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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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량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걸쳐 직함은 있으나 직무가 없는 무직 사관과 직역이 없는 사족의 자제를 지칭하는 사회 계층이었다. 조선 건국 후 신흥 세력은 이들을 통제하기 위해 과전을 지급하고 삼군도총제부에 귀속시켰으나, 귀부를 거부하거나 지방에 거주하는 한량에게는 군전을 차등 지급했다. 1466년 직전법 실시 이후 한량의 구분이 의미가 없어졌으며, 국가는 한량 자제를 군역에 충당하고 무재를 국방에 활용하려 했다. 그 결과 조선 후기에는 한량의 의미가 무과 및 잡과 응시자, 무예가 뛰어난 사람 등으로 변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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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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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다른 이름 | 건달 무뢰배 |
어원 | |
유래 | '본래 불교 용어인 "건달바"에서 유래' |
어원적 의미 | 일정한 거처 없이 하늘을 떠돌아다니며 술과 여자만 탐하는 존재 |
특징 | |
긍정적 의미 | 예술, 풍류를 즐기는 사람 |
부정적 의미 | 일정 직업 없이 빈둥거리며 남에게 빌붙어 사는 사람 싸움질이나 하는 불량한 사람 |
역사적 변화 | 긍정적, 부정적 의미 모두 내포하며 시대에 따라 의미 변화 |
사회적 인식 | |
현대적 의미 | 주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 |
연관 단어 | 불량배 조폭 |
기타 | |
참고 | 건달은 원래 ‘건달바’라는 불교 용어에서 유래했다. |
2. 초기의 한량 (고려 말 ~ 조선 초)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에는 직첩이나 직함은 있지만, 실제로 하는 일이 없는 무직사관이나, 직역이 없는 사족의 자제들을 한량이라고 불렀다. 조선 왕조를 세운 신흥 세력은 1391년(공양왕 3) 과전법을 시행하여 이들을 통제하고 회유하려 하였다. 서울에 살면서 왕실을 호위하는 한량에게는 직함에 따라 과전을 지급했지만, 새 왕조에 협력하지 않고 지방에 머무르며 왕실 호위 임무를 맡지 않은 한량에게는 적은 양의 군전을 지급하거나 아예 지급하지 않았다. 이러한 토지 소유 현황에 따라 무직자 한량은 과전 소유자, 군전 소유자, 무수전자로 나뉘게 되었다.[1]
2. 1. 무직사관으로서의 한량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에 걸쳐 한량이라 불리는 사회 계층은 직첩(職牒), 직함(職銜)은 있으나, 직사(職事)가 없는 무직사관(無職事官)과 직역(職役)이 없는 사족(士族)의 자제, 즉 무역 사족 자제(無役士族子弟)를 가리킨다. 고려 말·조선 초기의 한량에 속하는 무직사관(無職士官)으로는 2품(品) 이상의 한량기로(閑良耆老)를 포함한 전함관(前銜官), 여말 선초의 검교관(檢校官), 고려 말기에 계속되는 병란 속에서 상직(賞職)으로 수여된 첨설관(添設官) 등이 있다.[1]고려 말·조선 초기의 무직사관으로서의 한량에 대하여, 조선왕조 건국을 계획 실현한 신흥 세력은 신왕조 건국에 즈음하여 이들을 중앙권력의 통제 밑에 두고 회유할 것을 목적으로 1391년(공양왕 3)에 과전법 체제하에서 그들을 그 해 설치한 삼군도총제부(三軍都總制府)에 귀속시켜 서울에 거주하면서 왕실을 호위하는 한량관에게 그가 소유한 직함에 따라 과전을 지급하였다.[1] 그리고 신왕조에의 귀부(歸附)를 끝내 거부하고 대부분 지방에 근거를 두고 거경시위(居京侍衛)의 소임을 갖지 않은 한량관 수보다 현저하게 적은 10~5결의 군전을 지급하고, 무임소 한량관에 대하여는 그나마 군전마저 지급하지 않음으로써 토지소유 현상으로 본 무직자 한량관은 과전소유자, 군전소유자, 무수전자(無受田者)로 분화된다.[1]
3. 조선 세조 이후의 변화
1466년(세조 12) 직전법(職田法) 실시로 양반과 평민 구분이 모호해졌다. 고려 말·조선 초기, 병역 기피를 위해 호적과 군적에 오르지 않은 미사한량자제(未仕閑良子弟)를 국가가 호적에 올려 군역에 충당하려 했다. 조선 건국 후 태종·세종 대에는 이들을 중앙과 지방의 여러 병종(兵種)에, 세조는 단일 병종으로 귀속시키려 했다. 무재(武才)를 닦은 무역한량자제(無役閑良子弟)는 국방력에 흡수하려, 세종 때부터 시험으로 갑사(甲士)직을 주고, 중종 때부터 무과 응시를 허용해 무인(武人) 성격을 굳혔다.
3. 1. 한량의 의미 변화
1466년(세조 12) 직전법(職田法)의 실시로 양반과 평민의 구분도 의미가 없어지게 되었다. 고려 말·조선 초기의 사족(士族) 자제 가운데 병역을 피하기 위해 호적과 군적에 등록하지 않아 직역(職役)이 없는 미사한량자제(未仕閑良子弟)에 대해, 고려 말부터 국가는 그들을 호적에 등재하고 강제로 추쇄(推刷)하여 군역에 충정(充定)하려는 노력을 계속하였다. 조선 건국 후에는 한량 자제의 추쇄충군(推刷充軍) 정책이 더욱 강화되어, 태종·세종조에는 그들을 중앙과 지방의 여러 병종(兵種)에 속하게 하고, 세조 때부터는 단일 병종에 귀속시키려는 정책이 추진되었다. 또한 궁술 등 무재(武才)를 닦은 무역한량자제(無役閑良子弟)에 대하여 국가는 계속하여 그들의 무재를 국방력에 흡수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세종 무렵부터는 그들에게 일정한 시험을 거쳐 갑사(甲士)직을 제수하였고, 중종 때부터는 그들에게 무과 응시를 허용하여 한량 자제가 무인으로서의 성격을 굳혀가게 된다.[1]따라서 조선 후기에는 한량의 의미가 무과 및 잡과 응시자를 가리키거나, 호반(虎班) 출신으로 아직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사람 또는 궁술의 무예가 뛰어난 사람이라는 뜻으로 고정되어 갔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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