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의 리투아니아 합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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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치의 리투아니아 합병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리투아니아가 나치 독일과 소련에 의해 점령당한 사건을 의미한다. 1939년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의 비밀 의정서에 따라 리투아니아는 소련의 영향권에 놓였고, 1940년 소련에 의해 점령되어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후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면서 리투아니아는 나치 독일의 점령하에 놓이게 되었고, 홀로코스트로 인해 유대인 대량 학살이 자행되었다. 리투아니아인들은 독일 점령에 저항하며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1944년 소련의 재점령으로 인해 상당한 인구 손실을 겪었다.
2. 배경
1939년, 소련과 나치 독일은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과 비밀 의정서를 통해 중동부 유럽을 분할하기로 합의했다. 초기에는 리투아니아가 독일과의 무역에 의존하여 독일의 영향권에 있었으나, 폴란드 침공 이후 양국은 리투아니아를 소련의 영향권으로 넘기는 비밀 조약을 맺었다.[3]
이후 소련은 리투아니아를 압박하여 군사 기지 설치를 대가로 빌뉴스 지역을 넘겨주는 조약을 맺게 했다. 이는 사실상 리투아니아의 독립을 훼손하는 것이었다.[4] 핀란드는 소련의 압력에 저항하여 겨울 전쟁을 벌였지만, 리투아니아는 결국 소련의 요구를 수용했다.
1940년, 소련은 리투아니아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친소 정부를 세우라는 최후통첩을 보냈고, 리투아니아는 이를 수용했다.[8] 이후 소련은 선거를 조작하여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수립하고 리투아니아가 자발적으로 소련에 합병되었다고 선전했다.[9]
합병 직후, 소련은 리투아니아 사회를 소련식으로 바꾸는 정책을 시행했다. 리투아니아 공산당을 제외한 모든 정치, 문화, 종교 단체를 폐쇄하고,[10] 은행, 대규모 부동산, 기업들을 국유화했다.[11] 또한 토지를 국유화하고 농민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여 불만을 야기했다.[11]
소련은 정치적 반대자들을 탄압하고, 많은 사람들을 '인민의 적'으로 규정하여 체포하거나 시베리아로 추방했다.[11] 붉은 군대 철수 과정에서 일부 정치범들이 학살되기도 했다.
2. 1. 독소 불가침 조약과 리투아니아
1939년 8월, 소련과 나치 독일은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과 중동부 유럽을 세력권에 두는 비밀 의정서를 체결하였다. 리투아니아는 초기에 독일 무역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의 세력권으로 편성되었다. 당시 독일은 리투아니아 수출의 75%, 수입의 86%를 차지할 정도였다.[1] 독일은 영향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리투아니아에 독일-리투아니아 군사 동맹을 제안하고 빌뉴스 지역 반환을 약속했으나, 리투아니아는 중립 정책을 고수했다.[2]
1939년 9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 이후, 독일은 소련 세력권 하에 있던 루블린 주와 동부 바르샤바 주를 점령했다. 이에 대한 보상으로 독일과 소련은 국경 및 우호 조약에 대한 비밀 부록을 작성하여 리투아니아를 소련의 영향권으로 넘겼다.[3] 이는 소련이 1940년 6월 15일 리투아니아를 점령하고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설립하는 근거가 되었다.
