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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오키나와 강간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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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95년 오키나와 미군 강간 사건은 1995년 9월 오키나와에서 미군 병사 3명이 12세 소녀를 납치, 강간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미일 지위 협정(SOFA)에 따른 미군 측의 특권적인 대우, 일본 사법 당국의 제한적인 수사, 용의자 이송 지연 등으로 인해 오키나와 주민들의 반미 감정을 폭발시켰다. 사건 이후 오키나와에서는 대규모 항의 시위가 벌어졌으며, 미일 SOFA 개정 및 미군 기지 축소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사건의 가해자들은 처벌을 받았으며, 관련자들의 부적절한 발언으로 논란이 일기도 했다. 이 사건은 일본 사회의 반미 감정을 증폭시키고 SOFA 개정 논의를 촉발했으며, 오키나와 반기지 운동을 심화시키는 등 일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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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오키나와 강간사건
사건 개요
위치오키나와현 긴정
발생일1995년 9월 4일
유형아동 강간, 아동 유괴, 고문
피해자12세 오키나와 소녀
가해자마커스 디온 길 (Marcus Dion Gill)
로드리코 하프 (Rodrico Harp)
켄드릭 모리스 레뎃 (Kendrick Maurice Ledet)
무기덕트 테이프
판결유죄 인정
유죄 판결길, 하프:
상해를 입힌 강간
레뎃:
공모
형량길, 하프:
징역 7년
레뎃:
징역 6년 6개월

2. 사건의 배경

1995년 오키나와 강간 사건은 단순한 형사 사건을 넘어 오키나와 내 미군 주둔에 대한 뿌리 깊은 반감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오키나와현 경찰은 미 해병대원들의 범행 연루를 확신하고 체포 영장을 청구했지만, 일미 지위 협정(SOFA)으로 인해 수사에 어려움을 겪었다.[40][41]

이 사건은 오키나와 주민들의 분노를 일으켜, 오키나와현 의회를 비롯한 여러 자치단체에서 항의 결의를 채택하게 만들었다.[42] 1995년 10월 21일에는 기노완시에서 대규모 현민 총궐기 대회가 열렸고, 오타 마사히데 지사를 포함한 8만 5천여 명(주최 측 발표)이 참여하여 본토 복귀 이후 최대 규모의 항의 시위로 기록되었다.[43][44][45]

이러한 움직임은 미군 기지 정리 및 축소, 일미 지위 협정 재검토 요구로 이어졌고, 오키나와현 지사는 일본 정부에 강력히 문제 해결을 촉구했다.[44][46] 이후 미군 기지 이전 문제가 논의되었으나, 이전 비용 문제 등으로 인해 난항을 겪고 있다.

2. 1. 미일 지위 협정 (SOFA)

일미 지위 협정에 따르면, 피의자가 미국 군인인 경우, 그 신병이 미국 측에 있을 때 기소될 때까지는 미국이 피의자의 구금을 계속하도록 되어 있었다.[40][41] 따라서, 설령 체포 영장이 발부되더라도 일본 측 수사 당국은 기소 전에는 체포 영장을 집행할 수 없었고, 피의자의 신병을 구속하여 취조하는 실질적인 수사 수단을 취할 수도 없었다.

이러한 미군 병사의 특권적인 취급으로 인해 사건 수사에 지장을 초래하면서, 오키나와현 주민들 사이에서 반기지 감정이 폭발하여, 오키나와현 의회를 비롯한 오키나와현 내의 자치단체에서 미국군에 대한 항의 결의가 잇따라 채택되었다.[42] 이러한 움직임은 오키나와에 집중된 미군 기지의 정리·축소와 일미 지위 협정의 재검토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44]

같은 해 10월, 일미 양국 정부 간에 "일미 지위 협정 제17조 5(c) 및, 형사 재판 절차에 관한 일미 합동 위원회"가 열렸고,[47] 일미 지위 협정에 대해서는 운용을 개선(개정이 아님)하기로 하여, 다음과 같이 합의했다.[48]

  • 미국은, 살인 또는 강간이라는 흉악한 범죄의 특정 경우에 일본이 행할 수 있는 피의자의 기소 전 구금의 이전에 대한 어떠한 요청에도 '''호의적인 고려'''를 기울인다. 미국은, 일본이 고려되어야 한다고 믿는 기타 특정 경우에 대해 일본이 합동 위원회에서 제시할 수 있는 특별한 견해를 충분히 고려한다.
  • 일본은, 일본이 1에 언급된 특정 경우에 중대한 관심을 가질 때, 구금의 이전에 대한 요청을 합동 위원회에서 제기한다.

