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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0년 바타비아 대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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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740년 바타비아 대학살은 당시 네덜란드령 동인도(현재 인도네시아)의 바타비아(자카르타)에서 발생한 중국계 주민 대량 학살 사건이다. 네덜란드 식민 당국의 중국인 추방 정책과 말라리아 발생으로 인한 사회적 불안, 경제적 어려움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생했다. 1740년 10월, 중국인들의 반란 시도 이후, 네덜란드 군과 현지 민병대는 바타비아 내 중국인 거주지를 공격하여 수많은 중국인을 살해했다. 이 학살로 인해 약 10,000명의 중국인이 사망하고, 도시 내 중국인들은 강제 이주되었으며, 이후 자바 전역으로 학살이 확산되었다. 이 사건은 네덜란드 식민주의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자카르타의 지명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네덜란드 문학 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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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0년 바타비아 대학살
지도 정보
기본 정보
명칭바타비아 학살
네덜란드어 명칭Chinezenmoord (키네젠모르트, "중국인 살해"라는 의미)
인도네시아어 명칭Geger Pacinan (게게르 파치난, "차이나타운 소요"라는 의미)
중국어 명칭홍계 참안 (紅溪慘案, "붉은 강 비극/학살"이라는 의미, 로마자 표기: Hóng Xī cǎn'àn)
관련 사건차별에 대한 중국인도네시아인
사건 개요
발생일1740년 10월 9일 ~ 11월 22일 (이후 약 한 달간 소규모 충돌 지속)
장소네덜란드령 동인도 바타비아 (현재의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원인불명확 (반중국 감정, 경제적 불안정, 정부의 정책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추정)
방법포그롬
교전 세력
교전 1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및 동맹 세력
교전 2중국계 인도네시아인
주요 인물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측아드리아안 발케니에르 (Adriaan Valckenier) 총독
중국계 인도네시아인 측Nie Hoe Kong
피해 규모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측사망자 500명
중국계 인도네시아인 측사망자 10,000명 이상, 부상자 500명 이상
생존자600명 ~ 3,000명으로 추정
결과
결과바타비아 내 중국인 사회 붕괴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권위 실추
반란 진압 후 중국인에 대한 차별 강화
동남아시아 지역의 반중 감정 확산
이후 유사한 학살 사건 발생 (예: 1741년 수라바야 학살)

2. 배경

Adrian Valckenier, Governor-General of the Dutch East Indies, in a large white wig and regal clothing, holding a pipe-shaped object
총독 발케니에르는 중국계 주민 학살을 명령했다.


1740년 바타비아 대학살은 복합적인 배경에서 발생했다. 네덜란드 동인도(오늘날의 인도네시아) 식민지 초기, 바타비아 건설에 많은 중국인들이 숙련된 기술자, 상인, 설탕 공장 노동자, 가게 주인 등으로 고용되었다.[1][2] 바타비아 항을 통한 동인도와 중국 간의 무역 호황은 자바로의 중국인 이민을 증가시켰고, 1740년에는 바타비아 내에만 10,000명, 도시 성벽 밖에 수천 명의 중국계 주민이 거주하게 되었다.[3] 네덜란드 식민 당국은 중국계 주민들에게 등록 서류 소지를 요구하고, 불응 시 중국으로 추방하는 정책을 시행했다.[4]

1730년대 말라리아 유행으로 네덜란드령 동인도 총독 디르크 판 클론을 포함한 수천 명이 사망하면서, 중국계 주민에 대한 추방 정책은 더욱 강화되었다.[5] 이 질병 발생 이후, 네덜란드인과 원주민들 사이에서는 중국계 주민들의 수적 증가와 경제적 부상에 대한 의심과 불만이 커졌다. 1740년 7월 25일, 원주민 담당 위원 로이 페르디난트는 총독 아드리안 발케니에르의 명령에 따라 의심스러운 중국인들을 실론(오늘날의 스리랑카)으로 추방하여 계피 수확을 강요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부패한 네덜란드 관리들은 부유한 중국인들에게 추방을 빌미로 금품을 갈취하기도 했다.

스탬퍼드 래플스의 기록에 따르면, 네덜란드 당국은 바타비아의 중국인 촌장 니 호에 콩에게 가난한 사람들을 의미하는 검은색 또는 파란색 옷을 입은 중국인들을 모두 추방하라고 지시했다. 또한 추방된 사람들이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고 바다에 던져졌다는 소문, 배에서 폭동이 일어나 사망했다는 기록도 있어, 중국계 주민들 사이에 불안감이 커져 많은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포기하게 되었다.

베타위 하인들을 포함한 바타비아 원주민들 역시 중국인들에 대한 불신이 커져갔다. 대부분 가난했던 원주민들은 도시에서 번영하는 지역을 차지한 중국인들을 경계했다. 비록 네덜란드 역사학자 알베르투스 니콜라스 파스만은 당시 중국인들을 "아시아의 유대인"이라고 묘사했지만, 실제로는 많은 가난한 중국인들이 설탕 공장 노동자로 일하며 네덜란드와 중국 엘리트 모두에게 착취당한다고 느끼는 복잡한 상황이었다. 부유한 중국인들은 공장, 농업, 해운, 설탕 제조, 아락 증류 등에 관여하며 수입을 올렸지만, 네덜란드 지배자들이 설정한 설탕 가격으로 인해 불안이 가중되었다. 1720년대부터 유럽 수출 증가와 서인도 제도의 경쟁으로 세계 설탕 가격이 하락하면서, 동인도의 설탕 산업은 큰 타격을 입었고, 1740년에는 1720년 가격의 절반으로 떨어져 식민지에 재정적 어려움을 초래했다.

동인도 의회 내부에서는 중국인들의 공격 가능성을 낮게 평가하고, 중국인 통제를 위한 강력한 조치를 반대하는 세력도 있었다. 그러나 많은 중국인들이 바타비아 외곽으로 이동하면서, 1740년 9월 26일 발케니에르 총독은 긴급 회의를 소집하여 중국계의 모든 봉기에 치명적인 무력으로 대응할 것을 명령했다. 이러한 정책에 대한 반대도 있었지만, 결국 발케니에르의 강경책이 시행되었다.

1740년 10월 1일, 발케니에르는 5일 전 회의 발언에 분노한 1,000명의 중국인 무리가 성문 밖에 모였다는 보고를 받았으나, 이를 믿지 않았다. 그러나 성벽 밖에서 중국인들에게 발리 하사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의회는 비상 조치를 취하고 경비를 강화했으며, 공격 계획을 수립했다.

