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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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련 해군은 러시아 혁명 이후 재건되어 냉전 시기 미국 해군에 대항하는 강력한 해군력으로 성장했다. 잠수함 전력에 특히 집중하여 세계 최대 규모의 잠수함대를 보유했으며, 탄도 미사일 잠수함, 순항 미사일 잠수함, 공격 잠수함 등 다양한 종류의 잠수함을 운용했다. 수상함 전력으로는 항공모함, 순양함, 구축함 등을 갖추었으며, 해군 항공대와 해군 보병도 운용했다.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대부분의 전력은 러시아 해군으로 이관되었지만, 발트 3국의 독립과 우크라이나의 독자적인 군대 창설로 인해 지배 지역이 축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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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트 함대는 1703년 표트르 1세가 창설한 러시아 해군의 주요 함대로, 대북방 전쟁부터 냉전 시대까지 발트해 지역 안보와 러시아 해상 전력을 담당하며 여러 역사적 사건을 겪었고, 소련 붕괴 후 칼리닌그라드를 중심으로 재편되어 현재 러시아 서부 군관구에 속해 발트해 방어와 지역 안보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 소련 해군 - 키로프급 미사일 순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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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해군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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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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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 이름 | 러시아어: Военно-морской флот СССР 로마자 표기: Voyenno-morskoy flot SSSR |
별칭 | 붉은 함대 |
창설 | 1918년 |
해체 | 1992년 2월 14일 |
국가 |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1918–1922) 소비에트 연방(1922–1991) 독립 국가 연합(1991–1992) |
충성 |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1990년까지) 소비에트 연방의 대통령(1990–1991) 독립 국가 연합(1991–1992) |
상위 부대 | 소비에트 연방군 |
군종 | 해군 |
규모 | |
1984년 | 467,000명 |
1990년 함선 | 1,057척 |
1990년 항공기 | 1,172대 |
1990년 항공모함 | 5척 |
1990년 헬리콥터 모함 | 2척 |
순양전함 | 3척 |
순양함 | 30척 |
구축함 | 45척 |
호위함 | 113척 |
초계함 | 124척 |
탄도 미사일 잠수함 | 63척 |
순항 미사일 잠수함 | 72척 |
핵 공격 잠수함 | 68척 |
재래식 공격 잠수함 | 63척 |
보조 잠수함 | 9척 |
상륙함 | 35척 |
초계정 | 425척 |
룬급 에크라노플란 | 1척 |
지휘관 | |
주요 지휘관 | 소비에트 연방 함대 원수 세르게이 고르시코프 소비에트 연방 함대 원수 니콜라이 쿠즈네초프 알렉산드르 네미츠 해군 중장 예브게니 베렌스 해군 중장 바실리 알트파터 함대 제독 이반 유마셰프 해군 제독 |
상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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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및 작전 | |
주요 전투 | 러시아 혁명 러시아 내전 폴란드-소비에트 전쟁 소련-일본 국경 분쟁 스페인 내전 소련의 폴란드 침공 겨울 전쟁(핀란드) 제2차 세계 대전(대조국전쟁) 소련의 만주 침공 베트남 전쟁 1966년 소비에트 잠수함 전 세계 일주 냉전 소비에트 해군 기지 공격 |
2. 역사
소련 해군의 역사는 러시아 혁명, 제2차 세계 대전, 냉전 등 20세기 주요 사건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러시아 혁명 직후, 구 러시아 제국 해군의 함선들은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및 우크라이나국에 접수된 흑해 함대 소속 함선들을 포함하여 최종적으로 소련 해군으로 재편되었다. 대륙 국가였던 소련은 지리적 조건 때문에 육군 전력에 집중했고, 해군은 자국 영토 근해 방어를 위한 연안 해군으로 정비되었다. 이에 따라 소련은 연안 경비용 잠수함 건조에 주력하여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잠수함대를 보유하게 되었다.[4] 그러나 당시 소련 해군의 대양 작전 능력은 매우 부족했다.
1941년 독소전쟁 발발 이후, 소련 해군은 나치 독일 및 그 동맹국들과 맞서 싸웠다. 많은 수병과 해군 함포들이 붉은 군대를 지원하기 위해 주요 전투에 투입되었다.[9]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은 탄도 미사일 탑재 잠수함 개발에 주력하여 골프급 및 호텔급 잠수함 등을 서방보다 먼저 건조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는 소련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미국의 압도적인 해군력에 의해 소련은 불리한 상황에 놓였고, 쿠바의 IRBM 기지를 철거해야만 했다. 이 사건은 흐루쇼프 서기장의 실각을 초래했고, 소련은 해군 전력, 특히 수상 함정 전력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1960년대 미국 해군은 미사일 갭 논쟁에 대응하여 조지 워싱턴급 SSBN 등 전략 핵미사일 탑재 잠수함을 취역시켰다. 소련은 수중 핵공격 위협에 직면하여 대잠 전투 능력 강화에 나섰다. 카라급 대잠 순양함, 모스크바급 대잠 순양함, 크리박 I·II급 대잠 프리깃 등이 이 시기에 취역했다.
1970년대부터 소련 해군은 범세계적 전략 수행을 위해 대양 해군 건설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는 미국 해군과의 전면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평시 자국의 전략적 목표 달성을 위한 것이었다. 소련 해군은 자국 전략 핵미사일 원자력 잠수함(델타급 등)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기 위해 자국 근해 방어를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미국 해군의 항공모함 기동부대는 소련 해군에게 가장 큰 위협이었고, 소련은 이를 격퇴하기 위해 대함 미사일 포화 공격 전술을 개발했다. 소브레메니급 미사일 구축함, 슬라바급 미사일 순양함, 키로프급 미사일 순양함 등은 이러한 전술을 위해 건조된 함정들이다.
소련 해군은 미국 해군에 대항하기 위해 항공모함 보유에도 착수했다. 키에프급 항공모함, 쿠즈네초프 항공모함 등이 취역했고, 원자력 항공모함 울리야노프스크급 건조도 추진되었으나, 소련 붕괴로 인해 중단되었다.
2. 1. 러시아 혁명과 내전 (1917-1922)
러시아 혁명 이후, 구 러시아 제국 해군의 함선들은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우크라이나국에 접수된 흑해 함대의 함선들도 있었지만, 최종적으로는 소련 해군으로 재집결되었다.
