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판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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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판락은 일제강점기 고문 경찰로,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며 악명을 떨쳤다. 1912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나 진주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가 구금되었고, 이후 일제 경찰이 되어 사천과 부산에서 독립운동가 색출에 앞장섰다. 특히 신사 참배 거부 기독교인들을 고문하고, '친우회 불온 전단사건' 관련자들에게 끔찍한 고문을 가해 여경수 등 3명을 죽음에 이르게 하고 이광우 등은 평생 불구로 만들었다. 해방 후 미군정 하에서 재산을 축적하고,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으나 무혐의로 풀려났다. 이후 사업가로 변신해 정치 진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고향에서 친일 행적이 삭제되는 등 논란을 겪었다. 2000년 인터뷰에서 사과했지만, 친일파 명단에 포함되었으며, 2003년 91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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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판락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하판락 |
원어명 | 河判洛 |
출생일 | 1912년 2월 15일 |
사망일 | 2003년 9월 11일 |
출생지 |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진주군 명석면 관지리 |
사망지 | 대한민국 인천 |
학력 | 경상남도 진주제일보통학교 졸업 경상남도 진주고등보통학교 졸업 |
거주지 | 대한민국 경상남도 부산 구서동(前) |
본관 | 진주 |
별명 | 호(號)는 산남(山南) |
일본식 이름 | 가와모토 한라쿠(河本判洛) 가와모토 마사오(河本正夫) |
닉네임 | 고문귀신 고문귀 |
공직 이력 | |
직책 | 대한민국 경상남도 경찰청 수사과 차석수사관 |
임기 | 1948년 8월 15일 ~ 1949년 1월 16일 |
대통령 | 이승만 대통령 |
부통령 | 이시영 부통령 |
총리 | 이범석 국무총리 |
장관 | 윤치영 내무부 장관 신성모 내무부 장관 |
차관 | 황희찬 내무부 차관 김효석 내무부 차관 |
정치 | |
정당 | 무소속 |
경력 | |
경력 | 일제강점기 사천경찰서 경찰 부산 외사계 고등경찰 前 부산신용금고 사장 (1990년대 매각, 現 사주와 무관) |
가족 관계 | |
부 | 하한운 |
모 | 동래 정씨 |
형제 | 하영락(형) 하충락(아우) |
2. 일제강점기 활동
1912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났다. 1934년부터 일제 경찰로 일하며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고 고문하는 데 앞장섰다. '고문 경찰'의 대명사가 '이근안'이라면 일제강점기 최고의 고문 경찰은 '하판락'이었다.[2]
2. 1. 경찰 임용 및 초기 활동
1930년 진주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가 구금되었다.[1] 졸업 후 순사 시험에 합격하여 1934년부터 일제 경찰로 근무했다. 사천과 부산에서 근무하며 경남 지역 독립운동가 색출을 담당했다. 1939년 경부보 시험에 합격하였다.[2]2. 2. 독립운동 탄압 및 고문
일제강점기 최고의 고문 경찰은 '하판락'이었다. '고문하는 귀신'이라는 '고문귀'가 그의 별명이다.[2]하판락이 이러한 악명을 얻게 된 계기는 1930년대 말 신사참배를 거부한 기독교인 수십 명을 집단 고문하면서부터였다. 당시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된 진주 배돈병원장 김준기의 증언에 따르면, 하판락은 자신 역시 조선인 출신이면서도 '조센징' 운운하며 심한 고문을 가했다고 한다. 이에 김준기는 '''"같은 동족의 몸에 그렇게도 심한 고문을 할 수 있었던 그의 행동에 대해 나는 심한 분노와 슬픔을 느꼈다. 차라리 그것은 비극이었다"'''고 회고했다.[5][3]
1943년 '친우회 불온 전단사건'으로 검거된 여경수와 이광우 등 7~8명에 대해 하판락은 자백을 강요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진술하지 않는 독립운동가들의 혈관에 주사기를 삽입하고 혈관을 통해 주사기 하나 가득 피를 뽑았다. 하판락은 다시 그 피를 고문 피해자를 향해 뿌린 후, 다시 물었고 거부하면 또 주사기로 착혈한 후 고문 피해자의 몸이나 벽에 피를 뿌리는 행위를 반복하는 '착혈 고문' 외에도 온몸을 화롯불에 달궈진 쇠 젓가락으로 지지고, 전기 고문, 물 고문, 다리 고문을 했다. 이 과정에서 여경수, 이미경 등 3인이 순국하였고, 살아남은 이광우 등은 고문으로 전원 신체 불구자가 되었다. 독립운동가 이광우(2007년 작고)는 '''"고문을 당하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은 내가 고문당할 순서를 기다리는 것과 또 하나는 다른 이가 고문 당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라고 했다.[4]
