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2월 영국 총선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1974년 2월 영국 총선은 에드워드 히스 총리가 의회 해산을 건의하면서 치러진 선거로, 경제 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선거 결과, 노동당이 301석, 보수당이 297석을 얻었으며, 자유당이 14석을 확보했다. 보수당이 근소한 득표율 차이로 제1당이 되었지만, 노동당이 의석수에서 우위를 점해 해롤드 윌슨이 자유당의 협력을 얻어 소수 정부를 구성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974년 2월 - 조엘마 빌딩 화재
조엘마 빌딩 화재는 1974년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발생한 대형 화재로, 건물 구조적 문제와 미비한 방화 설비로 인해 227명의 사망자를 내고, 브라질 건축 방화 기준 개정의 계기가 되었다. - 1974년 영국 - 1974년 10월 영국 총선
1974년 10월 영국 총선은 소수 정부의 불안정으로 인해 다시 치러진 선거로, 노동당이 원내 1당을 유지하며 정권을 잡았으나 과반수 확보에는 실패했고, 경제난과 인플레이션이 쟁점이 되었으며 스코틀랜드 국민당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 1974년 영국 -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 1974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 1974는 룩셈부르크의 재정적 이유로 영국 브라이튼에서 BBC 주최로 개최되어 17개국이 참가, 스웨덴의 ABBA가 "워털루"로 우승했으며, 참가자들의 성공과 정치적, 사회적 사건들로 주목받았고 이탈리아에서는 방송 지연 논란이 있었다. - 1974년 선거 - 1974년 10월 영국 총선
1974년 10월 영국 총선은 소수 정부의 불안정으로 인해 다시 치러진 선거로, 노동당이 원내 1당을 유지하며 정권을 잡았으나 과반수 확보에는 실패했고, 경제난과 인플레이션이 쟁점이 되었으며 스코틀랜드 국민당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 1974년 선거 - 1974년 2월 영국 총선 결과
1974년 2월 영국 총선은 노동당이 런던, 스코틀랜드, 웨일스 등지에서 강세를 보였고, 웨일스에서는 22석을 얻어 압승했으며, 지역별로 보수당과 자유당이 우위를 점한 곳도 있었다.
1974년 2월 영국 총선 | |
---|---|
지도 | |
![]() | |
![]() | |
선거 정보 | |
선거 이름 | 1974년 2월 영국 총선 |
국가 | 영국 |
선거 유형 | 의회 |
선거일 | 1974년 2월 28일 |
이전 선거 | 1970년 영국 총선 |
이전 선거 연도 | 1970년 |
다음 선거 | 1974년 10월 영국 총선 |
다음 선거 연도 | 1974년 10월 |
선출 의석 | 635석 |
과반 의석 | 318석 |
투표율 | 78.8% (6.8%) |
주요 정당 | |
정당 | 노동당 |
![]() | |
당대표 | 해럴드 윌슨 |
당대표 취임일 | 1963년 2월 14일 |
당대표 선거구 | 하이턴 |
이전 선거 의석수 | 288석, 43.1% |
이전 의석 | 287석 |
획득 의석 | '301'석 |
의석 변화 | 14석 |
득표수 | 11,645,616표 |
득표율 | 37.2% |
득표율 변화 | 5.9% |
정당 | 보수당 |
![]() | |
당대표 | 에드워드 히스 |
당대표 취임일 | 1965년 7월 28일 |
당대표 선거구 | 시드컵 |
이전 선거 의석수 | 330석, 46.4% |
이전 의석 | 325석 |
획득 의석 | 297석 |
의석 변화 | 28석 |
득표수 | '11,872,180'표 |
득표율 | '37.9%' |
득표율 변화 | 8.5% |
정당 | 자유당 |
![]() | |
당대표 | 제러미 소프 |
당대표 취임일 | 1967년 1월 18일 |
당대표 선거구 | 북 데번 |
이전 선거 의석수 | 6석, 7.5% |
이전 의석 | 6석 |
획득 의석 | 14석 |
의석 변화 | 8석 |
득표수 | 6,059,519표 |
득표율 | 19.3% |
득표율 변화 | 11.8% |
총리 정보 | |
직책 | 총리 |
선거 전 총리 | 에드워드 히스 |
선거 전 총리 소속 정당 | 보수당 |
선거 후 총리 | 해럴드 윌슨 |
선거 후 총리 소속 정당 | 노동당 |
기타 정보 | |
의견 조사 | 1974년 영국 총선 여론 조사 |
유튜브 영상 | BBC Feb '74 Election coverage |
유튜브 참조 | YouTube - Election 1974 (February) - Part 1 |
BBC 참조 | Part 1, Election 74 |
2. 선거 배경
1974년 2월 총선은 에드워드 히스 수상이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게 의회 해산 및 총선 실시를 건의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영국은 경제적으로 여러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며, 언론에서는 이를 '경제위기 총선'이라고 칭하기도 했다.[16]
총선 시작 3일 후, 전국광부노조는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총파업에 돌입했다. 그러나 이전 파업에 비해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 큰 충돌은 없었다. 이로 인해 인플레이션 문제가 주요 의제로 떠올랐고, 소매물가지수가 크게 상승했다는 통계가 발표되었다.[16]
이후 영국 임금조정위원회의 조사 결과, 광부들의 임금 수준이 낮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보수당은 비난을 받았다. 또한 경상수지 적자가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면서 여당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아졌다.[17]
보수당 에녹 파웰 의원은 유럽 공동체 가입에 대한 정부 정책에 반대하며 노동당 지지를 호소했다. 영국산업연맹 사무총장 역시 1971년 산업관계법 폐지를 요구하면서 보수당은 더욱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17]
