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장예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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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효장예황후는 명나라 영종의 황후로, 토목의 변으로 영종이 포로로 잡히고 형제들이 전사하는 시련을 겪었다. 영종이 복위한 후 다시 황후가 되었으며, 영종 사후 황태후가 되었다. 성화제 즉위 후 자의황태후의 존호를 받았으며, 사후 효장헌목홍혜현인공천흠성예황후의 시호와 유릉의 능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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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장예황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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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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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 전오원 (錢晤圓) |
씨족 | 전 (錢) |
가문 | 전 (錢) |
아버지 | 전국 (錢貴) |
어머니 | 진씨 (陳氏) |
형제 | 전기, 전종 (錢欽, 錢鐘) |
작위 | |
황후 | 황후 |
재위 (1차) | 1442년 ~ 1449년 |
전임자 (1차) | 효공장황후(恭讓章皇后) |
후임자 (1차) | 효연경황후(孝淵景皇后) |
황후 (복위) | 황후 |
재위 (2차) | 1457년 ~ 1464년 |
전임자 (2차) | 숙효황후(肅孝皇后) |
후임자 (2차) | 폐후 오씨(廢后 吳氏), 효정순황후(孝貞純皇后) |
황태후 | 황태후 |
재위 (황태후) | 1464년 ~ 1468년 |
전임자 (황태후) | 효공장황후(孝恭章皇后), 효익황태후(孝翼皇太后) |
후임자 (황태후) | 효숙황후(孝肅皇后) |
시호 | 효장헌목홍혜현인공천흠성예황후 (孝莊獻穆弘惠顯仁恭天欽聖睿皇后) |
능묘 | 유릉(裕陵) |
존호 | 자의황태후 (慈懿皇太后) |
생애 | |
출생 | 선덕 원년 (1426년) |
출생지 | 해주 (海州, 현재의 롄윈강 시) |
사망 | 성화 4년 (1468년) |
사망지 | 순천부 자금성 |
배우자 | 정통제(正統帝) |
결혼 | 1442년 ~ 1464년 (사망) |
매장일 | 1468년 9월 4일 |
2. 생애
효장예황후는 정통 7년(1442년) 태황태후 장씨의 점지로 황후에 책봉되었으나, 1449년 토목의 변으로 영종이 몽골군에 포로로 잡히면서 시련을 겪었다. 명나라 신하들은 성왕 주기옥을 황제로 추대했고, 영종은 태상황으로 물러났다. 전황후는 이 과정에서 큰 충격을 받아 젖은 땅에 누워 울부짖으며 날마다 하늘에 눈물로 호소하여 건강이 악화되어 오른쪽 눈을 잃고 다리가 불편하게 되었다.[3]
탈문의 변으로 영종이 복위되면서 황후로 다시 복위되었으나, 영종과의 사이에서 자녀를 두지 못했다.[4] 천순 8년(1464년) 영종이 사망하자 황태후가 되었고, 4년 후인 성화 4년(1468년)에 세상을 떠났다. 사후 영종과의 합장이 주씨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효장헌목홍혜현인공천흠성예황후'라는 시호를 받았다.
2. 1. 초기 생애 (1426년 ~ 1442년)
회안부해주 출신으로, 정2품 도독동지 전귀의 딸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진씨이다.[2]정통 7년(1442년) 5월, 태황태후 장씨에게 간택되어 영종의 황후가 되었다. 영종을 한결같이 사랑했다.
2. 2. 황후 간택과 책봉 (1442년)
정통 7년(1442년) 태황태후 장씨의 선택으로 황후로 책봉되었다. 정통 14년(1449년) 토목의 변으로 영종이 몽골에 포로로 잡히자, 신하들이 성왕(郕王) 주기옥(朱祁鈺)을 황제로 추대하여 정통제는 명목상 태상황(太上皇)으로 물러났다. 이후 탈문의 변으로 정통제가 복위하자, 전씨는 황후로 복위되었다.[3]회안부해주 출신으로, 정2품 도독동지 전귀의 딸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진씨이다.[2]
정통 7년(1442년) 5월, 태황태후 장씨에게 간택되어 영종의 황후가 되었다. 영종을 한결같이 사랑했으며, 토목의 변으로 영종이 포로로 잡히고 형제 2명(전흠, 전종)이 전사했다.[3] 인수궁(선제의 비빈이 거처하는 곳)으로 옮겨진 전황후는 충격으로 젖은 땅에 누워 울부짖으며, 날마다 하늘에 눈물로 호소하여 신체에 장애를 얻어 오른쪽 눈을 실명하고 다리가 불편하게 되었다고 한다. 탈문의 변으로 영종이 복위하자, 다시 황후로 세워졌다.
