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로스앤젤레스 폭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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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92년 로스앤젤레스 폭동은 1992년 4월 29일부터 5월 3일까지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발생한 대규모 폭동이다. 1991년 로드니 킹 사건에서 백인 경찰관들의 무죄 평결이 내려지자 흑인 사회를 중심으로 불만이 폭발하여 시작되었다. 폭동은 63명의 사망자와 2,300명 이상의 부상자를 발생시켰으며, 약 8억 달러에서 10억 달러의 재산 피해를 입혔다. 특히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이 큰 피해를 입었으며, 흑인과 한인 간의 갈등이 심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폭동 이후 경찰 개혁과 인종 간 화합 노력이 이루어졌으나, 경제적 불평등과 인종차별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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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로스앤젤레스 폭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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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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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 1992년 로스앤젤레스 폭동 |
다른 명칭 | 1992년 로스앤젤레스 소요 로드니 킹 폭동 사우스 센트럴 폭동 1992년 로스앤젤레스 시민 소요 1992년 로스앤젤레스 시민 불안 |
발생 기간 | 1992년 4월 29일 – 5월 4일 (6일간) |
발생 장소 |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캘리포니아, 미국 |
주요 원인 | 로드니 킹 구타 사건의 경찰관 무죄 평결 라타샤 할린스 살해 사건 로스앤젤레스의 인종 갈등 |
시위 방식 | 광범위한 폭동 약탈 폭행 시위 기물 파손 총격전 |
결과 | 폭동 진압 다수의 주택과 사업체 파손, 약탈 또는 파괴 대릴 게이츠 경찰 서장 사임 |
참여 세력 | |
폭동 가담자 | 폭도 및 약탈자 크립스 피루스 블러즈 멕시칸 마피아 플로렌시아 13 MS-13 18번가 갱 |
미국 연방 정부 | 7 보병 사단 1 해병 사단 연방수사국 미국 보안관 서비스 주류·담배·화기 단속국 미국 국경 순찰대 SRT BORTAC 연방 교정국 마약단속국 |
캘리포니아 주 정부 | 캘리포니아 주 방위군 캘리포니아 공군 방위군 144 전투 비행단 144 보안 경찰 편대 146 공수 비행단 캘리포니아 고속도로 순찰대 로스앤젤레스 경찰국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보안관국 롱비치 경찰국 컴프턴 경찰국 잉글우드 경찰국 패서디나 경찰국 가디나 경찰국 호손 경찰국 사우스게이트 경찰국 사우스패서디나 경찰국 |
무장 민간인 | 특히 한인 사회에서 폭도와 약탈자로부터 재산을 보호 |
주요 인물 | |
피해 규모 | |
부상자 | 2,383명 |
사망자 | 63명 |
체포자 | 12,111명 |
재산 피해액 | 10억 달러 |
기타 정보 | |
참고 자료 | 트럼프, 폭동진압법 발동은 경찰 개혁을 무효화할 수 있다고 전문가 경고 '92년 폭동으로 사망한 63명 중 23명의 죽음은 미해결 상태로 남아있다. – 예술가 제프 비올이 사망 장소를 지도화하고 있다 게이츠 서장에게 많은 책임이 있다 로스앤젤레스 폭동의 원인으로 지적된 도시의 실패 1992년 로스앤젤레스 봉기 |
2. 로드니 킹 사건
1991년 3월 3일 로스앤젤레스에서 백인 교통경찰관들이 과속으로 질주하는 흑인 운전자 로드니 킹을 집단 구타하여 흑인 사회가 크게 동요했다. 당시 로드니 킹은 백인 교통경찰관들을 용서하였으나, 이 사건으로 인해 평생 청각장애인이 되었다.[264]
로드니 킹은 1991년 3월 3일 저녁, 캘리포니아주 210번 주간 고속도로에서 과속으로 운전하다가 캘리포니아 고속도로 순찰대에 의해 정차되었다. 이후 고속 추격전이 벌어졌고, 킹은 결국 후스힐 블러바드에서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한센 댐 휴양 센터 앞에서 멈췄다. 킹이 멈추자, 로스앤젤레스 경찰국(LAPD)과 CHP 경찰관들이 킹의 차량을 포위했고, 킹과 동승자 2명을 체포했다.[27]
동승자 두 명이 순찰차에 태워진 후, LAPD 경찰관 5명(스테이시 쿤, 로렌스 파월, 티모시 윈드, 시어도어 브리세노, 롤란도 솔라노)이 킹을 포위했다. 경찰관들은 킹에게 전기충격총을 사용하고, 경찰봉으로 수십 번 때리고, 발로 등을 짓밟는 등 집단 구타했다. 쿤 경사는 킹이 체포에 저항했고, 페니실리딘(PCP)의 영향 하에 있었다고 증언했지만,[29] 체포 당시 영상에는 킹이 맞을 때마다 일어서려고 시도했고, 경찰은 킹이 가만히 있을 때까지 수갑을 채우려 하지 않았다.[30] 킹의 체내에서 PCP는 검출되지 않았다.[31]
이 사건은 지역 주민 조지 홀리데이에 의해 촬영되었고,[32] 이 영상은 즉각 미디어의 주목을 받으며 로스앤젤레스와 미국 전역의 활동가들에게 결집의 계기가 되었다. 로스앤젤레스 경찰국장 데릴 게이츠는 영상을 보고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39]
이후 경찰관들의 재판을 요구하는 여론이 거세졌고, 연방 정부는 시민권 침해 혐의를 적용했다. 1993년 4월 17일, 로렌스 파월 경관과 스테이시 쿤은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시어도어 브리세노와 티모시 윈드 경관은 무죄 판결을 받았다.[188] 네 명의 경찰관 모두 LAPD에서 해고되거나 떠났다.[191] 로드니 킹은 로스앤젤레스 시로부터 3800000USD의 손해 배상금을 받았다.[56]
2. 1. 재판과 무죄 평결
1991년 3월 3일, 흑인 남성 로드니 킹은 로스앤젤레스 시 경찰(LAPD) 경관들에게 속도 위반으로 정차 명령을 받았다.[220][221] 경찰 추격 끝에 킹은 강제로 정차되었고, 경찰관들은 킹이 저항했다는 이유로 톤파와 맥라이트로 폭행했다.[220][223] 이 장면은 인근 주민에 의해 촬영되었고, 전국적으로 보도되면서 경찰의 과잉 진압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아졌다.[246]이 사건으로 백인 경관 3명(스테이시 쿤, 로렌스 파월, 티모시 윈드)과 히스패닉계 경관 1명(테오도어 브리세노)이 기소되었다.[28] 경찰 측은 킹이 술에 취한 채 저항했기 때문에 제압이 불가피했다고 주장했다.[223] 그러나 보도된 영상에는 무저항 상태의 킹이 폭행당하는 모습이 담겨 있었지만, 증거로 채택되지 않았다.[241] 킹은 심각한 부상을 입었지만, 재판에서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았다.[241] 킹의 혈중 알코올 농도가 검출된 점도 불리하게 작용했다.[224]
사건 발생 1년 후인 1992년 4월 29일, 벤투라 카운티 고등법원에서 배심원단은 경찰관들에게 무죄 평결을 내렸다.[225] 배심원단은 백인 9명, 혼혈 1명,[43] 라틴 아메리카계 1명, 아시아계 1명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44] 검사는 흑인 테리 화이트였다.[45][46] 백인 주민이 많은 시미 밸리가 재판 장소였고,[241] 배심원 구성 또한 인종 편향적이었다는 점이 무죄 평결의 원인 중 하나로 지적된다.
배심원단은 과잉 진압 혐의에 대해서는 세 명에게 무죄, 한 명에게는 평결에 합의하지 못했다.[44] 평결은 흐릿한 비디오테이프의 처음 3초에 부분적으로 근거했는데, 언론에는 공개되지 않은 부분이었다.[47][48] 비디오테이프의 처음 2초는 킹이 도망치려는 모습을 보여주며,[49] 이후 1분 19초 동안 킹은 계속 구타당한다.[50] 검찰은 배심원들이 비디오테이프를 반복 재생하며 폭력성에 둔감해졌을 수 있다고 추정했다.[64]
무죄 평결 직후, 법원 밖에서는 분노한 시위대가 스테이시 쿤을 위협했고, 영화감독 존 싱글턴은 "이 평결로 이 사람들이 한 일은 폭탄의 심지를 켰다"고 말했다.[51]
3. 두순자 사건과 한인 사회
1991년 3월 3일 로스앤젤레스에서 백인 교통경찰관이 과속으로 질주하는 흑인 운전자 로드니 킹을 집단 구타하여 흑인 사회가 흥분하였다. 같은 해 3월 16일에는 한국계 미국인 두순자가 자신이 운영하는 상점에서 흑인 소녀 라타샤 할린스가 오렌지 주스를 훔쳤다고 오인해 총으로 쏴 죽여 흑인 사회의 분노를 일으켰다.[264]
많은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는 '''한국계 미국인들'''은 이날을 사이구라고 부른다. 이 숫자는 '''한국어'''로 “사-이-구”라는 뜻으로 1992년 로스앤젤레스 폭동이 시작한 날인 4월 29일을 가리킨다. 이 폭동으로 인해 Association of Korean-American Victims 같은 많은 활동가 단체들이 구성되었고 다른 인종 집단과의 협력 관계 구축이 증가했다.
