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거정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장거정은 명나라 시대의 정치가로, 1525년 호북성 강릉에서 태어났다. 1547년 진사로 급제하여 서계의 신임을 받아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1572년 만력제가 즉위한 후 수보(首輔)가 되어 개혁 정치를 펼쳤다. 그는 일조편법과 토지 측량을 실시하여 명나라의 재정을 안정시켰으나, 권력 남용, 언론 탄압 등으로 비판을 받았다. 1582년 사망 후 부정부패 혐의로 가문이 몰락했으나, 1622년 천계제에 의해 복권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명나라의 태사 - 이선장
이선장은 명나라 초 주원장의 참모로, 뛰어난 계략과 법가 사상으로 명나라 건국에 기여했으나, 호유용의 옥에 연루되어 숙청된 인물이다. - 척계광 - 양명학
양명학은 명나라 시대 왕양명에 의해 창시된 유교의 한 학파로, 심즉리, 치양지, 지행합일을 핵심 사상으로 하며 동아시아에 영향을 미쳤으나 사회적 혼란을 야기했다는 비판도 받았다. - 명나라의 태부 - 양정화 (명나라)
양정화는 명나라 시대의 문신으로, 효종 때 황태자의 스승을 지냈으며, 내각 수보를 거쳐 무종 사후 어린 황제를 옹립하고 개혁을 단행했으나 대례의 논쟁으로 관직을 버리고 평민이 되었다가 사후 복원되었다.
장거정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장거정 |
다른 이름 | 장강릉 () |
자 | 숙대 () |
호 | 태악 () |
시호 | 문충 () |
출생일 | 1525년 5월 26일 |
출생지 | 장링, 후광 |
사망일 | 1582년 7월 9일 |
사망지 | 경사 |
배우자 | 유씨 |
자녀 | 7명 |
관직 | |
직위 | 제47대 수석 대학사 |
임기 | 1572년–1582년 |
이전 | 고공 |
이후 | 장사유 |
군주 | 융경제 만력제 |
교육 | 후광성에서 실시한 향시에서 거인 학위 (1540년) 진사 학위 (1547년) |
기타 관직 | |
관직 목록 | 한림원 학사 () 한림원 편수 () 태자부의 우비서 및 우간쟁, 국자감의 학업 감독 담당 () 태자부의 우비서 및 우상반, 유왕부 강독 겸임 () 태자부의 우비서 및 우자문, 한림원 시강학사 겸임 () 예부 우시랑 겸 한림원 학사 () 이부 좌시랑 겸 동각대학사 () 소보 겸 태자태보, 예부상서, 무영전대학사 () 주국 소보 겸 태자태부, 예부상서, 무영전대학사 () 주국 소부 겸 태자태부, 이부상서, 건극전대학사 () 주국 소부 겸 태자태사, 이부상서, 건극전대학사 () 주국 소사 겸 태자태사, 이부상서, 건극전대학사 () 주국 소사 겸 태자태사, 이부상서, 중극전대학사 () 좌주국 태부 겸 태자태사, 이부상서, 중극전대학사 () 좌주국 태사 겸 태자태사, 이부상서, 중극전대학사 () 상주국 태사 겸 태자태사, 이부상서, 중극전대학사 () |
칭호 | |
관직 및 명예 칭호 | 봉천익운추성수정문신, 특진광록대부, 상주국태사, 겸 태자태사 이부상서 중극전대학사 () |
2. 생애
장거정은 호북성(湖北省) 형주부(荊州府) 강릉현(江陵縣, 현 후베이성 징저우시 장링현) 출신으로, 수려한 외모를 지녔다. 향시(鄕試)와 진사(進士)에 합격한 후 서계의 문하생이 되었고, 그의 신임을 받아 여러 관직에 중용되었다. 융경제 즉위 후 이부좌시랑(吏部左侍郎) 겸 동각대학사(東閣大學士)를 거쳐 예부상서(禮部尙書) 무영전대학사(武英殿大學士)가 되었다. 가정제의 유언에 따라 도사를 배제하는 데 역할을 맡았다.
