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스팅스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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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헤이스팅스 전투는 1066년 10월 14일, 잉글랜드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노르만 공작 윌리엄과 잉글랜드 왕 해럴드 2세 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윌리엄은 잉글랜드군을 격파하고 해럴드를 전사시키며 승리했고, 잉글랜드는 노르만 왕조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 전투는 잉글랜드 사회와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잉글랜드 역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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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스팅스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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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전투 이름 | 헤이스팅스 전투 |
다른 이름 | 고대 영어: Gefeoht æt Hæstingum 노르만어: Batâle dé Hastings |
분쟁 | 노르만 정복 |
날짜 | 1066년 10월 14일 |
장소 | 잉글랜드 이스트서식스 주 헤이스팅스 근교 현재의 배틀 |
결과 | 노르만 프랑스군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노르망디 공국 |
교전국 2 | 잉글랜드 왕국 |
지휘관 1 | 기욤 2세 앨런 루퍼스 윌리엄 피츠오스번 외스타슈 2세 드 불로뉴 로베르 드 보몽 기욤 드 에브뢰 오도 주교 기타 다수 |
지휘관 2 | 해럴드 2세 기르스 고드윈슨 레오프윈 고드윈슨 |
병력 1 | 불명 (7,000명에서 12,000명 추정) |
병력 2 | 불명 (5,000명에서 13,000명 추정) |
사상자 | |
사상자 1 | 대략 2,000명 |
사상자 2 | 대략 4,000명 |
기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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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정보 |
2. 배경
1066년 에드워드 참회왕이 사망하기 전 후계자로 해럴드를 선택했다. 노르망디 공국의 정복왕 윌리엄은 자신이 잉글랜드의 후계자이며 잉글랜드의 국왕은 자신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윌리엄은 잉글랜드 헤이스팅스로 침략하여 해럴드를 공격했다.
911년, 카롤링거 왕조의 통치자 샤를 3세는 바이킹 무리의 지도자 롤로에게 노르망디에 정착할 것을 허락했다.[1] 이들의 정착은 성공적이었고,[2] 노르만족은 토착 문화에 빠르게 적응하여 이교를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했으며,[3] 현지 주민들과 혼인했다.[4]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공국의 영토는 서쪽으로 확장되었다.[5] 1002년, 에텔레드 2세 왕은 노르망디 공작 리샤르 2세의 누이인 에마와 결혼했다.[6] 그들의 아들 에드워드 참회왕은 노르망디에서 여러 해를 망명 생활하다가 1042년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7] 이는 잉글랜드 정치에 강력한 노르만 세력의 영향력을 확립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에드워드는 그의 옛 후원자들에게서 많은 지원을 받았으며, 노르만 귀족, 군인, 성직자들을 데려와 특히 교회에서 권력 있는 자리에 임명했다. 자녀가 없었던 에드워드는 웨섹스 백작 고드윈과 그의 아들들과 갈등을 겪고 있었고,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의 잉글랜드 왕위 야망을 부추겼을 가능성도 있다.[8]
2. 1. 노르망디 공국의 기원
911년, 카롤링거 왕조의 군주 샤를 3세는 바이킹 집단의 지도자 롤로에게 노르망디에 정착하는 것을 허락했다.[1] 이들의 정착은 성공적이었고,[2] 이 지역의 바이킹들은 "북방의 민족(Northmen)"으로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는 "노르망디"와 "노르만인"의 어원이 되었다.[2] 그들은 이교를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했으며,[3] 현지 주민들과 혼인하여 빠르게 토착 문화에 적응했다.[4]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공국의 영토는 서쪽으로 확장되었다.[5] 1002년, 잉글랜드의 왕 에텔레드 2세는 노르망디 공작 리샤르 2세의 누이인 에마와 결혼했다.[6] 그들의 아들 에드워드 참회왕은 노르망디에서 여러 해를 망명 생활하다가 1042년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7] 이는 잉글랜드 정치에 강력한 노르만 세력의 영향력을 확립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에드워드는 그의 옛 후원자들에게서 많은 지원을 받았으며, 노르만 귀족, 군인, 성직자들을 데려와 특히 교회에서 권력 있는 자리에 임명했다. 자녀가 없었던 에드워드는 웨섹스 백작 고드윈과 그의 아들들과 갈등을 겪고 있었고,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의 잉글랜드 왕위 야망을 부추겼을 가능성도 있다.[8]
2. 2. 잉글랜드 왕위 계승 분쟁

1066년 1월 5일 에드워드 왕이 후계자 없이 서거하면서,[9] 잉글랜드 왕위를 둘러싼 분쟁이 발생했다.
