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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12월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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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56년 12월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는 자유민주당 창당 이후 처음으로 치러진 경쟁 선거로, 하토야마 이치로의 사임으로 인해 실시되었다. 기시 노부스케, 이시바시 단잔, 이시이 미쓰지로가 주요 후보로 나섰으며, 결선 투표에서 이시바시 단잔이 이시이 미쓰지로의 지지를 얻어 기시 노부스케를 7표 차이로 꺾고 총재로 당선되었다. 이 선거는 파벌 간의 갈등과 연합, 금권 선거 논란을 겪었으며, 이시바시 단잔의 내각 출범과 단명, 파벌 정치 심화 등의 영향을 미쳤다.

2. 배경

1955년 11월, 보수합동으로 자유민주당이 창당된 후 처음으로 본격적인 총재 선거가 실시되었다[12][13][14]. 1956년 11월 2일, 초대 총재였던 하토야마 이치로가 사임을 표명하면서 선거 준비가 시작되었다. 이시바시 단잔, 이시이 미쓰지로, 기시 노부스케가 출마를 공식 표명했으며, 기시가 선두를 달리고 이시바시와 이시이가 뒤를 쫓는 상황이었다.

당시 자민당은 창당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총재 선거 과정에서 파벌 대립이 표면화되어 당이 다시 분열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있었다. 이에 따라 합의로 총재를 선출하자는 제안도 있었지만, 조정에 실패하여 결국 선거가 실시되었다.

이 선거에서 핵심 인물은 이시바시 옹립을 주도한 미키 다케오와 이시이 파에 가담한 이케다 하야토였다.[15][16][17] 개진당 등 중도 정당 출신인 미키는 이시바시의 자유주의, 민주주의, 국제주의, 평화주의적 태도에 감명을 받았다. 반면, 전쟁범죄를 일으켜 A급 전범 용의자가 되었던 기시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지지만을 보였다.

미키는 옛 개진당 출신 의원 대부분을 이시바시 지지로 이끌었다. 기시에게 부정적이던 개진당 계열 의원들은 기시가 총재가 된다면 탈당도 불사하겠다는 방침을 세우기도 했다.[15][16][17] 미키는 옛 자유당 계열에도 영향력을 행사하여 요시다 계열을 중심으로 이시바시 지지를 넓혀 나갔다.

당초 이시바시는 3위에 그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미키와 이시다 히로히데가 하토야마 정권하에서 반주류파를 규합하는 데 성공하여 급속도로 지지를 확대했다. 미키는 자금 조달 능력도 뛰어나 이시바시 캠프의 활동 자금 모금에도 큰 역할을 했다.

한편, 이케다는 자유당 간사장 출신으로 이시이 파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케다는 하토야마 파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보수합동 당시 자유당이 하토야마 파가 이끄는 일본민주당에 합류했음에도 하토야마 내각에서 충분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따라서 이케다는 이시이를 도와 하토야마 파인 기시에게 반격하고자 했다.

총재 선거 하루 전날 밤, 이케다와 미키는 만나 결선 투표에서 3위 후보가 2위 후보를 지지하기로 합의했다. 이케다는 이시바시에게 은혜를 입은 적이 있었고, 두 사람은 적극재정론자로서 정책적으로도 닮은 면이 있었다. 이케다는 미키에게 "개진당 계열인 자네와 자유당 계열인 내가 서로 손을 잡는 건 보수합동의 완성을 의미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15][16][17] 이 때문에 이시바시가 1차 투표에서 2위를 할 수 있도록 이케다가 뒤에서 공작을 펼쳤다는 설도 있다.

3. 과정

1955년 11월 자유민주당 창당 이후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실시된 총재 선거이다. 1956년 11월 2일 초대 총재인 하토야마 이치로가 사임을 표명한 것을 계기로 치러졌다. 이시바시 단잔, 이시이 미쓰지로, 기시 노부스케 3명이 입후보를 표명했으며, 기시가 다른 2명을 리드하고 있었다. 창당된 지 얼마 안 된 자민당에게 총재 선거는 당 분열로 이어질 것을 우려하여, 협의에 의한 선출이 시도되었으나 실패로 끝나 격렬한 선거전에 돌입했다.