고공(高拱)은 서계의 정적으로, 서계를 탄핵했다가 오히려 역공을 당해 파면되었다. 이후 복권을 위해 장거정과 협력했고, 장거정은 고공과 결탁하여 권력 기반을 다졌다. 나아가 내시 풍보(馮保)와 연합하여 고공을 실각시키려 했다. 융경제 사후 만력제가 즉위하자, 장거정은 융경제의 유언을 이용해 고공을 실각시키고 수보(首輔) 자리에 올랐다.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진출
장거정은 1525년 호북성(湖北省) 형주부(荊州府) 장링현(현 후베이성 징저우시 장링현)에서 태어났다. 수려한 외모를 타고났으며, 가정 19년(1540) 향시(鄕試)에 합격하여 거인(擧人)이 되었다.[1] 1544년에는 회시(會試)에 낙방하였으나,[2] 가정 26년(1547) 23세의 젊은 나이로 진사(進士)에 급제했다.[1][3] 한림원 서길사(庶吉士)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으며, 서계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그의 문하생이 되었다.[1] 1554년에는 질병으로 인해 사직했다가[2] 6년 후 복귀하여 국자감과 한림원에서 일했다.[2]2. 2. 권력 장악 과정
가정 43년(1564년), 장거정은 우춘방(右春坊) 우유덕(右渝德) 겸 국자감(國子監) 사업(司業)이 되었다. 서계의 추천으로 유왕(裕王) 주재후(훗날의 융경제)의 시강시독(侍講侍讀)이 되었다.[1] 융경 원년(1567년), 주재후가 융경제로 즉위하면서 장거정은 이부좌시랑(吏部左侍郎) 겸 동각대학사(東閣大學士)로 발탁되어 입각(入閣)하였다.[1] 같은 해 4월, 예부상서(禮部尙書) 무영전대학사(武英殿大學士)가 되었다.[1] 서계가 가정제의 유언에 따라 도사(道士)들을 배제할 때 그 역할을 맡았다.[1]서계의 정적이었던 고공은 모함으로 서계를 탄핵했지만, 오히려 역공을 당해 파면되었다.[1] 고공은 태감(太監) 이방(李芳) 등과 연결해 서계의 실각을 노렸고, 결국 서계는 융경 2년(1568년) 사퇴했다.[1] 장거정은 고공과 결탁하여 권력 기반을 다지고, 내시 풍보와 연합하여 고공을 실각시키려 했다.[1]
융경 6년(1572년), 융경제가 사망하고 만력제가 즉위하면서, 장거정은 융경제의 유언을 이용해 고공을 실각시키고 중극전대학사(中極殿大學士)로 승진하여 수보(首輔)가 되었다.[1]
3. 개혁 정치
만력제가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천자의 스승이라는 직함을 이용하여 만력제를 등에 업은 장거정은 독재적으로 개혁을 실행했다. 우선 관리 탄핵을 담당하는 언관(言官)의 권한을 축소하고 각지의 서원(書院)을 철폐하여 사인(士人)의 언론을 약화시켜 독재권을 확립하고, 낭비 제거, 강기숙정(綱紀肅正) 등을 실시했다. 그리고 전국적인 토지측량과 일조편법(一條鞭法)을 실시했다.[3]
당시 지방의 향신(鄕紳) 세력은 소유한 땅을 속여 보고하고 탈세하는 일이 많았지만, 장거정은 관청 몰래 경작하는 대량의 땅을 적발하였다. 양세법(兩稅法)은 항목이 복잡하여 불공정했으나, 일조편법(一條鞭法)은 과세대상을 토지로 옮기고 은으로 납세하게 했다.
이러한 개혁으로 명나라 재정은 크게 좋아져, 국고에는 10년 분의 식료와 4백만 냥의 잉여금을 축적했다.[4] 그러나 언론 탄압, 기득권 침해 등으로 조정과 재야에는 장거정에 대한 불만이 컸다. 만력 5년(1577) 부친상 때 휴직 중 탄핵을 우려하여 복상하지 않았고( 탈정(奪情)사건), 만력 9년(1581) 병으로 쓰러져 다음 해 사망하였다. 상주국(上柱國)의 봉호와 문충(文忠)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장거정은 만력제에게 빡빡한 훈육을 하여 취미를 통제하고 학문 수양을 강요했다. 만력제는 처음에는 장거정을 두려워했으나, 점차 증오하게 되었다. 이후 만력제는 장거정 사후 여러 신하들이 그의 비리를 들추자, 장거정을 숙청했다.
