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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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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탁은 후한 말기의 군벌로, 폭정과 권력 찬탈 시도로 악명을 떨쳤다. 젊은 시절 강족 지역을 유랑하며 군사적 경험을 쌓았고, 환제 시대에 관직에 진출하여 변방에서 활약했다. 하진 사후 낙양에 입성하여 정권을 장악하고 소제를 폐위, 헌제를 옹립하며 상국에 올랐다. 폭정을 일삼고 반동탁 연합군에 맞서 싸웠으나, 양아들 여포에게 암살당했다. 동탁은 《삼국지연의》에서 악인으로 묘사되며, 역사적으로 독재와 폭정의 상징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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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딩시시 출신 - 탕융퉁
    탕융퉁은 중국 철학과 불교 연구에 기여한 학자이자 교육자로, 베이징 대학 교수를 역임했으며 《한위 양진 남북조 불교사》 등의 저서를 통해 현대 중국 철학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동탁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동탁의 청나라 삽화
청나라 삽화 속 동탁
이름동탁
로마자 표기Dong Zhuo
음역Tung Cho
민난어 표기Táng Toh
객가어 표기Dúng Cheuk
광동어 표기Dung2 Coek3
중고음túwng ʈæwk
자(字)중영(仲穎)
출생140년대
출생지간쑤성 민현
사망일192년 5월 22일
사망지산시성 시안
매장지미현
아버지동준야
어머니치양 부인
친척동탁(형)
동민(형)
여포(양아들)
동황(조카)
동백(손녀)
손자 (최소 1명)
자녀우보의 아내
아들 (최소 2명)
직업군인, 정치가, 군벌
작위미후
군대후한 제국군
동탁군
소속후한
알레기앙스후한
동탁 정권
관직
관직낭중
광무현령
촉군북부도위
서역무기교위
병주자사
하동태수
동중랑장
파로장군
전장군
사공
태위
상국
태사
태사 임기 시작189년
태사 임기 종료192년 5월 22일
재위 군주헌제
상국 임기189년
재위 군주헌제
전장군 임기188년–189년
재위 군주영제 / 소제
전투
전투양주 반란
십상시 학살
동탁 토벌전
적대 세력
적대 세력장온
손견
원소
왕윤
여포(양아들)
기타

2. 생애

동탁의 출생년도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140년대 초 린타오에서 태어났다는 설과, 영천(潁川) 윤씨(綸氏)에서 태어났다는 설이 있다.[4] 영웅기(英雄記)에 따르면 아버지는 영천(潁川) 윤씨(綸氏)(예주(豫州) 최북서부)의 지방 경찰서장인 동군아(董君雅)였다.

동탁은 팔힘이 매우 강하고 무예에 뛰어났으며, 화살통을 말 양옆에 달고 달리면서 양손으로 동시에 활을 쏠 수 있었다고 한다. 젊어서는 강(羌)족 등 이민족 거주지를 방랑하며 그들의 우두머리들과 교류했다.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를 지을 때 강족 우두머리들이 방문하자, 농사에 쓰던 소를 잡아 연회를 베풀었고, 이에 감격한 우두머리는 가축 천 마리를 선물했다.

이후 군의 관리가 되어 도적을 단속했다(『오서(呉書)』). 호(胡)가 침입하여 약탈을 하고 많은 주민들이 납치되자, 양주자사 성취(成就)는 동탁을 종사(従事)로 등용하여[24] 기병을 이끌고 호를 토벌하게 했다. 동탁은 호를 크게 무찔러 네 자릿수의 호를 죽이거나 사로잡았다(『오서(呉書)』).

