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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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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키나와 반환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 시정 하에 놓였던 오키나와현이 일본으로 반환된 사건을 말한다.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에 따라 오키나와는 미국의 행정 하에 놓였으며, 류큐 정부가 설치되어 자치가 보장되었지만 최종 결정권은 미국이 가지고 있었다. 냉전 시기, 오키나와는 미국의 군사 기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이에 따라 일본 복귀 운동과 독립, 유엔 신탁 통치 등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었다. 1969년 사토 에이사쿠 일본 총리와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 간의 정상회담을 통해 오키나와 반환 협정이 체결되었고, 1972년 5월 15일 오키나와는 일본에 반환되었다. 반환 이후에도 주일 미군 기지 문제, 경제적 격차 등 여러 과제가 남아 있으며, 류큐 독립운동도 지속되고 있지만, 본토 복귀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은 높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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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반환
지도
개요
명칭오키나와 반환
일본어 명칭沖縄返還 (おきなわへんかん) (오키나와 헨칸)
배경
주요 원인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미국의 오키나와 제도 점령 및 통치
오키나와 주민들의 일본 복귀 열망
일본 정부의 노력
주요 사건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1951년): 오키나와를 포함한 난세이 제도의 미국 통치 규정
일미 공동 성명(1969년): 오키나와 반환 합의
오키나와 반환 협정(1971년): 반환 조건 및 절차 규정
오키나와 반환(1972년 5월 15일): 오키나와의 일본 복귀
주요 내용
반환 범위오키나와 제도 (오키나와 현)
반환 조건미국의 군사 기지 유지 (일부 축소)
미국의 행정권 이양
일본의 경제 지원
반환 협정 조인1971년 6월 17일
영향 및 결과
정치적 영향일본의 주권 회복
오키나와 현민의 일본 국민으로서의 권리 회복
경제적 영향오키나와의 경제 발전
미군 기지 관련 경제 의존도 감소 노력
사회적 영향오키나와의 문화 및 정체성 회복 노력
미군 기지 문제 지속 (소음, 범죄 등)
반환 이후
주요 과제미군 기지 문제 해결
오키나와의 자립 경제 구축
오키나와의 문화 진흥
논쟁점미군 기지 존치 및 이전 문제
오키나와의 일본 내에서의 지위
관련 사건
주요 사건고자 폭동 (1970년): 미군의 범죄에 대한 오키나와 주민들의 항거
730: 일본 복귀 후 차량 통행 방향 변경 (우측 → 좌측)
관련 인물
주요 인물존 F. 케네디
린든 B. 존슨
리처드 닉슨
사토 에이사쿠
야라 초 요

2. 배경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연합국 사이에서 맺어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에 따라 오키나와현은 미국의 시정권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 조약은 1952년 4월 28일에 발효되었다. 미국은 오키나와에 행정주석이 이끄는 류큐 정부를 설치하고, 민선 의원들로 구성된 입법기관인 입법원을 함께 두어 어느 정도의 자치를 보장했지만, 최종적인 의사 결정권은 미국 정부가 쥐고 있었다.[25]

미국 시정권 아래 오키나와의 지위는 매우 애매했다. 미국은 난세이 제도(류큐 제도)가 일본 영토이고 류큐 주민들이 일본 국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류큐 제도 출입은 엄격하게 관리되어 일본인이 류큐 제도를 출입할 때에는 여권이 필요했다.[25]

사실상 미국에 점령된 오키나와에서는 일본 복귀, 유엔 신탁통치령화, 완전한 독립 등 다양한 주장이 나왔다.[25] 1962년에는 인도네시아 해군이 참치 어선을 국적 불명 선박으로 오인하여 총격을 가한 제1구양환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3]

