 북동부에서는 1558년~1559년, 마쓰다이라, 이마가와 씨가 점령한 시나 성(세토시)을 공격했지만, 탈취하지는 못했다.[13]
2. 2.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오와리 침공
오다 노부히데 시대부터 미카와, 오와리 양국의 국경지대 지배권을 두고 오다 씨와 이마가와 씨는 오랜 분쟁을 벌였다. 미카와 서부를 지배하던 마쓰다이라 씨는 젊은 당주들이 연이어 사망하면서 가문의 힘이 약해져 이마가와 씨의 보호를 받았다. 초기에는 오다 씨가 우세하여 전투는 미카와 국내에서 벌어졌지만, 1542년 제1차 아즈키자카 전투에서 이마가와 씨가 승리한 후로는 이마가와 씨가 우세했다. 그러나 오다 씨는 다시 역습을 시작해 오와리 국내의 이마가와 씨 측 성인 나루미 성 등 몇몇 성을 포위하여 고립시켰다.[51]1560년 음력 5월 12일(6월 5일),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직접 대군을 이끌고 슨푸를 출발해 오와리를 향해 도카이도를 따라 서쪽으로 진군했다. 음력 5월 17일(6월 10일) 오와리의 이마가와 측 성 중 미카와국과 가장 가까운 구쓰카케 성에 도착한 이마가와 군은 다음날 밤, 마쓰다이라 모토야스(훗날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미카와 지역 무사를 선봉으로 오타카 성에 병량을 공급했다.[51]
19일(6월 12일) 3시경, 모토야스와 아사히나 야스토모는 일제히 오다 씨 측 요새를 공격했다. 전날 이마가와 군의 움직임을 듣고도 대책을 세우지 않던 오다 노부나가는 이마가와 군의 공격 소식을 듣고 즉시 아쓰모리를 추고 출진 준비를 한 뒤 새벽 4시경 출발했다. 부하들이 연이어 뒤따르면서 8시경 아쓰타 신궁에 도착해 군대를 집결시키고 필승을 기원했다.[51]
10시경, 노부나가 군은 나루미 성을 둘러싼 요새 중 한 곳에 들어가 약 4,000명의 군세를 만들었다. 그 사이 이마가와 군 선봉의 맹공으로 2개의 요새가 함락되었고, 오타카 성 주변 제압을 완료한 이마가와 측은 요시모토의 본대가 구쓰카케 성을 출발해 오타카 성 방면으로 서진했다. 한편, 노부나가는 11시부터 12시경 요새에서 나와 나루미에서 보이는 도카이도 동남쪽에 해당하는 오케하자마 방면에서 적군의 존재를 확인하고 동남쪽으로 진군을 시작했다.[51]
3. 전투의 전개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이끄는 2만 5천의 대군은 오다 노부나가의 영지인 오와리 국으로 진군, 마쓰다이라 모토야스가 이끄는 마쓰다이라 군은 마루네 성을 함락시켰다. 요시모토는 나고야시 외곽 오케하자마 마을 덴가쿠하자마에 진영을 구축했다.[3] 반면, 오다 노부나가는 2천에서 3천 명 정도의 병력밖에 동원할 수 없었다.[3]
노부나가는 적의 우세한 병력을 상쇄할 수 있는 것은 강력한 공격 전략뿐이라 판단, 역습을 명령했다.[3] 그는 매사냥을 명목으로 오케하자마 일대 지형을 잘 알고 있었고, 병사들에게 적을 직접 공격하는 것이 최선이라 말하며 휴식을 취하게 한 후 다음 날 아침 공격을 개시했다.
정오 무렵, 오다 군의 사사 마사쓰구, 센슈 시로 등 30여 명의 부대가 이마가와 군 선봉을 공격했으나, 오히려 반격을 받고 전사했다. 이후 이마가와 군이 마루네 성(丸根砦)와 와시즈 성(鷲津砦)를 함락시키는 등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자 요시모토는 크게 기뻐하며 우타이(謡)를 부르게 했다. 요시모토는 '오케하자마 산'에 본대를 배치하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20]
13시경, 폭우가 쏟아졌고, 오다 군은 이를 틈타 요시모토의 본진을 기습했다. 그러나 기습이 아닌, 비가 그친 후 정면으로 진격하여 전투를 벌였다는 설도 있다. 이마가와 군은 병력이 분산되어 요시모토를 호위하는 실제 병력은 적었고, 양측의 전력 차이는 크지 않았다.
이마가와 군 선봉은 오다 군과 접전하자 싸우지도 않고 무너졌고, 오다 군은 혼란 속에서 이마가와 군 본진을 향해 돌격했다. 요시모토는 300명의 호위를 받으며 도망쳤다.[21] 신장공기(信長公記)에 따르면, 요시모토는 가마를 버리고 300기의 친위대를 거느리고 후퇴했으나, 오다 군의 공격으로 병사들을 잃고 결국 말을 탄 무사에게 추격당했다. 혼전 속에서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타도(太刀)를 뽑아 스스로 분전하며, 첫 창을 꽂은 핫토리 가즈타다(服部一忠)에게 반격하여 무릎을 베었지만, 모리 요시카쓰(毛利良勝)에게 제압당하고 목이 베였다(향년 42세).[23] 요시모토는 죽을 때 모리의 왼쪽 손가락을 물어뜯을 정도로 저항했다고 한다.