결국, 이 선거는 "이 나라를 통치하는 것은 누구인가. 노동조합인가, 아니면 선거로 뽑힌 정부인가"라는 슬로건으로 대표되며, 히스 수상의 노동조합 강경 노선에 대한 신임 투표 성격이 강하게 나타났다.[11]
2. 1. 경제 위기
1974년 2월 7일, 에드워드 히스 수상은 영연방 대회 참석차 뉴질랜드를 순방하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게 의회를 해산하고 2월 28일에 총선을 치를 것을 공식 건의하였다. 선거 당시 영국의 경제적 상황은 여러 악재를 겪고 있던 관계로, <더 선>이나 <데일리 미러> 등의 언론에서는 '경제위기 총선' (Crisis election)으로 칭하기도 하였다.[16]총선 개시로부터 3일 뒤인 2월 10일, 영국 전국광부노조는 예고했던 대로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총파업에 들어갔다. 하지만 세간의 이목이 집중됐던 2년 전의 파업보다는 저자세로 진행되어, 충돌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각 피켓라인마다 여섯 명의 시위자만 참가했을 뿐이었다. 짐 프라이어 전 의원은 이 당시 광부들이 "조용하고 얌전히 있는 것이 꼭 생쥐 (mice) 같았다"고 회고했다.[16] 선거기간 동안 영국 사회는 1주3일 전력소비원칙 (스리 데이 위크)[16]이 시행됨에 따라 TV 방송시간 역시 단축되었으나, 보수당 정권 측에서 선거운동 방송을 보장하기 위해 심야 시간대 방송 금지를 해제하였다. 광부 파업이 그다지 큰 규모로 진행되지 않으면서 인플레이션 문제가 선거 주요 의제로 떠오르게 되었다. 2월 15일에는 소매물가지수가 전년도 대비 20%의 폭등을 보였다는 통계가 발표되었다.[16]
2월 21일 영국 임금조정위원회는 광부 임금에 대한 조사보고서를 발표하였는데, 전국석탄위원회가 밝혀왔던 견해와는 달리 광부의 임금 수준이 여타 제조업 부문 노동자보다 적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는 보수당의 입장에 적잖은 타격을 입힌 것으로, 전국석탄위 측이 자체 임금체계를 스스로도 숙지하지 못하고 있으며, 애당초 파업할 필요도 없었던 것이 아니냐는 비난으로 이어졌다.[17] 나흘 뒤에 발표된 무역 현황에서는 경상수지 적자가 3.83억파운드를 기록, 관련 통계 집계 이후 사상 최고를 기록하면서 여당 측에 더더욱 큰 악재로 작용했다. 히스 총리는 이 소식과 관련해 '상황의 엄중함'을 고려하여 정권 재창출이 필요하다는 논리를 내세웠는데, 당시 노동당 예비내각 내무부 장관이었던 로이 젠킨스는 "결과가 악화되면 목소리에 더 힘이 실린다고 생각했나 보다"라고 비꼬기도 했다.[16]
선거운동 과정에서 예기치 못했던 동시에 제일 큰 여파를 몰고 왔던 사건은 소신 발언으로 유명했던 보수당의 에녹 파웰 의원의 행보였는데, 이미 당 공약에 반하여 재선 출마를 단념한 것으로 모자라 유럽 공동체 가입에 관한 현 정부의 정책이 올바르지 못하다며 표를 주지 말라고 호소하기까지 했다. 2월 23일 영국 버밍엄의 연설회에서 파웰 의원은 이번 선거운동의 핵심 의제란 영국이 "한 민주주의 국가로 남을 것이냐, 신 유럽 대국의 변방으로 편입될 것이냐"라고 밝혔다. 또 "나라의 법을 제정하고 세금을 걷을 (의회) 고유의 권한"을 박탈한 자들에게 반대하는 것이 국민으로서의 "국가적 의무"라고 발언했다.[16] 이 연설로 <더 선> 지는 "엎친 데 덮친 에녹" (Enoch puts the boot in)이란 헤드라인을 뽑기도 했다. 며칠 뒤 에녹 의원은 "브뤼셀 협약의 근본적인 재협상, 그리고 그 결과를 국민들에게 보고할 것을 약속하는 정당"이 승리하길 바란다고 밝혔다. 이는 곧 노동당의 공약집에서 명시된 내용이기도 했다.[16]
2월 26일에는 캠벨 애덤슨 영국산업연맹 (CBI) 사무총장이 "고용주와 노조 관계를 국가 차원에서 망쳤다"면서 히스 정권이 제정한 산업관계법 폐지를 요구했다고 보도됨에 따라 보수당의 선거운동은 돌발 악재를 하나 더 맞이하게 됐다. 특히 애덤슨 총장은 탄광 노동자 문제와 관련해 정부 측과 면밀히 논의해왔던 것으로 알려진 시점이었다. 히스 총리는 애덤슨 총장의 발언이 개인적인 견해이며 영국산업연맹의 공식 입장을 대변하지 못한다고 해명했으나, 선거 패배 이후에는 이때의 발언이 보수당의 선거 운동에 부정적 영향을 끼친 사실을 인정했다.[17] 한편 노동당은 애덤슨의 발언으로 "정부에게 촉구해왔던... 모든 면에서" 어려움이 확인된 셈이라는 입장을 보였다.[18]
이는 1931년 총선 이후 경제 위기 중에 치러진 영국 최초의 총선이었는데, 1931년 총선은 대공황의 절정기에 치러졌었다.[9]
이 선거는 전년부터 진행되었던 탄광 노조(炭労)가 주도한 파업에 운송 및 전력 등의 노동조합이 동참하여 전력 부족이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치러졌다. "이 나라를 통치하는 것은 누구인가. 노동조합인가, 아니면 선거로 뽑힌 정부인가"라는 슬로건으로 상징되는 히스 수상의 노동조합 강경 노선에 대한 신임 투표의 성격이 강하게 나타났다.[11]
2. 2. 정치적 상황
1974년 2월 7일, 에드워드 히스 수상은 영연방 대회 참석차 뉴질랜드를 순방하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게 의회를 해산하고 2월 28일에 총선을 치를 것을 공식 건의하였다. 선거 당시 영국의 경제적 상황은 여러 악재를 겪고 있던 관계로, <더 선>이나 <데일리 미러> 등의 언론에서는 '경제위기 총선' (Crisis election)으로 칭하기도 하였다.총선 개시로부터 3일 뒤인 2월 10일, 영국 전국광부노조는 예고했던 대로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총파업에 들어갔다. 하지만 세간의 이목이 집중됐던 2년 전의 파업보다는 저자세로 진행되어, 충돌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각 피켓라인마다 여섯 명의 시위자만 참가했을 뿐이었다. 짐 프라이어 전 의원은 이 당시 광부들이 "조용하고 얌전히 있는 것이 꼭 생쥐 (mice) 같았다"고 회고했다. 선거기간 동안 영국 사회는 1주3일 전력소비원칙 (스리 데이 위크)[16]이 시행됨에 따라 TV 방송시간 역시 단축되었으나, 보수당 정권 측에서 선거운동 방송을 보장하기 위해 심야 시간대 방송 금지를 해제하였다. 광부 파업이 그다지 큰 규모로 진행되지 않으면서 인플레이션 문제가 선거 주요 의제로 떠오르게 되었다. 2월 15일에는 소매물가지수가 전년도 대비 20%의 폭등을 보였다는 통계가 발표되었다.
