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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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환온은 312년에 태어나 동진의 군인이자 정치가였다. 그는 소준의 난 때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강보의 아들들을 죽이고 명성을 얻었으며, 남강공주와 결혼하여 황제의 사위가 되었다. 군사적 재능을 발휘하여 성한을 정벌하고 북벌을 여러 차례 감행했으나, 전연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권력을 장악하여 황제를 폐위하고 간문제를 옹립하는 등 전횡을 일삼았다. 간문제 사후 섭정이 되려 했으나 실패하고, 373년에 사망했다. 그의 아들 환현은 환초를 건국하고 환온을 선무황제로 추존했다. 환온은 뛰어난 군사적 능력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권력 남용으로 부정적인 평가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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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온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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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출생 | 312년 |
사망 | 373년 8월 18일 (61세) |
배우자 | 사마흥남, 남강공주 |
자녀 | 환현 |
아버지 | 환이 |
존호 | 선무공(宣武公), 선무제(宣武帝) |
시호 | 선무제(宣武帝) |
묘호 | 태조(太祖) |
2. 생애
환온은 312년에 태어났다. 아버지 환이(桓彝)는 군 태수였다. 어렸을 때 온교(溫嶠)가 어린 환온을 보고 특별하다고 칭찬하자, 환이는 아들의 이름을 온교의 성을 따라 '환온'이라 지었다.[3]
328년 소준(蘇峻)의 난 때 환이는 한황(晉)(韓晃)에게 살해당했다.[4] 329년, 환온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강보의 아들들을 죽여 명성을 얻었다.[5] 그는 유능하다고 여겨졌고, 황실을 위해 죽은 아버지 덕분에 성제의 누이동생 남강공주(南康公主) 사마흥남(司馬興男)과 혼인하고, 아버지의 작위 "만녕자(萬寧子)"를 물려받았다. 이후 서주(徐州) 자사가 되었다. 성제의 삼촌 유익(庾翼)은 환온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더 큰 책임을 맡기도록 추천했다. 345년 유익이 사망한 후, 재상 하충(晉)(何充)은 환온을 서부 지방의 군사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2. 1. 초기 생애와 배경
환온은 312년 초국(譙國) 용항(龍亢) 출신으로, 그의 가문은 화북 지방에서 남하한 명문 귀족이었다. 아버지 환이(桓彝)는 명제 때 왕돈의 난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나, 소준의 난 때 전사하였다.[34] 어렸을 때(1세 미만), 온교(溫嶠)가 환온을 보고 특별한 아이라고 칭찬하자, 아버지 환이는 아들의 이름을 온교의 성을 따라 '환온'이라 지었다.[3]328년, 소준의 난 때 아버지 환이가 소준의 장수 한황(晉)(韓晃)에게 살해당했다.[4] 환이는 강보(江播)의 도움을 받은 한황에게 죽임을 당했는데, 329년 강보가 사망하자, 환온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강보의 아들들을 죽여 명성을 얻었다.[5] 331년, 강보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강표 등 형제 3명은 환온의 복수를 두려워하여 칼을 숨기고 대비했으나, 환온은 조문객으로 위장하여 접근해 강표를 죽이고, 그의 동생 2명도 죽였다. 이 복수는 당시 사람들에게 칭송받았다.[34]
환온은 아버지의 공로와 황실과의 관계로 인해 성제의 누이동생인 남강공주(南康公主) 사마흥남(司馬興男)과 혼인하고, 아버지의 작위인 "만녕자(萬寧子)"를 물려받았다.[5] 이후 관직에 나아가 343년에 낭야태수(琅邪太守), 서주자사(徐州刺史)가 되었다.[34] 유익(庾翼)은 환온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더 큰 책임을 맡기도록 추천하기도 했다.[5]