요시모토가 전사한 곳은 '덴가쿠쿠보'(田楽窪)로 기록되어 있으며,[24] 현재 도요아케시(豊明市) 구쓰카케초(沓掛町)에 '덴가쿠케쿠보'(田楽ケ窪)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다.[25]
총대장 요시모토의 전사로 이마가와 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무너졌으며, 오케하자마 전투는 오다 군의 승리로 끝났다. 이마가와 측 전사자는 2753명, 오다 측 전사자는 990명 남짓이었다.[26]
;참전 병력
오다 군 | 이마가와 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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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 이마가와 군의 진군과 오다 군의 대응
오다 노부히데 시대부터 오다 씨와 이마가와 씨는 미카와, 오와리 양국의 국경지대 지배를 둘러싸고 오랜 다툼을 벌였다. 미카와 서부를 지배하던 마쓰다이라 씨는 젊은 당주가 연이어 사망하여 가문의 힘이 약해져 이마가와 씨의 보호 아래 들어갔다. 처음에는 오다 씨가 우세하여 전투는 미카와 국내에서 벌어졌지만, 덴분 11년(1542년) 제1차 아즈키자카 전투에서 이마가와 씨가 승리한 후로는 이마가와 씨가 우세했다. 그러나 오다 씨는 다시 역습을 시작해 오와리 국내의 이마가와 씨 측 성인 나루미 성 등 몇몇 성을 포위하여 고립시켰다.[51]이러한 정세를 보고 에이로쿠 3년 음력 5월 12일(6월 5일)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직접 대군을 이끌고 슨푸를 출발해 오와리를 목표로 도카이도를 따라 서진했다. 음력 5월 17일(6월 10일) 오와리의 이마가와 측 성들 중에서 가장 미카와 국과 가까운 구쓰카케 성에 입성한 이마가와 군은 다음날 밤 마쓰다이라 모토야스(훗날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미카와 지역 무사를 선봉으로 내세워 오타카 성에 병량을 공급하였다.[51] 도쿠가와 이에야스(당시 마쓰다이라 모토야스)가 지휘하는 미카와 군을 먼저 보내 대고성에 병량을 보급하게 했다.[18]
19일(6월 12일) 3시경, 모토야스와 아사히나 야스토모는 일제히 오다 씨 측의 요새를 공격했다. 한편 전날 이마가와 군의 움직임을 듣고도 그대로 있던 오다 노부나가는 이마가와 군의 공격 소식을 듣고 즉시 아쓰모리를 추고, 출진 준비를 갖춘 뒤 새벽 4시경 거성인 청수성을 출발했다.[19] 휘하의 부하들이 이를 보고 연이어 뒤따라오면서 8시경 아쓰타 신궁에 도착해 군대를 집결시키고 필승을 기원하였다.[51]
10시경 노부나가 군은 나루미 성을 둘러싼 요새 중 한 곳에 들어가 약 2,000명에서 3,000명으로 추정되는 군세를 정비했다.[19] 그 사이 이마가와 군 선봉의 맹공을 받고 2개의 요새가 함락당해 오타카 성 주변의 제압을 완료한 이마가와 측은 요시모토의 본대가 구쓰카케 성을 출발해 오타카 성 방면을 향해 서진했다. 한편 노부나가는 11시부터 12시경 요새에서 나와 나루미에서 보이는 도카이도 동남쪽에 해당하는 오케하자마 방면에서 적군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동남쪽으로 진군을 개시했다.[51]
이마가와 군 2만 5천 명은 와시즈의 오다 측 국경 요새를 빠르게 점령했고, 마쓰다이라 모토야스가 이끄는 마쓰다이라 군은 마루네 성을 함락시켰으며, 요시모토는 현재 나고야시 외곽 오케하자마 마을에 위치한 덴가쿠하자마에 진영을 구축했다. 반면 오다 노부나가는 2,000~3,000명, 이마가와 군의 10분의 1 정도의 병력만을 동원할 수 있었다. 측근 중 일부는 오다의 거점인 기요스 성으로 후퇴할 것을 권했지만, 노부나가는 기요스 성이 포위 공격을 견딜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대신 "적의 우세한 병력을 상쇄할 수 있는 것은 강력한 공격 전략뿐"이라고 말하며 역습을 명령했다.[3]
3. 2. 오케하자마 전투
오후 1시경 돌연 우박이었을 가능성이 있는 폭우가 쏟아져 시야가 나빠졌다.[4] 통설에는 이 호우를 틈타 우회기동하였다고 전해지는데, 현재는 이것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비가 내린 직후인 오후 2시경, 오다 군은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본대에 접촉하여 공격을 개시했다. 전군이 약 25,000명을 헤아리는 이마가와 군도 본대는 그 정도 대규모의 병력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2,000명이 하나로 뭉쳐 돌격하는 오다 군의 맹공에 의해 혼란에 빠졌고, 약세를 깨달은 요시모토는 퇴각을 명령했다. 그러나 양측의 대장이 직접 칼과 창을 휘두르는 난전이 벌어져 얼마 안가 요시모토의 하타모토(旗本) 부대에 노부나가의 하타모토 부대가 돌입했다.
요시모토는 노부나가의 우마마와리(馬廻) 중 한 명인 핫토리 가쓰타다(服部小平太)에게 베였는데, 거꾸로 핫토리의 오른쪽 팔을 베는 부상을 입혔다.[7][8][9] 그러나 핫토리와의 격투 중에 다가온 모리 신스케(毛利新助)와 또다시 난전을 벌인 끝에 그에게 죽임을 당했다.[7][8][9] 죽을 때 요시모토는 신스케의 손가락을 이빨로 물어뜯을 정도로 저항했다고 한다. 요시모토의 전사로 인해 이마가와 군 본대는 괴멸하고 전투는 오다 측의 대승으로 끝났다.
노부나가는 기요스성(清洲)에서 아쓰타 신궁(熱田神宮)을 거쳐 도카이도(東海道) 건너편 오케하자마(桶狭間) 근처에 있는 젠쇼지(善照寺)라는 요새화된 사찰까지 자신의 부하들을 이끌고 갔다.[4]
이마가와 정찰병들을 속이기 위해 노부나가는 부하들에게 젠쇼지 주변에 수많은 깃발과 깃발을 설치하여 훨씬 더 큰 병력을 보유한 것처럼 보이도록 명령했다.[5][6]
오케하자마 전투의 실제 전투 경과는 전설에 의해 과장되었고 역사적으로 불분명하다. 전통적으로는 6월 12일, 수적으로 압도적으로 불리했던 노부나가와 그의 부하들은 이마가와 본진 건너편 가마가타니(釜ヶ谷)라는 지역에 은신하여, 오다 군은 측면 기동을 통해 북쪽에서 덴가쿠하자마(田楽狭間)에서 이마가와 군을 공격했다고 알려져 있다.[6] 하지만 오다 군의 지형에 대한 익숙함과 노부나가의 공격적인 전술 성향으로 미루어 볼 때, 많은 현대 역사가들은 이 공격이 계획적이든 우연적이든 실제로 요시모토 진영에 대한 정면 공격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어찌 되었든 이마가와 군은 기습을 당했다. 이마가와 군은 최근의 쉬운 승리들을 자축하고 있었고, 오후 날씨가 매우 더웠기 때문에 많은 병사들이 갑옷을 벗고 있었다. 뇌우를 이용하여 이동을 은폐한 오다 군은 좁은 계곡에 위치한 이마가와 진영의 중심부를 강하게 공격했다. 기습 공격으로 혼란이 초래되어 이마가와 군은 병력이 흩어졌고 많은 병사들이 도망치려 했다.[4]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한 채 소음을 듣고 텐트에서 나와 부하들에게 술 취한 흥청거림을 그만두고 자리로 돌아가라고 소리쳤다. 잠시 후, 자신의 앞에 있는 무사들이 자신의 부하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방어를 조직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요시모토는 자신의 전쟁 진영에서 죽지 않았다. 요시모토와 그의 부하들은 재빨리 진영을 버리고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곳으로 도망쳤다.[7]
요시모토는 모리 신스케(毛利新介)와 핫토리 고헤이타(服部小平太)의 공격을 받았다. 요시모토, 무네노부(宗信), 나오모리(直盛)는 그들과 근접전을 벌여 초기 공격을 막았다. 요시모토는 창을 든 모리 신스케의 공격을 막아내고 오다 무사의 창을 베어 그의 무릎에 상처를 입혔다고 한다. 그 후 핫토리 고헤이라는 두 번째 오다 무사에게 붙잡혀 곧바로 목이 잘렸다.[7][8][9]
지휘관과 고위 장교 중 두 명을 제외한 모든 장교가 사망하자 남은 이마가와 군은 항복하거나 도망쳤다.
