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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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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홍세화는 1947년 서울에서 태어나 2024년 사망한 대한민국의 사회운동가, 저술가, 정치인이다.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가 프랑스로 망명하여 택시 운전사 등으로 활동했다. 귀국 후에는 언론 기고와 정치 활동을 병행했으며, 진보신당 대표를 역임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등이 있다. 그는 진보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독자적인 견해를 피력했으며, 반일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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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2012년 통합 당원 대회에서의 홍세화
2012년 홍세화
로마자 표기Hong Sehwa
한글 표기홍세화
한자 표기洪世和
출생일1947년 12월 10일
출생지미군정 조선 서울특별시
사망일2024년 4월 18일
국적대한민국
학력서울대학교 (1966–1967, 1969–1977)
웹사이트홍세화의 아름다운 나라
경력
주요 작품한국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0년–)
아웃사이더 (2000년–2005년)
조직기본 소득을 위한 집단 행동 준비위원회 (2014년–)
수상민주 시민 언론상 (2002년)
정당 활동
정당노동당 (2013년–)
진보신당 (2008년–2013년)
민주노동당 (2002년–2008년)
진보신당대표 (2011년–2012년)
공동대표 (2012년)
이전 대표조승수
다음 대표김일웅

2. 생애

1947년 12월 10일 서울특별자유시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재일 조선인 아나키스트였으며 해방 이후 귀국해서 가족을 꾸렸다. "세화"라는 이름은 "세계평화"라는 뜻이다.[6] 충청남도 아산군 염치면에서 유년기를 보냈으며, 3살 때인 1950년 9월 황골 새지기 학살사건을 겪었다.[7]

이후 창경국민학교, 경기중학교,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에 진학했다.

연도내용
1966년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금속공학과 입학
1967년 10월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중퇴
1969년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 외교학과 입학
1972년민주수호선언문 사건으로 제적되었다가 복학
1977년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졸업



1977년 '민주투위' 조직과 '남민전' 조직에 가담했고, 이후 무역 회사에 입사, 1979년 3월 무역회사 해외지사 근무차 유럽으로 건너갔다. 남민전 사건에 연루되어 프랑스 체류 중 망명했다.

1982년 이후 프랑스에서 관광안내, 택시운전 등 여러 직업에 종사하며 망명 생활을 했다. 1995년 자서전적 고백인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를 발간하고, 1997년르 몽드》에 실린 기사 모음인 〈진보는 죽은 사상인가〉를 번역하여 출간했으며, 1999년 문화비평 에세이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를 펴냈다.

2000년 단행본 《아웃사이더를 위하여》, 격월간 《아웃사이더》지의 발간에 참여했다. 2002년 대한민국으로 영구 귀국하여 《아웃사이더》 편집위원을 맡았고, 같은 해 1월 한겨레신문의 기획위원으로 선임되어 언론, 강연 등 여러 활동을 했다.

2010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대한민국판 편집장이 되었고, 같은 해 민주노총과 한신대학교에서 기획한 노동자 대학에서 강의를 맡았다. 진보신당 당원으로 활동하다가 2011년 11월 진보신당 대표로 선출되었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진보신당 비례대표 후보 2번으로 출마했으나 득표율 1.13%를 기록하며 낙선했다.

2013년 계간지 <말과활>을 창간했다. 2015년부터는 벌금형을 선고받고 돈을 내지 못해 옥살이해야 하는 사람들을 구제하는 비영리 사회단체인 장발장 은행의 은행장으로 재직했다.[9]

2022년, 녹색당에 입당하여 녹색당과 노동당의 이중 당적을 가졌다.

