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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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조는 고대 일본에서 혼슈 북부와 동부, 홋카이도에 거주하며 야마토 조정에 복속되지 않은 집단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에조는 다양한 부족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이들은 일본 조정과 적대하거나 동맹을 맺는 등 다양한 관계를 맺었다. 에조는 수렵, 채집, 농업 등을 통해 생계를 유지했으며, 기병술과 게릴라 전술에 능했다. 7세기 이후에는 홋카이도 및 도호쿠 지방에서 아이누족과 연결되는 것으로 여겨지며, 중세 이후에는 아이누족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에조는 일본의 역사와 민족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들의 기원과 정체성에 대한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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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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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명칭 | 에미시 |
한자 표기 | 蝦夷 |
로마자 표기 | Emishi |
중국어 표기 | 마오런 |
역사적 배경 | |
지역 | 일본 혼슈 북부 |
언어 | 아이누어 관련 언어 |
관련 민족 | 에피-조몬 문화인 |
같이 보기 | |
관련 인물 | 소가노 에미시 |
2. 어원
에조는 옛날에는 '''아이미시(愛瀰詩)'''(신무 동정기)나 '''모인(毛人)'''으로 표기하고, '에미시(えみし)'로 읽었다. 후에는 '에비스(えびす)'라고도 불렸는데, 이는 '에미시'가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에조(えぞ)'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후대인 11세기-12세기의 일이다.
에미시(毛人・蝦夷)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제기되고 있지만, 어느 것도 확실한 증거는 없다.
2. 1. 다양한 명칭과 표기
에조는 옛날에는 '毛人'(모인)으로 표기하고, '에미시(えみし)'로 읽었다. 후에는 '에비스(えびす)'로도 불렸는데, 이는 원래 '에미시'가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에조(えぞ)'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후대인 11세기-12세기의 일이다.[81] 에미시(毛人 혹은 蝦夷)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모두 확실한 증거는 없다.문헌상으로 가장 오래된 예는 '모인'으로, 5세기의 왜왕 무(武)가 송에 보낸 상표문에 "동쪽으로 에미시의 나라 55국을 정벌하고, 서쪽으로는 오랑캐의 무리 66국을 항복시켰다."라는 구절이 있다. '에조(蝦夷)'라는 표기를 쓰기 시작한 것은 사이메이 덴노 5년(659년)의 견당사 파견 무렵이라고 한다.
일본의 옛 노래에 "에미시는 혼자서 백 명을 감당한다 해도 우리 군에는 반항도 못 한다네(えみしを 一人 百な人 人は言へども 手向かいもせず)"라는 것이 있고,[34] 아스카 시대의 권신이었던 소가노 에미시처럼 고대 일본인의 이름에도 '에미시'라는 말이 사용된 바가 있다. '에미시'는 일본어로 '강하고 용감하다'는 어감이 있어 원래 나쁜 의미는 없었다고 한다. 이를 근거로 (비록 직접 그런 의미로 사용된 용례는 없으나) '에미시'의 본래 의미는 '변경 용사(촌뜨기 무사)'였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후대에 '에미시'라는 단어가 사람 이름으로 쓰이는 경우는 거의 대부분 '모인'으로 표기했는데,[81] '모인'의 '모(毛)', 즉 '털'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온몸에 털이 많다'는 뜻으로 후세의 아이누와의 관련성에서 찾는 설과, '수염이 긴 것을 보고 에비(えび, 새우)에 빗대어 부른 것'이라는 설이 있다. 중국의 지리서 《산해경》에 나오는 모민국(毛民國)을 의식해 중화(여기서는 '일본 본토')의 변경을 뜻하는 글자로 선택했다는 설도 있다.[35]
일본 학자 긴다이치 쿄스케는 에미시라는 단어가 아이누어에 어원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사할린 아이누어에서 '인간'을 뜻하는 '엔추(enchu, enchiu)'라는 단어를 일본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에미시'가 되었거나, 혹은 아이누어의 고어였을 것이라 추정했다.
최초로 에미시(Emishi)에 대한 언급은 478년 중국 문헌인 《송서》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 책에서는 에미시를 "털 많은 사람들"(毛人)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송서》는 왜의 다섯 왕 중 한 명인 부왕(King Bu)의 보고를 인용하여 "동쪽의 털 많은 사람들(毛人)의 55개 나라(国)"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일본어 '에미시(Emishi)'라는 단어가 처음 기록으로 등장하는 것은 720년의 《일본서기》이다. 여기에는 음독 표기인 愛瀰詩 (emi1si)로 나타나 있으며(하첨자는 구일본어 모음에 대한 설명을 참조), 짐무 천황의 기록에서 짐무 천황이 즉위하기 전에 에미시 무리를 물리쳤다고 서술하고 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경항 천황 시대에 다케우치노스쿠네가 동일본의 히타카미국 에미시 정벌을 제안했다고 한다.
후대 기록에서는 한자 표기가 蝦夷로 바뀌었는데, 이는 "새우"와 "오랑캐"를 뜻하는 글자로 구성되어 있다. "새우"라는 표현은 새우의 긴 수염처럼 얼굴털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오랑캐" 부분은 명백히 일본 제국의 성장하는 국경 너머에 살던 외부인을 묘사한 것으로, 일본 제국은 자신을 문명화된 세력으로 여겼고, 이를 통해 정복을 정당화할 수 있었다. 이 한자 표기는 일본 사신이 중국에 데려온 두 명의 에미시와의 만남을 묘사한 당나라 문헌에서 처음으로 확인된다. 이 한자 표기는 중국에서 채택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가장 오래된 기록된 발음인 emi1si는 구일본어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중요한 무기인 활과 관련하여 "활 제작자"(bowyer)를 뜻하는 "yumishi"라는 단어에서 유래했을 수 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아이누어의 "칼"(sword)을 뜻하는 "emushi"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yumishi"설은 문제가 있는데, 구일본어에서 "활 제작자"를 뜻하는 단어는 弓削(yuge)였고, 弓師(yumishi)는 17세기 이전에는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에미시(Emishi)에서 유래한 후대의 발음인 에비스(Ebisu)는 戎으로도 표기되었는데, 이는 "무사"(warrior)를 뜻하기도 하며, "칼"을 뜻하는 단어가 은유적으로 "무사"를 의미하게 된 아이누어 어원설과 일치할 수 있다.
2. 2. 어원 관련 학설
에조는 옛날에는 '''아이미시(愛瀰詩)'''(신무 동정기)라고 썼으며, 그 다음으로는 '''모인(毛人)'''이라고 표기했는데, 모두 "에미시"라고 읽었다. 후에는 "에비스"라고도 불렸는데, 이는 "에미시"에서 변화한 것으로 여겨진다. "에조"라는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1세기 또는 12세기이다.에미시(毛人・蝦夷)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제기되고 있지만, 어느 것도 확실한 증거는 없다. 에미시(愛瀰詩)는 신무 천황에 의해 멸망당한 기내의 선주 세력으로 여겨지며, 일본서기의 계행 천황 조에 처음 등장한다. 해당 기록에는 무내숙네가 "동쪽의 이 가운데 히다카미국이 있는데, 그 나라 사람들은 남녀 모두 머리를 묶고 몸에 문신을 했으며 용맹하다. 이들을 모두 에조라고 하며, 땅이 비옥하고 넓으니 공격하여 취해야 한다"라고 진언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를 통해 5세기경 에조는 현재의 도호쿠 지방뿐만 아니라 간토 지방을 포함한 넓은 동쪽에 살았고, 야마타이국 사람들처럼 문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대 가요에는 "에미시 한 사람이 백 명에 해당한다고 말하지만, 우리 군대에는 맞서지도 못한다"[34]라는 구절이 있다. 또한 소가 에조, 오노 모인, 사에키 이마모인, 가모 에조처럼 야마토 조정 귀족의 이름에도 사용되었고, 헤이안 시대 후기에는 아베씨와 시와라씨 등 호족들이 권위를 얻기 위해 에조와의 관련성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점들에서 "에미시"는 강함이나 용맹함이라는 어감을 지녔다고 추측되며, 본래 의미는 "시골(변방)의 용사"와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도 있다.
키타니치 쿄스케는 아이누어에 어원이 있다고 보았다. 그는 아이누어에서 사람을 뜻하는 "엔츄(enchu, enchiu)"라는 말이 일본어로 "에미시"가 되었거나, "에미시"가 아이누어의 옛 형태였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문헌상 가장 오래된 기록은 모인(毛人)이다. 5세기 왜왕무가 송에 보낸 상표문에는 "동쪽으로 모인 55개국을 정벌하고, 서쪽으로 여러 이(夷) 66개국을 복종시켰다"라는 내용이 있다. 에조(蝦夷)라는 글자는 제이천황 5년(659년) 견당사 파견 무렵부터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후대에 인명으로 사용될 때는 대부분 모인(毛人)으로 표기했다. 소가 에조는 『일본서기』에는 에조(蝦夷)로, 『상궁성덕법왕제설』에는 소가 토우라 모인(蘇我屠 毛人)으로 기록되어 있다. 모인(毛人)의 "모(毛)"가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체모가 많은 것을 뜻하며 후대의 아이누와 관련이 있다는 설과, 중국 지리서 『산해경』의 모민국(毛民國)을 의식하여 중화(일본)의 변방을 나타내기 위해 선택했다는 설 등이 있다.[35]
사에키 이마모인의 근무 평정에는 이마에조(蛦, '夷'에 벌레 변(虫)이 붙은 글자)라고 기록된 예도 있다. 에조(蝦)의 "하(蝦)"는 턱수염이 긴 것을 새우에 비유한 것이라는 설이 있으며, "이(夷)"를 분해하면 "궁인(弓人)"이 되는데, 이것이 에조의 특징을 나타낸다는 설도 있다.