정오 무렵, 나카시마 砦(中嶋砦) 앞에 진을 치고 있던 오다 군의 사사 마사쓰구(佐々政次), 센슈 시로(千秋四郎) 등 30여 명의 부대는 오다 노부나가의 출진 소식을 듣고 기세등등하여 단독으로 이마가와 군의 선봉에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사사와 센슈 등은 오히려 이마가와 군의 반격을 받고 전사했다. 이후 이마가와 군이 마루네 砦(丸根砦)와 와시즈 砦(鷲津砦)를 차례로 함락시키고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자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크게 기뻐하며 우타이(謡)를 부르게 했다.
이때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본대를 배치하고 휴식을 취하고 있던 곳은 '오케하자마 산'(桶狭間山)이었다.[20]
이마가와 군의 총 병력은 2만 5천 명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마가와 측은 스루가(駿府)에서 출발하여 점차 토호(土豪)들이 합류하는 원정이었고, 그 안에는 병참 유지를 위한 수송병 등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게다가 이마가와 측은 병력을 분산시켰기 때문에,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호위하는 실제 병력은 적었고, 양측의 전력에 큰 차이는 없었다.
요시모토 본진 앞에 배치되어 있던 이마가와 군의 선봉은 오다 군과 접전하자 싸우지도 않고 무너져 내렸고, 오다 군은 그 혼란 속에서 이마가와 군의 본진을 향해 돌격했다. 이러한 갑작스러운 적의 강습을 알게 된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300명의 기본(旗本)의 호위를 받으며 곧바로 도망쳤다.
신장공기(信長公記)에 따르면,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이 예상치 못한 위급 상황에 가마를 버리고 300기의 기본(旗本)·친위대를 거느리고 주위를 굳게 하면서 서둘러 그 자리에서 기마로 탈출하여 후퇴했다. 그러나 5번에 걸친[21] 오다 군의 공격으로 주위의 병사들을 조금씩 잃어, 결국 오다 군의 말을 탄 무사에게 추격당했다. 고와다 야스쓰네(小和田泰経)는 오케하자마를 이 추격전이 벌어진 지역의 지명으로 보고, 지형도 계곡이나 좁은 길이 아니라 깊은 논밭과 습지가 펼쳐져 있었고, 게다가 폭우까지 내렸기 때문에 패주 루트 현장에서는 진흙탕에 발이 빠진 곳을 오다 군에게 공격받아 죽는 이마가와 군 병사도 많았다고 한다.[22] 혼전 속에서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타도(太刀)를 뽑아 스스로 분전하며, 첫 창을 꽂은 핫토리 가즈타다(服部一忠)에게 반격하여 무릎을 베었지만, 모리 요시카쓰(毛利良勝)(모리 신스케)에게 제압당하고, 목이 베여 사망했다(향년 42세).[23] 미즈노 가쓰나리(水野勝成)의 각서(覚書) 전문에 따르면,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목이 베일 때 모리의 왼쪽 손가락을 물어뜯었다고 한다.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전사한 현장은 이마가와 가의 자료에서는 '덴가쿠쿠보'(田楽窪)라고 기록되어 있다.[24] 오케하자마 전투로부터 27년 후인 1587년에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군사였던 다하라 스우후(太原崇孚)(= 다하라 셋사이(太原雪斎))의 삼십삼회 기제가 거행되었는데, 그때의 기록 '호고쿠 젠시 삼십삼회기 넨코 셋스고 히토조'(護国禅師三十三回忌拈香拙語并序)에 "5월 19일, 레이부(礼部) 오와리(尾州) 덴가쿠쿠보(田楽窪)에서 일전하여 자결했다"라고 적혀 있다. '레이부'는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가리키며,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5월 19일에 오와리의 '덴가쿠쿠보'에서 죽었다는 것이다. 이 '덴가쿠쿠보'의 위치는 현재 도요아케시(豊明市) 구쓰카케초(沓掛町)에 '덴가쿠케쿠보'(田楽ケ窪)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다.[25]
이마가와 군 총대장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전사로 이마가와 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군대는 완전히 무너졌으며, 오케하자마 전투는 오다 군의 승리로 끝났다.