2월 21일 영국 임금조정위원회는 광부 임금에 대한 조사보고서를 발표하였는데, 전국석탄위원회가 밝혀왔던 견해와는 달리 광부의 임금 수준이 여타 제조업 부문 노동자보다 적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는 보수당의 입장에 적잖은 타격을 입힌 것으로, 전국석탄위 측이 자체 임금체계를 스스로도 숙지하지 못하고 있으며, 애당초 파업할 필요도 없었던 것이 아니냐는 비난으로 이어졌다. 나흘 뒤에 발표된 무역 현황에서는 경상수지 적자가 3.83억파운드를 기록, 관련 통계 집계 이후 사상 최고를 기록하면서 여당 측에 더더욱 큰 악재로 작용했다. 히스 총리는 이 소식과 관련해 '상황의 엄중함'을 고려하여 정권 재창출이 필요하다는 논리를 내세웠는데, 당시 노동당 예비내각 내무부 장관이었던 로이 젠킨스는 "결과가 악화되면 목소리에 더 힘이 실린다고 생각했나 보다"라고 비꼬기도 했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예기치 못했던 동시에 제일 큰 여파를 몰고 왔던 사건은 소신 발언으로 유명했던 보수당의 에녹 파웰 의원의 행보였는데, 이미 당 공약에 반하여 재선 출마를 단념한 것으로 모자라 유럽 공동체 가입에 관한 현 정부의 정책이 올바르지 못하다며 표를 주지 말라고 호소하기까지 했다. 2월 23일 영국 버밍엄의 연설회에서 파웰 의원은 이번 선거운동의 핵심 의제란 영국이 "한 민주주의 국가로 남을 것이냐, 신 유럽 대국의 변방으로 편입될 것이냐"라고 밝혔다. 또 "나라의 법을 제정하고 세금을 걷을 (의회) 고유의 권한"을 박탈한 자들에게 반대하는 것이 국민으로서의 "국가적 의무"라고 발언했다. 이 연설로 <더 선> 지는 "엎친 데 덮친 에녹" (Enoch puts the boot in)이란 헤드라인을 뽑기도 했다. 며칠 뒤 에녹 의원은 "브뤼셀 협약의 근본적인 재협상, 그리고 그 결과를 국민들에게 보고할 것을 약속하는 정당"이 승리하길 바란다고 밝혔다. 이는 곧 노동당의 공약집에서 명시된 내용이기도 했다.
2월 26일에는 캠벨 애덤슨 영국산업연맹 (CBI) 사무총장이 "고용주와 노조 관계를 국가 차원에서 망쳤다"면서 히스 정권이 제정한 산업관계법 폐지를 요구했다고 보도됨에 따라 보수당의 선거운동은 돌발 악재를 하나 더 맞이하게 됐다. 특히 애덤슨 총장은 탄광 노동자 문제와 관련해 정부 측과 면밀히 논의해왔던 것으로 알려진 시점이었다. 히스 총리는 애덤슨 총장의 발언이 개인적인 견해이며 영국산업연맹의 공식 입장을 대변하지 못한다고 해명했으나, 선거 패배 이후에는 이때의 발언이 보수당의 선거 운동에 부정적 영향을 끼친 사실을 인정했다.[17] 한편 노동당은 애덤슨의 발언으로 "정부에게 촉구해왔던... 모든 면에서" 어려움이 확인된 셈이라는 입장을 보였다.[18]
이 선거는 전년부터 진행되었던 탄광 노조(炭労)가 주도한 파업에 운송 및 전력 등의 노동조합이 동참하여 전력 부족이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치러졌다. "이 나라를 통치하는 것은 누구인가. 노동조합인가, 아니면 선거로 뽑힌 정부인가"라는 슬로건으로 상징되는 히스 수상의 노동조합 강경 노선에 대한 신임 투표의 성격이 강하게 나타났다.[11]
3. 주요 정당 및 정책
1970년 총선에서 승리하여 수상이 된 에드워드 히스 (보수당)는 전년부터 계속된 탄광 노조의 파업과, 이에 동참한 운송 및 전력 노동조합으로 인해 심각한 전력 부족 상황에 직면했다. 히스 수상은 "이 나라를 통치하는 것은 누구인가. 노동조합인가, 아니면 선거로 뽑힌 정부인가"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노동조합에 대한 강경 노선에 대한 신임을 묻는 선거를 치렀다.[11]
각 정당의 주요 공약 및 슬로건은 다음과 같다.
