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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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훈춘 사건은 1920년 10월 2일, 지린성 훈춘에 있는 일본 영사관이 공격받아 발생한 사건이다. 일본은 이 사건을 한국 독립군의 소행으로 규정하고 만주 지역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확대했다. 그러나 한국 측에서는 이 사건이 일본의 만주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한 조작이라는 주장이 제기되며, 사건의 진실 공방이 이어지고 있다. 훈춘 사건 이후 일본군은 간도 출병을 단행하여 독립군을 진압하고, 1920년 12월에는 32개 마을을 불태우고 민간인을 학살하는 등 잔혹한 행위를 저질렀다. 이 사건은 청산리 전투와 같은 독립군의 군사적 승리에도 불구하고 1930년 간도사변으로 이어지는 등 한반도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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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춘 사건 | |
---|---|
개요 | |
사건명 | 훈춘 사건 |
다른 이름 | 간도 사건 (일본어: 間島事件 (かんとうじけん) 간토 지켄[*]) |
시기 | 1920년 10월 2일 |
위치 | 만주 훈춘 |
원인 | 독립군 공격을 위한 일본군의 자작극이라는 설이 있음 |
결과 | 간도 출병 일본군의 간도 지역에 대한 군사적 개입 및 점령 한국 독립운동가 탄압 |
배경 | |
배경 | 1920년 10월, 청산리 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이 간도 지역에서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한 명분 필요 |
사건 내용 | |
주요 내용 | 1920년 10월 2일, 훈춘의 일본 영사관과 일본인 주택이 공격을 받음. 일본군은 이를 빌미로 간도 출병을 감행, 대대적인 독립군 토벌 작전을 펼침. 당시 공격 주체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 (독립군, 마적, 일본군 자작극 등). |
논란 | |
공격 주체 | 독립군: 독립군이 일본군을 공격했다는 설. 마적: 마적들이 우발적으로 공격했다는 설. 일본군 자작극: 일본군이 간도 출병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 자작극을 벌였다는 설. |
영향 | |
영향 | 간도 출병: 일본군의 간도 지역에 대한 군사적 개입 및 점령을 정당화. 독립군 탄압: 간도 지역의 독립군 기지가 파괴되고,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체포되거나 살해됨. 민간인 학살: 일본군은 독립군 색출을 명목으로 한국인 민간인들을 학살함. |
관련 정보 | |
관련 전투 | 청산리 전투 |
관련 사건 | 간도 출병 |
2. 배경
1919년 3·1 운동을 계기로 만주 지역에서는 한국 독립운동이 더욱 활발해졌다. 3·1 운동은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렸지만, 일제의 탄압은 더욱 거세졌다. 이에 많은 한국인이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만주는 한국과 가깝고 중국 관할 지역이라 일본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지 않아 독립운동 기지로 적합했다.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서일의 북로군정서, 김좌진, 이동휘 등이 만주에서 독립군을 조직하여 일본군에 맞서 무장 투쟁을 전개했다.
만주 지역 독립군의 활동 증가는 일본에게 큰 위협이었다. 일본은 만주에서 확산되던 볼셰비즘과 한국 독립운동의 연계를 우려했다. 1920년 3월에는 니항 사건이 발생하여 만주 지역의 긴장이 더욱 고조되었다.