독일-소련 우호 조약 직후, 소련은 리투아니아에게 소련-리투아니아 상호지원조약 체결을 강요했다. 이 조약으로 리투아니아는 5개의 소련 군사기지(총 20,000명의 군인) 설치를 허용하는 대신 빌뉴스 지역(리투아니아의 역사적 수도인 빌뉴스 포함)에서 약 6880km2의 영토를 얻었다.[3] 이 영토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전쟁 이후 양국 간 분쟁 지역이었으며, 1939년 9월 소련의 폴란드 침공 이후 소련이 점령했던 곳이다. 그러나 ''뉴욕 타임스''는 이 조약을 "사실상 독립의 포기"로 묘사했다.[4]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핀란드에게도 유사한 조약이 제안되었으나, 핀란드는 유일하게 거부하여 겨울 전쟁이 발발했다.[5] 겨울 전쟁은 소련의 리투아니아 점령을 지연시켰고,[6] 소련은 리투아니아 국내 사정에 개입하지 않고 러시아 군인들은 기지에서 훈련만 하고 있었다.[7] 겨울 전쟁이 3월에 종료되고 독일이 프랑스 전선에서 빠르게 진군하자, 소련은 리투아니아인들이 소련군을 납치한다는 비난을 격화시켰다. 리투아니아 정부의 협상 노력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1940년 6월 14일 리투아니아에 최후통첩을 보냈다.[8] 리투아니아는 최후통첩을 수용했고, 소련군은 6월 15일 주요 도시들을 점령했다. 다음 날에는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에도 동일한 최후통첩이 전달되었다. 소련은 점령을 합법화하기 위해 선거를 조작하여 리투아니아 소련 사회주의 공화국 성립을 선언했다.[9]
2. 2. 소련의 리투아니아 점령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으로 리투아니아는 소련의 영향권에 들어갔다. 1939년 소련은 리투아니아에게 상호지원조약을 강요하여 군사기지를 설치하는 대신 빌뉴스 지역을 주었다. 이 조약은 사실상 리투아니아의 독립을 포기하는 것이었다.[4] 핀란드는 이와 같은 조약을 거부하여 겨울 전쟁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소련의 리투아니아 점령이 지연되었다.[6]
1940년 6월, 소련은 리투아니아에 최후통첩을 보내 군대를 주둔시키고 친소 정부를 수립할 것을 요구했다.[8] 리투아니아는 이를 수용했고, 소련군은 주요 도시를 점령했다. 이후 소련은 선거를 조작하여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수립을 선언하고, 리투아니아가 자발적으로 소련에 가입했다는 선전을 펼쳤다.[9]
합병 후, 소련은 소련화 정책을 시행했다. 모든 정치, 문화, 종교 단체가 폐쇄되고 리투아니아 공산당만 남았다.[10] 은행, 대규모 부동산, 기업들이 국유화되었고,[11] 생산 감소와 상품 부족 문제가 발생했다.[12] 토지 국유화와 과도한 세금 부과로 농민들의 불만이 커졌다.[11] 리투아니아 리타는 가치가 하락했고, 1941년 3월 사용이 중단되었다.[11]
소련은 인민 의회 선거를 앞두고 정치인들을 체포하고, '인민의 적'으로 간주된 사람들을 수감했다.[11] 1941년 6월에는 17,000명의 리투아니아인이 시베리아로 추방되었고,[11][13] 철수하는 붉은 군대는 일부 정치범들을 학살했다.
3. 독일 침공과 리투아니아 반란
1941년 6월 22일,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영토는 나치 독일의 북부 집단군과 중부 집단군에 의해 공격받았다. 북부 집단군은 리투아니아 북서쪽을, 중부 집단군은 빌뉴스 지방 대부분을 침공했다. 루프트바페는 리투아니아 도시들에 공습을 가해 약 4,000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고,[11] 대부분의 소련 항공기는 지상에서 파괴되었다. 독일군은 빠르게 전진하며 산발적인 소련군의 저항만을 받았고, 리투아니아인들은 독립이나 자치권 회복을 기대하며 독일군을 지원했다.
리투아니아인들은 소련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자발적으로 조직되어 철도, 다리, 통신 장비, 식량 및 장비 창고 등 전략 시설물들을 통제하고 소련의 사보타주로부터 보호했다. 코나스 지방은 리투아니아 활동가 전선(LAF)에 의해 점령되었다. 6월 23일, 독립 운동가들은 리투아니아 임시 정부를 수립했다. 빌뉴스 지방은 붉은 군대에서 탈영한 리투아니아 독립군 병사들로 구성된 제29 리투아니아 군단에 의해 점령되었다.
6월 23일, 라세이나이 전투가 시작되었고, 소련군은 전차를 동원하여 반격했으나 큰 피해를 입었다.[11] 6월 24일, 독일군은 전투 없이 코나스와 빌뉴스에 진입했다.[11] 독일군은 일주일 만에 리투아니아 전역을 점령했지만, 3,362명의 사상자를 냈다.[11]
3. 1. 리투아니아의 독립 선언과 좌절
1941년 6월 22일,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영토는 북군과 중군에 의해 공격당했다. 북군은 리투아니아 북서쪽을 침공했고, 중군은 대부분 빌뉴스 지방을 침공했다. 첫 공격은 루프트바페가 리투아니아 도시들에 가했으며, 약 4,000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11] 대부분의 러시아 항공기들은 지상에서 파괴되었다. 독일군은 신속하게 전진하여 소련으로부터 산발적인 저항만을 받았으며, 리투아니아인들은 독립이나 자치권 회복을 기대하며 독일군을 지원했다. 리투아니아인들은 독일군을 해방군으로 보았고, 독일이 자주국을 다시 설립해주거나 적어도 자치권을 회복시켜줄 것이라고 믿었다.
