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이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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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이형은 충청도 덕산 출신의 양반으로, 14세에 천주교 교리를 접하고 독실한 신자가 되었다. 그는 교리 교사로 임명되어 활동했으며, 1846년 병오박해 때 체포되어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배교를 거부했다. 결국 곤장 70대를 맞고 교수형을 당해 순교했다. 1925년 복자,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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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이형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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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한이형 라우렌시오 |
출생일 | 1799년 |
사망일 | 1846년 9월 20일 |
축일 | 9월 20일 |
교파 | 로마 가톨릭교회 |
출생지 | 충청도 덕산 |
사망지 | 서울 |
직업 | 순교자 |
시복일 | 1925년 7월 5일 |
시복인 | 교황 비오 11세 |
시성일 | 1984년 5월 6일 |
시성인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
2. 생애
한이형은 충청도 덕산의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14세에 천주교 교리를 접한 후 깊은 신앙심을 갖게 되었으며, 이후 결혼하여 경기도 양지 인근 은이마을에서 생활했다. 그는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모범적인 신자였으며, 앵베르 주교에 의해 교리 교사로 임명되어 활동하기도 했다. 1846년 병오박해 때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관련된 인물로 지목되어 체포되었고, 혹독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지키다가 1846년 9월 20일 48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그의 삶과 순교 과정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아래 하위 문단에서 다룬다.
2. 1. 출생과 신앙
한이형은 충청도 덕산의 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정직하고 헌신적인 성격을 가진 인물이었다. 14세에 천주교 교리를 접한 후, 몇 주 만에 매우 독실한 신자가 되었다. 그는 하루 중 상당 시간을 십자고상 앞에서 묵상하며 과거의 죄를 참회하는 데 보냈다. 주일과 모든 의무 축일에는 날씨가 궂어도 개의치 않고, 기도를 드리기 위해 10리(약 4km) 거리에 있는 선교 예배당까지 걸어 다녔다. 사순절 기간에는 매일 단식을 실천했다. 21세에는 같은 교우 여성과 결혼하여 경기도 양지 근처의 외딴 시골인 은이마을로 이주하여 생활했다.2. 2. 이웃 사랑 실천
그는 하느님에게 뿐만 아니라 이웃들,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게 매우 헌신적이었다. 그는 가난한 이들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음식과 의복을 제공했으며, 하느님께서 이러한 자선 행위를 보상해 주실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2. 3. 교리 교사 활동
앵베르 주교는 한이형을 교리 교사로 임명하였다. 그는 지식과 덕행, 그리고 모범적인 면에서 교리 교사 직책에 매우 적합한 인물이었으며, 맡은 책무를 매우 잘 수행했다.2. 4. 체포와 순교
1846년 5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체포되면서 병오박해가 시작되었다. 박해가 거세지자 포졸들은 김대건 신부와 관련된 천주교 신자들을 찾아내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한이형은 위험을 감지하고 가족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킨 뒤 홀로 집을 지키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체포된 한이형은 모진 조롱과 함께 극심한 매질을 당했다. 포졸들은 그의 옷을 벗겨 나체로 만든 뒤 천장에 매달고, 천주교 신앙을 버리고 다른 신자들의 위치를 말하라고 강요하며 잔혹하게 매질했다. 그러나 한이형은 끝까지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포졸들은 그의 다리를 묶고 그 사이에 깨진 그릇 조각을 끼워 넣은 뒤 밧줄로 당겨 톱질하듯 살을 파고드는 참혹한 고문까지 가했지만, 그는 이 모든 고통을 놀라운 의지로 견뎌냈다. 그의 굳건한 모습은 고문을 가하던 포졸들조차 감탄하게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한이형은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이미 온몸이 상처투성이였기에 포졸들이 그를 말에 태우려 했으나, 그는 이를 거절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는 예수를 묵상하며, 약 52km에 달하는 거친 길을 맨발로 걸어갔다. 이는 그의 깊은 신앙심과 어떠한 고난 앞에서도 굴하지 않는 의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승정원일기''의 기록에 따르면, 한이형과 함께 체포된 네 명의 여성 신자들 역시 혹독한 고문 속에서도 신앙을 지켰다. 결국 1846년 9월 20일, 한이형은 매를 맞아 죽는 형벌인 장살형(杖殺刑)을 선고받았다. 당시 서울 교구장이었던 뮈텔 대주교의 증언에 따르면, 장살형으로 즉시 숨지지 않은 이들은 사실상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고 한다. 다른 기록에서는 한이형이 마지막으로 곤장 70대를 맞은 뒤 교수형을 당했다고도 전해진다. 이렇게 한이형은 48세의 나이로 자신의 신념을 지키다 순교했다. 그의 용기와 신앙은 혹독한 탄압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과 신념을 지키려 했던 숭고한 정신을 보여준다.
3. 시복 · 시성
한이형 라우렌시오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로 시복되었고[2][3],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3. 1. 시복
1925년 7월 5일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비오 11세가 집전한 79위[2] 시복식을 통해 복자 품에 올랐다.[3]3. 2. 시성
한이형은 1925년 7월 5일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비오 11세가 집전한 79위[2] 시복식을 통해 복자 품에 올랐다.[3] 이후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집전한 미사 중에 거행된 103위 시성식을 통해 성인 품에 올랐다.참조
[1]
웹사이트
http://newsaints.fai[...]
[2]
백과사전
103위 성인 (百三位聖人)
http://preview.brita[...]
2014-12-28
[3]
뉴스
교황, 화해와 평화..8월의 크리스마스되길
https://web.archive.[...]
평화방송
2014-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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