3. 1. 주요 정책
장거정은 만력제가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천자의 스승이라는 직함을 이용하여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며 개혁을 추진했다. 주요 정책은 다음과 같다.- 고성법(考成法) 시행: 지방관의 고과(考課)를 수보(首輔)가 판단하도록 하여, 대학사(大學士)의 권한을 강화하고 중앙집권적 통제를 강화했다.
- 언론 통제: 언관(言官)의 권한을 축소하고, 각지의 서원(書院)을 철폐하여 사인(士人)들의 언론을 약화시켜 독재권을 확립했다.
- 일조편법(一條鞭法) 전국 확대: 기존의 복잡한 세금 항목을 통합하여 토지에 부과하고, 은(銀)으로 납부하게 하는 세제 개혁을 전국적으로 확대 시행했다.
- 전국적인 토지 측량(丈量): 지방 향신(鄕紳) 세력의 탈세를 막고, 숨겨진 토지를 찾아내어 국가 재정을 확충했다.
- 황하 치수(治水) 사업: 범람하는 황하의 치수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 군사력 강화: 기제광(戚繼光) 등 유능한 군사 지휘관들을 요직에 배치하고, 국경 방어를 강화했다.
3. 2. 재정 개혁과 성과
장거정의 개혁으로 명나라 재정은 크게 개선되었다. 당시 지방의 향신(郷紳) 세력은 소유 토지를 속여 보고하고 탈세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장거정은 전국적인 토지 측량(丈量)을 실시하고 일조편법(一條鞭法)을 확대하여 세수를 늘렸다.[3] 一條鞭法중국어은 복잡한 세금 항목을 단순화하고 은(銀)으로 납부하게 하는 제도였다.이러한 개혁으로 세입은 크게 증가했다. 만력(萬曆) 초기 200만 냥이었던 세입은 300만에서 400만 냥으로 증가했다.[4] 국고에는 10년치 식량이 비축되었고, 400만 냥 이상의 잉여금이 쌓였다.[4]
구체적인 수치는 다음과 같다.
구분 | 내용 |
---|---|
세입 증가 | 만력 초기 200만 냥 → 300~400만 냥 |
국고 비축 | 10년치 식량 |
잉여금 | 400만 냥 이상 |
하지만, 장거정은 언론을 탄압하고 기득권을 침해하여 조정과 재야의 불만을 샀다.[3][4]
3. 3. 통화 정책
장거정은 백성의 복지를 증진하고자 화폐 공급 확대를 추진했다. 그는 은(銀)이 경제에 미칠 수 있는 부정적 영향을 우려하여 충분한 화폐 매개체로 여기지 않았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576년 베이징(北京), 난징(南京), 운남(雲南)에 주조소를 설립했다.[1] 주요 도시에서는 구리 함량이 93.8%인 고품질 동전이 생산되었고, 지방에서는 구리 함량이 약간 낮지만 무게가 더 나가는 동전이 생산되었다.[1] 장거정은 환전상으로부터 화폐 통제권을 확보하기 위해 산서(山西), 산동(山東), 하남(河南), 섬서(陝西), 강서(江西), 복건(福建), 호광(湖廣) 등지에 주조소를 설립했다.[2] 그러나 지방 주조소는 지역 당국이 선정한 사업가들이 운영했기 때문에 품질이 낮은 동전이 생산되었다.[3]동전 생산은 주조용 구리 부족과 자격을 갖춘 인력 채용의 어려움 등 여러 문제에 직면했다. 강서(江西)의 주조소는 계획된 동전 생산량의 5%만 생산할 수 있었다. 지방 당국은 세금 납부의 최소 70%를 새 동전으로 납부하도록 명령하고, 상인들을 통해 인근 지방에서 동전을 수입하도록 조직했지만, 이러한 동전들은 품질이 낮고 사적(불법적)으로 생산된 경우가 많았다. 강서(江西)에는 환전상이 부족하여 사람들이 새 동전을 구하기 어려웠으며, 은이 이미 화폐로 널리 사용되던 복건(福建)에서도 유사한 상황이 발생했다.[2] 장거정 정부의 통화 정책은 일관성이 없었고, 각 지방 관리들은 자신의 판단에 따라 결정을 내렸다. 절강(浙江) 관리들은 병사들의 봉급을 동전으로 전환하여 동전 사용을 늘리려 했으나, 이는 1582년 항주(杭州)에서 반란을 초래했다. 강서(江西)에서는 사설 환전소가 금지되어 새 동전 유통이 어려워졌다. 일부 지방에서는 동전 수출이 금지되었고, 다른 지방에서는 그 지방에서 주조된 동전만 유통되도록 했는데, 이는 사적 동전 생산에 관여하는 부패한 관리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4] 할인된 가격으로 새 동전을 판매하여 유통을 장려하려는 시도는 정부로부터 싼값에 동전을 사들여 정상 가격으로 판매하는 환전상들에게만 이익이 되었다. 일부 관리들이 불법 사적 동전 사용을 금지하려 시도했으나, 격렬한 항의와 금지 해제로 이어졌다. 관리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동전을 생산하고 지방 수도 밖으로 효과적으로 유통할 수 없었다. 그 결과 몇 년 안에 은과 곡물이 다시 주요 화폐로 사용되었다.[2]
