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타 이쿠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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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타 이쿠히코는 1932년생으로, 일본의 근대사 연구에 기여한 학자이다. 도쿄대학교를 졸업하고 재무성에서 근무했으며, 하버드 대학교 등에서 연구 활동을 했다. 다쿠쇼쿠 대학교, 지바 대학교, 니혼 대학교 등에서 교수를 역임했다. 주요 연구 분야는 일본 근현대사, 특히 제2차 세계 대전을 중심으로 한 일본 군사사이며, 난징 대학살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연구로 알려져 있다. 1993년 기쿠치 간상, 2014년 마이니치 출판문화상, 정론 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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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하타 이쿠히코 |
원어명 | 秦郁彦 |
로마자 표기 | Hata Ikuhiko |
출생일 | 1932년 12월 12일 |
출생지 | 일본, 야마구치현 호후시 |
국적 | 일본 |
배우자 | 가즈코 (1973년 9월 9일 결혼) |
학력 | |
모교 | 도쿄 대학 (학사, 박사) |
학위 | 법학 박사 |
경력 | |
직업 | 역사학자, 현대사학자 |
주요 연구 분야 | 일본사 근현대사 군사사 |
근무 기관 | 일본 재무성 다쿠쇼쿠 대학 지바 대학 니혼 대학 |
이전 근무 기관 | 방위성 방위연구소 방위대학교 대장성 재정사 실 프린스턴 대학교 |
수상 | |
주요 수상 | 기쿠치 칸 상 |
2. 학력 및 경력
하타 이쿠히코는 1932년 12월 12일 야마구치현 호후시에서 태어났다.[1] 1951년 야마구치현 타타라가쿠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도쿄대학 문과 1류에 입학하여, 법학부 제3류(정치 코스)로 진학했다. 재학 중에는 전사와 세이우라 케이고 등 정치가 연구에 몰두했으며, 2학년 때 결핵 진단을 받았으나(후에 오진으로 밝혀짐) 1년 휴학하고 스가모 교도소에 수감 중인 A급 전범을 포함한 구 육해군 군인 100여 명에게 인터뷰를 실시했다.[80][81] 초기 지도 교수는 마루야마 마나오였지만, 휴학으로 인해 오카 요시타케에게 배웠다.
하타 이쿠히코는 일본 근현대사, 그중에서도 제2차 세계 대전을 중심으로 하는 일본 군사 역사를 연구했다. 사실을 바탕으로 객관적으로 역사를 분석하는 실증주의 역사학자로 알려져 있다. 도쿄대학 재학 시절에는 마루야마 마사오의 지도를 받아 A급전범을 포함한 구 일본군 장교들을 직접 만나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4][5][6][7]
1956년 도쿄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하고 대장성에 들어갔다.[1] 아사히 신문 입사 시험에도 응시했지만 불합격했다.[76] 대장성에서는 외환국 조사과, 중국 재무국, 나고야 국세국에서 근무했으며, 경제기획청경제연구소에 파견되기도 했다. 1963년부터 1965년까지 하버드 대학교와 컬럼비아 대학교에 유학했고,[2] 1965년부터 방위청 방위국에 파견되어 방위연구소 교관, 방위대학교 강사를 역임했다.[86] 1969년 대장성으로 복귀하여 오키나와 반환 업무를 담당했고,[86] 1971년부터 1976년까지 대장성 재정사실장을 역임하며 총서 「쇼와 재정사」 편찬 책임자를 맡았다.[87] 1974년 도쿄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1]
재정사실장을 끝으로 대장성을 퇴관한 후,[73] 1977년부터 1978년까지 프린스턴 대학교 방문 교수를 역임했고,[1] 1980년부터 1993년까지 다쿠쇼쿠 대학교 정경학부 교수,[3] 1994년부터 1997년까지 지바 대학교 법경학부 교수를 역임했다.[3] 1997년부터 2002년까지 니혼 대학교 법학부 교수로 재직했으며,[3] 퇴직 후 2010년까지 동 대학원 법학연구과 비상근 강사를 역임했다.[89]
3. 연구 및 주장
일본군에 의한 위안부의 조직적 강제연행 가능성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며, 난징 대학살의 경우 피해자를 최대 4만 명으로 주장했다. 도조 히데키는 극동국제군사재판이 아니더라도 사형에 처할 범죄자라고 주장했다.