키타 사다키치는 "카이"라는 음이 에조의 자칭 민족명이었을 것이라는 설을 제기했다.[36] 아이누인은 몽골인 등 중국 동북부 민족에게는 "골궤(クギ, クイ)", 러시아인에게는 "쿠릴"로 불렸다. 쿠릴 열도의 러시아어 명칭은 쿠릴 제도이다. 제이천황 5년 견당사 때 당나라 사람이 에조라는 글자를 사용했고, 일본이 이를 계승했다는 것이다. 헤이안 초기 "홍인 사기" 서문에는 에조에 "카이"라는 루비(일본어 발음 표기)가 붙어 있고, 헤이안 말기 "이로하 지루이쇼"에도 카이 항목에 "에조"라고 적혀 있다. 아키타번 번사 히토미 쇼우가 1798년(관정 10년)경 저술한 흑천사어에는 에조(大+弓, 활 궁(弓) 자가 위에 있는 형태)에 "카이"라는 루비가 붙어 있으며, "다케칸바로 추정되는 식물을 타치라라고 부른다"는 기록을 통해 이것이 아이누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869년(메이지 2년) 마츠우라 부시로는 에조 지 탐사와 아이누와의 교류 경험을 바탕으로 "히다카미도", "호쿠카이도", "카이호쿠도", "카이토도", "토호쿠도", "치시마도"의 6가지 지명 안을 정부에 제출했다.[39] 메이지 정부는 "호쿠카이도"를 기본으로 하고 "카이"를 "해(海)"로 고쳐 "'''홋카이도'''"로 결정했다.[39] 같은 해 8월 15일 태정관 포고를 통해 "에조 지는 이제부터 홋카이도라고 부른다. 11개국으로 나누고 국명, 군명 등은 별지와 같이 명령한다"라고 발표했다.[39] 마츠우라는 건백서에서 "호쿠카이도" 안은 아이누가 스스로를 "카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착안했다고 설명했다.[39] 아오모리현 전승을 모은 나카미치 히토시의 『오쿠스미 키탄』에는 "에조자키"에 "카이자키"라는 루비가 붙어 있다.[40]
키타니치 쿄스케는 키타 사다키치 등의 설을 비판하고, "에비"의 옛 일본어 "에미"가 "에미시"와 통한다는 설을 주장했다.
여러 설 중 유일하게 확실한 것은 "이(夷)"가 동쪽 이민족(동이)을 가리키는 글자이며, 중화사상을 일본 중심으로 적용한 것이라는 점이다. "이(夷)"는 『고사기』 등에도 나오지만, 이 경우에는 옛 발음으로 "히나"라고 읽는다. 많은 학자들은 용자의 변화(에미시→에조)를 이민족에 대한 경멸 표현으로 해석하고, 소가 모인을 소가 에조라고 한 것도 『일본서기』 편찬자가 그를 낮춰 부른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에키 이마모인이나 오노 모인의 예를 들어 반대하는 의견도 있다.
『일본서기』에는 에조(蝦夷)의 "이(夷)" 자에 벌레 변(虫)을 붙인 글자도 자주 나타난다. 에조(蝦夷)라는 글자가 사용되기 시작한 시기와 거의 একই 때부터 북쪽 이민족을 나타내는 "적(狄)" 자도 사용되었다. "'''에데키(蝦狄)'''"라고 쓰고 "에미시"라고 읽었으며, 모인(毛人)과 결합하여 "모데키(毛狄)"라고 쓴 예도 있다.[41] "이(夷)"와 "적(狄)"을 한 글자로 구별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이는 관할 령제국에 따른 인위적인 구분이었다. 에치고국(후에 데와국) 관할의 일본해 쪽과 홋카이도의 에미시는 '''에데키・데키''', 무쓰국 관할의 태평양 쪽 에미시는 '''에조・이'''로 구분했다는 것이다.
3. 에미시 (고대)
에미시는 혼슈 동북부에 거주하며 야마토 조정에 복속되지 않은 집단이다. 이들은 통일된 정치 체제를 갖추지 못하고 점차 일본의 세력권에 편입되었다. 조정에 적극적으로 접근하는 집단도 있었지만, 적대적인 집단도 많았다. 에미시 중 일부는 가즈토(일본인)가 되었고, 나머지는 중세의 에조, 즉 아이누로 이어졌다. 에미시와 에조(아이누)는 연속성이 있다고 여겨졌으나, 근대에 도호쿠 지방에서 야요이 시대 벼농사 유적이 발견되면서 인종적으로는 동일하지만 민족적으로는 다르다는 설이 유력해졌다.
'에미시'는 야마토 조정 측에서 부른 명칭이며, 에미시 스스로를 어떻게 불렀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에미시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일본서기에 나오는 진무 천황 관련 내용이지만, 역사적 사실성이 낮아 신빙성이 떨어진다. 에미시의 민족적 성격이나 거주 범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대체로 간토 지방에서 도호쿠 지방, 홋카이도에 걸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5세기 중국 역사서 송서 왜국전에는 왜왕 무가 유송에 보낸 상표문에 "동쪽으로 모인(毛人)의 나라 55국을 정벌"했다는 기록이 있어, 5세기에는 에미시의 존재와 야마토 조정의 지배가 진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82]
고분 시대 전기의 전방후원분 북쪽 한계선은 니가타현 에치고 평야 중부, 후쿠시마현 아이즈 분지, 미야기현 센다이 평야로 여겨진다. 고분 시대 말기에는 동해 쪽 내륙에서 야마가타현 무라야마 지방 중부, 태평양 쪽에서는 이와테현 기타카미 분지 남부까지 북진했다.
《일본서기》 사이메이 천황 원년(655년) 기록에는 나니와쿄 조정에서 북에미시와 동에미시를 대접했다는 내용이 있다. 북쪽은 고시 국, 동쪽은 무쓰국 방향을 의미하며, 이는 당시 에미시가 양대 집단으로 나뉘었다기보다는 응대 실무를 맡았던 구니의 관할 방위에 따른 분류로 보인다.
사이메이 천황 5년(659년) 견당사 기록에는 에미시가 농사도 짓지 않고 나무 밑에 산다는 내용이 있지만, 이는 에미시를 야만인으로 과장하기 위한 창작으로 보인다.
7세기 아스카 시대에 에미시는 미야기 현 중부에서 야마가타 현 북쪽의 도호쿠 지방과 홋카이도 대부분에 거주했다. 아베노 히라후가 수군을 이끌고 에미시를 토벌하면서 야마토 정권의 지배 영역이 확대되었고, 조정과 충돌이 잦아졌다. 나라 시대 호키 11년(780년) 고레하리노 아키마로, 헤이안 시대 엔랴쿠 8년(789년) 아테루이 등이 에미시의 지도자로 알려져 있다. 조정은 세이이타이쇼군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를 파견하여 이사와 성과 지바 성을 쌓아 에미시를 정복했고, 복속된 에미시를 후슈라 불렀다.
9세기 기나이 조정은 에미시에 대한 직접적인 정복을 포기했고, 이후 현지 관료나 야마토화한 후슈 수장들이 에미시 부족 분쟁에 관여하면서 서서히 야마토화가 진행되었다. 전9년의 역, 후3년의 역 등에서 오슈 아베 씨나 데와 기요하라 씨는 스스로를 후슈장이라 칭하며 에미시와의 계보적 관련성을 주장했지만, 겐지 등은 에미시와 무관한 집안이었다. 헤이안 말기에는 에미시와의 혈연 관계를 주장하는 오슈 후지와라 씨의 지배가 도호쿠 북단까지 미쳤다.
오슈 후지와라 씨 초대 당주 후지와라노 기요히라는 주손지 공양원문에서 스스로를 '동이의 원추', '후슈의 우두머리'라 칭했고, 이후 3대 히데히라까지 오슈 후지와라 씨 당주는 주손지 곤지키도에 미라로 안치되었다. 1950년대 미라 조사 결과, 전형적인 일본인의 골격으로 알려졌으나, 미라의 인공 가공설도 주장되었다. 이는 사할린 아이누의 장례 관행과 유사하며, 에미시와 일본인 사이의 혼인으로 신체는 일본인화되었지만 문화에는 아이누적 요소가 남아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오슈 후지와라 씨가 가마쿠라 막부에 멸망당한 후, 에미시, 후슈 등의 민족적 개념은 사라지고 '에조'로 바뀌어 갔다.
에미시의 민족 계통에 대해서는, 후대의 아이누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에도 시대부터 에미시 아이누설과 에미시 변민설 두 가지 학설이 있었다. 현재는 고고학적 문화권 검토와 북동북에 아이누어에서 유래한 듯한 지명이 많은 점을 근거로, 적어도 아스카 시대 이후의 에미시는 아이누와의 연속성이 있다고 보는 학설이 유력하다. 고분 시대 한랭화로 홋카이도 도오, 도난 지방을 중심으로 번성하던 속조몬 문화 담당자가 도호쿠 지방 북부로 남하하여 고분 문화 담당자들과 접촉, 교류한 것이 고고학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들이 문헌상의 에미시이며, 이후 홋카이도의 에미시는 아이누로 이어지고, 도호쿠 지방의 에미시와 국내에 이배된 후슈는 일본인이 되었다고 한다. 한편, 에미시는 즈즈벤(일본 조몬어, 현재의 동북 방언의 시조)을 사용했고, 아이누와는 다른 민족이라는 설도 있다.
속조몬 문화에서 사쓰몬 문화로의 이행 과정 등은 단순히 설명하기 어려운 점이 있어, 일본서기에서 말하는 동일본 전역의 에미시, 조몬인, 야요이인 등과의 관계에 대한 논의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정복 이후 일부 에미시 지도자들은 도호쿠 지역 정부 체계에 편입되었고, 북부 후지와라 정권이 그 정점에 있었다. 이 정권과 아베 및 기요와라 같은 세력들은 에미시와 일본인을 기반으로 한 지역적 반독립 국가를 형성했다. 그러나 에미시 사람들은 점차 독특한 문화와 민족성을 잃어갔다.
북부 후와라는 에미시 출신으로 여겨졌지만, 그들의 혈통에 대한 의문이 있으며, 도호쿠 지역에 거주하던 지역 일본 가문의 후손일 가능성이 크다. 아베 가문과 기요와라 가문 모두 일본계이며, 9세기경 무쓰와 데와 지방으로 이주했을 가능성이 있는 강력한 가문이었다. 그들이 언제 이주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에미시의 후손들과 지역적 유대 관계를 발전시킨 일본 국경 가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직후, 히라이즈미에 있는 북부 후지와라 가문의 미라가 아이누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여겨져 연구되었으나, 연구자들은 이들이 아이누 민족과 관련이 없고 본토 일본인과 더 유사하다는 결론을 내렸다.[18] 이는 에미시가 아이누와 관련이 없다는 증거로 여겨졌지만, 북부 후지와라에 대한 연구는 그들이 에미시라고 가정했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며, 그들은 에미시가 아니었다.[19] 그들은 도호쿠의 이전 에미시가 지배했던 땅의 지배자가 되었기 때문에 스스로 에미시 칭호를 사용했다.