에도 시대에 쓰여진 것으로 보이는 나고야시(名古屋市) 조후쿠지(나고야시 미도리구)(長福寺) 소장의 '오케하자마 합전 토시자쇼죠'(桶狭間合戦討死者書上)에 따르면, 이마가와 측의 전사자는 2753명, 오다 측의 전사자는 990명 남짓이었다. 또한, 서상에 따르면, 오미국(近江国) 사사키 측(롯카쿠씨(六角氏))이 오다 측에 참전했고, 원군의 사망자는 오다 측 중 272명을 차지했다고 한다.[26] 에도 시대에 롯카쿠 씨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위서가 쓰여졌고, 이 '오케하자마 합전 토시자쇼죠' 역시 허위 정보라는 연구자의 견해가 있다.[27]
;참전 병력
오다 군 | 이마가와 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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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3. 전투의 결과
이마가와 군은 총대장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비롯하여 마쓰이 무네노부, 히사노 모토무네, 이이 나오모리, 유이 마사노부, 요시다 우지요시, 이치노미야 무네코레 등 다수의 유력 무장을 잃고 무너졌으며, 남은 부대들도 스루가로 퇴각했다.[10] 오다카성을 지키던 마쓰다이라 모토야스(후일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전투 직후 오다카 성을 버리고 오카자키성 부근의 다이주지로 들어갔다. 오카자키 성을 지키던 이마가와 측 무장이 성을 버리고 스루가로 돌아갔기 때문에, 모토야스는 오카자키 성에 입성했다.[28][29]오와리, 미카와 양국 국경에서 이마가와 측에 있던 여러 성들은 계속해서 오다 측에 저항했으나, 오다 군은 이마가와 군을 격파한 기세를 몰아 음력 6월 21일(7월 14일)에 구쓰카케 성을 공략하는 등 일대를 일거에 탈환했다. 그러나 나루미성은 성주 오카베 모토노부와 부하들이 완강하게 저항하여 함락되지 않았다. 모토노부는 오다 노부나가와 교섭하여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수급(首級)과 교환하는 조건으로 성을 넘겨주고, 요시모토의 수급을 가지고 스루가로 귀국했다.[10]
이 전투로 서 미카와에서 오와리에 이르는 지역에서 이마가와 씨 세력이 없어지게 되었고, 오카자키의 모토야스는 이마가와 씨에게서 반(半)독립하여 마쓰다이라 씨의 옛 영토 회복을 목표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지방은 노부나가와 모토야스의 각축장이 되었다. 모토야스는 요시모토의 뒤를 이은 이마가와 우지자네가 요시모토의 복수전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표면적인 이유로 내세우며 이마가와 씨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와 에이로쿠 5년(1562년) 독단으로 오다 씨와 강화(기요스 동맹)를 맺었다. 이후 모토야스는 공공연히 이마가와 씨와 적대하여 미카와 통일을 추진했다. 노부나가는 마쓰다이라 씨와 강화를 맺어 동쪽에서의 위협이 사라지게 되어, 이후 미노의 사이토씨와의 전투에 전념하여 급속히 세력을 확대할 수 있게 되었다.[10]
오케하자마 전투는 일본 역사상 가장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로 여겨진다. 이 전투로 이마가와 씨는 크게 약화되어 멸망하게 되었다. 오다 노부나가는 명성을 크게 얻었고, 많은 사무라이와 소규모 영주들(이마가와의 옛 가신이었던 후일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인 마쓰다이라 모토야스를 포함)이 충성을 맹세했다.[10] 또한, 이 전투는 노부나가가 훗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되는 기노시타 도키치로(木下藤吉郎)의 재능을 처음 알아본 전투이기도 하다.
갑상순 삼국 동맹의 한 축이었던 이마가와 가문의 당주가 죽은 것은 호조 가문이나 다케다 가문과 적대하는 세력, 특히 에치고의 나가오 가게토라(우에스기 겐신)를 크게 고무시켰다. 간토에서는 오타 스케마사나 가쓰누마 노부모토 등이 반란을 일으키는 등 간토 제후의 대부분이 우에스기 겐신에게 편을 들어 싸웠다. 그리고 이 우에스기 군의 기세는 오다와라 성 전투나 제4차 가와나카지마 전투로 이어졌다. 또한 가이 다케다 씨와 이마가와 씨는 관계가 악화되어 에이로쿠 11년 말에는 동맹 관계가 종료되었다.
에이로쿠 11년(1568년) 12월 6일, 다케다 씨에 의한 스루가 이마가와 영토에 대한 침공(스루가 침공)이 시작되었다. 오다 노부나가와 다케다 씨는 에이로쿠 초기부터 외교 관계를 맺고 있었고, 다케다 씨는 동맹 상대인 이마가와 씨의 주적이었던 오다 노부나가와 거리를 유지했지만, 에이로쿠 8년경에는 노부나가의 양녀가 신겐의 세자인 다케다 가쓰요리에게 시집가는 등 관계가 좋아졌다. 이후, 오다 노부나가와 다케다 씨의 관계는 동맹 관계에 가까운 것으로, 다케다 씨의 서상 작전에서 관계가 끊어질 때까지 지역 정세에 영향을 미쳤다.
4. 전투 이후의 정세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오다 노부나가에게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비롯한 마쓰이 무네노부, 이이 나오모리 등 다수의 유력 무장을 잃은 이마가와 군은 무너졌고, 남은 부대들은 스루가로 퇴각했다.[10] 오타카성을 지키던 마쓰다이라 모토야스(후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전투 직후 성을 버리고 오카자키성으로 돌아갔다.
오와리와 미카와 국경 지대에 있던 이마가와 측 성들은 오다 가문에 저항했지만, 오다 군은 6월 21일 구쓰카케 성을 공략하는 등 일대를 장악했다. 나루미 성의 성주 오카베 모토노부는 완강히 저항했으나, 결국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목과 교환하는 조건으로 성을 넘겨주었다.[10]
이 전투로 서 미카와에서 오와리에 이르는 지역에서 이마가와 가문의 세력은 사라졌고, 마쓰다이라 모토야스는 1562년 오다 가문과 동맹을 맺고 미카와 통일을 추진했다. 오다 노부나가는 동쪽의 위협이 사라져 미노의 사이토 가문과의 전투에 집중할 수 있게 되어 세력을 확장했다.[10]
갑상순 삼국 동맹의 한 축이었던 이마가와 가문의 당주가 사망하면서 호조 가나 다케다 가와 적대하는 세력, 특히 나가오 카게토라가 크게 고무되었다. 간토에서는 오타 스케마사 등이 반란을 일으키는 등 간토 제후 대부분이 우에스기 겐신에게 가담했다. 이 우에스기 군의 기세는 오다와라 성 전투와 제4차 가와나카지마 전투로 이어졌다. 다케다 가문과 이마가와 가문은 관계가 악화되어 1568년 말 동맹 관계가 종료되었다.