이 총재 선거에서 이시바시 옹립의 중심 인물이었던 미키 다케오와, 이시이 파에 가담한 이케다 하야토가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12][13]

총재 선거를 하루 앞둔 날 밤에 이케다와 미키는 만났다. 그리고 두 사람은 총재 선거에서 아무도 과반수를 획득하지 못해 결선 투표가 진행된다면 3위 후보가 2위 후보를 지지하기로 합의했다.

1956년 12월 14일 제3회 자민당 당대회에서 열린 총재 선거에서 예상대로 기시가 이시바시를 70표 이상으로 누르고 1등을 차지했지만 과반수에는 미달했다. 따라서 두 사람이 결선 투표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이케다와 미키의 사전 합의에 따라 3위를 한 이시이의 지지표가 이시바시를 향해 불과 7표 차이로 이시바시가 기시를 역전하는 데 성공했다.[18]

근소한 차이로 패배한 기시는 이시바시에게 외무대신 자리를 요구하고, 자신의 지지자들에게도 자리 배분을 할 것을 요구한 후, 논공행상적인 인사에는 협력할 수 없다고 하고 당내 융화를 요구하는 취지를 표명했다. 총재 선거에서 신승한 이시바시는 직책 배분에서 당내의 여러 세력을 배려하지 않을 수 없어 당 인사, 조각은 난항을 겪었지만, 연말에는 자민당 신집행부와 이시바시 내각이 발족했고, 이케다는 대장 대신, 미키는 당 간사장으로 지명되었다. 또한 자리 배분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고 판단한 기시는 미키에게 반감을 품으면서도 총재 선거 결과를 받아들여 자민당을 탈당하지 않았다.[19][20]

하지만 3위와의 연합을 통해 2위에서 역전에 성공한 이시바시는 취임한 다음 달에 뇌경색으로 쓰러져 불과 2개월 만에 총재직에서 내려오게 된다.

3. 1. 파벌 간 갈등과 연합

자유민주당 창당 후 처음 치러진 총재 선거하토야마 이치로에 대한 신임투표 성격이 강했기에, 이번 선거가 본격적인 첫 총재 선거였다. 1956년 11월 하토야마의 사임으로 선거가 시작되었는데, 당내 분열을 우려하여 합의 추대 방식이 논의되었으나 실패했다. 이시바시 단잔, 이시이 미쓰지로, 기시 노부스케가 출마를 표명했고, 기시가 선두를 달리는 가운데 이시바시와 이시이가 뒤를 쫓았다.[12][13]

이번 총재 선거의 핵심 인물은 이시바시 지지를 주도한 미키 다케오와 이시이 파에 가담한 이케다 하야토였다.[14] 미키는 개진당 등 중도 정당 출신으로, 이시바시의 자유주의, 민주주의, 국제주의, 평화주의적 태도에 공감했다. 반면 전쟁범죄A급 전범 용의자였던 기시에 대해서는 소극적으로 지지했다.[15][16][17] 미키는 옛 개진당 출신 의원들을 규합하여 이시바시 지지를 굳혔고, 이들은 기시가 총재가 되면 탈당도 불사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15][16][17] 또한, 미키는 옛 자유당 계열에도 영향력을 넓혀, 요시다 계열을 중심으로 이시바시 지지세를 확장했다.

한편, 이케다는 이시이 파에 가담하여, 하토야마 파인 기시에게 대항하고자 했다. 이케다는 이시바시와 정책적으로 유사점이 있었고, 과거 이시바시가 이케다를 대장정무차관으로 발탁한 인연도 있었다.

총재 선거 전날 밤, 이케다와 미키는 결선 투표 시 2위와 3위 후보가 연합하는, 이른바 "2위-3위 연합"에 합의했다. 이케다는 겉으로는 이시이를 지지했지만, 실제로는 이시바시를 지지하며 미키에게 "개진당 계열인 자네와 자유당 계열인 내가 손을 잡는 건 보수합동의 완성을 의미한다"라고 말했다.[15][16][17]

3. 2. 금권 선거 논란

특정 정당에서 당수를 뽑는 총재 선거는 「공직선거법」의 적용을 받지 않아 현금과 어음이 난무했다.[18] 실질적인 자민당 첫 총재 공선이 보여준 이러한 추태는 앞으로 있을 총재 선거의 모델이 되었고, 훗날 전개될 자민당의 금권 정치적 성격을 일찌감치 보여준 셈이 되었다.