에미시는 일반적으로 북일본의 조몬인에서 갈라져 나온 아이누족과 혈연관계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정확한 관계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둘은 공통 조상을 공유하거나, 에미시 부족이 사쓰몬 문화를 거쳐 후대 아이누의 조상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1][2][20] 에미시와 아이누 모두 역사적으로 '에조'로 불렸으며, 같은 한자를 사용하여 쓰였다. 혼슈 북부의 에산 문화는 이러한 집단과 관련이 있으며, 나중에 현대 홋카이도 아이누족의 조상인 사쓰몬 문화를 탄생시켰는데, 일부 오호츠크 문화의 영향도 포함되어 있다.[21] 아이누와 달리 에미시는 기마민족이었고 철기를 사용했는데, 이는 초기 아이누와 에미시 사이의 문화적 차이를 보여준다. 농업 증거도 있지만, 에미시는 주로 기마민족, 사냥꾼, 어부, 상인이었다.[22]
혼슈 북부의 에미시는 주로 아이누 관련 언어를 사용했다.[2] 마타기는 이 아이누어 사용자들의 후손으로 여겨지며, 지명과 외래어를 현지 일본어 사용자들에게 제공했다.[23][24]
일부 에미시가 다른 일본어족 언어, 아마도 고대 "주주 방언"(동북 방언의 기원)을 사용했으며, 아이누족과 초기 야마토인과는 다른 민족 집단이었다는 증거가 있다. 이들은 초기 일본에서 야마토 왕조에 저항하고 다른 지역 부족과 동맹을 맺었던 일본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25][28] 현대 동북 방언과 고대 이즈모 방언의 유사성은 이즈모 사람들 중 일부가 도호쿠 지방으로 피난하여 에미시의 일부가 되었다는 견해를 뒷받침한다.[26][27] 또한 일부 에미시의 벼농사 증거는 그들의 조상에 일본어족 구성 요소가 있었을 가능성을 뒷받침한다.[28]
몇몇 역사학자들은 아무르 강 유역, 특히 퉁구스계 민족과 에미시 사이의 유사성을 지적했다. 에미시는 나중에 일본어를 사용하는 이즈모 이주민들과 동화된 퉁구스계 근원 집단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오이시 나오마사, 에모리 스스무 등은 에미시를 반유목적인 말갈/모헤족과 연결짓는다.[29] 또한 혼슈의 에미시와 홋카이도의 와타리시마 에미시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었다. 역사적 증거는 혼슈 에미시와 와타리시마 에미시 사이의 빈번한 전투를 시사한다. 와타리시마 에미시는 혼슈 에미시와 원 아이누어 사용자들로 구성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쿠도 마사키와 키타카마에 야스오는 에미시가 주로 퉁구스계 기원이며 일부 일본계 집단(이즈모 사람들)이 동화되었다고 결론지었다.[30] 그들은 또한 이전에 아이누어로 추정되었던 지명이 원 아이누어에 대한 아무르 퉁구스어 기층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쿠도는 마타기 사냥꾼들이 사실 에미시의 후손이며, 특정 사냥 어휘가 아이누어가 아닌 퉁구스어 기원이라고 제안한다.
에조는 뛰어난 궁술(일본인의 전통적인 장궁에 비해 단궁을 사용했다)[78][43][44][45]과 고분 시대에 일본에 전래된 말을 일본인으로부터 받아들여 기마 궁술 기술을 연마하여 사냥에 활용했다.[46] 또한 기승 무기(일본인으로부터 받아들인 궐수도)도 개량·발달시켰다. 이러한 전투술은 나라 시대와 헤이안 시대에 일본인에게 받아들여졌다.
이중 구조 모델에서는 일본 열도의 조몬인이 한반도에서 온 도래인과의 혼혈이 진행되어 야요이 문화를 낳은 것이 야요이인·와인이지만, 조몬인·조몬 문화는 그 후에도 일본 열도에 남았다. 야요이인·와인과의 혼혈 정도도 홋카이도를 제외한 일본 열도 내에서는 지리적으로 연속적이었다.
2020년 도쿄 대학의 도도부현 유전자 조사에서는 규슈 지방과 도호쿠 지방이 오키나와현에 유전적으로 가깝고, 킨키 지방과 시코쿠 지방이 유전적으로 멀다는(도래인에 가깝다는) 것이 밝혀졌다.[62][63]
야요이인은 야요이 시대에 도호쿠 지방 북부에 도달했지만, 고분 시대 한랭화에 따라 남쪽으로 물러났고, 거기에 홋카이도 도오 및 도난 지방을 중심으로 번영했던 속조몬 문화 담당자(후의 아이누 민족)가 도호쿠 지방 북부를 남하하여 센다이 평야 부근에까지 도달하여,[64] 서남일본에서 북상해 온 고분 문화 담당자(와인)와 접촉·교류를 행했다. 도호쿠 지방에 도착한 속조몬 문화 담당자는 그 후 다시 홋카이도로 물러났지만, 도호쿠 지방 와인과의 접촉·교류 자체는 계속되었다.
蝦夷아이누설에서는 후기 조몬 문화의 주체가 도호쿠 지방에 남아 蝦夷(에미시)가 되었다고 생각되고 있다. 이 이론은 고고학적 문화권 검토와 북동 도호쿠에 아이누어로 설명 가능한 지명이 집중되어 있는 점에서, 적어도 아스카 시대(7세기) 이후의 蝦夷에 대해 아이누와의 연속성을 인정하는 견해가 유력하다.[65]
蝦夷와 일본의 다른 민족 집단과의 정확한 민족 관계에 대해서는 많은 학설이 존재하지만, 그중 하나는 蝦夷가 아이누 민족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이론은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많은 蝦夷 부족이 뛰어난 기마궁병이자 전사로 알려져 있는 반면, 아이누 또한 궁병으로 알려져 있지만, 말을 사용하지 않았고 전투 스타일이 분명히 달랐기 때문이다. 또한 문화적으로도 달랐다.[66] 중앙 정부 측에 통역이 있었다는 점에서 이(夷)어가 일본어와 상당히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앞서 언급한 대로 아이누어 계통의 지명이 북동 도호쿠에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아이누어 계통의 언어를 사용했다고 추정된다.[65]
조몬인은 역사적 변천 속에서 蝦夷와 아이누 양쪽의 조상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蝦夷(에미시)와 蝦夷(에조)의 이름은 같은 한자로 표기된다. 이미 “蝦夷”라는 이름이 중세 초기 쓰가루 반도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고, 홋카이도의 조몬인이 직접 아이누의 조상이었다는 것이 알려져 있으므로, 이 이론에 따르면 이것은 논리적인 진행이다. 북혼슈의 케이잔 문화는 이들과 관련이 있으며, 후에 홋카이도의 현대 아이누 민족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찰문 문화로 발전했다. 蝦夷는 말을 타고 철을 다루는 사람들이었다(아이누와는 달리). 농업(조와 쌀)의 증거가 있는 반면, 그들은 주로 말을 타고 사냥, 어업, 무역을 했다.[67]
최근 연구에서는 아이누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현지 일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연합하여 야마토 왕권의 확장에 저항했음을 시사하고 있다.[68] 마타기는 이러한 아이누어 사용자의 후손이며, 그들은 현지 일본어 사용자에게 지리와 그들이 사냥한 산과 물의 동물과 관련된 지명과 차용어를 제공했다고 여겨진다.[68][69]
조몬 문화 사람들의 골격 특징 연구는 토착 민족 사이의 비균질성을 보여주며, 여러 기원과 다양한 민족 집단을 시사한다. 2014년 인류학적·유전학적 연구에서는 “이 점에서 조몬 시대 사람들의 생물학적 정체성은 비균질적이며, 그것은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했고, 그들은 아마도 공통의 문화인 조몬 문화에 속해 있었음을 보여준다”라고 결론짓고 있다.[70]
이중 구조 모델을 제창한 하니하라 카즈오는 “에미시는 아이누인가 와인인가?”라는 논쟁은 아이누 이인종설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공통의 조상을 가진 것으로 밝혀졌으므로 넌센스이며, “중세 이전에 도호쿠 지방에 살았던 에미시는 아이누와 와인의 분리 과정에 있던 집단이며,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아이누도 와인도 아니고, 그 중간적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된다”라고 했다.[71]
이에 대해 蝦夷辺民説(에조변민설)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서남일본(西南日本)에서 북상하여 접촉·교류를 행한 고분문화(古墳文化)의 담당자(화인(和人))이 도호쿠 지방에 살면서 에미시(蝦夷)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유전자 특징 연구에서는, 에미시는 아이누(アイヌ)보다 화인(和人)(특히 이즈모 지방의 고대인)에 가깝다는 연구도 있다. 또한 일본어의 「즈즈벤」(ズーズー弁)(현재의 도호쿠 방언(東北方言)의 시조)을 말하는 화인이라는 설도 있다.[72] 특히 도호쿠 방언(東北方言)과 이즈모 방언(出雲方言)의 유사성으로부터, 고대 이즈모(古代出雲) 계 민족 중 국내성(国譲り) 후에도 야마토 왕권(ヤマト王権)에 따르지 않은 세력이 에미시가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73] 최근 연구에서는 에미시는 주로 이즈모 방언과 밀접하게 관련된 일본어를 사용했다고 결론짓고 있다. 더 나아가 에미시에 의한 벼농사(稲作)의 증거와 말의 사용은 고대 이즈모 일본인과 에미시 사이의 유대를 강화하고 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에미시는 야마토 일본인에게 쫓겨난 이즈모 일본인이며, 그들은 천황의 통치에 순응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74]
출운 방언과 퉁구스어족의 유사성[75] 등을 근거로, 에조는 원래 일본에 없던 말을 데리고 대륙에서 온 북방 신몽골로이드계의 기마민족이라는 설도 있다. 아무르 지역의 기마 유목민, 특히 퉁구스족과 에조 사이에 현저한 유사성을 지적하는 역사학자도 있다. 에조의 기원은 퉁구스계 주민이며, 후에 일본어를 사용하는 출운계 주민과 동화되었다고 주장되고 있다.[76]
에조를 반유목의 말갈과 관련짓는 설이 있다. 또한, 혼슈의 에조와 홋카이도의 오시마 에조 사이에는 차이가 있었다. 역사적 증거는 혼슈의 에조와 오시마 에조 사이의 빈번한 전투를 보여준다. 오시마 에조는 혼슈의 에조와 프로토아이누어 화자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주장된다. 에조는 주로 퉁구스 기원이며, 일부는 동화된 일본어 집단(출운인)이었다고 결론짓는 설이 있다.[77]
이전에 아이누어로 여겨졌던 지명은 아무르 지역 퉁구스의 기층에 의해 프로토아이누어로 설명할 수 있다고 여겨진다. 또한, 마타기 사냥꾼은 실제로 에조의 후손이며, 특정 사냥 어휘(마타기말)는 아이누어가 아니라 퉁구스어 유래라는 설이 있다. 기쿠치 토시히코는 북혼슈와 홋카이도의 선주민이 형성한 擦文文化(삭문문화)와 오호츠크 문화와 러시아 극동의 퉁구스와 고아시아 여러 부족 사이에는, 특히 아무르 강 유역이나 만주 평원에서 많은 접촉이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67]
그러나 에조 퉁구스설은 공상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비판도 있다.[78]
3. 1. 개요
고대의 에미시(蝦夷)는 혼슈 동부와 그 이북에 거주하며, 정치적·문화적으로 야마토 조정(大和朝廷)이나 그 지배하에 들어온 지역에의 귀속이나 동화를 거부했던 집단을 가리켰다.[33] 이들은 통일된 정치 세력을 가지지 않았고, 조정에 적극적으로 접근하는 집단과 적대하는 집단이 기록에 남아 있다. 그러나 점차 영향력을 증대시켜 가는 야마토 조정에 의해 정복·흡수되어 갔다.에미시는 여러 부족으로 구성되었으며, 그중 일부는 일본과 동맹을 맺었고(「후슈(俘囚)」 및 「夷俘」로 불림), 다른 일부는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했다(「夷敵」으로 불림).[9]
“에미시”는 조정 측에서 부르던 타칭이며, 에미시 측의 민족 집단으로서의 자각 유무에 대해 언급한 사료는 없다. 에미시에 통일적인 아이덴티티가 없었다고 해석할지, 조정 측과의 교섭 속에서 민족 의식이 형성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할지는 연구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하다.