2. 1. 국제 정세

1950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대한민국을 무력 침공해 6.25 전쟁이 발생하고, 1960년 12월에는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남 공화국을 공격하여 베트남 전쟁이 발발하는 등 동서 냉전이 격화되었다.[25] 이러한 상황에서 소련을 비롯한 공산주의 세력의 확장을 억제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미국은 오키나와를 베트남 전쟁 폭격기의 거점 및 후방 지원 기지로 활용하면서 그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6.25 전쟁 중에 발효된 강화조약에 따라 오키나와가 일본 본토에서 분리되자, 1953년 1월 오키나와 교직원회, 오키나와현 청년단협의회 등 23개 단체가 참여해 오키나와 제도 조국복귀기성회를 결성했다.[3] 그러나 냉전에 대처하기 위해 미국은 오키나와에 군사 기지를 설치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했고, 결국 미국의 압력으로 조국복귀기성회는 자연 해산되었다.[3]

2. 2. 복귀 운동

한 차례 실패로 끝난 복귀 운동은 잠시 침체기를 맞이했지만, 1950년대 후반 군용지 문제 등이 원인이 되어 섬 전체 투쟁이 발생하면서 다시 활발해졌다. 1960년 4월에는 오키나와현 조국복귀협력회가 결성되었다. 결국 미군은 통치 정책을 수정하고 본토와의 격차를 줄이기 위한 노력을 하기 시작했다.[25]

일본 본토에서도 오키나와 복귀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여당이던 자유민주당은 자치의 확대, 도항 제한 철폐, 일본 정부의 원조 확대 등을 추진해 사실상 본토와 오키나와의 일체화를 꾀하고자 했다. 하지만 야당들은 자민당의 정책이 오키나와의 현 상태를 긍정하는 것이라 비판하며 일본의 국기를 게양하고 행정주석 직선제를 도입하며 류큐 주민들의 국정 참여를 확대하라고 요구했다.[25]

제3차 사토 내각은 1970년에 예정된 「일본과 미국 간의 상호 협력 및 안전 보장 조약」 연장과 함께 오키나와의 본토 복귀를 긴급 외교 문제로 상정했다. 70년 안보 연장 반대를 외치던 일본사회당일본공산당은 오키나와의 본토 복귀를 호소하면서도 안보 조약과 오키나와 반환을 함께 다루는 것에 반발했다. 일부 신좌파, 학생 운동, 노동조합은 반(反)안보 조약·반(反)반환 운동을 전개했다.

1970년 12월 20일 오키나와섬에 위치한 고자시(지금의 오키나와시)에서 미군 병사가 2차례나 교통 사고를 일으키자 이른바 고자 폭동이 일어났다. 평소 미군과 오키나와현민을 부당하게 차별하고 있던 응어리가 폭발한 것이었다. 주민들은 "이 이상 오키나와현을 미국 군정하에 두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3. 반환

1969년 총리대신 사토 에이사쿠미국의 대통령 리처드 닉슨은 정상회담을 가졌다. 닉슨은 일본에게 섬유 제품 수출을 자율적으로 규제하라고 요구하면서, 그 대가로 오키나와를 일본에 돌려주겠다고 제안했다. 1971년 오키나와 반환 협정이 체결되면서 1972년 5월 15일에 오키나와가 일본에 반환되기로 결정되었다.

오키나와에 배치된 미군의 핵무기가 문제가 되었다. 초기 일본은 냉전 상황에서 미국의 입장과 요구를 존중해야 한다며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야당뿐만 아니라 집권 여당인 자민당 내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자, 사토는 1967년 비핵 3원칙을 발표했다. 미국도 유연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하면서, 1969년 정상회담에서 핵무기를 제거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이후 유사시에 미군이 요청하면 오키나와에 핵무기를 반입하는 것을 일본이 동의한다는 비밀 협정이 있었다는 사실이 폭로되었다.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 반환 협정 제7조에 따라 특별지출금 3.2억달러를 미국 정부에 지불했다. 여기에는 류큐수도공사·류큐전력공사·류큐개발금융공사와 나하 공항 시설·류큐 정부청사 등 미군이 설치한 기관을 인수하는 비용 1.75억달러가 포함되어 있었다.[26]

반환 당일, 미일합동위원회가 개최되어 오키나와 반환 후에도 유지될 오키나와 미군 기지의 사용 목적·조건 등을 규정한 5·15 메모가 작성되었다.[28][29]

