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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덕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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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홍덕영은 1926년 함흥 출생으로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골키퍼로 활약한 축구인이다. 1948년 하계 올림픽에 참가하여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첫 국제 경기를 치렀으며, 1954년 FIFA 월드컵과 아시안 게임에 출전하여 아시안 게임 은메달을 획득했다. 선수 은퇴 후에는 국제 심판, 고려대학교 및 서울은행 축구단 감독, 국가대표팀 감독을 역임했으며, 2002년 FIFA 월드컵 조직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1974년 FIFA 심판 특별상, 2005년 축구 명예의 전당 헌액, 대한축구협회 명예의 전당 헌액 등 수상을 하였으며, 20세기 한국 축구의 거목 7인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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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덕영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54년 홍덕영 선수 사진
1954년 홍덕영
전체 이름홍덕영
출생일1926년 5월 5일
출생지함경남도 함흥시, 일본 제국 통치 하의 한국
사망일2005년 9월 13일 (향년 79세)
사망지서울특별시
1.76m
포지션골키퍼
선수 경력
유소년 클럽함흥고등학교
대학 클럽고려대학교 (1946–1950)
클럽서울 FC (1947)
클럽조선방직 (?–1955)
국가대표팀대한민국 (1948–1954)
국가대표팀 출전17회
국가대표팀 득점0골
감독 경력
대학교 감독고려대학교 (1959–1962)
클럽 감독서울은행 (1969–1976)
국가대표팀 감독대한민국 (1971)
메달
아시안 게임은메달, 1954 마닐라, 팀

2. 선수 시절

홍덕영은 1948년 하계 올림픽, 1954년 FIFA 월드컵, 1954년 아시안 게임에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주전 골키퍼로 활약했다.

2. 1. 초기 활동 및 올림픽 참가

1926년 5월 5일 함경남도 함흥시에서 태어나 함흥고등보통학교와 고려대학교(당시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했다. 1948년 하계 올림픽을 통해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첫 국제 경기에 참가했다.[4] 첫 경기 상대는 멕시코였는데, 5-3으로 꺾고 8강에 진출했다. 그러나 8강에서 스웨덴에 0-12로 패하며 4강 진출에 실패했다. 이는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국제 경기 최다 점수차 패배였다.[4] 그는 스웨덴의 48개 슛을 막아내느라 고군분투했으며, 경기 후 가슴에 부상을 입기도 했다.[4]

6.25 전쟁이 종식된 지 1년이 채 되지 않았을 무렵 1954년 FIFA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에서 일본을 상대로 1차전에서 5-1로 승리했고, 2차전에서는 2-2로 비기며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첫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게 되었다.

약 2개월 뒤 1954년 아시안 게임에 출전하여 은메달을 획득,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아시안 게임 최초의 메달 획득에 공헌했다.

홍덕영은 1954년 3월 7일 일본 도쿄에서 열렸던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 경기를 가장 인상적인 경기로 기억했는데, "일본 땅에 처음 펄럭이는 태극기와 애국가 연주를 들으면서 느꼈던 뭉클한 기억을 죽어서도 잊지 못할 것"이라고 밝혔다.

본선에서는 헝가리에 0-9, 튀르키예에 0-7로 패배하며 세계 축구의 높은 벽을 실감했다.[9] 헝가리전에서 홍덕영은 푸슈카시 페렌츠의 강력한 슈팅 때문에 공포에 질리기도 했으며, 2경기에서 16골을 실점했다.[9] 한국 선수들은 항공권을 늦게 받아 첫 경기를 시작하기 10시간 전에 스위스에 도착했다.[5] 46시간 동안 비행기를 탄 후 최악의 컨디션으로 헝가리를 만났고, 경기 중 선수 4명이 탈진하여 경기장을 떠났다. 당시 축구에는 교체 시스템이 없었기에 대한민국은 7명의 선수만으로 경기를 마쳤다.[6] 김용식 대한민국 감독은 선수들의 체력 안배를 위해 두 번째 경기에서 7명의 선수를 교체했지만,[5][7][8] 터키에게 7-0으로 패했다.

