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독일의 리투아니아 최후 통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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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39년 독일의 리투아니아 최후 통첩은 독일이 리투아니아에 클라이페다 지역을 반환할 것을 요구하며 군사적 위협을 가한 사건이다. 1930년대 나치 독일의 압박이 심화된 가운데, 독일은 1939년 3월 20일 리투아니아에 최후 통첩을 제시하여 클라이페다 반환을 요구했고, 국제적 지원을 얻지 못한 리투아니아는 이를 수용했다. 이로 인해 클라이페다는 독일로 반환되었으며, 리투아니아는 경제적 손실과 정치적 위기를 겪었다. 이후 리투아니아는 독일과 소련의 세력 다툼 속에서 소련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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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독일의 리투아니아 최후 통첩 | |
---|---|
개요 | |
![]() | |
발생 위치 | 메멜란트 |
목표 | 클라이페다 지역의 양도 |
결과 | 독일의 요구 승인 |
날짜 | 1939년 3월 20일 ~ 3월 22일 |
장소 | 리투아니아 |
관련 분쟁 | 제2차 세계 대전 |
교전 세력 | |
공격 측 | 나치 독일 |
방어 측 | 리투아니아 |
지휘관 및 지도자 | |
공격 측 | 아돌프 히틀러 |
방어 측 | 요자스 투벨리스 |
배경 | |
배경 | 1938년 3월 폴란드의 리투아니아 최후 통첩 1939년 3월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합병 |
경과 | |
최후 통첩 전달 | 1939년 3월 20일 |
리투아니아의 수락 | 1939년 3월 22일 |
클라이페다 점령 | 1939년 3월 22일 ~ 3월 23일 |
여파 | |
영향 | 리투아니아의 고립 심화 독일의 영향력 강화 제2차 세계 대전 발발의 한 요인 |
참고 문헌 | |
참고 문헌 | ""Lithuania: The Year of Crisis, 1939–1940"". Lithuanian American Information Center. 1996. Eidintas, Alfonsas; Vytautas Žalys; Edvardas Tuskenis (1999). ""Lithuania in European Politics: The Years of the First Republic, 1918–1940"". New York: St. Martin's Press. ISBN 0-312-22458-3. Gerutis, Albertas (1984). ""Lithuania: 700 Years"". New York: Manyland Books. ISBN 0-87141-028-1. Sabaliūnas, Leonas (1972). ""Lithuania in Crisis: Nationalism to Communism 1939–1940"".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ISBN 0-253-33643-1. |
2. 역사적 배경
클라이페다 지역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독일로부터 분리되어 국제 연합의 관리 하에 놓이면서 복잡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게 되었다. 이 지역은 동프로이센의 중요한 항구였으며, 리투아니아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고, 리투아니아에게는 발트해로 나가는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에 리투아니아는 이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했다. 폴란드 또한 이 지역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다.
