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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영 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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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황사영 백서는 1801년 신유박해 당시 천주교 신자 황사영이 탄압받는 조선 천주교의 상황을 북경 주교에게 알리고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작성한 밀서이다. 흰 비단에 13,311자에 달하는 방대한 내용으로, 신유박해의 진행 과정, 순교자들의 행적, 교회 재건 방안 등을 담고 있으며, 특히 청나라 군대를 동원한 무력 침공을 요청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백서는 발각되어 황사영은 체포, 처형되었고, 백서의 내용은 천주교 박해를 더욱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현재 백서 원본은 교황청 민속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배론 성지에 토굴이 복원되어 있고, 묘소가 경기도 양주에 있다.

2. 사건의 배경

조선 후기, 진보적인 남인 소장파들은 유학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서양 학문과 천주교에 관심을 가졌다. 조선의 천주교는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한 후 만든 신앙 모임을 통해[1] 선교사 없이 자생적으로 신앙을 싹틔우고 성장했다는 매우 특이한 점이 있다. 이러한 조선 교회는 명례방 사건(1785년), 반회사건(1787년), 신해박해(1791년), 을묘박해(1795년)를 거치며 탄압이 점차 강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교세는 끊임없이 성장했다.

1790년(정조 14) 16세의 나이에 진사시에 합격한[2] 황사영은 다음 해 정약용의 맏형 정약현의 사위가 되면서 천주학을 접하게 되었다. 1791년에 세례를 받고 입교한 후 주문모 신부의 측근이 되어 선교 활동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신유박해 무렵에는 교계의 핵심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

정조가 갑자기 사망하자, 노론 벽파정순왕후의 섭정을 통해 조정을 장악하였다. 이후 사학(천주교) 철폐를 명분으로 남인 숙청을 감행하며 1801년 1월에 신유박해를 일으켰다.[3] 전국에 오가작통법을 적용하고 역모죄로 다스리라는 엄명이 내려졌다. 노론 벽파의 목적은 남인 세력을 박멸하여 재기 불가능하게 만드는 데 있었다.[4]

정약용이 체포되어 국문을 받던 중 황사영을 고변하자[5] 체포령이 떨어졌다. 서울을 탈출한 황사영은 충북 제천군 봉양면 배론(舟論)의 토굴 속에 숨어 지냈다.[6] 한편, 정순왕후는 황사영을 반드시 체포하라는 특별 명령을 여러 차례 내렸고, 국외 탈출에 대비하여 국경 수비를 강화시켰다. 조정의 독촉이 심해지자 함경도에서 가짜 황사영을 체포하여 서울로 압송하는 일도 있었다.[7]

2. 1. 조선 천주교의 전래와 발전

조선 후기 진보적인 남인 소장파들은 유학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서양 학문과 천주학에 관심을 가졌다. 조선의 천주교는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한 후 만든 신앙 모임을 통해[1] 선교사 없이 자생적으로 신앙을 싹틔우고 성장했다는 매우 특이한 점이 있다. 이러한 조선 교회는 명례방 사건(1785년), 반회사건(1787년), 신해박해(1791년), 을묘박해(1795년)를 거치며 탄압이 점차 강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교세는 끊임없이 성장했다. 1790년(정조 14) 16세의 나이에 진사시에 합격한[2] 황사영은 다음 해 정약용의 맏형 정약현의 사위가 되면서 천주학을 접하게 되었다. 1791년에 세례를 받고 입교한 후 주문모 신부의 측근이 되어 선교 활동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신유박해 무렵에는 교계의 핵심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

2. 2. 황사영의 입교와 활동

조선 후기 진보적인 남인 소장파들은 유학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서양 학문과 천주학에 관심을 가졌다. 조선의 천주교는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한 후 만든 신앙 모임을 통해 선교사 없이 자생적으로 성장했다는 특징이 있다.[1] 조선 교회는 명례방 사건(1785년), 반회사건(1787년), 신해박해(1791년), 을묘박해(1795년)를 거치며 탄압이 강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교세가 계속 성장했다.