3. 광복 이후 행적
해방 후 하판락은 미군정의 '일제 관리 재등용 정책'에 따라 경찰에 복귀하여 부를 축적했다. 미군정 경남도 제7경찰청 회계실 주임으로 일하며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재산을 처리하는 과정에 관여했으며, 1946년 6월에는 경상남도 경찰청 수사과 차석으로 승진했다.[5]
1949년 1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는 부산에서 하판락을 체포했다. 하판락에게 고문당해 사망한 독립투사 여경수의 어머니가 그를 고발했기 때문이었다. 고원섭의 <반민자 죄상기>에 따르면, 하판락에 대한 부산 시민들의 분노가 매우 컸다고 한다. 하판락은 서울로 압송되어 조사를 받았으나, 독립투사 살해 및 고문 사실을 부인했다. 1949년 6월 6일, 이승만과 신성모의 사주를 받은 친일 경찰이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하면서 반민특위가 무력화되었고, 하판락은 결국 무혐의로 풀려났다.[5]
3. 1. 미군정 하 활동
해방 후에도 하판락은 미군정의 '일제 관리 재등용 정책'에 따라 미군정 경남도 제7경찰청 회계실 주임으로 있으면서,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재산 처리에 관여하며 더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게 되었다.[5] 1946년 6월에는 경상남도 경찰청 수사과 차석으로 승진되었다.[5]3. 2. 반민특위 체포 및 석방
1949년 1월 하판락은 부산에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체포되었다. 하판락에게 고문을 당해 사망한 독립투사 여경수의 어머니가 그를 반민특위에 고발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고원섭이 쓴 <반민자 죄상기>에는, 하판락을 체포한 반민특위가 그를 서울로 압송하려 하자 '''"당장 여기서 우리들이 처리하겠으니 맡겨 달라"'''며 부산시민들이 애원할 정도로 하판락에 대한 분노가 높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서울로 압송되어 반민특위의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으나, 하판락은 독립투사 살해 및 착혈 고문 사실 등을 끝내 부인했다.1949년 6월 6일 이승만 대통령과 신성모 내무부 장관의 사주를 받은 친일 경찰의 반민특위 사무실 습격 사건으로 반민특위가 사실상 무력화되면서, 서울 마포형무소에 구금되었던 하판락은 서울에서 3회, 부산에서 1회, 총 4차례 공판을 거쳐 최종 무혐의로 풀려났다. 당시 사건 담당 김철호 조사관은 전란 와중에 통영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5]
4. 사업가 변신 및 사회 활동
해방 후, 하판락은 미 군정의 '일제 관리 재등용 정책'에 따라 미군정 경남도 제7경찰청 회계실 주임으로 일하며 일본인들의 재산 처리에 관여하며 부를 축적했고, 1946년 6월에는 경상남도 경찰청 수사과 차석으로 승진했다.[5]
1949년 1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되었으나, 이승만 대통령과 신성모 내무부 장관의 사주를 받은 친일 경찰의 반민특위 사무실 습격 사건으로 반민특위가 무력화되면서 무혐의로 풀려났다.[5]
4. 1. 정치 입문 시도 및 실패
석방 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부산에서 사업가로 변신한 하판락은 제도정치권 진입을 시도했다. 1956년 제2대 경남도의원 선거에 진양군 제1선거구에 출마했으나, 친일 행적에 대한 면민과 유권자들의 반발로 낙선했다.[5] 부산시의원 선거에도 도전했으나 실패했다.[5]4. 2. 사업 성공 및 사회 활동
해방 후 하판락은 사업가로 변신하여 재력을 쌓았다. 신용금고 사업으로 금융업자가 되고, 기업체를 운영하며 사업가로 성공했다.[5] 고향인 진주 명석면 청사 신축에 기금을 희사하고, 부산에서는 어버이날에 부산시장 표창을 받는 등 지역 사회 활동을 하며 신분 세탁을 시도했다.[5]5. 친일 행적 재조명 및 사망
독립운동가 이광우의 증언으로 하판락의 친일 행적이 다시 세상에 알려졌다.[5] 이광우는 하판락에게 고문을 당하고 투옥되었으며, 이때의 고문 후유증으로 평생 불구자로 고통받았는데, 이 사실이 정부로부터 인정되어 독립유공자로 건국훈장 애족상을 받으면서 하판락의 죄상이 다시 드러났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에 포함되었으며, 당시 명단에 든 인물 중 유일한 생존자였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경찰 부문,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2003년 9월 11일 하판락은 91세로 사망하였다.