조정 측 사람들과 다른 “이고(夷語)”를 사용했기 때문에, 번역가(통역)가 필요했다.[42]
3. 2. 역사
에미시는 고대에 혼슈 동부 및 북부에 거주하면서 야마토 조정의 지배에 복속되지 않은 집단이다. 이들은 통일된 정치 체제를 갖추지 못하고 점차 일본의 세력권에 포함되어 갔다. 일부는 조정에 적극적으로 접근하기도 했지만, 적대적인 집단도 많았다. 에미시 중 일부는 일본인(가즈토)이 되었고, 나머지는 중세의 에조, 즉 아이누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에미시와 에조(아이누)는 서로 연속성이 있다고 여겨졌지만, 근대에 도호쿠 지방에서 야요이 시대의 벼농사 유적이 발견되면서 인종적으로는 동일하나 민족적으로는 조금 다르다는 설이 유력해졌다.야마토 조정은 에미시를 3인칭 타칭으로 불렀으며, 에미시 스스로를 어떻게 불렀는지는 기록이 없다. 에미시에게 통일된 정체성이 없었다는 견해도 있고, 야마토 조정과의 협상 과정에서 민족 의식이 형성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에미시에 대한 가장 오래된 언급은 진무 천황의 동정편에 있는 '''에미시'''('''愛濔詩''')라는 제목의 노래이다.[82]
: '' '''에미시'''를 홀로 백 사람을 맞는 강한 병사라 가로되 사람 많아도 저항 없이 지고 말았네''
그러나 진무 천황에 대한 기술은 역사적 사실성이 떨어지므로, 에미시에 대한 기술과 해당 노래에 대해서도 신빙성이 높지 않다. 여기서 등장하는 "아이누족"이 후의 "에조(아이누)"를 의미하는지도 분명치 않아서, 에미시의 민족적 성격이나 거주 범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고 분명한 것은 없다. 다만 대체로 간토 지방에서 도호쿠 지방, 홋카이도에 걸쳐 살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평상시에는 모피, 말, 쌀, 포, 철 등을 교환하는 등 무역도 이루어졌지만, 간사이 지방을 중심으로 한 야마토 조정은 에미시가 사는 도호쿠 땅에 여러 차례 대규모 토벌군을 보냈으며, 잦은 전투가 벌어졌다. 5세기 중국 역사서인 《송서》 왜국전에는 순제 승명 2년(478년) 왜왕 무가 유송(劉宋)에 보낸 상표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 옛부터 조상들이 스스로 갑옷을 꿰어 입고 산천을 넘나들며 편히 쉴 틈이 없었습니다. 동쪽으로는 모인(毛人)을 정벌하여 55개국을, 서쪽으로는 여러 이(夷)를 복속시켜 66개국을, 건너가 해북(海北)을 평정하여 95개국을 다스렸습니다.
이를 통해 5세기 당시 에미시의 존재와 야마토 조정에 의한 지배가 진행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고분 시대 전기의 가장 오래된 연대의 전방후원분의 북쪽 한계선은 현재의 니가타현 · 에치고평야 중부, 후쿠시마현 · 아이즈 분지, 미야기현(宮城県) · 센다이평야라 여겨진다. 고분 시대 말기까지 북쪽 한계선은 동해쪽 바닷가에서는 거의 북진하지 않고 오히려 주에쓰 지방까지 후퇴한 데 반해, 동해(일본해)쪽 내륙에서는 야마가타현(山形県) · 무라야마 지방 중부, 태평양 쪽에서는 이와테현 · 기타카미 분지 남부까지 북진했다.
《일본서기》 사이메이 천황 원년(655년) 7월 11일조에는 나니와쿄(難破京) 조정에서 북에미시 99명과 동에미시 95명을 향응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북쪽과 동쪽은 각각 호쿠에쓰(北越), 히가시미치노쿠(東陸奧)라는 주석이 있는데, 북쪽은 고시 국(越國), 동쪽은 무쓰국(陸奧國) 방향이다(고시는 실제로는 무쓰 서쪽에 위치하지만 수도에서 보아 북쪽에 위치하므로 북에미시로 분류). 이는 당시 에미시가 두 개의 큰 집단으로 나뉘어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응대 실무를 맡았던 구니의 관할 방위에 따라 조정이 분류한 것이다.
에미시의 생활을 동시대 사람이 직접 설명한 것으로, 사이메이 천황 5년(659년) 견당사 이키노무라치 하카토코와 당 고종의 문답이 《일본서기》에 실려 있는데, 에미시 가운데 쓰가루라 불리던 집단은 그들의 고유 이름을 떨칠 정도의 유력 집단으로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7세기 아스카 시대(飛鳥時代), 에미시는 지금의 미야기 현 중부에서 야마가타 현 북쪽의 도호쿠 지방과 홋카이도 대부분에 걸치는 넓은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다. 사이메이 천황 4년(658년) 아베노 히라후(阿倍比羅夫)가 수군(水軍) 180척을 이끌고 에미시를 토벌하였다. 야마토 정권의 지배 영역이 북쪽으로 확대되면서, 차츰 방위를 위한 전쟁 등으로 조정과 충돌하기 시작했고, 가즈토가 쌓은 목책을 넘어 습격하기 시작했다.
가장 대규모 전투는 이사와(胆沢)와 그 주변에서 있었는데, 당시 에미시의 지도자로써 나라 시대 호키(宝亀) 11년(780년) 다가 성(多賀城)이 에미시에게 일시 함락당한 호키의 난(宝亀の乱)에서의 고레하리노 아키마로(伊治呰麻呂), 헤이안 시대 엔랴쿠(延暦) 8년(789년) 스부세(巣伏)에서 조정의 원정군을 궤멸시킨 아테루이(阿弖流為) 등이 알려져 있다. 조정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이를 진압하였고,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将軍)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坂上田村麻呂)가 이사와 성(胆沢城)과 지바 성(志波城)을 쌓아 정복하였다. 이렇게 조정에 복속된 에미시는 후슈(俘囚)라 불렀다.
9세기 초, 기나이(畿内)의 조정은 에미시에 대한 직접적인 정복 활동을 포기했고, 조정의 지배 영역 확대는 현재의 이와테현과 아키타현 각각 중부 일대를 북쪽 한계로 정지했다. 그 뒤로는 현지 조정 관료나 야마토화한 후슈 수장들이 에미시 부족 분쟁에 관여함으로써 서서히 야마토화가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전9년의 역, 후3년의 역 등이 발발하면서 헤이안 후기 도호쿠 북부는 전란에 휘말렸는데, 당사자 중 오슈 아베 씨(奧州安倍氏)나 데와 기요하라 씨(出羽清原氏)는 스스로를 후슈장이라 자칭하면서 에미시와의 계보적 관련성을 주장하였지만, 반면 상대인 겐지(源氏) 등은 에미시와는 전혀 무관한 채로 도호쿠에 이주한 집안이었다.
헤이안 말기, 에미시와의 혈연적, 계보적 관계를 주장하는 오슈 후지와라 씨(奥州藤原氏)의 지배가 도호쿠 북단까지 미치게 된다. 오슈 후지와라 씨의 초대 당주였던 후지와라노 기요히라(藤原淸衡)는 자신이 중창한 주손지(中尊寺) 공양원문에서 스스로를 「동이(東夷)의 원추(遠酋)」, 「후슈의 우두머리」를 자처했고, 기요히라 이후 3대 히데히라(秀衡)까지 오슈 후지와라 씨 당주는 주손지의 곤지키도(金色堂)에 미이라로 안치되었다. 1950년대 이 미이라에 대한 고고학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그 결과 전형적인 일본인의 골격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사할린 아이누의 미이라 제작 방식과 유사하여, 에미시와 일본인 사이의 혼인으로 신체는 일본인화되었지만 문화는 아이누적인 요소가 남아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오슈 후지와라 씨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이끄는 가마쿠라 막부에 멸망당한 후, 막부는 도호쿠 지방 각지에 도고쿠 고케닌들을 파견하여 에미시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가마쿠라 막부에 의한 지배가 도호쿠 북단까지 미치게 되었다. 그 이후 에미시, 후슈 등이라 불리던 민족적 개념들은 문헌에서 자취를 감추고, 차츰 「에조」로 바뀌어 갔다.