에드워드의 직계 후계자는 웨섹스 백작 해럴드 고드윈손이었다. 그는 잉글랜드 귀족 중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인물이었으며, 에드워드 왕과 대립했던 고드윈의 아들이었다. 해럴드는 잉글랜드 현인회의에서 왕으로 선출되었고, 요크 대주교 엘드레드에 의해 즉위식을 거행했다.[11] 그러나 노르만 측에서는 이 의식이 정식으로 인정받지 못한 캔터베리 대주교 스티간드에 의해 거행되었다고 주장했다.[12]
해럴드의 왕위 계승에 곧바로 노르망디의 윌리엄 공작과 노르웨이의 하랄 3세가 이의를 제기했다. 윌리엄은 에드워드 왕이 자신에게 왕위를 약속했고 해럴드도 이에 동의했다고 주장했다.[13] 하랄 3세는 그의 전임자 마그누스 1세와 잉글랜드 왕 하르데크누트 사이의 협정에 따라 왕위 계승권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 협정은 두 사람 중 한 명이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 다른 한 명이 잉글랜드와 노르웨이 모두를 상속받는다는 내용이었다.[14]
윌리엄과 하랄 3세는 즉시 잉글랜드 침공을 위한 군대와 함선을 모으기 시작했다.[15]
2. 3. 1066년의 정세
1066년 1월 5일, 에드워드 참회왕이 후계자를 명확히 남기지 않고 사망하자,[9] 잉글랜드 왕위를 둘러싼 여러 경쟁자들의 다툼이 시작되었다. 에드워드의 뒤를 이은 사람은 웨섹스 백작 해럴드 고드윈손으로, 잉글랜드 귀족 중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인물이었다. 해럴드는 잉글랜드 현인 평의회에서 왕으로 선출되었고, 요크 대주교 엘드레드에 의해 즉위식을 거행했다.[11][12]
그러나 해럴드는 곧 두 명의 강력한 이웃 통치자들로부터 도전을 받았다. 노르망디 공국의 윌리엄 공작은 에드워드 왕으로부터 왕위를 약속받았고 해럴드가 이에 동의하는 맹세를 했다고 주장했다.[13] 노르웨이의 하랄 3세 또한 왕위 계승에 이의를 제기했는데, 그의 왕위 주장은 그의 전임자 마그누스 2세와 이전 잉글랜드 왕 하르타카누트 사이의 협정에 근거한 것이었다.[14] 윌리엄과 하랄드 하르드라다는 즉시 별도의 침략을 위한 군대와 함선을 모으기 시작했다.[15]
1066년 초, 해럴드의 추방된 형제 토스티그 고드윈손은 플랑드르에서 모집한 함대를 이끌고 영국 남동부를 습격했으며, 이후 오크니에서 온 다른 배들이 합류했다. 해럴드의 함대에 위협을 느낀 토스티그는 북쪽으로 이동하여 이스트앵글리아와 링컨셔를 습격했다. 그는 머시아 백작 에드윈과 모어카르 형제에게 격퇴당해 배로 돌아갔다. 대부분의 추종자들이 그를 버리자 그는 스코틀랜드로 물러가 그 해 중반에 새로운 병력을 모집했다.[21]
하랄드 하르드라다는 9월 초 300척이 넘는 함대와 약 1만 5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영국 북부를 침략했다. 하르드라다의 군대는 왕위를 노리는 노르웨이 국왕을 지지한 토스티그의 병력으로 더욱 강화되었다. 요크로 진격한 노르웨이군은 9월 20일 에드윈과 모어카가 이끄는 영국 북부군을 풀포드 전투에서 물리친 후 요크를 점령했다.[22]
잉글랜드 군대는 지역을 기반으로 조직되었으며, 현지 징집군인 ''피르드''는 백작, 주교 또는 보안관 등의 귀족 휘하에서 복무했다.[25] ''피르드''는 자신의 땅을 소유하고, 군사력에 대한 국왕의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 지역 사회에서 장비를 갖춘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5하이드[24](명목상으로 한 가구를 부양할 수 있는 토지 단위)[23]마다 한 명이 복무해야 했다.[24] 잉글랜드는 ''피르드''가 소집될 때 약 14,000명의 병력을 제공할 수 있었다. ''피르드''는 비상사태를 제외하고 일반적으로 두 달 동안 복무했다. 전국적인 ''피르드''가 전부 소집되는 일은 드물었으며, 1046년부터 1065년 사이에는 1051년, 1052년, 1065년 세 번만 소집되었다.[24] 국왕은 또한 왕실군의 중추를 이룬 하우스칼이라고 알려진 개인 무장병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일부 백작들도 자신의 하우스칼 부대를 가지고 있었다. 현지 토지 소유 엘리트인 테인들은 왕실 하우스칼과 함께 싸우거나 백작 또는 다른 귀족의 군대에 합류했다.[25] ''피르드''와 하우스칼 모두 보병으로 싸웠으며, 주요 차이점은 하우스칼의 우수한 무장이었다. 잉글랜드 군대는 상당수의 궁수를 보유하고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26]
해럴드는 1066년 중반 남해안에서 대규모 군대와 함대를 이끌고 윌리엄의 침공을 기다렸다. 그의 병력 대부분은 농작물 수확을 해야 하는 민병대였기 때문에 9월 8일, 해럴드는 민병대와 함대를 해산했다.[27] 노르웨이 침공 소식을 듣고 그는 북쪽으로 서둘러 이동하면서 병력을 모았고, 노르웨이인들을 기습하여 9월 25일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에서 그들을 패배시켰다. 하랄드 하르드라다와 토스티그가 사망했고, 노르웨이인들은 큰 손실을 입어 원래 300척의 배 중 24척만이 생존자들을 태우고 돌아갈 수 있었다. 잉글랜드의 승리는 큰 희생을 치른 것이었고, 해럴드의 군대는 격파되어 약화된 상태였으며 남쪽과는 거리가 멀었다.[28]
3. 전투 전개 과정
1066년 여름, 해럴드는 윌리엄의 침공을 기다렸으나, 9월 초 보급품 부족으로 군대를 해산했다. 9월 25일, 해럴드는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에서 노르웨이의 하랄드 3세의 침략을 격퇴했다.[190]
한편, 노르망디 공국의 윌리엄은 북풍으로 8주 동안 항구에 발이 묶여 있다가, 바람이 바뀌자 9월 27일 침공을 시작했다. 해럴드는 좋지 않은 시기에 적을 맞게 되었다.
윌리엄은 노르망디 등지에서 군대를 모아 8월 12일경 영국 해협을 건널 준비를 마쳤으나, 악천후로 지연되었다. 9월 28일, 노르망디인들은 페번지에 상륙했고,[49] 일부는 로미에서 현지 민병대(피르드)와 싸웠다.[41] 윌리엄 군대는 해스팅스와 페번지에 요새를 건설했다.[49]
10월 13일, 윌리엄의 진격 소식을 접한 해럴드는 군대를 이끌고 요크셔에서 남하했다. 이들은 훈련과 장비가 부족했지만, 윌리엄에 맞서 해럴드는 전투를 준비했다.
