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서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두서는 조위 시대의 인물로, 자는 불명이다. 두기의 아들로 풍락정후를 물려받았으며, 유주자사, 건위장군 등을 역임했다. 강직한 성격으로 정론을 펼쳤으나, 지방관으로서는 아버지와 같은 역량을 발휘하지 못했다. 정희의 탄핵으로 평민으로 강등되어 유배 생활을 하였으며, 《체론》, 《흥성론》 등의 저서를 남겼다. 진수는 그를 자유로운 정신으로 행동하다 실패했다고 평가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98년 출생 - 전종
전종은 삼국시대 오나라의 장수로 손권의 사위였으며 위장군, 좌호군, 서주목 등을 지내며 중용되었으나, 태자 쟁립에 관여하여 가문의 몰락을 초래했다. - 198년 출생 - 육개
육개는 손권과 손호 치세에 여러 요직을 역임하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쳤으며, 수춘 전투에 참여하고 좌승상에 이르렀으며, 간언을 서슴지 않다가 72세에 사망한 강직하고 청렴한 관리이다. - 252년 사망 - 전예
전예는 삼국 시대 위나라의 인물로, 북방 이민족을 상대로 분할 통치를 펼쳐 국경을 안정시키고 여러 전투에서 활약했으며 82세에 사망했다. - 252년 사망 - 응거
응거는 위나라의 관료이자 문장가로, 조비와 조예 시대에 산기상시를 지냈으며 조상의 전횡을 풍자하는 시를 통해 이름을 알렸고, 사후 위위로 추증된 인물이다. - 경조 두씨 - 두완
두완은 전한의 관료로 흉노 정벌에 참여한 후 태상까지 올랐으나 면직되었고, 건평후에 봉해졌으며, 신중한 옥사 처리와 검소한 생활로 칭송받아 효후라는 시호를 받았다. - 경조 두씨 - 두예
두예는 서진 시대의 장군이자 학자로, 촉한 정벌에 참여하고 오나라 정벌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며, 《춘추좌씨전》 연구에 깊이 있는 학자였다.
두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두서 |
로마자 표기 | Du Shu |
자 | 무백 |
칭호 및 직위 | 풍락정후, 건위장군 |
출생 | 건안 3년 (198년) |
출생지 | 사례경조윤두릉현 |
사망 | 가평 4년 (252년) |
사망지 | 기주장무군 |
주군 | 조예 → 조방 |
2. 행적
두기의 아들로, 부친 사후 풍락정후(豊樂亭侯)를 물려받았다. 유주(幽州)자사(刺史) · 건위장군(建威將軍)을 거쳐 태화 연간에는 산기황문시랑(散騎黃門侍郞)이 되었다.[2] 평소 강직한 성품으로 정론을 펼쳐 신비 등에게 높이 평가받았으나, 주변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면도 있었다.
자사가 군권을 가지는 것에 반대하고, 관리 근무 평정에 대한 논의에 참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홍농 태수로 부임해서는 관대하고 은혜로운 통치를 펼쳤다고 전해진다. 병으로 벼슬에서 물러났다가 하동 태수, 회북도독 호군, 어사중승 등을 역임했다.
유주 자사 시절, 선비족 자제의 법령 위반에 대해 보고서를 제출하지 않아 정북장군 정희의 탄핵을 받았다. 이로 인해 평민으로 강등되어 장무군으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체론(體論)》·《흥성론(興性論)》을 저술하고 252년에 사망했다.[2]
감로 2년(257년), 하동의 낙상이 두기의 공적을 상소하여, 아들 두예가 풍락정후로 발탁되었다. 진수는 두서가 자유로운 정신으로 행동하여 실패를 초래했지만, 그의 의견과 반론은 훌륭하다고 평가했다.