1920년대 리투아니아와 독일은 반폴란드 정서를 공유하며 비교적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고,[4] 1928년 1월, 양국은 국경 조약을 체결하여 클라이페다를 리투아니아에 귀속시켰다. 그러나 연합국이 클라이페다 지역의 귀속에 대한 결정을 주저했고, 단치히 자유시와 마찬가지로 자유 국가로 남을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리투아니아는 주도권을 잡고 1923년 1월 클라이페다 봉기를 조직했다.[1]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과 독일은 이 봉기를 지지했다.[2]
1930년대 나치 독일 집권 후 독일과 리투아니아의 관계는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특히 1934년 2월 리투아니아 정부가 친나치 활동가 수십 명을 체포하면서 긴장이 심화되었고, 독일은 리투아니아 농산물 수입을 보이콧했다.[5] 이로 인해 수발키야(리투아니아 남부)에서 경제 위기가 발생했고, 농민들의 격렬한 시위가 일어났다.[6] 그러나 자르 국민 투표 이후 대부분의 친나치 죄수들이 사면되면서, 리투아니아의 위신은 하락하고 독일의 영향력은 강화되었다.[8]
2. 1. 베르사유 조약과 클라이페다
베르사유 조약 28조에 따라 클라이페다(독일어: ''메멜'')는 동프로이센의 중요한 항구였으나 독일로부터 분리되었고, 99조에 따라 연합국에 의해 통치되었다. 프랑스가 지역 행정을 맡았고, 리투아니아는 이 지역에 상당한 리투아니아인 인구가 있었고 (리투아니아 소구역 참조) 발트해로 가는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에 리투아니아에 속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통제권을 얻기 위해 로비를 계속했다.[1] 폴란드 역시 이 영토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다. 연합국이 결정을 주저했고, 단치히 자유시와 마찬가지로 자유 국가로 남을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리투아니아는 주도권을 잡고 1923년 1월 클라이페다 봉기를 조직했다.[1]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과 독일은 이 행동을 지지했다.[2] 자치 의회(클라이페다 지역 의회)가 있는 자치 영토인 이 지역은 리투아니아에 부속되었다. 이 지역은 약 2400km2 면적에 인구는 약 140,000명이었다.[3]1920년대에 리투아니아와 독일은 반폴란드 정서로 뭉쳐 비교적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했다.[4] 1928년 1월, 길고 어려운 협상 끝에 독일과 리투아니아는 국경 조약을 체결하여 클라이페다는 리투아니아 측에 남게 되었다. 그러나 나치 독일이 바이마르 공화국을 대체한 후 1930년대에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1934년 2월 리투아니아 정부가 친나치 활동가 수십 명을 체포했을 때 특히 긴장된 시기가 찾아왔다. 이러한 체포와 재판에 대한 대응으로 독일은 리투아니아 농산물 수입에 대한 보이콧을 선언했다.[5] 이 보이콧은 수발키야(리투아니아 남부)에서 경제 위기를 야기했으며, 이곳에서 농민들이 격렬한 시위를 조직했다.[6] 그러나 자르 (국제 연맹)에서의 국민 투표 후 대부분의 친나치 죄수들에게 사면이 주어졌다. 사면 이후 리투아니아의 위신은 해외와 클라이페다에서 모두 하락하여 독일이 이 지역에서 영향력을 강화할 수 있게 되었다.[8]
2. 2. 리투아니아와 클라이페다의 관계
클라이페다(독일어: Memel|메멜de)는 동프로이센의 중요한 항구로,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독일에서 분리되어 연합국의 통치를 받았다. 프랑스가 행정을 맡았고, 리투아니아는 이 지역에 리투아니아인이 많이 살고 있고 발트해로 가는 유일한 통로라는 이유로 영유권을 주장했다.[1] 폴란드 역시 영유권을 주장했으나, 연합국이 결정을 미루면서 단치히 자유시처럼 자유 국가가 될 것으로 예상되자, 리투아니아는 1923년 1월 클라이페다 봉기를 일으켰다.[1]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과 독일의 지지를 받은 이 봉기로[2] 클라이페다는 자치 의회(클라이페다 지역 의회)를 가진 자치 영토로서 리투아니아에 병합되었다. 면적은 약 2400km2, 인구는 약 14만 명이었다.[3]1920년대 리투아니아와 독일은 반폴란드 정서를 공유하며 비교적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4] 1928년 1월, 양국은 국경 조약을 체결하여 클라이페다를 리투아니아에 귀속시켰다. 그러나 1930년대 나치 독일 집권 후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특히 1934년 2월 리투아니아 정부가 친나치 활동가 수십 명을 체포하면서 긴장이 심화되었고, 독일은 리투아니아 농산물 수입을 보이콧했다.[5] 이로 인해 수발키야(리투아니아 남부)에서 경제 위기가 발생했고, 농민들의 격렬한 시위가 일어났다.[6] 그러나 자르 국민 투표 이후 대부분의 친나치 죄수들이 사면되면서, 리투아니아의 위신은 하락하고 독일의 영향력은 강화되었다.[8]
