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독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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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독립군은 1919년 3·1 운동 이후 홍범도를 사령관으로 하여 창설된 독립군 부대이다. 초기에는 간도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했고, 1920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에 승리하며 독립군의 위상을 높였다. 이후 자유시 참변으로 인해 부대가 와해되었고, 1937년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 이주 정책에 따라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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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무장 독립운동단체 - 대한신민단
대한신민단은 1919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결성된 독립운동 단체로, 교육, 군자금 모금, 군사력 강화에 힘썼으며, 한국사회당과 합병 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 참여하다가 소련의 무장 해제 명령으로 해체되었다. - 1920년 해체된 단체 - 미국 원정군
미국 원정군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서부 전선에서 연합군을 지원하기 위해 유럽에 파견된 미군 부대로, 존 J. 퍼싱 장군의 지휘 하에 창설되어 주요 전투에서 활약하며 연합군의 승리에 기여했다. - 대한독립군단 - 김인 (독립운동가)
안동 김씨 가문 출신 독립운동가 김인은 상하이에서 대한제국 애국 관련 교육을 받고 대한독립군 감독관으로 활동하다 중국 청두에서 사망,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으며 대한민국 건국에 기여했다. - 대한독립군단 - 김홍일 (1898년)
김홍일은 일제강점기부터 대한민국 건국 후까지 군인, 독립운동가, 정치인,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중국 국민혁명군 소장, 한국광복군 참모장, 육군사관학교 교장, 제1군단장 등을 역임했고, 6.25 전쟁 당시 한강 방어선 구축에 기여했으며, 주중화민국 대사와 야당 정치인으로도 활동했다.
대한독립군 | |
---|---|
기본 정보 | |
국기 | [[File:Korea Independence Army Marching Flag.svg|150px|border|한국 독립군 행진 깃발]] |
명칭 (한글) | 대한독립군 |
명칭 (한자) | 大韓獨立軍 |
명칭 (로마자 표기) | Daehandongnipgun |
주요 정보 | |
지도자 | 홍범도 |
창설일 | 1920년 12월 |
해산일 | 1921년 6월 |
소속 | 대한민국 임시정부 |
본부 | 안투현 봉오동, 왕칭현, 중국 미산 |
이념 | 한국 독립운동 |
규모 | 600명 |
동맹 | 대한국민회 대한군무도독부 국민회군 대한신민단 |
지휘부 | |
사령관 | 홍범도 |
부사령관 | 주건 |
참모장 | 박경철 |
전투 및 사건 | |
주요 전투 |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자유시 참변 |
관련 운동 | 한국의 독립운동 |
기타 전투 | 삼둔자 전투 |
2. 창설
3·1 운동 이후 홍범도를 사령관으로, 부사령관 주건, 참모장 박경철로 하여 창설되었다.[7]
3·1 운동이 1919년에 일어나자 홍범도와 그의 부대는 안투현으로 이동했다. 대한독립군은 프리모르스키 지방(연해주), 간도 등지에 거주하는 한인들과 관계를 맺었다.[2][3] 1919년 8월, 혜산진(압록강에 위치한 도시) 공격을 시작으로 북한 지역에서 일본군에 대한 군사 작전을 시작했다.[1]
홍범도 장군은 을미사변 이후 경기, 강원 지방 등에서 일본군 10명을 사살하거나 의병 부대를 조직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1897년까지 의병 활동을 이어나가다 1907년 북청군 안산사 노은리에 거주하며 생계를 이어나갔다. 간간이 독립운동을 하다가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노령 대한국민의회의 군무부와 상의하여 그해 8월 간도에서 독립군 병사들을 추가 모집하여 부대를 설립했다.
'대한독립군'이란 명칭은 정식 명칭은 아니었으나, 1919년 8월 초 연해주 지역을 출발할 때부터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1919년 8월 말 동간도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병사와 무기·재원을 계속 보강했고, 1919년 9월 초 구춘선이 이끄는 간도대한국민회의 재정적·인적 지원을 받아 본격적인 항일 무장 투쟁에 나섰다.[8][9] 초기 대한독립군은 3개 중대에 약 300여 명의 병력, 소총 200여 정과 권총 약 30정의 화력으로 시작했으나, 이후 병사들을 계속 징집·모집하고 타 독립군 부대들과 연합하며 부대 규모와 체제, 장비가 상당한 수준으로 정비되었다.[8][9]
1919년 대한독립군은 영가(永嘉, 현재 연해주), 프리모르스키 지방, 간도에 거주하는 한인들과 관계를 맺었다.[2][3] 1919년 8월 혜산진(압록강에 위치한 도시) 공격을 시작으로 북한 지역에서 일본군에 대한 군사 작전을 시작했다. 그러나 무기와 물자 공급의 어려움으로 1919년 겨울, 북간도 한인 사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간도 국민회 산하로 들어가 재정적 지원을 받았다. 병력은 600명으로 증가했으며, 군총 600정, 권총 30여 정, 총기당 탄약 200발을 갖춰 전투력을 강화했다.[1]
북간도에 근거지를 둔 대한독립군은 반일 무장 활동을 전개했으며, 간도 국민회의 지도 하에 있던 국민군과 함께 효과적인 반일 전쟁을 위해 1920년 초 통합을 논의했다. 1920년 2월 21일, 국민군 사령관 안무와 명월구 연길현에 주둔하고 있던 대한독립군은 연길현 하마탕에서 처음으로 통합 회의를 가졌다. 이후 왕청현 춘화향 봉오동에 주둔하고 있던 군무도독부의 최진동이 3월 8일부터 10일까지 3일간 합류했으며, 1920년 3월 세 군대는 연합했다. 이 기간 동안 노수안도 지역에서 생활하며 작전을 수행했다.