- 보수당: "누가 영국을 다스리는가?" (Who governs Britain?)라는 슬로건과 함께 <공정한 영국을 위한 단호한 행동> (Firm Action for a Fair Britain)이라는 선거공약집을 발표했다. 이 공약집은 노동당을 "정권에 굶주린 노동조합 대표들의 소모임"으로 비난하며, 노동당 집권 시 "엄청난 국가적 재앙"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히스 총리는 선거운동 과정에서 차분하고 침착한 모습을 보였으며, "나랏님 같은" (statesmanlike), "여유로운" (relaxed) 사람으로 묘사되었다.[19]
- 노동당: 탄광 노조 파업에 대한 히스 내각의 강경 대응에 대한 신임 투표 성격을 강조했다.[11]
- 자유당: 제레미 소프 대표의 지도 아래, 보수당에 불만을 가진 유권자들에게 어필하며 양당 체제의 논쟁을 넘어서는 모습을 보이려 했다. "당신은 영국의 모습을 바꿀 수 있습니다"(You can Change the Face of Britain)라는 선언문을 통해 투표 제도 개혁과 분권화를 약속했다.[6]
- 스코틀랜드 국민당(SNP): "스코틀랜드의 석유다(It's Scotland's oil)"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스코틀랜드 해안에서 발견된 북해 유전과 그로 인한 수익이 스코틀랜드에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7][8]
3. 1. 보수당
2월 7일, 에드워드 히스 총리는 텔레비전 연설을 통해 영국 국민들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19]이리하여 보수당의 선거유세는 "누가 영국을 다스리는가?" (Who governs Britain?)라는 슬로건으로 집약됐다.
보수당의 선거공약집은 훗날 장관직에 오르는 나이절 로슨이 썼는데 그 제목은 <공정한 영국을 위한 단호한 행동> (Firm Action for a Fair Britain)이었다. 이때의 명칭을 두고 역사학자 도미닉 샌드브룩은 "듣기 거친 미사여구"라고 평가했다. 선거공약집에는 야당인 노동당이 "정권에 굶주린 노동조합 대표들의 소모임"이 장악했다며 "역사상 유례없이 위험하고 극단적인 좌파 계략을 저지르고 있다"고 비난한다. 여기에 노동당이 승리하면 "엄청난 국가적 재앙"이 될 것이란 주장을 계속하고 있다. 샌드브룩은 보수당의 선거공약집이 "너무 모호하고 물렁하다"며, "세부적인 정책이나 방향감각"은 부족했다는 점을 부정적으로 짚고 있다.
에드워드 히스 총리는 선거운동 과정에서 지배적인 역할을 도맡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공유세에서 그는 차분하고 침착한 모습을 보였으며 파이낸셜 타임스의 데이비드 와트 기자는 "나랏님 같은" (statesmanlike), "여유로운" (relaxed) 사람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보수당의 마지막 선거운동 방송에서 히스 총리는 "이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다 하였습니다... 우리는 함께 일을 시작했습니다. 당신의 의지만 있다면 일을 계속해서 마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보수당의 선거방송 중에서 과격성 논란이 빚어진 사례도 있었다. 이 방송에서는 해설자가 "노동당이 당신의 은행계좌, 담보대출, 봉급봉투를 몰수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해롤드 윌슨과 제임스 캘러헌의 사진이 마이클 풋과 토니 벤의 사진으로 중첩되어 사라지는 화면을 내보낸다. 이어 "여러분께서 제 집도 소유하지 못하게 됐다고 알아차리기" 전에 노동당이 더 좌파로 기울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윌슨 노동당 대표는 이 방송에 격노하였고, 여당 측 인사인 피터 캐링턴 에너지장관이 공식 사과를 표해야 했다.
3. 2. 노동당
이 선거는 전년부터 진행되었던 탄광 노조(炭勞)가 주도한 파업에 운송 및 전력 등의 노동조합이 동참하여 전력 부족이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치러졌다. "이 나라를 통치하는 것은 누구인가. 노동조합인가, 아니면 선거로 뽑힌 정부인가"라는 슬로건으로 상징되는 히스 수상의 노동조합 강경 노선에 대한 신임 투표의 성격이 강하게 나타났다.[11]
선거 결과, 보수당과 노동당 모두 과반수에 미치지 못했다(연립 정부). 보수당은 제3당인 자유당의 협력을 얻어 정권을 유지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비교적 많은 의석을 확보한 제1당이 된 노동당 당수 윌슨이 수상에 취임했다.
3. 3. 자유당
자유당은 제레미 소프의 지도 아래 1972년과 1973년 일련의 보궐선거에서 승리하며 부흥기를 맞았다. 자유당은 보수당에 불만을 가진 유권자들에게 어필하기 시작했고, 선거 운동 내내 그러한 경향을 이어갔다. 소프는 젊고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로 비춰졌으며, 종종 양당 체제의 논쟁을 넘어서는 모습을 보이려 했다. "당신은 영국의 모습을 바꿀 수 있습니다"(You can Change the Face of Britain)라는 제목의 선언문은 투표 제도 개혁과 분권화를 약속했지만, 샌드브룩은 그 경제 정책을 "터무니없이 모호하다"(impossibly vague)고 평가했다.[6] 자유당은 더 많은 지역구에 출마하기 시작하여 전국 517개 선거구에 후보를 냈다.[6]3. 4. 스코틀랜드 국민당 (SNP)
선거 기간 동안 스코틀랜드 국민당(Scottish National Party)은 "스코틀랜드의 석유다(It's Scotland's oil)"라는 정치 슬로건을 널리 사용하며 선거운동을 펼쳤다. 스코틀랜드 해안에서 발견된 북해 유전(North Sea oil)과 그로 인한 수익이 스코틀랜드가 영국에 속해 있는 한 스코틀랜드에 큰 이익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7][8]4. 선거 운동
1974년 2월 7일, 에드워드 히스 수상은 영연방 대회 참석차 뉴질랜드를 순방하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게 의회를 해산하고 2월 28일에 총선을 치를 것을 공식 건의하였다. 당시 영국의 경제 상황은 여러 악재를 겪고 있었기 때문에, <더 선>이나 <데일리 미러> 등의 언론에서는 '경제위기 총선' (Crisis election)으로 칭하기도 하였다.
