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리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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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리우주는 핀란드만 남쪽에 위치한 에스토니아의 주(county)로, 수도는 탈린이다. 고대 레발라와 하르유마를 중심으로 덴마크, 리보니아 기사단, 스웨덴,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거쳐 에스토니아 공화국으로 독립했다. 1940년 소련에 점령된 후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의 점령을 겪었으며, 소련 재점령 이후 독립을 회복했다. 16개의 지방 자치체로 구성되어 있으며, 탈린이 가장 큰 도시이다. 인구는 2021년 기준 약 61만 명이며, 에스토니아인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종교는 무교가 가장 많고, 기독교가 그 뒤를 잇는다. 북에스토니아 해안 평원과 발트 클린트 지형을 가지며, 라헤마 국립공원 등 여러 보호 구역이 있다. 교통은 탈린을 중심으로 발달했으며, 고속도로, 철도, 항구, 렌나트 메리 탈린 공항 등이 주요 시설이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하리우주 - 탈린
탈린은 핀란드만 남동해안에 위치한 에스토니아의 수도로, 덴마크, 스웨덴,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거쳐 독립 후 수도가 되었으며, 정보 기술, 관광, 물류가 발달하고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구시가지를 포함한 다양한 문화 시설을 갖춘 도시이다. - 하리우주 - 마르두
마르두는 에스토니아의 도시로, 6개의 지역으로 나뉘며, 러시아인 비율이 높고 무교 신자가 많으며, 마르두 미하일 대천사 교회, 이루 화력 발전소 등의 시설이 있다. - 에스토니아의 주 - 이다비루주
이다비루 주는 에스토니아 북동부에 위치했던 주로, 러시아인 비율이 높았으며 2017년 행정 개혁으로 소멸되었다. - 에스토니아의 주 - 라플라주
에스토니아에 위치한 라플라주는 1241년에 처음 기록되었으며 석회암과 백운암이 풍부하고 4개의 지방 자치체로 구성되어 있으며 무교가 대다수를 차지하고 포르쿠니 성문 타워와 팜세 영지 등 다양한 문화 유적지를 포함한다. - 행정 구역 - 팔라우
팔라우는 태평양에 위치한 섬나라로, 스페인, 독일, 일본의 지배를 거쳐 미국의 신탁통치를 받았으며 1994년 독립하여 대통령 중심의 민주 공화국 체제를 갖추고 관광 산업, 특히 스쿠버 다이빙과 스노클링이 발달했으며 팔라우어와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모계 사회의 전통이 강하다. - 행정 구역 - 마셜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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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리우주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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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이름 | 하리우주 (Harju maakond) |
유형 | 주 |
수도 | 탈린 |
기타 도시 | 케일라 록사 마르두 |
면적 | 4,333 km² |
인구 | 638,076 명 (2023년 기준) |
인구 순위 | 1위 |
인구 밀도 | 147.26 명/km² |
통치 | |
주지사 | Ülle Rajasalu |
민족 구성 | |
에스토니아인 | 59.34% |
러시아인 | 27.1% |
기타 | 13.56% |
경제 | |
GDP (2022년) | 216억 8천만 유로 |
1인당 GDP (2022년) | 34,615 유로 |
기타 정보 | |
ISO 3166 코드 | EE-37 |
웹사이트 | 하리우주 관광 웹사이트 |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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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현대 하리우주의 영토는 레발라와 하르유마 두 개의 고대 에스토니아 군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레발라는 현재 탈린 주변 지역이고, 하르유마는 레발라 남쪽에 위치하며 현재 대부분 라플라 주에 속한다. 당시 핀란드만에 위치한 작은 무역 기지였던 린다니세는 레발라의 수도 역할을 했다. 린다니세는 이후 대부분 독일인이 거주하는 한자동맹 도시인 '레발'로 성장했으며, 나아가 에스토니아의 수도인 탈린으로 발전했다.