1568년 12월 6일, 다케다 가문이 이마가와 영토를 침공(순가 침공)하기 시작했다. 오다 노부나가와 다케다 가문은 1560년대 초부터 외교 관계를 맺었고, 1565년경에는 노부나가의 양녀가 신겐의 아들 다케다 가쓰요리에게 시집가는 등 관계가 호전되었다. 이후 오다 노부나가와 다케다 가문은 동맹에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며 지역 정세에 영향을 미쳤다.
4. 1. 오다 노부나가의 세력 확대
오다 노부나가는 오케하자마 전투를 통해 명성을 크게 얻었고, 이마가와 씨는 이 전투로 크게 약화되어 이웃 세력들에게 곧 멸망당하게 되었다. 마쓰다이라 모토야스(후일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포함한 많은 사무라이와 소규모 영주들이 오다 노부나가에게 충성을 맹세했는데, 이들은 이마가와 씨의 옛 가신이었다.[10]이 전투는 노부나가가 훗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되는 기노시타 도키치로(짚신을 신는 자)의 재능을 처음 알아본 전투이기도 하다.
4. 2. 이마가와 가문의 몰락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대두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이끄는 주력 부대는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마쓰이 무네노부(松井宗信), 이이 나오모리 등 많은 유력 무장을 잃고 무너졌다. 남은 부대들은 스루가로 퇴각했고, 오타카 성을 지키던 마쓰다이라 모토야스(후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오카자키 성으로 돌아갔다. 이마가와 가문의 세력이 약화되자, 모토야스는 이마가와 가문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하기 시작했다.[10]오와리와 미카와 국경 지대에 있던 이마가와 측 성들은 오다 가문에 저항했지만, 오다 군은 이들을 격파하고 일대를 장악했다. 나루미 성의 성주 오카베 모토노부(岡部元信)는 완강히 저항했으나, 결국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목과 교환하는 조건으로 성을 넘겨주었다.
이 전투로 서 미카와에서 오와리에 이르는 지역에서 이마가와 가문의 세력은 사라졌고, 마쓰다이라 모토야스는 오다 가문과 동맹을 맺고 미카와 통일을 추진했다. 오다 노부나가는 동쪽의 위협이 사라져 미노의 사이토 가문과의 전투에 집중할 수 있게 되어 세력을 확장했다.[10]
오케하자마 전투는 일본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받는다. 이마가와 가문은 몰락하고, 오다 노부나가는 명성을 얻었으며, 마쓰다이라 모토야스를 비롯한 많은 무장들이 노부나가에게 충성을 맹세했다.[10] 또한, 이 전투는 훗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되는 기노시타 도키치로의 재능이 처음으로 드러난 전투이기도 하다.
5. 전투의 실태를 둘러싼 논쟁
오케하자마 전투는 그 경과가 대체로 알려져 있으나, 전투의 실제 모습과 성격에 대해서는 불확실한 점이 많아 여러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34] 특히 전투의 정확한 발생 지점과 오다 노부나가의 기습 성공 여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이러한 논쟁들은 사료의 부족과 해석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오케하자마 전투의 진실을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더한다.
5. 1.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침공 목적 논쟁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오와리 침공 목적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상락', 즉 교토에 들어가 무로마치 막부의 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이 정설로 알려져 왔다.[34] 그러나 요시모토는 이마가와 가문을 계승한 뒤 미카와와 오와리에서 점진적으로 세력을 넓혀왔고, 오와리를 완전히 제압하지 않은 상황에서 상락을 목표로 하는 것은 무리한 결정이었다는 반론이 있다.[35] 또한, 이마가와 가문이 오와리 슈고직을 겸임했던 시기가 있어 오와리를 단순한 주변국이 아닌, 이마가와 가문의 옛 영토로 인식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옹립하여 상락한 오다 노부나가나, 이후 교토에 들어가 노부나가를 대신해 중앙 권력을 장악하려 한 다케다 신겐의 사례가 있지만, 당시 요시모토의 상황은 이들과 크게 달랐다. 노부나가와 신겐은 쇼군 등에게서 상락 명령을 명분으로 삼았지만, 요시모토의 경우 객관적인 정세와 영토 확대 방침을 고려할 때 이러한 명령에 따른 군사작전이었다고 보기 어렵다.
실제로 요시모토가 1559년에 발행한 출진 준비 문서에는 '상락'이라는 표현이 없었다.[35] 상락이 목적이었다면 아사쿠라 요시카게, 롯카쿠 요시카타, 기타바타케 도모노리 등에게 협력을 요청하는 문서가 남아있어야 하지만, 그러한 문서는 발견되지 않았고, 당시 쇼군이었던 아시카가 요시테루와 요시모토 사이에 교류나 행동이 있었다는 사료도 없다.
당시 오와리와 미카와 국경 지대에서는 이마가와 군이 오와리 쪽으로 진출하여 우세했지만, 최전선인 나루미 성과 오타카 성은 오다 측의 요새에 포위되어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 두 성을 구원하기 위한 영토 분쟁의 일환이었거나, 더 나아가 오와리 탈취를 목표로 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현재의 정설로 여겨진다.
오오이시 야스시는 상락설은 성립하기 어렵다고 보고, 비상락설을 다음과 같이 6가지로 분류했다.
1. 오와리 공격설
2. 이세·시마 제압 지향설
3. 오와리 방면 영토 확장설
4. 구 나고야 이마가와 영토 탈환·회복설
5. 나루미 성·오오다카 성·구츠카케 성 봉쇄 해제·확보 지향설
6. 미카와·오와리 국경 안정화설
오오이시는 이 중 2, 3, 4는 근거 사료가 부족하여 긍정하기 어렵고, 1, 5, 6은 모두 관련성이 있어 굳이 하나로 단정할 필요는 없다고 보았다.
5. 2. 전투 장소와 기습 여부 논쟁
오케하자마 전투의 본 전투에 대해서는, 근본적으로 "어디서, 어떻게 행해졌는가"라는 점에 있어서 논의되고 있는 문제가 있다.오케하자마 전투의 경위에 대해서는 오타 규이치의 《신장공기》, 또는 《신장공기》를 각색한 오제 호안의 《신장기》에서 구체적으로 저술되어 있지만, 양쪽의 기록에는 많은 차이가 보인다. 일반적으로 《신장공기》는 기록성이 강하고, 《신장기》는 호안 자신의 사관에 의한 개찬이 보여 사료 가치는 낮다.[42]
"오케하자마야마(桶狭間山)"의 위치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엔쿄(延享) 2년(1745년)의 오오와키무라(大脇村)(현·도요아케시) 그림에는 오오와키무라와 오케하자마무라(桶狭間村)의 경계에 표시되어 있으며, 텐메이(天明) 원년(1781년)의 오치아이무라(落合村)(현·도요아케시) 그림에는 오치아이무라와 오케하자마무라의 경계에서 앞서 언급된 오오와키무라 그림보다 약간 남쪽으로 내려간 산으로 표시되어 있다.