2. 3. 독일-리투아니아 관계 악화
1920년대에 리투아니아와 독일은 반폴란드 정서로 뭉쳐 비교적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했다.[4] 1928년 1월, 길고 어려운 협상 끝에 독일과 리투아니아는 국경 조약을 체결하여 클라이페다는 리투아니아 측에 남게 되었다. 그러나 나치 독일이 바이마르 공화국을 대체한 후 1930년대에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특히 1934년 2월 리투아니아 정부가 친나치 활동가 수십 명을 체포했을 때 긴장이 고조되었는데, 이러한 체포와 재판에 대한 대응으로 독일은 리투아니아 농산물 수입에 대한 보이콧을 선언했다.[5] 이 보이콧은 수발키야 (리투아니아 남부)에서 경제 위기를 야기했으며, 이곳에서 농민들이 격렬한 시위를 조직했다.[6] 그러나 자르에서의 국민 투표 후 대부분의 친나치 죄수들에게 사면이 주어졌다. 사면 이후 리투아니아의 위신은 해외와 클라이페다에서 모두 하락하여 독일이 이 지역에서 영향력을 강화할 수 있게 되었다.[8]3. 긴장 고조
1920년대 리투아니아와 독일은 반폴란드 정서를 공유하며 비교적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4] 1928년 1월, 양국은 오랜 협상 끝에 국경 조약을 체결하여 클라이페다를 리투아니아 영토로 확정했다. 그러나 1930년대 나치 독일이 바이마르 공화국을 대체하면서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특히 1934년 2월 리투아니아 정부가 친나치 활동가 수십 명을 체포하자, 독일은 리투아니아 농산물 수입을 보이콧하며 경제적 압박을 가했다.[5] 이 보이콧은 수발키야 지역에 경제 위기를 초래했고, 농민들의 격렬한 시위를 야기했다.[6] 자르 국민 투표 이후, 리투아니아는 대부분의 친나치 죄수들을 사면했지만, 이는 국내외적으로 리투아니아의 위신을 하락시켜 독일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8]
1939년 3월 25일, 클라이페다 지역 의회는 독일 복귀를 위한 투표를 진행할 것으로 예상되었다.[12] 독일은 리투아니아가 자발적으로 클라이페다 지역을 포기하기를 바랐고,[9] 공개적인 입장 표명은 당시 소련에 대항하는 반공 연합을 위해 폴란드와 진행 중이던 민감한 논의를 방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 침묵을 유지했다.[13]
3. 1. 1938년 독일의 압박
1938년 봄, 아돌프 히틀러는 클라이페다 획득을 주데텐란트 획득 다음의 최우선 과제로 언급했다.[7] 폴란드가 리투아니아에 최후 통첩을 제시했을 때, 독일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간 군사 충돌 시 클라이페다와 서부 리투아니아 상당 부분을 점령하기 위해 군대를 투입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리투아니아가 폴란드의 최후 통첩을 수락한 지 일주일 후,[9] 독일은 11개 조항의 각서를 통해 친독일 활동가들의 자유로운 행동과 리투아니아의 영향력 감소를 요구했다. 이 조항들은 독일이 리투아니아를 비난하기 쉽도록 일부러 모호하게 작성되었다.[8]리투아니아는 국제 정세 개선을 기대하며 문제 처리를 미루고, 독일에게 불만을 제기할 빌미를 주지 않으려 했다.[8] 그러나 친나치 선전과 시위는 리투아니아인들 사이에서도 만연했고, 지방 정부는 이를 막을 힘이 없었다.[8] 나치는 리투아니아 단체들을 물리적으로 괴롭혔다. 1938년 11월 1일, 리투아니아는 계엄령과 언론 검열을 해제하라는 압력을 받았다.[9] 클라이페다 의회의 12월 선거에서 친독일 정당들은 87%(29석 중 25석)의 득표율을 기록했다.[10] 1934년 재판의 주범인 에른스트 노이만은 1938년 2월 석방되어 클라이페다 친독일 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12월에 히틀러를 만나 클라이페다 문제가 1939년 3월 또는 4월까지 해결될 것이라는 확답을 받았다.[14] 노이만과 다른 나치 활동가들은 지역 자결권을 주장하며 리투아니아에 클라이페다 정치적 지위에 대한 협상을 요구했다.[11] 독일은 리투아니아가 자발적으로 클라이페다 지역을 포기하기를 바랐다.[9]