두순자 사건은 상점을 운영하던 한국 출신 이민자 두순자가 15세 흑인 소녀 라타샤 할린스가 오렌지 주스를 훔쳐가는 것으로 오인해 말다툼과 몸싸움 끝에 권총을 꺼내 라타샤 할린스를 총격해 사망하게 만든 사건이다. 배심원은 유죄 평결을 내렸고 검사는 흑인 사회의 반발을 고려해 무기징역을 구형했으나, 판사는 두순자가 재범의 가능성이 적다는 이유로 400시간의 사회 봉사명령과 함께 집행유예 판결을 내렸다.
결국 이 판결로 인해 흑인들의 사법 시스템 및 한인들에 대한 반감이 확산되었고, 로스앤젤레스의 흑인 지역에서 장사하던 한국인이 흑인들의 주요 폭행 대상이 된 단초를 제공했다. 흑인들은 한국인으로 보이는 동양인들에게 무차별 구타와 집단 난타, 투석, 총격을 가했고, 이에 피해가 막심한 한국인들 또한 재산 보호를 위해 여러 수단으로 방어하기 시작했다.
로욜라 메리마운트 대학교의 에드워드 박 교수는 1992년 폭력사태가 한인들을 자극하여 새로운 물결의 정치 운동을 시작함과 동시에 한인들을 두 쪽으로 갈라놓았다고 말한다. 자유주의자는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다른 소수민족들과 손을 맞잡고 인종적 억압과 희생양화에 싸우자는 의견이었고, 보수파는 법과 질서를 강조하고 공화당의 경제적, 사회적 정책을 지지했다.[128][129]
1991년, 폭동이 일어나기 1년 전, 흑인 미국인 사회와 한국계 미국인 사회 간의 불만과 폭력이 증가하고 있었다.[19] 1989년, 스파이크 리 감독의 영화 ''똑바로 살아라''는 인종차별과 경제적 불평등을 둘러싼 백인, 흑인, 그리고 한국인들 사이의 도시 긴장을 부각시켰다.[20]
3. 1. 언론의 편파 보도
1991년 3월, 미국 ABC 방송과 LA 지국인 KABC TV는 두순자 사건을 집중 보도하여 한국인과 흑인 사이의 인종 갈등을 부추기고 폭동을 악화시켰다.[266] 이는 흑인들의 분노를 백인에서 한국인으로 돌리려는 언론 공세였다.로드니 킹 사건과 두순자 사건 보도 당시, 미국 언론사들은 증거 비디오에서 로드니 킹이 경찰관을 밀치고 구타한 장면과 라타샤 할린스가 두순자의 얼굴을 때린 장면을 삭제하고 편집된 비디오를 방송하여, 흑인들이 한국인과 백인 경찰의 흑인 차별을 믿게 만들었다.
나이트라인에서 테드 코펠은 흑인/한국인 갈등에 대해 흑인 지도자들만 인터뷰했고,[145] 그들은 한국계 미국인에 대한 부정적 의견을 공유했다.[146] 가이 아오키는 초기 보도에서 흑백 구도만 사용되고 한국계 미국인 사회와 그들의 고통이 악화되고 무시된 것에 좌절했다.[146]
NBC 뉴스의 한나 강은 한국계 미국인과 흑인 간 갈등이 과장되었고 뉴스가 이야기의 일부만 보도했다고 전했다. 한나 강은 여러 분야의 두 인종 20명 이상을 인터뷰했고, 그들 모두 폭동 당시 언론에 대해 비슷한 견해, 즉 새로운 보도가 대중의 폭동 인식에 영향을 미쳤다고 믿었다. 언론에 보도된 한국계 미국인들의 사진은 대부분 건물 옥상에서 방어하는 모습이었지만, 이는 일부 상점 주인에 불과했다. 이러한 오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은 교육만이 미래 갈등을 없앨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는다.[148]
3. 2. 한인 사회의 피해와 대응
1992년 로드니 킹 사건으로 촉발된 로스앤젤레스 폭동 당시, 한인 사회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특히 흑인 빈민 소녀가 한국인 상점에서 사살당한 두순자 사건은 흑인들의 분노를 코리아타운으로 향하게 만들었다.[266] 폭동으로 인해 50~60명이 사망하고, 코리아타운의 90%가 파괴되었다.
많은 한국계 미국인들은 이 날을 "사이구"라고 부르며, 이는 폭동이 시작된 4월 29일을 의미한다.[119] 폭동 당시 미국 언론은 두순자 사건을 집중 보도하여 한인과 흑인 간의 인종 갈등을 악화시켰고,[266] 편집된 비디오를 통해 흑인들이 한인과 백인 경찰을 차별한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폭동 중 한인들은 라디오코리아(Radio Korea U.S.A)를 통해 자원봉사자들을 모집하여 코리아타운을 방어했다.[267][268][269] 이들은 즉석에서 만든 무기, 엽총, 반자동 소총 등으로 무장했다.[122] 당시 미국 경찰은 한인 상점이 몰려 있는 코리아타운 지역을 방관하고, 백인 거주 지역 위주로 경비했다.[267][268][269]
두순자 사건은 15세 흑인 소녀 라타샤 할린스가 오렌지 주스를 훔쳐가는 것으로 오인한 한국 출신 이민자 두순자가 총격을 가해 사망하게 만든 사건이다. 배심원은 유죄 평결을 내렸으나, 판사는 두순자에게 사회 봉사명령과 함께 집행유예 판결을 내려 흑인들의 반감을 샀다.[22]
폭동은 한흑 갈등으로 인한 로스앤젤레스시 전체 피해액 7.1억달러 중 절반인 3.5억달러가 한인 사회의 피해였다.
폭동 이후 한인 사회는 분열되었다. 에드워드 박 교수는 자유주의자들은 다른 소수민족과 연대하여 인종차별에 맞서 싸우려 했고, 보수파는 법과 질서를 강조하며 공화당의 정책을 지지했다고 설명했다.[128][129]
폭동 1년 전부터 흑인과 한국계 미국인 사회 간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19] 1991년 3월 16일, 두순자는 라타샤 헐린을 총으로 살해했고, 과실치사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징역형 대신 집행유예를 선고받아 흑인 사회의 분노를 샀다.[22]
폭동 당시 한국계 미국인들은 낮은 사회적 지위와 언어 장벽으로 인해 경찰의 보호를 받지 못했다.[120] 많은 한인들이 코리아타운으로 몰려들어 무기를 들고 상점을 지켰다.[121][122]
폭동은 한국계 미국인 정체성과 공동체 발전의 전환점으로 여겨진다. 한국계 미국인들은 피해 지역 재건을 위해 정부 지원을 얻으려 노력했고, 수많은 지역 사회 및 옹호 단체가 설립되었다.[120]
폭동으로 인해 약 2,300개의 한인 소유 상점이 피해를 입었고, 이는 전체 피해의 45%를 차지했다.[119] 많은 한국계 미국인들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치료를 받았다.[120]
폭동의 결과로 한국계 미국인들은 한국계 미국인 피해자 협회와 같은 활동가 단체를 결성하고, 다른 민족 집단과 협력 관계를 구축했다.[127] 약 3만 명의 한국계 미국인들이 LA 코리아타운에서 평화를 호소하는 시위를 벌였다.
에드워드 태한 창 교수는 LA 폭동을 한국계 미국인 정체성 발전의 전환점으로 규정했다.[128]
폭동·약탈로 인해 사망자 63명, 부상자 2,383명, 체포자 1만 2,000명이 발생했다.[240][249] 약 3,600건의 화재가 발생했고, 1,100개의 건물이 파괴되었으며, 4,500개의 상점과 기업이 약탈 및 파괴를 당했다.[249] 피해 총액은 10억달러에 달하며, 상당수가 한국계 미국인 소유 건물과 기업에 집중되었다.[214][216]

4. 폭동의 경과
1991년 3월 3일 로스앤젤레스에서 백인 경찰관들이 과속으로 질주하는 흑인 운전자 로드니 킹을 집단 구타하고, 같은 해 3월 16일 한국계 미국인 두순자가 흑인 소녀 라타샤 할린스를 오인 사살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흑인 사회는 분노하였다. 1992년 4월 29일 로드니 킹 폭행 경찰관들이 무죄 평결을 받자, 흑인 사회의 분노가 폭발하여 폭동으로 이어졌다.