해럴드는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 이후 군대 일부를 북쪽에 남겨두고 남하했다.[62] 윌리엄 상륙 소식은 남하 도중에 들었을 가능성이 크며, 헤이스팅스 전투 전 약 일주일 동안 런던에 머물렀다. 약 320km 거리를 하루 평균 약 43km로 이동했을 것이다.[63] [64] 10월 13일 밤, 해럴드는 칼드벡 언덕에 진을 쳤다.[65]
10월 14일 새벽, 노르만 기사단이 잉글랜드군을 기습, 헤이스팅스 북서쪽 16km 지점까지 몰아붙였다. 해질 무렵 해럴드가 전사하자 잉글랜드군은 와해되었다.
3. 1. 하랄 3세와 토스티그의 침공
1066년 초, 망명 중이던 하롤드의 동생 토스티 고드윈손은 플랑드르에서 병력을 모아, 이후 오크니 제도에서 온 함선들도 합류하여 잉글랜드 남동부를 공격했다. 하롤드의 함대에 위협받은 토스티는 북쪽으로 이동하여 이스트앵글리아와 린컨셔를 습격했다. 머시아 백작 에드윈과 모어카 형제[176]에 의해 그는 함대까지 밀려났다. 대부분의 지지자들이 이탈하자 그는 스코틀랜드로 물러났고, 그곳에서 6개월을 새로운 군대를 조직하는 데 보냈다.[177] 9월 초 하랄 3세는 1만 5천 명 이상이 탑승한 300척 이상의 함대를 이끌고 북잉글랜드를 침공했다. 왕좌에 대한 노르웨이 왕의 야망을 지지한 토스티의 군대에 의해 하랄 3세의 군대는 더욱 강화되었다. 요크로 진격하여 9월 20일 풀포드 전투에서 에드윈과 모어카가 지휘하는 북잉글랜드군을 격파한 후, 노르웨이군은 도시를 점령했다.[178]3. 2.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 (1066년 9월 25일)
1066년 9월 8일, 하롤드는 민병과 함대를 해산했다.[189] 노르웨이군의 침공 소식을 들은 하롤드는 도중에 병력을 모으면서 북쪽으로 서둘러, 9월 25일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에서 노르웨이군을 기습하여 패배시켰다. 하랄드 3세와 토스티는 전사했고, 노르웨이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초기 300척의 선박 중 생존자들을 수송하는 데 필요했던 것은 겨우 24척뿐이었다. 잉글랜드군의 승리는 큰 희생을 치렀는데, 하롤드의 군대는 타격을 입고 약화된 상태였으며, 남쪽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190]3. 3. 윌리엄의 상륙과 해럴드의 남하
해럴드는 1066년 중반 남해안에서 대규모 군대와 함대를 이끌고 윌리엄의 침공을 기다렸다. 그러나 병력 대부분이 농작물 수확을 해야 하는 민병대였기 때문에, 9월 8일에 민병대와 함대를 해산했다.[27] 노르웨이 침공 소식을 듣고 북쪽으로 이동하여 9월 25일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에서 노르웨이 군대를 격파했다. 하랄드 3세와 토스티는 전사했고, 노르웨이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잉글랜드의 승리는 큰 희생을 치렀고, 해럴드의 군대는 약화된 상태였으며 남쪽과 멀리 떨어져 있었다.[28]윌리엄은 노르망디와 프랑스 전역에서 군대를 모았고, 브르타뉴와 플랑드르 병력도 포함되었다.[49] 함대를 새로 건조해야 했기에 준비에 거의 9개월을 보냈다. 생발레리쉬르솜에서 군대를 집결시켰고, 8월 12일경에는 영국 해협을 건널 준비가 되었다.[33] 그러나 악천후 때문에 건널목이 지연되었다. 노르망디인들은 해롤드의 해군이 해산된 후 며칠 뒤인 9월 28일 페번지에 상륙했다.[49] 몇몇 배는 항로를 이탈하여 로미에 상륙했고, 거기서 노르망디인들은 현지 민병대인 피르드와 싸웠다.[41] 상륙 후, 윌리엄의 군대는 해스팅스에 목조 성을 건설하여 주변 지역을 약탈했다.[49] 페번지에도 더 많은 요새가 세워졌다.[50]
해럴드는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에서 승리한 후, 군대 상당수를 북쪽에 남겨두고 남쪽으로 진군했다.[62] 해럴드가 윌리엄의 상륙 소식을 언제 알았는지는 불분명하지만, 남하하는 도중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해럴드는 헤이스팅스 전투 전 약 일주일 동안 런던에 머물렀고, 약 320km를 하루 평균 약 43km로 이동했을 것이다.[63] [64] 해럴드는 10월 13일 밤 칼드벡 언덕에 진을 쳤는데, 이곳은 헤이스팅스에 있는 윌리엄의 성에서 약 13km 떨어진 "회색 사과나무" 근처였다.[65]
4. 헤이스팅스 전투 (1066년 10월 14일)
1066년 10월 14일 새벽, 노르망디의 윌리엄이 이끄는 노르만 기사단이 해럴드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을 기습했다. 이는 잉글랜드의 해럴드가 9월 25일에 요크셔 지방의 스탬퍼드브리지 전투에서 노르웨이의 하랄 3세의 침략을 물리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벌어진 일이었다. 해럴드는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에서 승리하고 남은 병력을 이끌고 남하하던 중, 10월 13일에 윌리엄이 헤이스팅스로 진격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노르만 기사단은 해럴드 군을 헤이스팅스에서 북서쪽으로 16km 지점까지 몰아붙였다. 해질 무렵 해럴드가 전사하자 잉글랜드군은 와해되었다.[75]