3. 2. 리투아니아의 대응과 한계
1920년대 리투아니아와 독일은 반(反)폴란드 정서로 비교적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했다.[4] 1928년 1월, 양국은 국경 조약을 체결하여 클라이페다를 리투아니아 영토로 인정했다. 그러나 1930년대 나치 독일이 바이마르 공화국을 대체하면서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1934년 2월, 리투아니아 정부가 친나치 활동가 수십 명을 체포하자 독일은 리투아니아 농산물 수입을 보이콧하며 대응했다.[5] 이로 인해 수발키야에서 경제 위기가 발생했고, 농민들은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6] 1935년 자르 국민 투표 이후 대부분의 친나치 죄수들이 사면되면서 리투아니아의 위신은 더욱 하락했고, 독일의 영향력은 강화되었다.[8]1938년 봄, 아돌프 히틀러는 클라이페다 획득을 주데텐란트 다음의 최우선 과제로 언급했다.[7] 리투아니아는 독일의 압력에 국제 정세 개선을 기대하며 문제 처리를 연기하는 소극적인 대응을 보였다.[8] 그러나 친나치 선전과 시위는 리투아니아인들 사이에서도 만연했고, 지방 정부는 이를 막을 힘이 없었다.[8] 나치는 리투아니아 단체를 물리적으로 괴롭혔다. 1938년 11월 1일, 리투아니아는 계엄령과 언론 검열을 해제해야 했다.[9]
1938년 12월 클라이페다 지역 의회 선거에서 친독일 정당들은 압도적인 득표율(87%, 29석 중 25석)을 기록했다.[10] 1934년 재판의 주요 피고인인 에른스트 노이만은 석방 후 클라이페다의 친독일 운동 지도자가 되었고, 아돌프 히틀러는 클라이페다 문제가 1939년 3월 또는 4월까지 해결될 것이라고 확신했다.[14] 노이만과 다른 나치 활동가들은 자결권을 주장하며 리투아니아에 협상을 요구했고,[11] 의회는 1939년 3월 25일 소집되어 독일 복귀를 투표할 것으로 예상되었다.[12]
4. 최후통첩
1920년대 리투아니아와 독일은 반폴란드 정서를 공유하며 비교적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4] 1928년 1월, 양국은 오랜 협상을 거쳐 국경 조약을 체결, 클라이페다를 리투아니아 영토로 인정했다. 그러나 1930년대 나치 독일이 바이마르 공화국을 대체하면서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특히 1934년 2월 리투아니아 정부가 친나치 활동가 수십 명을 체포하자, 독일은 리투아니아 농산물 수입을 보이콧하며 대응했다.[5] 이로 인해 수발키야 지역에서 경제 위기가 발생했고, 농민들의 격렬한 시위로 이어졌다.[6] 자르에서의 국민 투표 이후 대부분의 친나치 죄수들이 사면되면서 리투아니아의 국제적 위신은 하락했고, 독일은 클라이페다 지역에서 영향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8]
1939년 3월, 독일이 클라이페다를 점령하려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소문이 리투아니아 정부에까지 전해졌다. 3월 12일, 교황 비오 12세 대관식에 참석했던 외무장관 유오자스 우르브시스는 귀국길에 베를린에 들러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고자 했다.[8]
4. 1. 독일의 최후통첩 제시
1939년 3월 20일, 리벤트로프는 우르브시스와의 만남에서 클라이페다를 독일로 반환할 것을 요구하며 군사적 행동을 위협했다.[9] 우르브시스는 이 구두 최후 통첩을 리투아니아 정부에 전달했다. 이 최후 통첩은 서면으로 제시되지 않았고 공식적인 마감 시한도 없었기 때문에, 일부 역사가들은 이를 "일련의 요구"로 폄하하기도 한다.[14]그러나 리투아니아가 저항할 경우 독일이 무력을 사용할 것이라는 점은 분명했으며, 다른 국가에 도움을 요청하지 말라는 경고도 덧붙여졌다. 리투아니아는 빠른 결정을 내려야 했고, 충돌이나 독일 측 사상자가 발생할 경우 독일군의 즉각적인 대응을 받게 될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다.[9]
