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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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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윤은 태원 출신의 후한 시대 관리로, 19세에 관직에 나선 후 여러 차례 환관과 권력자들의 횡포에 맞서며 청렴한 면모를 보였다. 황건적의 난 당시 예주자사로 활약했으며, 동탁이 정권을 잡은 후에는 동탁 암살을 계획하고, 양녀 초선을 이용한 연환계로 여포와 동탁의 관계를 이간질하여 동탁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동탁 사후, 동탁 잔당의 공격으로 장안이 함락되고 이각에게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사후 헌제는 그의 충절을 기려 호분중랑장에 추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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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왕윤의 초상화
청나라 시대의 왕윤 삽화
이름왕윤
로마자 표기Wang Yun
자사 (子師)
출생137년
출생지기현, 산시성
사망192년 (55세)
사망지시안, 산시성
가족 관계왕홍 (동생)
왕침 (조카)
왕릉 (조카)
영호우의 어머니 (조카딸)
곽회의 아내 (조카딸)
자녀왕개
왕경
왕정
직업정치인
관직
녹상서사192년
군주헌제
사도190년–192년
군주헌제
상서령189년–192년
군주헌제
태복189년
군주헌제
하남윤189년
군주소제
예주자사184년–?
군주영제
주요 활동 시기
후한 시기168년 ~ 189년
후한 시기189년 ~ 220년

2. 생애 전반기

후한 말기의 관리. 자는 자사(子師)이며, 태원군 기현(祁縣) 출신이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지방 관리를 배출한 명문가였으며, 왕윤 자신도 19세에 관리가 되었다. 젊은 시절부터 절개가 있어 명망 높은 학자 곽태(郭泰)로부터 왕을 보좌할 만한 재목이라는 평을 받았다.

태원의 관리로 있을 때, 지역의 근심거리였던 환관 조진(趙津)을 태수 유질(劉瓆)의 명으로 처단했으나, 이 일로 조진의 형제들이 환관 세력에게 모함하여 유질은 옥중에서 사망했다. 왕윤은 유질의 장례를 치르고 3년상을 마친 뒤 복직했다.[9][10] 이후 새로 부임한 태수 왕구(王球)가 부적절한 인물을 등용하려 하자 강직하게 반대하다가 투옥될 뻔했으나, 병주자사 등성의 도움으로 풀려나 그의 별가종사(別駕從事)가 되면서 명성을 얻었다.

광화 7년(184년) 황건적의 난이 발발하자 예주자사로서 이를 성공적으로 진압했다. 그러나 진압 과정에서 환관 장양과 황건적의 내통 증거를 발견하여 고발했으나, 영제는 장양을 용서했다. 오히려 이 일로 장양의 원한을 사 모함을 받아 투옥되고 처형될 위기에 놓였다. 태위 양사 등이 자결을 권유했으나 왕윤은 거부했고, 대장군 하진 등의 구명 노력 덕분에 사형을 면하고 종사중랑(從事中郞)이 되었다.

영제 사후 하진이 정권을 잡자 중앙 정계로 복귀하여 황문시랑(黃門侍郎)을 거쳐 하남윤(河南尹)으로 승진했다. 동탁 집권 후에는 양표를 대신하여 사도(司徒)와 상서령(尙書令)을 겸임했다.[2][3]

2. 1. 관리 생활과 투옥

젊은 시절, 명망 높은 유학자 곽태(郭泰)로부터 “왕좌의 재능을 가진 인물”이라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후한서》에 따르면 왕윤은 태원군 기현 출신으로, 대대로 지방 관리를 배출한 명문가 자제였으며, 19세에 관리가 되었다.

155년(또는 166년) 경, 태원의 관리로 재직할 당시, 지역에서 횡포를 부리던 소황문(小黃門) 조진(趙津)을 태수 유질(劉瓆)의 명을 받아 체포하여 처형했다. 이 일로 원한을 품은 조진의 형제들이 중앙의 환관 세력에게 뇌물을 주어 모함하였고, 결국 태수 유질은 투옥되어 죽음을 맞이했다. 왕윤은 유질의 관을 직접 그의 고향인 평원까지 운구하고, 부모상과 같이 3년상을 치른 후에야 관직에 복귀했다.[9][10]