대한민국은 일본에, 중화민국은 미국에 오키나와가 일본에 반환되는 것이 동아시아의 안전 보장에 미칠 영향이 우려된다는 뜻을 표명했다.[30][8] 당시 주한 일본 대사 가나야마 마사히데는 대한민국 박정희 대통령에게 "오키나와 기지는 핵무기를 포함한 지금의 상태 그대로 자유 발진의 태세를 유지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30]

3. 1. 미일 협정

1969년 총리대신 사토 에이사쿠미국의 대통령 리처드 닉슨은 정상회담을 가졌다. 닉슨은 일본에게 섬유 제품 수출을 자율적으로 규제하라고 요구하면서, 그 대가로 오키나와를 일본에 돌려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야라 쵸뵤 오키나와 행정주석과 오키나와현민들의 기대와는 달리, 미국은 오키나와에 있는 군사 기지를 계속 유지하기로 했다. 1971년 오키나와 반환 협정이 체결되면서 1972년 5월 15일에 오키나와가 일본에 반환되기로 결정되었다.

오키나와에 배치된 미군의 핵무기가 문제가 되었다. 초기 일본은 냉전 상황에서 미국의 입장과 요구를 존중해야 한다며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야당뿐만 아니라 집권 여당인 자민당 내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자, 사토는 1967년 비핵 3원칙을 발표했다. 미국도 유연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하면서, 1969년 정상회담에서 핵무기를 제거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이후 유사시에 미군이 요청하면 오키나와에 핵무기를 반입하는 것을 일본이 동의한다는 비밀 협정이 있었다는 사실이 폭로되었다.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 반환 협정 제7조에 따라 특별지출금 3.2억달러를 미국 정부에 지불했다. 여기에는 류큐수도공사·류큐전력공사·류큐개발금융공사와 나하 공항 시설·류큐 정부청사 등 미군이 설치한 기관을 인수하는 비용 1.75억달러가 포함되어 있었다.[26] 언론인 니시야마 다키치는 훗날 실제로 지불한 금액이 5억달러가 넘는다고 주장했다.[27]

반환 당일, 미일합동위원회가 개최되어 오키나와 반환 후에도 유지될 오키나와 미군 기지의 사용 목적·조건 등을 규정한 5·15 메모가 작성되었다.[28][29]

3. 2. 주변국의 의심

대한민국은 일본에, 중화민국은 미국에 오키나와가 일본에 반환되는 것이 동아시아의 안전 보장에 미칠 영향이 우려된다는 뜻을 표명했다.[30][8] 당시 주한 일본 대사 가나야마 마사히데는 대한민국 박정희 대통령에게 "오키나와 기지는 핵무기를 포함한 지금의 상태 그대로 자유 발진의 태세를 유지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30] 중화민국도 주일 미국 수석공사 리처드 스나이더가 중화민국을 방문했을 때 "미국은 대외적으로 부담하는 의무를 어떻게 지키고자 하는가"라며 압박했다.[30][8]

4. 복귀

1972년 5월 15일 오전 10시 30분, 일본 정부 주최로 오키나와 복귀 기념식이 도쿄도일본무도관오키나와현 나하시민회관에서 동시에 열렸다.[31][32]

도쿄에서는 쇼와 천황고준 황후, 사토 에이사쿠를 필두로 한 제3차 사토 내각 (개조)의 각료들, 국회의원, 오키나와현 관계자, 각계 대표, 청소년 등이 참석했다. 미국 정부를 대표하여 스피로 애그뉴 미국의 부통령이, 오키나와현을 대표해 미야자토 마쓰마사 부지사가 참석했다.[31] 다케시타 노보루 내각관방장관이 '개식의 말씀'을 한 후 국가 제창이 이루어졌다.[9] 사토 에이사쿠 총리의 식사 후, 묵념이 이루어졌다.[9] 쇼와 천황의 '말씀' 후, 애그뉴 부통령이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오키나와 반환에 관한 선언서를 읽고 축사를 낭독하고 선언서를 사토 총리에게 전달했다.[10] 이어 후나다 나카 중의원 의장, 고노 겐조 참의원 의장, 이시다 가즈토 최고 재판소 장관의 축사, 미야자토 오키나와현 부지사의 인사, 청소년 대표의 결의 표명 등이 이루어졌다.[9] 식전 마지막에 사토 총리의 발성에 의해 만세 삼창이 이루어졌고, 미하라 아사오 내각관방 부장관이 '폐식의 말씀'을 낭독하며 식전은 종료되었다.[9]