병주(并州) 자사(刺史) 단호(段熲)는 동탁을 중앙 관청에 천거했고, 사도(司徒) 원괴(袁隗)는 동탁을 초빙하여 연(掾)으로 등용했다(『오서(呉書)』). 환제 말년, 6개 군의 명문가 자제 중에서 랑(郎)을 뽑을 때 우림(羽林)랑이 되었다. 장환(張奐)이 이끄는 병주 정벌군에 사마(司馬)로 종군하여 반란을 일으킨 강족을 쳐부수고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사로잡는 대승을 거두었다. 동탁은 랑중(郎中)에 임명되고 비단 9천 필을 하사받았으나, 모두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25]

그 후 광무령(廣武令)·촉군(蜀郡) 북부도위(北部都尉)·서역(西域)무기교위(戊己校尉)까지 승진했다가 면관되었지만, 병주자사·하동 태수(太守) 등을 역임했다. 이 기간 동안 변방에서 강족과 백 번 넘게 싸웠다고 한다(『영웅기(英雄記)』). 밭을 갈다가 칼 한 자루를 발견했는데, 채옹(蔡邕)에게 보여주니 항우(項羽)의 칼이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남조 량(南朝梁)·도홍경(陶弘景)『고금도검록(古今刀剣録)』).

2. 1. 강족과의 교류 및 군사 경력

동탁은 젊어서부터 강족 지역을 유랑하며 유력자들과 친분을 맺었다.[4] 귀향 후 농사를 지을 때 친했던 강족 무리가 찾아오자 갈던 를 잡아 연회를 열었고, 이에 감격한 강족들은 과 소를 제외한 가축 1,000여 마리를 선물했다.[23]

167년(영강 원년), 동탁은 우림랑(羽林郞)으로 임명되어 중앙 관직에 진출했다.[23] 흉노 중랑장 장환(張奐) 휘하에서 사마로 종군하여 한양(漢陽, 천수군)에서 강족을 격파하고 낭중(郞中)이 되었으며 비단 9,000필을 받았으나 부하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다.[23]

이후 이민족으로부터 변방을 지키며 여러 공을 세워 광무 현령(廣武―), 촉군 북부도위, 서역 무기교위(西域戊己校尉), 병주 자사, 하동 태수 등을 역임했다.[3]

184년(중평 원년), 황건적을 상대로 승리하던 노식이 좌풍(左豐)에게 뇌물을 주지 않아 소환되자, 동탁이 동중랑장(東中郞將)으로서 장각을 공격했으나 패하여 벌을 받았다.[7]

2. 2. 양주의 난 진압

185년 , 경조, 풍익, 부풍 등 삼보 지역에 기병 수만 명으로 침범해온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좌거기장군 황보숭의 지휘 하에 투입되었다. 그해 7월(음력)[56] 황보숭이 장양에게 뇌물을 주지 않아[57] 면직되고 장온이 부임하면서, 동탁은 파로장군(破虜―)으로 승진하였다.

11월(음력), 떨어진 별똥별에 불안해하는 반군을 바로 공격하여 크게 깨트리고 수천 명을 베었다. 탕구장군(盪寇―) 주신(周愼)이 유중으로 추격할 때, 동탁은 주신의 뒤에서 보급선을 지키려 했으나[58] 장온은 선령강 토벌을 명했다. 결국 보급선이 끊기고 주신은 패퇴하였다. 동탁은 수만 명의 강족에게 포위당했지만, 둑을 쌓은 후 물고기를 잡는 척하면서 그 아래로 자맥질해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둑을 무너트리니 강족은 이 깊어 쫓아오지 못했다. 진압군이 모두 패퇴하는 와중에도 동탁군만이 전력을 보전한 채 돌아와 부풍에 주둔했으므로 태향후(斄鄕侯)에 봉해지고 식읍 1,000호를 받았다.[26]

188년 왕국 등이 진창을 포위하자 전장군이 되어 황보숭과 함께 구원하러 갔다. 동탁은 진창으로 바로 나아가야 한다고 했지만, 황보숭은 진창이 충분히 버틸 수 있다며 반군이 힘이 빠지기를 기다렸다. 189년 2월(음력)[60] 왕국 등이 스스로 군을 물리자 황보숭이 때를 놓치지 않고 추격하려 하였다. 동탁이 이번에는 궁지에 몰린 적을 치는 것은 위험하다며 반대하자 그의 부대를 후방에 남겨둔 채 황보숭만이 진격하여 만여 명을 베고 반군을 소탕하였다. 동탁은 몹시 부끄럽고 한스러워 황보숭을 미워하였다.[57]