한편, 에도 시대에 그려진 오케하자마 전투의 전투도 중에는,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본진 위치로 에도 시대 당시 오케하자마무라 부근에 있는 언덕을 표시한 것이 있다. 이러한 그림 속의 "오케하자마야마"가 16세기의 오타 규이치의 인식과 일치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오케하자마는 게이쵸(慶長) 13년(1608년) 검지(檢地)에서 마을 이름이 되었다. 참고로 오제 호안의 《호안 노부나가키(甫庵信長記)》에는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죽은 곳은 "타가라사마(田楽狭間)"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에도 시대에 출판되어 널리 퍼졌지만, 각색이며 사료적으로는 신뢰성이 없어졌다. 타가라사마는 대자(大字)이며, 그 초견은 간에이(寛永) 원년(1624년) 야마스미 에이류(山澄英龍)의 《오케하자마 갓센키(桶狭合戦記)》로 그 이전에는 없다.
- 후지모토 마사유키(藤本正行) : 한 지점의 언덕이 아니라, 나카지마토리데(中嶋砦) 동쪽 일대의 구릉을 가리킨다.
- 코와다 테츠오 : "오케하자마야마"의 위치를 도요아케시의 고센죠(古戦場) 남쪽에 있는 표고 64.7미터 지점으로 특정하고 정상에 본진이 있었다고 한다. 이곳은 주변에서는 최고봉으로, 맑은 날에는 멀리 나루미 성와 젠쇼지토리데 부근까지 내다볼 수 있다고 한다. 또, 이곳에서 보면 도요아케시의 고센죠 흔적은 북쪽 기슭, 나고야시의 고센죠 흔적은 서쪽 기슭이 된다. 오다군(織田軍) 2,000명과 이마가와군(今川軍) 5,000명이 부딪쳤으므로, "오케하자마야마"의 기슭 일대는 모두 전장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 틀림없다고 하며, 어느 고센죠 흔적도 진짜라고 하고 있다. 코와다에 따르면, "오케하자마야마"에서 구쓰카케 성로 도망친 이마가와군이 도요아케시의 고센죠에서 죽었고, 오다카 성로 도망친 이마가와군이 나고야시의 고센죠에서 죽었으며, 또 요시모토의 전사지에 관해서는 《조쿠메이료코우한(続明良洪範)》이라는 자료에 요시모토는 오다카 성로 도망치려고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나고야시 쪽에서 전사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고 있다.
- 코지마 히로지(小島廣次) : 위의 도요아케시 고센죠 남쪽에 있는 표고 64.7미터 언덕의 북쪽 고지와의 안부에 본진이 있었다.
- 이소다 미치후미 : 입수한 《템포(天保) 11년 도츄 니키(道中日記)》(1840년. 카이 국(甲斐国) 하다군(八代郡)(카이 국)|하다군(八代郡)] 남타나카무라(南田中村)(현·야마나시현후에후키시 이치노미야쵸(一宮町)) 타나카 덴자에몬(田中伝左衛門) 저)에는 "오케하자마(桶はざま). 왕래에서 왼쪽, 반정(半丁)(54m) 정도 안쪽. 이마가와 요시모토 공 전사의 장소 및 칠장(七将)의 무덤, 있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이소다에 따르면, 메이와(明和) 8년(1771년) 오케하자마 고센죠에 "시치세키표(七石表)"라는 이마가와 요시모토 등의 비석이 세워졌고, 그것을 본 것이 아닐까 한다[43].
오케하자마 전투의 본 전투 상황에 대해서는, 대략 다음 4가지 설로 정리할 수 있다.
'''우회 공격설'''
선조사 성채를 나온 오다 노부나가는,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본대가 움푹 들어간 곳인 덴가쿠하자마[53]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목을 노려 기습 작전을 취하기로 결정했다. 오다 군은 이마가와 군에게 눈치채이지 않도록 은밀히 우회하여, 폭우를 타고 접근하여 데가쿠사마 북쪽 언덕 위에서 이마가와 군을 기습, 대혼란에 빠진 이마가와 군을 격파하여 마침내 요시모토를 전사시켰다.
'''정면 공격설'''
선조사 성채를 나온 오다 노부나가는, 이마가와 군의 진영을 보고 선조사 성채와 마루네 성채, 와시즈 성채를 잇는 위치에 있는 나루미 성 남쪽 최전선인 나카시마 성채에 들어갔다. 폭우 후 오케하자마 산에 있던 이마가와 군에 접근하여 정면에서 공격을 가했다. 이마가와 군의 선봉은 오다 군의 갑작스러운 정면 돌격으로 돌파되었고, 그 혼란 속에서 요시모토의 본진으로 쇄도하여 요시모토는 깃발을 든 무사들에게 둘러싸여 후퇴했다. 하지만, 남겨진 가마에 의해 노부나가가 요시모토를 발견하고 추격을 명령하여 마침내 요시모토는 죽임을 당했다.