나하에서는 행정주석에서 오키나와현지사로 당선된 야라 쵸뵤가 참석했고 정부를 대표해 야마나카 사다노리 총리부 총무장관, 중의원을 대표해 도코나미 도쿠지 오키나와 및 북방문제에 관한 특별위원장, 참의원을 대표해 하세가와 진 오키나와 및 북방문제에 관한 특별위원장, 최고재판소를 대표해 요시다 유타카 사무총장, 전국지방공공단체를 대표해 이케다 나오 사가현지사가 참석했다.[31] 구리야마 렌페이 총리부 총무 부장관이 '개식의 말씀'을 낭독한 후 국가 제창이 이루어졌고, 그 후, 도쿄 회장과 마이크로 회선으로 연결하여 도쿄 회장에서의 축사 전까지의 영상을 보내 동시에 진행되었다.[9] 나하 회장에서의 축사는 야마나카 사다노리의 인사에 이어 이루어졌고, 야라 조뵤 오키나와현 지사가 인사를 했다.[9][10] 그 후, 호시 마사루 오키나와현 의회 의장, 피트리 나하 주재 미국 총영사, 도코나미 도쿠지, 하세가와 히토시, 요시다 유타카, 이케다 나오가 축사를 낭독했고, 그 후 청소년 대표에 의한 결의 표명이 이루어졌다.[9] 식전 마지막에 야마나카 총무 장관의 발성에 의해 만세 삼창이 이루어지며 식전은 종료되었다.[9]

5. 반환 후

오키나와는 1972년 미국으로부터 일본에 반환된 이후에도 여러 과제를 안고 있다. 주일 미군 전용 시설 면적의 70%가 오키나와현에 집중되어 있으며, 오키나와섬의 14.5%가 미군 기지로 사용되고 있다.[35] 미군 병사들이 일으키는 각종 사건들은 미일 지위 협정 때문에 제대로 처리되지 않아 현민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35] 1995년 오키나와 강간사건은 대규모 저항 운동을 불러일으켰다.[35] 하토야마 유키오는 후텐마 기지를 현외로 이전하겠다는 공약을 내걸고 2009년 당선됐지만, 이후 말을 번복하여 이듬해 총리직에서 물러났다.[35]

정치인들은 경제를 본토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고 약속했지만, 경제 진흥 정책은 공공사업 중심의 건설업 투자에만 치중되었고, 도로 정비와 같은 전시행정만 남발되었다.[35] 최저 임금은 47개 도도부현 중에서 이와테현 다음으로 낮으며,[35] 2014년 기준 최저임금의 1.15배 미만을 받는 노동자의 비율은 도도부현 중 가장 많았다.[36] 2022년 실업률은 3.2%로 도도부현 중에서 가장 높았으며, 전국 평균 2.6%의 1.23배에 달했다.[37] 본토 이주는 늘었지만, 1인당 현민소득은 전국 최저로 2020년 기준 전국 평균 3123000JPY의 70%에도 못 미치는 2167000JPY이었다.[38]

류큐 독립운동도 이어지고 있지만, 현민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지는 못하고 있다. 2007년 류큐 대학 부교수 린취안중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독립해야 한다는 주장은 20.6%로, 2년 전 24.9%에 비해 줄었다.[35]

복귀 50주년을 맞아 2022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는 본토 복귀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비중이 80%를 넘었다. 2017년 여론조사에서는 18세~29세 90% 이상, 30대 86%, 40대~50대 84%, 60대 72%, 70세 이상 74%가 긍정적으로 답변했다.[39]

2022년 여러 언론에서 시행한 오키나와 복귀에 대한 여론조사에서 오키나와 현민의 긍정적 답변 비율
설문 답변마이니치 신문
류큐 신보
합동[40]
아사히 신문
오키나와 타임스
류큐 아사히 방송
합동[41]
일본방송협회[42]요미우리 신문[43]
긍정적65-3956
굳이 말하자면 긍정적27-4534
합계92858490
조사 기간2022년
5월 7일
2022년
3~4월
2022년
2월 2일~3월 25일
2022년
3~4월