5. 1. 친일 행적 재조명
이광우의 증언을 통해 하판락에게 고문당하고 투옥되었으며, 이때의 고문 후유증으로 평생을 불구자로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이 정부로부터 인정되어 이광우는 독립유공자로 건국훈장 애족상을 받았다. 이로 인해 하판락의 친일 행적이 다시 드러났다. 국민적인 공분과 비판 여론이 높아지자, 하판락은 2000년 1월 17일 <대한매일>(현재의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일제 경찰 간부를 지낸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며, 나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들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빈다"라고 밝혔다.[5]2000년 12월, 하판락의 고향인 진주시 명석면에서 발간된 <명석면사>에서 그의 집안인 진주 하씨 문중의 반발로 하판락의 친일 죄상이 삭제되는 사건이 발생했다.[6][7]
2002년 2월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에서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에 포함되었으며, 당시 명단에 든 인물 중 유일한 생존자였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경찰 부문,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5. 2. 친일파 명단 등재 및 사망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에 포함되었는데, 당시 명단에 포함된 인물 중 유일한 생존자였다.[6][7]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경찰 부문,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2003년 9월 11일 9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6. 평가 및 비판
하판락은 친일 행적과 고문 등으로 인해 많은 비판을 받았다.
하판락의 사례는 해방 이후 대한민국에서 친일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친일파들이 처벌받지 않고 사회 지도층으로 복귀하는 현실은 역사 정의 실현에 어려움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하판락에게 고문당한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의 고통은 제대로 치유되지 못했다. 진상 규명과 피해자 명예 회복, 배상 문제는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있다.[5]
독립투사 이광우의 증언으로 하판락의 친일 행적이 다시 알려지면서 역사 왜곡 문제가 제기되었다.[5] 2000년 12월, 하판락의 고향인 진주시 명석면에서 발간된 <명석면사>에서는 그의 집안인 진주 하씨 문중의 반발로 하판락의 친일 죄상이 삭제되는 사건이 발생했다.[6][7] 이는 지역 사회에서 친일 행적을 은폐하려는 시도가 여전히 존재함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6. 1. 친일 청산 문제
하판락의 사례는 해방 이후 친일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친일파들이 처벌받지 않고 사회 지도층으로 복귀하는 현실은 역사 정의 실현의 어려움을 보여준다.해방 후에도 하판락은 미 군정의 '일제 관리 재등용 정책'에 따라 미군정 경남도 제7경찰청 회계실 주임으로 있으면서,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재산 처리에 관여하며 더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게 되었다.[5] 1946년 6월에는 경상남도 경찰청 수사과 차석으로 승진되었다.[5]