3. 2. 1. 초기 기록
일본서기에 나오는 에미시에 대한 가장 오래된 언급은 진무 천황의 동정편에 있는 '''에미시'''('''愛濔詩''')라는 제목의 노래이다.[82]: '' '''에미시'''를 홀로 백 사람을 맞는 강한 병사라 가로되 사람 많아도 저항 없이 지고 말았네''
그러나 진무 천황에 대한 기술은 역사적 사실성이 떨어지므로, 에미시에 대한 기술과 해당 노래에 대해서도 신빙성이 높지 않다. 여기서 등장하는 "아이누족"이 후의 "에조(아이누)"를 의미하는지도 분명치 않아서, 에미시의 민족적 성격이나 거주 범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고 분명한 것은 없다. 다만 대체로 간토 지방에서 도호쿠 지방, 홋카이도에 걸쳐 살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5세기 중국의 역사서인 《송서》 왜국전에는, 순제 승명 2년(478년) 왜왕 무가 유송(劉宋)에 보낸 상표문에 다음과 같은 기술이 있다.
이 기록에서도 이미 5세기에는 에미시의 존재와 야마토 조정에 의한 지배가 진행되고 있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일본서기》 사이메이 천황 원년(655년) 7월 11일조에는, 나니와쿄(難破京)의 조정에서 북에미시 99명과 동에미시 95명을 향응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북쪽과 동쪽은 각각 호쿠에쓰(北越), 히가시미치노쿠(東陸奧)라는 주석이 있는데, 북쪽은 고시 국(越國), 동쪽은 무쓰국(陸奧國)의 방향이며(고시는 실제로는 무쓰 서쪽에 위치하지만 수도에서 보아 북쪽에 위치하므로 북에미시로 분류) 이는 당시 에미시 양대 집단으로 나뉘어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응대 실무를 맡았던 구니의 관할 방위에 따라 조정이 분류한 것으로 보인다.
에미시의 생활을 동시대 사람이 정면에서 설명한 것으로, 사이메이 천황 5년(659년)의 견당사 이키노무라치 하카토코와 당 고종의 문답이 《일본서기》에 실려 있는데, 여기에 보면 야마토 조정에 매년 입조하는 니키에미시(순한 에미시)가 야마토와 가장 가깝고, 다음으로 아라에미시(麁蝦夷), 그리고 가장 멀리 있는 것이 쓰가루(都加留)라고 대답하고 있다. 이키노 하카토코는 에미시가 농사도 지을 줄 모르고 집도 짓지 않고 나무 밑에 산다고 서술했지만, 사료에 보이는 다른 기술이나 현재의 고고학적 지식과도 모순되는 것으로 에미시를 야만인으로 과장하기 위한 창작으로 보인다.
3. 2. 2. 야마토 조정과의 갈등
일본서기의 내용 중 진무 천황의 동정편에 '''에미시'''('''愛濔詩''')라는 제목의 노래가 있으나, 역사적 사실성이 떨어지므로 신빙성이 높지 않다. 여기서 등장하는 "'''아이누족'''"이 후의 "'''에조(아이누)'''"를 의미하는지도 분명치 않다.[82]5세기 중국의 역사서인 《송서》 왜국전에, 순제 승명 2년(478년) 왜왕 무가 유송(劉宋)에 보낸 상표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어, 5세기에는 에미시의 존재와 야마토 조정에 의한 지배가 진행되고 있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 옛부터 조상들이 스스로 갑옷을 꿰어 입고 산천을 넘나들며 편히 쉴 틈이 없었습니다. 동쪽으로는 모인(毛人)을 정벌하여 55개국을, 서쪽으로는 여러 이(夷)를 복속시켜 66개국을, 건너가 해북(海北)을 평정하여 95개국을 다스렸습니다.
고분 시대 전기의 가장 오래된 연대의 전방후원분의 북쪽 한계선은 현재의 니가타현 · 에치고평야 중부 후쿠시마현 · 아이즈 분지, 미야기현(宮城県) · 센다이평야라 여겨진다. 고분 시대 말기까지 북쪽 한계선은 동해쪽 바닷가에서는 거의 북진하지 않고 오히려 주에쓰 지방까지 후퇴한 데 반해, 동해(일본해)쪽 내륙에서는 야마가타현(山形県) · 무라야마 지방 중부까지, 태평양 쪽에서는 이와테현 · 기타카미 분지 남부까지 북진했다.
《일본서기》 사이메이 천황 원년(655년) 7월 11일조에는, 나니와쿄(難破京)의 조정에서 북에미시 99명과 동에미시 95명을 향응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북쪽과 동쪽은 각각 호쿠에쓰(北越), 히가시미치노쿠(東陸奧)라는 주석이 있는데, 북쪽은 고시 국(越國), 동쪽은 무쓰국(陸奧國)의 방향이며(고시는 실제로는 무쓰 서쪽에 위치하지만 수도에서 보아 북쪽에 위치하므로 북에미시로 분류) 이는 당시 에미시 양대 집단으로 나뉘어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응대 실무를 맡았던 구니의 관할 방위에 따라 조정이 분류한 것으로 보인다.
에미시의 생활을 동시대 사람이 정면에서 설명한 것으로, 사이메이 천황 5년(659년)의 견당사 이키노무라치 하카토코와 당 고종의 문답이 《일본서기》에 실려 있는데, 에미시 가운데 쓰가루라 불리던 집단은 그들의 고유 이름을 떨칠 정도의 유력 집단으로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7세기 아스카 시대(飛鳥時代), 에미시는 지금의 미야기 현 중부에서 야마가타 현 북쪽의 도호쿠 지방과, 홋카이도 대부분에 걸치는 넓은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다. 사이메이 천황 4년(658년)에 아베노 히라후(阿倍比羅夫)가 수군(水軍) 180척을 이끌고 에미시를 토벌하였다. 야마토 정권의 지배영역이 북쪽으로 확대되면서, 차츰 방위를 위한 전쟁 등으로 조정과 충돌하기 시작했고, 가즈토가 쌓은 목책을 넘어 습격하기 시작했다.
가장 대규모 전투는 이사와(胆沢)와 그 주변에서 있었는데, 당시 에미시의 지도자로써 나라 시대인 호키(宝亀) 11년(780년)에 다가 성(多賀城)이 에미시에게 일시 함락당한 호키의 난(宝亀の乱)에서의 고레하리노 아키마로(伊治呰麻呂), 헤이안 시대인 엔랴쿠(延暦) 8년(789년)에 스부세(巣伏)에서 조정의 원정군을 궤멸시킨 아테루이(阿弖流為) 등이 알려져 있다. 조정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이를 진압하였고,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将軍)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坂上田村麻呂)가 이사와 성(胆沢城)과 지바 성(志波城)을 쌓아 정복하였다. 이렇게 조정에 복속된 에미시를 후슈(俘囚)라 불렀다.
헤이안 시대 전기인 9세기에 이르러 기나이(畿内)의 조정은 에미시에 대한 직접적인 정복 활동을 포기했고, 조정의 지배 영역 확대는 현재의 이와테 현과 아키타현의 각각 중부 일대를 북쪽 한계로 정지했다. 그 뒤로는 현지의 조정 관료나 야마토화한 후슈의 수장들이 에미시의 부족 분쟁에 관여함으로써 서서히 야마토화가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전9년의 역, 후3년의 역 등이 발발하면서 헤이안 후기 도호쿠 북부는 전란에 휘말렸는데, 당사자 중 오슈 아베 씨(奧州安倍氏)나 데와 기요하라 씨(出羽清原氏)는 스스로를 후슈장이라 자칭하면서 에미시와의 계보적 관련성을 주장하였지만, 반면 상대인 겐지(源氏) 등은 에미시와는 전혀 무관한 채로 도호쿠에 이주한 집안으로 당시의 민족 상황의 한 면모를 엿볼 수 있다.
헤이안 말기가 되면, 에미시와의 혈연적 계보적 관계를 주장하는 오슈 후지와라 씨(奥州藤原氏)의 지배가 도호쿠 북단까지 미치게 된다. 오슈 후지와라 씨의 초대 당주였던 후지와라노 기요히라(藤原淸衡)는 자신이 중창한 주손지(中尊寺)의 공양원문에서 스스로를 「동이(東夷)의 원추(遠酋)」, 「후슈의 우두머리」를 자처했고, 기요히라 이후 3대 히데히라(秀衡)까지 오슈 후지와라 씨의 당주는 주손지의 곤지키도(金色堂)에 미이라로 안치되었다.
1950년대 이 미이라에 대한 고고학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그 결과 이 미이라에는 지문에는 와문이 많고 둥근 머리며 치아의 배열을 보아도 전형적인 일본인의 골격인 것으로 알려졌다. 해당 미이라에는 내장이나 뇌장이 전혀 없었고, 복부는 만곡 형태로 절개되고 후두부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틈틈이 쥐가 갉아먹은 듯한 모양이 붙어 있어, 하세베 코토히토(長谷部言人)는 미이라는 자연발생했다고 주장하며 후지와라 3대는 일본인이라 주장하였다. 반면 후루와타 네모토(古畑種基)는 미이라의 인공 가공설을 주장했다. 미이라가 안치된 목관 3개 모두 뒤통수와 항문이 닿는 부분에 구멍이 뚫려 있고, 절개된 단면은 깨끗하고 오물이 유출한 흔적은 없으며 성기는 절개되어 가공의 흔적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지극히 아이누적인 관행으로써, 사할린 아이누는 위대한 추장이 죽으면 근친자들이 그 시신의 뇌와 내장을 제거하고 몇 번이나 소금물에 담가서 햇볕에 말려 미이라(우후이)로 만든다. 모리 카헤(森嘉兵衛)는 에미시와 일본인 사이의 몇 대에 걸친 혼인으로 골격 등 신체는 일본인화되기는 했지만 의식이나 장례의 관행 등의 문화는 아이누적인 요소가 여전히 남아 있던 것 아닐까 설명하고 있다.
오슈 후지와라 씨가 겐지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가 이끄는 간토 지방의 가마쿠라 막부(鎌倉政権)에 멸망당하고, 막부는 도호쿠 지방 각지에 도고쿠 고케닌들을 파견해, 이곳에 에미시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가마쿠라 막부에 의한 지배가 시작되어, 도호쿠 북단까지 미치게 되었다. 그 이후 에미시, 후슈 등이라 불리던 민족적 개념들은 문헌에서 자취를 감추고, 차츰 「에조」로 바뀌어 갔다.