소련 해군은 제1차 세계 대전 (1914–1918) 중 있었던 1917년의 두 번의 혁명(2월과 10월/11월), 그 후의 러시아 내전 (1917–1922) 및 1921년의 크론시타트 반란 동안 거의 완전히 파괴된 러시아 제국 해군의 잔해로 형성된 공화 해군을 기반으로 했다.[1] 혁명 기간 동안 러시아 수병들은 자의적으로 배를 버리고 일반적으로 임무를 소홀히 했다.[1] 장교들은 흩어졌고 (일부는 적색 공포에 의해 살해되었고, 일부는 백군(반공산주의) 군대에 합류했으며, 다른 사람들은 단순히 사임했다) 대부분의 수병들은 배에서 내려갔다.[1] 미완성 상태의 배가 급격히 악화된 조선소에서의 작업이 중단되었다.[1]
흑해 함대는 발트해 함대보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1] 볼셰비키 (공산주의) 혁명은 장교 대량 살해로 인해 인력을 완전히 붕괴시켰고, 배는 사용 불가능하게 되었다.[1] 1918년 4월 말, 독일 제국군은 흑해 해안을 따라 크림 반도에 진입하여 세바스토폴 해군 기지로 진격하기 시작했다.[1] 더 효과적인 배는 세바스토폴에서 노보로시스크로 이동되었고, 독일의 최후 통첩 이후 블라디미르 레닌의 명령에 따라 자침되었다.[1]
세바스토폴에 남아 있던 배는 독일군에게 점령되었고, 이후 전쟁을 종식시킨 서부 전선에서의 1918년 11월 11일 휴전 협정 이후, 추가 러시아 배는 영국군에 의해 압수되었다.[1] 1919년 4월 1일, 러시아 내전 중 붉은 군대가 크림 반도를 점령했을 때, 영국 왕립 해군 함대는 철수해야 했지만, 떠나기 전에 나머지 전함들을 손상시키고 13척의 신형 잠수함을 침몰시켰다.[1]
반대 세력인 차르주의 백군이 1919년 크림 반도를 점령했을 때, 몇몇 함정을 구출하여 재정비했다.[1] 내전이 끝났을 때, 백군의 함대인 브랑겔 함대는 흑해, 다르다넬스 해협을 거쳐 에게 해를 지나 지중해를 건너 프랑스 튀니지의 북아프리카 해안에 있는 비제르타로 이동하여 억류되었다.[1]
혁명 해군의 첫 번째 함선은 1900년에 건조된 반란을 일으킨 러시아 제국 순양함 로 간주될 수 있는데, 이 함선의 승무원은 공산주의 볼셰비키에 합류했다.[1] 발트 함대의 수병들은 차르에 대항한 2월의 첫 번째 혁명 이후 수립된 알렉산드르 케렌스키의 민주적 임시 정부에 대항하여 1917년 11월의 10월 혁명 동안 블라디미르 레닌과 레온 트로츠키가 이끄는 볼셰비키의 전투 부대에 군수품을 공급했다.[1] 일부 제국 함선은 혁명 이후에도 다른 이름으로 계속 운용되었다.[1]
새로운 인민 위원회 평의회의 1918년 소비에트 법령에 의해 "노동자 농민 적색 함대"(Рабо́че-крестья́нский Кра́сный флот|Raboche-krest'yansky krasny flot (RKKF)ru)로 설립된 소련 해군은 임시 러시아 혁명 정부로 설치되었고, 1918년부터 1941년까지의 전간기 동안에는 정비가 덜 된 상태였다.[1]
제정 러시아 시대 말기, 발트 함대의 수병들은 좌익 성향이 강했고, 러시아 임시 정부와 대립했다. 10월 혁명에서 겨울 궁전 습격 때, 발트 함대의 방호순양함 "아브로라"의 함포에 의한 신호탄이 신호가 되었고, 발트 함대의 거점인 크론슈타트의 수병들도 많이 참가했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이들 수병들을 "노동 대중의 전위"라는, 공산주의자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찬사로 칭찬했다. 다만 레닌의 해군력 자체에 대한 평가는 낮았고, "소련은 해군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부족한 것은 영해를 경비하는 국경 경비대의 함정뿐이다"라고 말했다.
수병들의 높은 지위에 걸맞게, 레닌은 통합된 국방성 안에서 상당한 자주권을 가진 "해사 인민 위원부"를 창설했고, 1918년 2월 12일에는 제정 러시아 해군을 해체하고 "사회주의 노동 농민 적색 함대"를 창설했다. 그러나 소비에트의 초기의 이념이 퇴색하고, 볼셰비키에 의한 일당 지배가 확립되어 가면서, 발트 함대의 수병들은 이와 대립했고, 1921년에는 크론시타트 반란이 발생했다. 이 반란은 즉시 진압되었지만, 해군의 정치적 신뢰는 실추되었고, 이후의 병력 정비는 정체되었다. 반란 후, 공산당은 함대에 가능한 한 많은 당원·당 관계자를 보내는 것과 함께, 해군 군인에 대한 숙청을 실시했다. 약 6명 중 1명이 해군에서 추방된 한편, 이후의 대량 징모도 있어, 1923년 말에는 해군 요원의 70퍼센트까지가 콤소몰의 멤버가 되었다.
내전에서는, 시베리아에서 쳐들어오는 콜차크 군에 대하여 볼가강 함대의 방해를 성공시켰고, 연합국의 러시아 내전 개입의 일환으로 백군에 의한 페트로그라드 탈환을 지원하려던 영국 해군의 발트해 파견 부대와 대치했다. 흑해 연안에서도 데니킨의 백군에 대한 붉은 군대의 공격 작전과 협동하는 등, 각 전선에서 용전했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은 모두 하천·호수 등의 내수역과 연안부에 한정된 연안 해군적 용법에 머물렀다. 1921년 여름 시점에서, 발트 함대에서 운용 가능한 상태에 있는 것은 노비크급 구축함 6척과 잠수함 5척에 불과했고, 같은 해 말, 해군 참모장이었던 A.V. 돔브로프스키는 "해상 국경의 방위 이상의 임무는 실시하기 어렵다"라고 말했다.