환온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환이 | 초국 용항의 환씨는 위 시대에 형가(죄인의 가계)가 되었고, 서진 시대에는 고문 명족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한다. 환이는 강남으로 건너가 명사들과 교류하며 강좌팔달(강동의 명사 8인)에 꼽히게 되었다. 후에 선성내사가 되었고, 명제 아래에서 왕돈의 난 진압에 공을 세워 가문을 크게 일으켰지만, 소준의 난에서 전사했다. |
어머니 | 공헌 | 임하태부인으로 추증되었다. |
정실 | 사마흥남 | 명제의 장녀. 남강공주에 봉해졌다. |
첩 | 이씨 | 이세의 딸[32]. 환온이 성한을 평정했을 때 첩으로 삼았다. |
첩 | 마씨 | 환현의 생모이다. 후에 환현에 의해 예장공태부인으로 추증되었다. |
2. 2. 군사적 경력과 북벌
345년, 유익(庾翼)이 죽자 환온은 그의 후임으로 안서장군 겸 형주자사(荊州刺史)에 기용되어 무창(武昌)을 수비했다. 강대한 군사력을 거머쥔 실력자로 성장한 환온은 347년에 성한국(成漢國)[36]을 멸망시키는 개가를 올렸다. 이때의 공훈으로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으로 승차했다.[34]성한의 군주 이세는 주색에 빠져 무도한 인물이었고, 그 국력은 날마다 쇠퇴하고 있었다. 346년 10월경, 환온은 성한을 멸망시키고 훈공을 세우려고 서벌을 감행했다. 여러 장수들은 실패할 것이라고 반대했지만, 강하상 원교만이 환온의 의견에 찬동했다.[10] 11월, 환온은 성한 정벌 작전을 결행했다. 조정의 백관들은 촉의 땅이 험하고 멀리 있으며, 또한 환온의 병력이 적은 것을 우려하여 서신을 보내 깊이 들어가지 않도록 간했지만, 환온은 이를 무시했다.
347년 정월, 성한 영내로 진군한 환온은 원교의 진언에 따라 3일 분의 식량만을 챙겨 보병을 이끌고 곧장 수도인 성도로 진격했다. 환온은 성한의 이복·이권 등의 군을 격파하고, 성도 성 밖 10리까지 진격했다. 이세는 전군을 동원하여 환온 군을 맞아 싸웠고, 착교에서 결전을 벌였다. 동진군의 선봉은 열세가 되어 참군 공호가 전사했고, 성한군의 공세는 환온의 말 앞까지 화살이 닿을 정도였다. 여러 장수들은 크게 두려워하여 철수하려고 생각했지만, 고리(군의 북 담당)는 실수로 전진의 신호를 쳐버렸다. 하지만, 원교는 오히려 이것을 이용하여, 칼을 뽑아 군사들을 크게 고무시키자, 분전하여 적군을 격파했다. 이로 인해 이세군은 크게 궤주했으므로, 환온은 승기를 타고 진격하여, 마침내 성도를 함락시켰다. 이세는 항복을 결단하고, 환온에게 항복 문서를 보냈다. 환온은 경계를 풀고, 이세와 그 종실 10여 명을 건강으로 송환했다.
348년 8월, 조정에서 촉 평정의 공적이 논의되자, 환온은 임하군공에 봉해졌다.
351년 12월에는 북벌군을 독자적으로 결성, 무창에 집결만 시켰는데도, 그 위세에 놀란 염위국(冉魏國)[37]의 서주자사, 연주자사, 예주목, 북형주자사가 싸워보지도 않고 환온에게 차례차례 귀순했다.
환온은 후조(後趙)가 염민(冉閔) 때문에 혼란한 틈을 타 북벌을 결행했지만 354년 전진(前秦) 정복엔 실패했다. 다만 356년에 낙양(洛陽) 수복까진 성공했다. 환온은 동진의 원래 도읍인 낙양 천도를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39]
은호가 실각하자, 환온은 354년에 후조의 계승 국가 중 하나인 전진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시작했다. 그의 군대는 전진의 저항을 거의 격파하고 장안 근처까지 진격했지만, 환온은 장안에 대한 마지막 공격을 주저했다. 이때 환온은 그를 만나러 온 왕맹을 만났다. 환온은 왕맹의 지식과 전술에 감명을 받았고, 왕맹에게 진(Jin)에 충성을 옮기지 않는 이유를 물었다. 왕맹은 환온이 장안 동쪽에 있는 파수(灞水)를 건너는 것을 주저하는 것을 보고 백성들이 환온의 의도를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상황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환온은 식량이 고갈되기 시작했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왕맹에게 함께 철수하자고 제안했지만, 왕맹은 환온을 따를 만한 적합한 인물이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거절했다.