폭동은 평결 발표 당일부터 시작되어 이틀 동안 가장 격렬했다. 밤부터 새벽까지 통행금지가 실시되고, 캘리포니아 주방위군, 미국군, 미국 연방법 집행 기관 인력이 배치되면서 상황이 통제되었다.[52] 폭동으로 총 63명이 사망했고, 최대 2,383명이 부상당했으며, 재산 피해는 약 8억달러에서 10억달러로 추산된다.[56] 약 3,600건의 방화로 건물 1,100채가 파괴되었고, 광범위한 약탈도 발생했다. 특히, 한국인과 다른 아시아계 소유의 상점이 공격 대상이 되었다.[57] 소요 사태는 대부분 남중부 로스앤젤레스에 집중되었다.[58][59]
폭동 초기, LA 경찰은 흑인 경찰관만 현장에 보내고 백인 경찰관에게는 접근 금지 명령을 내렸으나,[228] 폭동이 확대되면서 LA 경찰은 자체 보호에 급급하여 진압에 실패했다.[227] 이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캘리포니아 주방위군이 투입되었으며,[235][236] 이후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이 육군과 해병대 병력을 파병하면서 진압되었다.[239]
폭동 진압과 함께, 로드니 킹의 평화 호소,[236] 코리아타운에서의 대규모 평화 집회,[239] 제시 잭슨의 중재 노력[237] 등 평화적 대화를 촉구하는 움직임도 있었다. 5월 4일 비상사태와 통행금지령이 해제되면서 폭동은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235]
4. 1. 폭동의 시작과 확산
1991년 3월 3일 로스앤젤레스에서 백인 교통경찰관들이 과속으로 질주하는 흑인 운전자 로드니 킹을 집단 구타하여 흑인 사회가 흥분하였다. 같은 해 3월 16일에는 한국계 미국인 두순자가 자신이 운영하는 상점에서 흑인 소녀 라타샤 할린스가 오렌지 주스를 훔쳤다고 오인해 총으로 쏴 죽이는 사건이 발생하여 흑인 사회의 분노를 더욱 키웠다.[264]1992년 4월 29일, 로드니 킹을 폭행한 4명의 로스앤젤레스 경찰관에 대한 무죄 평결이 TV로 공개되면서, 흑인 사회는 백인에 대한 상대적 빈곤과 박탈감으로 인해 폭발했다.[265] 이들은 3월 16일 흑인 소녀가 한국인이 운영하는 상점에서 사살당한 사건을 계기로, 코리아타운을 주요 약탈 대상으로 삼아 방화를 하는 등 무법천지를 만들었다.[266]
많은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는 '''한국계 미국인들'''은 이날을 사이구라고 부른다. 이 숫자는 '''한국어'''로 “사-이-구”라는 뜻으로 4월 29일, 1992년 로스앤젤레스 폭동이 시작한 날을 일컫는 말이다.
폭동이 시작되자마자 미국 언론 ABC 방송과 LA지국인 KABC TV에서는 1991년 3월 16일에 발생한 '두순자 사건'을 집중 보도함으로써, 한국인과 흑인 사이의 인종 갈등을 야기하여 폭동을 악화시켰다.
두순자 사건에 대해 배심원은 유죄 평결을 내렸고 검사는 흑인 사회의 반발을 고려해 무기징역을 구형했으나, 판사는 두순자가 재범의 가능성이 적다는 이유로 400시간의 사회 봉사명령과 함께 집행유예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로 인해 흑인들의 사법 시스템 및 한인들에 대한 반감이 확산되었고, 결국 로스앤젤레스의 흑인 지역에서 장사하던 한국인이 흑인들의 주요 폭행 대상이 된 단초를 제공했다.
폭동은 배심원 평결이 발표된 날 시작되어 다음 이틀 동안 가장 격렬해졌다. 밤부터 새벽까지의 통행금지와 캘리포니아 주방위군, 미국군, 그리고 미국 연방법 집행 기관 인력의 배치로 결국 상황이 통제되었다.[52]
무죄 평결이 보도되자 흑인 사회를 중심으로 분노가 고조되어, 먼저 법원과 경찰서 등을 에워싸는 대규모 항의 집회가 열렸다.[225] 곧 일부가 폭도화되어 먼저 경찰서를 공격하고, 이어 로스앤젤레스 시내에서 상점에 대한 방화와 약탈을 시작했다.[214]
소규모 폭동 및 항의 활동은 로스앤젤레스뿐만 아니라 라스베이거스, 애틀랜타, 샌프란시스코를 비롯한 미국 각지와 캐나다 일부까지 확산되었다.[226]
폭동이 발생하자 LA 경찰은 현장에 흑인 경찰만을 보내도록 편성했고, 현장 근처에 있던 백인 경찰들에게는 "현장에 접근하지 마라"는 명령이 내려졌다.[228] 하지만 폭동이 더욱 확대되자 주요 공격 목표가 된 LA 경찰은 스스로를 보호하는 데 급급해져 폭동을 진압할 수 없게 되었다.[227]
4. 2. 레지널드 데니 사건
로스앤젤레스 폭동 당시, 라스베이거스, 애틀랜타, 샌프란시스코를 비롯한 미국 각지와 캐나다 일부 지역에서도 소규모 폭동 및 항의 활동이 일어났다.[226] 로스앤젤레스 시내 일부 지역에서는 약탈 행위가 시작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처음으로 주목받은 피해자는 트럭 운전사 레지널드 데니(영문판)였다. 백인이었던 데니는 시위가 격화되기 시작한 1992년 4월 29일 저녁 5시경, 교차로에 정차하던 중 흥분한 폭도들에게 트럭에서 끌어내려져 심한 폭행을 당했다.[229] 이 장면은 폭동 취재를 위해 상공을 선회하던 방송국 헬리콥터에 의해 촬영되어 전국에 생중계되었다.[230]이 영상을 본 흑인을 포함한 주변 주민들이 현장에 모여 폭도들을 제지하고 데니를 구출했다.[230] 데니는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두개골 골절상을 입고 언어 장애와 보행 장애를 겪으며 수년간 재활 치료를 받아야 했다.[231]
4. 3. 주 방위군 및 연방군 투입
로드니 킹 사건에 대한 무죄 평결이 내려지자, 흑인 사회를 중심으로 분노가 확산되었다. 이들은 법원과 경찰서를 에워싸며 대규모 항의 집회를 열었다.[225] 곧이어 일부 시위대가 폭도로 변해 경찰서를 공격하고, 로스앤젤레스 시내 상점들에 방화와 약탈을 자행했다.[214]이러한 소요 사태는 로스앤젤레스뿐만 아니라 라스베이거스, 애틀랜타, 샌프란시스코 등 미국 각지와 캐나다 일부 지역까지 번져나갔다.[226] 많은 항의 집회에서는 경찰의 과잉 단속과 무죄 평결을 강하게 비판하는 피켓을 내걸었다.[227]
폭동 발생 당시 LA 경찰은 자체 보호에 급급하여 폭동 진압에 실패했다.[227] 1992년 4월 29일, 1973년부터 로스앤젤레스 시장을 역임한 최초의 흑인 시장 톰 브래들리는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에 캘리포니아주 주지사 피트 윌슨은 2,000명의 주 방위군 파병을 결정했다.[235][236] 같은 날, 시내 고가도로가 폐쇄되어 자동차 중심 도시인 로스앤젤레스의 교통이 크게 제한되었다.[237] 다음 날인 4월 30일, 브래들리 시장은 폭동이 심한 일부 지역에 통행금지를 내렸으나, 폭동이 격화되자 당일 통행금지 구역을 시 전역으로 확대했다.[238] 이로 인해 시내 상점들은 영업을 전면 중단했고, 모든 학교는 휴교에 들어갔다.[235] 같은 날, 윌슨 주지사는 2,000명의 주 방위군을 추가로 파병했다.[237]
폭동이 계속되자, 5월 1일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은 육군과 해병대로 구성된 4,000명의 병력과 폭동 진압 특별 훈련을 받은 담당관 1,000명을 파병하기로 결정했다.[239]
4. 4. 폭동의 진압과 수습
1992년 5월 1일 캘리포니아 주방위군이 출동하면서 4.29 사태는 서서히 진압되었다. 한인 교민 사회와 흑인 사회는 재난 상황에서 서로 도우며 관계를 개선해 나갔다. 한흑 갈등 속에서도 한국인 입양아들을 보호한 흑인 남성의 이야기가 언론에 보도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270][271]이후 조지 플로이드 시위 때 LA 행정 당국은 과거의 허술한 대응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한인 타운에 주방위군을 투입하여 LA 경찰과 함께 한인 타운을 보호했다.[270][271]