2. 2. 오키나와의 미군 기지 문제

오키나와현 경찰은 여러 증거를 통해 해병대원의 사건 연루가 명백하다고 판단하여 체포 영장 발부를 청구했다. 그러나 일미 지위 협정에 따르면, 피의자가 미국 군인인 경우, 그 신병이 미국 측에 있으면 기소될 때까지는 미국이 피의자의 구금을 계속하도록 되어 있었다.[40][41] 따라서 일본 측 수사 당국은 기소 전에는 체포 영장을 집행할 수 없었고, 피의자를 구속하여 조사하는 실질적인 수사 수단을 취할 수 없었다.

이러한 미군 병사의 특권적인 취급은 사건 수사에 지장을 초래했고, 오키나와현 주민들 사이에 잠재되어 있던 반기지 감정을 폭발시켰다. 오키나와현 의회, 오키나와시, 기노완시 의회를 비롯하여 오키나와현 내의 자치단체에서 미국군에 대한 항의 결의가 잇따라 채택되었다.[42] 1995년 10월 21일에는 기노완시에서 사건에 항의하는 현민 총궐기 대회가 열렸고, 오타 마사히데 오키나와현 지사를 비롯한 약 8만 5천 명(주최 측 발표)의 현민이 참가했다. 이는 본토 복귀 후 최대 규모의 항의 대회였고, 언론에서 크게 보도되었다.[44][45] 이러한 움직임은 오키나와에 집중된 미군 기지의 정리·축소와 일미 지위 협정의 재검토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고,[44] 오키나와현 지사도 정부를 향해 강력하게 그 실행을 촉구했다.[46]

같은 해 10월, 일미 양국 정부 간에 "일미 지위 협정 제17조 5(c) 및, 형사 재판 절차에 관한 일미 합동 위원회"가 열렸고,[47] 일미 지위 협정에 대해서는 운용을 개선하기로 합의했다.[48] 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미국은 살인 또는 강간이라는 흉악한 범죄의 특정 경우에 일본이 행할 수 있는 피의자의 기소 전 구금 이전에 대한 어떠한 요청에도 '''호의적인 고려'''를 기울인다. 미국은 일본이 고려되어야 한다고 믿는 기타 특정 경우에 대해 일본이 합동 위원회에서 제시할 수 있는 특별한 견해를 충분히 고려한다.

# 일본은 1에 언급된 특정 경우에 중대한 관심을 가질 때, 구금 이전에 대한 요청을 합동 위원회에서 제기한다.

한편, 오키나와에 소재한 미군 기지의 정리 축소에 대해서는, 일본 본토 또는 으로의 기지 기능 이전을 통해 실현하는 방향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일본 본토로의 기지 기능 이전과 관련하여 지역 자치단체의 의향과 관계없이 일미 정상급에서 기정사실화되는 것에 대한 반발 외에도, 기지 이전에 따른 비용을 일본 측에 대부분 부담(일설에는 3조)하도록 요구하는 등, 일본 측의 반발을 초래하여 앞날이 불투명하다.

3. 사건의 전개

1995년, 세 명의 미군 병사와 다른 한 명의 미 해병이 차를 몰던 중, 마커스 길은 동료들에게 "미친 짓을 할 생각을 해본 적이 있냐"고 물었다. 곧 이들은 강간을 어떻게 저지를지에 대해 이론적으로 대화하기 시작했다. 길은 증언에서 켄드릭 레뎃이 로드리고 하프를 캠프 킨서로 돌려보내기 직전에 실제로 강간을 해보자고 제안했다고 주장했다.[5] 이들은 가데나 공군 기지의 상점으로 가서 콘돔과 전기 테이프를 구입했다. 이후 4시간 동안 범행 대상을 찾았으며, 한때 하프에게 붙잡혔다가 건물 안으로 도망간 여성을 골목길에서 납치하려 시도하기도 했다.[6]