1219년, 덴마크 국왕 발데마르 2세는 린다니세(덴마크어: ''Lyndanisse'')에 상륙하여 레발라와 하르유 카운티를 정복했고, 주민들은 기독교로 강제 개종되었다.[1] 리보니아 십자군 전쟁(1208–1227 에스토니아) 말에 두 카운티는 검 형제 기사단에 점령되었다가 1238년 스텐스비 조약을 통해 덴마크에 반환되었다.[1]
덴마크인들은 탈린의 툼페아 언덕에 토메아 성(''Castrum Danorum'')을 건설했고, 이곳은 빠르게 에스토니아에서 가장 큰 정착지가 되었다.[1] 1248년, 이곳은 에스토니아에서 최초로 도시 권리를 부여받은 정착지였으며, 1285년에는 한자 동맹의 최북단 회원이 되었다.[1]
독일의 지배는 성 게오르기우스 밤 봉기로 이어졌고, 이 봉기는 1343년 오늘날의 파디세 교구에 있는 파디세 수도원의 방화로 시작되었다.[1] 이 봉기로 인해 덴마크는 북부 에스토니아의 영토를 리보니아 기사단에 매각하게 되었다.[1] 1561년, 리보니아 전쟁이 발발한 후, 북부 에스토니아의 귀족과 탈린 시의회는 스웨덴에 충성을 선언했다.[1] 탈린과 전쟁 중 획득한 기타 스웨덴 점령 지역은 플루사 조약에 의해 확보되었다.[1]
대북방 전쟁 동안, 하르유는 에스토니아에서 오랫동안 전쟁의 영향을 받지 않은 몇 안 되는 지역 중 하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르유 카운티는 카운티 인구의 80% 이상을 사망케 한 1710-1713년 전염병으로 큰 영향을 받았다.[1] 러시아군은 마침내 1710년에 도착하여 스웨덴 수비대가 항복할 때까지 한 달 동안 탈린을 포위했고, 이로써 에스토니아에서 대북방 전쟁이 종식되었다.[1] 러시아의 지배는 1721년 니스타드 조약으로 확정되었다.[1] 전염병은 수년 동안 계속되어 결국 카운티의 여러 지역이 완전히 무인 지대가 되었다.[1]
제정 러시아의 지배는 탈린과 발디스키(스웨덴어: ''로게르비크'')에 해군 기지를 건설하면서 시작되었다.[1] 러시아 차르 표트르 1세는 1711년부터 1723년 사이에 최소 9번 탈린을 방문했다.[1] 그는 1714년에 탈린 해군 기지 건설을, 1718년에는 발디스키 해군 기지 건설을 직접 시작했다.[1]
1870년에는 발디스키-탈린-상트페테르부르크 철도가 개통되었고, 이후 노선을 따라 발디스키, 케이, 사우에, 뇜메, 아루큠라, 라아시쿠, 케라 및 아에그비두 (당시 비루 카운티)와 같은 여러 작은 정착지가 성장하기 시작했다.[1] 표트르 대제의 해군 요새의 여러 요소가 하리우주에 건설되었으며 그 본부는 탈린에 있었다.[1]
제1차 세계 대전 중인 1914년, 나이싸르 섬의 원주민은 섬에서 추방되었고 섬은 군사 기지로 바뀌었다.[1] 섬에는 협궤 철도망이 건설되었다.[1] 탈린은 10월 혁명의 시작 지점이었는데, 에스토니아의 볼셰비키 얀 안벨트가 1917년 11월 5일 탈린에서 권력을 잡았고, 이는 페트로그라드에서 혁명이 시작되기 이틀 전이었다.[1] 1917년 11월 9일, 볼셰비키는 총독 얀 포스카로부터 권력을 빼앗았다.[1] 쿠데타 이후, 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집행 위원회와의 협력을 거부하면서 에스토니아 지방 의회(에스토니아어: ''마아노우코구'')는 1917년 11월 28일 탈린에서 러시아 제국으로부터의 주권을 선언했다.[1] 1917년 12월, 스테판 막시모비치 페트리첸코의 지도하에 러시아 해군은 "나이싸르의 병사와 요새 건설자 소비에트 공화국"을 선포했다.[1] 그들은 1918년 2월 26일 독일군에 의해 축출되었다.[1]
에스토니아 공화국은 1918년 2월 24일 탈린에서 선포되었고, 다음 날 독일의 점령이 시작되었다. 독일의 지배는 독일의 11월 혁명으로 끝났다. 에스토니아 독립 전쟁 동안, 소련군은 1918년 말에 탈린에서 동쪽으로 불과 40km 떨어진 곳에서 저지되었다. 탈린은 실패한 공산주의 1924년 쿠데타 시도의 장소였다.