2. 2. 전간기 (1922-1941)
러시아 혁명 이후, 소련은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해군력 재건을 시도했다. 1920년대에는 연안 방어를 위한 소규모 함대 건설에 집중했다. 소련은 연안 경비용 잠수함 건조에 힘을 쏟아 제2차 세계 대전 시에는 세계 최대의 잠수함대를 보유하게 되었다.[4]1921년, 발트 함대 사령관 표도르 라스코르니코프는 대함대 건설을 피하고, 함대 중 가장 중요한 부대에 집중하여 보수, 장비, 연료를 공급할 것을 제안하여 채택되었다.[4] 같은 해 7월 모스크바에서 소집된 "해군 재편성을 위한 위원회"는 전함 1척만을 전투 태세를 갖춘 부유 포대로 사용하고, 나머지 발트 함대의 주력함은 예비 함대로 옮겨야 한다고 결정했다. 이는 미국 해군의 전략가인 앨프레드 세이어 메이한이 제시한 "요새 함대" 전략과 유사한 형태로, 전함 1척, 8척의 구축함, 소수의 잠수함 외에도 다수의 연안포, 요새포, 기뢰로 발트해 방위 경비를 수행하는 계획이었다.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에서는 마르크스주의에 기반하여 육해군 전략을 재정의하려는 프롤레타리아 군사 사상파의 세력이 강했지만, 트로츠키 국방인민위원이 권력을 유지하는 동안 억제되었고, 제정 러시아 해군 시대의 전통적인 해군 전략이 답습되었다. 해군대학교의 페트로프 교수와 젤베 교수는 메이한의 이론에 준거한 "전통파"로서, 제해권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기존 형식의 전함과 순양함을 중심으로 하는 함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1926년 노동국방위원회의 승인을 받은 해군 조선 프로그램에는 12척의 잠수함을 건조하는 계획이 포함되었으며, 처음 6척은 급으로 알려지게 되었다.[4] 1926년 11월 4일부터 B.M. 말리닌의 지휘 하에 발트 조선소에서 잠수함 건조 작업이 진행되었다.[4] 이후 수년에 걸쳐 말리닌의 관리하에 개발된 설계를 바탕으로 133척의 잠수함이 건조되었다.
1930년대 소련의 산업화와 함께 소련 해군은 대규모 함대 건설 계획을 추진했다. 잠수함, 구축함, 순양함 등 다양한 함정 건조가 시작되었다. 1932년 태평양 함대 창설과 1933년 북방 함대 창설이 있었다.[5] 이 함대는 강력한 급을 중심으로 구축될 예정이었다.
이오시프 스탈린 시대에는 대양 해군 건설을 목표로 전함, 중순양함 등 대형 수상함 건조가 추진되었으나, 독일의 침공으로 1941년에 중단될 때까지 초기 단계에 있었다.
1937년 말까지 가장 큰 함대는 레닌그라드에 주둔한 발트 함대였다.
함종 | 수량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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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함 | 2척 | |
훈련 순양함 | 1척 | |
구축함 | 8척 | 구축함 지도함 1척 포함 |
초계함 | 5척 | |
기뢰 제거함 | 2척 | 약간의 구형 기뢰 제거함 포함 |
세바스토폴의 흑해 함대 구성은 다음과 같다.
함종 | 수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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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함 | 1척 |
순양함 | 3척 |
훈련 순양함 | 1척 |
구축함 | 5척 |
초계함 | 2척 |
기뢰 제거함 | 4척 |
콜라 만과 폴랴르니 해안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북방 함대는 구축함 3척과 초계함 3척으로 구성되었으며, 태평양 함대는 1936년에 동쪽으로 이전된 구축함 2척과 극동에서 조립된 초계함 6척을 보유했다.
소련 해군은 1939–1940년 핀란드와의 겨울 전쟁에서 발트해에서 약간의 작전을 수행했다.
2. 3. 제2차 세계 대전 (1941-1945)
러시아 혁명 이후, 소련 해군은 구 러시아 제국 해군의 함선들을 재편하여 창설되었다. 소련은 대륙 국가로서 육군에 집중했기 때문에 해군은 연안 방어에 중점을 두었다. 그 결과, 소련은 잠수함 건조에 주력하여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잠수함대를 보유하게 되었다.[7] 그러나 소련 해군의 대양 작전 능력은 부족했다.1941년 6월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독소전쟁이 시작되자, 소련 해군은 나치 독일과 그 동맹국들에 맞서 싸웠다. 많은 수병들과 해군 함포들이 붉은 군대를 지원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이들은 오데사, 세바스토폴 전투, 스탈린그라드 전투, 노보로시스크, 투압세, 레닌그라드 등 주요 전투에서 활약했다.[9]

- 발트 함대: 탈린 점령 이후, 발트 함대는 지뢰밭으로 인해 레닌그라드와 크론시타트에 봉쇄되었다.[9] 이들은 도시의 대공 방어에 참여하고 독일군 진지를 폭격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건조된 노후 전함 마라트는 독일 항공기에 의해 침몰했으나, 선체의 수면 위 부분은 육상 포대로 계속 사용되었다. 잠수함들은 독일과 핀란드의 대잠수함전으로 큰 피해를 입었지만, 발트해에서 추축국 해상 수송을 방해하며 중요한 역할을 했다.
- 흑해 함대: 흑해에서는 많은 함선들이 기뢰밭과 추축국 항공기에 의해 손상되었지만, 해군 기지를 방어하고 포위된 동안 보급을 지원했다. 중(重) 해군 함포와 수병들은 추축국 군대의 오랜 포위 기간 동안 항구 도시들을 방어하는 데 기여했다.
- 북방 함대: 북극해에서 소련 북방 함대 구축함(''노빅''급, 7형 및 7U형)과 소형 선박들은 연합군의 호송선단의 대공 및 대잠수함 방어에 참여하여 무기 대여법 화물 수송을 수행했다.[9]
- 태평양 함대: 1945년 이전에는 소련이 일본과 전쟁 상태가 아니었으므로, 일부 구축함이 북방 함대로 이전되었다. 소련의 대일 참전 이후 일본의 항복까지 짧은 기간 동안 전투 행동을 했다.

소련 해군 항공대는 해상 및 육상 작전에 대한 항공 지원을 제공했다. 해안 기반 수상 비행기, 장거리 비행정, 사출기 발사 및 선박 기반 비행기, 해군용 육상 기반 항공기 등을 운용했다.
전후 소련은 여러 척의 이탈리아와 일본 군함, 그리고 독일 해군 기술 및 건축 문서를 전리품으로 획득했다.