3. 주요 활동
1919년 12월과 1920년 3월, 군사부와 연합하여 대규모 국내 진입 작전을 수행했다. 이들은 독립군의 무장 투쟁의 정당성을 알리고, 사망 성명과 경고문을 발표했다.[4]
이후 안투현에서 중국 왕칭현 봉오동으로 근거지를 옮기고, 간도 국민회로부터 국내 저항 작전을 위한 재정 지원을 받았다. 군대의 재정과 행정은 국민회가 관리했다. 홍범도를 중심으로 약 200명의 옛 의병과 간도 지역의 농민, 노동자들이 무기를 구입하여 독립군을 훈련시켰다.[1]
3. 1. 삼둔자 전투
1920년 6월 4일, 박승길이 지휘한 대한신민단 소속 독립군 부대가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江陽洞)에 진입해 일본군 순찰소대를 기습하고 유인하자, 일본군 남양수비대가 출동하였다. 독립군은 삼둔자 서남쪽 야산 요지에 잠복하였다가 이들을 공격하여 섬멸하였다.[1] 이 전투는 봉오동 전투의 전초전으로 평가받는다.
3. 2. 봉오동 전투
1920년 6월 6일부터 7일까지 대한독립군과 최진동, 안무 등이 이끄는 독립군 부대 연합군이 일본군과 맞서 싸워 크게 이긴 전투이다. 당시 독립군의 근거지였던 봉오동으로 진격하던 일본군 월강추격대를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을 중심으로 한 독립군 연합 부대가 봉오동 골짜기에서 기습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10]
일본군은 전사자 157명, 부상자 300명이라는 큰 피해를 입었지만, 독립군은 전사자 4명, 부상자 2명으로 피해가 매우 적었다. 이 승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가 '독립전쟁의 제1회전'이라고 선언할 정도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10]
일본군은 그동안 독립군을 쉽게 진압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봉오동 전투에서의 참패를 통해 독립군이 식민 통치에 큰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독립군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게 되었다.[11] 봉오동 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독립군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이에 독립군은 청산리로 이동하여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와 연합하게 된다.
3. 3. 청산리 대첩
청산리 전투는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이 연합하여 일본군을 상대로 승리한 전투이다.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약 1주일간 백운평 전투, 완루구 전투, 갑산촌 전투 등 10여 차례의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파했다.[13] 독립군 연합군의 전력은 약 1,950명이었고,[18] 일본군의 전력은 2만 9천에서 4만 명 정도였다.[1]
1920년 10월 21일 오후, 일본군이 이도구에 있는 홍범도 부대를 포위하자, 독립군은 10월 22일 새벽까지 완강하게 저항했다. 홍범도 부대는 일본군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했고, 어둠 속에서 일본군은 자기들끼리 총을 쏘는 혼란을 겪었다. 홍범도 부대는 일본군 400여 명을 사살하고 승리했으며, 중앙으로 진격한 일본군 부대를 집중 공격하여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14] 일본군 측 피해는 전사 500명, 부상 3,300명이었고, 독립군 측 피해는 전사 60명, 부상 90명이었다.[1]
4. 자유시 참변과 해체
청산리 대첩에서 크게 패한 일본군은 간도 참변(경신참변)을 일으켜 한국인 거주 지역, 항일 단체, 학교, 교회를 초토화하며 보복했다.[1] 이후, 대한독립군은 미산에 집결한 독립군 부대들을 통합하여 조직된 대한독립군단에 합류했다. 약 700명으로 구성된 독립군 연합 부대는 1921년 1월 말 일본군의 간도 토벌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후, 우수리강을 건너 러시아 영토인 이만을 거쳐 자유시(러시아어: Свобо́дный, 스보보드니)로 들어갔다.[1] 이는 각지에 흩어져 있던 한국 부대들을 통합하고 볼셰비키 정부의 지원을 받아 항일 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였다.[1]
그러나 모여든 한국군 부대의 지휘권을 둘러싸고 지도부 간에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1] 1921년 6월 28일, 대한혁명군정부 지도부는 완강한 대치 상태에 있던 사할린 의용군의 무장을 해제하기로 결정했다. 장갑차 등 중화기를 동원한 대한혁명군은 자유시 인근 수라제프카 지역을 포위하고 대규모 공격을 가해 양측 간에 큰 충돌이 발생했다. 자유시 참변으로 불리는 이 충돌로 인해 사상자가 속출했고, 대한 의용군 부대는 사방으로 흩어져 독립군의 전투력에 큰 손실을 입혔다.[1]
자유시 참변 이후, 러시아 공산당의 강력한 통제로 인해 한국 무장 세력의 활동에 많은 제약이 가해졌으며, 홍범도 장군을 비롯한 다수의 지도부가 이탈하여 1937년 9월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 이주 정책에 따라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했다. 대한독립군은 해산되었다.[1]
5. 평가
대한독립군은 수적, 전력 열세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을 상대로 두 차례나 큰 전투에서 승리하여 항일무장투쟁에 큰 원동력을 불어넣는 계기가 되었다. 봉오동 전투 승리를 계기로 만주 각지에서 독립군 부대가 일어났고, 독립군에 대한 금전적, 물질적인 지원도 대거 늘어났다.