356년, 환온은 수도를 311년 한-조에게 함락되기 전까지 수도였던 뤄양으로 다시 옮길 것을 청원했지만, 황실 정부는 이를 거절하고 대신 환온에게 먼저 요양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환온은 군대를 뤄양으로 진격시켜 요양과 전투를 벌였고, 요상이 그를 함정에 빠뜨리려 한 것을 피하고 요상에게 큰 패배를 안겨 요상을 서쪽으로 도망가게 했다. 환온은 뤄양 지역을 동진을 위해 확보했다. 그는 362년에 수도를 뤄양으로 다시 옮기는 안을 재차 제안했지만, 황실 정부는 또다시 거절했다.
369년, 환온은 희초의 아버지 희음(郗愔), 그의 형제 환충, 원진과 함께 원정을 시작했지만, 곧 희음의 군대를 장악하여 자신의 지휘 아래 두었다. 희초가 전연의 수도 야성으로 직접 진격하라고 조언했음에도 불구하고, 환온은 서서히 진격하며 전연의 군대를 여러 번 격파했지만 황하에 도달하는 데 3개월이 걸렸고, 방두(枋頭, 현대의 허난 허베이시)에 멈춰 섰다. 그는 거기서 멀지 않은 야성을 공격하기 위해 황하를 건너는 것을 다시 망설였다.
모용수와 모용덕은 환온과 교전하여 소규모 피해를 입혔다. 한편, 진나라 군대의 식량 공급이 바닥나고 있었다. 환온은 철수를 시작했고, 모용수와 모용덕은 환온의 군대를 함정에 빠뜨려 거의 전멸시켰다. 곧 전연이 지원을 요청했던 전진의 군대가 도착했고, 환온은 또 다른 큰 패배를 겪었다. 환온은 그의 경력에서 가장 큰 패배에 굴욕을 느끼며 원진이 식량을 공급할 수 없다고 비난하여 책임을 돌리고 원진을 평민으로 강등하라고 명령했다. 원진은 복종하는 대신, 수춘(壽春, 현대의 안후이 루안시)을 점령하고 전연과 전진 모두에게 지원을 요청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환온의 군대가 크게 패배하면서, 원진은 수춘을 지킬 수 있었다. 그는 370년 봄에 사망했고, 그의 아들 원흠이 뒤를 이었다. 환온의 군대는 장군 주요와 환석천의 지휘 하에 원흠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전연 및 전진 군대를 격파했다. 370년 가을, 환온은 직접 수춘에 도착하여 포위했다. 그 해 말에 전연이 전진에 함락된 후, 수춘은 더욱 큰 어려움에 처했다. 371년 봄에 파견된 전진의 구원군은 환온에게 격파되었다. 이후 환온은 수춘을 점령하고 원진의 일족과 그의 지지자 주보의 일족을 학살했다.
2. 3. 권력 장악과 전횡
환온은 북벌의 공으로 대사마(大司馬) 겸 대도독중외제군사(都督中外諸軍事)에 올랐고, 364년에는 형주자사에서 양주자사(揚州刺史)로 전임되었다.[41] 369년에는 연주자사 겸 서주자사를 더해 장강(양쯔강) 하류의 모든 군세를 수중에 넣었다. 여기에 자신의 정예 군세인 서부군단을 합쳐 동진의 실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또한 친구이자 동진의 명문 귀족인 유담(劉淡)을 등용하여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였다.[44]환온은 동진의 국력을 강화하기 위해 토단(土斷) 정책을 실시했다. 동진은 화북 지방으로부터의 유민(流民)과 화중, 화남의 원주민이 섞여 건국되었는데, 유민의 증가로 호구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조세와 병역 부과에 어려움이 있었다. 이에 환온은 현재 거주지를 중심으로 호구 조사를 실시하는 토단을 통해 국력을 크게 확대할 수 있었다.