리투아니아인들은 소련에 대항하여 독립을 주장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많은 집단들이 자발적으로 조직되어 철도, 다리, 통신 장비, 식품 및 장비 창고 등 전략적인 시설물을 통제하고 소련의 잠재적인 사보타주로부터 보호했다. 코나스 지방은 리투아니아 활동가 전선(LAF)에 의해 점령되었다. LAF 지도자 카지스 스키르파는 적어도 1941년 3월 이후부터 반란을 준비하고 있었다. 독립 운동가들은 리투아니아 독립을 선포하고 6월 23일에 리투아니아 임시 정부를 수립했다. 빌뉴스 지방은 붉은 군대에서 탈영한 리투아니아 독립군 병사들인 29 리투아니아 군단의 병사들에 의해 점령되었다.
라세이나이 전투는 6월 23일에 시작되었으며, 소련이 전차를 강화하여 반격을 시도했으나 리투아니아 제27군단에 의해 크게 패했다.[11] 이 전투에는 약 16,000 ~ 30,000명이 참여했으며, 약 600명의 리투아니아인과 5,000명의 소련인이 희생되었다고 추정된다. 6월 24일에는 독일군이 전투 없이 코나스와 빌뉴스 지역에 진입했다.[11] 독일군은 일주일 이내에 3,362명의 사상자를 기록했지만, 결국 리투아니아 전체 영토를 점령했다.[11]
4. 독일의 점령
전쟁 초기, 독일 군사 당국은 리투아니아인들이 자체 행정 기관을 설립하는 것을 허용하고 민간 문제들을 맡겼다. 코나스 지역의 임시 정부는 리투아니아 독립을 선언하고 소련 정권의 피해 복구를 시도했으나, 정책은 대개 반소련 및 반유대주의적이었다. 이들은 리투아니아 군 재건을 위해 Tautinio Darbo Apsaugos Batalionas(TDA)라는 자원군을 조직했으나, 이 부대는 곧 독일군에 의해 제9요새에서 리투아니아 유대인 대량 학살에 이용되었다.[1]
그러나 독일은 리투아니아 임시 정부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7월 말 자체 정부인 동방 국가판무관부(Reichskommissariat Ostland)를 출범시켰다. 동방 국가판무관부는 네 개의 일반 지구(Generalbezirke)로 나뉘었고, 애드리안 폰 렌텔른이 리투아니아 총괄지구장이 되었다. 리투아니아 임시 정부는 8월 5일에 해체되었고, 일부 장관들은 지방 자치 단체의 일반 고문이 되었다. 독일은 현지 행정에 충분한 인력이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지방 사무소는 리투아니아인들이 이끌었다.[1] 정책 결정은 독일인들이 했으나, 정책 실행은 리투아니아인들이 했다. 리투아니아 일반 고문들은 독일의 부정적 결정에 대한 책임을 돌리기 위한 허수아비와 같았다. 세 명의 고문은 수개월 내에 사퇴했고, 다른 네 명은 독일 정책에 항의하다 슈트호프 강제 수용소로 추방당했다.[1] 리투아니아 지방 자치는 독일의 무장친위대 부대 편성, 강제 노동자 징집 등의 계획을 저해하기도 했다.[1]
4. 1. 독일의 행정 및 통치
전쟁 초기 몇 일 동안, 지역 안전에 주된 관심을 둔 독일 군사 당국은 리투아니아인들이 자체 행정 기관을 설립하려는 시도를 허용하고 여러 민간 문제들을 그들에게 맡겼다. 코나스 지역의 임시 정부는 리투아니아의 독립 선언을 시도하고 1년 동안 소련 정권에 의해 받은 피해를 복구하려고 했다. 임시 정부는 6주 동안 약 100개의 법과 조례를 발표했으나, 대부분 시행되지 못했다. 이러한 정책은 대개 반소련과 반유대주의로 설명될 수 있다. 정부는 리투아니아 군을 재건하기 위한 기초로 Tautinio Darbo Apsaugos Batalionas(TDA)라고 불리는 자원군을 조직했으나, 이 보병대는 곧 독일 3특수작전특공대와 Rollkommando Hamann과 같은 부대에 의해 제9요새에서 리투아니아 유대인 대거 학살에 사용되었다.[1] 그 동안 알기르다스 클리메이티스가 이끄는 공군 부대는 도시와 교외를 휩쓸며 약탈행위를 벌였다.[1]그러나 실제로 독일은 리투아니아 정부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7월 말에 그들의 자체 정부를 출범했다. 이 정부는 Ostland라 불리는 동방 국방판무관부(Reichskommissariat Ostland)의 일부로 구성되었고, 이 지역은 네 개의 일반 지구(Generalbezirke)로 나뉘었다.[1] 애드리안 폰 렌텔른은 리투아니아의 총괄지구장이 되었고, 관련 정부 기능을 도맡았다.[1] 임시 정부는 8월 5일에 해체되었고, 일부 장관들은 지방 자치 단체의 일반 고문이 되기도 했다.