총선 개시 3일 뒤인 2월 10일, 영국 전국광부노조는 예고했던 대로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총파업에 들어갔다. 하지만 2년 전의 파업과는 달리 낮은 수위로 진행되어 큰 충돌은 없었다. 선거 기간 동안 영국 사회는 1주3일 전력소비원칙 (스리 데이 위크)이 시행됨에 따라 TV 방송시간 역시 단축되었으나, 보수당 정권 측에서 선거운동 방송을 보장하기 위해 심야 시간대 방송 금지를 해제하였다. 광부 파업이 크게 확산되지 않자 인플레이션 문제가 선거 주요 의제로 떠올랐다. 2월 15일에는 소매물가지수가 전년도 대비 20% 폭등했다는 통계가 발표되었다.
2월 21일 영국 임금조정위원회는 광부 임금에 대한 조사보고서를 발표하였는데, 전국석탄위원회가 밝혀왔던 견해와는 달리 광부의 임금 수준이 여타 제조업 부문 노동자보다 적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는 보수당의 입장에 타격을 입혔고, 전국석탄위 측이 자체 임금체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며, 애당초 파업할 필요도 없었던 것이 아니냐는 비난으로 이어졌다. 나흘 뒤 발표된 무역 현황에서는 경상수지 적자가 3억 8300만 파운드를 기록, 관련 통계 집계 이후 사상 최고를 기록하면서 여당 측에 더 큰 악재로 작용했다. 히스 총리는 이 소식과 관련해 '상황의 엄중함'을 고려하여 정권 재창출이 필요하다는 논리를 내세웠는데, 당시 노동당 예비내각 내무부 장관이었던 로이 젠킨스는 "결과가 악화되면 목소리에 더 힘이 실린다고 생각했나 보다"라고 비꼬기도 했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가장 큰 파장을 일으킨 사건은 보수당의 에녹 파웰 의원의 행보였다. 그는 당 공약에 반하여 재선 출마를 포기했을 뿐만 아니라, 유럽 공동체 가입에 관한 현 정부의 정책이 올바르지 못하다며 표를 주지 말라고 호소했다. 2월 23일 영국 버밍엄의 연설에서 파웰 의원은 이번 선거운동의 핵심 의제가 영국이 "한 민주주의 국가로 남을 것이냐, 신 유럽 대국의 변방으로 편입될 것이냐"라고 밝혔다. 또 "나라의 법을 제정하고 세금을 걷을 (의회) 고유의 권한"을 박탈한 자들에게 반대하는 것이 국민으로서의 "국가적 의무"라고 발언했다. 며칠 뒤 에녹 의원은 "브뤼셀 협약의 근본적인 재협상, 그리고 그 결과를 국민들에게 보고할 것을 약속하는 정당"이 승리하길 바란다고 밝혔는데, 이는 곧 노동당의 공약집에 명시된 내용이기도 했다.
2월 26일에는 캠벨 애덤슨 영국산업연맹(CBI) 사무총장이 "고용주와 노조 관계를 국가 차원에서 망쳤다"면서 히스 정권이 제정한 산업관계법 폐지를 요구했다고 보도됨에 따라 보수당의 선거운동은 또 다른 악재를 맞이하게 됐다. 히스 총리는 애덤슨 총장의 발언이 개인적인 견해이며 영국산업연맹의 공식 입장을 대변하지 못한다고 해명했으나, 선거 패배 이후에는 이때의 발언이 보수당의 선거 운동에 부정적 영향을 끼친 사실을 인정했다. 한편 노동당은 애덤슨의 발언으로 "정부에게 촉구해왔던... 모든 면에서" 어려움이 확인된 셈이라는 입장을 보였다.
자유당은 1972년과 1973년 일련의 보궐선거에서 승리하면서 제레미 소프의 지도력 아래 부흥기를 맞았다. 자유당은 불만을 가진 보수당 유권자들에게 어필하기 시작했고, 선거 운동 내내 그러한 경향을 이어갔다. 소프는 젊고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로 비춰졌으며, 종종 2당 체제의 논쟁을 넘어서는 모습을 보이려 했다. "당신은 영국의 모습을 바꿀 수 있습니다"(You can Change the Face of Britain)라는 제목의 선언은 투표 제도 개혁과 분권화를 약속했지만, 경제 정책은 "터무니없이 모호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자유당은 더 많은 지역구에 출마하기 시작하여 전국 517개 선거구에 후보를 냈다.
선거 기간 동안 스코틀랜드 국민당은 "스코틀랜드의 석유다(It's Scotland's oil)"라는 정치 슬로건을 널리 사용하며 선거운동을 펼쳤다. 북해 유전과 그로 인한 수익이 스코틀랜드가 영국에 속해 있는 한 스코틀랜드에 큰 이익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주요 날짜는 다음과 같다.