여러 역사학자들은 하타 이쿠히코를 근대 일본사 연구에 중요한 학자로 평가해 왔다. 역사학자 에드워드 드리아(Edward Drea)는 그를 "일본 군사사 연구의 대가"라고 칭송했고,[4] 그의 저술이 "학문성, 연구, 정확성, 그리고 신중한 해석의 모범"이라고 평가했다.[5] 요크 대학교(York University)의 중국사 전문가 조슈아 에이. 포겔(Joshua A. Fogel) 역시 하타가 "40년 이상 전쟁 중 일본에 관한 수많은 뛰어난 연구를 해 온 저명한 학자"라는 데 동의했다.[6] 야마모토 마사히로(Masahiro Yamamoto)는 그를 "일본 근대사 분야의 선도적인 일본 학자"라고 불렀다.[7]
일본국제정치학회(日本国際政治学会)는 하타를 포함한 역사가 팀에 아시아-태평양 전쟁 발발 원인에 대한 연구를 맡겼고, 그 결과물인 『太平洋戦争への道|태평양 전쟁으로 가는 길일본어』(1962-1963)은 이후 영어로 번역되었다.[14] 1968년부터 하타는 문부성으로부터 일본의 전시 및 전전 군대 운영에 대한 자료를 분석하는 팀을 이끌었다. 1993년에는 『昭和史の謎を追う|쇼와사의 수수께끼를 쫓다일본어』를 집필하여 기쿠치 간상(Kikuchi Kan Prize)을 수상했다.[1]
하타는 이자와 야스호(Yasuho Izawa)와 함께 제2차 세계 대전의 일본 전투기 에이스에 관한 책을 공동 집필했는데, 역사가들은 이 두 책을 해당 주제에 대한 결정적인 논문이라고 평가했다.[22][23][24] 1984년에 쓴 저서 『裕仁天皇五つの決断|히로히토 천황 다섯 개의 결단일본어』은 마리우스 얀센(Marius Jansen)에 의해 영어로 번역되었다.
군사사학회(軍事史学会) 회원으로서 여러 차례 학회에서 논문을 발표했으며, 쇼와 시대(昭和時代) 관련 저서도 다수 집필했다. 자신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실증적이라고 자주 말을 듣는다"고 평가한다.[75] 일본국제정치학회(日本国際政治学会) 태평양 전쟁 원인 규명부의 공동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그 연구 성과는 『太平洋戦争への道|태평양 전쟁으로 가는 길일본어』로 출판되어 일본 외교를 다루고 있다. 존 W. 다워(John W. Dower)의 『Embracing Defeat|패배를 껴안고영어』, 알빈 D. 쿡스(Alvin D. Coox)의 『Nomonhan|노몬한영어』에서는 공동 연구자로서 헌사에 이름이 언급되었다.
3. 1. 주요 연구 분야
하타 이쿠히코는 일본 근현대사, 특히 제2차 세계 대전을 중심으로 하는 일본 군사 역사를 전공했다. 치밀하고 객관적인 실증을 중시하는 실증사가로, 도쿄대학 재학 중 마루야마 마사오의 지도 아래 A급전범을 포함한 구 일본군 장교들을 대상으로 청취 조사를 벌였다.[4][5][6][7]
역사가 에드워드 드리아(Edward Drea)는 하타를 "일본 군사사 연구의 대가"라고 칭하며, 그의 저술이 "학문성, 연구, 정확성, 그리고 신중한 해석의 모범"이라고 평가했다.[12] 요크 대학교(York University)의 조슈아 에이. 포겔(Joshua A. Fogel)도 하타가 "40년 이상 전쟁 중 일본에 관한 수많은 뛰어난 연구를 해 온 저명한 학자"라는 데 동의했다.[14]
하타의 초기 저작인 『일중전쟁사』(1961)와 『군 파시즘 운동사』(1962)는 각각 챌머스 존슨(Chalmers Johnson), 제임스 T.C. 리우(James T.C. Liu), 도몬 슈헤이(Shuhei Domon) 등으로부터 호평을 받았다.[10][11][13]
일본국제정치학회(日本国際政治学会)는 하타를 포함한 역사가 팀에 아시아-태평양 전쟁 발발 원인에 대한 연구를 맡겼고, 그 결과물인 『태평양 전쟁으로 가는 길』(1962-1963)은 이후 영어로 번역되었다.[15][16][17] 하타는 이 시리즈에 "일소 대립, 1935-1939", "인도차이나 북부로의 군대 진격", "1937년 마르코 폴로 다리 사건"의 세 논문을 기고했다.