1939년 9월 18일, 나치 독일과 소련의 폴란드 침공 이후, 폴란드 잠수함 ORP 오제우가 오제우 사건으로 탈린 항구에서 억류되었다가 탈출했다. 이 잠수함은 영국으로 향했고, 이 사건은 소련과 독일 양국에 에스토니아의 중립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게 만들었다. 1939년 9월 24일, 소련 해군 군함이 북 에스토니아 해역에 나타났고, 소련 공군 폭격기가 탈린과 인근 지역 상공을 순찰했다.
소련은 에스토니아에 소련 군사 기지를 허용하고 유럽 전쟁 기간 동안 에스토니아 영토에 25,000명의 병력을 주둔시킬 것을 요구했다. 1939년 9월 28일, 에스토니아 정부는 최후 통첩을 받아들여 소련-에스토니아 상호 원조 조약을 체결했다. 팔디스키는 소련 해군 기지가 되었고, 그곳 주민들은 강제로 이주당했다. 북 에스토니아에 새로운 군사 기지를 확보한 소련은 1939년 11월 30일 핀란드를 침공하여 겨울 전쟁을 시작했다. 1939년부터 1940년까지 탈린과 하리우주 시골 지역의 대부분의 발트 독일인들은 독일로 피난을 갔다(''Umsiedlung'').
1940년 6월 14일, 소련 해군은 핀란드만과 발트해에 해상 봉쇄를 설치하고 탈린 근처 나이싸르 섬 서쪽에 해군 함대를 주둔시켰다. 소련 폭격기는 케리 섬 근처에서 여객기 "칼레바"를 격추하여 외국 외교관을 포함한 탑승자 9명 모두 사망했다.
1940년 6월 16일, 붉은 군대가 에스토니아를 침공하여 탈린에서 소련의 쿠데타를 조직했다. 1940년 6월 21일, 탈린의 독립 신호 대대는 붉은 군대에 저항했지만, 같은 날 항복하고 무장 해제되었다. 소련은 조작된 의회 선거를 조직했고, 새 의회는 1940년 7월 21일 에스토니아 SSR을 선포했으며, 1940년 8월 6일 소련에 합병되었다. 대부분의 카운티 및 지방 자치 단체 지도자들이 교체되었고, 지방 의회는 소비에트로 교체되었다. 나이싸르 섬의 원주민들은 1914년처럼 섬이 군사 기지로 바뀌면서 섬에서 추방되었다. 1940년-1941년 소련 점령 기간 동안 수천 명이 처형, 투옥, 노동 대대로 동원되거나, 1941년 6월 14일 6월 추방으로 시베리아로 추방되었다.
1941년 6월 22일 독일은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소련을 침공했고, 핀란드는 1941년 6월 25일 소련과의 계속 전쟁을 선포했다. 소련이 후퇴하면서, 소련의 소멸 부대는 초토화 작전을 수행했다. 에르나 장거리 정찰대는 1941년 7월 10일, 후퇴하는 붉은 군대의 정찰을 위해 핀란드에서 북부 에스토니아로 보내졌지만, 1941년 7월 31일부터 8월 1일까지 카우틀라 전투에서 소멸 부대와 교전하여 2,000명의 민간인이 도망칠 수 있도록 했다.
독일군은 1941년 8월 19일 탈린 공세를 시작하여 1941년 8월 21일 라플라를 점령했다. 1941년 8월 24일 피리타에서 탈린 외곽에 도달했고, 1941년 8월 26일에는 하르쿠와 라스나매에에 도달했다. 일반 시민들은 탈린 주변에 방어 시설을 건설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소련군은 1941년 8월 24일 해상으로의 철수를 시작했다. 탈린과 팔디스키를 떠난 195척의 선박 중 55척이 윰인다 반도 근처에서 기뢰에 의해 침몰하여 약 15,000명의 피난민이 사망했다. 철수하는 소련군은 탈린 주변의 많은 기반 시설과 산업을 파괴했다. 독일군은 1941년 8월 28일 팔디스키와 탈린을 점령하여 탈린 피크 헤르만 타워에 꽂혀 있던 소련기를 격추시켰다. 에스토니아인들은 이를 에스토니아 국기로 교체했지만, 다음 날에는 독일 국기로 교체되었다. 독일군은 탈린에서 해방자로 환영받았다. 1219년 이후 탈린이 군사적 교전을 통해 점령된 것은 처음이었다.