같은 날 오후 8시, 이들은 피해자가 집에서 노트 한 권을 사기 위해 잠시 들른 일반 상점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피해자가 나오자 하프가 접근해 길을 물었고, 이때 레뎃이 피해자를 때리고 목을 잡아 차 안으로 끌어당겼으며 하프가 이를 도왔다. 차 안에서 하프는 피해자의 입, 손, 발목을 테이프로 묶었고, 레뎃은 눈에 테이프를 붙였다. 그들은 블루 비치 훈련장[7]으로 이동했고, 검찰에 따르면 하프와 레뎃은 피해자를 차에서 내리게 한 후 길이 피해자의 바지를 벗기고 얼굴과 복부를 때린 뒤 다시 차에 밀어 넣어 강간했다.[8] 그 후 길의 법정 증언에 따르면, 그와 레뎃은 범행에 대해 농담을 나눴고, 레뎃은 속옷만 입은 채 밴으로 다시 들어갔고, 그 후 하프가 안으로 들어가 그녀를 강간했다.

이후 소녀는 집을 찾아 어머니에게 전화하여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했고, 그녀의 어머니는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피해자의 묘사를 바탕으로 렌터카의 정확한 번호판을 포함하여 용의자들을 신속하게 식별할 수 있었다.

당초 실행범은 4명이었으나, 그 중 1명은 소녀가 너무 어려 강간에 가담하지 않았다. 실행범 3명은 흑인(黒人)이었기 때문에 "이 체포는 인종차별이다"라고 반복해서 언론에 주장했지만, 그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3. 1. 범행 과정

1995년 9월 4일 오후 8시경, 오키나와현 구니가미군(国頭郡) 킨초(金武町)의 캠프 한센(キャンプ・ハンセン)에 근무하던 미 해군 수병 마커스 길(22세), 미 해병대 일등병 로드리고 하프(21세), 그리고 미 해병대 일등병 켄드릭 레뎃(20세) 3명은 기지 내에서 빌린 렌터카를 이용했다. 이들은 오키나와 본섬(沖縄本島) 북부 상가에서 쇼핑 중이던 여자 초등학생(12세)을 납치했다.[6]

세 명의 범인과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미 해병 한 명이 차를 몰고 다니는 동안, 길은 그들에게 "미친 짓을 할 생각을 해본 적이 있냐"고 물었고, 이들은 곧 강간을 어떻게 저지를지에 대한 이론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길은 증언에서 레뎃이 하프를 캠프 킨서로 돌려보내기 직전에 실제로 해보자고 제안했다고 주장했다.[5] 이들은 하프와 레뎃이 콘돔과 전기 테이프를 구입할 가데나 공군 기지의 상점으로 향했다. 이후 4시간 동안 범행 대상을 물색했으며, 한때 하프에게 붙잡혔다가 건물 안으로 도망간 여성을 골목길에서 납치하려 시도하기도 했다.[6]

오후 8시, 이들은 피해자가 집에서 노트 한 권을 사기 위해 잠시 들른 일반 상점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피해자가 나오자 하프가 접근해 길을 물었고, 이때 레뎃이 피해자를 때리고 목을 잡아 차 안으로 끌어당겼으며 하프가 이를 도왔다. 차 안에서 하프는 피해자의 입, 손, 발목을 테이프로 묶었고, 레뎃은 눈에 테이프를 붙였다. 그들은 블루 비치 훈련장[7]으로 이동했고, 검찰에 따르면 하프와 레뎃은 피해자를 차에서 내리게 한 후 길이 피해자의 바지를 벗기고 얼굴과 복부를 때린 뒤 다시 차에 밀어 넣어 강간했다.[8] 그 후 길의 법정 증언에 따르면, 그와 레뎃은 범행에 대해 농담을 나눴고, 레뎃은 속옷만 입은 채 밴으로 다시 들어갔고, 그 후 하프가 안으로 들어가 그녀

3. 2. 수사 과정

오키나와현 경찰은 여러 증거를 통해 해병대원의 사건 연루가 명백하다고 판단하여 9월 7일 체포 영장 발부를 청구했다. 그러나 일미 지위 협정에 따르면, 피의자가 미국 군인인 경우, 그 신병이 미국 측에 있을 때 기소될 때까지는 미국이 피의자의 구금을 계속하도록 되어 있었다[40][41]. 따라서 체포 영장이 발부되더라도 일본 측 수사 당국은 기소 전에는 체포 영장을 집행할 수 없었고, 피의자의 신병을 구속하여 취조하는 실질적인 수사 수단을 취할 수 없었다.