일본방송협회의 여론조사를 보면 1970년에는 85%가 본토 복귀를 환영했지만, 닉슨 충격, 물가 상승, 미군 기지 잔류 등의 영향으로 복귀 직전에는 51%, 1973년에는 38%로 환영 여론이 급감했다. 이후 기반 시설 정비와 관광 수입 증대로 생활이 안정되자 1982년에는 63%로 상승했고, 이후 2017년을 제외하고는 꾸준히 75%가 넘는 환영 여론을 유지하고 있다.[42][44][45]

5. 1. 본토와의 일체화

1971년에 공포된 「오키나와의 복귀에 따른 특별 조치에 관한 법률」에 근거해 1972년 6월 25일 제1차 오키나와현의회 의원 선거가 시행되었다. 다른 도도부현처럼 오키나와현청, 오키나와현경찰이 설치되었고 자위대도 주둔하기 시작했다. 다만 자위대는 옛 일본군의 후신으로 여겨져 대원들이 주민들로부터 박해를 받거나 주민표를 교부받지 못하거나 자녀들이 학교 입학을 거절당하는 등 인권 침해가 발생해 사회 문제로 불거졌다.[33]

6년간의 730 캠페인 끝에 1978년 7월 30일 차량 통행이 미국식 우측 통행에서 일본식 좌측 통행으로 변경되었다. 또한 본토와 동일한 「도로교통법」이 적용되기 시작했다.

일본전매공사에 의한 전매제가 실시되었다. 반환 전 오키나와에서 소비되는 소금의 75%를 제조 판매했던 오키나와 제염은 제염 사업을 폐지하고 오키나와현 유일의 소금 도매상인 오키나와 소금 도매상으로 존속했다. 류큐 담배와 오리엔탈 담배, 오키나와 담배 산업 3사의 담배 제조 사업은 일본전매공사에 양도되었고, 류큐 담배의 공장이 일본전매공사 나하 공장(후에 일본담배산업 나하 공장, 2004년 폐쇄)이 되었다. 3사가 제조했던 담배 브랜드도 계승되어, 2020년대에도 우루마가 오키나와 한정으로 판매되고 있다.

5. 2. 과제

반환 이후에도 오키나와현은 여러 과제를 안고 있다. 주일 미군 전용 시설 면적의 70%가 오키나와현에 집중되어 있으며, 오키나와섬의 14.5%가 미군 기지로 사용되고 있다.[35] 미군 병사들이 일으키는 각종 사건들은 미일 지위 협정 때문에 제대로 처리되지 않아 현민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35] 1995년 오키나와 강간사건은 대규모 저항 운동을 불러일으켰다.[35] 하토야마 유키오는 후텐마 기지를 현외로 이전하겠다는 공약을 내걸고 2009년 당선됐지만, 이후 말을 번복하여 이듬해 총리직에서 물러났다.[35]

정치인들은 경제를 본토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고 약속했지만, 경제 진흥 정책은 공공사업 중심의 건설업 투자에만 치중되었고, 도로 정비와 같은 전시행정만 남발되었다.[35] 최저 임금은 47개 도도부현 중에서 이와테현 다음으로 낮으며,[35] 2014년 기준 최저임금의 1.15배 미만을 받는 노동자의 비율은 도도부현 중 가장 많았다.[36] 2022년 실업률은 3.2%로 도도부현 중에서 가장 높았으며, 전국 평균 2.6%의 1.23배에 달했다.[37] 본토 이주는 늘었지만, 1인당 현민소득은 전국 최저로 2020년 기준 전국 평균 312만 3천 엔의 70%에도 못 미치는 216만 7천 엔이었다.[38]

류큐 독립운동도 이어지고 있지만, 현민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지는 못하고 있다. 2007년 류큐 대학 부교수 린취안중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독립해야 한다는 주장은 20.6%로, 2년 전 24.9%에 비해 줄었다.[35]