2. 1. 고대 역사


현대 하리우주의 영토는 주로 레발라와 하르유마 두 개의 고대 에스토니아 군으로 구성되어 있다. 레발라는 현재 탈린 주변 지역이고, 하르유마는 레발라 남쪽에 위치하며 현재 대부분 라플라 주에 속한다. 당시 핀란드만에 위치한 작은 무역 기지였던 린다니세는 레발라의 수도 역할을 했다. 린다니세는 이후 대부분 독일인이 거주하는 한자동맹 도시인 ''레발''로 성장했으며, 나아가 에스토니아의 수도인 탈린으로 발전했다.
2. 2. 덴마크와 리보니아 기사단 지배
1219년, 덴마크 국왕 발데마르 2세는 린다니세(덴마크어: ''Lyndanisse'')에 상륙하여 레발라와 하르유 카운티를 정복했고, 주민들은 기독교로 강제 개종되었다.[1] 리보니아 십자군 전쟁(1208–1227 에스토니아) 말에 두 카운티는 검 형제 기사단에 점령되었다가 1238년 스텐스비 조약을 통해 덴마크에 반환되었다.[1]덴마크인들은 탈린의 툼페아 언덕에 툼페아 성(''Castrum Danorum'')을 건설했고, 이곳은 빠르게 에스토니아에서 가장 큰 정착지가 되었다.[1] 1248년, 이곳은 에스토니아에서 최초로 도시 권리를 부여받은 정착지였으며, 1285년에는 한자 동맹의 최북단 회원이 되었다.[1]
독일의 지배는 성 게오르기우스 밤 봉기로 이어졌고, 이 봉기는 1343년 오늘날의 파디세 교구에 있는 파디세 수도원의 방화로 시작되었다.[1] 이 봉기로 인해 덴마크는 북부 에스토니아의 영토를 리보니아 기사단에 매각하게 되었다.[1]
2. 3. 스웨덴과 러시아 제국 지배
1219년, 덴마크 국왕 발데마르 2세는 린다니세에 상륙하여 레발라와 하르유 카운티를 정복했고, 주민들은 기독교로 강제 개종되었다.[1] 리보니아 십자군 전쟁(1208–1227 에스토니아) 말에 두 카운티는 검 형제 기사단에 점령되었다가 1238년 스텐스비 조약을 통해 덴마크에 반환되었다.[1]덴마크인들은 탈린의 툼페아 언덕에 툼페아 성(''Castrum Danorum'')을 건설했고, 이곳은 빠르게 에스토니아에서 가장 큰 정착지가 되었다.[1] 1248년, 이곳은 에스토니아에서 최초로 도시 권리를 부여받은 정착지였으며, 1285년에는 한자 동맹의 최북단 회원이 되었다.[1]
독일의 지배는 성 게오르기우스 밤 봉기로 이어졌고, 이 봉기는 1343년 오늘날의 파디세 교구에 있는 파디세 수도원의 방화로 시작되었다.[1] 이 봉기로 인해 덴마크는 북부 에스토니아의 영토를 리보니아 기사단에 매각하게 되었다.[1] 1561년, 리보니아 전쟁이 발발한 후, 북부 에스토니아의 귀족과 탈린 시의회는 스웨덴에 충성을 선언했다.[1] 탈린과 전쟁 중 획득한 기타 스웨덴 점령 지역은 플루사 조약에 의해 확보되었다.[1]
대북방 전쟁 동안, 하르유는 에스토니아에서 오랫동안 전쟁의 영향을 받지 않은 몇 안 되는 지역 중 하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르유 카운티는 카운티 인구의 80% 이상을 사망케 한 1710-1713년 전염병으로 큰 영향을 받았다.[1] 러시아군은 마침내 1710년에 도착하여 스웨덴 수비대가 항복할 때까지 한 달 동안 탈린을 포위했고, 이로써 에스토니아에서 대북방 전쟁이 종식되었다.[1] 러시아의 지배는 1721년 니스타드 조약으로 확정되었다.[1] 전염병은 수년 동안 계속되어 결국 카운티의 여러 지역이 완전히 무인 지대가 되었다.[1]
제정 러시아의 지배는 탈린과 발디스키(스웨덴어: ''로게르비크'')에 해군 기지를 건설하면서 시작되었다.[1] 러시아 차르 표트르 1세는 1711년부터 1723년 사이에 최소 9번 탈린을 방문했다.[1] 그는 1714년에 탈린 해군 기지 건설을, 1718년에는 발디스키 해군 기지 건설을 직접 시작했다.[1]