1968년부터 하타는 문부성의 지원을 받아 일본의 전시 및 전전 군대 운영에 대한 자료를 분석하는 팀을 이끌었고, 그 결과 『일본 육해군의 제도, 조직, 인사』(1971)를 출판했다.[18] 이후 재무성의 의뢰로 일본 점령에 관한 공동 연구 프로젝트를 조정했다.[19][20][21]
1993년에는 『쇼와사의 수수께끼를 쫓다』를 집필하여 기쿠치 간상(Kikuchi Kan Prize)을 수상했다.[1] 이자와 야스호(Yasuho Izawa)와 함께 제2차 세계 대전의 일본 전투기 에이스에 관한 책을 공동 집필하기도 했다.[22][23][24]
하타는 『히로히토 천황 다섯 개의 결단』(1984)에서 히로히토 천황의 정치적 역할에 대해 "상당한 정치적 감각이 있었다"고 평가했다.[25][26]
일본군에 의한 위안부의 조직적 강제연행 가능성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며, 난징대학살의 피해자 수를 최대 4만 명으로 주장했다. 도조 히데키에 대해서는 극동국제군사재판이 아니더라도 사형에 처할 범죄자라고 주장했다.
3. 2. 연구 방법론
하타 이쿠히코는 일본 근현대사, 특히 제2차 세계 대전을 중심으로 하는 일본 군사 역사를 전공했다. 치밀하고 객관적인 실증을 중시하는 실증사가로 알려져 있다. 도쿄대학 재학 중에는 마루야마 마사오의 지도 아래 A급전범을 포함한 구 일본군 장교들을 대상으로 청취 조사를 실시하기도 했다.[4][5][6][7]
하타는 1961년 도쿄 대학교 학부 과정을 마치면서 연구를 시작한 『日中戦争史|일중전쟁사일본어』를 출판했다.[8][9] 이 책은 챌머스 존슨(Chalmers Johnson)으로부터 "1930년대 중국의 일본 정책에 대한 가장 철저한 연구"라는 평가를 받는 등 호평을 받았다.[10] 1962년에는 『軍ファシズム運動史|군 파시즘 운동사일본어』를 출판하여, 도몬 슈헤이(Shuhei Domon)로부터 "방대한 증거 자료를 바탕으로 한 일류 서술적 해석"이라는 평가를 받았다.[13]
일본국제정치학회(日本国際政治学会)는 하타를 포함한 젊고 객관적인 외교 및 군사 역사가 팀을 선정하여, 아시아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 원인에 대한 역사를 쓰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14] 그 결과 1962년부터 1963년 사이에 『太平洋戦争への道|태평양 전쟁으로 가는 길일본어』이 출판되었고, 하타는 이 시리즈에 세 편의 논문을 기고했다.[14] 그의 논문들은 "풍부한 새로운 자료"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인도차이나 북부를 통한 평화로운 통과가 어떻게 강제 점령이 되었는지를 훌륭하게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았다.[15][16]
1968년부터 하타는 문부성의 지원을 받아 일본의 전시 및 전전 군대 운영에 대한 모든 가능한 출처와 문서를 분석하는 학자 팀을 이끌었다. 그 결과 1971년에 『日本陸海軍の制度、組織、人事|일본 육해군의 제도, 조직, 인사일본어』가 출판되었으며, 마크 피티(Mark Peattie)는 이를 "그 분야의 권위 있는 참고 자료"라고 평가했다.[18] 또한 하타는 재무성을 위한 제2차 세계 대전 후 미국의 일본 점령에 관한 공동 연구 프로젝트를 조정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이 프로젝트는 1975년부터 출판되기 시작하여 점령에 관한 최고의 학술 연구로 평가받았다.[19][20][21]
1993년에는 현대 일본 역사의 논란이 되는 사건에 관한 2권짜리 저서 『昭和史の謎を追う|쇼와사의 수수께끼를 쫓다일본어』를 집필하여 기쿠치 간상(Kikuchi Kan Prize)을 수상했다.[1]
하타는 이자와 야스호(Yasuho Izawa)와 함께 제2차 세계 대전의 일본 전투기 에이스에 관한 두 권의 책을 공동 집필했는데, 역사가들은 이 두 책 모두 그 주제에 대한 결정적인 논문이라고 평가했다.[22][23][24]
1984년에 쓴 저서 『裕仁天皇五つの決断|히로히토 천황 다섯 개의 결단일본어』은 마리우스 얀센(Marius Jansen)에 의해 영어로 번역되었으며, 히로히토의 정치적 감각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담고 있다.[5][25][26]