2. 1. 경제적 배경



네덜란드동인도 (현재의 인도네시아)를 식민지배하던 초기, 자바섬 북서부 해안에 바타비아를 건설할 때 많은 중국인을 숙련된 기술자로 고용했다.[1] 중국인은 상인, 설탕 공장 노동자, 소매점 주인으로도 일했다.[2] 바타비아 항을 이용한 동인도와 중국의 교역은 호황을 이루었고, 자바로 이주하는 중국인 이민은 증가했다. 바타비아의 화교 인구는 급속히 증가하여 1740년에는 총 1만 명에 달했고, 수천 명은 도시 성벽 밖에 살고 있었다.[3] 네덜란드인 정착민들은 화교에게 등록증을 휴대하도록 요구했고, 따르지 않는 자는 중국으로 송환했다.[3]

1730년대, 말라리아가 유행하여 네덜란드 동인도 총독 디르크 판 클론을 포함하여 수천 명이 사망한 후 추방 정책이 강화되었다.[3][4] 인도네시아 역사가 베니 G. 세티오노에 따르면, 이 유행 이후 인도네시아 원주민과 네덜란드인 사이에서 인구가 증가하고 점점 더 부유해지는 화교에 대한 의심과 유감이 강해졌다고 한다.[4] 그 결과 1740년 7월 25일, 원주민 관계를 담당하는 변무관 로이 페르디난드는 발케니에르 총독의 명을 받아 의심스러운 중국인을 실론(현재 스리랑카)으로 추방하여 계피 수확의 강제 노동에 종사시키라고 포고했다.[4][5] 부유한 중국인은 부패한 네덜란드 관리에게 추방하겠다고 협박을 당했고 돈을 갈취당했다.[4] 영국의 탐험가이자 자바섬 역사가인 토마스 래플스의 1830년 저서에 따르면, 네덜란드가 임명한 바타비아의 중국인 대표 니 호에 콩은 검은색이나 파란색 옷을 입은 중국인은 가난하다고 여겨지므로 모두 추방해야 한다고 네덜란드인에게 제안했다고 여러 자바인이 증언했다. 추방된 사람들은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고 자바섬이 보이지 않게 되면 배 밖으로 던져졌다는 소문이 돌았고, 배에서 폭동을 일으켜 사망했다는 증언도 있다. 화교 추방은 남은 중국인들 사이에서 불안을 야기했고, 많은 중국인 노동자들이 일을 포기했다.

동시에 바타비아의 원주민들은 베타위 노예를 포함하여 점점 더 중국인을 불신하게 되었다. 경제적인 요소도 한몫했다. 대부분의 원주민들은 가난했지만, 이 도시의 특히 부유한 사람들 중 일부는 중국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네덜란드 역사학자 A.N. 파스만은 당시 중국인은 "아시아의 유대인"이라고 말했지만, 실제 상황은 훨씬 더 복잡했다. 바타비아 주변에 사는 많은 가난한 중국인들은 설탕 공장 노동자였으며, 네덜란드인과 중국인 상류층 모두에게 착취당한다고 느꼈다. 부유한 중국인은 공장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농장과 배에서 수익을 올렸다. 그들은 설탕과 당밀, 쌀이 주원료인 알코올 음료 아락의 증류로 수입을 얻었다. 그러나 네덜란드 영주들은 설탕 가격을 정했고, 이 자체가 불안을 야기했다. 1720년대에는 유럽으로의 수출 증가와 서인도 제도와의 경쟁으로 세계 설탕 가격이 하락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동인도의 설탕 산업은 큰 손실을 입었다. 1740년까지 세계 설탕 가격은 1720년의 절반으로 하락했다. 설탕은 주요 수출품이었기 때문에 식민지는 심각한 재정난에 빠졌다.

2. 2. 사회적 배경



네덜란드가 동인도 (현재의 인도네시아)를 식민 지배하던 초기, 많은 중국인들이 바타비아 건설에 숙련된 기술자로 고용되었다.[1] 이들은 상인, 설탕 공장 노동자, 가게 주인 등으로도 일했다.[2] 바타비아 항구를 통한 동인도와 중국 간의 무역은 경제 호황을 가져왔고, 이는 자바로의 중국인 이민을 증가시켰다. 1740년 바타비아의 중국계 인구는 10,000명에 달했으며, 수천 명은 도시 성벽 밖에서 살았다.[3] 네덜란드 식민 당국은 이들에게 등록 서류를 소지하도록 요구했으며, 이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중국으로 추방했다.[4]

1730년대 말라리아 발생으로 네덜란드령 동인도 총독 디르크 판 클론을 포함한 수천 명이 사망하자, 추방 정책은 더욱 강화되었다.[5] 인도네시아 역사학자 베니 G. 세티오노에 따르면, 이 질병 발생 후 네덜란드인과 원주민들 사이에서 중국계 주민에 대한 의심과 불만이 커졌는데, 이는 중국계 인구가 증가하고 그들의 부가 점점 더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원주민 담당 위원 로이 페르디난트는 총독 아드리안 발케니에르의 명령에 따라 1740년 7월 25일, 의심스러운 중국인들을 실론(오늘날의 스리랑카)으로 추방하여 계피 수확을 강요하기로 결정했다. 부유한 중국인들은 부패한 네덜란드 관리들로부터 추방하겠다는 협박을 받으며 금품을 갈취당했다. 스탬퍼드 래플스는 1830년에 자바인들의 기록에 따르면, 네덜란드 당국은 바타비아의 네덜란드인 임명 중국인 촌장인 니 호에 콩에게 검은색 또는 파란색 옷을 입은 모든 중국인을 추방하라고 지시했는데, 이는 가난한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라고 언급했다. 또한 추방된 사람들이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고 자바에서 시야에서 벗어나면 바다에 던져졌다는 소문이 있었으며, 일부 기록에서는 배에서 폭동이 일어나 사망했다고 한다. 중국계 추방은 남아있는 중국인들 사이에서 불안을 야기하여 많은 중국인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동시에, 베타위 하인들을 포함한 바타비아의 원주민들은 중국인에 대한 불신을 점점 더 키웠다. 경제적 요인이 작용했는데, 대부분의 원주민은 가난했고, 중국인들이 도시에서 가장 번영하는 지역을 차지하고 있다고 인식했다. 네덜란드 역사학자 알베르투스 니콜라스 파스만(Albertus Nicolaas Paasman)은 당시 중국인들이 "아시아의 유대인"이었다고 언급했지만, 실제 상황은 더 복잡했다. 바타비아 주변 지역에 거주하는 많은 가난한 중국인들은 네덜란드와 중국 엘리트 모두에게 착취당한다고 느꼈던 설탕 공장 노동자들이었다. 부유한 중국인들은 공장을 소유했고, 수입 농업과 해운에 관여했으며, 설탕 제조와 당밀 및 쌀을 기반으로 한 알코올 음료인 아락 증류로부터 수입을 얻었다. 그러나 네덜란드 지배자들은 설탕 가격을 설정했고, 이로 인해 불안이 발생했다. 1720년대부터 유럽 수출 증가와 서인도 제도의 경쟁으로 시작된 세계 설탕 가격 하락으로 인해 동인도의 설탕 산업은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1740년까지 세계 설탕 가격은 1720년 가격의 절반으로 떨어졌다. 설탕이 주요 수출품이었기 때문에 이는 식민지에 상당한 재정적 어려움을 초래했다.