2. 3. 낙양 입성 및 정권 장악

189년, 영제가 사망하고 하진이 환관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동탁을 불렀다.[62] 하진이 암살되고 환관들이 소제와 진류왕을 데리고 도망치자,[64] 동탁은 북망산에서 황제 일행을 영접하여 낙양으로 돌아왔다.[3][10]

동탁은 군사력을 이용하여 하진과 하묘의 병력을 흡수하고,[3][12] 여포를 포섭하여 정원의 군대까지 흡수하며 정권을 장악했다.[32]

2. 4. 폐립 단행과 횡포

동탁은 소제가 어리석다고 판단하고, 총명하며 동태후가 기른 유협(헌제)을 황제로 세우려는 뜻을 품었다. 189년 9월, 동탁은 대신들과 폐립을 의논하였고, 노식만이 반대했으나 결국 소제를 폐위하고 홍농왕으로 강등시켰다. 그리고 유협을 황제로 옹립하고,[67] 하태후와 그 어머니 무양군을 죽였다.[68][69]

동탁은 스스로 상국에 올라(11월 26일)[71] 헌제를 옹립한 공을 내세웠다. 자신은 미후(郿侯), 어머니는 지양군(池陽君)에 봉해졌다. 황제를 배알할 때 자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게 하고[贊拜不名], 칼을 찬 채 전각에 오르는 등[劍履上殿] 황제에 준하는 권력을 휘둘렀다.[36][37][38]

동탁과 그 휘하 군대는 살인, 약탈, 겁탈, 축재 등 온갖 횡포를 저질렀다.[39] 특히 낙양의 부호들을 습격하여 재물을 빼앗고, 마을 축제에 참여한 농민들을 학살하는 등 백성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39]

2. 5. 반동탁 연합군과의 대립

190년(초평 원년), 원소를 맹주로[72] 반동탁 연합군이 결성되었다. 황건적이었던 곽태(郭太) 등의 백파적(白波賊)이 서하군에서 봉기하여 그 규모가 10여만 명에 달했고, 반동탁 연합군까지 일어나자 동탁은 이유를 시켜 홍농왕을 독살하고(190년 1월 25일)[74] 장안으로 천도를 강행했다.[76] 이 과정에서 원소의 숙부 원외원술의 동복형 원기 등 낙양에 남아있던 원소 일가를 멸족하였다.[79][80]

6월(음력) 한융, 음수, 호모반, 오수(吳脩), 왕괴(王瓌)를 보내 진정시키려 했으나 한융을 제외하고 모두 잡혀 죽었다.[81]

하내 태수 왕광태산병을 하양진(河陽津)에 주둔시키고 남쪽으로 넘어오려 하자, 동탁은 평음진(平陰津)에서 황하를 건널 것처럼 속이고 몰래 소평진에서 북상해서 그 배후를 공격했다. 조조는 제북상 포신,[84] 진류 태수 장막의 부하 위자와 함께 형양(滎陽) 방면으로 진군해 왔으므로 서영을 보내 무찔렀다.[85] 겨울에는 노양(魯陽)으로부터[87] 올라오던 장사 태수 손견까지 양(梁, 지금의 허난성 루저우시)에서 서영이 대파하였다.

191년 음력 2월,[88] 손견이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고 다시 양인(陽人)으로 진격해오자 호진을 대독(大督), 여포를 기독(騎督)으로 삼아 요격하였다.[89] 호진과 여포는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아 내분으로 패하였고, 이각을 보내 화친을 시도했으나 결렬되었다. 손견이 낙양 가까이까지 진군해오므로 동탁이 직접 맞붙었지만 패하여 낙양 입성을 허용하고 말았다. 다만 낙양은 이미 황폐해져 보급이 어려웠기에[90] 손견은 곧 노양으로 돌아갔다.[57] 동탁은 중랑장 동월(董越), 단외, 우보를 각각 면지(黽池), 화음(華陰), 안읍(安邑)에 배치하여 대치시키고 장안으로 들어갔다.