[1] 독일은 현지 행정에 충분한 인력을 보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지방 사무소들은 리투아니아인들이 이끌었다.[1] 정책 결정은 고위 계급의 독일인들이 했으나, 정책 실행 과정은 하위 계급의 리투아니아인들에 의해 이뤄졌다.[1] 리투아니아의 일반 고문들은 독일인들이 부정적인 결정을 내릴 시, 그 책임을 돌리기 위한 하나의 허수아비와도 같았다.[1] 세 명의 고문은 수개월 내에 사퇴하였고, 다른 네 명은 독일의 몇몇 정책에 항의하자 슈트호프 집중 수용소로 추방당했다.[1] 전반적으로 리투아니아의 지방 자치 단체는 꽤나 발전된 상태였기 때문에, 독일의 여러 계획을 방해 및 저해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1] 이들은 독일이 무장친위대 부대를 편성하거나 강제 노동자를 징집하는 등의 계획을 저지하기도 했다.[1]
4. 2. 홀로코스트
전쟁 초기, 독일 군사 당국은 리투아니아인들이 자체 행정 기관을 설립하는 것을 허용하고 민간 문제들을 맡겼다. 코나스 지역의 임시 정부는 독립을 선언하고 소련 정권의 피해 복구를 시도했다. 임시 정부는 6주 동안 약 100개의 법과 조례를 발표했으나, 대부분 시행되지 못했다. 이러한 정책은 대개 반소련 및 반유대주의적이었다. 정부는 리투아니아 군 재건을 위해 Tautinio Darbo Apsaugos Batalionas(TDA)라는 자원군을 조직했으나, 이 부대는 곧 독일 3특수작전특공대 등에 의해 제9요새에서 리투아니아 유대인 대량 학살에 이용되었다. 알기르다스 클리메이티스가 이끄는 부대는 도시와 교외에서 약탈행위를 벌였다.
독일은 리투아니아 정부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7월 말 자체 정부를 출범시켰다. 이 정부는 동방 국방판무관부(Reichskommissariat Ostland)의 일부였고, 네 개의 일반 지구(Generalbezirke)로 나뉘었다. 애드리안 폰 렌텔른은 리투아니아 총괄지구장이 되었고, 정부 기능을 도맡았다. 임시 정부는 8월 5일에 해체되었고, 일부 장관들은 지방 자치 단체의 일반 고문이 되었다. 독일은 현지 행정에 충분한 인력이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지방 사무소는 리투아니아인들이 이끌었다. 정책 결정은 고위 독일인들이 했으나, 정책 실행은 하위 계급의 리투아니아인들이 했다. 리투아니아 일반 고문들은 독일의 부정적 결정에 대한 책임을 돌리기 위한 허수아비와 같았다. 세 명의 고문은 수개월 내에 사퇴했고, 다른 네 명은 독일 정책에 항의하다 슈트호프 집중 수용소로 추방당했다. 리투아니아 지방 자치는 독일의 무장친위대 부대 편성, 강제 노동자 징집 등의 계획을 저해하기도 했다.

4. 2. 1. 홀로코스트의 단계별 전개
홀로코스트 이전에 리투아니아에는 약 210,000명[15]~250,000명[16]의 유대인들이 거주했으며, 빌나 가온 시대 이전에도 유대인 신학, 철학 및 학문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리투아니아 내의 홀로코스트는 다음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대량 학살 (1941년 6월~12월)
- 게토 기간 (1942년~1943년 3월)
- '최종 청산' (1943년 4월~1944년 7월)

다른 나치 점령국들과는 달리, 리투아니아에서는 홀로코스트가 점진적으로 진행되지 않고 전쟁 초기부터 유대인 강제 추방이 시작되었다. 독일 특수작전특공대 A팀은 독일 국방군의 점령 하루 전에 인종 정화를 목적으로 리투아니아에 진입하였다.[17] 독일 측 문서에 따르면, 1941년 6월 25일-26일 사이에 약 1,500명의 유대인들이 리투아니아 파르티잔에 의해 제거되었고,[18] 많은 시나고그들이 불에 탔으며, 다음날 밤에는 유대인 2,300명이 살해당했다. 이러한 학살은 유대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모은 후 게토에 가두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1941년 12월 코너스 지역에서는 15,000명의 유대인이 잔존했고, 약 22,000명이 추방당했다.[17] 1941년 12월 1일까지, 120,000명이 넘는 리투아니아 유대인들이 학살당했다.