이후 새로 부임한 태수 왕구(王球)가 부적절한 인물인 노불(路佛)을 등용하려 하자 왕윤은 강하게 반대했다. 이에 분노한 왕구가 왕윤을 투옥하고 죽이려 했으나, 이 소식을 들은 병주 자사 등성이 개입하여 왕윤을 구출하고 자신의 별가종사(別駕從事)로 삼았다. 이 일을 계기로 왕윤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광화 7년(184년) 황건적의 난이 발발했을 때, 왕윤은 예주 자사로서 순상, 공융 등 명망 있는 인물들을 등용하여 황건적을 성공적으로 토벌했다. 이 과정에서 왕윤은 황건적이 십상시 중 하나인 장양과 내통한 증거(편지)를 발견하고 이를 조정에 고발했다. 하지만 영제는 장양이 간절히 사죄하자 그를 용서하였고, 오히려 이 일로 장양의 원한을 사게 된 왕윤은 모함을 받아 투옥되어 처형될 위기에 놓였다. 당시 태위였던 양사는 치욕을 당하기 전에 자결할 것을 권유하기도 했으나, 왕윤은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다행히 대장군 하진을 비롯한 여러 대신들의 적극적인 구명 운동 덕분에 사형을 면할 수 있었다. 이후 사면되어 종사중랑(從事中郞)이 되었다.

2. 2. 황건적의 난 진압

광화 7년(184년)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당시 예주자사였던 왕윤은 순상, 공융 등을 참모로 삼아 황건적 토벌에 나섰고, 성공적으로 황건군을 격파하였다.

진압 과정에서 왕윤은 자신이 무찌른 황건적에게서 십상시 중 한 명인 장양이 보낸 편지를 발견하였다. 이는 장양이 황건적과 내통하고 있었다는 증거로, 왕윤은 이 편지를 조정에 바치며 장양의 죄를 고발했다. 영제는 처음에는 노여워했으나, 장양이 간곡히 사죄하자 마음을 돌려 그를 용서하고 벌을 내리지 않았다.

오히려 이 일로 왕윤은 장양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양은 왕윤을 모함했고, 결국 왕윤은 조정으로 불려와 투옥되어 처형당할 위기에 놓였다. 당시 태위였던 양사는 왕윤에게 장양에게 치욕을 당하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고 권유하기도 했고, 예주의 부하 중에서도 자결용 독약을 건네는 이가 있었으나 왕윤은 이를 거부했다. 다행히 대장군 하진을 비롯한 여러 인물들이 왕윤의 구명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 사면을 탄원한 결과, 왕윤은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이후 종사중랑(從事中郞)이 되었다.

3. 동탁 집권기의 활동

189년 하진과 십상시가 제거된 혼란 속에서 동탁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190년 2월 1일, 동탁은 왕윤을 사도(司徒)와 상서령(尙書令)에 임명하여 양표의 뒤를 잇게 했다.[11][2][3]

동탁은 소제를 폐위하고 살해했으며, 반동탁 연합군이 일어나자 낙양을 불태우고 장안(長安)으로 강제 천도를 단행하는 등 폭정을 일삼았다. 또한 장온원술과 내통했다는 구실로 무고하여 살해하고[7], 항복한 병사들을 잔혹하게 처형하는[7] 등 포악한 행동으로 인망을 잃었다.

왕윤은 이러한 동탁의 폭정을 지켜보면서도 겉으로는 그의 뜻에 순응하며 정사를 처리하여 동탁의 신임을 얻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동탁의 잔혹함과 황위 찬탈 의도를 간파하고, 친구인 황완, 부하인 사손서(士孫瑞) 등 뜻을 같이하는 관리들과 함께 동탁 제거를 비밀리에 모의했다.[4] 동탁 암살 계획에는 그의 양아들이자 무장인 여포(呂布)를 끌어들였다. 192년 5월 22일(음력 4월 23일), 왕윤은 여포 등을 통해 궁궐로 들어서던 동탁을 성공적으로 암살하였다.[12][4] 동탁의 죽음은 오랫동안 그의 폭정에 시달렸던 조정과 백성들에게 큰 기쁨을 안겨주었다. 동탁 사후, 왕윤은 녹상서사(錄尙書事)가 되어 여포와 함께 잠시 조정을 이끌었다.

