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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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종은 한당의 아들로, 오나라에서 벼슬을 시작했으나, 아버지 한당의 사망 후 위나라에 투항했다. 위나라에서 장군으로 임명되어 오나라를 공격했고, 252년 동흥 전투에서 오나라 군대와 싸우다 전사했다. 제갈각은 손권이 한종을 미워했던 것을 기억하며 그의 머리를 베어 손권의 묘에 바쳤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정봉에게 죽는 것으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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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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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씨명 | 한 (韓) |
휘 | 종 (綜) |
작위 | 석성후 (石城侯) 오 광양후 (廣陽侯) 위 |
출생 및 사망 | |
출생 년도 | 미상 |
사망 년도 | 가평 4년 12월 23일 (253년2월 8일) |
사망 장소 | 전사 |
가족 관계 | |
아버지 | 한당 |
경력 | |
소속 | 손권 → 조예 → 조방 |
직업 | 장군 위 |
2. 생애
한종은 아버지 한당이 살아있을 때 함께 손권을 섬겼다. 한당 사후, 황무 5년(226년)에 손권은 석양으로 군을 진격시켰지만, 한종은 아버지의 상을 치르고 있다는 이유로 무창을 지켰다. 그러나 한종은 음란에 빠져 무법을 저질렀다. 손권은 한당 때문에 이 일을 책망하지 않았지만, 한종은 내심 두려움을 느껴 황무 6년(227년) 윤 12월에 한당의 관을 가지고 어머니와 가족, 부곡 등 남녀 수천 명을 이끌고 위나라로 도망쳤다.[1]
위나라 장군이 된 한종은 종종 변경을 침범하여 오나라 평민을 살해했다. 손권은 항상 이를 갈며 분하게 여겼다. 이후 동흥 전투에 위나라 장수 중 한 명으로 참가했지만, 제갈각 등에게 패배하여 환가 등과 함께 전사했다. 그의 목은 손권의 사당에 바쳐졌다.[1]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동흥 전투에서 정봉에게 참수당하는 위나라의 무장으로 이름만 언급된다.
2. 1. 오나라에서의 초기 생애
한종은 한당의 아들이었으므로 처음에는 오나라에서 벼슬을 했다.227년, 한당이 병으로 죽자 아버지의 작위 석성후(石城侯)를 세습하고 아버지의 병사를 거느렸다. 이해 7월, 손권은 조비(曹丕)가 죽은 틈을 타 강하(江夏)와 석양(石陽)을 공격하러 가면서 부친상을 당한 한종에게 무창(武昌)을 지키도록 했다.[1] 그러나 한종은 근신하지 않고 음란한 행동을 벌였으며, 손권은 죽은 한당을 생각하여 한종을 벌하지는 않았으나, 한종은 스스로의 잘못으로 인해 항상 불안해했다.[1] 결국 한종은 12월에 한당의 시체가 든 관을 수레에 싣고 가족들과 자신이 거느리던 병사들을 데리고 위나라에 가서 항복했다.[1]
2. 2. 위나라로의 투항
한당의 아들인 한종은 처음에는 오나라에서 벼슬을 했다.227년, 한당이 사망하자 한종은 아버지의 작위인 석성후(石城侯)를 물려받고 아버지의 병사들을 거느렸다. 같은 해 7월, 손권은 조비가 죽은 틈을 타 강하(江夏)와 석양(石陽)을 공격하면서, 부친상을 당한 한종에게 무창(武昌)을 지키도록 했다. 그러나 한종은 근신하지 않고 음란한 행동을 벌였다. 손권은 한당을 생각하여 한종을 벌하지 않았으나, 한종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항상 불안해했다.[1]
결국 한종은 227년 12월에 한당의 시신이 든 관을 수레에 싣고 가족들과 자신이 거느리던 병사들을 데리고 위나라에 항복했다. 위나라에서는 그를 장군으로 임명하고 광양후(廣陽侯)에 봉했다. 이후 한종은 위나라 군사들을 이끌고 오나라의 변경 지역을 침범하여 백성들을 살해하는 일이 잦았으므로, 손권은 이를 갈며 한종을 증오했다.[1]
2. 3. 동흥 전투와 최후
227년, 한당이 병으로 죽자 한종은 아버지의 작위 석성후(石城侯)를 세습하고 아버지의 병사를 거느렸다. 이해 7월, 손권은 조비가 죽은 틈을 타 강하(江夏)와 석양(石陽)을 공격하러 가면서 부친상을 당한 한종에게 무창(武昌)을 지키도록 했다. 그러나 한종은 근신하지 않고 음란한 행동을 벌였으며, 손권이 죽은 한당을 생각하여 한종을 벌하지는 않았으나, 한종은 스스로의 잘못으로 인해 항상 불안해 했다. 결국 한종은 12월에 한당의 시체가 든 관을 수레에 싣고 가족들과 자신이 거느리던 병사들을 데리고 위나라에 가서 항복했다.[1] 위나라에서는 그를 장군으로 임명하고 광양후(廣陽侯)에 봉했다. 이후 위나라 군사들을 이끌고 오나라의 변경지역에 쳐들어와 백성들을 살해하는 일이 잦았으므로 손권은 이를 갈며 한종을 증오했다.[1]252년 12월, 위나라의 실권을 쥐고 있던 사마사는 대군을 일으켜 오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호준은 제갈탄과 함께 동흥(東興)을 공격했는데, 한종은 호준의 부장으로 전부독(前部督)의 직책을 가지고 선봉을 맡았다. 오나라의 태부(太傅) 제갈각은 정봉, 당자 등을 선봉으로 삼고 위군에 맞서게 했다. 정봉은 군사 3000명을 거느리고 호준의 진영에 다가갔는데, 한겨울이었기 때문에 날씨가 추워서 호준은 술을 마시며 잔치를 즐기고 있었다. 정봉이 병사들을 고무하며 위군을 일제히 공격하자, 한종은 오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제갈각은 손권이 살아 있을 때 한종을 미워하던 것을 생각하여 한종의 머리를 베어 건업으로 보내 손권의 묘에 바쳤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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