날짜 | 사건 |
---|---|
2월 8일(금요일) | 45대 의회 해산 및 선거운동 공식 시작 |
2월 18일(월요일) | 후보 등록 마감; 635석을 놓고 2,135명의 후보가 출마 |
2월 27일(수요일) | 선거운동 공식 종료 |
2월 28일(목요일) | 투표일 |
3월 1일(금요일) | 노동당이 근소한 차이로 가장 많은 의석을 차지했지만 과반수에 미달하여 연립정부 불가능 상황 발생 |
3월 3일(일요일) | 에드워드 히스가 잠재적 연정 조건을 논의하기 위해 자유당 당수 제러미 소프와 회담 시작 |
3월 4일(월요일) | 자유당이 연정 조건을 거부한 직후 보수당 수상 에드워드 히스가 사임하고, 해럴드 윌슨이 노동당 소수 정부 지도자로 복귀 |
3월 6일(수요일) | 46대 의회 소집 |
3월 12일(화요일) | 의회 개원식 |
4. 1. 보수당
1974년 2월 영국 총선에서 보수당은 "누가 영국을 다스리는가?" (Who governs Britain?)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선거 운동을 펼쳤다.[19]에드워드 히스 총리는 2월 7일 텔레비전 연설을 통해, 인플레이션에 맞서 싸울 강력한 정부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과격파와 행동파에 맞서 온건하고 합리적인 국민의 목소리를 낼 것을 촉구했다.[19]
보수당의 선거 공약집은 훗날 장관직에 오르는 나이절 로슨이 썼으며, <공정한 영국을 위한 단호한 행동> (Firm Action for a Fair Britain)이라는 제목이었다. 이 공약집은 노동당을 "정권에 굶주린 노동조합 대표들의 소모임"이 장악한 극좌 세력으로 묘사하며, 노동당 집권 시 "엄청난 국가적 재앙"이 닥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역사학자 도미닉 샌드브룩은 이 공약집이 "너무 모호하고 물렁"하며, "세부적인 정책이나 방향 감각"이 부족하다고 평가했다.[19]
히스 총리는 선거 운동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언론은 그를 "나랏님 같은", "여유로운" 사람으로 묘사했다. 그는 마지막 선거 방송에서 "이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다 하였습니다... 우리는 함께 일을 시작했습니다. 당신의 의지만 있다면 일을 계속해서 마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19]
보수당의 한 선거 방송은 노동당이 국민의 재산을 몰수할 것이라고 경고하며 해롤드 윌슨과 제임스 캘러헌의 사진을 마이클 풋과 토니 벤의 사진으로 중첩시키는 과격한 내용을 담아 논란이 되었다. 이에 피터 캐링턴 에너지장관이 공식 사과를 해야 했다.[19]
선거 운동 기간 동안, 전국 광부 노동조합(National Union of Mineworkers (Great Britain))의 파업, 소매물가지수(Retail Price Index) 상승, 광부 임금 보고서 발표, 경상수지(Current account (balance of payments)) 적자 발표 등 경제 문제가 주요 쟁점으로 떠올랐다. 특히 광부 임금 보고서에서 광부들의 임금이 다른 제조업 노동자들보다 적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보수당의 입지가 약화되었다.[4]
또한, 보수당 의원 이녹 파월이 유럽 경제 공동체 가입에 반대하며 히스 총리에게 반대표를 던질 것을 촉구하고, 영국산업연합(Confederation of British Industry) 사무총장 캠벨 애덤슨(Campbell Adamson)이 산업관계법(Industrial Relations Act) 폐지를 촉구하는 등 예상치 못한 사건들이 발생하여 보수당의 선거 운동에 타격을 주었다.[4][5]
4. 2. 노동당
노동당의 선거 공약집 ''함께 일합시다(Let us work together)''는 1955년 이후 가장 짧은 단 10페이지로 구성되었다.[3] 이 공약집은 경제학자 스터트 홀랜드(Stuart Holland)와 당시 산업부 장관직을 맡았던 토니 벤(Tony Benn)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3] 노동당은 이 공약집에서 "노동자와 그들의 가족을 위해 권력과 부의 균형을 근본적이고 돌이킬 수 없게 바꾸겠다"고 약속했다.[3] 또한 산업계와의 계획 협약 및 국가 기업 위원회(National Enterprise Board) 설립을 주장했는데, 이 부분은 당내 일부 인사들의 비판을 받았다.[3] 예를 들어, 앤서니 크로슬랜드(Anthony Crosland)는 이 프로그램을 비공개적으로 "덜 익은" 그리고 "어리석은" 것이라고 불렀다.[3] 이 선거 공약집에는 영국의 유럽 경제 공동체(European Economic Community) 가입 조건 재협상과 이 문제에 대한 전국적 국민투표 실시를 당의 공약으로 제시하는 내용도 포함되었다.[3]노동당의 선거 운동은 당 지도부를 노조와의 평화를 회복할 유능한 협상가로 제시했다.[3] 이전 선거와 달리 윌슨은 다소 뒤로 물러서서 제임스 캘러핸(James Callaghan), 데니스 힐리(Denis Healey), 셜리 윌리엄스(Shirley Williams)가 동등하거나 더 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했다.[3] 선거 운동 마지막 방송에서 여러 주요 인사들은 노동당이 영국을 "회복의 길로 인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3] 이 영상에서 윌슨은 "노동조합원도 사람이고, 고용주도 사람이다. 우리는 국가 자체에 피해를 주는 대가를 치르지 않고서는 서로를 대립시킬 수 없다."라고 주장했다.[3]
4. 3. 언론의 태도
도미닉 샌드브룩(Dominic Sandbrook)은 선거 당시 전국 신문들의 "극심한 당파성"을 전후 영국에서 "전례 없는" 수준이라고 묘사하며, 대부분의 언론이 에드워드 히스와 보수당을 지지하는 편향을 보였다고 말한다. 《데일리 미러(Daily Mirror)》는 노동당을 지지한 몇 안 되는 전국 신문 중 하나였으며, 다른 많은 신문들은 독자들에게 히스를 재선출하라고 촉구했다. 우익 언론에서는 해롤드 윌슨과 그의 당에 대한 강한 비난이 쏟아졌다. 1970년 노동당을 지지했던 《더 선(The Sun)》은 노동당 승리가 "급격한 인플레이션"을 초래할 것이라고 주장했고, 《데일리 텔레그래프(The Daily Telegraph)》의 사설은 노동당 정부가 "공공 및 사적으로 완전한 파탄"을 가져올 것이라고 말하며 윌슨의 "노조 권력에 대한 비굴한 복종"으로 여겨지는 것을 비난했다. 《이브닝 스탠다드(Evening Standard)》는 선거 후 산업부 장관(Secretary of State for Industry)에 임명될 예정이었던 노동당 정치인 토니 벤(Tony Benn)을 "영국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이라고 부르는 킨슬리 에이미스(Kingsley Amis)의 글을 실었고, 《데일리 익스프레스(Daily Express)》에서는 만화가 커밍스가 광부 노조 지도자 조 고름리(Joe Gormley (trade unionist)), 윌슨, 그리고 다른 노동당 인사들을 프랑스 혁명 당시의 단두대(Guillotine)로 히스를 처형하는 모습으로 묘사했다. 반면 《가디언(The Guardian)》은 어떤 당도 공개적으로 지지하지 않았다. 이 신문의 칼럼니스트 피터 젠킨스(Peter Jenkins (journalist))는 지난 10년 동안 "어떤 당도" 국가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고 주장했다.[19]5. 선거 결과
1974년 2월 영국 총선은 어느 정당도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 득표율에서는 보수당이 37.9%로 노동당(37.2%)보다 근소하게 앞섰지만, 의석수에서는 노동당이 301석으로 보수당(297석)을 제치고 제1당이 되었다. 자유당은 19.3%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14석을 얻었다.