2. 1.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919년 3·1 운동 이전 10년 이상 동안, 많은 수가 구 대한제국군 출신인 한국 독립 투쟁 민족주의 단체들이 만주에서 다양한 친독립 파벌로 조직되었다. 한국 국경 너머의 전략적 위치는 게릴라 전사들이 일본 영사 경찰서에 효과적인 기습 공격을 가한 후 중국 측으로 후퇴할 수 있게 해주었다.[1] 예를 들어, 과거 의병 지도자였던 홍범도는 연길에서 대한 독립군을 창설하고 소위 독립군을 훈련시켰다. 또한, 서일의 지휘 하에 북로군정서가 설립되었으며, 김좌진은 장교 훈련 학교에서 400명 이상의 독립군을 지휘했다. 이동휘는 훈춘에서 3,000명 이상의 독립군을 훈련시키고 볼셰비키 군이 제공한 무기로 무장시켰다.[2]3·1 운동이 독립을 확보하고 일본 식민 통치하에 있는 한국인의 곤경에 대한 국제적 여론을 불러일으키는 데 실패하자, 1919년 4월 13일 상하이에 모여 만주 독립 파벌과 협력하여 궁극적으로 일본으로부터의 자유를 얻기 위해 공화국 형태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수립했다.[3]
만주에서 한국 독립 운동의 동력이 증가함에 따라, 일본 영사 경찰서장 스에마쓰 기치지는 한국인 사이에서 급증하는 급진적인 볼셰비즘에 대해 점점 더 우려하게 되었다. 이러한 운동을 억압하기 위해 그는 급진주의자로 의심되는 간도 기지에 대한 수많은 불법적인 경찰 습격을 명령했고, 이는 지역 중국 지도자들의 항의를 받았다.[1] 만주의 일부 한국 게릴라 전사들이 좌익 이념의 영향을 받았음은 분명하지만, 주요 파벌은 주로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지지했으며 한국 독립과 자결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2]
일본의 3·1 운동 탄압에 분노한 만주의 한국 독립군들은 일본 국경 초소에 대한 기습 공격을 늘려 많은 일본 경비병을 살해했으며, 궁극적으로 일본을 몰아내기 위해 한국으로 진격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4] 1920년 초여름 동안 한국 반군은 국경을 따라 32번의 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한 번의 일본 반격 이후 홍범도의 부대는 120명의 일본군을 포위하여 사살하고 200명 이상을 부상시켰다.[4] 1919년 3·1 운동 이후 간도에 거주하거나 망명해 온 전 의병 등 조선인들이 일본으로부터의 독립 운동을 일으켜 무력 투쟁을 준비했고(독립군), 중일 국경 문제도 얽혀 긴장이 고조되었다(간도 문제).
2. 2. 만주 지역 독립군 활동 증가
3·1 운동 이전 10년 이상 동안, 구 대한제국군 출신을 중심으로 하는 많은 한국 독립 투쟁 민족주의 단체들이 만주에서 다양한 친독립 파벌로 조직되었다. 한국 국경 너머의 전략적 위치는 게릴라 전사들이 일본 영사 경찰서에 효과적인 기습 공격을 가한 후 중국 측으로 후퇴할 수 있게 해주었다.[1] 예를 들어, 과거 의병 지도자였던 홍범도는 연길에서 대한독립군을 창설하고 독립군을 훈련시켰다. 또한, 서일의 지휘 하에 북로군정서가 설립되었으며, 김좌진은 장교 훈련 학교에서 400명 이상의 독립군을 지휘했다. 이동휘는 훈춘에서 3,000명 이상의 독립군을 훈련시키고 볼셰비키 군이 제공한 무기로 무장시켰다.[2]2. 3. 일본의 우려와 간도 지역 긴장 고조
3·1 운동 이후 만주에서 한국 독립 운동의 기세가 높아지자, 일본 영사 경찰서장 스에마쓰 기치지는 한국인들 사이에서 급진적인 볼셰비즘이 확산될 것을 우려했다.[1] 이를 억압하기 위해 그는 급진주의자로 의심되는 간도 기지에 대한 불법적인 경찰 습격을 지시했고, 이는 지역 중국 지도자들의 반발을 샀다.[1] 만주의 일부 한국 게릴라 전사들이 좌익 이념의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주요 파벌은 주로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지지했으며 한국 독립과 자결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2]한편, 1920년 3월에는 적군과 협력하여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 주둔 일본군을 전멸시키고 재류 일본인을 몰살하는 사건(니항 사건)이 발생했다.
3. 훈춘 사건
1920년 10월 2일, 지린성 훈춘에서 일본 영사관이 공격받아 불에 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일본은 이 사건을 한국 독립군의 소행으로 규정하고, 이를 빌미로 만주 지역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확대했다.
일본은 한국 독립군을 진압하기 위해 도쿄와 중국 정부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별다른 도움을 받지 못했다.[1]
하지만, 한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일본 측 주장에 강하게 반발하며, 이 사건이 일본의 조작이거나 친일 마적을 이용한 자작극이라고 주장한다.
이 사건은 진위 여부를 둘러싼 논란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만주에서의 군사적 개입을 확대하는 명분으로 활용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일본은 이 사건을 계기로 중국에 요청하여 조선군 제19사단에서 15,000명의 병력을 파견, 지린성에서 한국 독립군을 진압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3. 1. 사건 발생
1920년 10월 2일, 지린성 훈춘에 있는 일본 영사관이 공격받아 불탔다.[5] 일본 측 자료에 따르면, 이 공격은 한국 독립군이 감행하여 일본인 13명이 사망했다고 한다.[5] 또한, 이 공격을 감행한 "강도"들이 "무차별적인 살인과 약탈을 저질렀고" "지역 상점을 약탈했다"고 보도되었다.[5][1] 그러나 많은 한국 역사학자들은 훈춘 공격이 한국 독립군에 의해 수행된 것이 아니라, 일본이 만주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한다.[1]사건 전개 과정은 다음과 같다.