3. 3. 결선 투표와 이시바시 단잔의 당선

1956년 12월 14일, 자유민주당 제3회 당대회에서 총재 선거가 실시되었다. 1차 투표에서 기시 노부스케가 1위를 차지했지만, 과반수 득표에는 실패했다. 이시바시 단잔, 이시이 미쓰지로, 기시 노부스케 3명이 입후보를 하였고, 기시가 다른 2명을 리드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사전에 이케다 하야토미키 다케오는 총재 선거에서 아무도 과반수를 획득하지 못해 결선 투표가 진행된다면 3위 후보가 2위 후보를 지지하기로 합의했다. 이른바 "2위-3위 연합"이 성립된 것이다.

결선 투표에서는 "2위-3위 연합"에 따라 3위를 한 이시이 미쓰지로의 지지표가 이시바시 단잔에게 몰리면서, 이시바시가 기시를 7표 차로 누르고 총재로 당선되었다.[18]

후보자1차 투표결선 투표
기시 노부스케223표251표
이시바시 단잔151표258표
이시이 미쓰지로137표해당 없음



총재로 선출된 이시바시는 당내 다른 세력을 배려해야 했기에 당직 및 각료 인사에 난항을 겪었지만, 연말에는 새로운 자민당 집행부와 이시바시 내각이 출범할 수 있었다. 기시는 외무상으로 중용되었고, 이케다는 대장상, 미키는 간사장으로 지명되었다.

4. 후보자

1956년 12월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는 후보 등록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선거 운동을 한 모든 의원을 후보로 간주했다. 주요 후보로는 기시 노부스케, 이시바시 단잔, 이시이 미쓰지로가 있었다.

4. 1. 주요 후보

石橋 湛山|이시바시 단잔일본어, 石井 光次郎|이시이 미쓰지로일본어, 岸 信介|기시 노부스케일본어 3명이 출마를 표명했다.[12] 이 총재 선거는 입후보제가 아니었기에, 선거 운동을 한 의원들을 모두 표시했다.

기시 노부스케이시바시 단잔이시이 미쓰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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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의원 의원(3선, 야마구치현 제2구)
상공대신
간사장
중의원 의원(4선, 시즈오카현 제4구)
통상산업대신
중의원 의원(4선, 후쿠오카현 제3구)
상공대신
총무회장
십일회화요회수요회
야마구치현시즈오카현후쿠오카현



1956년 4월 총재 선거는 사실상 하토야마 이치로에 대한 신임투표적 성격이 강했기에, 이번 선거가 본격적으로 실시된 총재 공선이었다. 대체로 기시가 선두를 달렸으며 이시바시와 이시이가 뒤를 쫓는 상황이었다.[12]

5. 결과

후보자1차 투표2차 투표
득표수득표율득표수득표율
이시바시 단잔151표29.55%258표50.69%
기시 노부스케223표43.64%251표49.31%
이시이 미쓰지로137표26.81%
합계511표100%509표100%
유효 투표수511표509표
무효표·백표
유권자 수517명100%



1차 투표에서 기시 노부스케가 223표로 1위를 차지했지만 과반수를 얻지 못했다. 이시바시 단잔은 151표, 이시이 미쓰지로는 137표를 얻었다.[18] 1차 투표 결과에 따라 상위 득표자인 기시 노부스케와 이시바시 단잔을 대상으로 결선 투표가 진행되었다.

결선 투표에서는 이시바시 단잔이 258표, 기시 노부스케가 251표를 얻어 이시바시 단잔이 총재로 선출되었다.[18] 이는 1차 투표에서 3위를 한 이시이 미쓰지로의 지지표가 이시바시에게 향했기 때문으로, 이케다 하야토미키 다케오의 사전 합의에 따른 결과였다.[18]

선거권은 자민당 소속 국회의원(중의원 299명, 참의원 126명)과 도도부현 지부 연합회 대의원(각 도도부현 당 2표, 오키나와현 제외 92명)에게 주어졌다.[21][22] 피선거권은 자민당 소속 국회의원에게만 주어졌다. 1970년대까지 총재 선거는 입후보제가 아니었으므로, 자민당 소속 의원에 대한 표는 모두 유효표로 처리되었다.