정당 | 득표수 | % | 의석수 | |
---|---|---|---|---|
노동당 | 11,645,616 | 37.2 | 301 | |
보수당 | 11,872,180 | 37.9 | 297 | |
자유당 | 6,059,519 | 19.3 | 14 | |
스코틀랜드 국민당 | 633,180 | 2.0 | 7 | |
얼스터 연합주의자당 | 232,103 | 0.7 | 7 | |
웨일스당[12] | 171,374 | 0.5 | 2 | |
사회민주노동당 | 160,437 | 0.5 | 1 | |
밴가드연맹진보당 | 75,944 | 0.2 | 2 | |
민주연합당 | 58,656 | 0.2 | 1 | |
독립노동당 | 26,892 | 0.1 | 1 | |
링컨 민주노동협회 | 14,780 | 0.1 | 1 | |
합계 | 635 |
에드워드 히스가 이끌던 보수당은 선거에서 패배하였지만, 해롤드 윌슨의 노동당은 자유당의 협력을 얻어 정권을 잡게 되었다.
5. 1. 개요
1974년 2월 영국 총선은 1970년 선거에서 사용된 630석에 5석이 추가된 새로운 선거구 경계를 기준으로 치러졌다. 이로 인해 새로운 가상 경계에서 많은 의석이 바뀌었다. 1970년 총선의 가상 선거 결과는 BBC를 대신하여 마이클 스티드(Michael Steed)에 의해 계산되어 1974년 2월 선거 결과와 비교되었다.1929년 1929년 이후 처음으로, 가장 큰 두 정당의 득표율 합계가 80% 미만이었고, 자유당도 10% 이상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이 선거는 전년부터 진행되었던 탄광 노조(炭労)가 주도한 파업에 운송 및 전력 등의 노동조합이 동참하여 전력 부족이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치러졌다. "이 나라를 통치하는 것은 누구인가. 노동조합인가, 아니면 선거로 뽑힌 정부인가"라는 슬로건으로 상징되는 히스 수상의 노동조합 강경 노선에 대한 신임 투표의 성격이 강하게 나타났다.[11]
선거 결과, 보수당과 노동당 모두 과반수에 미치지 못했다(연립정부). 보수당은 제3당인 자유당의 협력을 얻어 정권을 유지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비교적 많은 의석을 확보한 제1당이 된 노동당 당수 윌슨이 수상에 취임했다.
정당 | 의석수 |
---|---|
노동당 | 301 |
보수당 | 297 |
자유당 | 14 |
스코틀랜드 국민당 | 7 |
얼스터 연합주의자당 | 7 |
밴가드연맹진보당 | 3 |
웨일스민족당 | 2 |
사회민주노동당 | 1 |
민주연합당 | 1 |
민주노동당 | 1 |
무소속 | 1 |
합계 | 635 |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
보수당 | 11,872,180 | 37.9% |
노동당 | 11,645,616 | 37.2% |
자유당 | 6,059,519 | 19.3% |
스코틀랜드 국민당 | 633,180 | 2.0% |
얼스터 연합주의자당 | 232,103 | 0.8% |
웨일스민족당 | 171,374 | 0.5% |
사회민주노동당 | 160,137 | 0.5% |
북아일랜드 친의회 연합주의자당 | 94,301 | 0.3% |
국민전선 | 76,865 | 0.2% |
밴가드연맹진보당 | 75,944 | 0.2% |
민주연합당 | 58,656 | 0.2% |
공산당 | 32,743 | 0.2% |
연합당 | 29,892 | 0.1% |
통합당 | 17,593 | 0.06% |
민주노동당 | 14,780 | 0.05% |
항목 | 내용 |
---|---|
정부의 새로운 과반수 | −33 |
총 투표 수 | 31,321,982 |
투표율 | 78.8% |
5. 2. 정당별 득표 및 의석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의석수 |
---|---|---|---|
노동당 | 11,645,616 | 37.2 | 301 |
보수당 | 11,872,180 | 37.9 | 297 |
자유당 | 6,059,519 | 19.3 | 14 |
스코틀랜드 국민당 | 633,180 | 2.0 | 7 |
얼스터 연합주의자당 | 232,103 | 0.8 | 7 |
밴가드연맹진보당 | 75,944 | 0.2 | 3 |
웨일스 민족당 | 171,374 | 0.5 | 2 |
사회민주노동당 | 160,137 | 0.5 | 1 |
민주연합당 | 58,656 | 0.2 | 1 |
민주노동당 | 14,780 | 0.05 | 1 |
무소속 | 0 | 1 |
득표율에서는 보수당이 37.9%로 노동당(37.2%)보다 근소하게 앞섰지만, 의석수에서는 노동당이 301석으로 보수당(297석)을 제치고 제1당이 되었다. 자유당은 19.3%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14석을 얻어 선전했다.