- 1920년 9월 12일 오전 5시경, 중국인 마적 약 300명이 훈춘 시가지를 습격하여 약탈하고, 시가지 중심가에 방화하여 40호 가량을 불태웠다.
- 9월 30일, 약 50명의 마적이 훈춘현 대황구의 중국군 공병영을 습격하여 대부분을 납치하고 무기와 탄약을 빼앗았다.
- 10월 1일 오후 4시, 마적 두목 진동이 청구자에 도착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 10월 2일 오전 4시, 훈춘에 400명의 마적이 쳐들어와 중국제 37mm 경포 3문을 발사하며 일본 영사관을 공격했다. 마적은 영사관에 방화하고 수류탄을 던졌으며, 1시간 후 거류지 방면으로 이동하여 약탈을 자행하고 일부 가옥을 소각했다.
이 습격으로 영사관 경찰서장, 조선인 순사, 재향 군인 3명이 전투로 사망했으며, 그 외 남성 6명, 여성 2명, 어린이 2명 등 총 13명이 살해당하고, 중상을 입은 11명 중 1명은 후에 사망, 20여 명은 경상을 입었다.[12] 피해자 대부분은 일본인이었으며, 조선인은 3명, 중국인은 1명이었다.[12]
3. 2. 사건의 진위 여부 논란
1920년 10월 2일, 지린성 훈춘에서 일본 영사관이 공격받아 불에 탄 사건에 대해 일본, 한국, 그리고 북한은 서로 다른 주장을 제시하고 있다.일본은 이 사건을 한국 독립군의 공격으로 규정하고, 이를 빌미로 만주 지역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확대했다. 반면, 한국과 북한은 이 사건이 일본의 조작이거나, 친일 마적을 이용한 자작극이라고 주장한다.
역사학자들은 이 공격의 배후가 누구인지, 혹은 사건 자체가 실제로 일어났는지에 대해 판단하기 어렵다고 말한다.[1] 그러나 이 논란이 많은 사건은 일본이 만주에서의 군사적 개입을 확대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이 중론이다.
중국계 문헌에서도 훈춘 사건을 연변(간도의 중국 측 호칭) 출병의 구실을 만들기 위한 일본의 모략이라고 주장한다. 러일 전쟁 때부터 일본군이 친일적인 마적 집단에게 무기를 제공하고 군사 교육을 실시했으며, 훈춘 사건은 그들 친일파 마적을 이용한 "자작극의 고육지책"으로 여겨진다. 사건 전 일본군 부대가 한국 독립군의 조사를 명목으로 중국 영토에 침입했다는 것과 사건 후 중국 측 조사를 통해 일본제 무기가 발견되었다는 것을 그 증거로 제시한다. 또한, 일본 영사관을 습격한 것은 구금되어 있던 독립군 병사를 구출하기 위해서라고 주장한다. 관동군이나 소련이 일부 마적을 공작대로 이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습격자가 "구출"한 조선인의 숫자나 일본군에 관한 묘사가 일본 측 문헌과는 다르다.
3. 2. 1. 한국 측 주장
많은 한국 역사학자들은 훈춘 사건이 일본의 만주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한 조작이라고 주장한다.[1] 이들은 일본이 중국 산적 두목 창장하오(장강호)에게 뇌물을 주고 공격을 사주하여 한국인들을 범죄자로 몰았다고 주장한다. 일부 자료에서는 창장하오가 일본의 요구보다 더 큰 규모로 공격을 감행했다고도 한다.[6]한국계 문헌에 따르면, 일본군이 마적 장강호를 매수하여 훈춘을 습격하게 했으며, 일본인 희생자는 공동 작전을 펼친 그의 부하가 아닌 다른 마적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다만, 장강호의 세력 범위는 서간도에 있었고 훈춘은 관할 밖이며, 습격자가 일본 영사관에 피해를 주지 않았다는 등, 일본 측 문헌과는 다른 주장도 있다.