2. 2. 1954년 FIFA 월드컵

홍덕영은 6.25 전쟁이 끝난 직후 1954년 FIFA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에서 일본을 상대로 1차전에서 5-1로 승리하고 2차전에서 2-2로 비기며 1승 1무로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첫 월드컵 본선 진출을 이끌었다.[5] 그는 훗날 1954년 3월 7일 일본 도쿄에서 열렸던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 경기를 가장 인상적인 경기로 기억하며 "일본 땅에 처음 펄럭이는 태극기와 애국가 연주를 들으면서 느꼈던 뭉클한 기억을 죽어서도 잊지 못할 것"이라고 회고했다.

하지만 본선에서는 당시 세계 최강국인 헝가리에 0-9, 같은 월드컵 처녀 출전국인 튀르키예에 0-7로 대패하며 세계 축구의 높은 벽을 실감했다.[9] 특히 헝가리전에서 홍덕영은 푸슈카시 페렌츠의 강력한 슈팅에 공포를 느끼기도 했다. 대한민국 대표팀은 항공권을 늦게 받아 첫 경기를 시작하기 10시간 전에 스위스에 도착했고, 헝가리와의 경기에서는 선수 4명이 탈진하여 경기장을 떠나는 등 최악의 컨디션이었다.[5][6] 당시에는 선수 교체 시스템이 없었기 때문에 대한민국은 7명의 선수만으로 경기를 마쳤다.[6] 김용식 감독은 선수들의 체력 안배를 위해 두 번째 경기에서 7명의 선수를 교체했지만,[5][7][8] 튀르키예에게 0-7로 패했다. 홍덕영은 두 경기 모두 출전하여 총 16골을 허용하며 단일 월드컵에서 가장 많은 골을 내준 골키퍼가 되었다.[9]

3. 은퇴 이후

선수 생활을 접은 후 1957년부터 1967년까지 국제심판으로 활동했고, 1959년부터 1962년까지 고려대학교 축구부, 1969년부터 1976년까지 서울은행 축구단의 감독을 맡아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16]

1970년부터 1971년까지 국가대표팀 감독을 역임했으며, 1974년 국제축구연맹 심판특별상을 받았다. 대한축구협회 이사를 거쳐 1985년부터 1986년까지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을 지냈고, 2002년 FIFA 월드컵 조직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며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첫 월드컵 4강 신화에 기여했다.[16]

대한민국 축구 역사의 시작을 알렸던 축구인 중 한 명으로, 20세기 한국 축구의 거목 7인 중 한 명으로 꼽힌다. 2005년 김용식, 거스 히딩크 감독 등과 함께 대한축구협회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16] 말년에는 당뇨 합병증으로 시력을 잃고 발가락 절단 수술을 받는 등 힘겨운 투병 생활을 했다.[16]

4. 수상 경력

wiki

수상 경력
연도대회소속팀결과비고
1974FIFA 심판특별상[16]
2005대한축구협회 축구 명예의 전당 헌액[16]
1952대통령배조선방직[11]준우승[12]
1953대통령배조선방직[11]준우승[12]
1954대통령배조선방직[11]준우승[12]
1954아시안 게임대한민국은메달[13]


4. 1. 개인 수상

4. 2. 클럽

홍덕영은 대통령배 준우승을 3회(1952, 1953, 1954) 기록한 조선 방직에서 선수 생활을 하였다.[11][12]

4. 3. 국가대표팀

홍덕영은 1948년 하계 올림픽에 참가하여 멕시코를 상대로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첫 승리에 기여했다. 그러나 8강전에서 대한민국은 우승팀인 스웨덴을 만나 0-12로 패했는데, 이는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최다 점수차 패배였다. 그는 스웨덴의 48개의 슛을 막아내느라 고군분투했으며, 경기 후 가슴에 부상을 입었다.[4]

1954년 FIFA 월드컵 예선에서 일본을 꺾고 본선에 진출한 대한민국 대표팀에 선발되었다. 그러나 한국 선수들은 항공권을 늦게 받아 첫 경기를 시작하기 10시간 전에 스위스에 도착했다.[5] 첫 경기에서 헝가리의 "매지컬 마자르"에게 0-9로 패했다. 당시 축구에는 교체 시스템이 없었기에 대한민국은 46시간 동안 비행기를 탄 후 최악의 컨디션에서 헝가리를 상대했고, 경기 중 선수 4명이 탈진하여 경기장을 떠나 7명의 선수만으로 경기를 마쳤다.[6] 김용식 대한민국 감독은 선수들의 체력 안배를 위해 두 번째 경기에서 7명의 선수를 교체했지만,[5][7][8] 터키에게 0-7로 패했다. 홍덕영은 두 경기에 모두 출전하여 총 16골을 허용하며 단일 월드컵에서 가장 많은 골을 내준 골키퍼가 되었다.[9]