1870년에는 발디스키-탈린-상트페테르부르크 철도가 개통되었고, 이후 노선을 따라 발디스키, 케이, 사우에, 뇜메, 아루큠라, 라아시쿠, 케라 및 아에그비두 (당시 비루 카운티)와 같은 여러 작은 정착지가 성장하기 시작했다.[1] 표트르 대제의 해군 요새의 여러 요소가 하리우주에 건설되었으며 그 본부는 탈린에 있었다.[1]
제1차 세계 대전 중인 1914년, 나이싸르 섬의 원주민은 섬에서 추방되었고 섬은 군사 기지로 바뀌었다.[1] 섬에는 협궤 철도망이 건설되었다.[1] 탈린은 10월 혁명의 시작 지점이었는데, 에스토니아의 볼셰비키 얀 안벨트가 1917년 11월 5일 탈린에서 권력을 잡았고, 이는 페트로그라드에서 혁명이 시작되기 이틀 전이었다.[1] 1917년 11월 9일, 볼셰비키는 총독 얀 포스카로부터 권력을 빼앗았다.[1] 쿠데타 이후, 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집행 위원회와의 협력을 거부하면서 에스토니아 지방 의회(에스토니아어: ''마아노우코구'')는 1917년 11월 28일 탈린에서 러시아 제국으로부터의 주권을 선언했다.[1] 1917년 12월, 스테판 막시모비치 페트리첸코의 지도하에 러시아 해군은 "나이싸르의 병사와 요새 건설자 소비에트 공화국"을 선포했다.[1] 그들은 1918년 2월 26일 독일군에 의해 축출되었다.[1]
2. 4. 에스토니아 독립과 소련 점령
1219년, 덴마크 국왕 발데마르 2세는 린다니세(덴마크어: ''Lyndanisse'')에 상륙하여 레발라와 하르유 카운티를 정복했고, 주민들은 기독교로 강제 개종되었다. 리보니아 십자군 전쟁(1208–1227 에스토니아) 말에 두 카운티는 검 형제 기사단에 점령되었다가 1238년 스텐스비 조약을 통해 덴마크에 반환되었다.덴마크인들은 탈린의 툼페아 언덕에 툼페아 성( ''Castrum Danorum'')을 건설했고, 이곳은 빠르게 에스토니아에서 가장 큰 정착지가 되었다. 1248년, 이곳은 에스토니아에서 최초로 도시 권리를 부여받은 정착지였으며, 1285년에는 한자 동맹의 최북단 회원이 되었다.
독일의 지배는 성 게오르기우스 밤 봉기로 이어졌고, 이 봉기는 1343년 오늘날의 파디세 교구에 있는 파디세 수도원의 방화로 시작되었다. 이 봉기로 인해 덴마크는 북부 에스토니아의 영토를 리보니아 기사단에 매각하게 되었다. 1561년, 리보니아 전쟁이 발발한 후, 북부 에스토니아의 귀족과 탈린 시의회는 스웨덴에 충성을 선언했다. 탈린과 전쟁 중 획득한 기타 스웨덴 점령 지역은 플루사 조약에 의해 확보되었다.
대북방 전쟁 동안, 하르유는 에스토니아에서 오랫동안 전쟁의 영향을 받지 않은 몇 안 되는 지역 중 하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르유 카운티는 카운티 인구의 80% 이상을 사망케 한 1710-1713년 전염병으로 큰 영향을 받았다. 러시아군은 마침내 1710년에 도착하여 스웨덴 수비대가 항복할 때까지 한 달 동안 탈린을 포위했고, 이로써 에스토니아에서 대북방 전쟁이 종식되었다. 러시아의 지배는 1721년 니스타드 조약으로 확정되었다. 전염병은 수년 동안 계속되어 결국 카운티의 여러 지역이 완전히 무인 지대가 되었다.
에스토니아 공화국은 1918년 2월 24일 탈린에서 선포되었고, 다음 날 독일의 점령이 시작되었다. 독일의 지배는 독일의 11월 혁명으로 끝났다. 에스토니아 독립 전쟁 동안, 소련군은 1918년 말에 탈린에서 동쪽으로 불과 40km 떨어진 곳에서 저지되었다. 탈린은 실패한 공산주의 1924년 쿠데타 시도의 장소였다.