일부 학자들은 이 사건 전체가 일본의 완전한 날조라고 주장하기도 한다.[6]
3. 2. 2. 일본 측 주장
1920년 10월 2일, 지린성 훈춘에 있는 일본 영사관이 공격받아 불탔다. 일본 측 자료에 따르면 한국 독립군이 공격하여 일본인 13명이 사망했다고 한다.[5] 일본 측은 이 공격을 감행한 "강도"들이 "무차별적인 살인과 약탈을 저질렀고" "지역 상점을 약탈했다"고 보도했다.[5][1]일본 측 자료에 따르면 사건 전개는 다음과 같다.
- 9월 30일: 약 50명의 마적이 훈춘현 대황구의 중국군 공병영을 습격, 대부분을 납치하고 무기와 탄약을 빼앗았다.
- 10월 1일 오후 4시: 마적 두목 진동이 청구자에 도착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 10월 1일 오후 6시: 중국 공병 60명이 나와 동문 부근을 경비했다. 일본인은 자경단을 조직하지 않았고, 영사관으로의 피난은 임의로 정했다. 경부 1명과 일본인 경찰관 10명이 안전을 맡았다.
- 10월 1일 밤: 영사는 급사를 보내 경원 수비대에 지원을 요청했다.
- 10월 2일 오전 3시 50분: 경원 수비대는 특무 조장 이하 10명을 훈춘으로 파견했다.
- 10월 2일 오전 4시: 400명의 마적이 훈춘을 공격, 중국제 37mm 경포 3문을 125고지에서 발사하며 시가지 서쪽 끝 일본 영사관 부근의 중국군을 격퇴했다. 100명 정도가 함성을 지르며 영사관 각 문에 쇄도하여 신형 수류탄을 던지면서 소총을 발사했다. 영사관의 무장 인원은 10여 명으로, 수적으로 열세였다. 마적은 영사관에 방화하고 수류탄을 던졌다.
- 10월 2일 오전 5시: 마적은 나팔을 불면서 거류지 방면의 중국인 거리로 향해 약탈을 자행하고 일부 가옥을 소각했다.
- 10월 2일 오전 8시: 경원 수비대의 도착이 늦어져 마적은 일본인 1명, 중국인·조선인 수 명을 납치하고 왔던 방향으로 돌아갔다. 중국군 일부가 추격했지만 약간의 피해만 입혔을 뿐이었다.
이 습격으로 영사관 경찰서장, 조선인 순사, 재향 군인 3명이 전투 중 사망했다. 그 외 남성 6명, 여성 2명, 어린이 2명 등 총 13명이 살해당하고, 11명이 중상을 입었다(그중 1명은 후에 사망). 20여 명이 경상을 입었다. 마적 측은 30여 구의 시신을 남겼다.[12] 피해자는 대부분 일본인이었으며, 조선인은 3명, 중국인은 1명이었다.
3. 2. 3. 북한 측 주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식 자료에서는 "일본 제국이 기병대를 투입하여 영사관을 공격하게 하고, 이를 빌미로 중국 동북 지역의 한국인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하는 '훈춘 사건'을 조작했다"고 주장한다.[7]3. 3. 사건의 역사적 중요성
역사학자들은 훈춘 사건 공격의 배후가 누구인지, 또는 이 사건이 실제로 발생했는지 여부를 판단하기 어렵다고 결론 내린다.[1] 그러나 이 논란 많은 사건은 일본이 만주에서의 군사적 개입을 확대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하다.[1] 일본은 중국에 요청하여 일본 조선군 제19사단에서 15,000명의 병력을 파견하여 지린성에서 한국 반군을 진압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4. 일본의 간도 출병
일본 제국은 훈춘 사건을 빌미로 1920년 10월부터 이듬해인 1921년 초까지 간도 지역에 대규모 병력을 파견했다.[1] 일본군은 '불령선인'을 색출하고 징벌한다는 명목으로 수색 및 소탕 작전을 펼치며, 수많은 조선인들을 체포하고 처형했다.[1] 이 과정에서 32개 마을이 불태워지고, 훈춘 지역 남성 주민 대부분이 살해당하는 등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었다.[8]