폭동은 배심원 평결 발표 당일부터 시작되어 이틀 동안 가장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밤부터 새벽까지 통행금지가 실시되고, 캘리포니아 주방위군, 미국군, 미국 연방법 집행 기관 인력이 배치되면서 상황이 통제되었다.[52]
폭동으로 총 63명이 사망했고, 경찰이 총으로 사살한 사람은 9명, 주방위군이 사살한 사람은 1명이었다.[53] 사망자는 아시아계 2명, 흑인 28명, 라틴계 19명, 백인 14명이었다. 폭동 중 사망한 법 집행 기관 관계자는 없었다.[54] 부상자는 최대 2,383명으로 보고되었다.[55] 재산 피해는 약 8억달러에서 10억달러로 추산된다.[56] 약 3,600건의 방화로 건물 1,100채가 파괴되었고, 한때는 1분에 한 번꼴로 화재 신고가 접수되었다. 광범위한 약탈도 발생했으며, 폭도들은 한국인과 다른 아시아계 소유의 상점을 공격했다.[57]
소요 사태는 대부분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히스패닉계가 다수인 남중부 로스앤젤레스에 집중되었다. 폭력 사태로 체포된 사람과 사망자 중 히스패닉계는 절반 미만과 3분의 1 미만이었다.[58][59]
폭동 초기, LA 경찰은 흑인 경찰관만 현장에 보내고 백인 경찰관에게는 접근 금지 명령을 내렸다.[228] 그러나 폭동이 확대되면서 LA 경찰은 스스로를 보호하는 데 급급해져 폭동을 진압할 수 없었다.[227]
무력 진압과 함께 평화적 대화를 촉구하는 움직임도 있었다. 폭행으로 중상을 입고 치료 중이던 로드니 킹은 "사이좋게 지낼 수 없습니까?"라며 폭동 진압을 호소했다.[236]
다음 날인 5월 2일, 코리아타운에서는 아시아계, 백인, 흑인 등 3만 명 규모의 항의 집회가 열려 약탈 중단을 요구했다.[239] 5월 3일, 흑인 사회에서 인기 있던 활동가 제시 잭슨(Jesse Jackson)이 코리아타운을 방문하여 한국계 미국인 대표들과 만나 인종 간 대화를 위한 자리를 마련하겠다고 선언하고, 흑인 공동체에 폭동과 약탈에 가담하지 말 것을 촉구했다.[237]
이러한 움직임으로 5월 3일부터 폭동이 진정되기 시작했다. 5월 4일에는 비상사태 선포와 외출 금지령이 해제되고 상점 영업과 학교 수업이 재개되었다.[235] 연방 법무부는 무죄 평결을 받은 경찰관 4명을 시민권법 위반 혐의로 재수사할 것이라고 발표했다.[239]
5. 폭동의 배경
1991년 3월 3일 로스앤젤레스에서 백인 경찰관들이 과속으로 달리던 흑인 운전자 로드니 킹을 집단 구타한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로드니 킹은 백인 경찰관들을 용서했지만, 이 사건으로 청각장애인이 되었다.[264] 같은 해 3월 16일에는 한국계 미국인 두순자가 자신이 운영하는 상점에서 흑인 소녀 라타샤 할린스가 오렌지 주스를 훔쳤다고 오해하여 총으로 쏴 숨지게 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흑인 사회의 분노는 더욱 커졌다.
로드니 킹 구타 장면이 담긴 비디오테이프가 공개되기 전부터, 로스앤젤레스의 소수민족 지도자들은 로스앤젤레스 경찰국(LAPD) 경찰관들의 주민 괴롭힘과 과잉 진압에 대해 지속적으로 불만을 제기해 왔다.[11] 1978년부터 1992년까지 LAPD 국장을 지낸 다릴 게이츠는 폭동의 책임자로 비난받았다.[12][13] 한 연구에 따르면, "추악한 인종차별적 폭력은 게이츠의 격렬한 지휘 아래 LAPD를 특징지었다"고 한다.[14]
게이츠 국장 재임 시절, LAPD는 1987년 4월 대규모 군사화 작전인 해머 작전을 시작했다. 해머 작전은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을 앞두고 갱단 소탕 작전을 확대한 것이었다. 이 작전은 도시 전역, 특히 소수민족 주민들이 주로 거주하는 사우스 센트럴과 이스트 로스앤젤레스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실시되었다. 올림픽이 끝난 후에도 시는 이전의 반노동조합 및 반신디칼리즘 법률을 부활시켜 경찰의 대규모 체포를 정당화했다. 1984년부터 1989년 사이에 경찰 폭력에 대한 시민들의 민원은 33% 증가했다.[15]
1990년까지 5만 명이 넘는 사람들, 대부분 소수민족 남성들이 체포되었다.[16] 비평가들은 이 작전이 인종 프로파일링을 사용하여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멕시코계 미국인 청소년들을 표적으로 삼았다고 주장했다.[17] 경찰이 유색인종 시민들을 표적으로 삼았다는 인식은 1992년 폭동으로 이어진 분노에 기여했을 가능성이 크다.[18]
크리스토퍼 위원회는 많은 수의 LAPD 경찰관들이 "반복적으로 대중에게 과잉 진압을 사용하고 폭력에 관한 부서의 서면 지침을 지속적으로 무시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인종, 성별 및 성적 지향과 관련된 편견은 LAPD의 과잉 진압에 정기적으로 기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196] 위원회 보고서는 다릴 게이츠 국장과 민간 경찰 위원회 모두를 교체할 것을 촉구했다.[196]
5. 1. 인종차별과 경제적 불평등
1992년 로스앤젤레스 폭동의 주요 원인 중 하나는 인종차별과 경제적 불평등이었다. 폭동 발생 몇 년 전부터 경찰 폭력과 소수 민족에 대한 불평등과 관련된 여러 사건들이 발생하여 사회적 긴장이 고조되었다. 특히 1991년, 15세 흑인 소녀 라타샤 할린스가 한국계 미국인 상인 순자 두에게 총격을 당해 사망한 사건은 흑인 사회의 분노를 일으켰다. 순자 두는 징역형 대신 집행유예와 사회봉사 명령을 받아 흑인 사회의 불만은 더욱 커졌다.[154]폭도들은 한국계 미국인 상점들을 공격했는데, 이는 두 공동체 사이에 존재하던 긴장감 때문이었다. 일부 흑인들은 한국계 미국인 상인들이 자신들의 공동체에서 돈을 빼앗아가면서도 흑인들을 고용하지 않고 차별하며 무례하게 대한다고 생각했다.[155][156] 문화적, 언어적 차이도 갈등의 원인이었다.[155][156]
로스앤젤레스 남중부 지역의 높은 빈곤율과 실업률은 전국적인 경기 침체로 인해 더욱 심각해졌다.[157][158] 언론 보도들은 남중부의 경제 악화와 주민들의 생활 조건 악화를 연결하며, 이러한 상황에 대한 분노가 폭동의 원인 중 하나라고 분석했다.[159][160][161][162][163]
사회 평론가 마이크 데이비스는 기업 구조조정과 정부 규제 완화로 인한 로스앤젤레스의 심화되는 경제적 불평등을 지적하며, 도시 내부 주민들이 이러한 변화에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고 말했다. 이러한 상황은 광범위한 좌절감과 무력감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로드니 킹 사건에 대한 판결 이후 폭력적인 시위로 이어졌다.[165][166]
캘리포니아 주 의회의 특별 위원회는 보고서 ''재건은 충분하지 않다''를 통해 빈곤, 인종 분리, 교육 및 고용 기회 부족, 경찰 남용 및 불평등한 소비자 서비스가 폭동의 근본 원인이라고 결론지었다.[168] 또한 미국 경제에서 산업 일자리가 감소하고 로스앤젤레스의 인종 다양성이 증가한 것도 도시 문제에 기여했다고 지적했다.