2. 4. 냉전 (1945-1991)
러시아 혁명 후, 구 러시아 제국 해군의 함선들은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우크라이나국에 접수된 흑해 함대의 함선들도 있었지만, 최종적으로는 소련 해군으로 재집결되었다.제2차 세계 대전 후에도 잠수함대의 증강은 소련에게 중시되었는데, 특히 탄도 미사일 탑재 잠수함인 골프급 잠수함이나 호텔급 잠수함 등의 건조는 서방보다 이른 것이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가 발생하면서 상황은 돌변했다. 미국의 압도적인 해군 전력에 의해 소련은 불리한 상황에 몰려 쿠바의 IRBM 기지를 철거해야 했고, 이는 흐루쇼프 서기장의 실각을 불렀다. 이 사건으로 소련은 해군 전력, 특히 수상 함정 전력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1960년대 미국 해군은 미사일 갭 논쟁에 대한 대책으로 조지 워싱턴급 SSBN 등의 전략 핵미사일 탑재 잠수함을 취역시켰다. 소련은 수중으로부터의 핵공격 위험에 노출되었고, 대잠 전투 능력 증강의 필요성을 느꼈다. 이에 소련 해군은 카라급 대잠 순양함, 대잠 헬리콥터 14기를 탑재한 모스크바급 대잠 순양함, 크리박 I·II급 대잠 프리깃 등을 취역시켰다.
1970년경부터 소련 해군은 범세계적 전략 수행을 위해 대양 해군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는 전시에 대양에서 미국 해군과 교전하는 것이 아니라, 평시에 자국의 전략적 목표를 위한 것이었다. 소련 해군의 전시 기본 방침은 자국 전략 핵미사일 원자력 잠수함(델타급 등)을 자유롭게 활동시키기 위해 자국 근해를 방어하는 것이었다. 이때 가장 큰 위협은 미국 해군의 항공모함 기동부대였고, 소련 해군은 이 해상 항공 전력을 타파해야 자국 근해의 안전 확보가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판단에 따라 소련은 대함 미사일 포화 공격 전술을 고안했다. 이는 대형 폭격기, 수상함, 잠수함 등에서 적 항공모함을 목표로 대함 미사일을 발사하여 적 방공 능력의 한계를 넘는 수의 미사일로 미국 해군 항공모함을 격침시키는 전술이었다. 이를 위해 장거리 대함 미사일 P-500 바잘트, P-700 그라니트 등을 탑재한 소브레메니급 미사일 구축함, 슬라바급 미사일 순양함, 키로프급 미사일 순양함 등 강력한 대함 타격력을 가진 함정들을 취역시켰다.
한편, 소련 해군은 미국 해군에 대항해 항공모함 보유에도 착수, 키에프급 항공모함, 쿠즈네초프 항공모함 등을 취역시켰고, 원자력 항공모함 울리야노프스크급 건조에도 착수했다. 그러나 소련 붕괴와 함께 소련 해군력 증강은 중지되었다.
1946년 2월, 붉은 함대는 소련 해군(Советский Военно-Морской Флот|Sovyetsky Voyenno-Morskoy Flot|소비에트 군사 해상 함대ru)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12] 전쟁 이후, 소련은 해상 보급선 방해 및 개발도상국에 대한 소규모 해군력 과시 필요성을 인식했다.[13] 소련은 유라시아 대륙에 천연 자원이 있었기에 서방 해군처럼 대규모 상선단 보호를 위한 해군은 필요하지 않았다.[13] 이후, 해상 핵 투발 시스템 대응이 해군의 또 다른 중요 목표가 되어 확장의 동기가 되었다.[13]
소련 해군은 잠수함과 소형 기동성 전술 선박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13] 소련의 조선 프로그램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크리그스마리네의 설계 기반 잠수함 건조에 주력했고, 이는 전후 잦은 빈도로 건조되었다. 이후 소련은 자체 연구와 나치 독일 및 서방 국가 첩보로 얻은 기술을 결합, 잠수함 설계를 개선했다.
소련은 다양한 미사일을 해군 함대에 장착했다. 작지만 빠른 미사일정에 대형 미사일을 장착하는 것은 소련 설계의 특징이었지만, 서방에서는 전술적으로 실행 가능하다고 간주되지 않았다. 소련 해군은 키로프급과 슬라바급과 같은 크고 무장된 유도 미사일 순양함도 보유했다. 1970년대 소련 잠수함 기술은 일부 서방보다 발전했고, 몇몇 잠수함 유형은 미국 경쟁자보다 우수한 것으로 간주되었다.[14]
제5 작전 전대(:ru:5-я Средиземноморская эскадра кораблей ВМФ)[15]는 지중해에서 작전했다. 주요 기능은 유라시아 대륙을 거치지 않고 침공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흑해로의 대규모 해군 진입을 막는 것이었다.[13] 기함은 오랫동안 스베르들로프급 ''즈다노프''였다.


소련 전략가들은 항공모함을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다고 여겼다. 모스크바는 해상 교통로 교란을 목표로 하는 해군 전략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소련 해군은 미 해군과의 경쟁을 위해 항공모함 프로그램을 추진했다.[13]
소련 해군은 서방 잠수함에 맞서는 임무를 위해 대잠 헬리콥터를 탑재할 대형 수상함이 필요했다. 1968년과 1969년에 모스크바급 헬리콥터 항공모함이 배치되었고, 1973년에는 4척의 항공기 탑재 순양함인 키예프급 항공모함 중 첫 번째 함이 뒤를 이었다. 두 종류 모두 대잠 헬리콥터를 운용할 수 있었으며, '키예프'급은 V/STOL (수직/단거리 이착륙기) 항공기(예: Yak-38 'Forger')도 운용했다. 이들은 주로 육상 기반 소련 해군 항공기 사정권 내에서 함대 방어를 위해 설계되었다.
1970년대 소련은 배치된 함대를 방어하기 위해 고정익 전투기를 기지로 삼을 수 있는 항공모함 제작을 목표로 프로젝트 1153 오렐 (독수리)를 시작했다. 이 프로젝트는 전략적 우선순위 변경으로 계획 단계에서 취소되었다.
1981년, 소련 해군은 첫 항공모함인 ''트빌리시''를 주문, ''소련 해군 함대 사령관 아드미랄 쿠즈네초프''로 개명했다.[16] 이 함은 Su-33 'Flanker-D'와 MiG-29 전투기, Ka-27 헬리콥터를 탑재한다.