하타는 군사사학회(軍事史学会) 회원으로서 여러 차례 학회에서 논문을 발표했으며, 쇼와 시대(昭和時代) 관련 저서도 다수 집필했다. 자신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실증적이라고 자주 말을 듣는다"고 평가한다.[75]
일본국제정치학회(日本国際政治学会) 태평양 전쟁 원인 규명부의 공동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그 연구 성과는 『太平洋戦争への道|태평양 전쟁으로 가는 길일본어』로 출판되어 일본 외교를 다루고 있다.
존 W. 다워(John W. Dower)의 『Embracing Defeat|패배를 껴안고영어』, 알빈 D. 쿡스(Alvin D. Coox)의 『Nomonhan|노몬한영어』에서는 공동 연구자로서 헌사에 이름이 언급되었다.
3. 3. 난징 대학살
난징 대학살에 대해 하타 이쿠히코는 피해자를 최대 4만 명으로 추정했다.[29] 1986년 출판된 그의 저서 『난징 사건(南京事件)』은 일본어, 중국어, 영어 자료를 바탕으로 한 상세한 연구로, 양다칭(楊大慶, Daqing Yang) 등 역사가들에 의해 당시 대학살에 관한 몇 안 되는 공정한 학술 연구 중 하나로 평가받았다.[27][28] 하타는 루이스 S. C. 스미스(Lewis S. C. Smythe)의 연구(《난징 지역 전쟁 피해, 1937년 12월~1938년 3월, 도시 및 농촌 조사》War Damage in Nanking Area, Dec.1937 to March 1938, Urban and Rural Surveys)를 기반으로 민간인 학살 숫자를 최대 4만 명으로 추정했으며, 중국군은 제외하였다.[29]
하타의 책은 대학살의 원인을 논의한 최초의 연구로, 이전의 책들이 사건 자체에만 초점을 맞춘 것과 달리, 일본군의 군경 부족과 포로 수용 시설 부재, 국제법 무지, 그리고 당성지(唐生智, Tang Shengzhi) 장군의 공식적인 항복 없이 도시를 탈출한 결정(이로 인해 민간인 사이에 많은 사복 군인이 남게 되었고, 이후 일본군의 과도한 토벌 작전이 이어졌다) 등을 학살로 이어진 요인으로 지적했다.[29]
호라 토미오(保坂 智夫, Tomio Hora)와 혼다 가쓰이치(本田 勝一, Katsuichi Honda) 등 일부 현대 연구자들은 하타의 사망자 수 추정에 강하게 반박했지만, 그의 학문적 성과와 진정성에는 감탄을 표했다.[29][30] 하타는 오늘날 남경대학살에 대한 소위 "중도파" 사상의 주요 학자로, 사망자 수를 수만 명으로 보는 견해를 가지며, 수십만 명이 학살당했다고 보는 "대학살" 론과 난징 대학살 부정론자들의 "허구" 론 사이에 위치한다.[31][32] 기무라 다쿠지(木村卓三, Takuji Kimura)는 하타를 잔혹 행위를 "축소하는" 사람으로 비판하면서도, 그의 대학살 관련 저서는 "훌륭한 연구"라고 인정했다.[33] 빅스 허버트(Herbert Bix)는 그를 남경대학살의 "부분적 부정론자" 중 "가장 악명 높은" 인물로 묘사했다.[34] 그러나 토마쓰 하루오(戸松晴夫, Haruo Tohmatsu)와 윌모트 H. P.(H. P. Willmott) 등의 역사가들은 하타의 사망자 수 추정치가 일본에서 "가장 학문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추정치"로 여겨진다고 밝혔다.[35]
하타의 『난징 사건』은 일부 학자들로부터 지속적인 찬사를 받았다. 2000년 얀센 마리우스(Marius Jansen)는 이 책을 대학살에 관한 "많은 일본 연구 중 가장 합리적인 것"으로 옹호했고,[36] 2001년 요시다 유타카(吉田裕, Yutaka Yoshida)는 사망자 수 추정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이 책을 남경대학살에 관한 추천 도서 5권 중 하나로 선정했다.[37] 2003년 포겔 조슈아(Joshua Fogel)는 이 책을 "여전히 이 분야의 권위"라고 불렀고,[6] 리쓰메이칸 대학(立命館大学, Ritsumeikan University)의 데이비드 애스큐(David Askew) 교수는 이를 "어떤 언어로도 남경 사건에 대한 최고의 입문서"라고 지칭했다.[38] 1999년까지 이 책은 19쇄를 기록했다.[39]