복귀 50주년을 맞아 2022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는 본토 복귀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비중이 80%를 넘었다. 2017년 여론조사에서는 18세~29세 90% 이상, 30대 86%, 40대~50대 84%, 60대 72%, 70세 이상 74%가 긍정적으로 답변했다.[39]

2022년 여러 언론에서 시행한 오키나와 복귀에 대한 여론조사에서 오키나와 현민의 긍정적 답변 비율
설문 답변마이니치 신문
류큐 신보
합동[40]
아사히 신문
오키나와 타임스
류큐 아사히 방송
합동[41]
일본방송협회[42]요미우리 신문[43]
긍정적65-3956
굳이 말하자면 긍정적27-4534
합계92858490
조사 기간2022년
5월 7일
2022년
3~4월
2022년
2월 2일~3월 25일
2022년
3~4월



일본방송협회의 여론조사를 보면 1970년에는 85%가 본토 복귀를 환영했지만, 닉슨 충격, 물가 상승, 미군 기지 잔류 등의 영향으로 복귀 직전에는 51%, 1973년에는 38%로 환영 여론이 급감했다. 이후 기반 시설 정비와 관광 수입 증대로 생활이 안정되자 1982년에는 63%로 상승했고, 이후 2017년을 제외하고는 꾸준히 75%가 넘는 환영 여론을 유지하고 있다.[42][44][45]