3. 1. 동탁 암살 계획

189년 하진 사후 동탁이 정권을 잡자 190년 왕윤은 양표를 대신하여 사도(司徒)와 상서령(尙書令)을 겸임하게 되었다.[2][3] (2월 1일)[11] 동탁은 소제를 살해하고 낙양을 불태우며 장안(長安)으로 강제 천도를 단행하는 등 폭정을 일삼았고, 장온원술과 내통했다는 구실로 무고하여 채찍으로 때려 죽였으며[7], 유혹을 거절한 미망인을 몽둥이로 살해하고[7] 항복한 병사의 신체를 절단하는 등[7] 잔혹하고 난폭한 행위를 거듭하여 인망을 잃었다. 왕윤은 정사를 잘 처리하며 겉으로는 동탁에게 순종하는 척했지만, 남몰래 동탁을 제거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는 친구인 황완과 부하 사손서(士孫瑞) 등 다른 관리들과 함께 동탁 암살 계획을 세웠다.[4]

계획의 성공을 위해 왕윤은 동탁의 양자이자 뛰어난 무장이었던 중랑장(中郞將) 여포(呂布)를 끌어들이려 했다. 여포는 이전에 동탁의 뜻을 거스르다 동탁이 던진 수극(手戟)에 맞을 뻔한 일이 있었고, 동탁의 시녀와 사통한 사실이 발각될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왕윤은 자신을 찾아온 여포의 불안감을 이용하여 암살 계획을 털어놓고 동참할 것을 권유했다. 여포가 동탁과의 부자 관계 때문에 망설이자, 왕윤은 본래 남남이었음을 강조하며 설득하여 결국 가담시켰다.

192년 4월, 헌제(獻帝)의 병환이 나은 것을 축하하는 잔치가 미앙전(未央殿)에서 열렸다. 왕윤은 상서복야(尙書僕射) 사손서에게 동탁을 주살하라는 거짓 조서를 쓰게 하여 여포에게 전달했다. 여포는 고향 친구인 이숙(李肅)과 함께 북액문(北掖門)을 지키고 있다가, 궁궐로 들어오려던 동탁을 수십 명의 병사와 함께 포위하여 살해했다.[4] (5월 22일, 음력 4월 23일)[12] 동탁의 죽음에 조정과 백성들은 크게 기뻐하였다.

3. 2. 연환계와 동탁 암살

189년 하진은 왕윤을 하남윤(河南尹)으로 임명하였고, 이후 태복(太僕)으로 삼았다. 하진과 십상시가 제거되고 동탁이 정권을 장악하자, 왕윤은 190년 2월 1일에 사도(司徒)에 임명되었다.[11] 반동탁 연합군이 결성되어 낙양을 압박하자, 동탁은 낙양에 불을 지르고 장안(長安)으로 강제 천도를 단행했다. 왕윤은 정사를 능숙하게 처리하며 겉으로는 동탁에게 복종하는 모습을 보여 그의 의심을 피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동탁을 제거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당시 동탁의 양아들이자 중랑장(中郞將)이었던 여포는 동탁의 비위를 거스른 일로 인해 동탁이 던진 수극(手戟)에 맞을 뻔한 일이 있었다. 또한 여포는 동탁의 시녀와 사사로이 관계를 맺은 사실이 발각될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평소 자신에게 호의적이던 왕윤을 찾아간 여포가 이러한 사정을 털어놓자, 왕윤은 동탁 제거 계획을 밝히며 여포의 동참을 설득했다. 여포가 동탁과의 양부자 관계 때문에 망설이자, 왕윤은 본래 혈연관계가 아님을 강조하며 거사를 결심하도록 부추겼다.

192년 4월, 헌제(獻帝)의 병이 회복된 것을 축하하는 연회가 미앙전(未央殿)에서 열리게 되었다. 왕윤은 자신과 뜻을 함께하던 상서복야(尙書僕射) 사손서(士孫瑞)에게 동탁을 처단하라는 거짓 조서를 만들게 하여 여포에게 전달했다. 여포는 이 조서를 명분 삼아 고향 친구인 이숙(李肅) 등과 함께 북액문(北掖門)을 지키고 있다가, 궁궐로 들어서는 동탁을 살해했다(192년 5월 22일, 음력 4월 23일).[12] 조정과 백성들은 폭정을 일삼던 동탁의 죽음을 크게 기뻐하였다.