이러한 미군 병사의 특권적인 취급으로 인해 사건 수사에 지장을 초래하면서, 오키나와현 주민들 사이에서 반기지 감정이 폭발했다. 오키나와현 의회, 오키나와시, 기노완시 의회를 비롯하여 오키나와현 내의 자치단체에서 미국군에 대한 항의 결의가 잇따라 채택되었다[42].

같은 해 10월, 일미 양국 정부 간에 "일미 지위 협정 제17조 5(c) 및, 형사 재판 절차에 관한 일미 합동 위원회"가 열렸고[47], 일미 지위 협정에 대해서는 운용을 개선하기로 하여, 다음과 같이 합의했다[48].

  • 미국은, 살인 또는 강간이라는 흉악한 범죄의 특정 경우에 일본이 행할 수 있는 피의자의 기소 전 구금의 이전에 대한 어떠한 요청에도 '''호의적인 고려'''를 기울인다. 미국은, 일본이 고려되어야 한다고 믿는 기타 특정 경우에 대해 일본이 합동 위원회에서 제시할 수 있는 특별한 견해를 충분히 고려한다.
  • 일본은, 일본이 1에 언급된 특정 경우에 중대한 관심을 가질 때, 구금의 이전에 대한 요청을 합동 위원회에서 제기한다.

3. 3. 재판 과정

변호사의 권유로 일본 법원이 범죄를 자백하고 뉘우치는 사람에게 더 관대하다는 말을 듣고, 길(Gill)은 강간 혐의를 인정했다.[21] 그러나 그는 편지와 부모님과의 전화 통화에서 경찰에 의해 조작되어 허위 진술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으며, 동의하지 않으면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주장했다.[21] 다른 두 사람(하프, 레데트)은 재판 내내 강간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공모 혐의는 인정했다.[23]

길은 재판관들에게 범죄가 있기 몇 주 전부터 업무 관련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고, 과체중으로 인해 신체 검사에서 불합격하여 미국으로의 전출 명령이 취소되면서 스트레스가 더욱 심해졌다고 설명했다.[24] 그의 변호사는 이것이 그에게 살인적 사고를 일으켰다고 주장했다.[25]

1996년 12월 11일 재판에서, 하프(Harp)는 납치 및 강간에 대한 자신의 역할을 자세히 설명한 진술이 법정에서 낭독되었다. 그는 자신이 피해자를 강간한 적이 없다는 점을 수사관들에게 정정하려고 했고, 미국 경찰의 강압에 의해 자신의 범죄를 자백하는 진술서에 서명했다고 말했다. 또한 변호사가 서명하기 전에 진술서를 명확하게 읽었는지 질문했을 때 아니라고 답했다.[26]

재판 자체는 통역사가 피고인의 빠른 말을 완전히 번역하지 못하는 등 언어 장벽으로 인해 복잡함을 겪었다.[27] 길은 강간 자체를 자백하려는 자신의 의지가 자신의 뉘우침과 사건에 대한 설명이 가장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주장하며, 재판 내내 강간에 대해 자세하게 증언한 것에 대해 자랑했다. 재판이 끝나갈 무렵, 그는 재판관들에게 "오늘 제가 한 일을 여러분 중 몇 명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자신의 증언에 대해 말했다.[28]

검사들은 각 남성에 대해 10년의 형량을 권고했다. 재판관은 레데트(Ledet)에게 6년 6개월을 선고했고, 길과 하프에게는 7년의 징역과 가혹한 노동을 선고했는데, 이는 당시 일본 기준으로 평균보다 약간 긴 형벌로 여겨졌다.[29] 그들의 가족은 또한 일본에서 흔한 관행인 피해자의 가족에게 금전적 배상을 지불했다.