2. 1. 초기 생애 및 관직 생활
두기의 아들이다. 평소 꾸밈이 없고 강직하며 정론을 펼쳤기 때문에, 시중(侍中) 신비 등이 높이 평가하였다.[2] 그러나 지방에 있을 때에는 부친처럼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였으며, 중앙에서는 그 성격으로 인하여 주변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였다.부친 사후 부친의 작위인 풍락정후(豊樂亭侯)를 물려받았으며, 유주(幽州)자사(刺史) · 건위장군(建威將軍)에 임명되었다. 태화 연간에는 산기황문시랑(散騎黃門侍郞)이 되었다.[1]
자사가 군권을 가지는 것에 반대하여 진북장군 여소가 기주 자사를 겸임하려 하자 반대했다. 또한, 관리의 근무 평정에 대한 논의가 활발했을 때, 두서도 또한 지론을 말했다. 낙안의 염소라는 인물이 탄핵을 맹렬하게 행하는 경향이 있었으므로, 두서는 상소를 올려 염소를 격렬하게 비판했다. 두서는 중앙에 8년 있었지만, 항상 정론을 토했다고 한다.
홍농태수로 전출되었으며, 관대하고 부드러우며 은혜가 넘치는 통치를 했다고 한다(『위략』). 조의 국상으로 전임된 후, 병으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이때 의양에 일천오를 쌓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그 주변에 살았다고 한다(『두씨신서』).
후에 평민에서 하동 태수로 발탁되었고, 1년 정도 만에 회북도독 호군이 되었지만 다시 병에 걸려 벼슬에서 물러났다. 지방에 있을 때는 임무의 대략적인 것만 파악하고, 아버지처럼 은혜를 구석구석까지 미치게 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이후 어사중승에 임명되었으나, 성격 때문에 주변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몇 번 지방 임무를 맡았다.
2. 2. 유배와 죽음
가평 원년(249년), 정북장군(征北將軍) 정희의 탄핵을 받아 평민으로 강등되었다. 당시 선비족 자제가 법령을 위반했기 때문에 두서는 그 아들 중 한 명을 참수했지만, 보고서를 제출하지 않았다.[2] 정희는 사마 송권을 시켜, 탄핵하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자신에게 아첨하도록 권유했으나 두서는 듣지 않았다. 이때의 편지에 따르면, 당시 52세였다고 한다.정희의 탄핵으로 두서는 정위에게 보내져 일시 사형되었지만, 아버지의 공적에 힘입어 사형에서 감형되어 평민이 되었고, 장무군으로 이송되었다. 유배지에서 《체론(體論)》·《흥성론(興性論)》을 저술하였고, 가평 4년(252년)에 숨을 거두었다.[2] 진류군의 완무는 두서에게 한가한 신분이 되었으니 독창적인 견해를 연마해야 한다고 권했다.
2. 3. 사후
아버지 사후, 그 뒤를 이었다. 풍익군의 이풍과는 어릴 적부터 아는 사이였지만, 이풍이 명성이 높아져 세상의 평판을 얻게 되자, 두서의 신중함을 끌어들여 이풍을 비판하는 사람이 나오면서 이풍과는 사이가 틀어졌다.[1]이풍이 벼슬을 한 후에도 한동안 세상에 나오지 못했지만, 조예(명제) 시대 태화 연간에 산기황문시랑이 되었다.[1] 벼슬을 한 후에는 개인적인 친분을 쌓는 데 힘쓰지도 않았고, 정치가 어지러워지면 언제나 정론을 내세워 비판했기 때문에 신비 등에게 높이 평가받았다. 또한, 황문시랑이었을 때 동료였던 이풍·원간·순우와는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1]
자사가 군권을 가지는 것에 반대했기 때문에 진북장군 여소가 기주 자사를 겸임하려 하자 반대했다. 관리의 근무 평정에 대한 논의가 활발했을 때, 두서도 또한 지론을 말했다. 어느 날, 낙안의 염소라는 인물이 탄핵을 맹렬하게 행하는 경향이 있었으므로, 두서는 상소를 올려 염소를 격렬하게 비판했다. 두서는 중앙에 8년 있었지만, 항상 정론을 토했다고 한다.
홍농태수로 전출되었다. 관대하고 부드러우며 은혜가 넘치는 통치를 했다고 한다. 조의 국상으로 전임된 후, 병으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이때 의양에 일천오를 쌓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그 주변에 살았다고 한다.[1]
후에 평민에서 하동 태수로 발탁되었고, 1년 정도 만에 회북도독 호군이 되었지만 다시 병에 걸려 벼슬에서 물러났다. 지방에 있을 때는 임무의 대략적인 것만 파악하고, 아버지처럼 은혜를 구석구석까지 미치게 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후, 어사중승에 임명되었다. 성격 때문에 주변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몇 번 지방 임무를 맡았다.