1577년부터 1581년까지 구리 부족으로 국가 주화 가격이 약 70% 상승했다. 주화 제작 비용은 1,000개 동전당 0.9냥(37.3g)(공식적으로는 1냥)에서 1.35냥으로 증가했다. 1579년 장거정은 동전 도입 시도의 실패를 인정했다. 베이징(北京)에서 주조된 동전은 시장에서 받아들여졌지만, 남쪽에서는 품질이 낮은 사적 동전이 계속 우세했다. 이는 국가가 베이징(北京)에서 주조된 고품질 동전을 유통할 수 없었던 점, 즉 상당 부분이 호조(戶曹)와 황제 금고에 남아 있었던 것이 부분적인 원인이었다.[3] 1580년 운남(雲南) 주조소가 폐쇄되었고, 1582년 장거정 사후 그의 후계자와 반대파는 비효율성을 이유로 다른 대부분의 지방 주조소를 폐지했다. 호광(湖廣)의 세 주조소는 계속 운영되어 서로 다른 동전을 생산했고, 이로 인해 호광(湖廣)성이 여러 화폐권으로 나뉘게 되었다.
장거정의 반대파는 국가가 시장과 화폐 문제에 개입해서는 안 되며, 백성이 원하지 않는 화폐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반면 국가 주화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은이 가치 저장 수단이 될 수 있지만 동전은 교환 매개체로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동전 생산으로 손실이 발생하더라도 결국 장기적으로 경제 회복과 이익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믿었다.
4. 사후
장거정은 1582년 7월 9일에 사망했다. 사후 뇌물 수수, 사치스러운 생활, 권력 남용 등의 혐의를 받았다.[1] 장거정을 지지하던 관료들은 직책에서 물러났고, 1583년 초, 그의 전 동료인 풍보(馮保)는 낮은 직급으로 남경으로 좌천되어 그곳에서 사망했다.
장거정의 검소한 삶을 이끌었던 황제는 그의 사치스러운 생활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장거정의 이중적인 도덕성은 황제를 분노케 했고, 이로 인해 장거정 가문 전체가 희생되었으며, 황제는 모든 관료들을 의심스럽게 바라보게 되었다. 1584년 4월, 장거정은 황족이자 요왕(遼王)인 주헌계(朱憲㸅, 1582년 사망)의 측실에게 왕의 재산을 횡령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황제는 장거정의 가산을 몰수했고,[1] 장거정 자신은 사후에 모든 칭호와 관직을 박탈당했다. 장거정의 장남 장경수(張敬修)와 그의 부인, 그리고 그의 넷째 아들은 자살했고, 장거정의 10명의 자손은 빈집에 감금되어 굶어 죽었다. 몰수는 황제가 예상했던 것만큼 많은 수익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북경과 경주에서 부동산과 집이 압류되었지만, 상대적으로 소량의 금과 은만 발견되었다.
장거정의 개혁은 부분적으로만 성공했다. 그는 기제광 장군이 새로운 모병, 훈련, 전술을 시행하는 것을 지원했지만, 이러한 변화를 다른 명나라 군대에까지 확대할 수는 없었다. 또한 그는 상당한 재정적 예비비를 축적할 수 있었지만,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그는 국가 행정권을 장악했지만, 그의 통제는 제도화된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관계와 권위에 기반을 두었다. 만력제는 장거정의 사후 규탄에 동의했음에도 불구하고 장거정의 많은 정치적 견해를 채택했다.