초기에 동인도 의회 (Raad van Indië|라트 판 인디nl)의 일부 구성원들은 중국인들이 바타비아를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으며, 중국인을 통제하기 위한 더 강력한 조치는 1738년 바타비아로 돌아온 발케니에르의 정적이자 전 제일란 총독인 구스타프 빌렘 판 임호프가 이끄는 파벌에 의해 저지되었다. 그러나 많은 수의 중국인들이 인근 정착지에서 바타비아 외곽으로 도착했고, 9월 26일 발케니에르는 의회의 긴급 회의를 소집하여 중국계의 모든 봉기에 치명적인 무력으로 대응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러한 정책은 판 임호프 파벌에 의해 계속 반대받았으며; 베르뮬렌(1938)은 두 식민지 파벌 간의 긴장이 그 후의 학살에 역할을 했다고 시사했다.

10월 1일 저녁, 발케니에르는 5일 전 긴급 회의에서 그의 발언에 분노한 1,000명의 중국인 무리가 성문 밖에 모였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 보고는 발케니에르와 의회에 의해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성벽 밖에서 중국인들에 의해 발리 하사가 살해된 후, 의회는 비상 조치를 취하고 경비를 강화하기로 결정했다. 50명의 유럽인과 몇몇 원주민 짐꾼으로 구성된 두 그룹이 도시의 남쪽과 동쪽의 초소로 보내졌고, 공격 계획이 수립되었다.

2. 3. 정치적 배경



네덜란드의 동인도(현재의 인도네시아) 식민지 지배 초기에 많은 중국인들이 바타비아 건설에 숙련된 기술자로 고용되었다.[1] 이들은 상인, 설탕 공장 노동자, 소매점 주인으로도 일했다.[2] 바타비아 항을 통한 동인도와 중국 간의 무역 호황은 자바로의 중국인 이민을 증가시켰다. 1740년 바타비아의 중국계 인구는 총 10,000명에 달했고, 수천 명이 도시 성벽 밖에서 살았다.[3] 네덜란드 식민 당국은 이들에게 등록 서류를 소지하도록 요구했으며, 이를 준수하지 않는 사람들은 중국으로 추방했다.[4]

1730년대 말라리아 발생으로 네덜란드령 동인도 총독 디르크 판 클론을 포함하여 수천 명이 사망한 후 추방 정책이 강화되었다.[5] 인도네시아 역사학자 베니 G. 세티오노에 따르면, 이 질병 발생 후 네덜란드인과 원주민 사이에서 중국계에 대한 의심과 불만이 커졌는데, 그들의 수가 증가하고 부가 점점 더 눈에 띄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원주민 담당 위원 로이 페르디난트는 아드리안 발케니에르 총독의 명령에 따라 1740년 7월 25일, 의심스러운 중국인들을 실론(오늘날의 스리랑카)으로 추방하여 계피 수확을 강요하기로 결정했다. 부유한 중국인들은 부패한 네덜란드 관리들로부터 추방하겠다는 협박을 받으며 금품을 갈취당했다. 스탬퍼드 래플스는 1830년에 자바인들의 기록에 따르면, 네덜란드 당국은 바타비아의 네덜란드인 임명 중국인 촌장인 니 호에 콩에게 검은색 또는 파란색 옷을 입은 모든 중국인을 추방하라고 지시했는데, 이는 가난한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라고 언급했다. 또한 추방된 사람들이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고 자바에서 시야에서 벗어나면 바다에 던져졌다는 소문이 있었으며, 일부 기록에서는 배에서 폭동이 일어나 사망했다고 한다. 중국계 추방은 남아있는 중국인들 사이에서 불안을 야기하여 많은 중국인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동시에, 베타위 하인들을 포함한 바타비아의 원주민들은 중국인에 대한 불신을 점점 더 키웠다. 경제적 요인이 작용했는데, 대부분의 원주민은 가난했고, 중국인들이 도시에서 가장 번영하는 지역을 차지하고 있다고 인식했다. 네덜란드 역사학자 Albertus Nicolaas Paasman|알베르투스 니콜라스 파스만nl은 당시 중국인들이 "아시아의 유대인"이었다고 언급했지만, 실제 상황은 더 복잡했다. 바타비아 주변 지역에 거주하는 많은 가난한 중국인들은 네덜란드와 중국 엘리트 모두에게 착취당한다고 느꼈던 설탕 공장 노동자들이었다. 부유한 중국인들은 공장을 소유했고, 수입 농업과 해운에 관여했으며, 설탕 제조와 당밀 및 쌀을 기반으로 한 알코올 음료인 아락 증류로부터 수입을 얻었다. 그러나 네덜란드 지배자들은 설탕 가격을 설정했고, 이로 인해 불안이 발생했다. 1720년대부터 유럽 수출 증가와 서인도 제도의 경쟁으로 시작된 세계 설탕 가격 하락으로 인해 동인도의 설탕 산업은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1740년까지 세계 설탕 가격은 1720년 가격의 절반으로 떨어졌다. 설탕이 주요 수출품이었기 때문에 이는 식민지에 상당한 재정적 어려움을 초래했다.

초기에 동인도 의회(Raad van Indië)의 일부 구성원들은 중국인들이 바타비아를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으며, 중국인을 통제하기 위한 더 강력한 조치는 1738년 바타비아로 돌아온 발케니에르의 정적이자 전 제일란 총독인 구스타프 빌렘 판 임호프가 이끄는 파벌에 의해 저지되었다.[5] 그러나 많은 수의 중국인들이 인근 정착지에서 바타비아 외곽으로 도착했고, 9월 26일 발케니에르는 의회의 긴급 회의를 소집하여 중국계의 모든 봉기에 치명적인 무력으로 대응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러한 정책은 판 임호프의 파벌에 의해 계속 반대받았으며; 베르뮬렌은 두 식민지 파벌 간의 긴장이 그 후의 학살에 역할을 했다고 시사했다.