살아남은 약 43,000명의 유대인들은 여러 대도시에 밀집하여 거주하였고, 독일 군수산업에 도움이 되는 강제 노역을 당하였다. 1943년 6월 21일, 하인리히 힘러는 모든 게토를 청산하고 잔존한 유대인들을 유대인 집중 수용소로 보낼 것을 지시하였다. 빌뉴스 지방의 게토는 청산되었으나, 카우나스와 시아울리아이 지역의 게토는 수용소로 변모하여 1944년 7월까지 운영되었다.[19] 다른 유대인들은 스터트호프, 다하우, 아우슈비츠의 수용소에 보내졌다. 이후 약 2,000~3,000명의 리투아니아 유대인들이 이러한 강제 수용소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19] 더 많은 사람들은 개전 이전에 러시아 내륙으로 도피하거나, 게토를 탈출하여 유대인 파르티잔에 합류함으로써 생존할 수 있었다.
리투아니아 내의 유대인 말살률은 약 95~97%였으며, 이는 유럽에서 가장 높은 수치였다. 이는 당시 독일 당국에 대한 리투아니아인들의 적극적인 동참과 협력의 결과였다. 유대인들은 유대 볼셰비즘으로 인해 이전의 소련 정권에 대한 비난을 그대로 물려받았고, 과거 소련 부대들의 입성을 환영한 죄목으로 리투아니아인들에 의해 비난받고 있었다. 나치의 이러한 표적 대상 선전 활동은, 리투아니아인들의 반소련 감정을 이용하고, 기존의 전통적인 반유대주의를 증폭시켰다.
4. 2. 2. 리투아니아인들의 협력과 책임
홀로코스트 이전 리투아니아에는 약 210,000명[15]에서 250,000명[16]의 유대인이 거주했으며, 빌나 가온 시대 이전부터 유대인 신학, 철학 및 학문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그러나 리투아니아 내 유대인 말살률은 유럽에서 가장 높은 95-97%에 달했는데, 이는 독일 당국에 대한 리투아니아인들의 적극적인 협력 때문이었다.[20] 유대인들은 유대 볼셰비즘으로 인해 이전 소련 정권에 대한 비난을 받았고, 소련군을 환영했다는 이유로 리투아니아인들에게 비난받았다. 나치는 이러한 점을 이용하여 반소련 감정을 부추기고, 전통적인 반유대주의를 증폭시켰다.
독일 점령 초기부터 리투아니아인들은 나치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여러 단체들을 조직했다.[20]
단체명 | 규모 | 주요 활동 및 역할 |
---|---|---|
리투아니아 보조 경찰대대 | 26개 대대, 12,000~13,000명 | 나치 특수작전특공대와 협력하여 대량 학살에 가담, 약 78,000명의 유대인 학살에 관여[17] |
5개 대대, 2,500명 | 많은 부대원들이 무장친위대에 가입 (40%) | |
리투아니아 방위군 | 10,000~12,000명 | |
자위 조직 | 3,000명 | |
조국 수호 파견대 | 6,000명 |
특히 10개의 리투아니아 경찰대대는 나치의 특수작전특공대와 협업하여 대량 학살에 가담했으며, 약 78,000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7] 리투아니아 공병대대의 많은 부대원들은 무장친위대 가입을 권유받았고, 실제로 40%가 가입했다. 리투아니아 국가 단체가 무장친위대에서 활동한 적은 없지만, 개인적으로 활동한 자들은 많았다.
