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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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슈는 7세기부터 9세기까지 야마토 조정에 항복하거나 귀순한 에미시들을 지칭하며, 규슈 지역 등으로 강제 이주된 집단을 의미한다. 조정은 후슈를 통치하고 감독하기 위해 고쿠시를 임명하고, 후슈에게 후슈료를 지급하며 세금을 면제했다. 후슈는 사냥과 무예 훈련을 하며 군사력으로 활용되었으며, 무사에게 영향을 주기도 했다. 870년에는 신라에 대항하기 위해 후슈가 동원되기도 했으나, 부당한 처우로 인한 봉기가 발생하여 오우 지방으로 송환되었다. 오우 지방으로 송환된 후에도 일부 후슈 부락이 잔존했으며, 11세기에는 아베 씨, 데와 기요하라 씨, 오슈 후지와라 씨 등이 후슈의 지위를 기반으로 세력을 확장하기도 했다.
7세기에서 9세기까지 야마토 조정과 에미시 사이에 벌어진 전쟁에서 항복하거나 귀순한 에미시 집단을 야마토 조정은 규슈 지역 및 그 인근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정책을 시행했다. 그러나 813년경 이즈모국(出雲国)에서 일어난 「아라가시(荒橿)의 난」, 875년의 「시모우사 후슈의 난」, 883년의 「가즈사 후슈의 난」 등 후슈에 의한 무장봉기가 곳곳에서 일어났고, 결국 897년(간표 9년) 조정은 사민시켰던 후슈들을 다시 오우 지방으로 송환하는 정책을 취했다.[1]
야마토 조정에 귀부한 에조 중, 무쓰국과 데와국에 머물렀던 자들을 오우(奥羽)의 후슈라고 부른다. 이들은 같은 지역의 왜인과는 달리 조세를 면제받았으며, 무쓰와 데와의 국가(고쿠가)로부터 식량과 천을 받는 대신 복종을 맹세하고 특산물을 바쳤다. 부수(俘囚)라는 지위는 변방 사람을 하위에 두려는 조정의 태도에서 비롯되었지만, 이들은 무세(無稅) 조건과 교역을 통해 힘을 키웠다. 이는 11세기에 이르러 '''부수장'''을 칭한 아베 씨, '''부수주'''를 칭한 기요하라 씨, '''부수상두'''를 칭한 오슈 후지와라 씨의 세력으로 이어졌다.
2. 사민된 후슈
이에 따라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사민된 후슈는 에미시들이 살았던 오우 지방으로 돌아갔지만, 그 뒤로도 5백 개가 넘는 후슈 부락(部落)이 여전히 잔존했고 현재 이들은 일본 내 피차별 부락의 일부가 된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1]
2. 1. 사민 목적
야마토 조정이 에미시를 사민시킨 목적은 다음과 같았다.[1]
이주지는 규슈까지 전국에 걸쳐 있었다.
조정은 고쿠시(국사)에게 후슈 담당을 겸임하게 하여, 후슈의 감독과 교화, 보호 양육을 담당하게 했다. 후슈는 정착지에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될 때까지 후슈료라는 명목으로 고쿠시로부터 식량을 지급받았으며, 용·조의 세금이 면제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이주된 후슈가 정착지에서 자활하는 일은 없었고, 후슈료 지급을 계속 받았다. 후슈는 일반 공민 백성과는 크게 다른 생활 양식을 가지고 있어, 수렵 및 무예 훈련이 인정되었다. 후슈와 공민 백성 간의 마찰 등의 문제를 억제하기 위해, 812년(고닌 3년), 조정은 고쿠시에게 후슈 중에서 뛰어난 자를 이부장으로 임명하고, 후슈 사회에서의 형벌권을 이부장에게 부여하는 내용의 명령을 내렸다.
9세기 중반, 각 국내의 치안 유지를 위한 고쿠시(수령)의 지휘에 따른 국아군제로 이행했지만, 이주된 후슈는 주요한 군사력으로 자리매김되었다.
