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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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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황완은 후한 말기의 인물로, 어려서 조부 황경의 총애를 받았다. 성장하여 오관중랑장이 되었으나 진번과 함께 정치 쇄신을 시도하다 실패하여 관직에서 물러났고, 이후 태복 등을 역임하고 예주 자사가 되었다. 동탁 암살에 가담했으나, 이각과 곽사에게 붙잡혀 옥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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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완
인물 정보
이름황완
자염(子琰)
생몰년140년 ~ 192년
출생지강하군 안륙현
사망지미상
시대후한
직업관료
학자
최종 관직위위(衛尉)
아버지황경(黃瓊)
친척황보
관력
효렴효렴(孝廉) 천거
상서랑상서랑(尙書郞) 임명
태위태위(太尉) 임명
동탁 암살 모의동탁 암살 모의 가담
위위위위(衛尉) 임명
일화
좌승의 인물평'국지주석'(國之柱石)
'왕좌지기'(王佐之器)
옹고의 평가'자신을 숨기고 드러내지 않음'
'맑고 깨끗함'

2. 사적

황완은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할아버지 황경의 손에서 자랐으며, 황경이 위군태수사도로 있을 때 여러 일화를 남겼다.

성장 후 오관중랑장이 되었을 때 진번과 함께 정치 쇄신을 꾀했으나 실패하여 20년간 관직에서 추방되었다.[4]

광화 연간 말, 양사의 추천으로 복귀하여 태복 등을 역임하고 예주 이 되었다.[4][5]

영한 원년(189년), 동탁이 권력을 잡자 도성으로 소환되어 사도, 태위에 임명되었으나, 동탁의 장안 천도에 반대하여 파면되었다. 이후 광록대부로 복귀하였고, 사례교위로 전임되었다. 왕윤, 여포 등과 동탁 암살을 모의하여 성공하였다.[6]

그러나 곧 동탁의 옛 부하 이각, 곽사 등이 장안을 점거하여 왕윤을 죽였고, 여포는 달아났다. 이때 황완은 붙잡혀 옥사했다. 향년 52세였다.[7] 황완은 태위였을 때 화타를 벽소를 통해 초빙하려 했지만, 화타는 응하지 않았다.[8]

2. 1. 어린 시절과 일화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할아버지 황경의 손에서 자랐다.

황경이 위군태수였을 때의 일이었다. 건화 원년(147년) 정월에 일식이 일어났는데, 서울에서는 이를 보지 못하였다. 황경은 장계를 올려 이를 보고하였는데, 해의 크기가 얼마나 줄었는지 태후가 물으니 모르겠다고 대답하였다. 이때 황완은 일곱 살이었는데, 곁에 있다가 황경에게 "어째서 남은 해의 크기가 달이 처음 떴을 때와 같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라고 말하였다. 크게 놀란 황경은 황완의 말대로 태후에게 아뢰었고, 황완을 매우 기특하게 여겨 아꼈다.

황경이 사도가 되었을 때, 삼공의 자손으로서 특혜로 동자랑(童子郞)에 선발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나아가지 않아 경사에서 명성을 떨쳤다.

사공 성윤이 병이 들었는데, 황경은 황완을 보내 안부를 물었다. 마침 강하에서 오랑캐들이 난리를 일으켰다는 소식이 관청에 들어오자, 성윤은 황완을 놀리려는 심산으로 "강하는 땅이 크나 오랑캐가 많고 선비는 적구나."라고 말하였다. 황완이 "오랑캐가 쳐들어온 것은 사공께 책임이 있습니다."라고 답하였다. 그러고는 떠나니, 성윤은 이를 기이하게 하였다.[3][2]

2. 2. 조정에서의 행적

성장하여 오관중랑장이 되었을 때, 진번과 함께 정치 쇄신을 꾀했지만 실패하여 20년에 걸쳐 관직에서 추방되었다.[4]

광화 연간 말, 양사의 추천으로 복귀하여 태복 등을 역임하고, 예주 이 되었다.[4][5]

영한 원년(189년), 동탁이 권력을 잡자 도성으로 소환되어 사도, 태위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동탁의 장안 천도에 반대하여 파면되었다. 이후 광록대부로 복귀하였고, 사례교위로 전임되었다. 왕윤, 여포 등이 동탁 암살을 꾀하자, 황완도 이에 참여하여 암살을 성공시켰다.[6]

그러나 곧, 구 동탁군의 이각, 곽사 등이 장안을 점거하여 왕윤을 살해하고, 여포를 내쫓았다. 이때 황완도 이각 등에게 붙잡혀 옥사했다. 향년 52세였다.[7]

시기는 불분명하지만 황완은 태위였을 때 화타를 벽소를 통해 초빙하려 했지만, 화타는 초빙에 응하여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8]

2. 3. 동탁 암살과 죽음

영한 원년(189년), 동탁이 권력을 쥔 후 소환되어 사도태위를 지냈으나, 동탁의 장안 천도에 반발하여 파면되었다. 훗날 광록대부에 임명되어 조정에 복귀하였고, 사례교위로 전임되었다. 사도 왕윤, 여포 등과 동탁 암살을 모의하여 성공하였다.[6]

그러나 곧 동탁의 옛 부하 이각, 곽사 등이 장안을 점거하여 왕윤을 죽였고, 여포는 달아났다. 이때 황완은 붙잡혀 옥사하니, 향년 52세였다.[7]

3. 가계

黃琬|황완중국어의 가계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황완은 후한의 관료로서 후한의 사도, 태위등의 고위직을 역임한 기록이 있다. --|]]

4. 기타

황완은 태위 시절 화타를 벽소를 통해 초빙하려 했으나, 화타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8]

4. 1. 삼국지연의에서의 등장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황규라는 가공의 아들이 등장하는 설정으로 되어 있다.[7]

4. 2. 화타와의 관계

황완은 태위 시절 화타를 벽소를 통해 초빙하려 했으나, 화타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8]

참조

[1] 서적 後漢書校勘記 中華書局
[2] 웹사이트 後漢書/卷61#孫 黃琬
[3] 서적 漢末英雄記
[4] 서적 三国志
[5] 웹사이트 後漢書/卷61#孫 黃琬
[6] 웹사이트 後漢書/卷61#孫 黃琬
[7] 웹사이트 後漢書/卷61#孫 黃琬
[8] 웹사이트 三國志/卷29#華佗
[9] 서적 후한서
[10] 서적 후한서
[11] 서적 후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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