3. 2. 3. 야마토 조정에 복속된 에미시
일본서기에는 진무 천황의 동정편에 에미시에 대한 가장 오래된 언급이 있다. 거기서 읊은 노래 가운데 '''에미시'''('''愛濔詩''')라는 제목의 노래가 있다.[82] 그러나 진무 천황 관련 기술은 역사적 사실성이 떨어지므로, 에미시에 대한 내용과 해당 노래 역시 신빙성이 높지 않다. 여기서 등장하는 "'''아이누족'''"이 후의 "'''에조(아이누)'''"를 의미하는지도 불분명하여, 에미시의 민족적 성격이나 거주 범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고 명확히 밝혀진 것은 없다. 다만 대체로 간토 지방에서 도호쿠 지방, 홋카이도에 걸쳐 살고 있었다고 추정된다.평상시에는 모피, 말, 쌀, 포, 철 등을 교환하는 등 무역도 이루어졌지만, 간사이 지방을 중심으로 한 야마토 조정은 에미시가 사는 도호쿠 땅에 여러 차례 대규모 토벌군을 보냈으며, 잦은 전투가 벌어졌다. 5세기 중국 역사서인 《송서》 왜국전에는 순제 승명 2년(478년) 왜왕 무가 유송(劉宋)에 보낸 상표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5세기 당시 에미시의 존재와 야마토 조정에 의한 지배가 진행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발굴 조사에 따르면, 고분 시대 전기 가장 오래된 연대의 전방후원분 북쪽 한계선은 현재의 니가타현 · 에치고평야 중부, 후쿠시마현 · 아이즈 분지, 미야기현(宮城県) · 센다이평야로 여겨진다. 고분 시대 말기까지 북쪽 한계선은 동해쪽 바닷가에서는 거의 북진하지 않고 오히려 주에쓰 지방까지 후퇴한 반면, 동해(일본해)쪽 내륙에서는 야마가타현(山形県) · 무라야마 지방 중부, 태평양 쪽에서는 이와테현 · 기타카미 분지 남부까지 북진했다.
《일본서기》 사이메이 천황 원년(655년) 7월 11일조에는 나니와쿄(難破京) 조정에서 북에미시 99명과 동에미시 95명을 향응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북쪽과 동쪽은 각각 호쿠에쓰(北越), 히가시미치노쿠(東陸奧)라는 주석이 있는데, 북쪽은 고시 국(越國), 동쪽은 무쓰국(陸奧國) 방향이다(고시는 실제로는 무쓰 서쪽에 위치하지만 수도에서 보아 북쪽에 위치하므로 북에미시로 분류). 이는 당시 에미시가 두 개의 큰 집단으로 나뉘어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응대 실무를 맡았던 구니의 관할 방위에 따라 조정이 분류한 것이다. 이러한 구분은 나중에 데와국과 무쓰 국 관할이 되면서 헤이안 시대까지 답습되지만, 표기는 고대 중국에서 북방 이민족을 가리키는 단어인 북적(北狄)으로 바뀌어 에미시(蝦狄)라고도 쓰였다.
에미시의 생활을 동시대 사람이 직접 설명한 것으로, 사이메이 천황 5년(659년) 견당사 이키노무라치 하카토코와 당 고종의 문답이 《일본서기》에 실려 있다. 여기에 따르면 야마토 조정에 매년 입조하는 니키에미시(순한 에미시)가 야마토와 가장 가깝고, 다음으로 아라에미시(麁蝦夷), 가장 멀리 있는 것이 쓰가루(都加留)라고 대답하였다. 이키노 하카토코는 에미시가 농사도 지을 줄 모르고 집도 짓지 않으며 나무 밑에 산다고 서술했지만, 이는 사료에 보이는 다른 기술이나 현재의 고고학적 지식과 모순되는 것으로, 에미시를 야만인으로 과장하기 위한 창작으로 보인다. 신빙성이 부족한 이 설명에서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에미시 가운데 쓰가루라 불리던 집단이 그들의 고유 이름을 떨칠 정도의 유력한 집단으로 존재했다는 점이다.
7세기 아스카 시대(飛鳥時代), 에미시는 지금의 미야기 현 중부에서 야마가타 현 북쪽의 도호쿠 지방과 홋카이도 대부분에 걸치는 넓은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다. 사이메이 천황 4년(658년) 아베노 히라후(阿倍比羅夫)가 수군(水軍) 180척을 이끌고 에미시를 토벌하였다. 야마토 정권의 지배 영역이 북쪽으로 확대되면서, 차츰 방위를 위한 전쟁 등으로 조정과 충돌하기 시작했고, 가즈토가 쌓은 목책을 넘어 습격하기 시작했다. 가장 대규모 전투는 이사와(胆沢)와 그 주변에서 있었는데, 당시 에미시의 지도자로써 나라 시대 호키(宝亀) 11년(780년) 다가 성(多賀城)이 에미시에게 일시 함락당한 호키의 난(宝亀の乱)에서의 고레하리노 아키마로(伊治呰麻呂), 헤이안 시대 엔랴쿠(延暦) 8년(789년) 스부세(巣伏)에서 조정의 원정군을 궤멸시킨 아테루이(阿弖流為) 등이 알려져 있다. 조정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이를 진압하였고,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将軍)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坂上田村麻呂)가 이사와 성(胆沢城)과 지바 성(志波城)을 쌓아 정복하였다. 이렇게 조정에 복속된 에미시는 후슈(俘囚)라 불렀다.
헤이안 시대 전기인 9세기에 이르러 기나이(畿内)의 조정은 에미시에 대한 직접적인 정복 활동을 포기했고, 조정의 지배 영역 확대는 현재의 이와테 현과 아키타현 각각 중부 일대를 북쪽 한계로 정지했다. 그 뒤로는 현지 조정 관료나 야마토화한 후슈 수장들이 에미시 부족 분쟁에 관여함으로써 서서히 야마토화가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전9년의 역, 후3년의 역 등이 발발하면서 헤이안 후기 도호쿠 북부는 전란에 휘말렸는데, 당사자 중 오슈(무쓰) 아베 씨(奧州安倍氏)나 데와 기요하라 씨(出羽清原氏)는 스스로를 후슈장이라 자칭하면서 에미시와의 계보적 관련성을 주장하였지만, 반면 상대인 겐지(源氏) 등은 에미시와는 전혀 무관한 채로 도호쿠에 이주한 집안으로 당시의 민족 상황의 한 면모를 엿볼 수 있다. 헤이안 말기가 되면, 에미시와의 혈연적, 계보적 관계를 주장하는 오슈 후지와라 씨(奥州藤原氏)의 지배가 도호쿠 북단까지 미치게 된다.
3. 2. 4. 가마쿠라 막부 이후
오슈 후지와라 씨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거느린 간토 지방의 가마쿠라 정권에 멸망당했다. 이후 막부는 도호쿠 지방 각지에 도고쿠 고케닌들을 파견하여 에미시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가마쿠라 막부에 의한 지배가 도호쿠 북단까지 미치게 되었다. 그 이후 에미시, 후슈 등이라 불리던 민족적 개념들은 문헌에서 자취를 감추고, 차츰 「에조」로 바뀌어 갔다.[82]3. 3. 민족 계통
에미시는 혼슈 동북부에 거주하며 야마토 조정에 복속되지 않은 집단이었다. 이들은 통일된 정치 체제를 갖추지 못하고 점차 일본의 세력권에 편입되었다. 조정에 적극적으로 접근하는 집단도 있었지만, 적대적인 집단도 많았다. 에미시 중 일부는 가즈토(일본인)가 되었고, 나머지는 중세의 에조, 즉 아이누로 이어졌다. 에미시와 에조(아이누)는 연속성이 있다고 여겨졌으나, 근대에 도호쿠 지방에서 야요이 시대 벼농사 유적이 발견되면서 인종적으로는 동일하지만 민족적으로는 다르다는 설이 유력해졌다.'에미시'는 야마토 조정 측에서 부른 명칭이며, 에미시 스스로를 어떻게 불렀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에미시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일본서기에 나오는 진무 천황 관련 내용이지만, 역사적 사실성이 낮아 신빙성이 떨어진다. 에미시의 민족적 성격이나 거주 범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대체로 간토 지방에서 도호쿠 지방, 홋카이도에 걸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5세기 중국 역사서 송서 왜국전에는 왜왕 무가 유송에 보낸 상표문에 "동쪽으로 모인(毛人)의 나라 55국을 정벌"했다는 기록이 있어, 5세기에는 에미시의 존재와 야마토 조정의 지배가 진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82]
고분 시대 전기의 전방후원분 북쪽 한계선은 니가타현 에치고 평야 중부, 후쿠시마현 아이즈 분지, 미야기현 센다이 평야로 여겨진다. 고분 시대 말기에는 동해 쪽 내륙에서 야마가타현 무라야마 지방 중부, 태평양 쪽에서는 이와테현 기타카미 분지 남부까지 북진했다.
《일본서기》 사이메이 천황 원년(655년) 기록에는 나니와쿄 조정에서 북에미시와 동에미시를 대접했다는 내용이 있다. 북쪽은 고시 국, 동쪽은 무쓰국 방향을 의미하며, 이는 당시 에미시가 양대 집단으로 나뉘었다기보다는 응대 실무를 맡았던 구니의 관할 방위에 따른 분류로 보인다.
사이메이 천황 5년(659년) 견당사 기록에는 에미시가 농사도 짓지 않고 나무 밑에 산다는 내용이 있지만, 이는 에미시를 야만인으로 과장하기 위한 창작으로 보인다.
7세기 아스카 시대에 에미시는 미야기 현 중부에서 야마가타 현 북쪽의 도호쿠 지방과 홋카이도 대부분에 거주했다. 아베노 히라후가 수군을 이끌고 에미시를 토벌하면서 야마토 정권의 지배 영역이 확대되었고, 조정과 충돌이 잦아졌다. 나라 시대 호키 11년(780년) 고레하리노 아키마로, 헤이안 시대 엔랴쿠 8년(789년) 아테루이 등이 에미시의 지도자로 알려져 있다. 조정은 세이이타이쇼군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를 파견하여 이사와 성과 지바 성을 쌓아 에미시를 정복했고, 복속된 에미시를 후슈라 불렀다.