1997년 11월 프린스턴 대학교(Princeton University) 학회에서 하타는 『난징의 강간(The Rape of Nanking)』의 저자 천이리스(張純如, Iris Chang)로부터 일본군 포로들의 증언에 대한 의문을 제기받았다. 하타가 일본군 포로들의 증언이 고문과 강압에 의한 것으로 신뢰할 수 없다고 답하자, 첸은 자리를 떠났고 청중은 소란스러워졌다.[40] 이 사건 이후, 그의 사망자 수 추정치에 반대하는 중국 유학생들의 유사한 방해 행위로 인해 하타는 방문 예정이었던 여러 대학에서 강연을 할 수 없었다.[30] 요크 대학교(York University)의 와카바야시 밥(Bob Wakabayashi)은 하타가 이러한 공격 이후 더욱 공격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핀켈슈타인 노먼(Norman Finkelstein)의 "홀로코스트 산업(Holocaust industry)"과 비교하여 "난징 산업(Nanking industry)"이라고 불렀다고 주장한다.[30]
1980년대 하타는 사망자 수를 3만 8천 명에서 4만 2천 명이라고 주장하면서 최대 6만 명에 달할 가능성도 제시했지만,[41] 2007년 『난징 사건』 두 번째 판에서는 학살된 사람이 최대 4만 2천 명이며 실제 숫자는 그보다 적을 수도 있다고 밝혔다.[42] 그는 일본군의 불법적인 학살 규모를 십수만 명에서 수십만 명으로 보는 대학살 존재론과, 불법 살해가 전무하거나 거의 없었다고 보는 대학살 부정론(환상론)의 중간에 위치하여, 학살의 존재는 인정하되 희생자 수를 수천 명에서 수만 명으로 보는 중간론(축소론, 한정론)의 입장을 취한다. 저서 『난징 사건』에서 일본군의 불법 행위로 인한 희생자 수를 "3만 8천 명~4만 2천 명"으로 추정하고, 이후에도 피학살자 수는 약 4만 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90] 2007년에 출판된 동 저서의 증보판에서는 "4만 명의 숫자는 최대치이며, 실제 숫자는 이보다 훨씬 적을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백인참경쟁(百人斬り競争)에 대해서는, 이를 자행했다고 알려진 구 일본 육군 소위가 고향 가고시마현에서 지역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항복한 적[91]"을 벤 사실을 명부를 통해 문의하여 4명으로부터 답변을 얻어, 1991년 일본대학 법학회 『정경연구』 42권 1호·4호에 발표했다. 시시메 아키라(志々目彰)의 증언은 "전의를 상실하고 항복한 적을 벤[92]"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타 자신이 말하는 포로의 요건은 "지휘관이 있고, 표식이 제복에 붙어 있으며, 공공연히 무기를 휴대하는 것이 조건이며, 국제법상의 대우를 받을 수 있다"이다.[93]
3. 4.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하타 이쿠히코는 일본 근현대사 전공의 실증사가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깊이 연구했다. 그는 요시다 세이지가 주장한 일본군에 의한 한국 여성 납치 주장이 허위임을 처음으로 폭로하였다.[44] 하타 이쿠히코는 위안부가 대부분 자발적 매춘부였고, 일부는 부모에 의해 팔려갔으며, 일본군의 직접적인 개입은 드물었다고 주장한다.[45] 그는 위안부의 최대 숫자를 2만 명으로 추산하며, 그들 중 누구도 강제로 징집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위안부의 40%는 일본 출신이며, 위안소의 생활 조건은 베트남 전쟁 중 미군을 위한 매춘 업소와 거의 동일했다고 덧붙였다.[45]
그러나 역사학자 소 청희(Chunghee Sarah Soh)는 하타가 1993년 위안부 총 수를 9만 명으로 추산했지만, 이후 일본 보수 진영과의 정치적 결합으로 인해 그 수치를 낮췄다고 지적한다.[46]
하타 이쿠히코는 1999년 『위안부와 전장의 성(Ianfu to senjō no sei)』을 출판했는데,[47] 이 책은 2018년 영어로 번역되었다. 이 책은 방대한 자료 수집으로 주목받았으며, 여러 학자들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48][49][50][51][52] 반면, 하야시 히로후미는 하타가 문서를 잘못 사용했다고 비판했다.[53]