1949년 1월, 하판락은 부산에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체포되었다.[5] 하판락의 고문으로 사망한 독립투사 여경수의 어머니가 그를 반민특위에 고발했기 때문이었다.[5] 당시 고원섭이 쓴 <반민자 죄상기>에는 하판락을 체포한 반민특위가 그를 서울로 압송하려 하자 '''"당장 여기서 우리들이 처리하겠으니 맡겨 달라"'''며 부산시민들이 애원할 정도로 하판락에 대한 분노가 높았다고 기록되어 있다.[5] 서울로 압송된 하판락은 반민특위에서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으나, 자신이 한 독립투사 살해 및 착혈 고문 사실 등을 끝까지 부인했다.[5] 1949년 6월 6일, 이승만 대통령과 신성모 내무부 장관의 사주를 받은 친일 경찰이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한 후, 반민특위가 사실상 무력화되면서 서울 마포형무소에 구금되었던 하판락은 서울에서 3회, 부산에서 1회 등 모두 4차 공판을 거쳐 최종 무혐의로 풀려났다.[5] 당시 사건 담당 김철호 조사관은 전란 와중에 통영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5]
6. 2. 고문 피해자 문제
하판락에게 고문당한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의 고통은 제대로 치유되지 못했다. 진상 규명과 피해자 명예 회복, 배상 문제가 여전히 과제로 남아있다.[5] 하판락은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으나, 1949년 6월 6일 이승만 대통령과 신성모 내무부 장관의 사주를 받은 친일 경찰의 반민특위 사무실 습격 사건 이후 반민특위가 무력화되면서 결국 무혐의로 풀려났다.[5]6. 3. 역사 왜곡 문제
하판락의 친일 행적이 세상에 다시 알려진 것은 독립투사 이광우의 증언이었다. 이광우가 하판락에게 고문당하고 투옥되었으며, 이때의 고문 후유증으로 평생 불구자로 고통받고 있는 사실이 정부로부터 인정되어 독립유공자로 건국훈장 애족상을 받으면서 하판락의 죄상이 다시 드러났다.[5] 하판락의 친일 죄상과 고문 사실이 하나둘 재조명되면서 국민적인 공분과 비판 여론이 비등하자, 노령의 하판락은 2000년 1월 17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일제 경찰 간부를 지낸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며, 나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들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빈다”며 마지못해 잘못을 시인하기도 했다.2000년 12월, 하판락의 고향인 현 진주시 명석면에서 발간된 <명석면사>에서는 그의 집안인 진주 하씨 문중의 반발로 하판락의 친일 죄상이 모조리 삭제되는 ‘분서갱유’를 당했다. 명석면사를 쓴 김경현은 하씨 문중이 하씨 집성촌인 명석면 관지리 마을회관으로 김씨를 불러 ‘무슨 근거로 그렇게 썼냐. 근거를 대라. 하판락은 단지 경찰이었다. 고등계 형사가 아니다.’, ‘광주놈이라 경상도를 저렇게 쓴다’, ‘외지인 주제에 지역 사정을 뭘 안다고 그렇게 막 쓰냐’고 비판했고 결국 하판락 부분은 삭제되었으나, 김경현은 자신의 마지막 양심을 편찬 후기 형식으로 끼워 넣었다. '''“명성면 출신자 중에 반민특위 관련자에 대해서는 면사편찬위의 결의로 삭제했다.”''' 진주 하씨 문중은 뒤늦게 ‘죽일 놈 살릴 놈’했지만 책은 인쇄가 끝난 뒤였다.[6][7] 이 사건은 지역 사회에서 친일 행적을 은폐하려는 시도가 여전히 존재함을 보여주며, 올바른 역사 교육과 역사적 사실 기록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참조
[1]
뉴스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30-02-12
[2]
웹인용
보관된 사본
https://web.archive.[...]
2015-08-14
[3]
뉴스
최후의 친일파, '고문귀신' 하판락을 아십니까
http://www.ohmynews.[...]
2013-03-01
[4]
뉴스
이광우선생, 고문 후유증으로 평생 다리절며 불우한 삶 살아
http://www.busanilbo[...]
2007-03-27
[5]
뉴스
친일 인사 최지환 하판락은 누구인가
http://www.bjynews.c[...]
2002-03-05
[6]
뉴스
<일제강점기 진주 인명록…> 펴낸 김경현 편찬위원
http://www.idomin.co[...]
2005-03-10
[7]
뉴스
친일의 흔적. 너를 지운다
http://legacy.h21.ha[...]
2001-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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