870년 2월 15일, 정관의 입구에 대항하기 위해, 조정은 노 사와 방인의 선사 50명을 쓰시마에 배치했지만[2], 현지에서 징발한 병사는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를 받아들여 조정은 후슈를 동원하기로 했다. 궁술과 마술에 뛰어난 에미시는 징용된 방인보다 전투 능력이 높다고 평가되었다.[3]
2. 2. 사민 후슈의 생활
7세기에서 9세기까지 야마토(大和) 조정과 에미시 사이에 벌어진 전쟁에서 항복하거나 귀순한 에미시 집단은 야마토 조정에 의해 규슈 지역 및 그 인근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조정은 후슈가 사민된 지역의 고쿠시(国司)에게 후슈의 통치를 겸임시켜 그들의 감독, 교화, 보호 양육을 맡겼다. 후슈는 사민된 곳에서 정착해 생계가 해결될 때까지 후슈료(俘囚料)라는 명목으로 고쿠시로부터 식량을 지급받았고 용(庸) ・ 조(調)의 세금이 면제되었다. 그러나 후슈들 대부분이 사민된 땅에서 제대로 정착하지 못했기에 후슈료의 지급은 계속됐다.
후슈는 일반 공민(公民)들과 크게 다른 생활 방식을 지녔는데, 수렵 및 무예 훈련이 후슈 생활의 특징이었다. 812년(고닌 3년) 조정은 고쿠시들에게 후슈 가운데 구성원 내 영향력이 큰 자들을 가려 이후죠(夷俘長)로서 후슈 사회의 형벌권을 맡기도록 했다. 사민된 후슈들은 9세기 일본에서 국내 치안 유지를 위한 주요 군사력으로서의 위치에 있었다. 후슈가 보유한 사냥 기술 ・ 무예는 궁술(弓術)과 마술(馬術), 기사(騎射)를 중심으로 하고 있었고, 이들 후슈의 전투 기술은 당시 새롭게 대두한 무사(武士)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어 후슈가 사용하던 와라비테가타나(蕨手刀)는 무사들의 모발형태도(毛抜形太刀)로 발전했고 이것이 일본도의 원형이 되었다. 이같이 후슈의 전투기술은 일본의 초창기 무사들에게로 이어진다.
그러나 813년경 이즈모국(出雲国)에서 일어난 「아라가시(荒橿)의 난」, 875년의 「시모우사(下総) 후슈의 난」, 883년의 「가즈사(上総) 후슈의 난」 등 후슈에 의한 무장봉기가 곳곳에서 일어나게 되는데, 그 원인은 후슈들에 대한 부당한 처우와 개선 요구에 있었다. 897년(간표 9년) 조정은 사민시켰던 후슈들을 다시 오우(奥羽) 지방으로 송환하는 정책을 취했다. 이에 따라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사민된 후슈는 에미시들이 살았던 오우 지방으로 돌아가 살게 되지만, 그 뒤로도 5백 개가 넘는 후슈 부락(部落)이 여전히 잔존했고 현재 이들은 일본 내 피차별 부락의 일부가 된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2. 3. 후슈의 군사적 역할
후슈는 일반 공민들과는 다른 생활 방식을 가졌는데, 사냥과 무예 훈련이 그 특징이었다. 고닌(弘仁) 3년(812년) 조정은 고쿠시들에게 후슈 가운데 영향력이 큰 자들을 가려 이후죠(夷俘長)로서 후슈 사회의 형벌권을 맡도록 했다.[1] 9세기 일본에서 후슈는 국내 치안 유지를 위한 주요 군사력으로 자리 잡았다.[3] 이들의 사냥 기술과 무예는 승마와 기사(騎射)를 중심으로 하였으며, 당시 새롭게 대두한 무사(武士)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어 후슈가 사용하던 와라비테가타나(蕨手刀)는 무사들의 모발형태도(毛抜形太刀)로 발전했고, 이것이 일본도의 원형이 되었다.
870년 2월 15일, 정관의 입구에 대항하기 위해 조정은 노(弩)사와 방인(防人)의 선사 50명을 쓰시마에 배치했지만,[2] 현지에서 징발한 병사는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조정은 후슈를 동원하기로 했다. 궁술과 마술에 뛰어난 에조는 징용된 방인보다 전투 능력이 높다고 평가되었다.