1947년 4월, 서울 FC는 대한민국이 정식으로 창설되기 전 임시 국가대표팀으로 상하이로 떠나 상하이 아마추어 축구팀과 5번의 경기를 치렀으며, 홍덕영은 이 경기에 참여했다.[3]

'''대한민국'''

5. 경력

선수 생활을 접은 후 1957년부터 1967년까지 국제심판으로 활동하였고, 1959년부터 1962년까지 고려대학교, 1969년부터 1976년까지 서울은행의 감독을 맡았다.[16]

1970년부터 1971년까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역임했고, 1974년에는 국제축구연맹에서 주는 심판특별상을 받았다. 대한축구협회 이사를 거쳐 1985년부터 1986년까지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을 역임하였으며, 2002년 FIFA 월드컵 조직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했다.[16]

연도내용
1948년1948년 하계 올림픽 대표
1954년1954년 FIFA 월드컵 대표
1957년~1967년국제 심판
1959년~1962년고려대학교 감독
1969년~1976년서울은행 감독
1970년~1971년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2002년2002년 FIFA 월드컵 조직위원회 위원


6. 통계

wikitext

대회별 출장 및 득점 기록[10]
대회출장득점
친선 경기70
아시안 게임40
하계 올림픽20
FIFA 월드컵 예선20
FIFA 월드컵20
합계170


6. 1. 국가대표팀 기록

국가대표팀별 출장 및 득점 기록[10]
국가대표팀연도출장득점
대한민국194820
194920
195350
195480
통산170



대회별 출장 및 득점 기록
대회출장득점
친선 경기70
아시안 게임40
하계 올림픽20
FIFA 월드컵 예선20
FIFA 월드컵20
합계170


6. 2. 대회별 기록

대회별 출장 및 득점 기록[10]
대회출장득점
친선 경기70
아시안 게임 축구40
하계 올림픽 축구20
FIFA 월드컵 예선20
FIFA 월드컵20
합계170


참조

[1] 웹사이트 축구원로 홍덕영씨 https://news.naver.c[...] Seoul Shinmun 2005-09-14
[2] 웹사이트 Hong Deok-young https://www.olympedi[...] 2021-10-15
[3] 웹사이트 上海遠征蹴球 今十日空路壯途에 https://newslibrary.[...] The Dong-a Ilbo 1947-04-10
[4] 웹사이트 첫 올림픽·월드컵 수문장 홍덕영씨 http://nk.chosun.com[...] NK chosun 2005-08-30
[5] 웹사이트 200달러 들고 46시간 날아 헝가리에 9대0 참패 https://www.nocutnew[...] No Cut News 2006-06-23
[6] 웹사이트 반세기만에 한 푼 원로축구인 홍덕영옹 https://www.hankyung[...] The Korea Economic Daily 2002-06-05
[7] 웹사이트 Hungary 9-0 Korea Republic https://www.fifa.com[...] FIFA 2020-04-23
[8] 웹사이트 Turkey 7-0 Korea Republic https://www.fifa.com[...] FIFA 2020-04-23
[9] 웹사이트 Quirky Facts http://www.goalkeepe[...] Goalkeepers Are Different 2012-08-16
[10] 웹사이트 Hong Deok-young at Korea Football Association https://www.kfa.or.k[...] Korea Football Association 2021-12-01
[11] 웹사이트 스포一쓰 蹴球올림픽代表 監督等十七名選拔 https://newslibrary.[...] Kyunghyang Shinmun 1952-04-06
[12] 웹사이트 대통령배전국축구대회 http://kfa.or.kr/rec[...] KFA 2020-05-23
[13] 뉴스 Asian Games 1954 https://www.rsssf.or[...] 2014-10-02
[14] 웹사이트 '축구 명예의 전당'에서 한국 축구의 전통 세워나간다. https://www.kfa.or.k[...] KFA 2006-11-23
[15] 뉴스 축구원로 홍덕영씨 부고 https://news.naver.c[...] 서울신문 2005-09-14
[16] 뉴스 축구 명예의 전당에 홍덕영, 차범근 등 7명 헌액 https://news.naver.c[...] 2005-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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