369년 북벌에서 전연(前燕) 모용(慕容) 황제에게 대패하여 실추된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371년 황제를 폐위하고 간문제(簡文帝)를 옹립하였다. 그러나 간문제는 이듬해 병사했고, 환온은 황제가 되려는 계략을 꾸몄다. 사안(謝安)과 왕담지(王坦之)는 이를 간파하고 환온에게 당시 황태자였던 효무제(孝武帝)의 섭정이 되어달라고 제안했다.
사안(謝安)은 환온에게 '대사마(大司馬)께서 제갈무후(諸葛武侯)가 되어 주십시오'라는 서간을 보냈다. 이는 유비(劉備)의 아들 유선(劉禪)의 섭정이었지만 황위를 뺏지 않았던 제갈량을 언급한 것이었다. 환온은 계속 계획을 진행시켜 조정에 '구석(九錫)의 예(禮)'[42]를 요구했으나, 사안(謝安)은 이를 지연시켰고 환온은 373년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이후 사안(謝安)이 상서복야(尙書僕射)[43]에 올라 정권을 장악했다.
2. 4. 만년과 죽음
373년, 환온은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였다.[42] 환온이 죽은 뒤 사안(謝安)이 상서복야(尙書僕射)에 올라 정권을 장악했다.[43]환온 사후, 아들인 환현이 공제에게 양위받아 환초를 건국하자 선무제(宣武帝)로 추존되었다. 본래 새 왕조를 개창한 건국군주는 3대조 이상을 추존해야 하는데 환현이 황고인 환온만을 추존하니 여러 신하가 예의에 의문을 제기하였고, 산기상시 서광이 칠묘를 세울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자 환현은 증조부 대(代) 이상은 별다른 명위(名位)가 없음을 이유로 배향하는 것을 거부했고 왕망이 구묘(九廟)나 배향한 전례를 비웃으며 환온을 태조(太祖)로 간주한 후, 일묘(一廟)만을 설치하여 2일만 제사를 지냈다.[44]
3. 평가와 논란
환온은 동진을 쥐락펴락했던 인물로,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후대에 다양한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환온은 오랫동안 진(晉)나라의 황위를 찬탈할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는 전연을 멸망시킨 후, 건강으로 돌아와 황실 정부에 구석을 하사받도록 강요하여 황위에 오르려 했다. 그는 점술가 두경(杜炅)에게 자신의 앞날을 점쳐보게 했는데, 두경은 "당신의 업적은 우주만큼 위대하며, 황실 신하 중 최고위직에 오를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환온은 이 대답에 불만족스러워했다.
371년 환온은 폐제를 폐위하고 회계왕 사마욱을 간문제로 옹립했다. 폐제가 흠잡을 데 없이 신중하게 행동했기에, 환온은 폐제가 무능하고 자녀를 낳을 수 없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또한 폐제의 총애를 받는 사람들이 사실은 그의 후궁 소생이라는 소문을 퍼뜨려 폐제와 그들 사이의 동성애 관계를 암시했다. 이후 수도로 가 추 태후를 협박하여 폐제 폐위 조서를 반포하게 했다.
372년 간문제가 병에 걸리자 환온을 수도로 소환하는 칙서를 네 번이나 내렸으나, 환온은 함정이라고 생각하여 거절했다. 간문제는 유언을 통해 환온에게 섭정을 맡기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스스로 제위에 오르라고 명시했다. 그러나 왕탄지(王坦之)는 간문제를 설득하여 유언을 수정, 환온이 제위를 찬탈할 경우 정당성을 약화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간문제가 사망하고 효무제가 즉위하자, 수도의 실권은 사안과 왕탄지에게 넘어갔다. 환온은 373년 수도를 방문하여 왕과 사를 처형하고 제위를 찬탈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소문대로 행동하지 않고 근거지인 고숙(姑孰, 현재의 마안산시 안후이성)으로 돌아갔다. 같은 해 가을, 환온은 병이 들어 동생 환충(桓沖)에게 모든 일을 맡기고 사망했다.