홍세화는 극우 반북 국가주의 성향의 보수주의자들과 반일 민족주의 성향의 자유주의자들이 모두 반사회주의적인 보수주의자들이라고 평가했으며, 진정한 진보주의자 또는 좌파는 대한민국 정치에서 정권을 잡은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2]

그는 대한민국 자유주의자들의 반일 민족주의를 비판했다. 그는 자유주의자들이 겉으로는 반제국주의적인 급진적인 수사를 사용하지만, 역설적으로 대한민국 사회주의 운동의 성장을 억제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일본 보수적 민족주의자들과 대한민국 자유주의적 민족주의자들 모두 노동 계급을 대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3]

또한 자유주의자들이 "일본 제국주의"라는 용어를 다소 과장하고 있으며, 반일 민족주의적인 이유로 재벌과 타협한다고 보았다. 대한민국 (주로 더불어민주당) 자유주의자들이 미국 제국주의를 비판하지 않는다는 점도 비판했다. 대한민국 사회주의자들은 미국 제국주의를 비판하며,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 민족주의를 조장한다고 주장한다.[3]

2023년 2월부터 전립선암으로 투병해 오다가 2024년 4월 18일 사망했다. 한겨레 재직 이력으로, 장례는 한겨레 사우장으로 진행된다.[9] 향년 77세.[5]

2. 1.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

1947년 12월 10일 서울특별자유시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재일 조선인 아나키스트였으며 해방 이후 귀국해서 가족을 꾸렸다. 이름 "세화"는 "세계평화"라는 뜻으로 붙여준 것이다.[6] 홍세화는 충청남도 아산군 염치면에서 유년기를 보내다가, 3살 때였던 1950년 9월 황골 새지기 학살사건을 겪었다.[7]

이후 창경국민학교, 경기중학교,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6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금속공학과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1967년 10월 자퇴하였다. 그 뒤, 재수하여 1969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외교학과에 입학하였고, 문리대에서 연극반 활동을 하였다. 1972년 '민주수호선언문' 사건으로 제적되었다가 복학하였으며, 1977년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8] 외교학과를 졸업했다.

1977년부터 '민주투위' 조직과, '남민전' 조직에 가담하였고, 이후 무역 회사에 입사, 1979년 3월 무역회사 해외지사 근무차 유럽으로 건너갔다.

연도내용
1966년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금속공학과 입학
1967년 10월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중퇴
1969년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 외교학과 입학
1972년민주수호선언문으로 제적. 이후 복학.
1977년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졸업


2. 2. 민주화 운동과 망명

1967년 10월 서울대학교를 자퇴하였다. 그 후, 재수하여 1969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외교학과에 입학하였고, 이후 문리대에서 연극반 활동을 하였다. 1972년 '민주수호선언문' 사건으로 제적되었다가 복학하였으며, 1977년에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8] 외교학과를 졸업했다.

1977년부터 '민주투위' 조직과, '남민전' 조직에 가담하였고, 이후 무역 회사에 입사, 1979년 3월 무역회사 해외지사 근무차 유럽으로 건너갔다.

남민전 사건에 연루되어 프랑스 체류 중 망명하였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에 따르면 프랑스 정부로부터 사상의 자유 침해에 따른 망명자로 인정받았고, 1982년 이후 관광안내, 택시운전 등 여러 직업에 종사하는 망명 생활을 하며 집필, 기고활동에 종사하였다. 1995년 자서적 고백인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를 발간하고, 1997년 《르 몽드》에 실린 기사 묶음인 〈진보는 죽은 사상인가〉를 번역하여 출간했으며, 1999년 문화비평 에세이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를 펴냈다.

2. 3. 저술 활동과 귀국

2000년 단행본 《아웃사이더를 위하여》, 격월간 《아웃사이더》지의 발간에 참여하였다.

2002년에 대한민국으로 영구 귀국하여 《아웃사이더》 편집위원으로 선임되었고, 같은 해 1월 한겨레신문의 기획위원에 선임되었으며 이후 언론, 강연 등의 활동을 했다.

2010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대한민국판 편집장이 되었고, 같은 해 민주노총과 한신대학교에서 기획한 노동자 대학에서 강의를 맡기도 했다. 진보신당의 당원으로 활동하다가 2011년 11월엔 <진보신당>의 당 대표로 선출되어 활동하기도 했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진보신당 비례대표 후보 2번(1번 김순자, 2번 홍세화, 3번 이명희, 4번 정진우, 5번 장혜옥, 6번 티코노프 블라디미르(박노자), 7번 박은지)으로 출마하기도 하였으나 득표율 1.13%를 기록하면서 낙선했다.