리투아니아는 클라이페다 협약 서명국에 이러한 요구를 비밀리에 알렸지만, 히틀러 유화 정책을 따르던 영국과 프랑스는 실질적인 지원을 제공하지 않았다.[15][16] 소련은 리투아니아를 지지했지만, 독일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개입하지 않았다.[9] 국제적인 지원이 없는 상황에서, 리투아니아는 최후 통첩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리투아니아 외교는 이를 "필요악"으로 간주하고, 독립을 보존하기 위한 일시적인 양보라는 희망을 가졌다.[8]
4. 2. 국제 사회의 반응
클라이페다 협약 서명국 중 이탈리아와 일본은 독일을 지지했고, 영국과 프랑스는 리투아니아에 동정심을 표했지만 실질적인 지원은 제공하지 않았다.[16] 영국은 수데텐 위기와 마찬가지로 히틀러 유화 정책을 따랐으며, 독일이 공격할 경우 리투아니아나 다른 발트 국가를 지원할 계획이 없었다.[16] 소련은 원칙적으로 리투아니아를 지지했지만,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 체결을 고려하여 독일과의 관계를 악화시키고 싶지 않아 했다.[9] 결국 국제적인 지원이 없는 상황에서 리투아니아는 독일의 최후 통첩을 수락해야만 했다.5. 리투아니아의 굴복
나치이 바이마르 공화국을 대체하면서 1930년대에 리투아니아와 독일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1934년 리투아니아 정부가 친나치 활동가들을 체포하자, 독일은 리투아니아 농산물 수입을 보이콧하며 양국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5] 이로 인해 수발키야에서 경제 위기가 발생하고 농민들의 격렬한 시위가 일어났다.[6] 그러나 자르에서의 국민 투표 이후, 리투아니아는 대부분의 친나치 죄수들에게 사면을 내렸고, 이는 독일이 클라이페다 지역에서 영향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8]
독일의 압박이 거세지자, 리투아니아는 1939년 3월 23일 오전 1시에 독일과 조약을 체결하여 클라이페다 지역을 넘겨주었다.[17] 리투아니아 외무장관 우르브시스와 독일 외무장관 리벤트로프가 서명한 이 조약은 1939년 3월 22일부터 발효되었다.
5. 1. 조약 내용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독일에서 분리되었던 클라이페다 지역은 1939년 3월 22일부터 독일 제국에 재통합되었다.[17] 이 조약은 리투아니아가 클라이페다 지역을 독일에게 자발적으로 양도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다음 5개의 조항으로 구성되었다.조항 | 내용 |
---|---|
제1조 | 베르사유 조약으로 독일에서 분리된 클라이페다 지역을 독일 제국에 재통합한다.[17] |
제2조 | 리투아니아 군대와 경찰은 클라이페다 지역에서 즉시 철수한다. 리투아니아 정부는 질서 유지를 보장하며, 양측은 필요한 경우 행정 업무 인수를 위한 위원을 임명한다. 국가 주권 교환으로 발생하는 경제, 금융, 공무원, 시민권 문제는 별도 협정으로 처리한다.[17] |
제3조 | 리투아니아의 경제적 필요를 위해 클라이페다에 리투아니아 자유 항구 지역을 설치한다. 세부 사항은 부록에 따른다.[17] |
제4조 | 양국은 서로에게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제3자의 공격을 지원하지 않는다.[17] |
제5조 | 조약은 서명 즉시 발효된다. 양측 전권대사는 독일어와 리투아니아어로 작성된 두 개의 원본 조약에 서명한다.[17] |
6. 결과
1939년 독일의 최후 통첩과 클라이페다 상실은 리투아니아와 국제 정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안타나스 스메토나 대통령은 1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 두 번의 최후 통첩을 무조건 수용하여 권위주의 통치에 대한 불만을 증폭시켰으며, 이는 리투아니아에 정치적 위기를 불러왔다. 또한, 발트해로 향하는 유일한 항구였던 클라이페다를 잃은 것은 리투아니아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
독일과 소련은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을 체결하여 동유럽을 각자의 세력권으로 나누었고, 리투아니아는 처음에는 독일에 할당되었다가[9] 폴란드 침공 이후 독일-소련 국경 조약에 따라 소련의 세력권으로 변경되었다.