360년 임하군공에서 남군공으로 개봉되었고, 361년에는 동생 환활을 시켜 전연의 허창을 침공하여 모용진을 격파했다.
3. 1. 긍정적 평가
환온은 뛰어난 군사적 능력으로 성한을 멸망시키고, 일시적으로나마 낙양을 수복하여 동진의 국력을 크게 신장시켰다.[39] 특히, 346년 성한 정벌은 대부분의 장군들이 반대했음에도 불구, 과감한 결단력과 뛰어난 전략으로 성공을 이끌어냈다. 당시 성한의 황제 이세는 무능하고 백성들의 신뢰를 잃은 상태였고, 환온은 이를 간파하여 신속하게 공격을 감행했다. 그는 성도 근처에 도착하여 이세의 군대를 격파하고, 이세의 항복을 받아내 성한을 멸망시켰다.[10]354년에는 전진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여 장안 근처까지 진격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비록 식량 부족으로 인해 철수해야 했지만, 이 과정에서 왕맹과 같은 유능한 인재를 만나기도 했다.[40] 356년에는 요양(姚襄)의 군대를 격파하고 낙양을 수복하여, 서진(西晋)의 옛 도읍을 되찾는 쾌거를 이루었다.[39]
또한 환온은 '토단(土斷)' 정책을 실시하여 동진의 재정을 안정시키고 유민(流民) 문제를 해결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토단 정책은 유민들을 현재 거주지에 정착시켜 호구 조사를 실시하고, 조세와 병역 의무를 부과하는 정책이었다. 환온은 대사마 재직 시절 토단을 가장 적극적으로 실행하여 동진의 국력을 크게 확대시켰다.[14]
3. 2. 부정적 평가
환온은 지나친 권력욕으로 황실을 위협하고 황제를 폐위하는 등 전횡을 일삼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북벌 과정에서 무리한 군사 작전을 감행하여 많은 인명 피해를 초래했다.[10]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정적들을 숙청하고 반대파를 탄압했다.[16] 황제 즉위를 위해 간문제를 압박하고, 사후에는 자신의 아들 환현이 제위를 찬탈하는 계기를 제공했다.[44]환온은 354년 전진 정벌에 실패하고, 369년 전연의 모용수에게 대패하는 등 군사적 실패를 겪었다. 특히 369년 북벌에서는 황하에 도달하는 데 3개월이 걸리고, 방두(枋頭, 현대의 허난 허베이시)에 멈춰 서서 야성을 공격하기 위해 황하를 건너는 것을 망설이는 등 전략적 판단에서 미숙함을 보였다. 이로 인해 식량 공급에 차질이 생겨 철수해야 했고, 모용수와 모용덕에게 대패하여 많은 병력을 잃었다.[11]
371년에는 황제를 폐위하고 간문제를 옹립했지만, 사안과 왕담지(王坦之)의 계략으로 황제 즉위 계획이 좌절되었다. 사안은 환온에게 제갈무후(諸葛武侯)가 되어달라고 요청하며, 황위를 넘보지 말 것을 우회적으로 경고했다.[42] 그럼에도 환온은 '구석(九錫)의 예(禮)'[42]를 요구하며 황제 즉위에 대한 야심을 꺾지 않았다.