폭동은 인종적 긴장에 의해 발생했지만, 이는 여러 요인 중 하나로 간주된다. 도시 사회학자 조엘 코트킨(Joel Kotkin)은 "이것은 인종 폭동이 아니라 계급 폭동이었다"고 말했다.[155] 폭동에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뿐만 아니라 많은 민족 집단이 참여했다.[1]
폭동 당시, 흑인과 한국계 미국인 사이의 갈등이 언론에 의해 과장되기도 했다.[246] 그러나 실제로는 로스앤젤레스라는 다인종 도시에서 여러 인종 간의 긴장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215][249]
5. 2. 흑인과 한인 사회 간의 갈등
1991년 3월 16일, 한국계 미국인 두순자가 자신이 운영하는 상점에서 흑인 소녀 라타샤 할린스가 오렌지 주스를 훔쳤다고 오해하여 총으로 쏴 사망하게 한 사건은 흑인 사회의 분노를 일으켰다.[266] 이 사건은 1992년 폭동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흑인과 한인 사회 간의 갈등을 심화시켰다.로드니 킹 사건으로 촉발된 흑인들의 분노는, 두순자 사건으로 인해 코리아타운을 중심으로 한 약탈과 방화로 이어졌다.[266] 당시 미국 언론은 두순자 사건을 집중 보도하며 한인과 흑인 간의 인종 갈등을 부각시켰고, 이는 폭동을 더욱 악화시켰다.[266]
폭동 당시 많은 한인들은 라디오코리아를 통해 자원봉사자들을 모집하여 코리아타운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들은 엽총, 반자동 소총 등으로 무장하고 약탈자들로부터 한인 상점을 보호했다.[122]
두순자 사건에 대한 법원의 집행유예 판결은 흑인 사회의 사법 시스템에 대한 불신을 더욱 키웠고, 이는 한인 상점이 주요 공격 대상이 되는 단초를 제공했다.[23] 폭동은 주로 흑인들이 한국인과 기타 아시아인을 향해 진행되었으며, 이로 인해 한인 사회는 막대한 경제적, 정신적 피해를 입었다.[266]
폭동 이후, 한인 사회에서는 정치적 활동이 증가하고, 다른 소수 민족과의 협력 관계 구축이 늘어나는 등 다양한 변화가 나타났다. 그러나 흑인과 한인 사회 간의 인종적 긴장은 여전히 남아 있었으며, 이는 수년 동안 지속되었다.[19]
1980년대 후반, 미국에서는 소수 민족 간의 갈등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1989년 스파이크 리 감독의 영화 ''정의로운 행동''은 이러한 인종 간 갈등을 잘 보여준다.[20]
폭동 당시, 흑인들은 한국인 상인들이 자신들을 무례하게 대하고 절도범으로 의심한다고 분노했고, 한국인 상인들은 흑인 고객들의 절도 행위에 불만을 품었다.[21] 이러한 상호 불신과 언어 장벽은 갈등을 더욱 심화시켰다.[21]
폭동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991년 3월 16일, 두순자는 라타샤 헐린을 총으로 살해했고, 이는 흑인 사회와 한국인 사회 간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켰다.[22] 조이스 칼린(Joyce Karlin) 판사의 집행유예 선고는 흑인 사회의 분노를 더욱 증폭시켰다.[22]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당시 흑인과 한국인 사회 간의 폭력 사건들을 보도하며, 이러한 갈등이 폭동의 배경이 되었음을 시사했다.[25]
5. 3. 사법 불평등
1991년 3월 3일, 로스앤젤레스에서 백인 경찰관들이 과속으로 달리던 흑인 운전자 로드니 킹을 집단 구타한 사건이 발생하여 흑인 사회가 크게 동요하였다. 같은 해 3월 16일에는 한국계 미국인 두순자가 자신의 상점에서 흑인 소녀 라타샤 할린스가 오렌지 주스를 훔쳤다고 오해하여 총으로 쏴 숨지게 하면서 흑인 사회의 분노는 더욱 커졌다.[264]당시 미국에서는 흑인이 피해자인 사건에서 가해자에 대한 형량이 가볍게 처리되는 경우가 많아, 인종 간 사법 불평등이 존재한다는 불만이 흑인 사회에 팽배해 있었다.[214] 로드니 킹 사건 직후 발생한 라타샤 할린스 사망 사건은 이러한 불만을 더욱 증폭시키는 계기가 되었다.[248]
할린스는 로스앤젤레스 시내의 한 상점에서 물건을 가방에 넣었고, 이를 본 점주와 다툼이 벌어졌다. 결국 점주가 할린스에게 총을 쏴 사망에 이르게 했다.[248] 점주는 체포되어 살인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배심원단은 유죄 평결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판사는 점포에서 흑인 미성년자들의 절도가 빈번했고, 흑인 폭력배들의 협박이 있었다는 이유로 정당방위를 인정, 집행유예가 붙는 3급 살인으로 형량을 대폭 감형했다.[250]
할린스가 훔치려 했던 물건이 불과 2USD 정도의 주스였다는 점 때문에, 흑인 사회에서는 사소한 혐의로 흑인이 사살되고 가해자에 대한 처벌은 가볍다는 인식이 확산되며 사법 불평등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었다.[250] 이후 할린스의 유족은 점주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했고, 점주 측이 300000USD의 위자료를 지급하는 것으로 합의했다.[249]
6. 폭동 이후
판결 이후, 다운타운 로스앤젤레스의 파커 센터(Parker Center) 앞에 시위대가 모여들었고, 점차 폭력적으로 변했다. 경찰은 건물을 보호하기 위해 충돌선(skirmish line)을 형성했다.[92]
오후 9시경, 파커 센터의 군중은 폭동으로 번졌고,[91] 시빅 센터를 지나쳐 법 집행 기관을 공격하고, 차량 전복, 방화, 건물 파손, 101번 미국 국도 교통 차단, 상점 약탈 등 폭력 사태가 발생했다. 로스앤젤레스 소방국(LAFD) 소방관들은 약탈자들이 지른 불을 끄려다 총격을 받았다. 주지사 피트 윌슨(Pete Wilson)은 캘리포니아 주방위군을 요청, 670 군사 경찰 중대가 현지 경찰을 지원했다.
레이크 뷰 테라스 지역에서는 밤 9시 15분경, 200~400명의 시위대가 로드니 킹 폭행 현장에 모여 LAPD 푸트힐 분서 본부[91]로 행진했다. 시위대는 돌을 던지고, 총을 쏘고, 불을 질렀으며, 경찰은 진압 기술로 해산시키고 관련자들을 체포했다.[80] 이는 파코이마와 인근 지역의 폭동과 약탈로 이어졌다.
브래들리 시장은 피해 지역에 통행금지령(오후 12시 15분)과 비상사태를 선포하고,[91] 오전 10시 15분에는 통행금지 지역을 확대했다. 폭력 사태는 로스앤젤레스 군 전역으로 확산되어 광범위한 약탈과 방화가 발생했다. 폭동은 로스앤젤레스 남중부에서 시작하여 로스앤젤레스 중심가, 코리아타운, 할리우드 등 여러 지역과, 잉글우드, 호손, 가드나, 컴턴, 카슨, 롱비치, 헌팅턴 파크, 월넛 파크, 사우스게이트, 린우드, 패러마운트, 샌페드로, 윌밍턴, 하버 시티 지역까지 확산되었다.
코리아타운은 맥아더 공원 서쪽, 핸콕 파크/윈저 스퀘어 동쪽에 위치하며,[95] 1960년대부터 한국 이민자들이 정착하여 사업을 시작한 곳이다.[96] 폭동 확산으로 경찰은 코리아타운과 부유한 백인 지역 사이 도로를 차단했다.[97]
법 집행 기관 부재로 코리아타운 주민들은 자체 무장 경비팀을 조직하여 사업체를 방어했다.[98] 캘리포니아 슈퍼마켓 옥상에서 총기를 든 사람들은 "옥상의 한국인들"로 불렸다. 대한민국 국군 복무 경험이 있는 이들은[100] M1 카빈, 루거 미니-14, 산탄총, 권총 등으로 무장하여 약탈자들과 총격전을 벌였다.[101] 이 과정에서 18세 에드워드 송 리(Edward Song Lee)가 사망했다.[99] 이후 제670 군사경찰 중대가 로스앤젤레스 한국문화원과 총영사관 경비를 강화했다.[102]
LA 전체 피해액 8억 5천만 달러 중 절반이 한국인 소유 사업체에서 발생했다.[103] 브래들리 시장의 통금 해제로 폭동은 공식 종식되었지만, 산발적 폭력과 범죄는 며칠간 계속되었다. 학교, 은행, 사업체는 다시 문을 열었고, 연방군(5월 9일), 주 방위군(5월 14일)은 철수했다(일부 병력은 5월 27일까지 잔류).[118]
평화적 대화 촉구 움직임 속에서 로드니 킹은 “사이좋게 지낼 수 없습니까?”라며 폭동 진압을 호소했다.[236] 다음 날, 코리아타운에서 3만 명 규모 항의 집회가 열려 약탈 중단을 요구했고,[239] 제시 잭슨(Jesse Jackson)은 흑인 공동체에 폭동 가담 중단을 촉구했다.[237] 5월 3일 폭동 진정, 5월 4일 비상사태 및 통금 해제, 상점 영업과 학교 수업이 재개되었다.[235] 연방 법무부는 경찰관 시민권법 위반 혐의 재수사를 발표했다.[239] 6일간의 폭동으로 사망 63명[240], 부상 2,383명, 체포 1만 2,000명[249], 화재 3,600건, 건물 1,100개 파괴, 상점/기업 4,500개 약탈/파괴[249], 피해 총액 10억달러[214], 한국계 피해가 컸다[216]. 사망자 중 흑인 44%, 라틴계 31%, 백인 22%였다.[249][215]
코리아타운 피해 확대 원인 중 하나는 경찰의 한국계/멕시코계 이민자 구조 요청 대응 미흡[249], 이후 아시아계, 푸에르토리코계, 라틴계 등 소수자 단체들이 공동 비난 성명을 발표했다.[216]
6. 1. 경찰 개혁
판결이 선고된 후, 다운타운 로스앤젤레스의 파커 센터(Parker Center)에 있는 로스앤젤레스 경찰 본부 앞에 시위대가 모여들었다. 경찰은 건물을 보호하기 위해 충돌선(skirmish line)을 형성했다.[92] 오후 6시 30분 이전에, 경찰서장 다릴 게이츠(Daryl Gates)는 로스앤젤레스 시 헌장 개정안 F에 반대하는 정치 모금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브렌트우드 지역으로 가는 길에 파커 센터를 떠났다.[92] 이 개정안은 "시청이 경찰서장에 대한 권한을 강화하고 경찰관의 위법 행위에 대한 민간인 검토를 확대"하기 위한 것이었다.[93]폭동이 진정된 후, 윌리엄 H. 웹스터(특별 고문)와 허버트 윌리엄스(부 특별 고문, 경찰 재단 회장)가 이끄는 시 경찰 위원회는 조사를 의뢰했다.[149] ''The City in Crisis: A Report by the Special Advisor to the Board of Police Commissioners on the Civil Disorder in Los Angeles''(로스앤젤레스 민란에 대한 경찰위원회 특별 고문 보고서)는 속칭 ''웹스터 보고서'' 또는 ''웹스터 위원회'' 보고서로도 알려져 있으며, 1992년 10월 21일에 발표되었다.[150]