'''별동대설'''
작가 하시바 츠키히는, 위의 두 설을 참고하여 새로운 설로서 "정면 공격 + 별동대에 의한 후방 기습"설을 주장하고 있다. 그 근거로 《신장공기》 갓카케(沓掛) 고개의 소나무 이야기에 있는 강풍에 의한 고목 넘어짐 기록을, 구쓰카케 성 북북동, 나카시마 성채에서 6km 떨어진 현재 도요아케시 갓카케정 마쓰모토(沓掛町松本)에서 오다 군이 별동대로 전개하고 있었다고 한다.[44] 에하타 히데사토(江畑英郷)는 2009년 간행의 《오케하자마 신군·노부나가의 전략과 실상》(桶狭間 神軍・信長の戦略と実像)(카나리아 서점)에서, 오다 군이 미리 확보하고 있던 갓카케 고개 방면에서 온 별동대에게 공격받은 이마가와 군 병참 부대가 본진으로 붕괴되었고, 그 혼란에 휘말려 요시모토가 죽임을 당했다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오카베 모토노부가 후퇴 시 미즈노 노부치카를 죽인 것은, 일단 이마가와 측에 붙었다가 배신한 것에 대한 보복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난전 상태 급습설'''
쿠로다 히데오는 《교양군감》에서, 요시모토의 군대가 난전 상태로 흩어져, 요시모토 자신은 현지 미카와 국의 승려로부터 받은 술과 음식으로 승려들도 참가한 술자리를 하고 있던 곳을 급습당했다고 하며, 이를 평가하는 설을 주장하고 있다.[45]. 다만, 《교양군감》에서는 주변 상황이 다르며 지리, 개전 경위, 전장 경과도 모르는 전해 듣기만 한 기록이다. 쿠로다 설은 《교양군감》에는 와시즈 성채, 마루네 성채 함락이나 사사 마사쓰구·센슈 시로 전투 완승의 사실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데, 다른 기록을 짜맞춰 설을 구성하고 있다고 비판받고 있다. 재평가되고 있는 《교양군감》에서도 다른 나라의 일은 사료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반론하고 있다.
"우회 공격설"은 에도 시대 초기 오제 호안 작 《노부나가기》에서 다루어져 오랫동안 정설로 여겨져 온 설이다. 이에 대해 "정면 공격설"은 노부나가를 섬겼던 오타 규이치의 저서로 신뢰성이 높은 《신장공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또 《신장공기》의 기록은 《노부나가기》와 크게 다르기 때문에 "우회 공격설"에는 현재 부정적인 견해가 많다.
"우회 공격설"에서는, 전제로 이마가와 군이 마루네 성채, 와시즈 성채를 함락시키고 승리에 자만하여 방심하고 있었다고 한다. 방심한 대군에 결사대가 돌입하여 격파한다는 구도는 극적이고 이해하기 쉽고, 또 오케하자마에서 오다 측의 승리 요인을 설명하기 쉬운 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이마가와 측이 방심하고 있었다고 명확히 전하는 사료는 당시의 것이 적고 근거가 부족하며, 상식적으로 보아도 합전에 익숙한 당시 장수 중 한 명인 이마가와 요시모토(혹은 이마가와 측 장수들)가 그러한 치명적인 방심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는 반론도 있다. 예를 들어 오쿠보 타다노리의 《미카와 이야기》에서는, 요시모토가 오케하자마 산으로 향하는 오다 군을 확인하고 북서 방향에 방비를 굳히고 있었다고 쓰여 있는 것처럼, 당시 사람들에게 이마가와 측이 반드시 방심하여 기습을 받았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또, 오다 군의 "기습" 성공 요인으로서, 이마가와 군의 정보를 오다 노부나가가 미리 잘 수집하고 있었다는 견해는 매우 자주 보인다. 그 근거로 유명한 것이, 오다 노부나가가 오케하자마 전투 후 공훈을 포상할 때, 요시모토의 목을 벤 모리 요시카쓰가 아니라 이마가와 군의 위치를 노부나가에게 알린 야나다 마사쓰나가 공훈 제1위가 되었다는 《호안 신장기》 등의 일화이다. 이 견해는 노부나가가 전쟁에서 정보의 중요성을 매우 잘 인식하고 있었던 증거로서 제시되고, 노부나가의 혁신성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로서 다루어지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신장공기》의 기록을 전면적으로 채용하는 정면 공격설에 따르면, 노부나가가 미리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는 견해에도 무리가 있다. 이에 따르면, 이미 언급했듯이 이마가와 군이 방심하여 저지대의 방어하기 어려운 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는 전제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요시모토의 위치는 파악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신장공기》에 따르면 노부나가 자신도 나카시마 성채에 들어간 자리에서 적진으로 돌입하는 것을 만류하는 가로에게, "적은 야간 행군하여 병량 반입 후 마루네 성채, 와시즈 성채를 공격한 직후라 지쳐 있을 것이고, 전장에 도착한 바로 신참인 오다 군이 공격하면 쉽게 격파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중신에 대한 훈시를 하고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노부나가 자신은 오케하자마에서 발견한 적군을 구쓰카케 성에서 나온 바로 적 본대라고 생각하지 않고, 야간 행군하여 오다카 성에 병량을 반입하고 그대로 출격하여 마루네 성채, 와시즈 성채를 공격한 직후 적군의 선봉대일 것이라고 생각하여, 이를 한꺼번에 격파하여 어쨌든 열세를 뒤집으려고 했을 뿐, 요시모토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존재를 몰랐다는 것이다.
《신장공기》를 전면적으로 근거로 하는 입장에 따르면, 결국 노부나가는 요시모토의 소재나 행동을 몰랐고 오다 노부나가가 일시적인 형세 역전을 노려 시작한 공격이 우연히 적 본대에 대한 정면 돌격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마가와 군은, 원래 이마가와 측의 영지에서 이세 만의 조수 간만으로 만조 때는 원군이 오기 어려운 시간에 공격을 시작하는 등 지리에 밝았다. 거기에 노부나가 측이었던 야마구치 사마스케의 배신 이후, 더욱 지형에 정통한 자의 조언으로, 병력 배치와 점령도 순조로웠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새벽에 전투 개시가 전국 시대 전투의 관례였지만, 오후 2시라는 상식 밖의 시간에 노부나가 군이 나타나 저지대에서 공격을 가해왔다. 이에, 요시모토를 총대장으로 하고 있던 이마가와 군 본진이 급변에 대응하지 못하고 방어하기보다는 깃발을 든 무사들에게 둘러싸여 후퇴했고, 남은 가마를 본 노부나가에게 요시모토의 존재가 알려져 노부나가 군의 기마병의 추격과 더불어 공격으로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다.
이상에 따라, 노부나가의 요시모토에 대한 본진 공격은 요시모토를 노리고 지형적으로 선택되어 계획적으로 이루어진 기습이 아니라, 요시모토가 있는 본진이었던 것도 우연이며, 우발적으로 요시모토 본진 돌격이 되어 죽임을 당했고, 전국 시대 다이묘가 전장에서 전사한 드문 사례가 되어, 그 결과 이마가와 군이 총붕괴하여 추격을 받고 대패했다는 해석이 된다. 이와 같이 《신장공기》를 전면적으로 의존하는 정면 공격설에 따르면, 오케하자마에서 오다 측의 승리는 여러 가지 조건이 겹쳐서 가져온 행운에 의한 성공이 된다는 것이다.