9세기 기나이 조정은 에미시에 대한 직접적인 정복을 포기했고, 이후 현지 관료나 야마토화한 후슈 수장들이 에미시 부족 분쟁에 관여하면서 서서히 야마토화가 진행되었다. 전9년의 역, 후3년의 역 등에서 오슈 아베 씨나 데와 기요하라 씨는 스스로를 후슈장이라 칭하며 에미시와의 계보적 관련성을 주장했지만, 겐지 등은 에미시와 무관한 집안이었다. 헤이안 말기에는 에미시와의 혈연 관계를 주장하는 오슈 후지와라 씨의 지배가 도호쿠 북단까지 미쳤다.
오슈 후지와라 씨 초대 당주 후지와라노 기요히라는 주손지 공양원문에서 스스로를 '동이의 원추', '후슈의 우두머리'라 칭했고, 이후 3대 히데히라까지 오슈 후지와라 씨 당주는 주손지 곤지키도에 미라로 안치되었다. 1950년대 미라 조사 결과, 전형적인 일본인의 골격으로 알려졌으나, 미라의 인공 가공설도 주장되었다. 이는 아이누의 장례 관행과 유사하며, 에미시와 일본인 사이의 혼인으로 신체는 일본인화되었지만 문화에는 아이누적 요소가 남아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오슈 후지와라 씨가 가마쿠라 막부에 멸망당한 후, 에미시, 후슈 등의 민족적 개념은 사라지고 '에조'로 바뀌어 갔다.
에미시의 성격은 아이누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여러 학설이 있었으나, 현재는 고고학적 문화권 검토와 북동북에 아이누어에서 유래한 듯한 지명이 많은 점을 근거로, 적어도 아스카 시대 이후의 에미시는 아이누와의 연속성이 있다고 보는 학설이 유력하다. 고분 시대 한랭화로 홋카이도 도오, 도난 지방을 중심으로 번성하던 속조몬 문화 담당자가 도호쿠 지방 북부로 남하하여 고분 문화 담당자들과 접촉, 교류한 것이 고고학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들이 문헌상의 에미시이며, 이후 홋카이도의 에미시는 아이누로 이어지고, 도호쿠 지방의 에미시와 국내에 이배된 후슈는 일본인이 되었다고 한다. 한편, 에미시는 즈즈벤(일본 조몬어, 현재의 동북 방언의 시조)을 사용했고, 아이누와는 다른 민족이라는 설도 있다.
속조몬 문화에서 사쓰몬 문화로의 이행 과정 등은 단순히 설명하기 어려운 점이 있어, 일본서기에서 말하는 동일본 전역의 에미시, 조몬인, 야요이인 등과의 관계에 대한 논의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정복 이후 일부 에미시 지도자들은 도호쿠 지역 정부 체계에 편입되었고, 북부 후지와라 정권이 그 정점에 있었다. 이 정권과 아베 및 기요와라 같은 세력들은 에미시와 일본인을 기반으로 한 지역적 반독립 국가를 형성했다. 그러나 에미시 사람들은 점차 독특한 문화와 민족성을 잃어갔다.
북부 후지와라는 에미시 출신으로 여겨졌지만, 그들의 혈통에 대한 의문이 있으며, 도호쿠 지역에 거주하던 지역 일본 가문의 후손일 가능성이 크다. 아베 가문과 기요하라 가문 모두 일본계이며, 9세기경 무쓰와 데와 지방으로 이주했을 가능성이 있는 강력한 가문이었다. 그들이 언제 이주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에미시의 후손들과 지역적 유대 관계를 발전시킨 일본 국경 가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직후, 히라이즈미에 있는 북부 후지와라 가문의 미라가 아이누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여겨져 연구되었으나, 연구자들은 이들이 아이누 민족과 관련이 없고 본토 일본인과 더 유사하다는 결론을 내렸다.[18] 이는 에미시가 아이누와 관련이 없다는 증거로 여겨졌지만, 북부 후지와라에 대한 연구는 그들이 에미시라고 가정했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며, 그들은 에미시가 아니었다.[19] 그들은 도호쿠의 이전 에미시가 지배했던 땅의 지배자가 되었기 때문에 스스로 에미시 칭호를 사용했다.
에미시는 일반적으로 북일본의 조몬인에서 갈라져 나온 아이누족과 혈연관계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정확한 관계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둘은 공통 조상을 공유하거나, 에미시 부족이 사쓰몬 문화를 거쳐 후대 아이누의 조상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1][2][20] 에미시와 아이누 모두 역사적으로 '에조'로 불렸으며, 같은 한자를 사용하여 쓰였다. 혼슈 북부의 에산 문화는 이러한 집단과 관련이 있으며, 나중에 현대 홋카이도 아이누족의 조상인 사쓰몬 문화를 탄생시켰는데, 일부 오호츠크 문화의 영향도 포함되어 있다.[21] 아이누와 달리 에미시는 기마민족이었고 철기를 사용했는데, 이는 초기 아이누와 에미시 사이의 문화적 차이를 보여준다. 농업 증거도 있지만, 에미시는 주로 기마민족, 사냥꾼, 어부, 상인이었다.[22]
혼슈 북부의 에미시는 주로 아이누 관련 언어를 사용했다.[2] 마타기는 이 아이누어 사용자들의 후손으로 여겨지며, 지명과 외래어를 현지 일본어 사용자들에게 제공했다.[23][24]
일부 에미시가 다른 일본어족 언어, 아마도 고대 "주주 방언"(동북 방언의 기원)을 사용했으며, 아이누족과 초기 야마토인과는 다른 민족 집단이었다는 증거가 있다. 이들은 초기 일본에서 야마토 왕조에 저항하고 다른 지역 부족과 동맹을 맺었던 일본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25][28] 현대 동북 방언과 고대 이즈모 방언의 유사성은 이즈모 사람들 중 일부가 도호쿠 지방으로 피난하여 에미시의 일부가 되었다는 견해를 뒷받침한다.[26][27] 또한 일부 에미시의 벼농사 증거는 그들의 조상에 일본어족 구성 요소가 있었을 가능성을 뒷받침한다.[28]
몇몇 역사학자들은 아무르 강 유역, 특히 퉁구스계 민족과 에미시 사이의 유사성을 지적했다. 에미시는 나중에 일본어를 사용하는 이즈모 이주민들과 동화된 퉁구스계 근원 집단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오이시 나오마사, 에모리 스스무 등은 에미시를 반유목적인 말갈/모헤족과 연결짓는다.[29] 또한 혼슈의 에미시와 홋카이도의 와타리시마 에미시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었다. 역사적 증거는 혼슈 에미시와 와타리시마 에미시 사이의 빈번한 전투를 시사한다. 와타리시마 에미시는 혼슈 에미시와 원 아이누어 사용자들로 구성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쿠도 마사키와 키타카마에 야스오는 에미시가 주로 퉁구스계 기원이며 일부 일본계 집단(이즈모 사람들)이 동화되었다고 결론지었다.[30] 그들은 또한 이전에 아이누어로 추정되었던 지명이 원 아이누어에 대한 아무르 퉁구스어 기층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쿠도는 마타기 사냥꾼들이 사실 에미시의 후손이며, 특정 사냥 어휘가 아이누어가 아닌 퉁구스어 기원이라고 제안한다.
5세기 중국 역사서 『송서』 왜국전에는 478년 왜왕 무가 송에 올린 상소문에 "동쪽으로 모인(毛人)을 정벌하여 55개국을" 다스렸다는 기록이 있다.
에조는 뛰어난 궁술(일본인의 전통적인 장궁에 비해 단궁을 사용했다)[78][43][44][45]과 고분 시대에 일본에 전래된 말을 일본인으로부터 받아들여 기마 궁술 기술을 연마하여 사냥에 활용했다.[46] 또한 기승 무기(일본인으로부터 받아들인 궐수도)도 개량·발달시켰다. 이러한 전투술은 나라 시대와 헤이안 시대에 일본인에게 받아들여졌다.
동북 지방 에미시의 민족 계통에 대해서는, 후대의 아이누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에도 시대부터 에미시 아이누설과 에미시 변민설 두 가지 학설로 나뉜다.
이중 구조 모델에서는 일본 열도의 조몬인이 한반도에서 온 도래인과의 혼혈이 진행되어 야요이 문화를 낳은 것이 야요이인·와인이지만, 조몬인·조몬 문화는 그 후에도 일본 열도에 남았다. 야요이인·와인과의 혼혈 정도도 홋카이도를 제외한 일본 열도 내에서는 지리적으로 연속적이었다.
2020년 도쿄 대학의 도도부현 유전자 조사에서는 규슈 지방과 도호쿠 지방이 오키나와현에 유전적으로 가깝고, 킨키 지방과 시코쿠 지방이 유전적으로 멀다는(도래인에 가깝다는) 것이 밝혀졌다.[62][63]
야요이인은 야요이 시대에 도호쿠 지방 북부에 도달했지만, 고분 시대 한랭화에 따라 남쪽으로 물러났고, 거기에 홋카이도 도오 및 도난 지방을 중심으로 번영했던 속조몬 문화 담당자(후의 아이누 민족)가 도호쿠 지방 북부를 남하하여 센다이 평야 부근에까지 도달하여,[64] 서남일본에서 북상해 온 고분 문화 담당자(와인)와 접촉·교류를 행했다. 도호쿠 지방에 도착한 속조몬 문화 담당자는 그 후 다시 홋카이도로 물러났지만, 도호쿠 지방 와인과의 접촉·교류 자체는 계속되었다.