2. 4. 후슈의 봉기
7세기에서 9세기까지 야마토(大和) 조정과 에미시 사이에 벌어진 전쟁에서 항복하거나 귀순한 에미시 집단을 야마토 조정은 규슈 지역 및 그 인근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정책을 시행했다. 813년경 이즈모국(出雲国)에서 일어난 「아라가시(荒橿)의 난」, 875년의 「시모우사(下総) 후슈의 난」, 883년의 「가즈사(上総) 후슈의 난」 등 후슈에 의한 무장봉기가 곳곳에서 일어났는데, 그 원인은 후슈들에 대한 부당한 처우와 개선 요구에 있었다.[1]
9세기, 이배 부수가 차츰 소란을 일으켜 치안이 악화되었다. 앞서 언급한 813년의 이즈모국 "아라가시의 난", 875년의 "시모우사 후슈의 난", 883년의 "가즈사 후슈의 난" (간페이·엔기 동국의 난)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러한 봉기들은 후슈들의 처우 개선 요구 때문으로 생각된다.[1]
이에 대해, 당초에는 신라의 입구 등 규슈 방어에 인력이 필요했던 점도 있어 이배 부수 제도는 유지되었지만, 결국 897년(간표 9년) 조정은 전국의 이배 부수를 오우로 돌려보내는 정책을 실행했다.
2. 5. 오우(奥羽)로의 송환
奥羽일본어 지방으로 강제 이주시켰던 후슈들을 다시 돌려보내는 정책은 897년(간표 9년) 조정에 의해 결정되었다.[1] 이 정책으로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후슈들은 다시 에미시의 땅이었던 奥羽일본어 지방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1]
당초 조정은 신라의 입구 등 규슈 방어를 위해 후슈의 군사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이배 부수 제도를 유지하려 했다.[1] 그러나 813년경 이즈모국에서 일어난 「아라가시(荒橿)의 난」,[1] 875년 시모우사 후슈의 난,[1] 883년 가즈사 후슈의 난[1] 등 후슈들의 무장봉기가 빈번하게 발생하면서 상황이 변하였다. 이러한 봉기들은 후슈에 대한 부당한 처우와 그들의 개선 요구가 원인이었다.[1]
결국 조정은 후슈들을 奥羽일본어로 돌려보내는 결정을 내렸지만, 그 후에도 5백 개가 넘는 후슈 부락(部落)이 일본 내에 잔존했고, 이들은 현재 일본 내 피차별 부락의 일부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1]
3. 오우(奥羽)의 후슈
3. 1. 후슈의 세력 확대
무쓰 ・ 데와로 송환된 후슈는 현지 조정측 사람들과는 달리 조세가 면제되었다고 여겨진다. 그들은 무쓰 ・ 데와의 고쿠가(国衙)로부터 식량과 베를 공급받는 대가로 조정에 복종할 것을 맹세했고 고쿠가에 특산품을 바쳤다. 후슈라는 지위는 변경 사람들을 하위에 둔다는 당시 일본 조정의 태도에서 생겨났고, 후슈들은 세금을 바치지 않아도 된다는 조건을 기반삼아, 교역을 통해 힘을 키우게 되었다. 이것이 11세기에 이르러 후슈죠(俘囚長)를 칭한 아베 씨, 후슈슈(俘囚主)를 칭한 기요하라 씨, 후슈쇼두(俘囚上頭)를 칭한 오슈 후지와라 씨의 위세로 구현된다.[1]
그러나, 오슈 후지와라 씨 시대에 후슈는 문화적인 면에서 일본인들과 거의 다름없게 동화되어버린 상태였다고 여겨진다. 오슈 후지와라 씨가 멸망한 뒤, 가마쿠라 막부는 간토의 무사들에게 무쓰 ・ 데와의 지배를 맡겼고, 후슈의 지위를 특별한 것으로 대하던 시각도 차츰 사라져 역사에서 그 이름이 지워지고 만다.[1]
한편 가이토 미네오(海保嶺夫, 1943년~)는 중세 쓰가루 지방의 호족 안도 씨를 후슈죠와 같은 존재로 보았다.[1]
3. 2. 후슈의 동화와 소멸
무쓰 ・ 데와에 송환된 후슈는 현지 조정측 사람들과는 달리 조세가 면제되었다고 여겨진다. 그들은 무쓰 ・ 데와의 고쿠가(国衙)로부터 식량과 베를 공급받는 대가로 조정에 복종할 것을 맹세했고 고쿠가에 특산품을 바쳤다. 후슈라는 지위는 변경 사람들을 하위에 둔다는 당시 일본 조정의 태도에서 생겨났고, 후슈들은 세금을 바치지 않아도 된다는 조건을 기반삼아 교역을 통해 힘을 키우게 되었다. 이것이 11세기에 이르러 후슈죠(俘囚長)를 칭한 아베 씨(安倍氏), 후슈슈(俘囚主)를 칭한 데와 기요하라 씨(出羽清原氏), 후슈쇼두(俘囚上頭)를 칭한 오슈 후지와라 씨(奥州藤原氏)의 위세로 구현된다.