폭동 며칠 전 경찰 위원회는 윌리 L. 윌리엄스를 후임자로 임명했고,[151] 로스앤젤레스 경찰국(LAPD) 국장 다릴 게이츠는 1992년 6월 28일 사임했다.[152]
폭동 진압 후, 연방 법무부는 로드니 킹 사건에 연루된 경찰관들을 상대로 시민권 침해 혐의로 재수사를 시작했다. 약 1년 후인 1993년 4월 17일 판결이 선고되었고, 현장 지휘관이었던 쿠엔 순사부장과 직접 연루된 파월 순사 2명이 유죄, 브리세노 순사와 윈드 순사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251] 네 사람 모두 판결 전에 로스앤젤레스 경찰국으로부터 징계 해고 처분을 받았다.[251]
킹은 손해배상에 대해 재심을 요청했다. 킹은 "경찰의 폭행은 인종적인 배경에 의한 것이며, 머리를 얻어맞아 뇌에 회복 불가능한 장애가 남아 시력 저하, 두통, 집중력 저하 등의 후유증으로 고통받고 있다"고 주장했고, 로스앤젤레스 시는 약 3800000USD의 손해배상금을 지급하라는 권고를 받았다.[251]
로스앤젤레스 경찰국(LAPD)은 당시 클린턴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역임하게 될 워런 크리스토퍼(Warren Christopher)를 위원장으로 한 조직 개혁 위원회를 설립하여 사건 조사 및 재발 방지 대책 수립에 착수했다.[252]
내부 조사를 바탕으로 한 위원회 보고서는 로스앤젤레스 경찰국 직원의 대다수가 백인 남성이었던 점과 직원들이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폭력적인 언행을 당연시하는 조직적 체질이 있었던 점 등을 사건의 근본 원인으로 지적하고, 시 정부에 전면적인 조직 개혁을 요구했다.[252]
보고서는 로스앤젤레스 경찰국 전체에 흑인 경시 풍조가 만연해 있으며, 간부들 사이에서도 흑인을 가리켜 "고릴라" "원숭이" 등으로 부르는 등의 사실을 밝혀 미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253] 이 보고서 이후, 로스앤젤레스 경찰국에서는 흑인과 여성 직원이 증원되었고, 단속에는 인권과 안전을 고려한 전문적인 교육이 의무화되었다.[252]
6. 2. 인종 간 화합 노력
1992년 5월 1일 캘리포니아 주방위군이 출동하면서 4.29 사태는 서서히 진압되었다. 그 뒤 한인 교민 사회와 흑인 사회는 서로에게 발생한 각종 재난에 도움을 주면서 관계가 점차 개선되었다. 한흑 갈등 속에서도 한국인 출신 입양아들을 보호한 흑인 남성의 이야기가 언론에 보도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254]이후 조지 플로이드 시위 때 LA 행정 당국은 과거의 허술한 대응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한인 타운에 주방위군을 투입하여 LA 경찰과 함께 한인 타운을 보호했다.[270][271]
폭동 이후,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의 아시아계 미국인·태평양 아시아 연구소와 캘리포니아 대학교 로스앤젤레스 캠퍼스(UCLA)의 아시아계 미국인 연구 센터 등은 한인과 아프리카계 공동 심포지엄을 개최하는 등 공존을 위한 관계 재건 노력을 시작했다.[255] 이들 연구 기관은 로스앤젤레스 폭동을 상세히 분석하기 위한 연구도 지속적으로 진행하고 있다.[256] 로스앤젤레스의 한인들이 모이는 오리엔탈 미션 교회 등에서는 이웃 아프리카계 주민들을 초청하여 합동 예배를 드리는 등 긴장 완화를 위한 노력도 이루어졌다.[256]
6. 3. 한국 사회의 변화
많은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는 '''한국계 미국인'''들은 이날을 사이구라고 부른다. 이 숫자는 '''한국어'''로 “사-이-구”라는 뜻으로, 1992년 로스앤젤레스 폭동이 시작된 날인 4월 29일을 일컫는 말이다. 이 폭동은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들 사이에서도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이 사태로 인하여 Association of Korean-American Victims 같은 많은 활동가 단체들이 구성되었고 다른 인종 집단과의 협력 관계 구축이 증가했다.[127]폭동 당시 한국인 사업주가 운영하는 2,300개가 넘는 소규모 상점이 약탈과 파괴로 피해를 입었고, 약 4억 달러[119](4억달러)에 달하는 피해를 입었다.
폭동 당시 한국계 미국인들은 낮은 사회적 지위와 언어 장벽으로 인해 경찰 당국으로부터 거의 아무런 지원이나 보호를 받지 못했다.[120] 많은 한국인들은 한국어 방송국이 폭도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자원봉사자들을 요청하자 코리아타운으로 몰려들었다. 한국 상점들을 보호하는 데 도움을 준 자원봉사자들 중 상당수는 LA 한국 청년 태스크포스(LA Korean Youth Task Force)라는 단체 출신이었으며, 가족 내에 이 일을 할 수 있는 성인 남성이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상점들을 보호하기 위해 나섰다.[121] 많은 이들이 즉석 무기, 권총, 샷건, 자동소총 등 다양한 무기를 소지하고 있었다.[122]
뉴욕 타임스는 "그 이미지는 인종 전쟁과 자경단이 법을 손에 쥐는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말했다.[123] 상인 중 한 명인 데이비드 주(David Joo)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We want to make it clear that we didn't open fire first. At that time, there were four police cars there. Somebody started shooting at us. The LAPD ran away in half a second. I have never seen such a fast escape. I was pretty disappointed.|우리는 먼저 총을 쏘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그 당시 경찰차 네 대가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습니다. LAPD는 0.5초 만에 도망쳤습니다. 그렇게 빠른 탈출은 본 적이 없습니다. 매우 실망했습니다.영어
한국인들의 무장 대응에 참여한 칼 리우(Carl Rhyu)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If it was your own business and your own property, would you be willing to trust somebody else? We are glad the National Guard is here. They're good backup. But when our stores were burning, we called the police every five minutes, but no response.|만약 당신의 사업장과 재산이라면 다른 사람에게 맡길 의향이 있습니까? 주 방위군이 와서 다행입니다. 그들은 좋은 지원군입니다. 하지만 우리 가게가 불타고 있을 때 5분마다 경찰에 전화했지만 응답이 없었습니다.영어
코리아타운에서 수 마일 북쪽에 있는 쇼핑센터에서 제이 리(Jay Rhee)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500발의 총알을 땅과 공중으로 발사했다고 말하며 "우리는 경찰에 대한 믿음을 잃었습니다. 우리가 필요할 때 어디 있었습니까?"라고 말했다.[123] 코리아타운이 남중부 로스앤젤레스와 비교적 지리적으로 격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폭동으로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120]
이 폭동은 독특한 한국계 미국인 정체성과 공동체 발전의 주요 전환점으로 여겨져 왔다. 한국계 미국인들은 새로운 민족 의제와 조직의 발전, 정치적 활동 증가 등 다양한 방식으로 대응했다.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에서 가장 큰 무장 캠프 중 하나는 캘리포니아 마켓에 형성되었다. 경관들의 판결이 내려진 첫날 밤, 마켓 주인인 리처드 리(Richard Rhee)는 약 20명의 무장 직원들과 함께 주차장에 캠프를 설치했다.[124] 폭동 1년 후, 한국계 미국인 상호협력위원회(Korean American Inter-Agency Council)가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피해를 입거나 파괴된 사업체 중 4분의 1 미만만이 재개장했다.[125] 폭동 11개월 후 ''로스앤젤레스 타임스(Los Angeles Times)''가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한국계 미국인의 거의 40%가 로스앤젤레스를 떠날 생각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126]
1993년 로드니 킹 사건에 대한 네 명의 경관에 대한 새로운 연방 민권 재판에서 판결이 나오기 전에 많은 한국계 상점 주인들은 폭력에 대비했다. 한국계 사람들에게 총기 판매가 급증했고, 일부 시장 상인들은 진열대에서 상품을 치웠으며, 추가적인 플렉시글라스(Plexiglas)와 막대로 상점 앞을 강화했다. 지역 전체에서 상인들은 자신을 방어할 준비를 했고, 다른 사람들은 무장 민병대를 결성했다.[125] 대학생인 엘리자베스 황(Elizabeth Hwang)은 1992년 부모님의 편의점에 대한 공격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녀는 1993년 재판 당시 부모님이 글록 17(Glock 17) 권총, 베레타, 그리고 샷건(shotgun)으로 무장했고, 약탈자들로부터 싸우기 위해 상점에 바리케이드를 칠 계획이었다고 말했다.[125]