전투는 헤이스팅스에서 북쪽으로 약 11.27km 떨어진 현재의 배틀 마을[78] 근처, 북쪽의 콜드벡 언덕과 남쪽의 텔험 언덕 사이에서 벌어졌다.[79] 이 지역은 숲이 우거져 있었고, 근처에는 습지가 있었다.[79]
해럴드의 군대는 가파른 경사면 꼭대기에 작고 밀집된 대형으로 배치되었으며,[84] 측면은 숲과 앞쪽의 습지로 보호되었다.[87] 잉글랜드군은 방패벽을 형성했고,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방패를 밀착하거나 겹쳐 들었다.[93]
윌리엄은 군대를 세 그룹으로 배치했다. 좌익은 브르타뉴인, 앙주, 푸아투, 메인 출신 병사들로 구성되었다. 중앙은 노르망디인이 차지했고,[94] 공작의 직접적인 지휘 아래 공작 가족과 친족들이 배치되었다.[93] 우익은 프랑스인,[94] 피카르디, 불로뉴, 플랑드르 출신 병사들로 구성되었다. 최전방은 궁수, 그 뒤에는 창으로 무장한 보병, 기병대는 예비대로 배치되었다.[94]
전투는 노르만 궁수들이 영국군 방패벽을 향해 화살을 쏘는 것으로 시작되었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94] 영국군 궁수가 부족했기 때문에 노르만 궁수들은 주워서 재사용할 영국군 화살이 거의 없었다.[96] 이후 윌리엄은 창병들을 앞세워 영국군을 공격하도록 했으나, 창, 도끼, 돌 등의 일제 사격을 받았다.[94] 보병들이 방패벽에 틈을 만들지 못하자 기병들이 지원에 나섰지만, 역시 실패했다.[96] 윌리엄이 죽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혼란이 가중되었지만, 윌리엄은 얼굴을 보여주며 자신이 살아있다고 외쳤다.[98]
오후, 노르망디 군은 영국군을 유인하여 방패벽에 틈을 만드는 가짜 후퇴 전술을 두 번 사용했다.[283] 이를 통해 잉글랜드군 방패벽의 하우스칼을 감소시켰다.[283]
해럴드는 전투 후반부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나, 여러 기록은 서로 다른 내용을 보인다. 바이외 태피스트리는 해럴드가 눈에 화살을 맞고 쓰러지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288] 해럴드의 죽음으로 잉글랜드군은 지도자를 잃고 붕괴하기 시작했다.[286]
4. 1. 전력 비교
해럴드는 1066년 중반 남해안에서 대규모 군대와 함대를 이끌고 윌리엄의 침공을 기다렸다. 병력 대부분은 농작물 수확을 해야 하는 민병대였기 때문에, 9월 8일에 해럴드는 민병대와 함대를 해산했다.[189] 노르웨이 침공 소식을 듣고 북쪽으로 서둘러 이동하면서 병력을 모았고, 9월 25일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에서 노르웨이군을 기습하여 패배시켰다. 하랄드 3세와 토스티는 전사했고, 노르웨이군은 큰 피해를 입어 초기 300척의 배 중 생존자 수송에 24척만이 필요했다. 잉글랜드군의 승리는 큰 희생을 치렀고, 해럴드의 군대는 타격을 입고 약화된 상태였으며, 남쪽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190]윌리엄은 노르망디와 프랑스 다른 지역에서 모은 군대와 대규모 침공 함대를 편성했고, 브르타뉴와 플랑드르에서 온 대규모 파견대도 포함되었다.[192] 함대를 새로 건조해야 했기에 거의 9개월을 쏟았다. 일부 노르망 연대기에 따르면, 외교적 지원도 확보했지만, 그러한 보고의 정확성은 논쟁거리이다. 교황 알렉산데르 2세가 지지의 표시로 교황의 깃발을 주었다는 주장이 유명한데, 푸아티에의 윌리엄의 기록에만 나타나며, 더 시대에 가까운 이야기에는 나타나지 않는다.[197] 1066년 4월 핼리 혜성이 하늘에 나타나 유럽 전역에서 널리 보고되었고, 당시 기록은 혜성 출현을 잉글랜드 왕위 계승 위기와 연결짓고 있다.[198]
윌리엄은 생발레리쉬르솜에 군대를 집결시켜 8월 12일경 영국 해협을 건널 준비를 마쳤다.[201] 그러나 불리한 날씨였거나 강력한 잉글랜드 함대의 저지를 피하기 위해 항해는 연기되었다.[202] 해럴드가 노르웨이 군대를 물리친 지 며칠 후, 노르망 군대는 해럴드의 해상 전력이 분산된 것을 이용하여 9월 28일 서섹스의 페번시에 상륙했다.[192] 몇몇 배는 항로에서 벗어나 롬니에 상륙했고, 그곳에서 노르망 군대는 현지 피르드와 교전했다.[217][196] 상륙 후, 윌리엄의 군대는 헤이스팅스에 목조 성채를 건설하고, 그곳에서 주변 지역을 공격했다.[192] 페번시에도 추가적인 요새들이 건설되었다.[218]

윌리엄 군대의 정확한 규모와 구성은 불명확하다.[194] 당시 문서는 윌리엄이 776척의 선박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과장된 표현일 것이다.[220] 군 규모에 대한 당시 저자들의 수치는 1만 4천 명에서 15만 명까지 다양하다.[221] 근대 역사가들은 윌리엄 군세 규모에 대해 다양한 추정치를 제시하고 있다.