10월 1일 저녁, 발케니에르는 5일 전 긴급 회의에서 그의 발언에 분노한 1,000명의 중국인 무리가 성문 밖에 모였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 보고는 발케니에르와 의회에 의해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성벽 밖에서 중국인들에 의해 발리 하사가 살해된 후, 의회는 비상 조치를 취하고 경비를 강화하기로 결정했다. 50명의 유럽인과 몇몇 원주민 짐꾼으로 구성된 두 그룹이 도시의 남쪽과 동쪽의 초소로 보내졌고, 공격 계획이 수립되었다.

3. 학살의 전개

사건 당시 바타비아 시가지를 그린 조감도. 규칙적으로 가옥이 늘어선 시가지에서 앞쪽 운하를 따라 늘어선 집에서는 불길과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길에는 무기를 들고 덤벼드는 사람들과 도망치는 사람들, 쓰러져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 등 학살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학살 중에 중국인 집에 불이 질러졌다.


1740년 10월 9일 학살이 시작된 이후, 네덜란드군은 바타비아 시내 곳곳에서 중국인 거주 지역을 공격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중국인들이 살해되었고, 가옥은 불탔으며 재산 약탈이 만연했다.

10월 11일, 아드리안 발케니에르 총독은 약탈 중단을 지시했지만, 현장에서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오히려 불법 무장 단체들이 중국인 사냥에 나서면서 학살은 더욱 확산되었다. 10월 22일, 발케니에르는 모든 살인 행위 중단을 명령하고, 폭동 주동자를 제외한 모든 중국인에게 사면을 제안하는 등 사태 수습에 나섰다.

한편, 도시 성벽 밖에서는 중국인 반란군과 네덜란드군 사이에 산발적인 전투가 계속되었다. 10월 25일, 500명의 무장한 중국인이 앙케에 접근했으나 네덜란드 기병대에 의해 격퇴되었다. 다음 날, 네덜란드군과 원주민 병력으로 구성된 기병대는 살라파장 설탕 공장에 있는 반란군 거점을 공격하여 불태웠다. 다른 공장들도 비슷한 방식으로 공격받았다. 네덜란드군의 공격을 피해 중국인들은 캄풍 멜라유의 설탕 공장으로 후퇴했지만, 이곳 역시 함락되었다.

10월 30일, 도망치던 중국인들이 탕게랑에 도착했다는 보고가 있었고, 11월 2일에는 휴전 명령이 내려졌다. 바타비아 성벽 안에는 더 이상 중국인이 남아있지 않았으며, 11월 8일에는 시레본 술탄국에서 파견된 원주민 병력이 도시 경비를 강화했다. 약탈은 11월 28일까지 계속되었고, 그 달 말에 마지막 원주민 병력이 철수하면서 학살은 사실상 마무리되었다.

3. 1. 초기 징후

1740년 9월, 정부의 탄압과 설탕 가격 하락으로 인해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중국계 주민들 사이에서 불안이 커졌다. 네덜란드령 동인도 총독인 Adriaan Valckenier|아드리안 발케니에르영어는 어떠한 폭동에도 무력 진압으로 대처하겠다고 포고했다.[1] 같은 해 10월 7일, 수백 명의 화교가 네덜란드 병사 50명을 살해했는데, 이들 중 다수는 설탕 공장의 노동자였다.[1] 이로 인해 네덜란드군은 중국계 주민이 소유한 무기를 모두 몰수하고, 중국인을 대상으로 야간 통행 금지령을 발령했다.[1]

3. 2. 학살의 시작 (1740년 10월 9일)

1740년 10월 7일, 설탕 공장에서 일하던 중국인 노동자들이 자체 제작한 무기로 공장을 약탈하고 불태우는 반란을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니에 호에 콩(Nie Hoe Kong)의 지휘 아래, 메스터 코르넬리스(현재의 자티네가라)와 타나 아방에서 50명의 네덜란드 군인을 살해했다. 이에 네덜란드군은 1,800명의 정규군, 스히테르레이(민병대), 11개 대대의 징집병을 보내 반란을 진압하고, 통행금지령을 내리고 중국인 축제를 취소했다. 중국인들이 촛불을 켜고 식민지배 세력에 대항하여 음모를 꾸밀 것을 두려워한 네덜란드 당국은 성벽 안에 있는 중국인들에게 촛불을 켜는 것을 금지하고 "가장 작은 부엌칼까지" 모든 것을 넘겨주도록 명령했다.

다음 날인 10월 8일, 네덜란드군은 인근 탕게랑과 브카시에서 온 집단을 포함하여 최대 10,000명의 화교가 도시 외곽에서 공격해 오는 것을 격퇴했다. 래플스는 이 공격으로 1,789명의 중국인이 사망했다고 기록했다. 이에 아드리안 발케니에르 총독은 10월 9일에 다시 회의를 소집했다.

한편, 발리와 술라웨시에서 온 노예, 부기스족, 발리인 군대를 포함하여 바타비아의 다른 민족 집단 사이에서는 중국인들이 그들을 죽이거나, 강간하거나, 노예로 만들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들은 먼저 베사르 강을 따라 화교 소유의 가옥을 불태웠다. 이후 네덜란드군은 바타비아의 다른 지역에 있는 중국인 정착지에 대한 공격을 가하여 가옥을 불태우고 사람들을 살해했다. 네덜란드 정치가이자 식민주의 비판가인 W. R. 반 호에벨은 "임산부, 수유모, 아이들, 떨고 있는 노인들이 칼에 쓰러졌다. 무방비 상태의 포로들은 양처럼 도살되었다"라고 기록했다.

헤르마누스 판 수흐텔렌 중위와 타나 아방 생존자인 얀 판 오스텐 대령 휘하의 병사들은 중국인 구역에 주둔했다. 수흐텔렌과 그의 부하들은 가금류 시장에 자리를 잡았고, 판 오스텐의 부하들은 인근 운하를 따라 초소를 지켰다. 오후 5시경, 네덜란드군은 대포로 중국인이 점거한 가옥에 발포하여 불을 질렀다. 일부 중국인들은 불타는 집에서 사망했고, 다른 사람들은 집을 나오다 총에 맞거나 절망하여 자살했다. 주거 구역 근처의 운하에 도달한 사람들은 작은 배에 대기하고 있던 네덜란드군에 의해 살해되었고, 다른 군인들은 불타는 집 사이를 수색하며 발견된 생존자들을 모두 살해했다. 이러한 행위는 나중에 도시 전체로 퍼졌다. 버르뮬런은 많은 가해자들이 선원과 사회의 다른 "불규칙하고 나쁜 요소"라고 언급한다. 이 기간 동안 심한 약탈과 재산 몰수가 있었다.