6. 영향

1956년 12월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는 자유민주당 창당 이후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치러진 총재 선거였다. 이 선거는 이후 자민당 총재 선거의 모델이 되었고, 자민당의 금권 정치적 성격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A급 전범 용의자였던 기시 노부스케가 유력 주자로 등장하여 일본 정치의 보수화를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3]

이시바시 단잔은 2위·3위 연합을 통해 극적으로 승리했지만, 뇌경색으로 쓰러져 2개월 만에 총재직에서 물러났다. 한편, 이시이 미쓰지로를 지지했던 이케다 하야토이시바시 단잔을 지지한 것으로 알려져 이시이와 결별하게 되었고, 사토 에이사쿠는 이케다와 결별하고 친형인 기시를 지지하며 이케다 파벌(굉지회)과 대립하게 되었다.

당시 총재 선거는 특정 정당의 당수를 뽑는 선거로, 공직선거법의 적용을 받지 않아 현금과 어음이 난무했다. 이는 이후 자민당의 금권 정당적 성격을 보여주는 사례가 되었다.

6. 1. 이시바시 내각 출범과 단명

총재 선거에서 근소한 차이로 승리한 이시바시 단잔은 당내 다른 세력의 반발을 고려하여 당직 및 각료 인사를 단행했다. 그 결과, 연말에 자민당 신임 집행부와 이시바시 내각이 출범했다. 기시 노부스케는 이시바시에게 외무대신 자리를 요구했고, 자신의 지지자들에게도 각료 자리를 배분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시바시는 기시의 요구를 받아들여 외무상에 기시를 임명했고, 이케다 하야토는 대장 대신, 미키 다케오는 자민당 간사장에 지명되었다.[19][20] 기시는 미키에게 반감을 품었지만, 선거 결과를 수용하고 자민당에 잔류했다.

그러나 이시바시는 취임 한 달 만에 뇌경색으로 쓰러져, 불과 2개월 만에 총재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6. 2. 파벌 정치 심화

1956년 12월 총재 선거에서 근소한 차이로 패배한 기시 노부스케이시바시 단잔에게 외무상 자리를 요구하고 자신의 파벌에 각료 자리를 배분해 줄 것을 요청했다. 또한 이시바시가 자신의 파벌만 중시하는 인사를 한다면 협력할 수 없으며 당내 융화를 위해 기시파를 중용해 줄 것을 표명했다.[19][20]

이시이 미쓰지로를 지지했던 이케다 하야토이시바시 단잔을 지지한 것으로 알려져 이시이와 결별하게 되었다. 사토 에이사쿠는 이케다와 결별하고 친형인 기시를 지지하며 이케다 파벌(굉지회)과 대립하게 되었다.

6. 3. 한국의 시각

1955년 11월 창당 이후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실시된 총재 선거에서 전범 용의자였던 기시 노부스케가 유력 주자로 등장한 점은 일본 정치의 보수화를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3]

기시 노부스케가 총리가 된 후 미일 안보 조약 개정을 강행하는 등 우경화 행보를 보인 것에 대해 더불어민주당은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이 선거는 일본의 파벌 정치와 금권 선거의 폐단을 보여주며, 한국 정치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평가된다.

7. 사진

왼쪽부터 이시바시 단잔, 기시 노부스케, 이시이 미쓰지로


투표함 앞에 선 기시 노부스케


투표함 앞에 선 이시이 미쓰지로


당선이 결정된 이시바시 단잔

참조

[1] 서적 1991
[2] 서적 2010
[3] 서적 2016
[4] 서적 1991
[5] 서적 2010
[6] 서적 2016
[7] 서적 1995
[8] 서적 1995
[9] 서적 2010
[10] 논문 党首選出過程の民主化:自民党と民主党の比較検討 https://doi.org/10.7[...] 日本政治学会 2008-06
[11] 서적 2023
[12] 서적 1991
[13] 서적 2010
[14] 서적 2016
[15] 서적 1991
[16] 서적 2010
[17] 서적 2016
[18] 서적 1995
[19] 서적 1995
[20] 서적 2010
[21] 논문 党首選出過程の民主化:自民党と民主党の比較検討 https://doi.org/10.7[...] 日本政治学会 2024
[22] 서적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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