환온은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정적들을 숙청했다. 372년 무릉왕(武陵王) 사마희를 모반 혐의로 몰아 숙청하고, 명문가인 은씨(殷氏)와 우씨(庾氏) 가문의 많은 사람들을 살해했다.[16]
3. 3. 후대의 평가
동진에서 후진으로 투항한 위화는 요흥이 동진의 상황을 묻자 "형벌은 가혹하고, 풍속은 사치스럽습니다. 환온과 사안 이후, 아직 관대함과 엄격함의 균형을 보지 못했습니다."라며 환온과 사안의 집정 시대를 비교하며 현 상황을 비난했다.[20]4. 관련된 고사성어
- 죽마고우(竹馬故友): 환온이 은호를 실각시키면서 "은호와 나는 어릴 적에 죽마를 타고 놀았는데, 항상 내가 버린 죽마를 은호가 주워 탔다."라고 말한 데서 유래하였다.[45] 원래는 상하 관계를 의미하는 말이었으나, 지금은 사이가 좋은 어린 시절 친구라는 뜻으로 쓰인다. 여기서 죽마(竹馬)는 잘린 대나무나 빗자루를 가랑이 사이에 끼고 뛰어다니는 것을 말한다.[45]
- 단장(斷腸): 환온이 성한(成漢)을 정벌하러 촉(蜀)에 들어갈 때, 부하가 새끼 원숭이를 잡자 어미 원숭이가 백 리를 울며 따라오다 죽었는데, 배를 가르니 창자가 끊어져 있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하였다. 환온은 이 이야기를 듣고 크게 화를 내며 해당 병사를 파면하고 벌을 주었다.[46][47]
- 유방백세 유취만년(流芳百世 遺臭萬年): 아름다운 이름은 백 년을 가고, 더러운 오명은 만 년을 간다는 뜻으로, 진서(晋書) 환온전(桓温伝)의 구절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이 있다.
5. 기타
환온은 검소한 사람이었지만, 권력을 잡은 후에는 분수에 맞지 않는 야망을 품게 되었다고 한다. 자신의 용모와 풍모가 사마의나 유곤을 닮았다고 자부했다. 여러 일화와 기담이 전해지며, 문집을 남기기도 했다.
- 유담은 환온을 손권이나 사마의에 비견했다.[3]
- 328년 아버지 환이가 소준의 난 와중에 살해당하자, 331년에 복수를 위해 강표 형제를 죽였다. 이 일로 칭찬을 받았다.[4],[5]
- 촉을 공격하여 삼협에 들어갔을 때, 험준한 산세를 보고 "충신이 되려면 효자가 될 수는 없다. 어떻게 해야 할까"라고 탄식했다.[21]
- 제2차 북벌 때, 젊은 시절 심었던 버드나무가 무성하게 자란 것을 보고 인간의 덧없음을 탄식했다.
- 제2차 북벌 때, 평승루에 올라 중원을 바라보며 왕연 등의 책임을 탄식했다. 원굉이 반박하자, 유표의 큰 소에 비유하며 은근히 비판했다.
- 형주자사 시절, 백성들에게 혹독한 형벌을 가하는 것을 좋지 않게 여겼지만, 형벌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걱정했다.
- 왕순이 기자와 비간 중 누구를 긍정할지 묻자, 둘 다 관중과 같은 인의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 "미명을 후세에 전할 수는 없는데, 악명을 만세에 남길 수도 없다는 것인가!"라며 야망을 드러냈다. (『자치통감』, 『십팔사략』에는 "미명을 후세에 전할 수 없다면, 악명을 만세에 남겨야 한다"고 기록)
- 만년에 왕돈의 묘를 지나가며 "좋은 사람이다"라고 말하며 과거와 달라진 마음을 보였다.
- 사안과 왕탄지 중 누가 더 훌륭한지 묻는 질문에, 남의 말을 떠벌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가르쳐 줄 것이 없다고 답했다.[22]
- 도술을 사용하는 비구니가 목욕하는 것을 훔쳐보았는데, 비구니는 칼로 자신의 배를 가르고 다리를 자르는 모습을 보였다. 비구니는 환온이 천자가 되면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했다.
- 곽박의 예언에 환온과 관련된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 373년 고평릉을 배알했을 때, 간문제의 영혼을 만났다고 하며 "감히 그런 짓(찬탈)을 하지 않겠다"고 여러 번 말했다. 이후 은연(은호의 아들)을 의심하여 죽였고, 곧 병이 났다고 한다.