5. 3. 분석
1974년 2월 총선은 1970년 선거에서 사용된 630석에 5석이 추가된 새로운 선거구 경계를 기준으로 치러졌다. 이로 인해 새로운 가상 경계에서 많은 의석이 바뀌었다. 1970년 총선의 가상 선거 결과는 BBC를 대신하여 마이클 스티드(Michael Steed)에 의해 계산되어 1974년 2월 선거 결과와 비교되었다.1929년 1929년 이후 처음으로, 가장 큰 두 정당의 득표율 합계가 80% 미만이었고, 자유당도 10% 이상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이 선거는 전년부터 진행되었던 탄광 노조(炭労)가 주도한 파업에 운송 및 전력 등의 노동조합이 동참하여 전력 부족이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치러졌다. "이 나라를 통치하는 것은 누구인가. 노동조합인가, 아니면 선거로 뽑힌 정부인가"라는 슬로건으로 상징되는 히스 수상의 노동조합 강경 노선에 대한 신임 투표의 성격이 강하게 나타났다.[11]
선거 결과, 보수당과 노동당 모두 과반수에 미치지 못했다(연립정부). 보수당은 제3당인 자유당의 협력을 얻어 정권을 유지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비교적 많은 의석을 확보한 제1당이 된 노동당 당수 윌슨이 수상에 취임했다.
득표율에서는 0.2%의 근소한 차이로 보수당이 제1당이 되었지만, 의석수에서는 노동당이 비교적 제1당이 되었기 때문에, 당수인 윌슨이 자유당의 협력을 얻어 수상에 취임했다. 탄광노조를 중심으로 한 파업에 대한 국민의 불만은 노동당이 아니라, 노동조합과의 대결 자세를 굽히지 않으려는 보수당에 향하게 되었다. 정권을 되찾은 노동당 내부에서는, 고전적인 사회주의 이념을 중시하는 좌파가 세력을 늘리고, 지방 조직과 노동조합 상층부는 좌파 세력이 장악하는 상태에 가까워졌다.[13]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
보수당 | 11,872,180 | 37.9% |
노동당 | 11,645,616 | 37.2% |
자유당 | 6,059,519 | 19.3% |
스코틀랜드 국민당 | 633,180 | 2.0% |
얼스터 연합주의자당 | 232,103 | 0.8% |
웨일스당 | 171,374 | 0.5% |
사회민주노동당 | 160,137 | 0.5% |
북아일랜드 친의회 연합주의자당 | 94,301 | 0.3% |
국민전선 | 76,865 | 0.2% |
밴가드연맹진보당 | 75,944 | 0.2% |
민주연맹당 | 58,656 | 0.2% |
공산당 | 32,743 | 0.2% |
연합당 | 29,892 | 0.1% |
통합당 | 17,593 | 0.06% |
민주노동당 | 14,780 | 0.05% |
6. 선거 이후
이 선거는 전년부터 진행되었던 탄광 노조가 주도한 파업에 운송 및 전력 등의 노동조합이 동참하여 전력 부족이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치러졌다. "이 나라를 통치하는 것은 누구인가. 노동조합인가, 아니면 선거로 뽑힌 정부인가"라는 슬로건으로 상징되는 히스 수상의 노동조합 강경 노선에 대한 신임 투표의 성격이 강하게 나타났다.[11]
선거 결과, 보수당과 노동당 모두 과반수에 미치지 못했다(헝 의회). 보수당은 제3당인 자유당의 협력을 얻어 정권을 유지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비교적 많은 의석을 확보한 제1당이 된 노동당 당수 해롤드 윌슨이 수상에 취임했다.
6. 1. 윌슨의 소수 정부 구성
선거 결과, 보수당과 노동당 모두 과반수에 미치지 못했다(헝 의회). 보수당은 제3당인 자유당의 협력을 얻어 정권을 유지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비교적 많은 의석을 확보한 제1당이 된 노동당 당수 해롤드 윌슨이 수상에 취임했다.[11]
6. 2. 정치적 영향
이 선거는 전년부터 진행되었던 탄광 노조가 주도한 파업에 운송 및 전력 등의 노동조합이 동참하여 전력 부족이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치러졌다. "이 나라를 통치하는 것은 누구인가. 노동조합인가, 아니면 선거로 뽑힌 정부인가"라는 슬로건으로 상징되는 히스 수상의 노동조합 강경 노선에 대한 신임 투표의 성격이 강하게 나타났다.[11]
선거 결과, 보수당과 노동당 모두 과반수에 미치지 못했다(연립정부). 보수당은 제3당인 자유당의 협력을 얻어 정권을 유지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비교적 많은 의석을 확보한 제1당이 된 노동당 당수 해롤드 윌슨이 수상에 취임했다.
참조
[1]
유튜브
BBC Feb '74 Election coverage
[1]
웹사이트
YouTube - Election 1974 (February) - Part 1
https://web.archive.[...]
2016-12-02
[2]
웹사이트
Part 1, Election 74
http://www.bbc.co.uk[...]
BBC
2018-06-02
[3]
간행물
no. 46205
https://www.thegazet[...]
London Gazette
1974-02-08
[4]
서적
The Times Guide to the House of Commons 1974
Times Newspapers Limited
1974
[5]
뉴스
Drop industry Act, urges CBI chief
https://news.google.[...]
2019-02-07
[6]
서적
State and Society: A Social and Political History of Britain since 1870
Bloomsbury Publishing
2017
[7]
뉴스
Scottish Nationalism Comes Out of Slump in Election Issue of Who Owns Offshore
https://www.nytimes.[...]
2022-10-15
[8]
뉴스
Who has a right to claim North Sea oil?
https://www.bbc.co.u[...]
BBC News
2022-10-15
[9]
웹사이트
28 February 1974
https://www.bbc.co.u[...]
2018-06-02
[10]
웹사이트
Seats changing hands at General Elections
http://www.election.[...]
2018-06-02
[11]
서적
これが英国労働党だ
新潮選書
[12]
웹사이트
The Party of Wales
[13]
참고자료
[14]
유튜브
BBC Feb '74 Election coverage
[14]
웹인용
Archived copy
https://web.archive.[...]
2016-12-02
[15]
웹사이트
Part 1, Election 74
http://www.bbc.co.uk[...]
BBC Parliament
2018-06-02
[16]
백과사전
석유 파동
[17]
서적
The Times Guide to the House of Commons 1974
Times Newspapers Limited
1974
[18]
뉴스
Drop industry Act, urges CBI chief
https://news.google.[...]
1974-02-27
[19]
원문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