유주 자사가 되어 건위장군·사지절호오환교위에 임명되었다. 당시 정북장군 정희가 계에 주둔하고 있었다. 상서가 되어 있던 원간은 정희가 과거 동료였던 전예를 참언으로 몰아넣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두서에게 경계할 것을 충고했다. 그러나 두서는 개의치 않았다.
가평 원년(249년), 선비족 자제가 법령을 위반했기 때문에 두서는 그 아들 중 한 명을 참수했지만, 보고서를 제출하지 않았다. 정희는 사마 송권을 시켜, 탄핵하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자신에게 아첨하도록 권유했다. 그러나 두서는 그것을 듣지 않았다. 이때의 편지에 따르면, 당시 52세였다고 한다.[1]
정희의 탄핵으로 두서는 정위에게 보내져 일시 사형되었지만, 아버지의 공적에 힘입어 사형에서 감형되어 평민이 되었고, 장무군으로 이송되었다. 진류군의 완무는 두서에게 한가한 신분이 되었으니 독창적인 견해를 연마해야 한다고 권했다. 두서는 배소에서 8절의 '체론'과 1편의 '흥성론'이라는 책을 남기고, 가평 4년(252년)에 거기서 사망했다.
감로 2년(257년), 하동의 낙상이라는 인물이 두기의 공적에 대해 상소했기 때문에, 유자인 두예가 풍락정후로 발탁되었다.
진수는 그를 "자유로운 정신으로 마음대로 행동한 결과, 실패를 초래했다"라고 하고 있다. 또한 "그 의견서나 반론은 모두 훌륭하다"라고 평하며, 전에서도 많이 인용하고 있다.
3. 사상 및 저술
두서는 유배지에서 《체론》과 《흥성론》을 저술했다.[3] 《수서》 경적지에는 《흥성론》 대신 《독론》이 두서의 저서로 기록되어 있는데, 엄가균은 《독론》이 동진 때 편찬되었으며 첫 부분이 《흥성론》이고 마지막이 《두씨신서》이므로, 《수서》 경적지에서 책 전체의 저자를 두서로 지목한 것이라고 설명했다.[3]
3. 1. 체론(體論)
청나라 때 엄가균이 《군서치요》 등에 남은 문장을 모아 집본으로 만들었다.[3] 두서는 유배지에서 8절의 '체론'을 남겼다.[3]3. 2. 흥성론(興性論)
두서가 유배지에서 남긴 저서 중 하나로, 1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당나라 때에는 이미 사라졌으나, 청나라 때 엄가균이 《군서치요》 등에 남은 문장을 모아 정리한 책을 만들었다.[3] 《수서》 경적지에는 흥성론이 빠지고 《독론》의 저자가 두서로 나오는데, 엄가균은 독론이 동진 때 편찬되었으며 첫 부분은 《흥성론》이고 맨 마지막은 《두씨신서》이므로, 《수서》 경적지에서 책 전체의 저자를 두서로 지목한 것이라고 설명했다.[3]3. 3. 기타 저술
4. 평가
두서는 평소 꾸밈이 없고 강직하며 정론을 펼쳤기 때문에 시중(侍中) 신비 등에게 높이 평가받았다.[2] 그러나 지방에 있을 때에는 부친 두기처럼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였으며, 중앙에서는 성격 때문에 주변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진수는 두서를 "자유로운 정신으로 마음대로 행동한 결과, 실패를 초래했다"라고 평했다. 또한 "그 의견서나 반론은 모두 훌륭하다"라고 평하며, 자신의 저서에서도 많이 인용하고 있다.
5. 친족 관계
두서는 아버지 두기의 뒤를 이었다. 풍익군 이풍과는 어릴 적부터 아는 사이였지만, 이풍이 명성을 얻자 두서의 신중함을 들어 이풍을 비판하는 사람이 나오면서 사이가 틀어졌다.[1]
참조
[1]
서적
『杜氏新書』
[2]
삼국지
삼국지
[3]
논문
두서(杜恕)의 『체논(體論)』을 통해 본 청년기 두예(杜預)와 가학(家學)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