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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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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환이는 서진과 동진 시대를 거치며 활약한 인물로, 관직을 역임하며 명성을 얻었다. 특히 왕돈의 난과 소준의 난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소준의 난 당시 항복을 거부하고 항전하다가 전사했으며, 사후 정위로 추증되고 간(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후 태상으로 재추증되었으며, 아들 환온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행동했다.

2. 생애

환이는 서진동진에서 벼슬을 지냈다. 산기상시(散騎常侍), 선성내사(宣城內史)를 역임했으며, 왕돈의 난을 진압한 공로로 만녕남(萬寧男)에 봉해졌다.[1]

소준의 난 때 항복을 거부하고 전사했으며, 난이 진압된 후 정위(廷尉)로 추증되었고, 시호는 간(簡)으로 정해졌다. 이후 동진 간문제가 태상(太常)으로 재추증하였다.[1]

아들 환온은 간문제 시기 권신이 되었고, 환온의 아들 환현동진 안제에게 선양받아 환초를 건국하였다.[1]

2. 1. 서진 시기

서진 시기 환이의 행적은 다음과 같다.

  • 영강 2년(301년) 3월, 제왕 사마경의 거병에 참여하여 기도위에 임명되었다.[1]
  • 안동장군 사마예로부터 준주 현령에 임명되었다.[1]
  • 영가 5년(311년) 12월, 강남으로 건너가 승상 사마예를 섬겼다.[1]
  • 승상 중병속·중서랑·상서리부랑을 역임하며 조정 내에서 명성을 높였다.[1]
  • 하북에서 온교가 오자, 왕도, 주의, 사곤, 유량 등과 함께 친교를 맺었다.[1]
  • 대장군 왕돈이 권력을 잡자, 병을 칭하며 관직을 사임했다.[1]
  • 황제 사마소로부터 산기상시로 임명되었으며, 왕돈 토벌의 밀모에 참여했다. 왕돈의 난 평정 후, 만년현남에 봉해졌다.[1]
  • 단양 윤 온교의 추천을 받아, 사마소는 직접 조칙을 내려 선성 내사로 임명했다. 환이는 선성을 다스리는 직책을 감당할 수 없다고 상소했지만, 잠시 후 선성 내사 취임을 승낙했다. 군 내에 선정을 펼쳐 백성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갔다.[1]
  • 함화 2년(327년) 12월, 챔피언 장군 소준이 조정에 반란을 일으켰다. 환이는 군사를 이끌고 건강으로 가려 했다. 장사 비혜는 선성군의 군사가 적고 백성들이 동요하기 쉬우므로, 대비를 풀고 반란이 끝나기를 기다릴 것을 권했다.[1]
  • 환이는 낯빛을 바꾸며 " '군주에게 무례를 범하는 자는, 비록 상대가 강한 매나 솔개이고 자신이 약한 새라도, 이를 쫓아내야 한다'고 한다. 지금 사직에 위기가 닥쳤는데, 의를 잃고 편안히 즐길 수 있겠는가"라고 분노했다.[1]
  • 장군 주착을 보내 무호에서 소준군을 격파했다. 환이는 무호로 진격하여 주둔했다. 소준군 장수 한황은 환이를 격파하고 선성을 공격했다. 환이는 광덕으로 물러났다. 한황은 주변 여러 현을 약탈하고 돌아갔다.[1]
  • 함화 3년 (328년) 5월, 건강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며 경현으로 진격하여 주둔했다. 이때 주군의 많은 수가 소준에게 항복했다. 비혜는 소준에게 사자를 보내 우호를 맺어 재앙을 피하도록 설득했다. 환이는 "나는 나라로부터 두터운 은혜를 받았으니, 의를 위해 죽을 것이다. 치욕을 참으며 역신과 통할 수는 없다! 비록 뜻대로 되지 않더라도, 나의 생각은 변함없다"라고 거절했다.[1]
  • 환이는 장군 유종에게 난석을 지키게 했다. 소준은 한황에게 공격하게 했다. 유종은 패배하여 힘겨운 싸움 끝에 죽임을 당했다.[1]
  • 한황은 선성을 공격했다. 원군은 없었고, 한황군은 "환이가 항복하면 예우로 우대하겠다"라고 항복을 권했다. 장병들은 거짓 항복을 하고 후일을 도모하라고 권했다. 환이는 따르지 않고 항전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1]
  • 6월, 선성이 함락되었고, 환이는 한황에게 죽임을 당했다. 향년 53세였다.[1]