190년대 한나라의 주요 군벌과 동탁 및 그의 부하인 이각과 과의가 지배한 지역

2. 6. 장안 천도와 통치

동탁은 낙양을 불태우고 장안으로 강제 천도한 후에도 폭정을 멈추지 않았다.[47] 가혹한 법령을 시행하고 문란한 통치를 일삼아 백성들을 억압했다.[39] 자신의 동생 동민을 좌장군으로 임명하는 등 친족들에게 여러 관직을 내렸다.

원소가 동탁에 대항하는 연합군의 지도자 역할을 했기 때문에, 동탁은 낙양에 있던 원씨 일족 전체를 몰살했다.[3] 2년 안에 수천 명의 관리들이 누명을 쓰고 처형되었고, 수많은 백성들이 납치되거나 살해당했다.

사치스러운 연회를 열어 포로로 잡힌 적들을 잔혹하게 고문했는데, 사지를 절단하거나 혀와 눈알을 제거하거나 산 채로 불태우는 등이었다.[18]

미현(郿縣)에 만세오(萬歲塢)를 쌓고 30년 치 식량을 비축하며 장기 집권을 꾀했다.[3]

매성(郿城)의 추가 개발을 위한 자재를 구입하기 위해 종과 청동상(그중에는 십이금인 아홉 개도 포함)들을 녹여 화폐를 만들었다.[19] 동탁은 오주전을 개주조하여 소전(小錢)을 남발하는 화폐 개혁을 실시했으나, 이는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초래했다.[3]

2. 7. 최후

동탁은 여포를 매우 신임하여 양아들로 삼고 경호를 맡겼다. 그러나 사소한 일로 화가 난 동탁이 여포에게 수극을 던졌고, 여포는 민첩하게 피했지만 이 일로 앙금이 남았다.[93] 게다가 여포는 동탁의 시중드는 계집종과 몰래 정을 통하고 있었는데, 발각될까 두려워했다.[93]

왕윤상서복야 사손서와 동탁 주살을 모의하고 있었는데, 여포가 수극에 죽을 뻔한 일을 듣고 여포를 회유하였다. 여포는 처음에는 부자 사이에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펄쩍 뛰었지만, 왕윤이 ‘친부도 아닐 뿐더러 아버지아들에게 수극을 던지겠느냐’고 설득하자 결국 동참하였다.[93]

192년 4월, 동탁이 여포 등 호위병을 거느리고 궁궐로 들어가는데 기도위 이숙 등 10여 명의 습격을 받았다. 동탁은 속에 갑옷을 입은 덕에 에만 부상을 입고 수레에서 떨어졌다. 큰 소리로 여포를 찾자 여포는 “조서를 받들어 역적 동탁을 치노라”고 하였고, 동탁은 “개 같은 놈, 네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94] 란 마지막 말을 남기고 죽었다.(5월 22일, 음력 4월 23일, 신사(辛巳)일)[95]

이 소식이 알려지자 사졸들은 만세를 부르고 사람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노래하고 추며 잔치를 벌였다. 미오는 황보숭이 점령하였으며 동탁의 시체는 거리에 내버려지고 그 일족은 멸족되었다.[95] 이때 동탁의 생모인 지양군왕윤에게 끌려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살려달라고 애원했으나, 왕윤은 이를 묵살하고 '동탁을 낳은 죄'를 죄목으로 지양군을 참수했다. 동탁은 이삼만 근, 팔구만 근, 비단과 구슬 등 온갖 보물을 처럼 모아 놨었다.