2013년 계간지 <말과활>을 창간했다. 이후 2015년 벌금형을 선고받고 돈을 내지 못해 옥살이해야 하는 사람들을 구제하는 비영리 사회단체 '장발장 은행'의 은행장으로 재직했다.[9]

2. 4. 정치 활동과 사회 운동

2000년 단행본 《아웃사이더를 위하여》, 격월간 《아웃사이더》지의 발간에 참여하였다.

2002년에 대한민국으로 영구 귀국하여 《아웃사이더》 편집위원으로 선임되었고, 같은 해 1월 한겨레신문의 기획위원에 선임되었으며 이후 언론, 강연 등의 활동을 했다.

2010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대한민국판 편집장이 되었고, 같은 해 민주노총과 한신대학교에서 기획한 노동자 대학에서 강의를 맡기도 했다. 진보신당의 당원으로 활동하다가 2011년 11월 <진보신당>의 당 대표로 선출되어 활동하기도 했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진보신당 비례대표 후보 2번(1번 김순자, 2번 홍세화, 3번 이명희, 4번 정진우, 5번 장혜옥, 6번 티코노프 블라디미르(박노자), 7번 박은지)으로 출마하였으나 득표율 1.13%를 기록하면서 낙선했다.

2013년 계간지 <말과활>을 창간했다. 이후 2015년 벌금형을 선고받고 돈을 내지 못해 옥살이해야 하는 사람들을 구제하는 비영리 사회단체 '장발장 은행'의 은행장으로 재직했다.

2022년, 녹색당에 입당하여 녹색당과 노동당의 이중 당적을 가졌다.

홍세화는 극우 반북 국가주의 성향의 보수주의자들과 반일 민족주의 성향의 자유주의자들이 모두 반사회주의적인 보수주의자들이라고 평가했으며, 진정한 진보주의자 또는 좌파는 대한민국 정치에서 정권을 잡은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2]

홍세화는 대한민국 자유주의자들의 반일 민족주의를 비판했다. 그는 자유주의자들이 겉으로는 반제국주의적인 급진적인 수사를 사용하지만, 역설적으로 대한민국 사회주의 운동의 성장을 억제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일본 보수적 민족주의자들과 대한민국 자유주의적 민족주의자들 모두 노동 계급을 대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3]

그는 자유주의자들이 "일본 제국주의"라는 용어를 다소 과장하고 있으며, 반일 민족주의적인 이유로 재벌과 타협한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대한민국 (주로 더불어민주당) 자유주의자들이 미국 제국주의를 비판하지 않는다는 점을 비판적으로 보았다. 대한민국 사회주의자들은 미국 제국주의를 비판하며,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 민족주의를 조장한다고 주장한다.[3]

2. 5. 말년과 사망

2013년 계간지 《말과활》을 창간하였다. 이후 2015년 벌금형을 선고받고 돈을 내지 못해 옥살이해야 하는 사람들을 구제하는 비영리 사회단체인 장발장 은행의 은행장으로 재직했다.

2023년 2월부터 전립선암으로 투병해 오다가 2024년 4월 18일 사망했다. 한겨레 재직 이력으로, 장례는 한겨레 사우장으로 진행된다.[9] 향년 77세.[5]

3. 정치적 견해

홍세화는 극우 반북 국가주의 성향의 보수주의자들과 반일 민족주의 성향의 자유주의자들이 모두 반사회주의적인 보수주의자들이라고 평가했으며, 진정한 진보주의자 또는 좌파는 대한민국 정치에서 정권을 잡은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2]

홍세화는 대한민국 자유주의자들의 반일 민족주의를 비판했다. 그는 자유주의자들이 겉으로는 반제국주의적인 급진적인 수사를 사용하지만, 역설적으로 대한민국 사회주의 운동의 성장을 억제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일본 보수적 민족주의자들과 대한민국 자유주의적 민족주의자들 모두 노동 계급을 대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3]