소련 항공모함의 특징은 해안 공격 임무에 중점을 둔 서방과 달리, 함대 방어 작전 개념을 나타내는 공격 미사일 무장(및 장거리 대공전 무장)이었다. 두 번째 항공모함 (건조 전 명칭 ''바랴크'')이 1991년 소련 붕괴 당시 건조 중이었다. 건조는 중단되었고, 이 함은 소련 해체 후 우크라이나에 의해 불완전한 상태로 중국에 판매, 2012년 중국 인민해방군 해군에 랴오닝함으로 취역했다.
''쿠즈네초프''급 함의 진수 직후, 소련 해군은 ''쿠즈네초프''급보다 크고 원자력 추진 예정인 개선된 항공모함 설계인 울리야노프스크 건조를 시작했다. 프로젝트는 종료되었고, 건조 시설에서 시작된 작은 구조물은 폐기되었다.
항공모함 탑재 항공기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소련 해군은 해상 작전에서 대량의 전략 폭격기를 배치, ''아비아치야 보엔노-모르스코고 플로타''(AV-MF, 해군 항공대)를 운용했다. 투폴레프 Tu-16 'Badger'와 Tu-22M 'Backfire' 같은 전략 폭격기는 고속 대함 미사일을 탑재하여 배치되었다. 이전에는 북대서양 해상 교통로를 따라 이동하는 NATO 보급 호송대 요격으로 여겨졌지만, 주요 역할은 미국 항공모함 기동 부대 공격으로부터 소련 본토를 보호하는 것이었다.[17]

소련의 지리적 위치 때문에, 잠수함은 해군의 주력 함정으로 간주되었다. 잠수함은 발트해와 흑해의 좁은 해역이나 소련 서부 북극의 외딴 지역에서 봉쇄 시도를 뚫을 수 있었지만, 수상함은 더 쉽게 발견되어 공격받을 수 있었다. 소련은 제2차 세계 대전에 독일보다 많은 잠수함을 보유하고 참전했지만, 지리적 요인과 독일의 신속한 공격으로 인해 더 많은 함대를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이점을 얻지 못했다. "양은 그 자체로 질을 가진다"는 의견과 함대 원수 세르게이 고르시코프의 주장에 따라, 소련 해군은 1960년대 초에 건조된 1세대 미사일 잠수함을 1991년 냉전 종식까지 계속 운용했다.
속도와 원자로 기술을 포함한 몇몇 측면에서, 소련 잠수함은 독특한 성공을 거두었지만, 전반적인 능력 면에서는 대부분의 시대에 서방 측에 뒤쳐졌다. 비교적 빠른 속도와 깊은 운용 심도 외에도, 다중 격실, 큰 예비 부력, 특히 이중 선체 설계로 인해 대잠전(ASW) 목표로 파괴하기 어려웠다.[18]

주요 단점은 불충분한 소음 감쇠(미국 잠수함이 더 조용했다)와 원시적인 소나 기술이었다. 음향은 소련이 서방의 잠수함 생산 방식에 대해 탐구했던 특히 흥미로운 정보 유형이었으며, 오랫동안 활동한 존 앤서니 워커 스파이 조직이 이에 대한 지식에 크게 기여했을 수 있다.[18]
소련 해군은 오스카급과 같은 다수의 특수 제작된 유도 미사일 잠수함과 많은 탄도 미사일 및 공격 잠수함을 보유했다; 타이푼급은 세계에서 가장 큰 잠수함이다. 서방 해군은 소련의 공격 잠수함 부대가 NATO 호송대를 요격하도록 설계되었다고 추정했지만, 소련 지도부는 그러한 임무를 위해 잠수함을 준비한 적이 없었다.[19]
소련 잠수함은 수년에 걸쳐 여러 차례 사고를 겪었으며, 특히 여러 척의 핵 잠수함에서 사고가 발생했다. 가장 유명한 사고로는 K-219, 콤소몰레츠 화재, K-19 원자로 누출 사고가 있었으며, 이는 선장에 의해 가까스로 예방되었다. 부적절한 핵 안전, 열악한 손상 통제, (특히 초기 잠수함의) 건설 과정 품질 관리 문제는 사고의 전형적인 원인이었다. 여러 차례 미국 잠수함과의 충돌 주장이 있었지만, 미국 해군에 의해 공식 확인된 적은 없다. 1976년 8월 28일, ''K-22''(에코 II)는 지중해에서 프리깃함 USS 보그와 충돌했다.[20]
1966년, 소련 정치 지도부는 세계 대전이 반드시 핵전쟁이 되거나 소련 본토에 대한 대량 공격을 수반하지 않는다고 판단, 미소 양측 본토가 보존된 상태에서 재래식 무기에 의한 전쟁 수행 능력을 정비했다. 이 상황에서 확증 전력인 SSBN을 안전하게 확보하는 것이 중요, 발트해나 흑해와 함께 북극해를 준폐쇄 해역으로 취급, 이곳을 SSBN의 성역으로 만들고, 북방 함대와 태평양 함대 사이 연락 확보를 구상했다. 북극해 성역화를 위해 폭이 넓고 수심도 있는 노르웨이해 제해 확립이 필요, 60년대 방침 전환으로 희생된 대수상함 능력이 다시 요구되었다.
그러나 북극해 폐쇄 시도는 많은 비용이 들어 단념, 1976년부터의 새로운 5개년 계획에서 관련 투자가 삭감되었다. 미영에서도 SLBM 성능 향상이 진행, 서방 SSBN 잠재 해역은 소련 근해에서 외해로 확대, 1979년 사정거리 4,000해리의 트라이던트 I 등장으로 소련 해군에 의한 서방 SSBN 포착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자군 SSBN 행동 해역이 자국에 가까워진 것도 있어, 소련 해군 대잠전 부대 주임무는 서방 SSBN 포착·격파에서 자군 SSBN 방호로 전환되었다.
한편, 1971년 인소 평화 우호 협력 조약과 1978년 소월 우호 협력 조약 체결로 소련 해군은 남중국해에서 인도양에 걸쳐 상시 주둔을 전개했다. 원자력 잠수함대도 태평양과 대서양에서 핵 억지 순찰 임무를 지속, 쿠바에도 종종 함대가 전개되었다.