또, 현재도 잘 알려지지 않은 일이지만, 《신장공기》에 따르면, 노부나가 본대에서 사사 마사쓰구와 센슈 시로 등 300명 정도의 보병 부대가 본전 이전에 이마가와 군에 공격을 가해 패퇴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사사 주인 전사). 코와다 테츠오에 따르면, 노부나가 본대의 움직임을 이마가와 군에게 알기 어렵게 하기 위한 유인 부대로 나루미 성을 이 부대에게 공격시켜 "노부나가 군은 나루미 성을 공격한다"고 이마가와 군에게 생각하게 하기 위한 부대라는 것이다. 후지모토 마사유키는, 당시 합전에서 자주 있었던 일이지만, 단순히 전장에 도착한 노부나가 앞에서 공을 세우기 위해 독자적인 판단으로 선행을 한 것이라는 설이다. 이 부대에 젊은 시절의 마에다 도시이에가 동료를 베고 출근 정지 처분을 받았지만, 이 선행에 참전하여 적의 목을 베어 노부나가에게 보였다(마에다가 가보).
위와 같이, 야나다 마사쓰나의 정보를 바탕으로 기습 작전을 감행했다는 설에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또한, 애초부터 기습 작전을 감행하려면 미리 치밀한 작전을 세웠을 것이며, 이마가와 군이 휴식 중이든 행군 중이든 기습은 실행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휴식 장소를 알렸다는 것만으로 공훈 제1위가 되는 것은 과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애초에 야나다 데와슈가 공훈 제1위가 되었다고 하는 기록은 사료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패자인 이마가와 가에는 이 전후의 감장(感状)가 남아 있지만, 승자인 오다 가에는 노부나가의 감장이 존재하지 않는다.
야나다 데와슈의 공훈 제1위라는 표현에 비교적 가까운 것은, 오제 호안의 《신장기》나 《무가사기》에 있는 "(요시모토를 토벌한) 모리 요시카쓰를 능가하는 특훈으로 여겨졌다"고 하며, 그 보상으로 구쓰카케를 받았다고 하는 부분이며, 공훈 제1위는 오케하자마 전투 후, 그때까지 이마가와 씨의 영토였던 구쓰카케를 야나다 데와슈가 받았다는 사실에서, 후에 이루어진 소설적인 해석이다.
그 밖에, 야나다 데와슈가 합전 전에 정찰이나 지형 조사를 했다고도 말해지고 있지만(《무공야화》 등), 확실한 것은 아니다. 현대에는 무네오카 아쓰히코가 군사 연구가의 관점에서 상세하게 구상하고 있음[46] 외에, 코와다 테츠오가 구쓰카케의 토호였던 야나다 데와슈가 지형 등을 파악하고 있었을 가능성에 언급하고 있지만, 이것들에도 사료적인 뒷받침은 없고, 야나다 씨의 본령은 9평이라는 설도 있다[47]. 다케다 쿄무라(武田鏡村)는 "합전 시에는 양쪽에 좋은 얼굴을 하는 것이 지역 소토호의 지혜"라고 하며, 요시모토 본대의 장소를 토호가 알린 상대로 야나다의 이름을 내고 있다[48].
사료에 남는 사실은, 오케하자마 전투 전까지는 이마가와 씨 영토였던 구쓰카케가, 이 전투 후에 야나다 씨에게 받쳐졌고, 그 영토가 되었다는 것뿐이다. 구쓰카케를 받을 만한 공을 세운 것은 확실하지만, 그것이 어떤 공인지는 알 수 없다.
6. 오케하자마 전투의 역사적 의의
1937년, 일본 문부성은 오케하자마 전투터(오케하자마 고센죠)를 일본의 국가 사적으로 지정했다.[11][12] 이곳은 아이치현 도요아케시 사카에정 미나미야카타에 위치하며, 칠국표(七国標)라고 하는 일곱 개의 화강암 기둥이 있다. 각 기둥은 이마가와 요시모토 휘하 7명의 장수를 나타내며, 첫 번째 기둥에는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이곳에서 죽었다"라고 적혀 있다.
현재 오케하자마 전투터는 공원으로 조성되었다.[11]
7. 오케하자마 전투를 소재로 한 작품
- NHK 대하드라마
- * 풍림화산: 제45화 「모략! 오케하자마」에서, 오다군의 작전을 간파한 야마모토 칸스케의 도발에 넘어간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칸스케가 피하라고 충고했던 오케하자마로 진격하여 전사한다.[49]
- * 여성 성주 나오토라: 제9화 「오케하자마에서 죽다」에서, 주인공의 친가인 이이가(井伊家)의 관계자를 중심으로 묘사되고 있다.
- * 기린이 온다: 제20화 「가토키에게 보낸 편지」, 제21화 「결전! 오케하자마」에서 오케하자마 전투 전야와 합전 당일이 묘사되며, 주인공인 아케치 미쓰히데가 오케하자마에 가는 설정으로 되어 있다.
- * 결정! 가토키: 제1화 「결전! 오케하자마」에서, 오다카 성에 군량을 운반하는 임무를 수행한 직후에 요시모토의 전사 소식이 전해지고, 최전선에서 결단을 내려야 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고뇌가 그려지고 있다.[50]
- 후지 TV
- * 오케하자마 OKEHAZAMA〜오다 노부나가〜
- 가와노 이치로(河野一郎) 『노부나가 전기(信長戦記)』: 제1권(오케하자마 전투 편). 의원(義元)을 뛰어난 무장으로 묘사하고, 오다 노부나가는 화살(矢) 전투에서 강한 순풍의 도움을 받는 등 간신히 승리했다고 서술한다.
- 미야시타 히데키(宮下英樹) 『센고쿠 외전 오케하자마 전기(センゴク外伝 桶狭間戦記)』
- 보드 게임
- * 오다 노부나가 (반다이 if 시리즈)
- * 노부나가 풍운록 (츠쿠다호비)
- * 노부나가의 도박〜강습 오케하자마〜(쇼 기획)
- * 오케하자마 전투(워게임 일본사)
- 아케이드 게임
- * 전국대전 - 1560 오와리의 풍운아 -(※초기 버전) (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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