참조

[1] 웹사이트 沖縄県ホームページ・沖縄観光の概要p.2 http://www.pref.okin[...]
[2] 문서 琉球諸島及び大東諸島に関する日本国とアメリカ合衆国との間の協定
[3] 웹사이트 日本復帰への道 IV.復帰運動 https://www.archives[...] 沖縄県公文書館 2022-03-08
[4] 서적 秘密保全法批判-脅かされる知る権利 日本評論社 2013-03
[5] 뉴스 特集 米軍ヘリ墜落 県政の姿勢に怒り http://www.okinawati[...] 沖縄タイムス 2004-09-06
[6] 문서 沖縄の施設・区域(5・15メモ等)【全文】 https://www.mofa.go.[...] 外務省
[7] 서적 沖縄米軍基地全史 吉川弘文館 2020
[8] 뉴스 【外交文書公開】沖縄返還で抑止力低下懸念 韓国・朴大統領、対北・中国で核増強も要望 http://sankei.jp.msn[...] 産経新聞 2011-12-22
[9] 웹사이트 沖縄関係 沖縄復帰記念式典(4)外務省外交史料館所蔵資料 https://hdl.handle.n[...] 外務省外交史料館 2022-03-18
[10] 웹사이트 1972年5月15日 沖縄県知事として沖縄復帰記念式典へ-あの日の屋良主席- https://www.archives[...] 沖縄県公文書館 2022-03-08
[11] 뉴스 自衛隊員の成人式への参加は拒否…沖縄の「反自衛隊感情」の歴史 ことし駐屯50年 https://www.okinawat[...] 沖縄タイムス 2021-01-04
[12] 웹사이트 地域別最低賃金の全国一覧 https://www.mhlw.go.[...] 厚生労働省 2023-10-07
[13] 웹사이트 資料シリーズ No.177 2007年の最低賃金法改正後の労働者の賃金の状況 第1章 地域別最低賃金近傍の賃金の分布 http://www.jil.go.jp[...] 独立行政法人労働政策研究・研修機構 2016-05-30
[14] 웹사이트 ホーム>統計データ>労働力調査>調査結果目次> <参考>労働力調査(基本集計)都道府県別結果>第6表 完全失業率>年平均 https://www.stat.go.[...] 総務省統計局 2023-05-30
[15] 웹사이트 2017年「全国新設法人動向」調査 http://www.tsr-net.c[...] 東京商工リサーチ 2018-05-23
[16] 웹사이트 内閣府ホーム > 統計情報・調査結果 > 国民経済計算(GDP統計) > 統計データ > 統計表(県民経済計算) > 県民経済計算(平成23年度 - 令和2年度)(2008SNA、平成27年基準計数)<47都道府県、4政令指定都市分> >統計表>1. 総括表>7.1人当たり県民所得 https://www.esri.cao[...] 内閣府 2023-09-29
[17] 웹사이트 【日本に復帰してよかった?】 沖縄82%が肯定、若い世代ほど高く 県民意識調査 http://www.okinawati[...]
[18] 뉴스 毎日新聞・琉球新報合同世論調査 質問と回答 https://mainichi.jp/[...] 毎日新聞 2022-05-10
[19] 뉴스 復帰「よかった」85% 朝日沖縄調査 https://www.asahi.co[...] 朝日新聞 2022-05-15
[20] 보고서 復帰50年の沖縄に関する意識調査(沖縄・全国調査)単純集計結果 https://www.nhk.or.j[...] 2022
[21] 뉴스 2022年3~4月 郵送全国世論調査「沖縄復帰50年」 https://www.yomiuri.[...] 読売新聞 2022-05-13
[22] 학술지 沖縄の人たちは,本土復帰をどう評価し,今の沖縄をどうみているのか~「復帰50 年の沖縄に関する意識調査」の結果から~ https://www.nhk.or.j[...] NHK放送文化研究所世論調査部 2022-08-01
[23] 학술지 本土復帰から50年,沖縄はどのような道を歩んできたのかーNHKの世論調査からみる沖縄の50年ー https://www.nhk.or.j[...] NHK放送文化研究所世論調査部 2023-01-30
[24] 웹사이트 沖縄県ホームページ・沖縄観光の概要p.2 http://www.pref.ok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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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뉴스 特集 米軍ヘリ墜落 県政の姿勢に怒り http://www.okinawati[...] 沖縄タイムス 2004-09-06
[27] 서적 秘密保全法批判-脅かされる知る権利 日本評論社 2013-03
[28] 문서 沖縄の施設・区域(5・15メモ等)【全文】 https://www.mofa.go.[...] 外務省
[29] 서적 沖縄米軍基地全史 吉川弘文館 2020
[30] 뉴스 【外交文書公開】沖縄返還で抑止力低下懸念 韓国・朴大統領、対北・中国で核増強も要望 http://sankei.jp.msn[...] 産経新聞 2011-12-22
[31] 웹사이트 沖縄関係 沖縄復帰記念式典(4)外務省外交史料館所蔵資料 https://hdl.handle.n[...] 外務省外交史料館 2024-03-10
[32] 웹사이트 1972年5月15日 沖縄県知事として沖縄復帰記念式典へ-あの日の屋良主席- https://www.archives[...] 沖縄県公文書館 2024-03-10
[33] 뉴스 自衛隊員の成人式への参加は拒否…沖縄の「反自衛隊感情」の歴史 ことし駐屯50年 https://www.okinawat[...] 沖縄タイムス 2021-01-04
[34] 웹사이트 大久保潤 『幻想の島 沖縄』より2(2009.7.23刊行) http://keybow49okina[...] 2024-03-10
[35] 웹사이트 地域別最低賃金の全国一覧 https://www.mhlw.go.[...] 厚生労働省 2023-10-07
[36] 웹인용 資料シリーズ No.177 2007年の最低賃金法改正後の労働者の賃金の状況 第1章 地域別最低賃金近傍の賃金の分布 http://www.jil.go.jp[...] 2016-05-30
[37] 웹인용 ホーム>統計データ>労働力調査>調査結果目次> <参考>労働力調査(基本集計)都道府県別結果>第6表 完全失業率>年平均 https://www.stat.go.[...] 総務省統計局 2023-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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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뉴스 毎日新聞・琉球新報合同世論調査 質問と回答 https://mainichi.jp/[...] 2022-05-10
[41] 뉴스 復帰「よかった」85% 朝日沖縄調査 https://www.asahi.co[...] 2022-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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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저널 沖縄の人たちは,本土復帰をどう評価し,今の沖縄をどうみているのか~「復帰50 年の沖縄に関する意識調査」の結果から~ https://www.nhk.or.j[...] NHK放送文化研究所世論調査部 2022-08-01
[45] 저널 本土復帰から50年,沖縄はどのような道を歩んできたのかーNHKの世論調査からみる沖縄の50年ー https://www.nhk.or.j[...] NHK放送文化研究所世論調査部 2023-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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