하프와 레데트는 형량에 불복하여 항소할 의사를 밝혔지만, 변호사의 설득으로 항소를 포기했다. 길은 변호사가 5년을 초과하는 형을 받으면 항소할 계획이었다고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항소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1996년 3월 7일, 나하 지방 법원은 3명에게 징역 6년 6개월에서 7년의 실형 판결을 선고했으며, 이 중 2명은 이후 후쿠오카 고등 법원 나하 지부에 항소했지만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50]

피고인이 된 해병대원의 가족은 "인종 차별에 의한 날조다", "젊은이들이 일본으로 끌려가려 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일본을 방문했다. 방일 후에도 "오키나와에서는 배심원에게 좋게 보이지 않으니 재판이 우리에게 불리해진다. 그러니 재판 장소를 규슈로 옮겨라" 등 피고인의 아내 등이 주장하는 모습이 일본과 미국의 양측 언론에 보도되었다. 피고인 가족은 울면서 실신하는 모습까지 보였지만, 당시 일본에는 재판원 제도가 도입되지 않았기 때문에(2009년 시작) 이들의 주장은 빗나간 헛수고로 끝났다. 또한 문화적으로 백인·흑인이 얽힌 인종 차별 문제에 익숙하지 않아 전혀 동정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고, 오히려 반감을 부추기는 결과가 되어 여론에서도 상대받지 못했다.[52]

4. 사건에 대한 반응

이 사건은 일본 국내외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특히 미일 지위 협정(SOFA)에 대한 비판 여론이 거셌다.


  • 언론 보도 및 여론: 일본 언론은 용의자들의 얼굴 사진을 거의 보도하지 않았는데, 이는 인종차별적 논란을 우려했기 때문이다.[9] 그러나 이 사건은 SOFA에 대한 대중의 분노를 일으켰고, 오키나와 주민들과 일본인들 사이에서 반미 감정이 고조되는 결과로 이어졌다.[10]
  • 오키나와 현의 반응: 오키나와현 의회는 미군의 행동에 항의하는 결의안을 채택했고,[14] 1995년 10월 21일 기노완시에서는 대규모 항의 집회가 열렸다.[15] 이 집회에는 오타 마사히데 당시 오키나와 현 지사를 포함하여 약 85,000명이 참가했으며, 1960년 조약 체결 이후 오키나와에서 열린 가장 큰 시위였다.[16][17]
  • 미국 정부의 반응: 미국은 당초 SOFA 규정에 따라 용의자들을 구금했지만,[10] 일본의 강한 반발에 따라 흉악 범죄의 경우 기소 전 용의자 인도를 고려하기로 합의했다.[11][19] 이는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하시모토 류타로 일본 총리 간의 긴급 회담을 통해 이루어졌다.
  • 미군 관계자의 부적절한 발언: 당시 미국 태평양 사령부 사령관이었던 리처드 C. 매케 미 해군 제독은 용의자들의 행동에 대해 "차를 빌릴 돈으로 [일본의 매춘] 여자를 살 수 있었을 것"이라는 발언으로 물의를 빚었다.[20] 이 발언으로 인해 매케는 해임되고 계급 강등 및 연금 삭감 조치를 당했다.[20]
  • 기타 반응:
  • 현지 출신 뮤지션 키나 쇼키치는 피해 여아를 위한 추모곡을 만들었다.[59]
  • 미국의 TV 드라마 NCIS에서는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한 에피소드가 제작되기도 했다.
  • 2008년에는 이 사건을 바탕으로 한 영화 『레이, 첫 호흡』이 제작되었으나, 주일 미 해병대는 상영을 불허했다.[60]
  • 2015년에는 장 융커만 감독이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했다.
  • 1998년 6월 12일, 방위 시설청은 피해 소녀에게 미군이 합의금을 지불하고, 일본 정부도 위로금을 지급하고 있음을 밝혔다.
  • 2003년 4월 15일, 참의원 외교 방위 위원회에서 범인 전원이 형기를 마치고 석방되어 귀국했으며, 불명예 제대(OTH)한 것이 밝혀졌다.