1921년 초, 여러 차례의 소규모 전투와 국제 사회의 비판 여론이 거세지자 일본군은 만주 동부에서 대부분 철수했다.[1] 그러나 일본은 간도에 경찰 분서를 설치하며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고, 이에 중국 측의 반발과 중국 내 반일 운동이 격화되었다.[1] 결국 일본은 군대를 완전히 철수했지만, 이 사건으로 3,000여 명의 조선인이 희생되었고, 이는 1930년 간도사변으로 이어지는 불씨가 되었다.[1]
4. 1. 출병 결정과 중국의 반발
하라 내각은 1920년 10월 7일 각의를 열어, 이전부터 위험시했던 '불령선인'으로부터 영사관과 거류민을 지키기 위해 '자위적 조치'로서 간도 출병을 결정했다.[1] 중국 정부는 10월 12일 항의 성명을 발표했고, 일본 측은 오히려 중국 측의 단속 미흡을 비판하는 등 외교적 공방이 이어졌다.[1] 이런 상황에서 관동군·조선군 등이 간도에 출병했다.[1] 봉천 군벌의 장쭤린도 일본 측에 동조하여 중앙 정부의 의향을 무시하고 원군을 파견했다.[1]4. 2. 일본군의 군사 작전
일본군은 훈춘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징벌적 성격의 간도 출병을 단행하여 만주 지역에서 게릴라 진압을 위한 수색 및 소탕 작전을 실시하고, 수많은 체포와 처형을 감행했다.[1] 1920년 12월, 한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군은 32개 마을을 불태우고 "훈춘 지역의 모든 남성 주민을 살해했으며, 평화로운 주민 145명을 학살"했다. 한 집은 "안에 있는 여성과 아이들"과 함께 불태워졌다고 한다.[8]하라 내각은 1920년 10월 7일 각의를 열어, 이전부터 위험시했던 '불령선인'으로부터 영사관과 거류민을 지키기 위해 '자위적 조치'로서 간도 출병을 결정했다. 이에 대해 중국 정부는 10월 12일 항의 성명을 발표했고, 일본 측은 오히려 중국 측의 단속 미흡을 비판하는 등 외교적 공방이 이어졌다. 관동군·조선군 등이 간도에 출병했으며, 봉천 군벌의 장쭤린도 일본 측에 동조하여 원군을 파견했다. 10월 하순에는 간도 출병 최대의 격전으로 여겨지는 청산리 전투가 벌어졌다.
만주의 한국 독립군은 상하이 임시정부의 지도 아래 효과적으로 조직되지는 못했지만, 일본군을 상대로 상당한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다.[9] 가장 중요한 것은 약 400명의 한국 반군이 훈련된 일본군을 4일간의 격렬한 전투 끝에 격파한 청산리 전투였다.[10] 이 전투에서 한국군은 약 1,200명의 일본군을 사살하고 60명만 잃었다.[6] 그러나 일본 기록에 따르면 11명의 병사가 전사하고 24명이 부상을 입었다.[11]
1921년 초, 양측의 일련의 소규모 전투와 후퇴, 그리고 현지 중국 당국과 국제 사회의 비판 이후, 제19사단의 대부분은 만주 동부에서 철수했다.[1] 1921년 12월, 일본 측이 독단적으로 간도에 경찰 분서를 설치하자, 중국 측은 다시 태도를 굳혔고, 중국 본토에서도 반일 운동이 격화되어 일본 측은 군대를 철수했다. 이 기간 동안 3,000명에 달하는 조선인이 살해되었으며, 이 중에는 독립운동과 무관한 사람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사태는 수습되지 않았고, 1930년의 간도사변으로 이어지게 된다.