1790년(정조 14) 16세의 나이에 진사시에 합격한[2] 황사영은 이듬해 정약용의 맏형 정약현의 사위가 되면서 천주학을 접하게 되었다. 1791년에 세례를 받고 입교한 후 주문모 신부의 측근이 되어 선교 활동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신유박해 무렵에는 교계의 핵심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

2. 3. 신유박해의 발발

정조가 갑자기 사망하자, 노론 벽파정순왕후의 섭정을 통해 조정을 장악하였다. 이후 사학(천주교) 철폐를 명분으로 남인 숙청을 감행하며 1801년 1월에 신유박해를 일으켰다.[3] 전국에 오가작통법을 적용하고 역모죄로 다스리라는 엄명이 내려졌다. 노론 벽파의 목적은 남인 세력을 박멸하여 재기 불가능하게 만드는 데 있었다.[4]

조선 후기, 진보적인 남인 소장파들은 유학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서양 학문과 천주학에 심취하였다. 조선의 천주교는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한 후 만든 신앙 모임을 통해 선교사 없이 자생적으로 신앙을 싹틔우고 성장했다는 매우 특이한 점이 있었다.[1] 이러한 조선 교회는 명례방 사건(1785년), 반회사건(1787년), 신해박해(1791년), 을묘박해(1795년)을 거치며 탄압이 점차 강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교세는 끊임없이 성장했다.

정약용이 체포되어 국문을 받던 중 황사영을 고변하자[5] 체포령이 떨어졌다. 서울을 탈출한 황사영은 충북 제천군 봉양면 배론(舟論)의 토굴 속에 숨어 지냈다.[6] 한편, 정순왕후는 황사영을 반드시 체포하라는 특별 명령을 여러 차례 내렸고, 국외 탈출에 대비하여 국경 수비를 강화시켰다. 조정의 독촉이 심해지자 함경도에서 가짜 황사영을 체포하여 서울로 압송하는 일도 있었다.[7]

3. 황사영 백서 작성

황사영은 토굴에 숨어 지내면서 신유박해로 인해 주문모 신부를 비롯한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당하고, 살아남은 신자들은 깊은 산속에서 비참하게 생활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8] 이러한 상황을 북경 주교에게 알리고 청나라 조정의 도움을 받아 박해를 끝내고자 1801년 흰색 비단에 《황사영 백서》를 작성했다.[9]

백서는 가로 62cm, 세로 40cm 크기의 흰색 비단에 쓰였으며, 총 13,311자가 검은 먹이 아닌 백반으로 쓰여 물을 묻혀야 읽을 수 있다.[10] 백서의 내용은 인사말, 신유박해의 진행 과정, 순교자 열전, 교회 재건과 신앙 자유를 얻기 위한 5가지 방안, 관면 요청과 맺음말로 구성되어 있다.[11]

교회 재건과 신앙 자유를 얻기 위한 5가지 방안에는 조선이 경제적으로 힘이 없으니 서양의 동정을 얻어 천주교를 받들고 백성을 구제하는 데 필요한 자본을 얻는 방안, 청나라 황제의 동의를 얻어 서양인 천주교 신부를 보내는 방안, 청나라 종녀를 조선 왕과 결혼시켜 조선을 청나라에 종속시키는 방안, 서양 군대의 힘으로 선교 승인을 강요하고 선교사의 포교를 쉽게 하는 방안 등이 제시되었다.[13]

백서는 1801년 음력 9월 22일에 작성되었으며, 발송인은 황심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 작성자는 황사영이다.[6] 황심의 이름을 쓴 이유는 그가 북경 교회에 알려진 인물이었기 때문에 밀서의 신뢰성을 높이기 위한 조치였다.[12][6] 황사영은 황심과 옥천희를 통해 백서를 전달하려 했다.

3. 1. 백서 작성의 배경

황사영은 토굴 속에 숨어 지내며 김한빈과 황심(黃心)을 통해 정세를 파악하던 중, 주문모 신부, 정약종, 이승훈, 최창현, 강완숙, 최필공, 이존창, 유항검 형제 등 많은 사람이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접했다.[8] 또한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깊은 산속으로 도피하여 비참하게 생활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었다.