2. 3. 토목의 변과 시련 (1449년 ~ 1457년)
1449년 토목의 변으로 정통제가 몽골군의 포로가 되자, 몽골군은 몸값을 요구했다. 전황후와 시어머니는 즉시 몸값을 마련했으나,[3] 몽골군은 정통제를 인질로 잡아두는 것을 선호하여 몸값 제안을 거부했다. 조정은 정통제에게 태상황제 지위를 부여하고 그의 이복동생 주기옥을 황제로 임명했다.[3] 전황후는 왕황후가 황후 지위를 얻을 수 있도록 궁궐에서 별도의 궁으로 옮겨졌다.[3]1450년 9월 19일, 남편 정통제가 몽골에 의해 베이징으로 돌아오자, 전황후는 황성 안의 경비 구역에서 그와 함께 가택 연금되었다.[3]軟禁|롼진중국어 1452년 그녀의 남편의 유일한 아들(미래의 성화제)이 황태자에서 폐위되었을 때, 그는 육체적 고난 속에서 전황후와 함께 살도록 보내졌다.[3] 1457년 쿠데타로 남편이 천순제로 다시 황위에 오르자, 전황후는 황후로 복위되었다.[3]
토목의 변 당시, 전황후는 충격으로 젖은 땅에 누워 울부짖으며 날마다 하늘에 눈물로 호소했고, 이로 인해 오른쪽 눈을 실명하고 다리가 불편하게 되었다고 한다.[3]
2. 4. 황후 복위 (1457년 ~ 1464년)
정통 14년(1449년) 토목의 변으로 영종이 몽골에 포로로 잡히자, 신하들이 성왕(郕王) 주기옥(朱祁鈺)을 황제로 추대하여 정통제는 명목상 태상황제로 물러났다. 이후 탈문의 변이 일어나 정통제가 복위되자, 전씨는 황후로 복위되었다.[2]토목보의 변에서 정통제가 포로로 잡히자 몽골은 몸값을 요구했고, 전황후와 시어머니는 즉시 몸값을 마련했다.[3] 그러나 몽골은 정통제를 인질로 잡아두는 것을 선호하여 몸값 제안을 거부했고, 명 조정은 정통제에게 태상황제 지위를 부여하고 그의 이복동생 주기옥을 황제로 임명했다.[3] 전황후는 왕황후가 황후 지위를 얻을 수 있도록 궁궐에서 별도 궁궐로 옮겨졌다.[3]
1450년 9월 19일, 몽골은 영종을 베이징으로 돌려보냈고, 전황후는 영종과 함께 황성 안 경비 구역에서 가택 연금되었다.[3] 1452년 영종의 유일한 아들(미래의 성화제)이 황태자에서 폐위되었을 때, 그는 육체적 고난 속에서 전황후와 함께 살도록 보내졌다.[4] 1457년, 쿠데타로 영종이 천순제로 다시 황위에 오르자, 전황후는 황후로 복위되었다.[3]
2. 5. 황태후 시절과 갈등 (1464년 ~ 1468년)
천순 8년 (1464년)에 천순제(정통제)가 죽자, 효장예황후는 황태후에 봉해졌다. 건태황후(乾泰皇后)는 자녀가 없었고, 성화제가 뒤를 이었다. 효장예황후는 새 황제의 생모인 효숙황후와 갈등을 겪게 되었다.[4] 효숙황후는 황제의 어머니로서 건태황후와 같은 황태후 칭호를 요구했다. 효숙황후는 건태황후에게 자녀가 없는 반면 자신은 황제의 어머니임을 지적했고, 건태황후는 칩거 생활을 함께 했던 선황제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며 칭호를 요구했다.성화제는 양측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방식으로 갈등을 해결할 수 없었지만, 두 사람 모두에게 황태후 칭호를 부여했다. 단, 건태황후의 공식 칭호는 조정 의례에서 그녀의 더 높은 지위와 선례를 인정받았다.
2. 6. 죽음과 사후 (1468년)
천순 8년 (1464년)에 천순제(정통제)가 죽자, 효장예황후 전씨는 황태후에 봉해졌다. 4년 후인 성화 4년(1468년)에 붕어하였다.[1] 베이징 근처 명나라 능원의 위릉에 매장되었다.[1] 천순 황제는 그녀가 '천 년 만에 장수하신 후'에만 자신의 옆에 묻히도록 특별히 명했다.영종과의 사이에서 살아남은 아이는 없었다.[4] 이 때문에 주귀비(효숙황후)에게 태자 주견심(성화제)이 태어나자, 전황후는 황후의 지위를 놓고 주씨와 다투었다. 영종은 붕어하기 직전, 전황후를 폐위하지 말라는 유명을 내렸다. 전황후는 영종의 붕어 4년 후인 성화 4년 (1468년)에 사망했다. 사후, 영종의 유언에 따른 합장은 태황태후가 된 주씨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시호는 '''효장헌목홍혜현인공천흠성예황후'''이다.
3. 존호, 시호, 능호
성화제가 즉위한 후 '''자의황태후'''(慈懿皇太后)라는 존호를 받았다. 사후에는 '''효장헌목홍혜현인공천흠성예황후'''(孝莊獻穆弘惠顯仁恭天欽聖睿皇后)로 추시되었다. 능호는 유릉(裕陵)이다.
참조
[1]
서적
History of Ming Dynasty (Part I): 二十四史 明史
DeepLogic
[2]
문서
[3]
문서
[4]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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