동탁 사후 조정에서는 왕윤을 녹상서사(錄尙書事)로 삼았고, 의동삼사(儀同三司)가 된 여포와 함께 정무를 총괄하게 했다. 한편, 왕윤과 함께 있던 채옹(蔡邕)이 동탁의 죽음을 듣고 탄식하자, 왕윤은 그를 처형하려 했다. 채옹은 목숨을 부지하여 한나라의 역사를 완성하기를 원했고, 태위 마일제(馬日磾) 역시 채옹의 구명을 청했으나, 왕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채옹을 옥에 가두었다. 뒤늦게 왕윤이 옥사를 찾았을 때는 이미 채옹이 죽은 뒤였다. 동탁 사후 서량 군벌 처리 문제에 대해서는, 왕윤이 동탁이 제거되었으니 큰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여 방치했다는 시각도 있지만, <<팔가집주>>에서는 당시 국법상 1년에 두 번의 대사면을 내리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에 동탁의 잔당을 사면하지 못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4. 최후

동탁 사후 실권을 잡은 왕윤은 동탁의 잔당인 이각, 곽사 등의 사면 요청을 거절했다. 이는 이각과 곽사가 가후의 계책을 받아들여 장안을 공격하는 계기가 되었다. 왕윤은 여포에게 방어를 맡겼으나, 성 내부의 배신과 반란으로 인해 장안은 함락되었다. 여포는 왕윤에게 함께 탈출할 것을 권했지만, 왕윤은 어린 헌제를 두고 갈 수 없다며 거절하고 죽음을 각오하며 장안에 남았다. 장안을 점령한 이각과 곽사에게 체포된 왕윤은 192년 6월, 일족과 함께 처형되었다.[13] 왕윤의 옛 부하였던 조전(趙戩)이 위험을 무릅쓰고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렀다. 훗날 허창으로 천도한 후, 헌제는 왕윤의 충절을 기려 그를 호분중랑장(虎賁中郞將)으로 추증하고 손자 왕흑(王黑)을 안락정후(安樂亭侯)에 봉했다.[13]

4. 1. 이각과 곽사의 난

동탁 사후 실권을 잡은 왕윤은 공을 세운 여포를 분위장군(奮威將軍)으로 임명하고 온후(溫侯)에 봉했다. 또한 동탁의 일족과 잔당을 숙청했는데, 이 과정에서 명망 높은 문인이었던 채옹도 동탁의 죽음을 슬퍼했다는 이유로 투옥시킨 뒤 사형에 처했다.

왕윤은 여포 등 많은 이들의 건의에도 불구하고, 옛 동탁 휘하의 양주 병사들에 대한 사면을 "1년에 두 번 사면하는 것은 관례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거부하고 추방을 결정했다.[8] 또한 여포 등이 동탁의 재산을 병사들에게 상여로 분배하자는 제안도 거절했다. 이러한 왕윤의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 대처는 이각곽사 등 동탁 잔당들의 반발을 샀다. 더불어 왕윤이 평소 여포를 경시하고 여포 또한 자신의 공을 자주 내세우면서 둘 사이의 관계도 점차 악화되었다.

동탁의 옛 부하였던 이각, 곽사 등 양주 출신자들은 왕윤에게 사면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자, 가후의 계책에 따라 군사를 모아 장안으로 쳐들어왔다. 왕윤은 여포에게 이들을 막게 했으나, 장안성 안에서 호진과 양정 등이 배신하고 익주 출신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켜 6월 1일 이각군을 성 안으로 끌어들이면서 전세는 급격히 불리해졌다.

패배한 여포는 왕윤에게 함께 달아날 것을 권유했지만, 왕윤은 어린 헌제를 홀로 남겨둘 수 없다며 거절하고 죽음을 각오했다. 그는 여포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장안에 남았다.

"나라의 안녕이 나의 소원이었습니다. 그것이 이루어질 수 없다면 목숨을 버리는 것까지 각오했습니다. 조정에서는 어린 폐하께서 나만을 의지하고 계십니다. 이런 때에 나 혼자만 살아남는다는 것은 도저히 할 수 없습니다. 부디 관동의 제후들에게 잘 부탁드립니다. 천하의 일을 잊지 말라고 전해주십시오."