황사영은 이러한 박해 상황을 북경 주교에게 알리고, 주문모 신부가 중국인이라는 사실을 알려 청나라 조정의 도움을 받아 박해를 끝낼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황사영 백서》라는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9]

3. 2. 백서의 내용

帛書중국어는 흰색 비단에 쓰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가로 62cm, 세로 40cm 크기이며, 가는 붓으로 쓴 깨알 같은 글씨는 한 줄에 110자씩 122행에 걸쳐 총 13,311자에 달한다.[10] 검은 먹이 아닌 백반으로 썼기 때문에 물을 묻혀야 글자를 읽을 수 있다.[10]

백서의 내용은 크게 다섯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11]

순서내용
1인사말 (1-5행)
2신유박해의 진행 과정 (6-32행)
3순교자 열전 (32-90행)
4교회 재건과 신앙 자유를 얻기 위한 5가지 방안 (90-118행)
5관면 요청과 맺음말 (119-122행)



이 중 교회 재건과 신앙 자유를 얻기 위한 5가지 방안은 다음과 같다.[13]

# 조선은 경제적으로 힘이 없으니 서양 제국의 동정을 얻어 천주교를 받들어 나가고, 백성들을 구제하는 데 필요한 자본을 얻고자 한다.

# 청나라 황제의 동의를 얻어 서양인 천주교 신부를 보낼 것.

# 청나라 종녀 1인을 공주로 삼아 조선 왕과 결혼하게 하여 국왕을 부마로 만들면, 다음 왕은 청국 황제의 외손이 되므로 자연히 청국에 충성을 바치게 될 것이다. 또는 조선을 청나라의 한 성(省)으로 편입시켜 감독하게 한다.

# 조선은 2백 년 이래 평화가 계속되어 백성은 전쟁을 모르니, 조선에 배 수백 척과 강한 병사 5~6만 명으로 대포, 군수 물자를 싣고 와서 선교 승인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서양 전교대를 조직하여 선교사의 포교를 쉽게 한다.

백서는 1801년 음력 9월 22일에 작성되었으며, 발송인은 황심(黃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 작성자는 황사영이다.[6] 황심의 이름을 쓴 이유는 그가 1798년과 1799년에 북경에 가서 주문모 신부의 서한을 구베아 주교에게 전달한 경험이 있어[12] 북경 교회에 알려진 인물이었기 때문에 밀서의 신뢰성을 높이기 위한 조치였다.[6]

3. 3. 백서 전달 시도

황사영은 황심(黃心)과 옥천희(玉千禧)를 통해 음력 10월에 떠나는 동지사 일행에 끼어서 중국 천주교회에 백서를 전달할 계획이었다.[6] 황심의 이름을 백서에 적은 이유는 그가 1798년과 1799년에 동지사의 마부가 되어 북경에 가서 주문모 신부의 서한을 구베아 주교에게 직접 전달했던 경험이 있어[12] 북경교회에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밀서의 신뢰성을 높이기 위한 조치였다.

4. 백서의 발각과 체포

(이전 출력에서 변경 사항 없음. 제공된 원본 소스에 해당 섹션 내용이 없으므로 본문은 작성하지 않습니다.)

4. 1. 황사영과 황심의 체포

1801년 9월 15일, 황심(黃心)이 제천 배론에서 체포되었고, 9월 26일에는 황사영도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14] 황사영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8개월여 만에 조정에 전해지자 조정은 환호했다.[15] 체포된 황사영의 옷 속에서 둘둘 말린 백서가 발견되자 노론 벽파는 다시 환호성을 질렀으나,[15] 그 내용을 읽고는 천주교에 빠져 나라를 외국에 넘기려 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4. 2. 황사영의 처형과 가족들의 피해