추정치 | 7,000명 ~ 8,000명 (기병 1,000명 ~ 2,000명 포함)[2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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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 명 ~ 1만 2천 명[221] | |
1만 명 (기병 3,000명 포함)[223] | |
7,500명[194] |
군은 기병대, 보병대, 궁수대와 석궁병 부대로 구성되었으며, 기병과 궁수의 수가 거의 같았고, 보병의 수는 다른 두 부대의 수를 합친 것과 같았다.[224] 윌리엄 1세의 동료에 대한 후대 목록이 존재하지만, 대부분 추가된 이름으로 부풀려져 있다. 약 35명의 고유명사를 가진 개인만이 윌리엄과 함께 헤이스팅스에 있었던 것으로 확실히 인정할 수 있다.[194][225]
주로 사용된 방어구는 사슬 갑옷으로, 무릎까지 오는 길이에 승마를 위한 절개가 있었고, 일부는 팔꿈치까지 소매가 있었다. 일부는 하우버크에 금속, 뿔, 경화 가죽으로 만든 판을 붙여 만들었을 것이다. 머리 보호구는 원뿔형 금속 투구였으며, 코 보호를 위한 금속 띠가 아래로 뻗어 있었다.[228] 기병과 보병 모두 방패를 휴대했다. 보병 방패는 원형 목재였으며 금속으로 보강되었다. 기병은 연형 방패로 바꾸어 들었고, 창을 장비했다. 오른팔 아래 몸에 밀착하여 든 창은 비교적 새로운 개량품이었으며, 장거리 기병 돌격에 적합하지 않은 지형이었던 헤이스팅스에서는 사용되지 않았을 것이다. 보병과 기병 모두 키가 크고 양날을 가진 직도의 검으로 싸웠다. 보병은 투창이나 장창을 사용할 수도 있었다.[229] 일부 기병은 검 대신 곤봉을 사용했을 것이다. 궁수는 단궁이나 석궁을 사용했으며, 대부분 방어구를 착용하지 않았다.[230]
해럴드 군대의 정확한 병력 수는 알 수 없다. 당시 기록들은 신뢰할 만한 수치를 제공하지 않는다. 일부 노르만 기록에서는 해럴드 측에 40만 명에서 120만 명에 달하는 병력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잉글랜드 기록들은 해럴드의 군대를 매우 적은 수로 제시하는데, 잉글랜드군 패배를 덜 참혹하게 보이게 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239] 근세 역사가들은 헤이스팅스의 해럴드 군에 대해 5,000명에서 1만 3,000명 사이의 수치를 제시하고 있으며,[240] 대부분 현대 역사가들은 7,000명에서 8,000명의 잉글랜드군 병력이라는 수치를 논하고 있다.[185][241] 이들은 피르드와 하우스칼의 혼성이었을 것이다. 헤이스팅스에 있었던 잉글랜드인 개인은 극소수이며,[194] 기르스와 레오프윈[242] 등을 포함하여 약 20명의 고유명사를 가진 개인이 해럴드와 함께 헤이스팅스에서 싸웠다고 합리적으로 추정할 수 있다.[227]
잉글랜드군은 전체가 보병이었다. 일부 상류층 군 구성원이 말을 타고 전투에 임했을 가능성은 있지만, 전투가 시작되면 보병으로 싸우기 위해 말에서 내렸다. 군의 핵심은 전업 전문 병사인 하우스칼이었다. 무장은 원추형 투구, 긴 쇄갑옷, 연형 또는 원형 방패였다.[246] 대부분 하우스칼은 양손 데인 액스를 사용했지만, 검을 휴대하기도 했다.[247] 나머지 군대는 피르드 징집병으로, 보병이지만 무장이 가볍고 전문 군인이 아니었다. 보병 대부분은 방패벽을 형성했고, 전열 병사는 방패를 서로 고정했다. 그 뒤에는 도끼병과 창병이나 궁병이 배치되어 있었다.[248]
4. 2. 전투 경과
1066년 9월 25일, 노르웨이의 하랄드 3세의 침략을 스탬퍼드브리지 전투에서 물리친 잉글랜드의 왕 해럴드 2세는, 노르망디 공국의 윌리엄 1세가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접했다. 해럴드는 7,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요크셔에서 남쪽으로 이동했지만, 이들은 훈련과 장비가 부족했다.[75] 반면 윌리엄은 북풍 때문에 8주 동안 항구에 묶여 있다가 바람의 방향이 바뀌자 9월 27일에 침공을 시작하여, 해럴드에게는 좋지 않은 시기에 강력한 기사단을 갖춘 적과 싸우게 되었다.10월 14일 새벽, 노르만 기사단은 잉글랜드군을 기습하여 헤이스팅스에서 북서쪽으로 16km 지점까지 몰아붙였다. 해질 무렵 해럴드가 전사하면서 잉글랜드군은 와해되었다.[75]
전투는 헤이스팅스에서 북쪽으로 11km 떨어진 현재의 배틀 마을 근처에서 벌어졌다.[78] 전투 당일 해는 오후 4시 54분에 졌고, 오후 6시 24분에는 완전히 어두워졌다.[77]
해럴드의 군대는 가파른 경사면 꼭대기에 밀집된 대형으로 배치되었고, 측면은 숲과 습지로 보호받았다.[84] 영국군은 방패벽을 형성하여 방패를 밀착하거나 겹쳐 들어 공격을 막았다.[93]
윌리엄은 군대를 세 그룹으로 나누었다. 좌익은 브르타뉴인, 앙주, 푸아투, 메인 출신 병사들로 구성되었고, 중앙은 노르망디인이, 우익은 프랑스인, 피카르디, 불로뉴, 플랑드르 출신 병사들로 구성되었다.[94] 최전방은 궁수, 그 뒤에는 창으로 무장한 보병, 기병대는 예비대로 배치되었다.[94]
전투는 노르만 궁수들이 영국군 방패벽을 향해 화살을 쏘는 것으로 시작되었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94] 이후 창병들이 공격했지만, 영국군의 창, 도끼, 돌 등의 공격을 받았다.[94] 보병들이 방패벽에 틈을 만들지 못하자 기병들이 지원에 나섰지만, 역시 실패했다.[96] 윌리엄이 죽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혼란이 가중되었지만, 윌리엄은 얼굴을 보여주며 자신이 살아있다고 외쳤다.[98]