장안을 점령한 이각과 곽사 등은 헌제가 있는 곳까지 나아가 왕윤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왕윤이 스스로 걸어 나오자, 이각 등은 "동탁이 무슨 죄를 지었느냐"며 그를 꾸짖었다. 이들은 왕윤의 형으로 외지에서 벼슬하던 왕굉과 송익(宋翼)을 장안으로 불러들여, 6월 7일 왕윤과 함께 처형했다. 당시 왕윤의 나이는 57세였다. 이각은 왕윤의 시체를 거리에 내걸고, 그의 장남인 시중(侍中) 왕개(王蓋)와 차남 왕경정(王景定)을 포함한 일족 10여 명을 살해했다. 장안의 많은 사람들이 이를 보고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왕윤의 옛 부하였던 조전(趙戩)은 위험을 무릅쓰고 왕윤의 시체를 거두어 장사를 지내주었다. 훗날 조전이 위 무왕에게 발탁된 것은 이때 보여준 의리 때문이었다.

후일 허로 천도한 후, 헌제는 왕윤의 충절을 기려 그를 호분중랑장(虎賁中郞將)으로 추증하고, 손자 왕흑(王黑)을 안락정후(安樂亭侯)에 봉하며 식읍 300호를 내렸다.[13]

4. 2. 죽음

동탁 사후, 왕윤은 공을 세운 여포를 분위장군(奮威將軍)으로 삼고 온후(溫侯)에 봉했다. 동시에 동탁의 일족을 모두 찾아내 처형하고, 동탁의 당여로 간주된 관리들을 숙청했는데, 여기에는 저명한 문인 채옹도 포함되었다. 채옹은 동탁에게서 받은 은혜 때문에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는 이유로 투옥되었고, 옥중에서 역사서 편찬을 이어가려 했으나 결국 처형당했다.[8]

동탁의 옛 부하였던 이각, 곽사 등 양주(涼州) 출신 장수들은 왕윤에게 사면을 요청했으나, 왕윤은 "한 해에 사면을 두 번이나 하는 것은 전례에 없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하고 추방을 결정했다.[8] 또한, 여포 등이 동탁이 모은 재산을 병사들에게 포상으로 나누어 주자고 건의했지만, 왕윤은 이마저도 거부했다. 이러한 원칙에 얽매인 융통성 없는 대처는 결국 스스로의 몰락을 자초하는 결과를 낳았다. 더불어 왕윤이 평소 여포를 가볍게 대하고, 여포 또한 자신의 공을 자주 내세우면서 두 사람 사이의 관계는 점차 나빠지고 있었다.

궁지에 몰린 이각과 곽사는 가후의 계책을 받아들여 군사를 일으켜 장안으로 진격했다. 왕윤은 여포에게 이들을 막도록 했으나, 장안성 안에서 익주(益州) 출신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호진, 양정 등이 배신하면서 전세는 급격히 불리해졌다. 결국 192년 6월 1일, 이각과 곽사의 군대는 장안성을 함락시켰다.

성 함락 직전, 여포는 왕윤에게 함께 탈출할 것을 권유했으나, 왕윤은 헌제를 두고 떠날 수 없다며 거절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죽음을 각오하고 장안에 남았다.

: "나라의 안녕이 나의 소원이었습니다. 그것이 이루어질 수 없다면 목숨을 버리는 것까지 각오했습니다. 조정에서는 어린 폐하(헌제)께서 나만을 의지하고 계십니다. 이런 때에 나 혼자만 살아남는다는 것은 도저히 할 수 없습니다. 부디 관동의 제후들에게 잘 부탁드립니다. 천하의 일을 잊지 말라고 전해주십시오."

장안을 점령한 이각과 곽사 등은 헌제가 머무는 곳까지 나아가 왕윤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그들은 스스로 걸어 나온 왕윤에게 동탁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죽였냐며 꾸짖었다. 결국 6월 7일(음력), 왕윤은 외지에서 벼슬하던 형 왕굉과 송익(宋翼)과 함께 처형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향년 57세였다. 이각 등은 왕윤의 시신을 거리에 내걸었으며, 장남인 시중(侍中) 왕개(王蓋)와 차남 왕경정(王景定)을 포함한 일가족 10여 명도 함께 살해했다. 왕윤의 죽음에 장안의 백성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왕윤의 옛 부하였던 조전(趙戩)은 위험을 무릅쓰고 왕윤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렀다.[13] 조전은 훗날 이러한 의리 덕분에 위 무왕에게 발탁되었다. 왕윤의 친척 중 일부는 난리 통에 탈출하여 목숨을 건졌는데, 그중 한 명인 왕릉은 훗날 삼국 시대 조위의 중요한 장수가 되었다.