황사영은 1801년 11월 5일에 대역죄로 서소문 밖에서 온몸이 찢기는 능지처참을 당했다.[14] 그의 모친 이윤혜는 거제도로, 그의 부인 정명련(정약용의 조카)는 제주도 대정현으로 노비로 끌려갔다. 두 살배기 아들 황경한은 영광군 추자도로 귀양갔고, 숙부 황석필은 함경도 경흥으로 귀양갔다.[16] 집안의 머슴과 종들도 피해를 보았는데, 종 육손은 갑산, 돌이는 삼수, 여종 판례는 위원, 복덕은 흥양으로 귀양 갔다. 여종 고음연은 단성으로 귀양갔다가 이듬해 죽었다. 여종의 남편 박삼취는 거창으로 유배되었다.[16] 황사영이 극형을 당한 다음날 그의 집은 헐리고 웅덩이가 파여 물이 고이게 되었다.[16]

5. 사건의 영향

《황사영 백서》 사건은 조선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우선,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더욱 강화되었다. 조정에서는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규정하였는데, 《황사영 백서》로 인해 이러한 방침은 더욱 힘을 얻게 되었고, 천주교는 매국의 종교라는 낙인이 찍혔다.[21] '백서'의 내용이 알려지자 재야 유생들은 조정에 천주교를 성토하는 글을 보냈고, 경상도전라도에서는 서원을 중심으로 천주교 배척 운동이 세차게 일어났다.[22] 이처럼 천주교를 배척하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더욱 거세어졌다.[23]

정순왕후는 1801년 12월 22일(음) 토사교문을 반포하여 위정척사라는 유교적 이념에 근거하여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규정하고, 신유박해의 상황 및 결과와[28] 다시는 천주교를 믿는 무리가 없도록 하라는 취지를 밝혔다. 그리고 청나라에 가는 사신의 수를 200명 이내로 줄이고, 40일 이상 머물지 못하게 하는 등 서학이나 서양 문물과의 접촉을 제한하는 쇄국정책을 강화했다.[29] 정순왕후는 사교를 믿는 자는 엄벌에 처하겠다고 언급했으나, 이는 역률로 다스리겠다는 이전의 지시를 뒤엎는 것이었다.[30] 정순왕후는 토사교문을 발표한 뒤 더 이상 천주교도를 잡아들이지 못하게 했다.[31]

황사영정약용 형제의 조카사위였기 때문에, 노론 벽파는 이 기회에 정약용을 제거하려 했다.[18] 그러나 증거 불충분과 노론 벽파 내 의견 갈등으로 정약용은 극형을 면하고 강진으로, 정약전흑산도로 유배를 떠났다.[19][20]

1801년 음력 10월, 조선 조정은 동지사를 파견하면서 천주교 탄압을 정당화하는 진주사(陳奏使)의 임무도 함께 부여했다.[32] 이때 파견된 진주사 조윤대 일행은 토사교문과 함께 황사영 백서의 내용을 16행 923자로 축소한 '가백서'(假帛書)를 청나라에 전달했다.[32] 가백서에는 조선 조정에 불리한 내용은 삭제하고, 서양 선박과 군대 파견을 요청한 사실을 적어 박해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황사영 백서가 발각된 후, 조정에서는 중국인 주문모 신부 처형 사실이 중국에 알려질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33] 이에 조선 정부는 진주사를 통해 신유박해 전반에 대해 청나라가 이해해주기를 바랐고, 주문모가 중국인임을 모른 채 처형했다고 거짓 해명했으며, 더 이상 천주교 탄압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22]

5. 1. 정약용 등 남인들의 추가 탄압

사헌부 홍낙안과 사간원 신구조가 《황사영 백서》 제작 배후에 정약전, 정약용, 이치훈 등이 있다며 이들을 다시 체포해 심문하라고 주청했다.[17] 이에 따라 정약용정약전은 각각 유배지인 장기와 신지도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당했다. 황사영은 정약용 형제의 조카사위였기 때문에 사태는 심각했다. 노론 벽파의 홍낙안 등은 "천 사람을 죽여도 정약용 하나를 죽이지 못하면 아무도 죽이지 못한 것과 같다"고 하며 이번 기회에 정약용을 죽이려 했다.[18] 그러나 관련 증거가 나오지 않았고 노론 벽파 내 의견이 갈리면서 극형은 면하게 되었다.[19] 정약용강진, 정약전흑산도로 다시 유배를 떠났다.[20]