2. 5. 제2차 세계 대전과 독일 점령
1939년 9월 18일, 나치 독일과 소련의 폴란드 침공 이후, 폴란드 잠수함 ORP 오제우가 오제우 사건으로 탈린 항구에서 억류되었다가 탈출했다. 이 잠수함은 영국으로 향했고, 이 사건은 소련과 독일 양국에 에스토니아의 중립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게 만들었다. 1939년 9월 24일, 소련 해군 군함이 북 에스토니아 해역에 나타났고, 소련 공군 폭격기가 탈린과 인근 지역 상공을 순찰했다.소련은 에스토니아에 소련 군사 기지를 허용하고 유럽 전쟁 기간 동안 에스토니아 영토에 25,000명의 병력을 주둔시킬 것을 요구했다. 1939년 9월 28일, 에스토니아 정부는 최후 통첩을 받아들여 소련-에스토니아 상호 원조 조약을 체결했다. 팔디스키는 소련 해군 기지가 되었고, 그곳 주민들은 강제로 이주당했다. 북 에스토니아에 새로운 군사 기지를 확보한 소련은 1939년 11월 30일 핀란드를 침공하여 겨울 전쟁을 시작했다. 1939년부터 1940년까지 탈린과 하리우주 시골 지역의 대부분의 발트 독일인들은 독일로 피난을 갔다(''Umsiedlung'').
1940년 6월 14일, 소련 해군은 핀란드만과 발트해에 해상 봉쇄를 설치하고 탈린 근처 나이싸르 섬 서쪽에 해군 함대를 주둔시켰다. 소련 폭격기는 케리 섬 근처에서 여객기 "칼레바"를 격추하여 외국 외교관을 포함한 탑승자 9명 모두 사망했다.
1940년 6월 16일, 붉은 군대가 에스토니아를 침공하여 탈린에서 소련의 쿠데타를 조직했다. 1940년 6월 21일, 탈린의 독립 신호 대대는 붉은 군대에 저항했지만, 같은 날 항복하고 무장 해제되었다. 소련은 조작된 의회 선거를 조직했고, 새 의회는 1940년 7월 21일 에스토니아 SSR을 선포했으며, 1940년 8월 6일 소련에 합병되었다. 대부분의 카운티 및 지방 자치 단체 지도자들이 교체되었고, 지방 의회는 소비에트로 교체되었다. 나이싸르 섬의 원주민들은 1914년처럼 섬이 군사 기지로 바뀌면서 섬에서 추방되었다. 1940-41년 소련 점령 기간 동안 수천 명이 처형, 투옥, 노동 대대로 동원되거나, 1941년 6월 14일 6월 추방으로 시베리아로 추방되었다.

1941년 6월 22일 독일은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소련을 침공했고, 핀란드는 1941년 6월 25일 소련과의 계속 전쟁을 선포했다. 소련이 후퇴하면서, 소련의 소멸 부대는 초토화 작전을 수행했다. 에르나 장거리 정찰대는 1941년 7월 10일, 후퇴하는 붉은 군대의 정찰을 위해 핀란드에서 북부 에스토니아로 보내졌지만, 1941년 7월 31일부터 8월 1일까지 카우틀라 전투에서 소멸 부대와 교전하여 2,000명의 민간인이 도망칠 수 있도록 했다.
독일군은 1941년 8월 19일 탈린 공세를 시작하여 1941년 8월 21일 라플라를 점령했다. 1941년 8월 24일 피리타에서 탈린 외곽에 도달했고, 1941년 8월 26일에는 하르쿠와 라스나매에에 도달했다. 일반 시민들은 탈린 주변에 방어 시설을 건설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소련군은 1941년 8월 24일 해상으로의 철수를 시작했다. 탈린과 팔디스키를 떠난 195척의 선박 중 55척이 윰인다 반도 근처에서 기뢰에 의해 침몰하여 약 15,000명의 피난민이 사망했다. 철수하는 소련군은 탈린 주변의 많은 기반 시설과 산업을 파괴했다. 독일군은 1941년 8월 28일 팔디스키와 탈린을 점령하여 탈린 피크 헤르만 타워에 꽂혀 있던 소련기를 격추시켰다. 에스토니아인들은 이를 에스토니아 국기로 교체했지만, 다음 날에는 독일 국기로 교체되었다. 독일군은 탈린에서 해방자로 환영받았다. 1219년 이후 탈린이 군사적 교전을 통해 점령된 것은 처음이었다.