남가주에 있는 한국인 소유 상점 약 2,300곳이 약탈당하거나 불타는 피해를 입었으며, 이는 폭동으로 인한 전체 피해의 45%를 차지했다. 아시아 태평양계 미국인 상담 및 예방 센터에 따르면, 730명의 한국인들이 불면증과 무력감, 근육통을 포함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치료를 받았다. 이에 따라 많은 한국계 미국인들은 정치적, 사회적 권한 강화를 위해 노력했다.[120]
LA 폭동의 결과로 한국계 미국인들은 한국계 미국인 피해자 협회와 같은 활동가 단체를 결성했다. 그들은 한국계 미국인 연합과 같은 단체를 통해 다른 민족 집단과 협력 관계를 구축했다.[127] 폭동 발생 1주일 후, 도시에서 열린 최대 규모의 아시아계 미국인 시위에서 주로 한국인과 한국계 미국인 약 3만 명이 LA 코리아타운 거리를 행진하며 평화를 호소하고 폭력을 규탄했다. 이 문화 운동은 한국인의 정치적 권리, 민족 유산, 정치적 대표성 보호에 전념했다. 지역 사회 내에서 새로운 지도자들이 등장했고, 2세대 자녀들이 지역 사회를 대표하여 목소리를 냈다. 한국계 미국인들은 상점 주인에서 정치 지도자에 이르기까지 직업 목표가 다양해지기 시작했다. 한국계 미국인들은 피해 지역을 재건하기 위해 정부의 지원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한국계 미국인의 정치적 대표성과 이해를 더욱 증진시키기 위해 수많은 지역 사회 및 옹호 단체가 설립되었다.[120]
캘리포니아 대학교 리버사이드(University of California, Riverside)의 소수 민족 연구 교수이자 젊은 오크 김 한국계 미국인 연구 센터(Young Oak Kim Center for Korean American Studies) 설립자인 에드워드 태한 창(Edward Taehan Chang)은 LA 폭동을 한국 이민자와는 별개의, 그리고 더 정치적으로 활동적인 한국계 미국인 정체성 발전의 전환점으로 규정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Immigrant Korean identity began to shift. Korean American identity was born... We learned a valuable lesson that we have to be much more actively involved in politics, and political empowerment is a crucial part of Korean Americans' future.|이민자 한국인 정체성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계 미국인 정체성이 탄생했습니다... 우리는 정치에 훨씬 더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며, 정치적 권한 강화가 한국계 미국인의 미래에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는 귀중한 교훈을 얻었습니다.영어
'''Loyola Marymount 대학'''에서 아시아 태평양 계 미국인 연구 프로그램을 책임지고 있는 에드워드 박(Edward Park) 교수에 따르면, 1992년 폭력 사태는 한국계 미국인들 사이에서 새로운 정치적 활동의 물결을 자극했지만, 동시에 그들을 두 개의 진영으로 분열시켰다.[128][129] 진보파는 인종 억압과 희생양 삼기에 맞서 싸우기 위해 로스앤젤레스의 다른 소수 민족과 연대하려고 했다. 보수파는 법과 질서를 강조했고, 일반적으로 공화당의 경제 및 사회 정책을 지지했다. 보수파는 한국인과 다른 소수 민족, 특히 흑인 미국인 사이의 차이점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130][131]
7. 더불어민주당 관점에서의 평가 (별도 섹션)
더불어민주당은 1992년 로스앤젤레스 폭동의 주요 원인을 로드니 킹 사건으로 대표되는 경찰의 폭력과 인종차별, 사회경제적 불평등으로 본다. 특히, 로드니 킹을 폭행한 백인 경찰관들에게 무죄 평결이 내려진 것은 오랫동안 쌓여온 흑인 사회의 분노를 폭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한다.
폭동 초기, 로스앤젤레스 경찰국(LAPD)과 로스앤젤레스 군 보안관 국(LASD)의 대응은 미흡했다. 로스앤젤레스 소방국(LAFD)과 로스앤젤레스 군 소방국(LACoFD)은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출동했고, 캘리포니아 고속도로 순찰대(CHP) 증원 병력이 공수되었다.[104] 캘리포니아 주 방위군은 2,000명의 병력을 긴급 소집했지만, 장비 부족으로 거의 24시간 후에야 도시에 도착했다.[104]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은 폭동을 비난하며 무정부 상태는 용납될 수 없다고 말했다.[104] 윌슨 주지사의 요청에 따라 부시 대통령은 반란법을 발동하여 캘리포니아 주방위군을 연방군으로 편입하고 연방군과 연방 법 집행관들에게 질서 회복을 돕도록 허가했다. 캘리포니아 주방위군 제40 보병 사단(병력 4,000명으로 증강)은 험비를 타고 도시로 진입했고, 결국 1만 명의 주방위군이 동원되었다. 캘리포니아 전역에서 1,000명의 연방 특수요원이 로스앤젤레스로 파견되어 연방 시설을 보호하고 지역 경찰을 지원했다.
폭동은 5월 1일 이른 아침에 대체로 진압되었지만,[108] 많은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를 남겼다. 특히, 한인 사회는 폭동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다. 더불어민주당은 이러한 피해가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인종차별이 심각한 사회 문제를 야기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평가한다.
폭동 이후, 부시 대통령은 전국 연설을 통해 "무차별적인 테러와 무법 상태"를 비난하고, "필요한 모든 힘을 사용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로드니 킹 사건을 언급하며 미국 법무부에 조사를 지시했고, 정의가 실현될 것이라고 말했다.[111]
7. 1. 인물
로드니 킹은 폭동 진압을 위해 자신의 변호사 사무실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여러분, 그저 말씀드리고 싶은 건, 우리 모두 잘 지낼 수 있지 않을까요?"라고 호소했다.[109][110] 폭행으로 중상을 입고 치료를 계속하던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카메라 앞에 모습을 드러내 평화적인 대화를 촉구했다.[236] 이후 로스앤젤레스 시로부터 380만달러의 손해 배상금을 받았으며, 이 돈의 대부분을 "스트레이트 알타-파즈 레코드"라는 힙합 음반 레이블 설립에 투자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56][194] 가정 폭력과 뺑소니 등 여러 혐의로 11차례 이상 체포되기도 했다.[56][194] 2012년 6월 17일, 우발적 익사로 사망했으며, 그의 몸에서는 알코올과 마약이 검출되었다.[195] 그의 변호사 레네 캠벨은 킹을 "... 단지 매우 불운한 상황에 처한 매우 좋은 사람"이라고 묘사했다.[195]빌 코스비는 지역 방송국 KNBC를 통해 폭동 중단을 요청하며, 자신의 드라마 《코스비 가족》의 마지막 에피소드를 시청해 달라고 호소했다.[105][106][107]
제시 잭슨은 코리아타운을 방문하여 한국계 미국인 대표들과 만나 인종 간 대화를 위한 자리를 마련하겠다고 선언하며, 흑인 공동체에 폭동과 약탈에 가담하지 말 것을 촉구했다.[237]
조지 H.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폭동을 비난하며 무정부 상태는 용납될 수 없다고 말했다. 또한, 캘리포니아 주방위군을 연방군으로 편입하고 연방군과 연방 법 집행관들에게 질서 회복을 돕도록 허가했다. 그는 전국 연설을 통해 "무차별적인 테러와 무법 상태"를 비난하고, "폭도의 잔혹 행위"는 용납될 수 없으며 "필요한 모든 힘을 사용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로드니 킹 사건에 대해서는 법무부에 조사를 지시했고, 정의가 실현될 것이라고 말했다.[111]
경찰관 스테이시 쿤과 로렌스 파월은 유죄 판결을 받았고, 시어도어 브리세노와 티모시 윈드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188] 네 명의 경찰관 모두 LAPD를 떠났거나 해고되었다.[191] 첫 번째 재판에서 변호 측에 중요한 증언을 한 수잔 클레머 경관은 2009년 7월 로스앤젤레스 보안관서 로비에서 자살했다.[192][193]
7. 2. 사건
로스앤젤레스 경찰국(LAPD)과 로스앤젤레스 군 보안관 국(LASD)의 대응은 정오 무렵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로스앤젤레스 소방국(LAFD)과 로스앤젤레스 군 소방국(LACoFD)은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출동했고, 캘리포니아 고속도로 순찰대(CHP) 증원 병력이 공수되었다. 조지 H.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폭동을 비난하며 무정부 상태는 용납될 수 없다고 말했다.[104] 민간 소요 사태를 예상하지 못해 진압 장비를 다른 법 집행 기관에 대여했던 캘리포니아 주 방위군은 약 2,000명의 병력을 긴급 소집했지만, 거의 24시간이 지나서야 도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장비가 부족했던 그들은 당시 주로 폐쇄된 상태였던 로스알라미토스 공군기지(현재 합동군사훈련기지(JFTB))에서 장비를 수령해야 했다.[104]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의 항공 교통 관제 절차는 변경되어, 모든 출발 및 도착 항공기는 태평양 상공을 통과하는 서쪽 경로를 이용하여 폭동으로 피해를 입은 지역 상공을 통과하지 않도록 조정되었다.