하타 이쿠히코는 고노 담화 철회를 지지하며, 아베 신조 정부의 담화 재검토 위원회에 임명된 유일한 역사학자였다.[54] 2015년에는 미국 교과서의 위안부 관련 기술 수정을 요구하는 일본 역사학자 그룹을 이끌기도 했다.[55]
그는 일본군 위안소를 당시 국내의 공창제도가 전지로 옮겨진 것이라고 주장하며, '위안부의 강제연행'은 자료(공문서)로 뒷받침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95] 또한 위안부를 (성)노예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며,[95][96][97] 요시미 요시아키 등과 논쟁을 벌였다.[98]
하타 이쿠히코는 "협의의 강제성"을 부정한 아베 신조 총리의 국회 답변에는 비판적이었다.[99]
2014년, 하타 이쿠히코는 고노 담화 검증 팀의 멤버가 되었다.[102]
4. 논쟁
하타 이쿠히코는 일본 근현대사 및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일본 군사 역사를 전공한 실증사가이다. 그는 객관적이고 치밀한 실증을 중시하며, 마루야마 마사오의 지도하에 A급 전범을 포함한 구 일본군 장교들을 대상으로 청취 조사를 진행했다. 이러한 연구를 바탕으로 하타 이쿠히코는 여러 논쟁적인 주제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 일본군 위안부 문제: 일본군에 의한 위안부의 조직적 강제 연행 가능성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56]
- 난징 대학살: 피해자 규모를 최대 4만 명으로 추정하여, 난징 대학살 부정론자들과 대립했다.[57]
- 도조 히데키: 극동국제군사재판이 아니더라도 사형에 처할 범죄자라고 주장했다.[58]
하타 이쿠히코의 이념적 성향에 대해서는 다양한 평가가 존재한다. 토머스 U. 버거는 그를 "매우 존경받는 보수적인 일본 역사학자"라고 평가했지만,[56] 야마모토 마사히로는 하타가 난징 대학살 논쟁에서 중도적 입장을 취했으며, "전통주의자"에 가깝다고 보았다.[57] 야마다 타카오는 하타가 역사적 논쟁에서 모든 측면을 비판해왔다는 점을 들어 그를 "실증주의자"로 규정했다.[49]
하타 이쿠히코는 일본의 전쟁 책임을 축소하려는 시도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 월스트리트 저널(The Wall Street Journal)은 그를 일본 역사에 대한 "우리가 잘못했다"는 견해를 옹호하는 인물로 묘사했다.[58] 그는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 근처에 새 전쟁 박물관 건립에 관한 정부 위원회에서 사퇴했는데, 이는 이 프로젝트가 일본의 전쟁 행위를 미화하는 데 이용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59] 그는 야스쿠니 신사에 전범이 합사된 것을 반대하며,[60] 신사 근처 박물관인 유슈칸(遊就館)의 민족주의적 역사 묘사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61]
역사 교과서 문제와 관련하여, 하타 이쿠히코는 일본 민족주의 단체들의 교과서 변경 시도를 비판했지만,[62] 좌익 역사가 이에나가 사부로(家永三郎)에 대항하여 교육부를 위해 증언하기도 했다.[63] 그는 일본 역사 교과서 개혁 협회(日本歴史教科書改革協会)의 활동을 지지했지만,[64] 협회가 집필한 교과서가 "다른 교과서보다 민족주의적으로 더 강하게 착색되어 있다"고 지적했다.[65]
2007년, 하타 이쿠히코는 다모가미 도시오(田母神俊雄) 전 일본 항공 자위대 장성의 일본 제국주의 정당화 수필을 "극히 저질"이며 "낡은 음모론"으로 가득 차 있다고 비난했다.[66][67]
하타 이쿠히코는 쇼와 천황의 전쟁 책임과 관련된 논쟁에도 참여했다. 그는 쇼와 천황 독백록이 GHQ에 제출하기 위한 변명서이며, 영어판도 존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69][70] 이후 그의 주장대로 영어판이 발견되었다.[71] 그는 쇼와 천황이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지 않게 된 이유가 A급 전범 합사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다른 견해를 가진 학자들을 비판했다.