오후 초, 노르망디 군은 영국군을 유인하여 방패벽에 틈을 만드는 가짜 후퇴 전술을 두 번 사용했다.[101] 이 전술로 영국군 방패벽의 하우즈칼(housecarls)이 희석되었고, 궁수들이 다시 공격했다.[99]
해럴드는 전투 후반부에 사망했는데, 그의 죽음에 대한 기록은 서로 다르다. 바이외 태피스트리는 해럴드가 눈에 화살을 맞고 쓰러지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103] 해럴드의 죽음으로 영국군은 지도자를 잃고 붕괴하기 시작했다.[101]
4. 3. 잉글랜드 패배 원인
해럴드 2세의 패배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우선, 거의 동시에 발생한 노르웨이의 하랄 3세와 노르망디 공국의 윌리엄의 침략에 대응해야 했다는 점이 컸다. 해럴드가 9월 8일에 남부 잉글랜드에 주둔시켰던 군대를 해산한 것도 패배의 한 원인이었다.[300]많은 역사가들은 해럴드가 헤이스팅스에서 윌리엄과 맞서기 전에 남쪽으로 서둘러 이동하면서 더 많은 병력을 모으지 않은 것을 비판한다. 그러나 잉글랜드군이 윌리엄의 군대에 대처하기에 충분했는지는 불분명하다.[300] 하루 종일 지속된 전투는 잉글랜드군이 장거리 행군으로 지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301] 해럴드가 헤이스팅스로 빠르게 진격한 것은 머시아의 에드윈 백작과 노섬브리아의 모르카 백작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다. 그는 토스티그가 패배한 후 그들과 그들의 군대를 남쪽으로 데려오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300] 현대 역사가들은 해럴드가 전투를 서두른 이유 중 하나가 윌리엄의 약탈을 억제하고 그가 상륙 지점에서 벗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지적한다.[302]
패배의 책임 대부분은 전투 당시의 사건에 있다.[300] 윌리엄은 경험이 풍부한 군사 지도자였고,[303] 잉글랜드 측에는 기병이 부족하여 해럴드는 전술적 선택의 폭이 좁았다.[301] 일부 저술가들은 해럴드가 전투 초반에 윌리엄이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도 기회를 활용하지 않은 것을 비판한다.[304] 잉글랜드군은 후퇴하는 노르망디군을 추격했을 때 측면이 공격에 노출되었고, 수비에만 집중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잉글랜드 지휘관들의 경험 부족 때문인지, 아니면 잉글랜드 병사들의 무질서 때문인지는 불분명하다.[303] 결국 해럴드의 죽음은 혼란에 빠진 잉글랜드군의 해체를 알리는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다.[301]
역사가 데이비드 니콜은 이 전투에 대해 윌리엄의 군대가 "노르망디-프랑스식 혼성 기병 및 보병 전술이 앵글로색슨족의 게르만-스칸디나비아식 보병 전통에 비해 우월함을 어렵지 않게 보여주었다"고 평가했다.[306]
5. 전투의 결과와 영향
헤이스팅스 전투는 잉글랜드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잉글랜드의 패배와 노르만의 승리로 이어졌다.[103] 전투가 매우 치열하여 윌리엄이 사망했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고, 윌리엄은 생존 사실을 알리기 위해 직접 얼굴을 보여주어야 했다.[126]
바이외 태피스트리는 이 전투를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해럴드의 형제들인 레오뷔네와 귀르드는 전투 초기에 전사했다.[121]
정확한 사상자 수는 알 수 없지만, 전투에 참여한 영국인 중 사망자는 약 50%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이는 과장되었을 수 있다. 헤이스팅스 전투에 참전한 노르망디인 중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의 사망률은 7명 중 1명이었지만, 이들은 모두 귀족이었고 일반 병사들의 사망률은 더 높았을 것이다. 오데리크 비탈리스의 수치는 매우 과장되었지만, 4명 중 1명의 사상자 비율은 정확할 수 있다. 마렌은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노르망디인 2천 명과 영국인 4천 명이 사망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122]
하롤드의 패배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거의 동시에 발생한 두 차례의 침공에 방어해야 했던 점, 9월 8일 남부 잉글랜드에서 군대를 해산한 점 등이 패배의 원인으로 지적된다. 많은 역사가들은 윌리엄과 대치하기 전에 추가 병력을 모으지 않은 점을 하롤드의 잘못으로 지적하지만, 잉글랜드군 전력 부족 여부는 불분명하다.[300]
하루 종일 이어진 전투는 잉글랜드군이 지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는 반론도 있다. 하롤드가 헤이스팅스로 진군한 속도와 관련하여, 머시아 백작에드윈과 노섬브리아 백작을 신뢰하지 않아 그들과 그들의 군대가 남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거부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300] 역사가들은 하롤드가 전투를 서둘렀던 이유 중 하나가 윌리엄의 약탈 행위를 막고 상대방의 해안 요새로부터의 진출을 막는 것이었다고 지적한다.[302]
