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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정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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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해적정지령은 158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발포한 명령으로, 일본의 해적들에게 다이묘가 되거나, 특정 다이묘의 가신이 되거나, 무장을 포기하고 백성이 될 것을 강요했다. 이 명령은 해적들의 경고료 징수 권한을 금지하고, 해적의 특별한 지위를 부정하여 일본사에서 해적의 활동을 종식시켰다. 해적정지령은 병농분리 정책의 일환으로 봉기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해외 무역 및 해상 물류를 통제하여 군사적, 경제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시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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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정지령
해적 정지령
유형법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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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법령해적 진압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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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일본의 해적

일본의 해적은 연안 호족 세력으로, 해상 세력권(해상 지배권)을 가지고 상호 연합하는 등 일정 규모의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이들은 단순한 해적이 아니라 "해적중"이라고 불렸으며, 연안 지대나 상선을 습격하는 일 외에도 다이묘나 상인의 의뢰를 받아 선박을 경호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158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해적정지령을 내리면서 해적중의 자립적인 지위는 사라지게 되었다.

2. 1. 무로마치 시대의 해적

무로마치 막부는 감합 무역을 할 때 해적에게 감합 무역선의 경호를 맡기는 대신 이들을 승인했다. 해적은 경호를 의뢰받아 선박을 호위하고 경고료를 받았으며, 경고관을 설치하여 요금 징수 등을 관리했다. 해적중은 "경고중"이라고도 불렸다. 이들은 경고료 수입 증가로 인해 정치적 자립을 이루고, 다이묘와 대등한 관계 혹은 용병으로서 활동했다.

무로마치 시대 후기에 막부의 권위가 쇠퇴하면서 각지의 해적중도 정치적으로 자립하여 그 지위를 확립했다. 이들은 특정 다이묘에게 복종하지 않고 대등한 관계, 혹은 용병으로서 행동하며 다이묘와는 독립된 조직으로 활동했다. 때로는 상황에 따라 지지하는 다이묘를 바꾸기도 했다.

2. 2. 전국 시대의 해적

일본사에서 남북조 시대 이후의 해적은 연안의 호족과 같은 모습을 지녔다. 다이묘가 영지를 가지듯 해상에 세력권(해상권, 해상 지배권)을 가졌고, 상호 연합 조직을 갖는 등 일정 규모의 조직으로 활동했다. 그래서 국인중이나 일향중(일향'''종'''이 아님)처럼 단순한 해적과 구분하여 "해적중"이라고 불렀다. 일반적인 해적처럼 연안 지대나 상선을 습격하기도 했지만, 다이묘나 상인의 의뢰를 받아 선박 경호(경고)를 하는 것도 주요 활동이었다. 특히 무로마치 막부는 감합 무역 때 해적을 승인하는 대신 경고 역할을 맡겼다. 그래서 해적중은 "경고중"이라고도 불렸다.

무로마치 시대 후기에 막부의 권위가 쇠퇴하고 권력이 분산되자, 각지의 해적중도 정치적으로 자립하여 지위를 확립했다. 특정 다이묘에게 복종하지 않고 대등한 관계, 혹은 용병으로서 행동하며 다이묘와는 독립된 조직으로 활동했다. 상황에 따라 지지하는 다이묘를 바꾸는 일도 자주 있었다. 이는 화폐 경제 및 물류의 발전 등으로 경고료 수입이 증가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전국 시대 후기, 유력 다이묘들은 해적중을 신하로 삼아 수군으로 편입시켰다. 이시야마 전투에서 오다 측과 모리 측 수군이 오사카 만에서 벌인 해전(제2차 키즈가와구치 전투)을 마지막으로 해적중의 자립적인 지위는 쇠퇴했다.

3. 해적 정지령

1588년(덴쇼 16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칼 사냥령과 함께 해적 정지령을 전국에 발포했다.

3. 1. 해적 정지령의 내용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덴쇼 16년(1588년)에 칼 사냥령과 거의 동시에 해적 정지령을 전국에 발포했다.

이는 해적들에게 다음 중 하나를 강요하는 것이었다.

  • 도요토미 정권 체제의 다이묘가 될 것
  • 특정 다이묘의 가신단이 될 것
  • 무장을 포기하고 백성이 될 것


또한, 동시에 지금까지 해적들에게 주어졌던 경고료 징수 권리도 금지함으로써, 해적이라는 이전까지의 특별한 지위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다. 이 명령으로 일본사에서 해적은 모습을 감추게 된다.

3. 2. 해적 정지령의 목적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덴쇼 16년(1588년)에 칼 사냥령과 거의 동시에 해적 정지령을 전국에 발포하였다. 해적 정지령의 목적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병농분리 정책의 일환이었다. 해적 중에는 어민을 겸하거나 봉기에 가담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무장을 금지하고 백성으로 편입시키려 했다.

둘째, 해상 수송 통제였다. 도요토미 정권은 해상 상업 세력을 정권 아래 편입하여 해외 무역 및 해상 물류를 지배하고자 했다. 특히, 조선 출병을 앞두고 군사적 측면에서 해상 수송력 확보가 중요했다.

셋째, 명과의 감합 무역 재개를 위한 준비 단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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