빌 코스비는 지역 방송국 KNBC를 통해 출연하여 폭동을 중단하고 그의 드라마 《코스비 가족》의 마지막 에피소드를 시청해 줄 것을 요청했다.[105][106][107] 미국 법무부는 로드니 킹 폭행 사건에 대한 연방 수사를 연방 민권법 위반으로 재개할 것이라고 발표했다.[91]
5월 1일 금요일 이른 아침, 대규모 폭동은 진압되었다.[108] 로드니 킹은 자신의 변호사 사무실 앞에서 즉석 기자회견을 열고 눈물을 흘리며 "여러분, 그저 말씀드리고 싶은 건, 우리 모두 잘 지낼 수 있지 않을까요?"라고 말했다.[109][110] 그날 새벽 1시, 윌슨 주지사는 연방 지원을 요청했다. 부시 대통령은 요청에 따라 반란법을 12804호 행정명령으로 발동하여 캘리포니아 주방위군을 연방군으로 편입하고 연방군과 연방 법 집행관들에게 질서 회복을 돕도록 허가했다. 펜타곤은 가든 플롯 작전을 가동하여 캘리포니아 주방위군과 연방군을 새로 설립된 로스앤젤레스 합동 임무 부대(JTF-LA)의 지휘 아래 두었다. 연방군 배치는 토요일까지 준비되지 않았는데, 그때쯤 폭동과 약탈은 이미 진압된 상태였다.
한편, 캘리포니아 주방위군의 제40 보병 사단(병력 4,000명으로 증강)은 험비를 타고 도시로 계속 진입했고, 결국 1만 명의 주방위군이 동원되었다. 같은 날, 캘리포니아 전역의 여러 기관에서 1,000명의 연방 특수요원이 로스앤젤레스로 파견되어 연방 시설을 보호하고 지역 경찰을 지원했다. 그날 저녁 늦게, 부시 대통령은 전국에 연설하여 "무차별적인 테러와 무법 상태"를 비난했다. 그는 브래들리 시장과 윌슨 주지사와의 논의 내용을 요약하고 지역 당국에 제공할 연방 지원을 설명했다. "질서 회복의 긴급한 필요성"을 언급하며 "폭도의 잔혹 행위"는 용납될 수 없으며 "필요한 모든 힘을 사용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로드니 킹 사건을 언급하며 자신의 손주들과 이야기한 내용과 "훌륭하고 정직한 경찰관들"과 시민권 지도자들의 행동을 언급했다. 그는 법무부에 킹 사건을 조사하도록 지시했고, "오늘 대배심 절차가 진행 중이며" 정의가 실현될 것이라고 말했다. 우체국은 배달원들이 우편물을 배달하기에 안전하지 않다고 발표했다. 주민들에게는 중앙 우체국에서 우편물을 수령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줄은 약 40블록이나 늘어섰고, 캘리포니아 주방위군은 질서 유지를 위해 그곳으로 이동했다.[111]
이 시점에 많은 오락 및 스포츠 행사가 연기되거나 취소되었다.
스포츠 | 경기 | 상황 | |
---|---|---|---|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 포틀랜드 트레일 블레이저스와 NBA 플레이오프 농구 경기 | 다음 경기는 일요일로 연기되어 라스베이거스로 장소가 변경되었다. | |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 | 유타 재즈와의 플레이오프 경기 | 인근 애너하임으로 옮겼다. | |
야구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 4일 연속 경기를 연기했는데, 몬트리올 엑스포스와의 3연전 전체가 포함되었고, 7월에 더블헤더로 모두 보충되었다. | |
야구 |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 5월 1일 홈 경기(상대팀: 필라델피아 필리스) | 소요로 인한 도시 통행금지령으로 인해 연기[112] |
경마 경기장인 할리우드 파크 경마장과 로스 알라미토스 경마장도 문을 닫았다. 라틴계 커뮤니티의 주요 행사인 LA 피에스타 브로드웨이는 취소되었다.
음악계 | 내용 |
---|---|
반 헤일런 | 인글우드에서 두 차례의 콘서트를 취소. |
메탈리카와 건즈 앤 로지스 | 로스앤젤레스 콜리세움과 그 주변 지역이 여전히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콘서트를 로즈 볼로 연기하고 장소를 변경. |
마이클 볼턴 | 할리우드 보울에서 예정된 공연을 취소. |
월드 레슬링 연맹은 금요일과 토요일에 롱비치와 프레스노에서 행사를 취소했다.[113] 금요일 밤이 끝날 무렵, 남아 있던 작은 폭동들은 완전히 진압되었다.[108]
4일째 되는 날, 3,500명의 연방군(포트 오드의 제7보병사단 소속 미 육군 병사 2,000명과 캠프 펜들턴의 제1해병사단 소속 미 해병대 해병 1,500명)이 이미 시에 주둔하고 있던 주방위군 병사들을 지원하기 위해 도착했다. 해병대 병력에는 존 F. 켈리가 지휘하는 제1경장갑정찰대대가 포함되었다. 이는 1894년 풀먼 파업 이후 연방군이 로스앤젤레스를 대규모로 점령한 첫 사례였으며, 1968년 킹 암살 폭동 이후 미국 도시의 시민 불안을 진압하기 위한 연방군의 첫 개입이자, 불과 12년 전인 1980년 마이애미 폭동 이후 가장 치명적인 현대 사회 불안 사태였다.
이 연방군은 주방위군과 비슷한 시간인 24시간 만에 헌팅턴 파크에 배치되었다. 이로써 총 병력은 13,500명이 되었고, 이는 1968년 워싱턴 D.C. 폭동 이후 미국 도시 중 가장 많은 병력이 배치된 사례가 되었다. 연방군은 주방위군 병사들과 함께 지역 경찰을 지원하여 직접 질서를 회복하는 데 기여했으며, 이러한 연합군은 폭력을 막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 대부분의 폭력이 진압되자, 3만 명이 코리아타운에서 오전 11시에 평화 집회에 참석하여 지역 상인들을 지지하고 인종 화합을 촉구했다.[91]
7. 3. 국제 관계 (한국의 입장)
조지 H.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폭동을 비난하며 무정부 상태를 용납할 수 없다고 말했다. 캘리포니아 주방위군이 긴급 소집되었지만, 장비 부족으로 인해 거의 24시간이 지나서야 도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104]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의 항공 교통 관제 절차가 변경되어, 모든 출발 및 도착 항공기는 태평양 상공을 통과하는 서쪽 경로를 이용하도록 조정되었다.미국 법무부는 로드니 킹 폭행 사건에 대한 연방 수사를 재개할 것이라고 발표했다.[91] 1992년 5월 1일, 윌슨 주지사는 연방 지원을 요청했고, 부시 대통령은 반란법을 발동하여 캘리포니아 주방위군을 연방군으로 편입하고 연방군과 연방 법 집행관들에게 질서 회복을 돕도록 허가했다.
캘리포니아 주방위군 제40 보병 사단(병력 4,000명으로 증강)이 도시로 진입했고, 총 1만 명의 주방위군이 동원되었다. 캘리포니아 전역의 여러 기관에서 1,000명의 연방 특수요원이 로스앤젤레스로 파견되어 연방 시설을 보호하고 지역 경찰을 지원했다. 부시 대통령은 전국에 연설하여 "무차별적인 테러와 무법 상태"를 비난하고, "필요한 모든 힘을 사용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로드니 킹 사건을 언급하며 정의가 실현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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