훗날 허창으로 수도를 옮긴 후, 헌제는 왕윤의 충절을 기려 그를 호분중랑장(虎賁中郞將)으로 추증하고, 손자인 왕흑(王黑)을 안락정후(安樂亭侯)에 봉하여 식읍 300호를 하사했다.[13] 왕윤의 묘는 현재 허창시 교외에 남아 있다.

후한서의 저자 반엽은 “왕윤이 동탁을 따랐던 것은 그의 허점을 노리기 위함이었으며, 그의 본심은 (황실에 대한) 충성이었다”고 평가했다. 또한 동전찬(同傳贊)은 “어려운 시기에 계책을 내고 절개를 지켰으나, 공은 이루었어도 그 시작이 순탄치 않았고 결국 잔당을 남기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논평했다.[6]

5. 평가

후한 말기의 혼란 속에서 동탁을 제거하여 헌제를 구하고 왕조를 바로 세우려 한 충신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과감한 결단력과 실행력은 높이 평가할 만하며, 특히 여포와 협력하여 동탁을 주살한 것은 큰 공적으로 인정된다.

그러나 동탁 사후 처리 과정에서의 경직된 태도와 융통성 부족은 많은 비판을 받으며[6], 결국 스스로의 몰락을 초래했다는 지적도 있다. 따라서 왕윤에 대한 평가는 그의 충성심과 공적을 인정하는 긍정적 측면과, 이후의 실책으로 인한 부정적 측면이 공존한다.

5. 1. 부정적 평가

동탁 사후 그의 잔당 처리에 있어 왕윤의 대처는 여러 비판점을 남겼다. 그는 동탁의 일족과 당파로 여겨지는 관리들을 숙청했는데, 이 과정에서 문인으로 명망 높던 채옹까지 포함되었다. 채옹은 동탁에게서 받은 은혜를 생각하여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는 이유로 투옥되었고, 옥중에서 역사서 편찬을 마저 하려 했으나 결국 사형에 처해졌다. 이는 왕윤의 융통성 없는 일면을 보여주는 사례로 지적된다.

또한, 여포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옛 동탁 휘하의 양주 병사들을 사면해 안정을 도모할 것을 건의했으나, 왕윤은 “1년에 두 번 사면하는 것은 관례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이를 고집스럽게 거부하고 추방을 결정했다.[8] 더불어 여포 등이 동탁의 막대한 재산을 협력한 병사들에게 상여금으로 나누어 주자고 제안했을 때도 이를 거부하여 병사들과 장수들의 불만을 샀다. 이러한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대응은 훗날 그의 몰락을 자초하는 원인이 되었다.

왕윤은 평소 여포를 다소 가볍게 여기는 태도를 보였고, 여포 또한 자신의 공적을 내세우는 일이 잦아 둘 사이의 관계는 점차 악화되었다. 이는 동탁 제거라는 공동의 목표를 달성한 이후 내부 결속을 다지는 데 실패했음을 보여준다.

결국 사면을 거부당한 이각, 곽사 등 동탁의 옛 부하들은 가후의 조언을 받아 장안으로 쳐들어왔다. 이때 왕윤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호진, 양정 등이 배신하면서 왕윤과 여포는 패배했다. 왕윤은 여포의 탈출 권유를 거절하고 장안에 남아 이각 등에게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후세의 역사가 반엽은 왕윤의 충성심과 동탁 제거의 공을 인정하면서도, 그가 동탁의 잔당을 남겨 화근을 자초했다고 평가하며 그의 마무리 능력 부족을 지적했다.[6]

6. 가계

후한서》에 따르면 왕윤은 태원군 기현 출신이다.[2][3] 그의 가문은 여러 세대에 걸쳐 지방 관리를 배출한 명문가였다.

동탁 사후 이각곽사의 난 때 왕윤과 그의 일가 대부분이 살해되었으나, 일부 친척들은 탈출하여 살아남았다. 그중 한 명인 왕릉은 훗날 삼국시대 조위의 장군이 되었다.