1740년 10월 10일, 바타비아 학살 당시 네덜란드군에 의해 처형된 중국인 포로.


다음 날 폭력은 계속 확산되었고, 병원에 있던 중국인 환자들은 밖으로 끌려 나와 살해되었다. 전날 파괴된 지역의 화재를 진압하려는 시도는 실패했고, 불길은 더욱 거세져 10월 12일까지 계속되었다. 한편, 800명의 네덜란드 군인과 2,000명의 원주민으로 구성된 집단이 케 판장의 지도 아래 생존한 중국인 집단이 버티고 있던 캄풍 가딩 멜라티를 공격했다. 중국인들은 인근 파닝가란, 페칼롱간으로 대피했지만, 나중에 네덜란드군에 의해 그 지역에서 쫓겨났다. 두 차례의 공격으로 약 450명의 네덜란드군과 800명의 중국인이 사상했다.[5]

3. 3. 학살의 확산

1740년 10월 7일, 중국인 설탕 공장 노동자들이 개조한 무기를 사용하여 반란을 일으켜 공장을 약탈하고 불태웠다.[1] 수백 명의 화교가 메스터 코르넬리스(현재의 자티네가라)와 타나 아방에서 50명의 네덜란드 군인을 살해했는데,[2][3] 이를 이끈 것은 니에 호에 콩(Nie Hoe Kong)으로 의심되었다.[4] 이에 네덜란드는 폭동 진압을 위해 1,800명의 정규군, 스히테르레이(민병대), 11개 징집병 대대를 파견하여 통행금지령을 내리고 중국 축제 계획을 취소했다.[2] 중국인들이 촛불 아래에서 식민지에 대항해 음모를 꾸밀 것을 우려한 네덜란드는 도시 성벽 안 중국인들에게 촛불을 켜는 것을 금지하고, "가장 작은 부엌칼까지" 모두 넘겨야 했다.[5] 다음 날, 네덜란드는 인근 탕게랑과 브카시에서 온 집단을 포함한 최대 10,000명의 화교 공격을 도시 외곽에서 격퇴했다. 래플스는 이 공격으로 1,789명의 중국인이 사망했다고 기록했다. 이에 발케니어는 10월 9일에 다시 회의를 소집했다.

한편, 발리와 술라웨시 출신 노예, 부기스족, 발리인 군대 등 바타비아의 다른 민족 집단 사이에서는 화교가 그들을 살해, 강간, 노예화할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들은 먼저 베사르 강가의 화교 소유 가옥을 불태웠다. 이어 네덜란드군은 바타비아의 다른 지역에 있는 중국인 정착지를 공격하여 가옥을 불태우고 사람들을 살해했다. 네덜란드 정치가이자 식민주의 비판가인 W. R. 반 호에벨은 "임산부, 수유모, 아이들, 떨고 있는 노인들이 칼에 쓰러졌다. 무방비 상태의 포로들은 양처럼 도살되었다"라고 기록했다.

헤르마누스 판 수흐텔렌 소위와 타나 아방 생존자 얀 판 오스텐 대위 휘하의 병사들은 중국인 구역에 주둔했다. 수흐텔렌과 부하들은 가금류 시장에 자리를 잡았고, 판 오스텐의 부하들은 인근 운하를 따라 초소를 지켰다. 오후 5시경, 네덜란드군은 대포로 중국인 점거 가옥에 발포하여 불을 질렀다. 일부 중국인들은 불타는 집에서 사망했고, 다른 사람들은 집을 나오다 총에 맞거나 절망하여 자살했다. 주거 구역 근처 운하에 도달한 사람들은 작은 배에 대기하고 있던 네덜란드군에 의해 살해되었고, 다른 군인들은 불타는 집 사이를 수색하며 발견된 생존자들을 모두 살해했다. 이러한 행위는 나중에 도시 전체로 퍼졌다. 버르뮬런은 많은 가해자들이 선원과 사회의 다른 "불규칙하고 나쁜 요소"였다고 언급한다. 이 기간 동안 심한 약탈과 재산 몰수가 있었다.

다음 날 폭력은 계속 확산되었고, 병원에 있던 중국인 환자들이 밖으로 끌려 나와 살해되었다. 전날 파괴된 지역의 화재 진압 시도는 실패했고, 불길은 더욱 거세져 10월 12일까지 계속되었다. 한편, 800명의 네덜란드 군인과 2,000명의 원주민으로 구성된 집단이 케 판장(Khe Pandjang)의 지휘 아래 생존한 중국인 집단이 버티고 있던 캄풍 가딩 멜라티를 공격했다. 중국인들은 인근 파닝가란으로 대피했지만, 나중에 네덜란드군에 의해 그 지역에서 쫓겨났다. 두 차례의 공격으로 약 450명의 네덜란드군과 800명의 중국인이 사상했다.

10월 11일, 발케니어는 장교들에게 병력을 통제하고 약탈을 중단할 것을 요청했지만 실패했다. 이틀 후, 의회는 다른 민족 집단이 숙청에 협력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병사들에게 인도된 모든 중국인 머리에 두 개의 두카트를 보상으로 내걸었다. 그 결과, 초기 공격에서 살아남은 화교들은 보상을 노린 불법 무장 단체에 의해 사냥당했고, 그들은 발견한 중국인들을 죽였다. 네덜란드인들은 바타비아의 여러 지역에서 원주민들과 협력했다. 10월 14일에는 부기스족과 발리족 척탄병들이 네덜란드군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10월 22일, 발케니어는 모든 살인을 중단하라고 명령했다. 발케니어는 폭동의 책임을 전적으로 중국 반란군에게 돌리는 긴 편지를 통해, 폭동 지도자를 제외한 모든 중국인에게 사면을 제안했으며, 그들의 머리에 최대 500라이크스달러의 현상금을 걸었다.