5. 2. 천주교 박해 강화

조정에서는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규정하였는데, 《황사영 백서》로 인해 이러한 방침이 힘을 얻게 되었고, 천주교는 매국의 종교라는 낙인이 찍혔다.[21] '백서'의 내용이 알려지자 재야 유생들은 조정에 천주교를 성토하는 글을 보냈고, 경상도전라도에서는 서원을 중심으로 천주교 배척 운동이 세차게 일어났다.[22] 이처럼 천주교를 배척하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더욱 거세어졌다.[23]

5. 3. 토사교문 반포와 쇄국 정책 강화

정순왕후는 1801년 12월 22일(음) 토사교문을 반포하였다.[27] 위정척사라는 유교적 이념에 근거하여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규정하고, 신유박해의 상황 및 결과와[28] 다시는 천주교를 믿는 무리가 없도록 하라는 취지를 담았다. 그리고 청나라에 가는 사신의 수를 200명 이내로 줄이고, 40일 이상 머물지 못하게 하는 등 서학이나 서양 문물과의 접촉을 제한하는 쇄국정책을 강화했다.[29] 또한 사교를 믿는 자는 엄벌에 처하겠다고 언급했으나, 이는 역률로 다스리겠다는 이전의 지시를 뒤엎는 것이었다.[30] 정순왕후는 토사교문을 발표한 뒤 더 이상 천주교도를 잡아들이지 못하게 했다.[31]

5. 4. 동지사 파견과 외교적 노력

1801년 음력 10월, 조선 조정은 동지사를 파견하면서 천주교 탄압을 정당화하는 진주사(陳奏使)의 임무도 함께 부여했다.[32] 이때 파견된 진주사 조윤대 일행은 토사교문과 함께 황사영 백서의 내용을 16행 923자로 축소한 '가백서'(假帛書)를 청나라에 전달했다.[32] 가백서에는 조선 조정에 불리한 내용은 삭제하고, 서양 선박과 군대 파견을 요청한 사실을 적어 박해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황사영 백서가 발각된 후, 조정에서는 중국인 주문모 신부 처형 사실이 중국에 알려질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33] 이에 조선 정부는 진주사를 통해 신유박해 전반에 대해 청나라가 이해해주기를 바랐고, 주문모가 중국인임을 모른 채 처형했다고 거짓 해명했으며, 더 이상 천주교 탄압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22]

6. 백서에 대한 평가와 논란

《황사영 백서》는 신앙의 자유와 인권 수호라는 목적은 정당했지만, 외세를 끌어들이려 한 수단 때문에 평가가 엇갈린다. 흉서, 매국의 계책, 외세 의존적인 반국가적 행위라는 비난과 함께, 조선 교회 구출의 원대한 계획, 인권 존중 옹호 텍스트라는 찬사도 존재한다.[34]

뮈텔 주교는 프랑스어 번역본 서문에서 “음모의 대부분이 공상적이며 위험천만한 것이며, 조선 정부가 필자에게 엄벌을 가했다는 점도 이해할 수 있다.”라고 평가했다. 샤를르 달레는 황사영이 제시한 대안에 대해 “지나친 상상에서 나온 유치한 계획이며, 저 시대에 있어서의 한 몽상(夢想)이었음이 분명하다.”라고 평가했다.[38]

재야 역사학자 이이화는 저서 《한국사 이야기》에서 "27세의 청년이 우리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너무나 자기 신앙에 골몰한 나머지 과장을 섞어 자기 비하를 한 지나친 호소였다."라고 비판했다.[36]

이처럼 《황사영 백서》는 외세를 끌어들이려 했다는 점에서 비판받지만, 한편으로는 교회의 평등주의 원칙과 당시 조선 사회에 미친 혁명적인 영향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도 일부 사학자들 사이에서 제기되고 있다.[35]

6. 1. 상반된 평가

《황사영 백서》는 신앙의 자유와 인권 수호라는 목적은 정당했지만, 외세를 끌어들이려 한 수단 때문에 평가가 엇갈린다. 흉서, 매국의 계책, 외세 의존적인 반국가적 행위, 몽상, 매국적 편지라는 비난과 함께, 조선 교회 구출의 원대한 계획, 인권 존중 옹호 텍스트, 인권선언서라는 찬사도 존재한다.[34]