蝦夷アイヌ説에서는 후기 조몬 문화의 주체가 도호쿠 지방에 남아 蝦夷(에미시)가 되었다고 생각되고 있다. 이 이론은 고고학적 문화권 검토와 북동 도호쿠에 아이누어로 설명 가능한 지명이 집중되어 있는 점에서, 적어도 아스카 시대(7세기) 이후의 蝦夷에 대해 아이누와의 연속성을 인정하는 견해가 유력하다.[65]
蝦夷와 일본의 다른 민족 집단과의 정확한 민족 관계에 대해서는 많은 학설이 존재하지만, 그중 하나는 蝦夷가 아이누 민족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이론은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많은 蝦夷 부족이 뛰어난 기마궁병이자 전사로 알려져 있는 반면, 아이누 또한 궁병으로 알려져 있지만, 말을 사용하지 않았고 전투 스타일이 분명히 달랐기 때문이다. 또한 문화적으로도 달랐다.[66] 중앙 정부 측에 통역이 있었다는 점에서 이(夷)어가 일본어와 상당히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앞서 언급한 대로 아이누어 계통의 지명이 북동 도호쿠에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아이누어 계통의 언어를 사용했다고 추정된다.[65]
조몬인은 역사적 변천 속에서 蝦夷와 아이누 양쪽의 조상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蝦夷(에미시)와 蝦夷(에조)의 이름은 같은 한자로 표기된다. 이미 “蝦夷”라는 이름이 중세 초기 쓰가루 반도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고, 홋카이도의 조몬인이 직접 아이누의 조상이었다는 것이 알려져 있으므로, 이 이론에 따르면 이것은 논리적인 진행이다. 북혼슈의 케이잔 문화는 이들과 관련이 있으며, 후에 홋카이도의 현대 아이누 민족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찰문 문화로 발전했다. 蝦夷는 말을 타고 철을 다루는 사람들이었다(아이누와는 달리). 농업(조와 쌀)의 증거가 있는 반면, 그들은 주로 말을 타고 사냥, 어업, 무역을 했다.[67]
최근 연구에서는 아이누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현지 일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연합하여 야마토 왕권의 확장에 저항했음을 시사하고 있다.[68] 마타기는 이러한 아이누어 사용자의 후손이며, 그들은 현지 일본어 사용자에게 지리와 그들이 사냥한 산과 물의 동물과 관련된 지명과 차용어를 제공했다고 여겨진다.[68][69]
조몬 문화 사람들의 골격 특징 연구는 토착 민족 사이의 비균질성을 보여주며, 여러 기원과 다양한 민족 집단을 시사한다. 2014년 인류학적·유전학적 연구에서는 “이 점에서 조몬 시대 사람들의 생물학적 정체성은 비균질적이며, 그것은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했고, 그들은 아마도 공통의 문화인 조몬 문화에 속해 있었음을 보여준다”라고 결론짓고 있다.[70]
이중 구조 모델을 제창한 하니하라 카즈오는 “에미시는 아이누인가 와인인가?”라는 논쟁은 아이누 이인종설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공통의 조상을 가진 것으로 밝혀졌으므로 넌센스이며, “중세 이전에 도호쿠 지방에 살았던 에미시는 아이누와 와인의 분리 과정에 있던 집단이며,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아이누도 와인도 아니고, 그 중간적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된다”라고 했다.[71]
이에 대해 蝦夷辺民説(에조변민설)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서남일본(西南日本)에서 북상하여 접촉·교류를 행한 고분문화(古墳文化)의 담당자(화인(和人))이 도호쿠 지방에 살면서 에미시(蝦夷)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유전자 특징 연구에서는, 에미시는 아이누(アイヌ)보다 화인(和人)(특히 이즈모 지방의 고대인)에 가깝다는 연구도 있다. 또한 일본어의 「즈즈벤」(ズーズー弁)(현재의 도호쿠 방언(東北方言)의 시조)을 말하는 화인이라는 설도 있다.[72] 특히 도호쿠 방언(東北方言)과 이즈모 방언(出雲方言)의 유사성으로부터, 고대 이즈모(古代出雲) 계 민족 중 국내성(国譲り) 후에도 야마토 왕권(ヤマト王権)에 따르지 않은 세력이 에미시가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73] 최근 연구에서는 에미시는 주로 이즈모 방언과 밀접하게 관련된 일본어를 사용했다고 결론짓고 있다. 더 나아가 에미시에 의한 벼농사(稲作)의 증거와 말의 사용은 고대 이즈모 일본인과 에미시 사이의 유대를 강화하고 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에미시는 야마토 일본인에게 쫓겨난 이즈모 일본인이며, 그들은 천황의 통치에 순응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74]
출운 방언과 퉁구스어족의 유사성[75] 등을 근거로, 에조는 원래 일본에 없던 말을 데리고 대륙에서 온 북방 신몽골로이드계의 기마민족이라는 설도 있다. 아무르 지역의 기마 유목민, 특히 퉁구스족과 에조 사이에 현저한 유사성을 지적하는 역사학자도 있다. 에조의 기원은 퉁구스계 주민이며, 후에 일본어를 사용하는 출운계 주민과 동화되었다고 주장되고 있다.[76]
에조를 반유목의 말갈과 관련짓는 설이 있다. 또한, 혼슈의 에조와 홋카이도의 오시마 에조 사이에는 차이가 있었다. 역사적 증거는 혼슈의 에조와 오시마 에조 사이의 빈번한 전투를 보여준다. 오시마 에조는 혼슈의 에조와 프로토아이누어 화자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주장된다. 에조는 주로 퉁구스 기원이며, 일부는 동화된 일본어 집단(출운인)이었다고 결론짓는 설이 있다.[77]
이전에 아이누어로 여겨졌던 지명은 아무르 지역 퉁구스의 기층에 의해 프로토아이누어로 설명할 수 있다고 여겨진다. 또한, 마타기 사냥꾼은 실제로 에조의 후손이며, 특정 사냥 어휘(마타기말)는 아이누어가 아니라 퉁구스어 유래라는 설이 있다. 기쿠치 토시히코는 북혼슈와 홋카이도의 선주민이 형성한 擦文文化(삭문문화)와 오호츠크 문화와 러시아 극동의 퉁구스와 고아시아 여러 부족 사이에는, 특히 아무르 강 유역이나 만주 평원에서 많은 접촉이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67]
그러나 에조 퉁구스설은 공상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비판도 있다.[78]
4. 에조 (중세 이후)
중세 이후의 에조(えぞ)는 대부분 아이누족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진다. 가마쿠라 시대 후기(13세기~14세기) 무렵에는, 현재 아이누라고 불리는 사람들과 동일시되는 "에조"가 존재했음이 문헌 자료를 통해 확인된다.
아이누 문화는 찰문 문화를 계승하면서 오호츠크 문화와 융합하고, 혼슈의 문화를 흡수하여 탄생했다고 생각된다. 그 성립 시기는 "에조"가 처음 보이는 가마쿠라 시대 후반(13세기)으로 여겨진다. 찰문 문화와 아이누 문화의 생활 체계의 가장 큰 차이는, 혼슈나 대륙 등 외부로부터의 유입품(특히 철제품)의 양적 증대에 있었다. 아이누 문화는 교역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누 문화가 탄생하는 계기에 와진(和人)과의 교섭 증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4세기에는 '도당(渡党)', '히노모토(日の本)', '가라코(唐子)'의 세 종류로 나뉘었다. 가마쿠라 시대에는 무쓰 국(陸奥国)의 호족인 안도 씨(安東氏)가 막부의 집권(執権) 호죠 씨(北条氏)로부터 에조 관령(蝦夷管領)(또는 에조 대관)에 임명되어 이들 세 종류의 에조를 통괄하고 있었다.
무로마치 시대(15세기~16세기)에 도당(渡党)을 통일하고 도시마 반도 남부의 영주로 성장한 가키자키 씨(蠣崎氏)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에조치 지배 및 교역권을 공인받아 안도 집안으로부터 독립했다. 에도 시대에 가키자키 집안은 마쓰마에 씨로 개명하고 다이묘(大名)의 반열에 올랐다.
4. 1. 개요
중세 이후의 에조는 대부분 아이누족과 일치한다는 의견이 주류이다.[72] 가마쿠라 시대 후반(13세기~14세기) 무렵, 오늘날 아이누라 불리는 이들과 동일한 것으로 여겨지는 '에조'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문헌 사료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이누의 대부분이 모여 살았던 홋카이도는 에조가시마(蝦夷が島) 또는 에조치(蝦夷地) 등으로 불렸고, 서구권에서도 '예조(Yezo)'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아이누 문화는 전대의 사츠몬 문화를 계승하면서 오호츠크 문화와 융합, 혼슈의 문화를 흡수하여 생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그 성립 시기는 '에조(えぞ)'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시기와 가까운 가마쿠라 후기(13세기)로 보인다. 사츠몬 문화와 아이누 문화의 생활 체계상 가장 큰 차이는, 외부로부터의 이입품(특히 철제품)의 양적인 증대에 있었다. 아이누 문화는 교역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고, 아이누 문화의 탄생에 카즈토와의 교섭 증대도 한몫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구체적으로는 오슈 후지와라 씨(奥州藤原氏) 세력의 성쇠와의 관련성이 지적되고 있다.
14세기에는 '도당(渡党)', '히노모토(日の本, 홋카이도 태평양측과 치시마. 근세의 히가시에조東蝦夷)', '가라코(唐子, 홋카이도 동해측과 가라후토. 근세의 니시에조西蝦夷)'로 나뉘어, 와타리토우는 카즈토와 언어가 서로 통해 혼슈와의 교역에 종사했다는 문헌(《스와 다이묘진 가사(諏訪大明神絵詞)》)이 남아 있다.[80] 가마쿠라 시대 무쓰 국(陸奥国)의 호족이었던 안도 씨(安東氏)가, 막부의 집권(執権) 호죠 씨(北条氏)로부터 에조 관령(蝦夷管領)(또는 에조 대관)에 임명되어 이들 세 종의 에조를 통괄하고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무로마치 시대(15세기~16세기)에 이들 와타리토우를 통일하고 오시마 반도 남부의 영주로 성장한 가키자키 씨(蠣崎氏)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에조치의 지배 및 교역권을 공인받고 명실공히 안도 집안으로부터 독립했다. 에도 시대에 들어 가키자키 집안은 성을 마츠마에로 개명하고 다이묘(大名)의 반열에 들었으며, 와타리토우는 명확하게 카즈토로 여겨졌다.
5. 한국과의 관계 (별도 목차 추가)
에조는 역사적으로 한국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 에조는 일본 홋카이도 지역의 옛 명칭이며, 홋카이도 원주민인 아이누족이 주로 거주하던 지역이다. 따라서 에조와 한국과의 관계는 주로 아이누족과 한국과의 관계로 설명될 수 있다.
현재까지 아이누족과 한국 민족 간의 직접적인 교류나 관계를 보여주는 역사적 기록이나 고고학적 증거는 부족하다. 다만, 일부 학자들은 아이누족의 기원과 관련하여 동북아시아의 여러 민족과의 연관성을 제시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아이누족의 언어나 문화에서 한국어족이나 다른 동북아시아 언어와의 유사성이 발견된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아직 학계에서 충분히 검증되지 않았으며, 논란의 여지가 있다.
결론적으로, 에조(홋카이도)와 한국과의 관계는 직접적이지 않으며, 주로 아이누족을 매개로 한 간접적인 관계를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이마저도 명확한 증거가 부족하여 학술적인 연구가 더 필요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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