6. 1. 독일의 클라이페다 점령

조약 체결 직후, 독일군은 클라이페다 항구에 진입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순양함 ''도이칠란트''를 타고 직접 도시를 방문하여 짧은 연설을 했다. 당시 클라이페다로 항해한 독일 함대는 순양함 ''아드미랄 그라프 슈페'', 경순양함 ''뉘른베르크'', ''라이프치히'', ''쾰른''[14], 구축함 2개 전대, 어뢰정 3개 기동대, 보급함 1개 기동대로 구성되었다.[18] 반면, 당시 리투아니아 해군은 580톤 규모의 개조된 기뢰 제거함인 ''대통령 스메토나함'' 한 척만을 보유하고 있었다.[19] 독일이 클라이페다 반환을 축하하는 동안, 유럽 정치인들은 단치히 자유시가 히틀러의 다음 목표가 될 것이라는 우려를 표명했다.[18]
6. 2. 리투아니아의 정치적 위기
안타나스 스메토나 대통령은 1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 두 번의 최후 통첩을 무조건 수용하여 권위주의 통치에 대한 불만을 증폭시켰다. 독일의 최후 통첩은 리투아니아에 정치적 위기를 불러왔다. 블라다스 미로나스의 소극적인 내각은 요나스 체르니우스 장군이 이끄는 내각으로 교체되었다.[20] 1926년 리투아니아 쿠데타 이후 처음으로 정부에 야당 인사들이 참여하게 되었는데, 리투아니아 기독교 민주당의 레오나스 비스트라스는 교육부 장관으로, 리투아니아 인민 농민 연합의 유르기스 크릭슈치우나스는 농업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20] 다른 정당들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비스트라스와 크릭슈치우나스는 공식적으로 독립적인 시민으로 간주되었다.[21] 새 내각에는 4명의 장군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국제적 위기가 다가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리투아니아 정치인들은 단결하지 못하고 사소한 정치적 분쟁을 계속했다.[20]6. 3. 리투아니아의 경제적 타격
발트해로 향하는 유일한 항구였던 클라이페다를 상실한 것은 리투아니아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 리투아니아 대외 무역의 70%에서 80%가 클라이페다를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8] 클라이페다 지역은 리투아니아 영토의 약 5%에 불과했지만, 전체 산업의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중요한 지역이었다.[8] 또한, 리투아니아는 클라이페다 항구 기반 시설에 투자한 막대한 자본을 잃게 되었다.다음 표는 1939년 당시 클라이페다 지역의 산업 생산량을 나타낸다.[21]
산업 | 생산량 (000's 리타스) | 생산량 (전국 총 생산량의 %) |
---|---|---|
이탄 채취 | 13.3 | |
금속 및 기계 | 10.6 | |
화학 | 36.6 | |
가죽 및 모피 | 4.2 | |
섬유 | 44.2 | |
목재 | 53.9 | |
종이 및 인쇄 | 57.6 | |
식료품 | 21.5 | |
의류 | 6.6 | |
전기 및 가스 | 28.6 |
클라이페다 상실 이후, 유대인을 포함한 약 10,000명의 난민이 이 지역을 떠나 리투아니아 정부에 피난처와 지원을 요청했다.[9] 1939년 3월부터 4월까지 리투아니아의 은행 및 신용 기관에서는 전체 예금의 거의 20%가 인출되는 등 경제적 불안이 심화되었다.[21]
클라이페다를 잃은 리투아니아는 무역 등 여러 면에서 독일의 세력권으로 편입되었다. 1939년 말, 독일은 리투아니아 수출의 75%, 수입의 86%를 차지할 정도로 리투아니아 경제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9]
6. 4. 리투아니아의 소련 귀속
1939년 독일의 리투아니아 최후 통첩 이후 독일과 소련은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을 체결하여 동유럽을 각자의 세력권으로 나누었다. 처음에는 리투아니아가 독일에 할당되었으나,[9] 폴란드 침공 이후 독일-소련 국경 조약에 따라 소련의 세력권으로 변경되었다.[22] 1940년 6월, 소련은 리투아니아에 최후 통첩을 보냈고, 리투아니아는 이를 수락하여 소련에 합병되었다.[22]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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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zis in Memel Got 87% of the Ballo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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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huania is Warned by Memel Germ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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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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