2. 6. 소련 재점령과 독립 회복
1939년 9월 18일, 나치 독일과 소련의 폴란드 침공 이후, 폴란드 잠수함 ORP 오제우가 오제우 사건 동안 탈린 항구에서 억류에서 탈출했다. 이 잠수함은 영국으로 향했고, 이는 소련과 독일 모두에게 에스토니아의 중립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게 했다. 1939년 9월 24일, 소련 해군 군함이 북 에스토니아 해역에 나타났고 소련 공군 폭격기가 탈린과 인근 시골 상공을 순찰했다.소련은 에스토니아에 소련 군사 기지를 허용하고 유럽 전쟁 기간 동안 에스토니아 영토에 25,000명의 병력을 주둔시킬 것을 요구했다. 1939년 9월 28일, 에스토니아 정부는 최후 통첩을 받아들여 소련-에스토니아 상호 원조 조약에 서명했다. 팔디스키는 소련 해군 기지가 되었고, 그곳 주민들은 마을에서 추방되었다. 이후 소련은 1939년 11월 30일 핀란드를 침공하여 겨울 전쟁을 시작했다. 1939년부터 1940년까지 탈린과 하르주 카운티 시골 지역의 발트 독일인들 대부분은 독일로 이주했다(''Umsiedlung'').
1940년 6월 14일, 소련 해군은 핀란드만과 발트해에 해상 봉쇄를 설치하고 탈린 근처 나이싸르 섬 서쪽에 해군 함대를 주둔시켰다. 소련 폭격기는 케리 섬 근처에서 여객기 "칼레바"를 격추하여 탑승자 9명 모두를 사망시켰는데, 여기에는 외국 외교관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1940년 6월 16일, 붉은 군대가 에스토니아를 침공하여 탈린에서 소련의 쿠데타를 조직했다. 1940년 6월 21일, 탈린의 독립 신호 대대는 붉은 군대에 저항했지만, 같은 날 항복하고 무장 해제되었다. 소련은 조작된 의회 선거를 조직했고, 새 의회는 1940년 7월 21일 에스토니아 SSR을 선포했으며, 1940년 8월 6일 소련에 합병되었다. 대부분의 카운티 및 지방 자치 단체 지도자들이 교체되었고, 지방 의회는 소비에트로 교체되었다. 나이싸르 섬의 원주민들은 1914년과 마찬가지로 섬이 군사 기지로 바뀌면서 섬에서 추방되었다. 1940년-1941년 소련 점령 기간 동안 수천 명이 처형, 투옥, 노동 대대로 동원되거나, 1941년 6월 14일 6월 추방때 시베리아로 추방되었다.[1]
1941년 6월 22일 독일의 소련 침공과 1941년 6월 25일 핀란드의 계속 전쟁 선포 이후, 소련은 후퇴하면서 소멸 부대를 통해 초토화 작전을 수행했다. 에르나 장거리 정찰대는 1941년 7월 10일 핀란드에서 북부 에스토니아로 보내져 후퇴하는 붉은 군대를 정찰했지만, 1941년 7월 31일부터 8월 1일까지 카우틀라 숲 근처에서 소멸 부대와 교전하여 2,000명의 민간인이 도망칠 수 있도록 했다.[1]
독일군은 1941년 8월 19일 탈린 공세를 시작하여 1941년 8월 21일 라플라를 점령했다. 1941년 8월 24일 피리타에서 탈린 외곽에 도달했고, 1941년 8월 26일에는 하르쿠와 라스나매에에 도달했다. 일반 시민들은 탈린 주변에 방어 시설을 건설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소련군은 1941년 8월 24일 해상으로의 철수를 시작했다. 탈린과 팔디스키를 떠난 195척의 선박 중 55척이 윰인다 반도 근처에서 기뢰에 의해 침몰하여 약 15,000명의 피난민이 사망했다. 철수하는 소련군은 탈린 주변의 많은 기반 시설과 산업을 파괴했다. 독일군은 1941년 8월 28일 팔디스키와 탈린을 점령하여 탈린 피크 헤르만 타워에 꽂혀 있던 소련기를 격추시켰다. 에스토니아인들은 이를 에스토니아 국기로 교체했지만, 다음 날에는 독일 국기로 교체되었다. 독일군은 탈린에서 해방자로 환영받았다. 1219년 이후 탈린이 군사적 교전을 통해 점령된 것은 처음이었다.[1]
3. 행정 구역
(2018)
(km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