《황사영 백서》에는 당시 상식으로는 용인될 수 없는 극단적인 문구까지 사용되었으며, 뮈텔 주교도 불역본(프랑스어 번역본) 서문에서 “음모의 대부분이 공상적이며 위험천만한 것이며, 조선 정부가 필자에게 엄벌을 가했다는 점도 이해할 수 있다.”라고 평가했다. 외세를 끌어들이려 했다는 점에서 《황사영 백서》는 민족 감정에서 나오는 공격의 대상이 되어 왔지만, 한편으로는 교회의 평등주의 원칙과 당시 조선 사회에 미친 혁명적인 영향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도 일부 사학자(史家)들 사이에서 제기되고 있다.[35]

재야 역사학자 이이화는 저서 《한국사 이야기》에서 "27세의 청년이 우리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너무나 자기 신앙에 골몰한 나머지 과장을 섞어 자기 비하를 한 지나친 호소였다. 이러한 몽상이 황사영 개인의 소견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일부 천주교도의 의식을 반영한 것인 만큼 문제의 심각성은 한층 더 컸다."라고 비판했다.[36]

《조선 교회사》를 저술한 샤를르 달레는 황사영이 제시한 대안에 대해 “지나친 상상에서 나온 유치한 계획이며, 저 시대에 있어서의 한 몽상(夢想)이었음이 분명하다.”라고 평가했다. 급박한 박해 상황 때문에, 황사영은 조선 왕조가 존재하는 한 신앙의 자유를 얻거나 자신을 포함한 신도들의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황사영의 ‘대안 제시’를 반민족적 행위로 규탄한다. 신앙의 자유라는 좋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무력 사용과 국가 생존권 부정이라는 좋지 못한 방법을 사용하고자 했기 때문에 그의 ‘대안 제시’는 비판받는 것이 당연하다.[38]

6. 2. 민족주의적 관점에서의 비판

이이화 등 재야 사학자들은 황사영이 외세에 의존하려 한 태도를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비판하였다.[36] 이이화는 자신의 저서 《한국사 이야기》에서 "27세의 청년이 우리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너무나 자기 신앙에 골몰한 나머지 과장을 섞어 자기 비하를 시킨 지나친 호소였다. 이러한 몽상이 황사영 개인의 소견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일부 천주교도의 의식을 반영한 것인 만큼 문제의 심각성은 한층 더 심했다."라고 비판했다.[36]

샤를르 달레는 황사영이 제시한 대안에 대해 “지나친 상상에서 나온 유치한 계획이며, 저 시대에 있어서의 한 몽상(夢想)이었음이 분명하다.”라고 평가했다.[38] 급박한 박해 상황 때문에 황사영은 조선 왕조가 존재하는 한 신앙의 자유를 얻거나 자신을 포함한 신도들의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신앙의 자유라는 좋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무력 사용과 국가 생존권의 부정이라는 좋지 못한 방법을 사용하고자 했기 때문에 황사영의 ‘대안 제시’를 반민족적 행위로 규탄하고 있다.[38]

6. 3. 현대적 관점에서의 재평가

《황사영 백서》는 신앙의 자유와 인권 수호라는 목적의 정당성과 외세를 동원하려 한 수단의 결함 때문에 평가가 엇갈린다. 흉서, 매국의 계책, 외세 의존의 반국가적 행위, 몽상, 매국적 편지와 같은 비난과 함께 조선 교회 구출의 원대한 계획, 인권 존중 옹호의 텍스트, 인권선언서와 같은 찬탄이 존재하고 있다.[34]

뮈텔 주교는 불역본(佛譯本) 서문에서 "음모의 대부분이 공상적이며 위험천만한 것이며, 조선 정부가 필자에게 엄벌을 가했다는 점도 이해할 수 있다."라고 논하였다. 외세를 끌어들이려 했다는 점에서 《황사영 백서》는 민족 감정에서 나오는 공격의 대상이 되어 왔지만, 한편 교회의 평등주의라는 원칙과 당시 조선 사회에 미친 혁명적인 영향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 일부 사가(史家)들의 주장이기도 하다.[35]