3. 성격 및 특징

동탁은 거칠고 사나운 성격이었지만 지략도 갖추고 있었다. 강족들이 경외할 정도로 힘이 세고 무예가 뛰어났으며, 동개(활과 화살을 꽂아 넣어 등에 지는 물건) 두 개를 차고 을 몰면서 좌우로 을 쏠 수 있었다. 오부(伍孚)가 동탁을 암살하려 했을 때도 힘이 세서 실패했다.[96] 한편으로 매우 뚱뚱하여, 동탁의 시체에서 기름이 흘러나와 이를 지키는 관리가 배꼽 위에 심지를 놓고 을 붙이자 며칠씩이나 계속 탔다고 한다.[57]

동탁은 흉악하고 방자하며 잔인했다. 한번은 양성(陽城)에 군대를 보냈는데, 마침 백성들이 지신제를 지내고 있기에 모두 죽이고 재물과 부녀자를 취한 뒤 도적을 격파했다며 만세를 불렀다. 장안에서 공경대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었을 때는 북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항복한 수백 명을 그 자리에서 죽였다. 먼저 를 자른 다음 을 베고 눈알마저 파낸 후에 삶았으며, 미처 죽지 않은 자들은 주안상 사이로 굴러다녔다. 모두가 두려움에 벌벌 떨며 수저를 들지 못하는데 동탁만이 태연자약하게 먹고 마셨다.

동탁은 억세고 편협하며 화가 나면 뒷일을 생각하지 않는 성격이었다.[97] 동탁이 아끼는 호인 부하가 이를 믿고 제멋대로 행동하다가 사례교위 조겸(趙謙)에게 죽임을 당했다. 동탁은 이에 크게 분노하여 “내가 사랑하는 도 꾸짖지 못하게 하는데 하물며 사람은 아닐쏘냐!”라고 하며 사례도관(―都官)을 죽였다.[57] 위위 장온은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태형을 받고 목숨을 잃었으며, 동탁을 노려보기만 해도 죽임을 당했다. 호위를 맡긴 여포에게까지 사소한 이유로 수극(手戟)을 던질 정도였고, 결국 이것이 화근이 되었다.

4. 평가

진수는 동탁을 '거칠고 포악하며 사악한데다 잔인하다. 역사를 기록한 이래 이와 같은 자는 없었다'고 혹평했다.[102] 범엽은 '원래 호랑이 같은 성깔로 우연히 난세를 만나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고 평가했다.[103]

동아시아에서 동탁은 왕망, 조조 등과 함께 나라를 도탄에 빠뜨린 역적의 대명사로 취급되었다.[105] 현대에는 독재와 폭정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민주주의와 인권을 억압하는 부정적인 인물로 평가된다.

동탁에 대한 생전의 평가를 보면, 손견은 장온에게 동탁을 군율에 따라 참수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하진이 동탁을 부를 때 노식정태는 동탁의 흉악함과 욕심 때문에 반대했다.[99][57] 포신 역시 원소에게 동탁을 조속히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탁이 정권을 장악한 후 순유는 동탁 암살을 모의하며 동탁의 무도함이 걸왕, 주왕보다 심하다고 말했다.[100] 순욱조조에게 동탁이 포학함 때문에 변을 당해 망할 것이라고 평가했다.[101]

영흥(永興) 원년(304년) 겨울, 팔왕의 난에서 우장군 장방(張方)은 동탁처럼 낙양에서 부호의 재물을 빼앗고 능묘를 파헤치는 등 불도덕한 짓을 했다. 중서감 노지(盧志)는 장방에게 "동탁이 무도하게 낙양을 불태워 원망이 백 년 동안 다하지 않았다"며 방화를 그만두게 했다.[50]

덴표보지(天平宝字) 4년(760년)에 완성된 『등씨가전(藤氏家伝)』 대직관전에는 소가노 이루카(蘇我入鹿)의 정치를 "동탁(董卓)의 폭정이 이미 나라에 행해지고 있다"라고 비판하는 기록이 있으며, 이 시대 일본에서 폭군의 대표적인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

5. 가계

항목내용
부친동군아 (181년 사망)[51]
모친지양군 (103~192년),[51] 처형됨
동탁(董擢)
동생동민 (192년 사망)[51]
조카동황 (아버지는 동탁(董擢), 192년 사망)[51]
아들동씨 (171년 출생, 요절)[51], 동씨 (후작에 봉해짐)[52]
손녀동백 (178년 이후 출생),[53] 위양군(渭陽夫人) 작위
손자동씨 (186년 출생, 처형됨)[53]
사위우보
양자여포



동탁 암살 후, 왕윤 등에 의해 일족 모두 처형되었다.