2. 2. 동진 건국과 초기 활동

영강 2년(301년) 3월, 환이는 제왕 사마경의 거병에 참여하여 기도위에 임명되었다.[1]

안동장군 사마예로부터 준주 현령에 임명되었다.[1]

영가 5년(311년) 12월, 강남으로 건너가 승상 사마예를 섬겼다.[1] 승상 중병속·중서랑·상서리부랑을 역임하며 조정 내에서 명성을 높였다.[1]

하북에서 온교가 오자, 왕도, 주의, 사곤, 유량 등과 함께 친교를 맺었다.[1]

대장군 왕돈이 권력을 잡자, 환이는 병을 칭하며 관직을 사임했다.[1] 사마소로부터 산기상시로 임명되었으며, 왕돈 토벌의 밀모에 참여했다. 왕돈의 난 평정 후, 만년현남에 봉해졌다.[1]

단양 윤 온교의 추천을 받아, 사마소는 직접 조칙을 내려 선성 내사로 임명했다. 환이는 선성을 다스리는 직책을 감당할 수 없다고 상소했지만, 잠시 후 선성 내사 취임을 승낙했다. 군 내에 선정을 펼쳐 백성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갔다.[1]

2. 3. 선성내사 부임과 소준의 난

왕돈이 권력을 잡자 환이는 병을 핑계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동진 명제는 환이를 산기상시(散騎常侍)로 임명하고 왕돈 토벌을 은밀히 모의하도록 했다. 왕돈의 난이 평정된 후, 환이는 만년현남(萬寧縣男)에 봉해졌다.[1]

함화 2년(327년) 12월, 챔피언 장군 소준이 조정에 반란을 일으켰다. 환이는 군사를 이끌고 건강으로 가려 했다. 장사 비혜는 선성군의 군사가 적고 백성들이 동요하기 쉬우므로, 대비를 풀고 반란이 끝나기를 기다릴 것을 권했다.[1]

환이는 " '군주에게 무례를 범하는 자는, 비록 상대가 강한 매나 솔개이고 자신이 약한 새라도, 이를 쫓아내야 한다'고 한다. 지금 사직에 위기가 닥쳤는데, 의를 잃고 편안히 즐길 수 있겠는가"라고 하며 낯빛을 바꾸며 분노했다.[1]

장군 주착을 보내 무호에서 소준군을 격파했다. 환이는 무호로 진격하여 주둔했다. 소준군 장수 한황은 환이를 격파하고 선성을 공격했다. 환이는 광덕으로 물러났다. 한황은 주변 여러 현을 약탈하고 돌아갔다.[1]

함화 3년 (328년) 5월, 환이는 건강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며 경현으로 진격하여 주둔했다. 이때 주군의 많은 수가 소준에게 항복했다. 비혜는 소준에게 사자를 보내 우호를 맺어 재앙을 피하도록 설득했다. 환이는 "나는 나라로부터 두터운 은혜를 받았으니, 의를 위해 죽을 것이다. 치욕을 참으며 역신과 통할 수는 없다! 비록 뜻대로 되지 않더라도, 나의 생각은 변함없다"라고 거절했다. 환이는 장군 유종에게 난석을 지키게 했다. 소준은 한황에게 공격하게 했다. 유종은 패배하여 힘겨운 싸움 끝에 죽임을 당했다.[1]

한황은 선성을 공격했다. 원군은 없었고, 한황군은 "환이가 항복하면 예우로 우대하겠다"라고 항복을 권했다. 장병들은 거짓 항복을 하고 후일을 도모하라고 권했다. 환이는 따르지 않고 항전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1]

6월, 선성이 함락되었고, 환이는 한황에게 죽임을 당했다. 향년 53세였다.[1]

2. 4. 최후

소준이 반란을 일으키자, 환이는 군사를 이끌고 건강으로 가려 했다. 그러나 장사 비혜는 선성군의 군사가 적고 백성들이 동요하기 쉬우므로, 대비를 풀고 반란이 끝나기를 기다릴 것을 권했다. 환이는 "군주에게 무례를 범하는 자는, 비록 상대가 강한 매나 솔개이고 자신이 약한 새라도, 이를 쫓아내야 한다"며 분노하며 이를 거부했다.

환이는 장군 주착을 보내 무호에서 소준군을 격파하고 무호에 주둔했다. 그러나 소준군 장수 한황이 환이를 격파하고 선성을 공격하자, 환이는 광덕으로 물러났다. 이후 건강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며 경현으로 진격하여 주둔했다.