재야 역사학자 이이화는 자신의 저서 《한국사 이야기》를 통해서 "27세의 청년이 우리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너무나 자기 신앙에 골몰한 나머지 과장을 섞어 자기 비하를 시킨 지나친 호소였다. 이러한 몽상이 황사영 개인의 소견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일부 천주교도의 의식을 반영한 것인 만큼 문제의 심각성은 한층 더 심했다."라고 비판했다.[36]

《조선 교회사》를 저술한 샤를르 달레는 황사영이 제시한 대안에 대해 "지나친 상상에서 나온 유치한 계획이며, 저 시대에 있어서의 한 몽상(夢想)이었음이 분명하다."라고 평가했다. 급박한 박해의 상황 때문에, 황사영은 조선 왕조가 존재하는 한 신앙의 자유를 얻거나 자신을 포함한 신도들의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황사영의 '대안 제시'를 반민족적 행위로 규탄하고 있다. 신앙의 자유라는 좋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무력 사용과 국가 생존권의 부정이라는 좋지 못한 방법을 사용하고자 했기 때문에 그의 '대안 제시'는 비판받는 것이 당연하다.[38]

7. 백서의 발견과 보존

황사영 백서는 신유박해 이후 거의 백 년 동안 의금부 창고 속에 보관되어 있었다. 1894년 갑오경장 때 옛 문서들을 파기하면서 원본이 우연히 발견되어 당시 조선교구장이던 뮈텔 주교에게 전달되었다.

7. 1. 원본과 사본

오늘날 전하는 백서는 원본과 사본 두 종류가 있으며, 신유박해 이후 거의 백 년 동안 의금부 창고 속에 보관되어 왔다. 1894년 갑오경장 때 옛 문서들을 파기하면서 원본이 우연히 발견되어 당시 조선교구장이던 뮈텔 주교에게 전달되었다. 1925년 7월 5일(음) 로마에서 조선 천주교회 순교 복자 79명의 시복식이 거행될 때 교황 비오 11세에게 전달되었고, 현재 교황청 민속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37]

한편 백서의 사본은 발각 당시부터 작성되기 시작해서 《벽위편》, 《신유사학죄인 사영 등 추안》을 비롯한 몇몇 자료에 다시 수록되어 있다. 뮈텔 주교는 백서의 원본을 로마로 보내기 전에 실물 크기대로 동판에 담아 인쇄하여 학계에 배포하였다. 또한 한국 교회사연구소에서는 1966년 이를 활판본으로 간행하였다. 《황사영 백서》의 번역본으로는 1925년 뮈텔의 프랑스어 번역본, 1946년 야마구치 마사유끼의 일본어 번역본, 1976년 정음사에서 간행한 윤재영의 한글 번역본 등이 있다.[38]

7. 2. 번역과 연구

오늘날 전하는 백서는 원본과 사본 두 종류가 있으며, 신유박해 이후 거의 백 년 동안 의금부 창고에 보관되었다. 1894년 갑오경장 때 옛 문서들을 파기하면서 원본이 우연히 발견되어 당시 조선교구장이던 뮈텔 주교에게 전달되었다. 1925년 7월 5일(음) 로마에서 조선 천주교 순교 복자 79명의 시복식이 거행될 때 교황 비오 11세에게 전달되었고, 현재 교황청 민속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37]

백서 사본은 발각 당시부터 작성되기 시작해 《벽위편》, 《신유사학죄인 사영 등 추안》을 비롯한 여러 자료에 다시 수록되었다. 뮈텔 주교는 백서 원본을 로마로 보내기 전 실물 크기 동판으로 인쇄하여 학계에 배포했다. 1966년 한국 교회사연구소는 활판본으로 간행했다. 《황사영 백서》 번역본으로는 1925년 뮈텔의 프랑스어 번역본, 1946년 야마구치 마사유끼의 일본어 번역본, 1976년 정음사에서 간행한 윤재영의 한글 번역본 등이 있다.[38]

8. 관련 유적지

황사영 백서와 관련된 유적지는 다음과 같다.