성벽 밖에서는 중국 반란군과 네덜란드군 사이에 산발적인 전투가 계속되었다. 10월 25일, 약 2주간의 소규모 교전 후, 500명의 무장한 중국인이 카두왕(현재의 앙케)에 접근했지만, ''기병대장'' 크리스토펠 몰과 코넷 다니엘 치츠, 피터 돈커가 지휘하는 기병대에 의해 격퇴되었다. 다음 날, 1,594명의 네덜란드군과 원주민 병력으로 구성된 기병대는 살라파장 설탕 공장에 있는 반란군 거점으로 진격하여, 먼저 인근 숲에 집결한 다음 반란군이 안에 있는 동안 공장에 불을 질렀다. 보둥 렌제에 있는 또 다른 공장도 같은 방식으로 다른 그룹에 의해 점령되었다. 들이닥치는 네덜란드군에 대한 두려움에, 중국인들은 살라파장에서 4시간 거리에 있는 캄풍 멜라유의 설탕 공장으로 후퇴했고, 이 거점은 얀 조지 크럼멜 대위 휘하의 병력에게 함락되었다. 콰이를 격파하고 탈환한 후, 네덜란드군은 바타비아로 돌아왔다. 한편, 서쪽으로는 반텐 술탄국의 3,000명의 병력에 의해 길이 막힌 도망치는 중국인들은 자바 북부 해안을 따라 동쪽으로 향했다. 10월 30일까지 중국인들이 탕게랑에 도착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11월 2일, 휴전 명령이 크럼멜에게 전달되었고, 그는 부하들과 함께 카두왕에 50명의 병력을 배치한 후 바타비아로 돌아왔다. 정오에 도착했을 때, 바타비아 성벽 안에는 더 이상 중국인이 없었다. 11월 8일, 시레본 술탄국은 도시 경비를 강화하기 위해 2,000명에서 3,000명 사이의 원주민 병력을 파견했다. 약탈은 최소 11월 28일까지 계속되었고, 마지막 원주민 병력은 그 달 말에 철수했다.

3. 4. 학살의 중단 (10월 22일)

10월 11일, 발케니에르 총독은 장교들에게 군대를 통솔하여 약탈을 중단하도록 요청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1] 이틀 후, 의회는 다른 민족 집단을 숙청에 협력시키기 위한 보상으로 병사들에게 살해된 중국인 머리 하나당 더컷 금화 2개를 지급했다.[1] 그 결과, 초기 공격에서 살아남은 중국인들은 보상을 노린 불법 무장 단체에 의해 사냥당했고, 그들이 발견한 중국인들은 살해되었다.[2] 네덜란드인들은 바타비아의 여러 지역에서 원주민들과 협력했다. 10월 14일에는 부기스족과 발리족 척탄병들이 네덜란드군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되었다.[1] 10월 22일, 발케니에르는 모든 살인을 중단하라고 명령했다.[2] 발케니에르는 폭동의 책임을 전적으로 중국 반란군에게 돌리는 긴 편지를 통해, 폭동 지도자를 제외한 모든 중국인에게 사면을 제안했으며, 주동자의 머리에 대해서는 rijksdaalder|라이크스달러nl 500개의 현상금을 걸었다.[3]

4. 학살 이후

이 학살 이후 자바 전역에서 중국인에 대한 "사냥철"이 이어져, 1741년 세마랑에서 또 다른 학살이 발생했고, 이후 수라바야와 그레식에서도 발생했다.

바타비아의 모든 중국인들은 도시 성벽 밖의 페치난(현재는 글로독으로 알려짐)으로 이주되었으며, 이를 통해 네덜란드인들은 중국인들을 더 쉽게 감시할 수 있었다. 페치난을 떠나기 위해서는 특별 통행증이 필요했다. 그러나 1743년까지 중국인들은 이미 바타비아 내로 돌아왔고, 수백 명의 상인들이 그곳에서 사업을 운영했다. 케 판장이 이끄는 다른 중국인들은 중부 자바로 도망쳐 네덜란드 무역소를 공격했고, 이후 마타람의 파쿠부워노 2세 군대와 합류했다. 이 추가 봉기는 1743년에 진압되었지만, 자바에서의 분쟁은 그 후 17년 동안 거의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학살 이후, 설탕 산업을 운영하던 많은 중국인들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어 이 지역의 설탕 생산은 큰 타격을 입었다. 새로운 총독 반임호프가 탕게랑을 "식민지화"한 후에 회복되기 시작했다. 반임호프는 처음에 네덜란드에서 사람들을 데려와 토지를 경작하게 하려 했으나, 이미 동인도에 정착한 사람들을 게으르다고 여겼다. 그러나 높은 세금 때문에 새로운 정착민을 유치할 수 없었고, 결국 바타비아에 있던 사람들에게 토지를 팔았다. 예상대로 새로운 토지 소유주들은 "손에 흙을 묻히는 것"을 꺼려 중국인들에게 토지를 임대했다. 이후 생산량은 꾸준히 증가했지만, 1740년 이전 수준에 도달하는 데는 1760년대까지 걸렸고, 그 후 다시 감소했다. 제분소의 수도 1710년 131개에서 1750년 66개로 감소했다.

1740년 학살 이후 수십 년에 걸쳐 바타비아에는 다양한 직업을 위해 중국인이 필요하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18세기 후반에 상당한 중국 경제 확장이 이루어졌고, 1814년에는 총 47,217명의 주민 중 11,854명의 중국인이 있었다.

4. 1. 피해 규모

대부분의 기록에 따르면 바타비아 성벽 안에서 중국인 10,000명이 사망했고, 최소 500명 이상이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중국인 소유 가옥 600~700채가 약탈당하고 불태워졌다.[1][2] 베르뮬렌(Vermeulen)은 600명의 생존자를 언급했고,[3] 인도네시아 학자 A.R.T. 케마상(A.R.T. Kemasang)은 3,000명의 중국인이 살아남았다고 추정한다.[4] 인도네시아 역사가 베니 G. 세티오노(Benny G. Setiono)는 500명의 수감자와 병원 환자가 사망했고,[5] 총 3,431명이 살아남았다고 언급한다.

4. 2. 정치적 여파

무장한 경비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 남자가 칼을 넘겨주는 흑백 에칭.
발케니에르에게 반항하여 반임호프와 두 명의 다른 평의원이 체포되었다.


학살에 대한 대부분의 기록은 바타비아 성벽 안에서 10,000명의 중국인이 사망하고, 최소 500명 이상이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고 추정한다. 600~700채의 중국인 소유 가옥이 약탈당하고 불태워졌다.[1][2] 베르뮬렌은 600명의 생존자를 언급했고,[3] 인도네시아 학자 A.R.T. 케마상(A.R.T. Kemasang)은 3,000명의 중국인이 살아남았다고 추정한다.[4] 인도네시아 역사가 베니 G. 세티오노(Benny G. Setiono)는 500명의 수감자와 병원 환자가 사망했고,[5] 총 3,431명이 살아남았다고 언급한다. 이 학살 이후 자바 전역의 중국인에 대한 "사냥철"이 이어져, 1741년 세마랑에서 또 다른 학살이 발생했고, 이후 수라바야와 그레식에서도 발생했다.