2. 5. 소련 붕괴 이후 (1991-)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소련 해군의 함대 대부분은 러시아 해군으로 이관되었다.[17] 그러나 독립 국가 연합(CIS)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발트 3국의 독립, 우크라이나군 창설 등으로 소련 시대보다 지배 지역이 축소되었고, 발트 함대와 흑해 함대는 주요 함대 기지를 잃었다.[17] 북방 함대는 큰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태평양 함대는 사령부가 있던 블라디보스토크가 폐쇄 도시 지정에서 해제되었다.[17]발트 함대는 주요 군항인 리가가 라트비아에, 탈린이 에스토니아에 속하게 되었고, 폴란드와 구 동독 항만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게 되어 행동에 큰 제약을 받았다.[17]
흑해 함대는 사령부와 주요 함대가 있던 세바스토폴 해군 기지가 우크라이나에 있어 귀속 문제가 발생했다.[17] 1992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세바스토폴을 기지로 하는 흑해 함대를 공동 운용하기로 합의했고(함선 군함기는 소련 유지, 사령관은 양국 동의하에 인선), 사실상 사령관은 러시아인이었다.[18] 1997년 양국은 흑해 함대를 별도로 조직하기로 합의하여 함선을 분할했지만,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에 대한 천연가스 요금 미납분 대가로 함선을 인도하여 대부분 러시아 소속이 되었다.[18]
같은 해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흑해 함대의 세바스토폴 기지 사용을 2017년까지 허용했다. 2009년 빅토르 유셴코 대통령은 협정 갱신 의사가 없음을 밝혔으나, 러시아는 천연가스 요금 등에 대한 양보를 통해 2042년까지 기지 사용권을 확보하고 5년 연장 옵션까지 얻었다.[18] 이후 2014년 러시아의 크림 병합으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기지 임대 협정 무효화를 일방 통고했다.[18]
3. 군사력
소련 해군은 잠수함, 수상함, 항공 전력 등 다양한 군사력을 보유했다.
러시아 혁명 이후, 소련은 구 러시아 제국 해군의 함선들을 재집결하여 소련 해군을 창설했다. 초기에는 연안 방어를 위한 잠수함 건조에 집중하여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세계 최대의 잠수함대를 보유했다.[4] 그러나 대양 작전 능력은 부족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은 탄도 미사일 탑재 잠수함 개발에 주력했다. 스탈린은 대규모 수상 함대 건설을 추진했으나, 그의 사후 중단되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를 겪으면서, 소련은 미국의 압도적인 해군력에 대응하기 위해 수상 함정 전력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또한, 미국 해군의 전략 핵미사일 탑재 잠수함에 대응하기 위해 대잠 전투 능력 증강의 필요성을 느꼈다.
1970년경부터 소련 해군은 대양 해군 건설을 시작했다. 이는 미국 해군과의 직접적인 교전보다는 평시 전략적 목표 달성을 위한 것이었다. 소련 해군은 자국 근해 방어를 위해 미국 해군의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위협으로 간주하고, 대함 미사일 포화 공격 전술을 고안했다. 이를 위해 소브레메니급 미사일 구축함, 슬라바급 미사일 순양함, 키로프급 미사일 순양함 등 강력한 대함 타격력을 가진 함정들을 건조했다.
소련 해군은 미국 해군에 대항하여 항공모함 보유에도 착수했다. 키에프급 항공모함, 쿠즈네초프 항공모함 등을 취역시켰고, 원자력 항공모함 울리야노프스크급 건조에도 착수했으나, 소련 붕괴로 중단되었다.
3. 1. 잠수함
소련 해군은 세계 최대 규모의 잠수함 전력을 보유했으며, 이는 냉전 시기 소련 해군력의 핵심이었다.[4] 소련은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도 잠수함 건조에 힘을 쏟아 세계 최대의 잠수함대를 보유하게 되었다.[4]소련의 잠수함대는 크게 탄도 미사일 잠수함(SSBN), 공격 원자력 잠수함(SSN), 재래식 잠수함(SS)으로 구성되었다.
- 탄도 미사일 잠수함(SSBN): 핵 억지력의 핵심 요소로, 수중에서 핵미사일을 발사하여 적국에 대한 보복 공격 능력을 제공했다. 대표적인 잠수함으로는 타이푼급이 있으며, 이는 세계에서 가장 큰 잠수함이었다.[16]
- 공격 원자력 잠수함(SSN): 주로 적의 함선과 잠수함을 공격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들은 핵 추진력을 사용하여 장기간 잠항이 가능하며, 높은 기동성을 가졌다.
- 재래식 잠수함(SS): 디젤-전기 추진 방식을 사용하며, 주로 연안 방어 및 대잠 작전에 투입되었다.
소련은 1930년대 소련의 산업화와 함께 해군력, 특히 잠수함 전력 증강에 주력했다.[5] 1926년 승인된 해군 조선 프로그램에는 12척의 잠수함 건조 계획이 포함되었고, 이후 수년에 걸쳐 133척의 잠수함이 건조되었다.[4]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도 잠수함대 증강은 소련에게 중요하게 여겨졌으며, 특히 탄도 미사일 탑재 잠수함인 골프급 잠수함이나 호텔급 잠수함 등의 건조는 서방보다 앞선 것이었다.
1960년대에 미국 해군이 조지 워싱턴급 SSBN 등의 전략 핵미사일 탑재 잠수함을 취역시켜, 소련은 수중으로부터의 핵공격 위협에 노출되었다. 이에 대응하여 소련은 대잠 전투 능력 증강에 힘썼다.
소련 해군은 미국 해군의 항공모함 기동부대에 대항하기 위해 대함 미사일 포화 공격 전술을 고안했다. 이 전술은 대형 폭격기, 수상함, 잠수함 등에서 대함 미사일을 발사하여 적 항공모함 부대의 방공 능력을 넘어서는 수의 미사일로 공격하는 방식이었다.
1990년, 소련 해군은 63척의 탄도 미사일 잠수함, 72척의 순항 미사일 잠수함, 68척의 핵 공격 잠수함, 63척의 재래식 공격 잠수함 등 대규모 잠수함 전력을 보유했다.
