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정황후 (융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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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효정황후는 명나라 융경제의 후궁으로, 융경제 사후 아들 만력제가 즉위하면서 황태후가 되었다. 순천부 곽현의 건축 노동자의 딸로 태어나 15세에 궁녀로 입궁하여 유왕 주재후의 첩실이 되었으며, 융경제 즉위 후 귀비로 책봉되고 아들 주익균(만력제)을 낳았다. 만력제 즉위 후 자성황태후로 존호를 받았으며, 말년에는 시력이 나빠져 여의사의 도움을 받았다. 최종 시호는 효정정순흠인단숙필천조성황후이며, 능호는 소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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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정황후 (융경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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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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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효정황후 (孝定皇后) |
휘 | 이씨 (李氏) |
존호 | 효정황태후 (孝定皇太后) |
생애 | |
출생 | 가정(嘉靖) 25년 11월 19일 (1546년 12월 21일) |
출생지 | 북경순천부(北京順天府) 통주(通州) 곽현(漷縣) |
사망 | 만력(萬曆) 42년 2월 9일 (1614년 3월 18일) |
사망지 | 북경순천부(北京順天府) 자금성 |
능묘 | 소릉(昭陵) |
가족 관계 | |
아버지 | 무청백(武淸伯) 이위(李偉) |
배우자 | 융경제(隆慶帝) |
자녀 | 만력제(萬曆帝) 주익균(朱翊鈞) 노간왕(潞簡王) 주익류(朱翊鏐) 수양장공주(壽陽長公主) 주요아(朱堯娥) 영녕장공주(永寧長公主) 주요영(朱堯媖) 서안대장공주(瑞安大長公主) 주요원(朱堯媛) |
재위 | |
명나라 황후 | (추존) |
명나라 황태후 | 1572년 ~ 1614년 |
전임 | 효성경황후(孝成敬皇后) 자효헌황후(慈孝獻皇后) 효안황후(孝安皇后) |
후임 | (추존) 효정황태후(孝靖皇太后) (남명) 각정황태후(恪貞皇太后) |
칭호 | |
시호 | 효정(孝定) 진순(貞純) 흠인(欽仁) 단숙(端肅) 필천(弼天) 조성(祚聖) 황태후(皇太后) |
존칭 | 자성황태후(慈聖皇太后) |
가문 | |
씨족 | 이(李) |
2. 생애
융경 6년(1572년) 융경제가 붕어하고 만력제가 즉위하면서 황태후가 되었으며, 거처를 자녕궁(慈寧宮)으로 옮겼다.[1] 만력제는 미성년이었기 때문에 이씨는 섭정으로 임명되었으나, 장거정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국정에 관여하지 않았다.[1] 1572년부터 1578년까지 관리들의 요청으로 황제의 궁궐에서 생활하며 만력제의 생활과 습관을 감독했으며,[1] 아들에게 엄격하여 공부를 거부하면 벌을 주기도 했다.
만력제가 맏아들을 황태자로 임명하는 것을 고심했을 때, 이씨는 자신 또한 궁녀의 아들이라는 점을 지적하며 임명을 지지했다.[1] 만력 42년(1614년) 2월에 붕어하였다.
2. 1. 초기 생애
이씨는 15세에 궁녀로 입궁하여 유왕부(裕王府)의 궁녀로 일하면서 유왕(裕王) 주재후(朱載垕)의 첩실로 간택되었다. 융경 원년(1567년) 융경제가 즉위한 후 귀비(貴妃)로 책봉되었고, 그 다음 해에 아들 주익균이 황태자로 책봉되었다.[1]순천부漷県의 건축 노동자였던 이위와 왕씨의 장녀로 태어났다. 가정 연간에 유왕 주재후(후의 융경제)의 저택에 들어가 시녀(측실)가 되었다. 가정 42년 8월 17일(1563년 9월 4일), 주익균(후의 만력제)을 낳았다. 다른 처첩이 낳은 장남 주익정과 차남 주익령은 이미 일찍 죽었기 때문에 유왕을 기쁘게 했고, 이씨는 총애를 받았다.
융경 원년(1567년) 3월, 황귀비에 봉해졌다. 그녀의 아버지는 작위를 받았다. 그녀의 사회적 경력은 명나라 시대에는 드문 일이 아니었는데, 여러 황후, 빈, 후궁들이 가난한 배경에서 비슷한 경력을 쌓았다. 그녀는 겸손하고 순종적이며, 당시 여성의 이상에 따라 행동했다고 묘사되었다.[1]
2. 2. 황귀비 시절
이씨는 15세에 궁녀로 입궁하여 유왕부(裕王府)에서 일하다가 유왕(裕王) 주재후(朱載垕)의 첩실이 되었다. 융경 원년(1567년) 융경제가 즉위한 후 귀비(貴妃)로 책봉되었고, 이듬해 아들 주익균(朱翊鈞)이 황태자로 책봉되었다.[1]융경 원년(1567년) 3월, 황귀비에 봉해졌다. 아들인 만력제가 즉위하자 '''자성황태후'''로 존칭되었고, 아버지 이위는 무청후에 봉해졌다.[1]
순천부漷県의 건축 노동자였던 이위와 왕씨의 장녀로 태어났다. 가정 연간에 유왕 주재균(후의 융경제)의 저택에 들어가 시녀(측실)가 되었다. 가정 42년 8월 17일(1563년 9월 4일), 주익균(후의 만력제)을 낳았다. 다른 처첩이 낳은 장남 주익정과 차남 주익령은 이미 일찍 죽었기 때문에 유왕을 기쁘게 했고, 이씨는 총애를 받았다.[1]
그녀는 가난한 이위(李偉, 1584년 사망)의 딸로, 융경제의 황궁에서 시녀로 일하다 후궁으로 승진했다. 1563년 아들 주익균을 낳았는데, 주익균은 처음에는 Yu의 세습 친왕으로, 융경제가 즉위한 후에는 황태자로 선포되었다. 그녀의 사회적 경력은 명나라 시대에는 드문 일이 아니었는데, 여러 황후, 빈, 후궁들이 가난한 배경에서 비슷한 경력을 쌓았다. 그녀 자신은 겸손하고 순종적이며, 당시 여성의 이상에 따라 행동했다고 묘사되었다.[1]
2. 3. 황태후 시절
융경 6년(1572년) 융경제가 붕어하고 만력제가 즉위하면서 황태후가 되었으며, 거처를 자녕궁(慈寧宮)으로 옮겼다.[1] 만력 42년(1614년) 2월에 붕어하였다.황태후가 된 이씨는 아들인 만력제가 미성년이었기 때문에 섭정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장거정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국정에 관여하지 않았다.[1] 1572년부터 1578년까지 관리들의 요청으로 황후의 궁궐이 아닌 황제의 궁궐에서 생활하며 만력제의 생활과 습관을 감독했다.[1] 그녀는 아들에게 엄격하여, 공부를 거부하면 벌을 주기도 했다.
만력제가 맏아들을 황태자로 임명하는 것을 고심했을 때, 이씨는 만력제 역시 궁녀의 아들이라는 점을 지적하며 임명을 지지했다.[1]
만력제가 즉위하자 '''자성황태후'''로 존칭되었다. 아버지 이위는 무청후에 봉해졌다. 이씨는 재물을 좋아하고 불교를 숭상했다.
2. 4. 죽음
이씨는 만력 42년(1614년) 2월에 붕어하였다.[2] 이씨는 재물을 좋아하고 불교를 숭상했다.[2]3. 자녀
1581년 후공신과 결혼
1582년 량방루이와 결혼
1585년 완웨이와 결혼, 아들 1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