패배의 책임 대부분은 전투 중 발생한 사건들 때문일 것이다.[300] 윌리엄은 경험이 풍부한 군사 지도자였고,[303] 잉글랜드 측 기병 부재는 하롤드가 이용할 수 있는 전술적 선택지를 줄였다.[301] 일부 저자들은 전투 초기에 윌리엄의 사망 소문이라는 기회를 활용하지 않은 점을 하롤드의 잘못으로 비판한다.[304] 잉글랜드군은 후퇴하는 노르망디군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측면 공격에 취약해졌고, 수비 전술에 전념하지 않고 실수를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잉글랜드군 지휘관들의 미숙함 때문인지, 아니면 잉글랜드군 병사들의 규율 부족 때문인지는 명확하지 않다.[303] 결국 하롤드의 죽음이 잉글랜드군의 혼란을 초래했고, 붕괴의 결정적인 신호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301]
5. 1. 노르만 왕조의 성립
헤이스팅스 전투 다음 날, 해롤드의 시신은 갑옷이나 신체적 특징으로 확인되었다. 그의 개인 깃발은 윌리엄에게 바쳐졌고,[120] 이후 교황에게 보내졌다.[103] 해롤드의 동생과 하우스칼 일부를 포함한 잉글랜드 전사자들의 시신은 전장에 남겨졌지만,[126] 이후 친척들이 몇몇을 수습했다.[121] 노르망디인 전사자들은 발견되지 않은 대규모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125] 정확한 전사자 수는 알 수 없다. 전투에 참여한 잉글랜드 병사 중 사망자는 약 50%로 추정되지만, 이는 과장일 수 있다. 헤이스팅스에서 싸운 것으로 알려진 노르망디인 중에서는 7명 중 1명이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들은 모두 귀족이었고 일반 병사의 사망률은 더 높았을 것이다. 올데릭 비탈리스의 수치는 과장되었지만, 4명 중 1명이라는 사망률은 정확할 수 있다. 마렌은 헤이스팅스에서 노르망디인 2,000명과 잉글랜드인 4,000명이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한다.[122] 몇몇 보고에 따르면 수년 후에도 언덕 경사면에서 잉글랜드 전사자들의 유해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학자들은 오랫동안 산성 토양 때문에 유해를 발굴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최근 발견으로 이 견해는 바뀌고 있다.[123] 중세 묘지에서 발견되어 13세기 루이 9세의 루이 9세의 십자군 원정과 관련된 것으로 여겨졌던 두개골은 이제 헤이스팅스 전투와 관련된 것으로 여겨진다.[124]어떤 이야기에 따르면, 승리한 공작에게 해롤드의 어머니 기사가 아들의 시신 무게만큼 금을 배상금으로 제안했지만,[315] 거절당했다고 한다. 윌리엄은 해롤드의 시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명령했지만, 그렇게 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126] 또 다른 이야기는 해롤드가 언덕 꼭대기에 묻혔다고 전한다.[125] 해롤드가 세운 월섬 수도원은 나중에 그의 시신이 비밀리에 그곳에 묻혔다고 주장했다.[126] 다른 전설에서는 해롤드가 헤이스팅스에서 죽지 않고 탈출하여 체스터에서 은둔자로 살았다고 주장한다.[121]

윌리엄은 승리 후 살아남은 잉글랜드 지도자들의 항복을 기대했지만, 참회왕 에드워드의 조카인 에드가 애설링이 현인 평의회에서 왕으로 선포되었고, 에드윈 백작, 모르카 백작, 캔터베리 대주교 스티간드 및 요크 대주교 에알드레드의 지지를 받았다.[128] 윌리엄은 켄트 해안을 따라 런던으로 진군했다. 그는 사우크에서 자신을 공격한 잉글랜드군을 물리쳤지만, 런던 브리지를 공격할 수 없어 더 우회적인 경로로 수도에 접근해야 했다.[129]
윌리엄은 템즈 계곡을 따라 월링포드에서 강을 건너려 했고, 그곳에서 스티간드의 항복을 받았다. 그런 다음 칠턴 구릉을 따라 북동쪽으로 이동하여 북서쪽에서 런던으로 접근하면서 도시에서 온 병력과 다시 전투를 벌였다. 잉글랜드 지도자들은 허트퍼드셔의 버킹엄스테드에서 윌리엄에게 항복했다. 윌리엄은 1066년 12월 25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잉글랜드 왕 윌리엄 1세로 즉위하고 에알드레드로부터 대관식을 치렀다.[129]
잉글랜드 귀족들이 항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저항은 수년 동안 계속되었다.[131] 1067년 말 엑서터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1068년 중반에는 해롤드의 아들들이 침공했으며, 같은 해 노섬벌랜드에서 봉기가 일어났다.[132] 1069년에는 노섬벌랜드 반군, 덴마크 함대의 습격, 잉글랜드 남부와 서부의 반란으로 윌리엄은 더 큰 어려움에 직면했다. 그는 여러 봉기를 무자비하게 진압했으며, 1069년 말부터 1070년 초까지 북잉글랜드 일부를 황폐화시킨 "북부의 유린"이 그 정점이었다.[133] 1070년 헤리워드 더 웨이크의 추가 반란 또한 일리 섬에서 왕에 의해 진압되었다.[134]