1622년, 천계제는 장거정을 복권시켰다. 장거정 사후, 만력제는 정무를 포기하고 과도한 사치에 빠져, 장거정이 쌓아 올린 모든 업적은 사라져 버렸다.
5. 평가
장거정은 강력한 권력을 바탕으로 개혁을 추진하여 명나라의 재정을 안정시키고 국력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지만, 독단적인 통치 방식과 권력 남용으로 비판받기도 한다.[1] 그의 개혁은 단기적인 성과를 거두었지만, 장기적인 제도 개선으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다.
그는 행정을 간소화하고 군사력을 강화함으로써 중앙 정부의 권력을 강화하고 황제의 역할을 높이려고 했다.[2] 어사대의 영향력을 행사하여 관료 내부의 규율을 강화하고, 내부 갈등에서 세금 징수와 산적 진압과 같은 업무로 그들의 초점을 전환했다. 행정의 효율성을 평가하기 위해 각 현과 부(府)에 대한 월별 및 반기별 보고서를 작성하여 이러한 분야에서의 성공 여부를 측정했는데, 이는 1572년부터 1582년까지 명나라 국가 행정의 최고 효율성 시대였다.[2]
왕양명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내면적 자기수양에 초점을 맞춘 것과는 달리, 장거정은 국가 이익 추구라는 실용적인 방안을 제시했다. 그는 국가와 백성을 위한 행동이 올바른 길이라고 믿었다. 그의 좌우명은 "만약 국가에 이롭다면, 죽고 사는 것을 가리지 않고 행하겠다"였다.
장거정의 행동은 기존 법률의 범위 내에 있었지만, 비판자들은 그의 추종자들을 승진시키고 관리들에게 부당한 압력을 행사하기 위한 권력 남용으로 보았다.[2] 1577년 그의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 관리들이 상복 중에도 관직에 머무르는 것은 전례가 없었던 일은 아니었지만, 부모를 불경하게 대한 것에 대한 비판이 널리 퍼져 있었다. 이러한 비판은 효자(孝子)가 충신(忠臣)이 될 수 없고, 스스로를 제대로 다스릴 수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다스릴 수 없다는 믿음에 근거했다.
장거정은 1582년 사망 이후, 뇌물 수수, 사치스러운 생활, 자격 없는 추종자 편애, 권력 남용, 반대 의견 억압 등 고위 관료들의 일반적인 범죄 혐의를 받았다.[1] 1584년 4월, 장거정은 황족의 재산을 횡령했다는 혐의를 받아 가산이 몰수되고, 사후에 모든 칭호와 관직을 박탈당했다.[1] 장남을 포함한 그의 가족들은 자살하거나 굶어 죽었다.
장거정의 개혁은 부분적으로만 성공했다. 그는 기제광 장군이 새로운 모병, 훈련, 전술을 시행하는 것을 지원했지만, 이러한 변화를 다른 명나라 군대에까지 확대할 수는 없었다. 또한 상당한 재정적 예비비를 축적할 수 있었지만,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그는 국가 행정권을 장악했지만, 그의 통제는 제도화된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관계와 권위에 기반을 두었다.
6. 저서
- 《서경직해》
- 《제감도설》
- 《신각장태악선생문집》
7. 가족
관계 | 이름 |
---|---|
조부 | 장진(張鎭) |
부 | 장문명(張文明) |
모 | 조씨(趙氏) |
처 | 고씨(顧氏), 왕씨(王氏) |
장남 | 장경수(張敬修) |
차남 | 장사수(張嗣修) |
삼남 | 장무수(張懋修) |
사남 | 장간수(張簡修) |
오남 | 장윤수(張允修) |
육남 | 장정수(張靜修) |
참조
[1]
웹사이트
Zhang Juzheng
http://concise.brita[...]
Encyclopedia Britannica
2010-02-11
[2]
웹사이트
Ming Shenzong 明神宗, the Wanli Emperor 萬曆
http://www.chinaknow[...]
2018-09-15
[3]
문서
내각수보의 탈정은 성화연간까지는 원칙 행해져 왔지만, 정덕연간의 양정화가 탈정을 거부하고 사임한 이래 행해지지 않고 있었다.
[4]
서적
관지도의 사상형성과 정치적 입장
교토대학 출판회
2019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