4. 3. 리투아니아인들의 나치 협력
전쟁 초기 며칠 동안, 독일 군사 당국은 리투아니아인들이 자체 행정 기관을 설립하려는 시도를 허용하고 여러 민간 문제들을 그들에게 맡겼다. 코나스 지역의 임시 정부는 리투아니아의 독립 선언을 시도하고 1년 동안 소련 정권에 의해 받은 피해를 복구하려고 했다. 임시 정부는 6주 동안 약 100개의 법과 조례를 발표했으나, 대부분 시행되지 못했다. 이러한 정책은 대개 반소련과 반유대주의로 설명될 수 있다. 정부는 리투아니아 군을 재건하기 위한 기초로 Tautinio Darbo Apsaugos Batalionas(TDA)라고 불리는 자원군을 조직했으나, 이 보병대는 곧 독일 3특수작전특공대와 Rollkommando Hamann과 같은 부대에 의해 제9요새에서 리투아니아 유대인 대거 학살에 사용되었다.[20] 그동안 알기르다스 클리메이티스가 이끄는 공군 부대는 도시와 교외를 휩쓸며 약탈행위를 벌였다.그러나 실제로 독일은 리투아니아 정부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7월 말에 그들의 자체 정부를 출범했다. 이 정부는 동방 국방판무관부(Reichskommissariat Ostland)의 일부로 구성되었고, 이 지역은 네 개의 일반 지구(Generalbezirke)로 나뉘었다. 애드리안 폰 렌텔른은 리투아니아의 총괄지구장이 되었고, 관련 정부 기능을 도맡았다. 임시 정부는 8월 5일에 해체되었고, 일부 장관들은 지방 자치 단체의 일반 고문이 되기도 했다. 독일은 현지 행정에 충분한 인력을 보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지방 사무소들은 리투아니아인들이 이끌었다. 정책 결정은 고위 계급의 독일인들이 했으나, 정책 실행 과정은 하위 계급의 리투아니아인들에 의해 이뤄졌다. 리투아니아의 일반 고문들은 독일인들이 부정적인 결정을 내릴 시, 그 책임을 돌리기 위한 하나의 허수아비와도 같았다. 세 명의 고문은 수개월 내에 사퇴하였고, 다른 네 명은 독일의 몇몇 정책에 항의하자 슈트호프 집중 수용소로 추방당했다. 전반적으로 리투아니아의 지방 자치 단체는 꽤나 발전된 상태였기 때문에, 독일의 여러 계획을 방해 및 저해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이들은 독일이 무장친위대 부대를 편성하거나 강제 노동자를 징집하는 등의 계획을 저지하기도 했다.[20]
리투아니아인들은 독일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몇몇 단체들을 조직했다.[20]
단체명 | 규모 |
---|---|
리투아니아 보조 경찰대대 | 26개 대대, 12,000~13,000명 |
리투아니아 공병대대 | 5개 대대, 2,500명 |
리투아니아 방위군 | 10,000~12,000명 |
자위 조직 | 3,000명 |
조국 수호 파견대 | 6,000명 |
나치의 특수작전특공대와 협업한 10개의 리투아니아 경찰대대들은 대량 학살에 가담했으며, 약 78,000명의 유대인들을 추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7]
리투아니아 공병대대의 많은 부대원들이 무장친위대 가입을 권유받았으며, 실제로 40%의 부대원들이 가입하기도 했다. 비록 어떠한 리투아니아 국가 단체도 무장친위대 하에서 활동한 적은 없으나, 개인적으로 활동한 자들은 매우 많았다.
5. 리투아니아의 저항
리투아니아 내 저항 운동은 폴란드계, 소련계, 유대계, 그리고 리투아니아 민족주의 세력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들 저항 세력은 각자의 한계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1941년 나치 침공 이후, 폴란드계와 소련계 파르티잔은 즉각적인 저항 활동을 시작했다.[21] 유대인 파르티잔 역시 1943년 빌뉴스 게토 봉기를 시작으로 저항에 참여했다.[22]
1943년에는 여러 지하 정치 그룹이 통합되어 리투아니아 해방 최고 위원회(VLIK)를 결성했다.[23] 이들은 해외 지원을 받으며 저항 운동을 이어갔다.[23][24]
같은 해, 나치는 리투아니아인으로 구성된 무장친위대 사단을 조직하려 했으나, 광범위한 저항과 보이콧으로 실패했다. 1944년 리투아니아 지역 방위군이 조직되었지만, 나치의 명령을 거부하여 해산되었다.[25][12][26]
5. 1. 폴란드계 저항 운동
리투아니아에서 발생한 대부분의 나치 반군 세력은 폴란드 및 소련의 파르티잔 단체에서 시작되었다. 이 두 조직은 모두 1941년 나치의 침공 이후 즉각적으로 독일군에 대한 사보타주 및 게릴라 작전을 시작했다. 리투아니아에서 가장 중요한 폴란드 반군 조직은 "홈 아미"(Armia Krajowa)였다. 빌뉴스 지역의 폴란드 지휘관은 알렉산더 크지샤노프스키였다. 1944년 7월, 폴란드 홈 아미는 "템페스트 작전"의 일환으로 "오스트라 브라마 작전"을 개시하여 빌뉴스 도시를 되찾으려 시도했다.[22]당시 폴란드인과 리투아니아인 간의 관계는 좋지 못했는데, 빌뉴스 지역을 둘러싼 전쟁 이전의 긴장은 폴란드인과 리투아니아인 간의 약한 수준의 갈등으로 이어졌다.[27] 나치 후원의 리투아니아 부대 내에서 리투아니아 비밀 경찰들이 활동했고,[27] 이 지역에서 폴란드인들을 억압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1943년 가을, 아르미아 크라요바는 리투아니아 부대에 대한 보복 작전을 개시했으며, 1944년 상반기에 리투아니아 경찰들과 다른 협력자들을 수백 명 죽였다. 이러한 갈등은 1944년 6월 글린치스키(Glinciszki)와 뒤빙키(Dubinki)에서 수많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민간인 간의 대학살로 이어졌다.