6. 동탁을 섬긴 사람들

7. 관련 작품

8.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소설삼국지연의》에서 동탁은 악인으로 묘사된다. 황건적의 난 진압 과정에서 장각에게 패배하고 유비, 관우, 장비 삼형제에게 구출되지만, 의용군 신분인 그들을 업신여기는 모습으로 처음 등장한다. 이후, 조조가 칠보도(七寶刀)를 이용해 동탁 암살을 시도하다 실패하는 장면이 추가되었다.

왕윤은 양녀 초선을 이용하여 동탁과 여포 사이를 이간질하는 계략을 꾸민다. 왕윤은 초선을 여포와 동탁에게 각각 소개하고, 둘 다 초선의 미모에 빠지게 만든다. 동탁은 초선을 첩으로 삼고, 이에 분노한 여포는 왕윤의 설득으로 동탁을 살해하기로 결심한다.

동탁은 헌제의 쾌유를 축하하는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궁궐로 향하던 중, 여포와 이숙 등에게 살해당한다. 동탁의 시체는 거리에 방치되고, 배꼽에 심지가 꽂혀 불태워지는 등 참혹한 최후를 맞는다.[20]

9. 기타

동탁은 십이금인을 포함한 종과 청동상을 녹여 무게가 일정하지 않은 주화를 만들었다. 이 화폐 개혁은 실패로 돌아갔고, 삼국시대 전반에 걸쳐 지속적인 경제난을 야기했다.[3]

동탁은 낙양에서 수많은 관리들을 누명을 씌워 처형하고 백성들을 납치하거나 살해했다.[3] 래프 드 크레스피니에 따르면, 동탁의 조정과 관리들에 대한 행위는 폭력적이고 억압적이며 빈번히 유혈 사태를 일으켰다.[3] 이러한 동탁의 폭정은 후한 멸망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

동탁은 코에이(Koei)의 비디오 게임 시리즈인 삼국무쌍무쌍 오로치에 플레이어블 캐릭터로 등장하며, 수집형 카드 게임 매직: 더 개더링의 포탈: 삼국지 세트에는 동주(董卓), 폭군이라는 이름의 카드가 있다. 또한 전략 게임 토탈 워: 삼국에서 주요 세력 지도자로 등장한다.