폭력 사태 종식 조건의 일환으로 바타비아의 모든 중국인들은 도시 성벽 밖의 페치난(현재는 글로독으로 알려짐)으로 이주되었으며, 이를 통해 네덜란드인들은 중국인들을 더 쉽게 감시할 수 있었다. 페치난을 떠나기 위해서는 중국인들은 특별한 통행증이 필요했다. 그러나 1743년까지 중국인들은 이미 바타비아 내로 돌아왔고, 수백 명의 상인들이 그곳에서 사업을 운영했다. 케 판장이 이끄는 다른 중국인들은 중부 자바로 도망쳐 네덜란드 무역소를 공격했고, 이후 마타람의 자바 술탄 파쿠부워노 2세의 지휘 하에 있던 군대와 합류했다. 이 추가 봉기는 1743년에 진압되었지만, 자바에서의 분쟁은 그 후 17년 동안 거의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1740년 12월 6일, 반임호프와 두 명의 다른 평의원은 발케니에르의 명령에 따라 불복종 혐의로 체포되었고, 1741년 1월 13일에는 각각 다른 배를 타고 네덜란드로 보내졌으며, 1741년 9월 19일에 도착했다. 네덜란드에서 반임호프는 발케니에르가 학살의 책임이 있다고 평의회를 설득했고, 11월 24일 "Consideratiën over den tegenwoordigen staat van de Ned. O.I. Comp."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현재 상황에 대한 고찰")이라는 제목의 긴 연설을 했다. 이 연설의 결과로 그와 다른 평의원에 대한 혐의는 기각되었다. 1742년 10월 27일, 반임호프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지도부인 17인의 영주들의 기대를 받으며, 동인도의 새로운 총독으로 ''Hersteller''호에 탑승하여 바타비아로 보내졌다. 그는 1743년 5월 26일 동인도에 도착했다.

반임호프는 네덜란드로 보내졌지만, 이후 네덜란드 동인도의 새로운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발케니에르는 1740년 말에 교체를 요청했고, 1741년 2월에는 후임자로 반임호프를 임명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다른 설명에 따르면 17인의 영주들은 그에게 1739년에 설탕을 너무 많이 수출하고 커피를 너무 적게 수출하여 막대한 재정적 손실을 초래한 것에 대한 처벌로 반임호프를 후임자로 임명하라고 통보했다. 발케니에르가 이 통보를 받았을 때, 반임호프는 이미 네덜란드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발케니에르는 임시 후임자 요하네스 테덴스를 임명한 후 1741년 11월 6일 동인도를 떠났다. 함대를 지휘하며 발케니에르는 네덜란드로 향했다. 1742년 1월 25일, 그는 케이프타운에 도착했지만, 17인의 영주의 명령에 따라 총독 헨드릭 스웰렌그레벨에게 구금되어 조사를 받았다. 1742년 8월 발케니에르는 바타비아로 다시 보내져 바타비아 요새에 투옥되었고, 3개월 후 학살 연루를 포함한 여러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1744년 3월 그는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그의 모든 재산은 몰수되었다. 1744년 12월 발케니에르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장문의 진술서를 제출하면서 재판이 다시 열렸다. 발케니에르는 네덜란드에서 더 많은 증거를 요청했지만, 조사가 완료되기 전인 1751년 6월 20일 감옥에서 사망했다. 사형은 1755년에 사후 취소되었다. 베르뮬렌은 이 조사를 네덜란드 내의 대중적 분노에 의해 부당하게 진행된 것이라고 특징지었고, 1760년에 발케니에르의 아들 아드리안 이사크 발케니에르가 총 725,000길더의 배상금을 받은 것을 보면, 공식적으로 인정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학살 이후 이 지역의 설탕 생산은 큰 타격을 입었는데, 산업을 운영하던 많은 중국인들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총독 반임호프가 탕게랑을 "식민지화"한 후에 회복되기 시작했다. 그는 처음에는 네덜란드에서 사람들이 와서 토지를 경작하기를 원했는데, 그는 이미 동인도에 정착한 사람들을 게으르다고 여겼다. 그러나 높은 세금 때문에 새로운 정착민을 유치할 수 없었고, 토지를 이미 바타비아에 있던 사람들에게 팔았다. 그가 예상했던 대로 새로운 토지 소유주들은 "손에 흙을 묻히는" 것을 꺼렸고, 재빨리 중국인들에게 토지를 임대했다. 이후 생산량은 꾸준히 증가했지만, 1740년 이전 수준에 도달하는 데는 1760년대까지 걸렸고, 그 후 다시 감소했다. 제분소의 수도 감소했다. 1710년에는 131개였지만, 1750년에는 66개로 줄었다.

1740년 학살 이후 수십 년에 걸쳐 일련의 고찰을 통해 바타비아에는 다양한 직업을 위해 중국인이 필요하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18세기 후반에 상당한 중국 경제 확장이 이루어졌고, 1814년에는 총 47,217명의 주민 중 11,854명의 중국인이 있었다.

4. 3. 사회적 여파

네덜란드령 동인도 총독인 아드리안 발케니에르|Adriaan Valckenier영어는 정부의 탄압과 설탕 가격 하락으로 인해 불안이 커진 중국계 주민들의 폭동에 무력 진압으로 대처하겠다고 포고했다.[1] 1740년 10월 7일, 수백 명의 화교가 네덜란드 병사 50명을 살해하면서 네덜란드군은 중국계 주민의 무기를 몰수하고 야간 통행 금지령을 발령했다.[1] 이틀 뒤, 화교에 의한 흉악한 행위가 일어날 것이라는 소문으로 인해 바타비아의 다른 민족 집단이 중국인 집을 불태우고 네덜란드군은 대포를 쏘는 등 폭동이 확산되었다.[1]

학살 기록에 따르면 바타비아 성벽 내에서 살해된 중국인의 수는 1만 명으로 추산되며, 최소 500명이 중상을 입었고 600~700채의 중국인 소유 가옥이 약탈 및 방화되었다.[2] 생존자 수는 자료에 따라 600명에서 3,431명까지 다양하게 추산된다.[2] 이 학살 이후 자바 섬 전체에 화교에 대한 '사냥 철'이 시작되었고, 1741년 스마랑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학살이 발생했다.[2]