소련의 잠수함 기술은 일부 측면에서 서방보다 발전했으며, 몇몇 잠수함 유형은 미국 경쟁자보다 우수한 것으로 간주되었다.[14] 그러나 불충분한 소음 감쇠와 원시적인 소나 기술은 단점으로 지적되었다.[18]
3. 2. 수상함
소련 해군은 다양한 종류의 수상함을 보유했다. 이들은 주로 순양함, 구축함, 프리깃, 코르벳 등으로 분류되었다.키로프급 순양전함과 슬라바급 순양함은 강력한 대함 미사일과 대공 미사일을 탑재하여 주력함으로 활약했다. 특히, 키로프급 순양전함은 원자력 추진을 사용하여 장거리 작전 능력이 뛰어났다.
소브레멘니급 구축함과 우달로이급 구축함은 각각 대함 작전과 대잠 작전에 특화된 함정이었다. 소브레멘니급 구축함은 강력한 대함 미사일 P-500 바잘트, P-700 그라니트 등을 탑재하여 미국 해군의 항공모함에 대항하는 주요 전력으로 평가되었다. 우달로이급 구축함은 뛰어난 대잠 능력을 바탕으로 잠수함 위협에 대응했다.
이 외에도 카라급 대잠 순양함, 크리박 I·II급 대잠 프리깃 등 다양한 함정들이 건조되어 소련 해군의 전력을 구성했다.
3. 3. 항공 전력
소련 해군은 해상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해군 항공대(Авиация Военно-Морского Флота|Aviatsiya Voyenno-Morskogo Flotaru, AV-MF)를 운영했다.[17] 이 부대는 해안 기반 수상 비행기, 장거리 비행정, 사출기 발사 및 선박 기반 비행기, 해군용으로 지정된 육상 기반 항공기를 운용했다.소련 해군은 투폴레프 Tu-16 'Badger'와 Tu-22M 'Backfire'와 같은 전략 폭격기를 대량 배치하여 해상 작전에 투입했다.[17] 이 폭격기들은 고속 대함 미사일을 탑재하여, 북대서양을 가로지르는 NATO 보급 호송대를 요격하거나 미국 항공모함 기동 부대에 대한 공격 임무를 수행했다.[17]
1970년대 이후, 소련 해군은 미국 해군과의 경쟁을 위해 항공모함 건조를 추진했다.[13] 키예프급 항공모함은 V/STOL(수직/단거리 이착륙기) 항공기인 Yak-38 'Forger'를 운용했다. 쿠즈네초프 항공모함은 Su-33 'Flanker-D'와 MiG-29 전투기, Ka-27 헬리콥터를 탑재했다.[16]

3. 4. 해군 보병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약 35만 명의 소련 해군이 육상에서 전투를 벌였다. 전쟁 초기에 해군은 발트 함대에 해군 여단 1개만 있었지만, 다른 대대를 편성하고 훈련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결국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
- 해군 보병 연대 6개 (2개 대대에 650명의 해병)
- 잉여 함선 승무원으로 구성된 40개의 해군 보병 여단, 5\~10개 대대. 5개의 여단이 근위대 지위를 받았다.
- 수많은 소규모 부대
- 1개 사단 - 이전에는 적군 부대였던 제55해군보병사단
군사적 상황으로 인해 많은 수의 해병대가 육상 전선에 배치되어야 했기 때문에 해군 보병은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오데사, 세바스토폴, 스탈린그라드, 노보로시스크, 케르치의 방어에 기여했다. 해군 보병은 114회 이상의 상륙 작전을 수행했으며, 대부분 소대와 중대가 수행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해군 보병은 상륙 훈련 없이 정규 보병으로 복무했다.
그들은 케르치 반도 전투에서 2번, 코카서스 전투에서 1번, 발트해에서 문순드 상륙 작전의 일부로 1번, 총 4번의 주요 작전을 수행했다. 전쟁 중 해군 보병 5개 여단과 2개 대대가 근위대 지위를 받았다. 9개 여단과 6개 대대는 훈장을 받았고, 많은 부대가 명예 칭호를 받았다. 소련 영웅 칭호는 해군 보병 부대원 122명에게 수여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소련의 상륙전 경험은 소련 합동 군사 작전의 발전에 기여했다. 많은 해군 보병은 공수 훈련을 받았으며, 소련 공수 부대(VDV)보다 더 많은 강하 및 성공적인 낙하산 작전을 수행했다.
해군 보병은 1947년에 해산되었으며, 일부 부대는 연안 방어 부대로 이관되었다.


1961년에 해군 보병은 재결성되어 해군의 활동적인 전투 병력 중 하나가 되었다. 각 함대는 연대(후에 여단) 규모의 해병대 부대를 배정받았다. 해군 보병은 소련 육군에서 사용한 전차를 포함하여 표준 장갑 전투 차량의 상륙 버전을 받았다.
1989년까지 해군 보병은 18,000명의 해병으로, 해병 사단 1개와 독립 해병 여단 4개로 편성되었다.
- 제55해군보병사단, 블라디보스토크 (태평양 함대)
- 제61키르케네스 해군 보병 여단, 페첸가 (북방 함대)
- 제175해군보병여단, 투마니 (북방 함대)
- 제336근위해군보병여단, 발티스크 (발트 함대)
- 제810해군보병여단, 세바스토폴 (흑해 함대)
냉전이 끝날 무렵, 소련 해군은 80척 이상의 상륙함과 2척의 이반 로고프급 상륙함을 보유했다. 후자는 40대의 장갑차와 상륙정과 함께 보병 대대 1개를 수송할 수 있었다. (''로고프'' 함선 중 하나는 이후 퇴역했다.)
소련은 75개의 부대로 세계 최대 규모의 전투 호버크래프트를 보유했다. 또한 소련 상선대(''모르플로트'')의 2,500척의 선박 중 다수는 상륙 작전 중에 무기와 물자를 하역할 수 있었다.
1990년 11월 18일, 유럽 재래식 무기 제한 조약 (CFE) 조약과 비엔나 문서가 서명될 파리 회담 전날, 소련 데이터는 소위 초기 데이터 교환에 따라 제시되었다. 이로 인해 발트 군관구의 클라이페다에 있는 제3근위소총사단, 오데사 군관구의 제126사단, 그리고 북방 함대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제77근위소총사단을 포함한 3개의 소위 연안 방어 사단과, 나토에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소련 해군에 종속된 3개의 포병 여단/연대가 갑자기 등장했다.[21]
일반적으로 조약으로 제한된 장비(TLE)로 이해되는 장비의 상당 부분이 해군 보병의 일부로 선언되었다. 소련의 주장은 CFE가 영구적으로 육상에 배치된 구성 요소를 포함하여 모든 해군 부대를 제외한다는 것이었다. 소련 정부는 결국 자신의 입장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1991년 7월 14일 소련 정부의 선언은 이후 계승 국가에서 채택되었으며, 해군 보병 또는 연안 방어 부대에 할당된 모든 "조약 제한 장비"(전차, 포병 및 장갑차)가 총 조약 권리에 포함된다고 규정했다.