- 385년 사안은 꿈에서 환온의 수레를 타고 흰 닭을 본 후,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다.[25]
- 43권의 문집을 저술했지만, 수나라 때에는 11권만 남아 있었다.[29] 《환온집(桓溫集)》 20권 중 18편이 현존하며, 《격호문(檄胡文)》, 《상소진편의칠사(上疏陳便宜七事)》 등이 대표적이다.[30],[31]
참조
[1]
서적
Book of Jin
[2]
서적
Book of Jin
[3]
서적
Book of Jin
[4]
서적
Book of Jin
[5]
문서
Huan Wen's biography
[6]
서적
晋書
[7]
서적
資治通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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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符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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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東晋門閥政治》
北京大学出版社
[10]
문서
夫經略大事、固非常情所及、智者了於胸中、不必待眾言皆合也。今為天下之患者、胡、蜀二寇而已。蜀雖險固、比胡為弱、將欲除之、宜先其易者。李勢無道、臣民不附、且恃其險遠、不修戰備。宜以精卒萬人輕繼疾趨、比其覺之、我已出其險要、可一戰擒也。蜀地富饒、戸口繁庶、諸葛武侯用之抗衡中夏、若得而有之、國家之大利也。論者恐大軍既西、胡必窺覦、此似是而非。胡聞我萬里遠征、以為内有重備、必不敢動、縱有侵軼、縁江諸軍足以拒守、必無憂也
[11]
서적
晋書
[12]
문서
臣近親率所統、欲北掃趙魏、軍次武昌、獲撫軍大將軍、會稽王昱書、説風塵紛紜、妄生疑惑、辭旨危急、憂及社稷。省之惋愕、不解所由、形影相顧、隕越無地。臣以暗蔽、忝荷重任、雖才非其人、職在靜亂。寇仇不滅、國恥未雪、幸因開泰之期、遇可乘之會、匹夫有志、猶懷憤慨、臣亦何心、坐觀其弊!故荷戈驅馳、不遑寧處、前後表陳、於今歴年矣。丹誠坦然、公私所察、有何纖介、容此嫌忌?豈醜正之徒心懷怵惕、操弄虚説、以惑朝聽?昔樂毅謁誠、垂涕流奔、霍光盡忠、上官告變。讒説殄行、奸邪亂德、及歴代之常患、存亡之所由也。今主上富於陽秋、陛下以聖淑臨朝、恭己委任、責成群下、方寄會通於群才、布德信於遐荒。況臣世蒙殊恩、服事三朝、身非羈旅之賓、跡無韓彭之釁、而反間起於胸心、交亂過於四國、此古賢所以歎息於既往、而臣亦大懼于當年也。今橫議妄生、成此貝錦、使垂滅之賊復獲蘇息、所以痛心絶氣、悲慨彌深。臣雖所存者公、所務者國、然外難未弭、而内弊交興、則臣本心陳力之志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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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晋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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晋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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晋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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晋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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晋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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晋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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晋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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晋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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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説新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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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説新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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晋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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晋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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温前敗灞上、後敗枋頭、十五年間、再傾国師。六十歳公挙動如此、不能思愆免退、以謝百姓、方廃君以自悦、将如四海何!諺云『怒其室而作色于父』者、其桓温之謂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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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世説新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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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世説新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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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隋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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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旧唐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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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全上古三代秦漢三国六朝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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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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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묘호가 태조(太祖)라고 하나, 이는 종묘 배향자 중 다른 존령들을 조율하는 역할을 맡은 지위로써의 태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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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용항(龍亢): 현재의 [[안후이성|안휘성(安徽省)]] 회원현(懐遠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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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유량(庾亮): 도간(陶侃)이 창설한 서부군단(西府軍團-[[장강]] 중류지역 방비군)의 군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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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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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염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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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사마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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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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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전진
[41]
기타
동진의 수도 낭야(琅邪) 근처의 모든 병권을 갖게 됐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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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조(曹操)가 헌제(獻帝)에게 요구했었던 9가지의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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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승상(丞相)을 비롯 3공(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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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晋書·桓玄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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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진서(晋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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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세설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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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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