4. 1. 오키나와 주민들의 분노

일본 언론은 수사 용의자들의 얼굴 사진을 거의 보도하지 않았다. 이는 강간 사건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용의자들의 인종이 알려질 경우 인종차별적 색채를 띠며 더욱 악화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요코타 주일 미군 사령부의 미국 군무관은 용의자들의 사생활 보호를 위해 인종을 공개할 수 없다고 밝혔다.[9]

사건 이후, 미일 지위 협정(SOFA)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커졌다. 이 협정은 미국 군인에게 치외 법권을 부여하여 일본 국내법 적용을 면제했다. 범죄는 미군 군사 기지 밖에서 발생했지만, 미국은 9월 6일 용의자들을 প্রাথম 구금했다.[10] 용의자들이 기지에서 햄버거를 먹으며 자유롭게 돌아다녔다는 허위 소문이 퍼졌으나,[11] 이들은 일본 당국이 기소할 때까지 군 교도소에 구금되었다.[10]

일본의 법 집행 기관은 즉시 구금 및 재판을 요구했지만, 용의자들은 일본이 공식 기소한 9월 29일에야 인도되었다.[10] 이는 "일본이 관할권을 행사하는 미군 또는 민간 구성원이 피고인으로 미국에 있으면, 기소 전까지 미국에 구금한다"는 지위 협정에 따른 것이었다.[12] 군은 용의자들을 매일 나하 경찰 본부로 심문을 위해 이송했지만,[13] SOFA 조항과 용의자 이송 지연은 오키나와 주민과 일본인들의 반미 감정을 증폭시켰다.

오키나와현 의회는 미군 행동에 항의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14] 10월 21일, 기노완시에서 사건과 미군 기지에 항의하는 대규모 집회가 열려 반기지 운동이 절정에 달했다.[15] 오타 마사히데 오키나와현 지사를 포함, 약 85,000명이 참여한 이 집회는 1960년 조약 체결 이후 오키나와 최대 시위였다.[16][17] 오타 마사히데 지사는 미군 기지 관련 서류 서명을 거부했다.[18]

이러한 미군 병사의 특권적 대우는 사건 수사에 지장을 초래했고, 오키나와 주민들의 반기지 감정을 폭발시켰다. 오키나와현 의회, 오키나와시, 기노완시 의회 등 오키나와현 내 자치단체들은 미군에 대한 항의 결의를 잇따라 채택했다.[42]

10월 21일, 기노완시에서 열린 현민 총궐기 대회에는 오타 마사히데 지사를 비롯한 약 8만 5천 명(주최 측 발표)이 참가했다. 이는 본토 복귀 후 최대 규모의 항의 대회로, 언론에 크게 보도되었다.[44][45] 이 움직임은 오키나와 미군 기지 정리·축소 및 일미 지위 협정 재검토 요구를 증폭시켰고,[44] 오키나와현 지사도 정부에 강력히 촉구했다.[46]

같은 해 10월, 한미 양국 정부는 "일미 지위 협정 제17조 5(c) 및 형사 재판 절차에 관한 일미 합동 위원회"를 열고,[47] 일미 지위 협정 운용 개선(개정은 아님)에 합의했다.[48] 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미국은 살인 또는 강간 등 흉악 범죄의 경우, 일본의 피의자 기소 전 구금 이전 요청에 '''호의적'''으로 고려한다.
  • 일본은 중대한 관심을 가진 경우, 합동 위원회에 구금 이전 요청을 제기한다.


항의 결과, 미국은 범죄 혐의의 심각성에 따라 기소 전 용의자 이송을 고려하기로 양보했다.[11][19] 이 합의는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과 일본 총리 하시모토 류타로의 긴급 회담에서 결정되었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뉴욕 타임스''에 강간 사건과 오키나와 미군 기지를 비난하는 전면 광고를 게재하기도 했다.

4. 2. 일본 정부의 대응

일본 언론은 수사 용의자들의 얼굴 사진을 거의 보도하지 않았다. 뉴스 간부들은 강간 사건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용의자들의 인종이 알려질 경우 인종차별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요코타 주일 미군 사령부의 미군 무관은 용의자들의 사생활 보호를 위해 인종을 공개할 수 없다고 밝혔다.[9]

사건 이후, 미일 지위 협정(SOFA)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커졌다. 이 협정은 미군에게 치외 법권을 부여했다. 범죄는 미군 군사 기지 밖에서 발생했지만, 미국은 9월 6일 용의자들을 구금했다.[10] 용의자들이 기지에서 햄버거를 먹었다는 허위 소문이 퍼졌지만,[11] 실제로는 일본 당국이 기소할 때까지 군 교도소에 구금되었다.[10]

일본의 법 집행 기관은 즉시 구금 및 재판을 요구했지만, 용의자들은 일본이 공식 기소한 9월 29일에야 인도되었다.[10] 이는 "일본이 관할권을 행사해야 하는 미군 또는 민간 구성원의 피고인이 미국에 있는 경우, 기소될 때까지 미국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지위 협정에 따른 것이었다.[12] 군은 용의자들을 매일 나하 경찰 본부로 심문을 위해 이송했지만,[13] SOFA 조항과 용의자 이송 지연은 오키나와 주민과 일본인들의 반미 감정을 증폭시켰다.