그러나 오슈 후지와라 씨 시대에 후슈는 문화적인 면에서 일본인들과 거의 다름없게 동화되었다고 여겨진다. 오슈 후지와라 씨가 멸망한 뒤,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는 간토(関東)의 무사들에게 무쓰 ・ 데와의 지배를 맡겼고, 후슈의 지위를 특별한 것으로 대하던 시각도 차츰 사라져 역사에서 그 이름이 지워지고 만다.
한편 가이토 미네오(1943년~)는 중세 쓰가루(津軽) 지방의 호족 안도 씨(安東氏)를 후슈죠(俘囚長)와 같은 존재로 보았다.
4. 후슈가 된 일본인
『속일본기』 기록에 따르면, 원래 에미시가 아니었으나 일본 조정과 전투에서 포로로 잡혀 후슈가 된 사례들이 있었다. 769년 오토모노 오시히토와 770년 부모가 천황의 백성이었으나 에미시에게 납치된 사람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조정에 청원하여 후슈 신분에서 벗어나 일반 백성이 될 수 있었다.
4. 1. 오토모노 오시히토(大伴部押人)의 사례
769년(진호케이운 3년) 11월 25일, 『속일본기』에는 원래 에미시가 아니었으나 포로가 된 오토모노 오시히토의 사례가 기록되어 있다.[1] 무쓰국 오시카군의 포로였던 오시히토는 조정에 자신의 선조가 기이국 나구사군 카타오카 마을의 오토모노 아타이(大伴部直)라고 설명했다.[1] 그는 에미시 정벌 때 오다군 시마다 마을에 살게 되었지만, 그 자손이 에미시에게 포로로 잡혀 여러 대를 거쳤다고 한다.[1] 오시히토는 에미시 땅을 떠나 천황의 덕 아래 백성이 되었으니, 포로라는 명칭을 없애고 일반 백성(공민)이 되기를 청원했고, 조정은 이를 허가했다.[1]770년(진호케이운 4년) 4월 1일의 기록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2] 부모는 천황의 백성이었지만 에미시에게 납치되어 에미시 신분이 된 사람이, 적인 에미시를 죽이고 자손도 늘렸기에 포로 명칭을 없애주기를 청원하여 조정이 허가했다는 내용이다.[2]
4. 2. 기타 사례
続日本紀일본어 진고케이운 3년(769년) 11월 25일 기사에 따르면, 원래는 에미시가 아니었으나 포로가 된 사례가 기록되어 있다. 무쓰국 오시카군의 포로인 오토모노 오시히토는 조정에 선조는 기이국 나구사군 가타오카 마을의 오토모노 아타이(大伴部直)이며, 에미시 정벌 때 오다군 시마다 마을에 이르러 살게 되었지만, 그 자손은 에미시의 포로가 되어 여러 대를 거쳤다고 설명했다. 그는 지금은 에미시의 땅을 떠나 천황의 덕 아래에서 백성이 되었으니, 포로 명칭을 없애고 공민이 되고 싶다고 청원하여 조정이 이를 허가했다.[1]진고케이운 4년(770년) 4월 1일 기사에도 부모는 천황의 백성이었지만 에미시에게 납치되어 에미시 신분이 되었다는 주장이 있었다. 적인 에미시를 죽이고 자손도 늘었기 때문에 포로 명칭을 없애주기를 청원하여 조정이 이를 허가했다.[2]
참조
[1]
서적
栃木県史 通史編2 古代二
[2]
서적
長崎県の歴史(県史42)
山川出版社
1998-09-30
[3]
서적
日本の歴史|平安時代 揺れ動く貴族社会
小学館
2008
[4]
서적
エゾの歴史
[[講談社]]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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