이때 주군의 많은 수가 소준에게 항복했고, 비혜는 소준에게 사자를 보내 우호를 맺자고 설득했다. 그러나 환이는 "나는 나라로부터 두터운 은혜를 받았으니, 의를 위해 죽을 것이다."라며 거절했다. 환이는 장군 유종에게 난석을 지키게 했으나, 유종은 패배하여 전사했다.

한황은 선성을 공격하며 항복을 권유했고, 장병들도 거짓 항복을 권했지만, 환이는 항전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결국 함화 3년 6월, 선성이 함락되었고, 환이는 한황에게 죽임을 당했다. 향년 53세였다.

2. 5. 사후

소준의 난이 진압된 후, 환이는 정위(廷尉)로 추증되었고, 시호는 간(簡)으로 정해졌다. 이후 동진 간문제는 환이를 태상(太常)으로 다시 추증하였다.

환이의 아들 환온은 간문제 시기 권신이 되었고, 환온이 죽은 후 환온의 아들 환현동진 안제에게 선양받아 환초를 건국하였다.

3. 인물 및 일화

어린 시절부터 고독하고 가난한 생활을 했다. 표주박 그릇으로 생활했지만, 평온하고 편안하게 지냈다.[1] 성격은 밝고 일찍부터 명성을 얻었다. 도덕적 질서와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 뛰어나, 어린 시절부터 재능이 뛰어났다.[1] 어릴 적부터 유량과 친교가 있었고, 아담하고 품위가 있었기에 주위에게 중용되었다. 주위는 "무륜의 험준하고 고결한 인품은, 무심코 웃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라고 탄식했다.[1]

강남으로 건너갔을 때, 환이는 사마예의 조정이 미약한 것을 보고, 주위에게 "나는 중원의 혼란을 피하여 안전을 구하려고 왔는데, 이렇게 약해서 어떻게 일을 이룰 수 있겠는가!"라며 근심과 두려움 때문에 즐거워하지 못했다. 왕도에게 찾아가 함께 세상사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후, 주위에게 "관이오(관중)를 보았다. 더 이상 근심할 것이 없다"라며 기뻐했다.[2]

황태자 사마소는 당시 명신으로 불린 환이, 왕도, 유량, 온교, 완방 등과 친하게 지냈다. 과거 성인의 진위에 대해 사마소의 의견에 환이 등은 답할 수 없었다.[3]

점술가 곽박과 친교를 맺었다. 환이는 늘 곽박의 아내가 있는 동안에 찾아왔다. 곽박은 아내에게 "그대가 다른 곳에서 오시면, 좁은 길 앞에서 맞이하도록 하시오. 다만, 변소에 들어가 있을 때는 모습을 살피면 안 됩니다. 반드시 손님이나 저에게 재앙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환이가 술에 취해 곽박의 집에 찾아와 변소에서 곽박과 만나버렸다. 곽박은 알몸으로 머리를 휘날리며 칼을 입에 물고 제단을 설치했다. 곽박은 환이를 보고 마음을 진정시키며 크게 놀라 "당신과 나는 친구이지만, 지금 와서는 안 되었소. 조금만 늦었더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텐데! 재앙은 나뿐만 아니라 당신도 면하지 못할 것이오. 이것은 하늘이 한 일이며, 누구에게 죄가 있겠소"라고 말했다. 곽박은 왕돈의 난으로, 환이는 소준의 난으로 모두 살해되었다.[4]

환이가 패배한 것은 경현 현령 강파가 한광에게 내통했기 때문이며, 아들 환온은 복수를 위해 강파를 노렸다. 그러나 강파는 죽어 있었고, 환온강파의 세 아들을 살해하여 복수를 했다.[5]

4. 가계

환온의 아버지로, 생전 산기상시(散騎常侍), 선성내사(宣城內史)를 역임했으며, 왕돈의 난을 진압한 공로로 만녕남(萬寧男)에 봉해졌다.[1] 이후 소준의 난 당시 항복을 거부하고 전사하였으며 소준의 난이 진압된 이후 정위(廷尉)로 추증되었고, 시호는 간(簡)으로 정해졌다.[1] 이후 동진 간문제가 태상(太常)으로 재추증하였다.[1]

환이 가계
이름비고
환온장남, 자는 원자
환운차남, 자는 운자
환활삼남, 자는 랑자
환비사남, 자는 목자
환충오남, 자는 유자


참조

[1] 서적 晋書 巻74 桓彝
[2] 서적 晋書 巻65 王導
[3] 서적 晋書 巻6 明帝
[4] 서적 晋書 巻72 郭璞
[5] 서적 晋書 巻98 桓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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