오키나와현 의회는 미군에 항의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14] 10월 21일, 기노완시에서 사건과 미군 기지에 항의하는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15] 약 85,000명이 참여했으며, 오타 마사히데 오키나와 현 지사도 함께했다. 이는 1960년 조약 체결 이후 오키나와 최대 시위였다.[16][17] 오타 마사히데 지사는 미군 기지 관련 서류 서명을 거부했다.[18]

항의 결과, 미국은 혐의가 중대한 경우 기소 전 용의자 인도를 고려하기로 했다.[11][19] 이 합의는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하시모토 류타로 일본 총리의 긴급 회담에서 결정되었다.

10월, "일미 지위 협정 제17조 5(c) 및 형사 재판 절차에 관한 일미 합동 위원회"가 열렸고,[47] 일미 지위 협정 운용 개선에 합의했다.[48]

# 미국은 살인 또는 강간 등 흉악 범죄의 경우, 일본의 기소 전 구금 요청에 '''호의적'''으로 고려한다.

# 일본은 중대 관심사의 경우, 합동 위원회에 구금 이전을 요청한다.

오키나와 미군 기지 정리·축소는 일본 본토나 으로 이전하는 방향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일본 본토 이전은 지역 반발, 이전 비용(약 3조) 문제 등으로 난항을 겪고 있다.

4. 3. 미국 정부의 대응

사건 발생 후, 미일 지위 협정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시작되었다. 이 협정은 미국 군인들에게 치외 법권(국내법의 적용 면제)을 부여하여, 범죄가 미군 군사 기지 밖에서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용의자들을 초기 구금했다.[10] 일본 당국이 즉시 구금 및 재판을 요청했으나, 용의자들은 일본이 공식 기소한 9월 29일이 되어서야 인도되었다.[10] 이러한 지연은 지위 협정에 따른 것이었지만,[12] 반미 감정을 더욱 증폭시켰다.

오키나와현 의회는 미군의 행동에 항의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고,[14] 10월 21일에는 기노완시에서 대규모 항의 집회가 열려 85,000여 명이 참여했다.[15] 오타 마사히데 당시 오키나와 현 지사도 이 집회에 참여했다.[16][17]

이러한 항의의 결과, 미국은 기소 전에 용의자를 일본으로 이송하는 것을 고려하기로 양보했다.[11][19] 이 합의는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하시모토 류타로 일본 총리 간의 회담에서 결정되었다.

당시 미국 태평양 사령부 사령관이었던 리처드 C. 매케 미 해군 제독은 용의자들의 행동에 대해 "차를 빌릴 돈으로 [일본의 매춘]여자를 살 수 있었을 것"이라는 발언을 하여 비난을 받고 해임되었다.[20] 그는 계급 강등되어 소장(2성)으로 강등되었고, 연금도 삭감되었다.[20]

1998년 6월 12일, 방위 시설청은 피해 소녀에게 미군이 합의금을 지불하고, 일본 정부도 위로금을 지급하고 있음을 밝혔다.

2003년 4월 15일, 참의원 외교 방위 위원회에서 오타 마사히데 위원(사건 당시 오키나와현 지사)의 질문에 대한 에비하라 신 외무성 북미국장의 답변에 따르면, 범인 전원이 형기를 마치고 석방되어 귀국했으며, 불명예 제대(OTH, Other Than Honored discharge)한 것이 밝혀졌다.

5. 사건의 영향

이 사건은 일미 지위 협정(SOFA)에 대한 비판 여론을 증폭시켰다. 이 협정은 미국 군인에게 치외 법권을 부여하여, 범죄가 미군 기지 밖에서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용의자들을 초기 구금할 수 있도록 했다.[10] 일본 당국은 즉시 구금 및 재판을 요청했으나, 용의자들은 일본이 공식 기소한 후인 9월 29일에야 이송되었다.[10] 이러한 지연은 오키나와 주민들과 일본인들 사이에 반미 감정을 증폭시켰다.