4. 조직
소련 해군은 여러 함대와 소함대로 구성되었다. 주요 함대 외에도 카스피 소함대, 레닌그라드 해군 기지 등 다양한 소함대와 해군 기지가 존재했다.
4. 1. 주요 함대
소련 해군은 다음과 같은 주요 함대들을 운용했다.함대 | 설명 |
---|---|
흑해 함대 | 제정 시대부터 계승되어 여러 차례 개칭을 거쳐 1935년에 흑해 함대로 개칭되었다. |
발트 함대 | 제정 시대부터 계승되어 여러 차례 개칭을 거쳐 1935년에 발트 함대로 개칭되었다. |
태평양 함대 | 1932년에 극동 해군으로 설치, 1935년에 태평양 함대로 개칭되었다. |
북방 함대 | 1933년에 소함대로 설치, 1937년에 함대로 승격되었다. |
카스피 소함대 | 제정 시대부터 계승되어 여러 차례 개편을 거쳐 1931년에 카스피 소함대로 개칭되었다. |
레닌그라드 해군 기지 | 소련 시대에는 해군 총사령관 직할하에 있었다. |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소련 해군의 함대 대부분은 러시아 해군으로 이관되었다.[3] 그러나 독립 국가 연합(CIS)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발트 3국의 독립이나 우크라이나군처럼 독자적인 군대를 창설하는 사태가 발생하여, 소련 시대와 비교해 지배 지역이 축소되었고 발트 함대와 흑해 함대는 주요 함대 기지를 잃었다.[3] 북방 함대는 큰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태평양 함대는 사령부를 둔 블라디보스토크가 폐쇄 도시 지정에서 해제되었다.[3]
발트 함대는 주요 군항인 리가가 라트비아에, 탈린이 에스토니아 영토가 된 것 외에도, 폴란드와 구 동독의 항만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게 되면서, 소련 시대와 비교해 행동이 크게 제약되었다.[3]
흑해 함대는 사령부와 주요 함대가 소재한 세바스토폴 해군 기지가 우크라이나에 있어 그 귀속이 문제가 되었다.[3] 1992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세바스토폴을 기지로 하는 흑해 함대를 양국이 공동 운용하는 것에 동의하고, 함선의 군함기는 소련 그대로 유지하며, 사령관은 양국의 동의를 바탕으로 인선·임명하기로 했지만, 사실상 사령관이 된 것은 러시아인뿐이었다.[4] 1997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별도로 흑해 함대를 조직하는 것에 동의하여 함선이 분할되었지만,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에 대한 천연 가스 요금 미납분의 대가로 함선을 인도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함선은 러시아 국적을 가지게 되었다.[4]
같은 해, 우크라이나 정부는 러시아 흑해 함대가 세바스토폴 기지를 2017년까지 사용하는 것에 합의했지만, 2009년 유셴코 대통령은 2017년에 이 협정의 기한이 만료될 때 갱신하지 않을 의향을 보였다. 이에 러시아는 천연 가스 요금 등에 대한 양보와 교환하여 기지를 2042년까지 사용하고, 추가로 5년 더 연장할 수 있도록 합의를 얻어냈다.[4] 그 후, 2014년 러시아의 크림 병합을 통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대해 기지 임대 협정의 무효화를 일방적으로 통보했다.[4]
5. 평가 및 영향
냉전 시기, 소련 해군은 미국 해군과 함께 세계 양대 해군력으로 평가받았다. 소련 해군의 발전은 냉전 시대의 군비 경쟁을 가속화시키는 요인 중 하나였다. 특히, 소련 해군은 잠수함 건조에 힘을 쏟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세계 최대의 잠수함대를 보유하기도 했다.[13]
스탈린은 대규모 수상 함대 건설에 나섰으나, 그의 사후 이 계획은 중단되었다. 그러나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를 계기로 소련은 해군 전력, 특히 수상 함정 전력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또한, 1960년대 미국 해군이 전략 핵미사일 탑재 잠수함을 취역시켜 소련은 수중으로부터의 핵공격 위협에 직면, 대잠 전투 능력 증강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1970년대부터 소련 해군은 대양 해군 건설을 시작했다. 이는 평시 자국의 전략적 목표 달성을 위한 것으로, 자국 전략 핵미사일 원자력 잠수함(델타급 등)의 자유로운 활동을 위해 자국 근해를 방어하는 것이 주요 목표였다. 소련 해군은 미국 해군의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가장 큰 위협으로 간주, 대함 미사일 포화 공격 전술을 고안했다. 이를 위해 소브레메니급 구축함, 슬라바급 미사일 순양함, 키로프급 미사일 순양함 등 강력한 대함 타격력을 가진 함정들을 취역시켰다.
소련 해군은 미국 해군에 대항하여 키에프급 항공모함, 쿠즈네초프 항공모함 등을 취역시켰고, 원자력 항공모함 울리야노프스크급 건조에도 착수했다. 그러나 소련 붕괴로 인해 해군력 증강은 중단되었다.
소련 해군의 기술 발전은 잠수함, 미사일 기술 등 여러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소련이 개발한 대함 미사일 기술은 미국 항공모함의 방공 능력을 약점으로 간주하여 개발된 것으로, 소브레메니급 구축함, 슬라바급 미사일 순양함, 키로프급 원자력 미사일 순양함 등에 탑재되어 미 해군을 위협했다.
6. 한국과의 관계
냉전 시기 소련 해군은 조선인민군 해군을 지원하며 대한민국 해군과 간접적으로 대립했다. 1983년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은 소련 해군 방공군 전투기에 의해 발생하여 한국과 소련 간 긴장을 고조시켰다.[13]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 해군은 대한민국 해군과 교류 협력을 추진하고 있다. 소련 해군이 건조했던 바리야그 항공모함은 중국에 판매된 후 개조되어 랴오닝함으로 취역했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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