5. 2. 소련계 및 유대계 저항 운동
리투아니아에서 발생한 대부분의 나치 반군세력은 폴란드 및 소련의 파르티잔 단체에서 시작되었다. 두 조직 모두 1941년 나치의 침공 이후 즉각적으로 독일군에 대한 사보타주 및 게릴라 작전을 시작했다. 리투아니아에서 가장 중요한 폴란드 반군 조직은 "홈 아미"(Armia Krajowa)였다. 빌뉴스 지역의 폴란드 지휘관은 알렉산더 크지샤노프스키였다.리투아니아에서의 소련 파르티잔 활동 일부는 안타나스 스니에치쿠스가 이끄는 리투아니아 파르티잔 운동 지휘부가, 나머지 일부는 소련 파르티잔 운동 중앙 지휘부가 부분적으로 편성했다.[21]
리투아니아의 유대인 파르티잔들도 나치의 점령에 대항하여 싸웠다. 1943년 9월, 아바 코브너가 이끄는 유대인 파르티잔들은 빌뉴스 게토에서 반란을 일으키려 시도했으며, 이후 나치 침략에 대한 사보타주 및 게릴라 작전에 동참했다.[22]
5. 3. 리투아니아 민족주의 저항 운동
1941년 나치의 침공 이후 리투아니아에서는 폴란드 및 소련의 파르티잔 단체를 중심으로 나치에 저항하는 세력이 등장했다. 이들은 독일군을 상대로 사보타주 및 게릴라 작전을 펼쳤다. 리투아니아에서 가장 중요한 폴란드 저항 조직은 "홈 아미"(Armia Krajowa)였으며, 빌뉴스 지역의 폴란드 지휘관은 알렉산더 크지샤노프스키였다.[21] 소련 파르티잔 활동은 안타나스 스니에치쿠스가 이끄는 리투아니아 파르티잔 운동 지휘부와 소련 파르티잔 운동 중앙 지휘부가 주도했다.[21] 아바 코브너가 이끄는 유대인 파르티잔들도 나치 점령에 맞서 싸웠으며, 1943년 9월 빌뉴스 게토에서 반란을 시도하기도 했다.[22]1943년에는 여러 지하 정치 그룹이 연합하여 "Vyriausias Lietuvos islaisvinimo komitetas" (VLIK, 리투아니아 해방 최고 위원회)를 결성했다.[23] VLIK는 주로 리투아니아 유대인 이민자들 사이에서 활동하며 서방 국가들과 연락을 맺고 리투아니아 내 저항 작전을 지원받았다.[23][24]
같은 해, 나치는 현지 인구로부터 무장친위대 사단을 조직하려 했으나, 저항 세력의 광범위한 보이콧으로 인해 실패했다. 1944년 리투아니아 지역 방위대가 조직되었지만, 나치의 명령을 따르지 않아 해산되었다.[25][12][26]
한편, 빌뉴스 지역을 둘러싼 갈등으로 폴란드인과 리투아니아인 간의 관계는 악화되었다.[27] 나치 후원의 리투아니아 비밀경찰은 이 지역에서 폴란드인들을 억압했고,[27] 이에 폴란드 저항군은 1943년 가을부터 보복 작전을 개시하여 1944년 상반기까지 수백 명의 리투아니아 경찰과 협력자들을 살해했다. 이러한 갈등은 1944년 6월 글린치스키(Glinciszki)와 뒤빙키(Dubinki)에서 양측 민간인 간의 대학살로 이어졌다.