4. 3. 청산리 전투
1920년 10월 하순, 간도 출병 최대의 격전으로 여겨지는 청산리 전투가 벌어졌다.[10] 약 400명의 한국 독립군은 훈련된 일본군을 상대로 4일간 격렬한 전투를 벌여 승리하였다.[10] 한국 측 기록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일본군 약 1,200명을 사살하고 60명의 독립군이 전사했다고 한다.[6] 그러나 일본 측 기록에는 일본군 11명이 전사하고 24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기록되어 있다.[11]5. 간도 출병의 결과와 영향
하라 내각은 1920년 10월 '불령선인'으로부터 영사관과 거류민을 지키기 위한 '자위적 조치'로 간도 출병을 결정했다. 중국 정부는 이에 항의했으나, 일본은 중국 측의 단속 미흡을 비판하며 관동군과 조선군을 동원했다. 봉천 군벌의 장쭤린도 일본에 동조하여 원군을 파견했다. 10월 하순에는 청산리 전투가 벌어졌다.[1]
1920년 12월, 일본이 간도에 경찰 분서를 설치하자 중국은 태도를 바꾸었고, 중국 본토에서도 반일 운동이 거세졌다. 결국 일본은 1921년 1월에 군대를 철수했다. 이 기간 동안 3,000명에 달하는 조선인이 살해되었으며, 이 중에는 독립운동과 무관한 사람도 있었다고 전해진다.[1] 이 사태는 1930년의 간도사변으로 이어지게 된다.[1]
5. 1. 일본군 철수
1921년 초, 양측의 일련의 소규모 전투와 후퇴, 현지 중국 당국과 국제 사회의 비판 이후, 제19사단의 대부분은 만주 동부에서 철수했다.[1]5. 2. 독립운동의 변화
일본의 징벌적 간도 출병으로 인해 수많은 체포와 처형이 이루어졌고, 게릴라 진압 작전이 수행되었다.[1] 1920년 12월, 한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군은 32개 마을을 불태우고 "훈춘 지역의 모든 남성 주민을 살해했으며, 평화로운 주민 145명을 학살"했다. 한 집은 "안에 있는 여성과 아이들"과 함께 불태워졌다.[8]만주의 한국 독립군은 상하이 임시정부의 지도 아래 효과적으로 조직되지는 못했지만, 일본군을 상대로 상당한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다.[9] 가장 중요한 것은 약 400명의 한국 독립군이 훈련된 일본군을 4일간의 격렬한 전투 끝에 격파한 청산리 전투였다.[10] 이 전투에서 한국군은 약 1,200명의 일본군을 사살하고 60명만 잃었다고 알려졌으나,[6] 일본 기록에 따르면 11명의 병사가 전사하고 24명이 부상을 입었다.[11]
1921년 초, 양측의 일련의 소규모 전투와 후퇴, 그리고 현지 중국 당국과 국제 사회의 비판 이후, 일본군 제19사단의 대부분은 만주 동부에서 철수했다.[1] 일부 사회주의 성향의 한국 독립군은 소련 결성 전에 러시아 내전을 돕기 위해 볼셰비키군에 징집되었다.
5. 3. 간도 참변
일본은 훈춘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징벌적 성격의 간도 출병을 단행하여 수색 및 소탕 작전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을 체포하고 처형했다.[1] 1920년 12월, 한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군은 훈춘 지역에서 32개 마을을 불태우고 모든 남성 주민을 살해했으며, 평화로운 주민 145명을 학살했다. 또한 "안에 있는 여성과 아이들"과 함께 집을 불태웠다고 한다.[8]1921년 1월, 일본군이 철수하기 전까지 3,000명에 달하는 조선인이 살해되었으며, 이 중에는 독립운동과 무관한 사람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5. 4. 이후 역사에 미친 영향
일본군은 목격 증언, 사용 언어, 유기된 시체의 복장 및 유류품 등을 토대로, 습격 부대가 러시아인 5명, 조선인 약 100명, 중국 관병 수십 명으로 혼재되어 있었다고 결론 내렸다. 하라 내각은 1920년 10월 7일 각의를 열어, 이전부터 위험하게 여겨졌던 '불령선인'으로부터 영사관과 거류민을 지키기 위해 '자위적 조치'로서 간도 출병을 결정했다. 이에 대해 중국 정부는 10월 12일 항의 성명을 발표했고, 일본 측은 오히려 중국 측의 단속 미흡을 비판하는 등 외교적 공방이 이어지는 가운데, 관동군·조선군 등을 동원하여 간도에 출병했다.[1] 더 나아가 봉천 군벌의 장쭤린도 일본 측에 동조하여 정부의 의향을 무시하고 원군을 파견했다. 10월 하순에는 간도 출병 최대의 격전으로 여겨지는 청산리 전투가 벌어졌다.[1]그러나 1920년 12월, 일본 측이 독단적으로 간도에 경찰 분서를 설치하자, 한 번은 상황에 밀려 출병을 용인했던 중국 측도 다시 태도를 굳혔고, 중국 본토에서도 반일 운동이 격화되었기 때문에 일본 측은 이듬해인 1921년 1월에 군대를 철수했다. 이 기간 동안 3,000명에 달하는 조선인이 살해되었으며, 이 중에는 독립운동과 무관한 사람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전해진다.[1] 하지만 사태는 수습되지 않았고, 1930년의 간도사변으로 이어지게 된다.[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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