참조

[1] 서적 Sanguo Yanyi
[2] 서적 A Biographical Dictionary of Later Han to the Three Kingdoms
[3] 서적 Fire over Luoyang: A History of the Later Han Dynasty 23–220 AD Brill 2017
[4] 웹사이트 A Biographical Dictionary of Later Han to the Three Kingdoms (23–220 AD) https://books.google[...] Brill 2006
[5] 서적 Wu Shu annotation in Sanguozhi
[6] 서적 Houhanshu
[7] 웹사이트 Fire over Luoyang : a history of the later Han dynasty, 23–220 AD https://www.worldcat[...] 2017
[8] 서적 Houhanshu
[9] 웹사이트 South China under the Later Han Dynasty https://trove.nla.go[...] Australian National University, Faculty of Asian Studies 2020-11-06
[10] 서적 Sanguozhi
[11] 서적 Houhanshu
[12] 웹사이트 Records of Han Dynasty: Zi Zhi Tong Jian 资治通鉴; or Comprehensive Mirror in Aid of Governance; Volume 9-68 https://books.google[...]
[13] 서적 Book of the Later Han
[14] 서적 Book of the Later Han
[15] 서적 Book of the Later Han
[16] 서적 Records of Three Kingdoms
[17] 서적 Annal of Emperor Xian
[18] 서적
[19] 웹사이트 西汉五铢 http://www.gov.cn/te[...]
[20] 서적 Annal of Heroes
[21] 서적 Annal of Heroes
[22] 서적 三国志事典 大修館書店 2017
[23] 웹사이트 董卓 https://kotobank.jp/[...]
[24] 서적 後漢書
[25] 서적 後漢書
[26] 서적
[27] 서적 後漢書
[28] 서적 漢紀
[29] 서적 典略
[30] 서적 九州春秋
[31] 서적 英雄記
[32] 서적 三国志
[33] 서적 献帝紀
[34] 서적 献帝起居注
[35] 서적 英雄記
[36] 문서 상국이라는 계급
[37] 문서 연의
[38] 문서 중국 관습
[39] 문서 영웅기
[40] 문서 연의
[41] 서적 한서 및 속한서
[42] 서적 후한서 朱儁전
[43] 서적 후한서
[44] 서적 삼국지 蜀지 許靖전
[45] 서적 삼국지 위지 司馬朗전
[46] 서적 헌제기
[47] 서적 헌제기
[48] 서적 삼국지 위지 呂布전
[49] 서적 태평어람 권828
[50] 서적 진서 권44 열전14 盧欽전 부 盧志전
[51] 서적 삼국지 위지 司馬朗전
[52] 서적 영웅기
[53] 서적 태평어람
[54] 서적 후한서 87권 열전 제77 서강 무익원검
[55] 서적 후한서 87권 열전 제77 서강 황중월지호
[56] 서적 후한서 8권 본기 제8 효영제 유굉 중평 2년
[57] 서적 후한서 71권 열전 제61 황보숭
[58] 서적 산양공재기
[59] 서적 후한서 8권 본기 제8 효영제 유굉 중평 4년
[60] 서적 후한서 8권 본기 제8 효영제 유굉 중평 6년
[61] 서적 삼국지 6권 위서 제6 동탁
[62] 서적 후한서 69권 열전 제59 하진
[63] 서적 후한서 70권 열전 제60 정태
[64] 서적 삼국지 권6 원소전
[65] 문서 한나라 황실의 성씨
[66] 서적 후한서 74권상 열전 제64상 원소
[67] 서적 후한서 제9권
[68] 서적 후한서 제9권
[69] 서적 영웅기
[70] 서적 후한서 제9권
[71] 서적 후한서 제9권 후한서
[72] 서적 삼국지 삼국지
[73] 서적 후한서 제10권 하 황후기 후한서
[74] 서적 후한서 제9권 후한서
[75] 서적 후한서 제9권 후한서
[76] 서적 후한서 제9권 후한서
[77] 서적 후한서 제9권 후한서
[78] 서적 후한서 제9권 후한서
[79] 서적 후한서 제9권 후한서
[80] 서적 후한서 제9권 본기 제9 효헌제 유협 초평 원년 후한서
[81] 서적 후한서 제9권 후한서
[82] 서적 후한서 제9권 후한서
[83] 웹사이트 http://www.chinajian[...]
[84] 서적 위서 왕심
[85] 서적 삼국지 1권 위서 제1 무제 조조 삼국지
[86] 서적 헌제기 유애
[87] 서적 삼국지 46권 오서 제1 손견 삼국지
[88] 서적 후한서 제9권 후한서
[89] 서적 구주춘추 구주춘추
[90] 서적 후한서 71권 열전 제61 주준 후한서
[91] 서적 후한서 제9권 후한서
[92] 서적 속한지 29권 여복상 청개거 녹거 사마표
[93] 서적 삼국지 7권 위서 제7 여포, 후한서 75권 열전 제65 여포 삼국지, 후한서
[94] 문서 庸狗敢如是邪
[95] 서적 후한서 제9권 후한서
[96] 서적 후한서 사승
[97] 서적 삼국지 7권 위서 제7 여포 삼국지
[98] 서적 삼국지 46권 오서 제1 손견 삼국지
[99] 서적 후한서 64권 열전 제54 노식 후한서
[100] 서적 삼국지 10권 위서 제10 순유 삼국지
[101] 서적 삼국지 10권 위서 제10 순욱 삼국지
[102] 서적 삼국지 6권 위서 제6 유표 삼국지
[103] 문서 有盜竊之道
[104] 서적 삼국지 6권 위서 제6 유표 삼국지
[105] 서적 양한변망론, 삼국사기 50권 열전 제10 견훤,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 6권, 송자대전 14권 소 권덕여, 삼국사기, 조선왕조실록, 송시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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