6. 1944년 소련의 재점령
소련은 1944년 여름부터 발트 공세의 일환으로 리투아니아를 재점령했다. 이 작전은 독일군을 물리치고 "소련 발트 민족들을 해방"[28]하기 위한 이중 군사-정치 작전으로 구성되었다.[5]
7. 인구 손실
제2차 세계 대전과 전후 10년 동안 리투아니아는 상당한 인구 손실을 겪었다. 역사학자들은 정확하고 신뢰할 수 있는 데이터 부족으로 인해 인구 손실과 변화를 수치화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따라서 연구자 간에 조사한 인구 손실 수치에는 차이가 존재한다. 1923년 인구 조사(2,028,971명)[3]와 1959년 소련 인구 조사(2,711,400명)[29] 사이에는 리투아니아 인구 데이터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러 학자들은 1940년부터 1953년까지 리투아니아의 인구 감소가 100만 명 이상(전쟁 전 인구의 1/3 이상)이라는 데 대체로 동의한다.[11][29][30][31] 이 수치는 홀로코스트 희생자, 소련 억압 희생자, 난민, 송환민 등으로 구성된다.
기간 | 근거 | |||
---|---|---|---|---|
Vaitiekunas (2006)[29] | Truska (2005)[11] | Damušis (1990)[30] | Zunde (1964)[31] | |
첫 번째 소련 점령 (1940년 6월 ~ 1941년 6월) | 161,000 | 76,000 | 135,600 | 93,200 |
나치 점령 (1941년 6월 ~ 1945년 1월) | 464,600 | 504,000 | 330,000 | 373,800 |
⇒ 홀로코스트로 인한 사망자 | 200,000 | 200,000 | 165,000 | 170,000 |
⇒ 클라이페다 지역에서의 전쟁 난민 | 150,000 | 140,000 | 120,000 | 105,000 |
⇒ 리투아니아에서 온 전쟁 난민 | 60,000 | 64,000 | 60,000 | |
⇒ 기타 | 54,600 | 100,000 | 45,000 | 38,800 |
두 번째 소련 점령 (1945년 1월 ~ 1953년) | 530,000 | 486,000 | 656,800 | 530,000 |
7. 1. 전쟁과 학살로 인한 사망자
제2차 세계 대전과 그 후 10년 동안 리투아니아는 상당한 인구 손실을 겪었다. 역사학자들은 인구 손실과 변화를 정확하게 측정하려 했으나, 신뢰할 수 있는 데이터가 부족하여 어려움을 겪었다. 연구자마다 인구 손실 수치에 차이가 있지만, 1940년부터 1953년까지 리투아니아 인구는 100만 명 이상, 즉 전쟁 전 인구의 3분의 1 이상 감소했다는 데에는 대체로 동의한다.[11][29][30][31] 이 수치에는 홀로코스트 희생자, 소련의 억압으로 인한 희생자, 전쟁 난민 등이 포함된다. 리투아니아의 인구는 1923년 인구 조사(2,028,971명)[3]와 소련의 1959년 인구 조사(2,711,400명)[29] 사이에 정확한 데이터가 존재하지 않는다.
7. 2. 전후 인구 변화
제2차 세계 대전과 그 후 10년 동안 리투아니아는 상당한 인구 손실을 겪었다. 역사학자들은 정확하고 신뢰할 수 있는 데이터 부족으로 인해 인구 손실과 변화를 수치화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1923년 인구 조사(2,028,971명)[3]와 1959년 소련 인구 조사(2,711,400명)[29] 사이에 리투아니아 인구 데이터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러 학자들은 1940년부터 1953년까지 리투아니아의 인구 감소가 100만 명 이상(전쟁 전 인구의 1/3 이상)이라는 데 대체로 동의한다.[11][29][30][31] 이 수치는 홀로코스트 희생자, 소련 억압 희생자, 난민, 송환민 등으로 구성된다.
기간 | 근거 | |||
---|---|---|---|---|
Vaitiekunas | Truska | Damušis | Zunde | |
첫번째 소련의 점령 | 161,000 | 76,000 | 135,600 | 93,200 |
나치의 점령 | 464,600 | 504,000 | 330,000 | 373,800 |
⇒ 홀로코스트로 인한 사망자 | 200,000 | 200,000 | 165,000 | 170,000 |
⇒ 클라이페다 지역에서의 전쟁 난민 | 150,000 | 140,000 | 120,000 | 105,000 |
⇒ 리투아니아에서 온 전쟁 난민 | 60,000 | 64,000 | 60,000 | |
⇒ 기타 | 54,600 | 100,000 | 45,000 | 38,800 |
두번째 소련의 점령 | 530,000 | 486,000 | 656,800 | 530,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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