배틀 수도원은 윌리엄이 전투가 벌어진 곳에 세운 수도원이다. 12세기 자료에 따르면, 윌리엄은 수도원 건립을 서약했고, 교회의 제단은 해롤드가 죽은 자리에 세워졌다.[101] 그러나 수도원 설립은 1070년 로마 교황의 사절이 윌리엄에게 부과한 것일 가능성이 더 높다.[135] 전투터 지형은 수도원 건설로 인해 변했는데, 잉글랜드군이 방어했던 경사면은 전투 당시보다 훨씬 완만해졌다. 능선 꼭대기도 쌓이고 평평해졌다.[78] 수도원 해체 이후 수도원 부지는 세속 지주들에게 넘어갔고, 그들은 이곳을 주택이나 시골집으로 사용했다.[136] 1976년 이 부지는 매물로 나왔고, 미국 독립 200주년 기념을 원하는 일부 미국 기부자들의 도움으로 정부가 매입했다.[137] 전투터와 수도원 부지는 현재 잉글리시 헤리티지가 소유 및 관리하며 일반인에게 공개되어 있다.[138] 바이외 태피스트리는 헤이스팅스 전투까지의 사건들을 묘사한 자수 작품으로, 아마도 전투 직후 오도가 바이외 주교좌에 걸기 위해 제작을 의뢰했을 것이다.[139] 현대에는 헤이스팅스 전투 재현 행사가 열려 수천 명의 참가자와 관람객이 원래 전투가 벌어진 곳으로 모여든다.[141][142]
5. 2. 잉글랜드 사회 변화
헤이스팅스 전투는 잉글랜드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윌리엄 1세는 승리 후 잉글랜드 지도자들의 항복을 기대했으나, 에드가 애설링이 현인 평의회에서 왕으로 선포되면서 저항에 부딪혔다.[317] 윌리엄은 런던으로 진군하며 잉글랜드군을 물리쳤지만, 런던 브리지를 점령하지 못하고 우회해야 했다.[318] 결국 잉글랜드 지도자들은 항복했고, 윌리엄은 1066년 12월 25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했다.[320]그러나 잉글랜드 귀족들의 항복에도 불구하고 저항은 수년간 계속되었다.[321] 1067년 엑서터 반란, 1068년 해럴드의 아들들의 침공, 1068년 노섬브리아 반란 등이 일어났다.[322] 1069년에는 더 큰 반란이 일어났고, 윌리엄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북부의 유린을 감행하여 북부 잉글랜드를 황폐화시켰다.[323] 1070년 헤리워드 더 웨이크의 반란도 진압되었다.[324]
윌리엄은 전투가 벌어진 곳에 배틀 수도원을 세웠다.[286] 수도원 해체 이후 수도원 토지는 세속 지주들에게 넘어갔고, 1976년 영국 정부가 매입하여 현재 잉글리시 헤리티지가 관리하고 있다.[327]
바이외 태피스트리는 헤이스팅스 전투까지의 사건들을 묘사한 자수 작품으로, 전투 직후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329] 현재는 프랑스 바이외에 전시되어 있다.[331] 오늘날에는 매년 헤이스팅스 전투 재현 행사가 열리고 있다.[332]
일부 잉글랜드 참전 용사들은 잉글랜드를 떠나 콘스탄티노플의 바랑기아 경비대에 합류하여 디라키움 전투에서 다시 노르망디인과 싸웠지만 패배했다.[143]
5. 3. 역사적 의의
헤이스팅스 전투는 잉글랜드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다. 전투 다음 날, 해럴드 2세의 시신은 갑옷이나 신체적 특징으로 확인되었다.[307] 그의 개인 깃발은 윌리엄 1세에게 넘겨졌고,[308] 이후 교황에게 보내졌다.[288] 잉글랜드군 전사자들은 전장에 방치되었지만,[309] 일부는 나중에 친척들이 수습했다.[310] 노르망디군 전사자들은 대규모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는데,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311] 정확한 사상자 수는 알 수 없지만, 참전한 잉글랜드 병사 중 사망자 수는 약 50%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312]윌리엄은 승리 후 잉글랜드 지도자들의 항복을 기대했으나, 에드가 애설링이 왕으로 선포되면서 저항이 계속되었다.[316] 윌리엄은 런던으로 진군하여 잉글랜드군을 물리쳤지만, 런던 브리지를 점령하지 못하고 우회해야 했다.[318] 윌리엄은 템스 계곡을 따라 이동하여 윌링포드에서 스티건드의 항복을 받고, 칠턴 구릉을 거쳐 런던으로 접근했다.[319] 결국 잉글랜드 지도자들은 버크햄스테드에서 윌리엄에게 항복했고, 1066년 12월 25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윌리엄 1세의 대관식이 거행되었다.[320]
잉글랜드 귀족들의 항복에도 불구하고 저항은 수년 동안 계속되었다.[321] 1067년 엑서터 반란, 1068년 해럴드 아들들의 침공, 1068년 노섬브리아 반란 등이 일어났다.[322] 1069년에는 더 큰 저항에 직면했고, 윌리엄은 여러 봉기를 진압하며 1069년 말부터 1070년 초까지 북부 잉글랜드를 황폐화시켰다.[323] 1070년에는 히어워드 더 웨이크의 반란도 진압되었다.[324]
배틀 수도원은 윌리엄이 전투가 벌어진 곳에 세운 수도원이다. 12세기 자료에 따르면 윌리엄은 수도원 건립을 서약했고, 교회의 제단은 해럴드가 죽은 곳에 세워졌다.[286] 그러나 1070년 교황 사절이 윌리엄에게 건립을 명령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325] 수도원 건설로 전투터 지형이 변했고, 잉글랜드군 방어 경사면은 완만해졌다.[252] 수도원 해체 후 토지는 세속 지주들에게 넘어갔고, 주택 등으로 사용되었다.[326] 1976년 부지는 매물로 나왔고, 미국 독립 200주년 기념 기부자들의 도움으로 정부가 매입했다.[327] 전투터와 수도원 부지는 현재 잉글리시 헤리티지가 소유 및 관리하며 공개되어 있다.[328]
바이외 태피스트리는 헤이스팅스 전투까지의 사건을 묘사한 자수 작품으로, 전투 직후 바이외의 오도가 의뢰했을 가능성이 있다.[329] 태피스트리는 현재 프랑스 바이외의 이전 주교관에 전시되어 있다.[331] 현대에는 매년 헤이스팅스 전투 재현 행사가 열려 많은 참가자와 관람객이 모인다.[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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