대한독립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승리한 주요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홍범도 장군의 산포수대 경험을 들 수 있다. 산포수는 잘 갖춘 조직을 통해 사냥을 하였다. 대한독립군이 빠르게 군 조직의 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산포수대의 경험이 가장 큰 자산이었다. 특히 산을 무대로 활동했던 산포수이기 때문에 함경도 산악지대의 특성을 숙지하고 있어 일본군보다 지형을 이용한 전투에 능숙했다.
둘째, 지역민과의 소통이 가능한 부대였다. 대한독립군은 민중들의 절대적인 지원을 받는 의병부대였다. 대한독립군 부대가 일본군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민중의 지지와 성원이 있었기 때문이다.[15]
6. 무장
대한독립군은 자체적인 총기 제조 시설이 없어 체코 등 외국에서 총기를 수입하거나[16] 일본군에게서 노획한 무기를 사용했다. 1919년 겨울 대한국민회 산하로 들어가 재정적 지원을 받아 무장을 강화했으며, 주로 소총, 권총, 기관총 등으로 무장했다.[18]
6. 1. 주요 사용 무기
대한독립군은 자체적인 총기 제조 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체코 등 외국에서 총기를 수입하거나[16] 일본군의 총기를 노획해 쓸 수밖에 없었다. 총기 1정 당 현재 가치로 대략 210만원에서 650만원 정도였다고 한다.[17] 1919년 겨울 간도의 대한국민회 산하로 들어가 재정적 지원을 받았다. 병사들을 증원해 병력이 600명이 되었으며, 1920년 초 당시 병력 약 3백 명에 군총 약 2백 정, 권총 약 40정, 탄약은 총 1정당 2백 발의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18]분류 | 이름 | 제조 국가 |
---|---|---|
소총 | 38식 보병총 | 일본 |
소총 | 게베어 98 | 독일 |
소총 | 모신나강 | 러시아 제국 |
소총 | 스프링필드 소총 | 미국 |
권총 | 남부 14년식 권총 | 일본 |
권총 | 마우저 리볼버 | 독일 |
권총 | 마우저 자동권총 | 독일 |
권총 | 엔필드 리볼버 | 영국 |
기관총 | 맥심 기관총 | 영국 |
기관총 | 루이스 기관총 | 영국 |
기관총 | 96/99식 경기관총 | 일본 |
7. 주요 인물
참조
[1]
뉴스
대한 독립군
http://contents.hist[...]
국사편찬위원회
2023-09-21
[2]
뉴스
대한독립군 (大韓獨立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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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3-09-23
[3]
웹사이트
Doopedia(대한독립군) : 大韓獨立軍 (Korean Independence Army)
https://www.doopedia[...]
2023-09-24
[4]
뉴스
대한 독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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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한국문화원
2023-09-21
[5]
웹사이트
‘The victory in the Battle of Bongo-dong announces the beginning of the war of independence’ - ‘Independence activist of June 20, ‘Mr. Lim Byeong-geuk’ was selected -
https://www.mpva.go.[...]
국가보훈처
2023-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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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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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한국문화원
2023-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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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
2022-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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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세계한민족문화대전
http://www.okpedi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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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이달의 독립운동가
https://e-gonghun.mp[...]
2022-12-25
[10]
서적
아틀라스 한국사
사계절
2004-09-20
[11]
서적
독립군과 한국광복군의 항일무장투쟁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2010
[12]
서적
한국사 이야기 21:해방 그날이 오면
한길사
2004
[13]
서적
한국사 100 장면
가람기획
1993
[14]
서적
이이화 선생님이 들려주는 이야기 한국사 2
파란하늘
2008
[15]
논문
홍범도 의병부대의 항일무장투쟁
1986
[16]
서적
독립군의 무기를 통해 만주지역 항일무장독립전쟁을 새롭게 조명하다!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7]
서적
Czech Arms for Korean Independence Fighters
[18]
서적
간도역사의 연구
국학자료원
2006
[19]
뉴스
임시정부 뜻 떠받든 ‘홍범도-러 연대’, 냉전 논리로 흠집내나
https://www.hani.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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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나의 회상기 일편-군정서 군대에 대한 강근 동지 회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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