바타비아의 모든 화교는 성벽 밖 '페시니안'(차이나타운), 현재의 글로독|Glodok영어으로 강제 이주되어 네덜란드인의 감시를 받게 되었고, 차이나타운을 벗어나려면 특별 통행 허가증이 필요했다.[2] 하지만 1743년까지 화교는 바타비아 도시로 돌아와 상업 활동을 재개했다.[2] 케 판장(Khe Pandjang)이 이끄는 다른 화교들은 중부 자바로 도주하여 네덜란드 무역 거점을 습격했고, 이후 마타람 왕국의 자바 술탄, 파쿠부오노 2세|Pakubuwono II영어의 군대와 합류하여 자바 전쟁 (1741년-1743년)|Java War (1741–1743)영어을 일으켰으나 1743년에 종결되었다.[2]

판 이무호프는 발케니에르를 학살의 책임자로 지목하고 평의회를 설득하여 발케니에르에 대한 고발을 기각시키고, 이후 새로운 총독으로 바타비아에 부임했다.[3] 발케니에르는 후임으로 판 이무호프를 지명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이미 판 이무호프가 네덜란드로 돌아간 후였다.[4] 발케니에르는 네덜란드로 귀국 중 체포되어 학살 연루 혐의로 재판을 받았고, 유죄 판결 후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조사 완료 전 사망하여 사후 사형이 철회되었다.[4]

학살로 인해 설탕 생산량이 크게 감소했으나, 판 이무호프의 탕게랑 '식민지화' 정책으로 점차 회복되었다.[5] 그러나 1740년 이전 수준을 회복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고, 공장 수도 감소했다.[5] 18세기 후반, 중국인 경제가 확대되면서 1814년에는 바타비아 거주자 중 상당수가 중국인이었다.

5. 역사적 평가 및 영향

페르메울런(Vermeulen)은 이 학살을 "18세기 [네덜란드] 식민주의의 가장 두드러진 사건 중 하나"라고 묘사했다.[4] W. W. 다르모비요노(W. W. Dharmowijono)는 박사 학위 논문에서 이 사건이 네덜란드 문학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으며, 초기 사례로는 학살을 비난하는 빌럼 판 하렌의 시(1742년)와 중국인을 비판하는 익명의 시(같은 시기)가 있다고 언급했다.[4] 래플스(Raffles)는 1830년에 네덜란드 역사 기록이 "완전하거나 만족스럽지 않다"고 썼다.[4]

네덜란드 역사가 레오나르트 블뤼세는 이 학살이 간접적으로 바타비아의 확장을 이끌었고, 20세기 후반에도 여전히 느껴지는, 중국계와 다른 집단 간의 이분법을 낳는 ''모두스 비벤디''를 제도화했다고 썼다.[4] 이 학살은 또한 자카르타의 수많은 지역 명칭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타나 아방(Tanah Abang, "붉은 땅") 지구 이름의 한 가지 가능한 어원은 그곳에서 흘린 중국인의 피 때문에 붙여졌다는 것이다. 반 호에벨(van Hoëvell)은 이 명칭이 중국인 생존자들이 더 빨리 사면을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한 타협안이었다고 제안한다.[4] 동자카르타의 라와 방케(Rawa Bangke)라는 하위 지구 이름은 그곳에서 살해된 많은 중국계 때문에 시체에 대한 구어체 인도네시아어 단어인 ''bangkai''에서 유래되었을 수 있다. 탐보라의 ''앙케(Angke)''에도 유사한 어원이 제안되었다.[4]

5. 1. 네덜란드 문학에서의 묘사

페르메런은 이 학살 사건을 "18세기 네덜란드 식민주의에서 가장 인상적인 사건 중 하나"라고 언급했다.[4] W. W. 다르모비요노는 자신의 박사 학위 논문에서 이 사건이 네덜란드 문학에서 자주 다뤄졌으며, 초기 사례로 1742년 빌렘 판 하렌의 학살을 비난하는 시와 동시대 중국인을 비판하는 익명의 시가 있다고 기록했다.[4] 래플스는 1830년에 네덜란드의 역사적 기록은 "결코 완전하거나 만족스럽지 않다"고 적었다.[4]

5. 2. 현대적 의의

페르메런은 이 학살을 "18세기 네덜란드 식민주의에서 가장 인상적인 사건 중 하나"라고 언급했다.[4] W. W. 다르모비요노는 박사 논문에서 이 사건이 네덜란드 문학에서 자주 다뤄졌으며, 초기 사례로 1742년 빌렘 판 하렌의 학살 비난 시와 동시대 중국인을 비판하는 익명의 시가 있다고 기록했다.[4] 래플스는 1830년에 네덜란드 역사 기록이 "결코 완전하거나 만족스럽지 않다"고 썼다.[4]

네덜란드 역사가 레오나르트 브뤼세는 이 학살이 간접적으로 바타비아의 확장을 가져왔고, 화교와 다른 민족 집단을 분리하는 잠정 협정을 제도화했으며, 이러한 분리가 20세기 후반에도 여전히 느껴진다고 말했다.[4] 이 사건은 자카르타 여러 지역의 이름에 영향을 주었을 수 있다. 타나 아반 지구('붉은 땅'이라는 뜻) 이름은 여기서 흘린 중국인의 피가 어원일 가능성이 있다. 판 호에벨은 이 이름이 중국인 생존자들이 조기에 사면을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한 양보라고 주장했다.[4] 동자카르타의 라와 방케 (Rawa Bangke) 구 이름은 여기서 다수의 화교가 살해된 것에서 인도네시아어로 시체를 의미하는 "bangkai"에서 유래했을 수 있다. 탕보라의 앙케 (Angke)도 비슷한 유래가 있다고 주장된다.[4]

인도네시아의 조코 위도도 정권과 차흐요 쿠모로 내무 장관은 바타비아 화교 학살 사건 피해자와 학살에 대한 보복으로 자바 전쟁 (1741-1743)에서 네덜란드와 싸운 자바인과 중국인의 기념비를 건립했다.[5]

참조

[1] 서적 Fragile Nation, A: The Indonesian Crisis https://books.google[...] World Scientific
[2] 서적 東南アジア史 II 島嶼部 山川出版社
[3] 간행물 ジャカルタの都市発展プロセスと環境変化―水環境と文化遺産の課題を中心に― http://www.ritsumei.[...] 2017-10-30
[4] 문서 far from complete or satisfactory
[5] 웹사이트 Hoax: Benarkah Pemerintah Jokowi Mendirikan Monumen Pao An Tui? https://jokowifaq.or[...] 2017-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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