7. 대중문화 속의 왕윤

왕윤은 특히 14세기 역사 소설 『삼국지연의』를 통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이 소설에서 왕윤은 후한 말기의 혼란 속에서 폭정을 일삼는 동탁을 제거하기 위해 지략을 발휘하는 충신으로 묘사된다. 그는 자신의 수양딸로 설정된 가상의 인물 초선을 이용하여 동탁여포의 사이를 이간질하는 미인계연환계를 성공시켜 동탁을 제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러한 극적인 설정 덕분에 왕윤은 여러 삼국지 관련 창작물에서 중요한 인물로 다루어진다.

7. 1. 삼국지연의

왕윤이 이각과곽사 앞에서 자결하는 모습. 삼국지연의 청나라 판본의 판화.


14세기 역사소설 『삼국지연의』에서 왕윤은 중요한 인물로 등장하며, 주로 두 장에 걸쳐 그의 활약이 묘사된다. 이 소설은 후한 말기와 삼국 시대의 사건을 바탕으로 하며, 왕윤은 폭정을 일삼는 동탁을 제거하기 위해 정교한 계략을 꾸미는 인물로 그려진다. 특히 삼십육계미인계연환계를 활용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소설 속에서 동탁이 정권을 잡고 폭정을 일삼자, 왕윤은 자신의 생일에 여러 신하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어지러운 현실을 개탄한다. 이때 조조가 동탁 암살을 자처하자, 왕윤은 그에게 칠성보도를 주며 성공을 기원한다. 그러나 조조의 암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조조는 진류로 달아나 반동탁 연합군을 일으키는 계기가 된다.

동탁이 연합군에 밀려 장안으로 천도한 후에도 그의 폭정이 계속되자, 왕윤은 동탁을 제거할 새로운 계획을 세운다. 그는 자신의 집에서 가수로 일하며 딸처럼 아끼던 초선을 이용하여 동탁과 그의 심복인 여포 사이를 이간질하는 '연환의 계'를 실행에 옮긴다.

제8장에서 왕윤은 먼저 여포를 초대하여 초선의 미모와 춤을 보여주고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한다. 며칠 후 동탁을 초대해서도 똑같이 초선을 보여주는데, 동탁 역시 초선에게 반하자 왕윤은 동탁이 초선을 데려가도록 내버려 둔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여포는 왕윤과 동탁에게 크게 분노한다. 어느 날, 동탁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여포는 초선을 찾아가고, 초선은 눈물로 동탁에게서 구해달라고 호소한다. 이때 돌아온 동탁은 여포가 초선과 함께 있는 것을 보고 격노하여 여포에게 극을 던지지만 여포는 간신히 피한다. 이후 동탁이 초선에게 여포와의 관계를 묻자, 초선은 차라리 죽겠다며 자결을 시도하여 동탁을 안심시킨다.

제9장에서 왕윤은 동탁에 대한 여포의 커진 분노를 이용하여 그를 설득하고 동탁 암살 계획에 끌어들인다. 왕윤은 이숙을 시켜 헌제가 동탁에게 선양하려 한다는 거짓 정보를 흘려 동탁을 궁궐로 유인한다. 궁궐 문 근처에 미리 매복해 있던 여포는 동탁을 성공적으로 암살한다.

그러나 동탁이 죽은 후, 그의 잔당인 이각곽사가 군대를 이끌고 장안을 공격하여 함락시킨다. 소설의 묘사에 따르면, 왕윤은 이각과 곽사에게 헌제를 해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은 뒤 성문 위 누각에서 뛰어내려 자결하는 것으로 최후를 맞는다.

『삼국지연의』에서 묘사된 양녀 초선을 이용한 연환계는 실제 역사 기록에는 없는 소설적 창작으로 평가받는다. 이는 여포가 동탁의 시녀와 사사로이 정을 통했다는 정사의 기록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이야기로 여겨진다. 또한, 조조에게 칠성보도를 건네준 이야기 역시 소설 고유의 설정이다.

7. 2. 기타 창작물


  • 미야기타니 마사미츠 저, 《삼국지 명신열전 후한편》 (분게이슌주, 2018년)

참조

[1] 서적 Book of the Later Han Houhanshu 192-07-04
[2] 서적 Houhanshu
[3] 서적 Houhanshu
[4] 서적 Sanguozhi
[5] 서적 후한서
[6] 서적 후한서
[7] 서적 후한서
[8] 서적 후한서
[9] 서적 후한서, 자치통감
[10] 서적 후한서
[11] 서적 후한서
[12] 서적 후한서
[13] 서적 후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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