2006년, 후타다 메모(富田メモ)의 진위 평가 연구위원회 위원을 맡아 메모가 진짜임을 인정했다. 이 메모에는 쇼와 천황이 A급 전범의 야스쿠니 신사 합사에 강한 불쾌감을 표시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하타 이쿠히코는 난징 대학살 부정론자인 다나카 마사아키(田中正明)와 종합토론회를 가졌으며, 와타나베 쇼이치(渡辺惣一郎)가 다나카 마사아키의 저서에 추천사를 쓴 것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그는 와타나베 쇼이치의 저서에서 표절 의혹을 제기하며, 저작권 문제에 대한 프로와 아마추어의 구분이 없음을 강조했다.[111]
청일 전쟁 당시 여순사변과 관련하여 노기 여단장의 관련성 여부를 두고 나카무라 마사루와 논쟁을 벌였다.
1990년 12월, 문예춘추에 공개된 「쇼와 천황 독백록」에 대한 종합토론에서 이토 타카시, 고지마 죠 등과 대립했다. 하타는 「독백록」이 쇼와 천황의 전범 기소를 회피하기 위해 만들어진 변명서이며 영어판도 존재할 것이라고 주장했고, 이후 영어판이 실제로 발견되었다.[114]
5. 평가
하타 이쿠히코는 일본 근현대사, 특히 군사 분야에서 권위 있는 학자로 평가받는다. 그의 연구는 실증주의적 접근을 중시하며, 방대한 1차 사료를 바탕으로 객관적인 역사 서술을 추구한다는 평가를 받는다.[49]
긍정적 평가 | 비판적 평가 |
---|---|
하타는 일본의 전쟁 책임을 축소하려는 민족주의자들의 시도에 반대하며, 야스쿠니 신사 문제, 역사 교과서 문제 등에서 일본 우익을 비판하는 모습을 보였다.[58][59][60][61][62] 그러나 가네나가 사부로의 교과서 검열 문제에서는 일본 정부 측 증인으로 참여하기도 했다.[63]
난징 대학살에 대해서는 중도적 입장을 견지하며, 학살 규모를 과장하는 일본 우익과 이를 부정하는 세력 모두를 비판했다.[57] 다모가미 도시오의 일본 제국주의 정당화 주장에 대해서는 "극히 저질"이라고 비난했다.[66][67]
하타는 히로히토 천황의 전쟁 책임 문제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연구했다. 그는 히로히토의 독백이 미국의 면책을 위해 만들어졌을 가능성을 제기하여 우익 학자들의 비판을 받았다.[69][70]
도조 히데키에 대해서는 극동국제군사재판이 아닌 일본인에 의한 재판이 열렸어도 유죄 판결을 받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시바 료타로의 역사관에 대해서는 "신 시바 사관", "시바 신화" 등으로 비판하며, 그의 주장이 언론과 평론가에 의해 과장되어 수용되었다고 주장했다.[115]
하타는 데이비드 버가미니의 저서 『천황의 음모』에 대해 거짓과 실수가 많다고 비판하며, 다나카 상소문이나 시온 의정서와 같은 위서로 취급했다.[116]
6.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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