그는 자유주의자들이 "일본 제국주의"라는 용어를 다소 과장하고 있으며, 반일 민족주의적인 이유로 재벌과 타협한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대한민국 (주로 더불어민주당) 자유주의자들이 미국 제국주의를 비판하지 않는다는 점을 비판적으로 보았다. 대한민국 사회주의자들은 미국 제국주의를 비판하며,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 민족주의를 조장한다고 주장한다. 21세기 기준으로 대한민국의 (''주체 사상''이 아닌) 사회주의자들은 반제국주의를 지지하지만, "저항적인 [반일] 한국 민족주의"는 지지하지 않는다. 따라서 대한민국 사회주의자들은 일본 제국주의는 1945년 이후 소멸되었다고 보고 있으며, 21세기에 우익 일본 민족주의자들이 일본국 헌법 제9조를 개정하고 군사력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은 일본 제국주의가 아니라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 제국주의 프로젝트의 일부라고 본다. 반면 한국 민족주의를 지지하는 대한민국 자유주의자들은 1945년 이후 일본도 "일본 제국주의"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대한민국 (주로 더불어민주당) 자유주의자들은 미국이 한국을 일본 식민 지배로부터 해방시키고 대한민국을 공산주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했다고 믿기 때문에 미국 제국주의를 비판하지 않는다.[3]

4. 저서 및 역서

コリアン・ドライバーはパリで眠らない|코리안 도라이바-와 파리데 네무라나이일본어 (미스즈쇼보, 1995년)

セ-ヌは左右を分け、漢江は南北を分ける|센느와 사유-오 와케, 한코-와 남보쿠오 와케루일본어 (미스즈쇼보, 2002년)

4. 1. 저서

4. 2. 공저


  • 《거꾸로 생각해봐! 세상이 많이 달라보일걸프랑스어
  • 《왜 80이 20에게 지배당하는가?: 작은책 스타가 바라본 세상한국어
  • 《21세기 첫 십년의 한국: 우리시대 희망을 찾는 7인의 발언록한국어
  • 《진보가 보수에게: 민주노동당의 희망과 약속한국어

4. 3. 역서


  • 《세계는 상품이 아니다》 (조제 보베, 프랑수아 뒤푸르 지음)
  • 《인종차별, 야만의 색깔들》 (타하르 벤 젤룬 지음)
  • 《보거를 찾아 떠난 7일간의 특별한 여행》 (질베르 시누에 지음)
  • 《진보는 죽은 사상인가》 (막스 갈로 지음)
  • 《민주주의의 무기, 똘레랑스》 (필리프 사시에 지음)

5. 학력

6. 수상 경력


  • 2002년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민주시민언론상

7. 가족 관계

관계이름
아버지홍승관
부인박만선
홍수현
아들홍용빈


참조

[1] 웹사이트 제 4회 민주시민언론상 수상자 발표 및 시상 안내 http://www.ccdm.or.k[...] 2002-12-20
[2] 뉴스 홍세화 "민주화 외친 586, 돈벌이 어려움 모르는 민주건달" https://www.mk.co.kr[...] 2020-12-19
[3] 웹사이트 [홍세화 칼럼] 관제 민족주의의 함정 https://www.hani.co.[...] 2019-08-08
[4] 웹사이트 '똘레랑스' 일깨운 홍세화 별세…마지막 당부 '성장에서 성숙으로' https://www.hani.co.[...]
[5] 웹사이트 ‘똘레랑스’ 일깨운 홍세화 별세…마지막 당부 ‘성장에서 성숙으로’ https://www.hani.co.[...] 2024-04-18
[6] 뉴스인용 [홍세화 칼럼] 내 아버지는 아나키스트였다 https://www.hani.co.[...] 한겨레 2020-09-17
[7] 뉴스인용 ‘빠리의 택시운전사’는 ‘새지기의 생존자’였다 [본헌터㉛] https://www.hani.co.[...] 한겨레 2024-01-07
[8] 기타
[9] 뉴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홍세화 별세…향년 77세 https://n.news.naver[...]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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