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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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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수(1332년 ~ 1384년)는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15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우왕 때 상당군에 봉해졌다. 그는 해서와 초서에 능했고, 학식과 의로운 행동으로 칭송받았다. 52세에 사망했으며, 경기도 파주시에 묘역이 있다. 저서로는 《유항시집》이 있으며, 개성의 노국대장공주묘비, 양주의 회암사지공대사탑비 등 여러 비문을 남겼다. 이색의 《목은문고》에 묘지명이 수록되어 있다.

2. 생애

한수는 1347년(충목왕3)에 15세의 어린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2] 이후 우왕 때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1375년(우왕1) 밀직제학(密直提學) 동지서연(同知書筵), 1376년(우왕2) 부사(副使), 동지(同知), 5월 동지공거(同知貢擧), 가을 지사(知司), 1378년(우왕4) 상당군(上黨君)에 봉해졌고, 대광(大匡)의 품계와 진현(進賢) 관직을 받았다. 1379년(우왕5) 광암사 비문을 써 첨서(簽書)가 되었다. 1380년(우왕6) 청성군(淸城君)에 봉해졌고 중대광(重大匡) 품계에 이르렀다. 1382년(우왕8) 남경(南京: 현 서울특별시)에 호종(扈從)했으며, 1383년(우왕9) 광정대부(匡靖大夫) 판후덕부사 우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 상호군(判厚德府事右文館大提學知春秋館事上護軍)에 임명되었고,[2] 1384년(우왕10) 음력 3월 28일 52세로 사망했다.[1] 해서초서에 뛰어났으며,[2] 학식이 있고 의로운 행동으로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다.[3]

3. 사후

유항 한수 묘역경기도 파주시 진동면 서곡리에 있다. 묘역은 종중 묘역으로, 한수의 아버지인 한공의(1307~1365) 묘역과 형제인 한리(1337~1417) 묘역이 인근에 함께 조성되어 있다. 묘역은 부인 안동 권씨와 쌍분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봉분 앞에 각각 묘비 1기씩을 조성하고 그 아래로 장명등을 각각 1기씩 설치하였다. 장명등 사이 중앙에 상석과 향로석이 있으며, 그 아래 양쪽으로 문인석 4기와 망주석 2기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상석 옆으로 근래에 새로 세운 묘비가 있을 뿐 다른 석물들은 원래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석물들의 형태는 전형적인 고려시대 양식을 따르고 있다. 2003년 4월 21일 경기도의 기념물 제187호로 지정되었다.

4. 저서

《유항시집》

5. 주요 필적

한수는 글씨에도 능하여 여러 비문을 남겼다.[4][5]

6. 전기 자료

고려 말기의 문신 한수의 생애와 업적은 이색의 《목은문고》 권15에 실린 한수 묘지명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이 묘지명은 한수의 가계, 성품, 관직 생활 등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어, 한수라는 인물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된다.

참조

[1] 서적 유항시집
[2] 서적 목은문고
[3] 간행물 고려사
[4] 서적 목은문고
[5] 서적 가정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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