  • 배론 성지: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에 있으며, 황사영이 숨어 지내던 토굴이 복원되어 있고, 토굴 안에는 백서의 실물 크기 복사본이 전시되어 있다.[39]
  • 황사영 묘소: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부곡리 가마골 홍복산 자락에 있다. 1980년 황사영의 후손이 발견하였으며, 석제 십자가와 비단 띠가 들어 있는 항아리가 발견되어 황사영의 묘소임을 확인하였다.[40]

8. 1. 배론 성지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에 있는 배론 성지에는 황사영이 은거했던 토굴이 복원되어 있으며, 그 안에 백서의 실물 크기 복사본이 전시되어 있다.[39]

8. 2. 황사영 묘소

황사영은 능지처참형을 받은 후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에 있는 가마골 홍복산 자락 아래 매장되었다.[40] 1980년 황씨 집안의 후손이 사료 검토 작업과 사계의 고증을 거쳐 홍복산 선영에서 황사영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을 발견하였는데, 발굴 결과 석제 십자가 및 비단 띠가 들어 있는 항아리가 나오면서 무덤의 주인공이 황사영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40]

참조

[1] 서적 한국 근대사 산책 1 인물과 사상사 2011-03-31
[2] 웹사이트 황사영 (黃嗣永)
[3] 서적 한국기독교회사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5
[4] 서적 한국사의 천재들 생각의 나무 2006
[5] 서적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2 김영사 2004
[6] 서적 한국사 이야기 15 한길사 2009-04-10
[7] 서적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2 김영사 2004
[8] 서적 한국기독교회사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5
[9] 서적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2 김영사 2004
[10] 서적 한국 근대사 산책 1 인물과 사상사 2011-03-31
[11] 웹사이트 천주교 원주교구 배론성지 http://www.baeron.or[...]
[12] 웹사이트 황사영 (黃嗣永)
[13] 논문 초기 한국 천주교와 개신교의 충돌에 대한 연구 : 1784년부터 1930년대까지 장로회 신학대학교대학원
[14] 서적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2 김영사 2004
[15] 서적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2 김영사 2004
[16] 서적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2 김영사 2004
[17] 서적 한국 근대사 산책 2 인물과 사상사 2011-03-31
[18] 서적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2 김영사 2004
[19] 서적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2 김영사 2004
[20] 서적 한국 근대사 산책 1 인물과 사상사 2011-03-31
[21] 서적 한국 근대사 산책 1 인물과 사상사 2011-03-31
[22] 서적 한국사 이야기 15 한길사 2009-04-10
[23] 웹사이트 황사영 [黃嗣永]
[24] 서적 한국 근대사 산책 1 인물과 사상사 2011-03-31
[25] 서적 조선의 왕비 이가출판사 2003
[26] 서적 한국 근대사 산책 1 인물과 사상사 2011-03-31
[27] 웹사이트 순조실록, 순조 1년 12월 22일 http://sillok.histor[...]
[28] 웹인용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 토역반교문(討逆頒敎文) <토사교문> 반포 https://www.cpbc.co.[...] 2021-08-22
[29] 서적 한 권으로 보는 한국사 가람기획 1993
[30] 서적 한국사 이야기 16 한길사 2009-04-10
[31] 서적 한국사 이야기 16 한길사 2009-04-10
[32] 웹사이트 황사영백서 [黃嗣永帛書]
[33] 서적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2 김영사 2004
[34] 뉴스 황사영 백서와 외세 (허동현 교수) 중앙일보 2003-01-18
[35] 웹사이트 황사영백서 [黃嗣永帛書]
[36] 서적 한국사 이야기 15 한길사 2009-04-10
[37] 백과사전 황사영백서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38] 사전 황사영 (黃嗣永) Good News 카톨릭 사전
[39] 뉴스 '황사영 백서'의 탄생지, 배론 성지에 가다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40] 웹사이트 가톨릭인터넷 Goodnews에 오신 모든 분들께 축복이 함께 하시길 http://info.cathol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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