오키나와현 의회는 미군의 행동에 항의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고,[14] 1995년 10월 21일, 기노완시에서 사건과 미군 기지에 항의하는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오타 마사히데 오키나와현 지사를 포함하여 약 85,000명의 주민이 참여했는데,[15][16][17] 이는 1960년 조약 체결 이후 오키나와에서 열린 가장 큰 시위였다.[16] 오타 마사히데 지사는 미군 기지가 요구하는 서류에 서명하는 것조차 거부했다.[18]

이 사건으로 인해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과 일본 총리 하시모토 류타로 간의 회담이 이루어졌고, 미국은 기소 전에 용의자를 일본으로 이송하는 것을 고려하기로 하는 양보를 했다.[11][19] 한편, 미 해군 제독 리처드 C. 매케는 용의자들의 행동에 대해 "범죄에 사용된 차를 빌리는 데 지불한 돈으로, 여자 [일본의 매춘]를 살 수 있었을 겁니다."라는 부적절한 발언을 하여 비난을 받고 계급 강등 및 조기 퇴직을 강요받았다.[20]

5. 1. 미일 지위 협정 개정 논의

오키나와현 경찰은 여러 증거를 통해 해병대원의 사건 연루가 명백하다고 판단하여 9월 7일 체포 영장 발부를 청구했다. 그러나 일미 지위 협정(SOFA)에 따르면, 피의자가 미국 군인인 경우, 그 신병이 미국 측에 있을 때 기소될 때까지는 미국이 피의자의 구금을 계속하도록 되어 있었다.[40][41] 따라서 일본 측 수사 당국은 기소 전에 체포 영장을 집행할 수 없었고, 피의자 신병을 구속하여 취조하는 실질적인 수사 수단을 취할 수 없었다.

이러한 미군 병사의 특권적인 취급은 사건 수사에 지장을 초래했고, 오키나와현 주민들 사이에서 잠재되어 있던 반기지 감정을 폭발시켰다. 오키나와현 의회, 오키나와시, 기노완시 의회를 비롯하여 오키나와현 내 자치단체에서 미국군에 대한 항의 결의가 잇따라 채택되었다.[42] 1995년 10월 21일에는 기노완시에서 사건에 항의하는 현민 총궐기 대회가 열렸고, 오타 마사히데 오키나와현 지사를 비롯한 약 8만 5천 명(주최 측 발표)의 현민이 참가했다. 이는 본토 복귀 후 최대 규모의 항의 대회였고, 미디어에서 크게 보도되었다.[44][45] 이러한 움직임은 오키나와에 집중된 미군 기지의 정리·축소와 일미 지위 협정의 재검토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고,[44] 오키나와현 지사도 정부를 향해 강력하게 그 실행을 촉구했다.[46]

같은 해 10월, 일미 양국 정부 간에 "일미 지위 협정 제17조 5(c) 및, 형사 재판 절차에 관한 일미 합동 위원회"가 열렸고,[47] 일미 지위 협정에 대해서는 운용을 개선(개정이 아님)하기로 합의했다.[48] 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미국은, 살인 또는 강간이라는 흉악한 범죄의 특정 경우에 일본이 행할 수 있는 피의자의 기소 전 구금의 이전에 대한 어떠한 요청에도 '''호의적인 고려'''를 기울인다. 미국은, 일본이 고려되어야 한다고 믿는 기타 특정 경우에 대해 일본이 합동 위원회에서 제시할 수 있는 특별한 견해를 충분히 고려한다.
  • 일본은, 일본이 1에 언급된 특정 경우에 중대한 관심을 가질 때, 구금의 이전에 대한 요청을 합동 위원회에서 제기한다.


한편, 오키나와에 소재한 미군 기지의 정리 축소에 대해서는, 일본 본토 또는 으로의 기지 기능 이전을 통해 실현하는 방향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일본 본토로의 기지 기능 이전과 관련하여 지역 자치단체의 의향과 관계없이 일미 정상급에서 기정 사실화되는 것에 대한 반발 외에도, 기지 이전에 따른 비용을 일본 측에 대부분 부담(약 3조)하도록 요구하는 등, 일본 측의 반발을 초래하여 앞날이 불투명하다.

5. 2. 일본 내 반미 감정 확산

사건 이후, 특히 미일 지위 협정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커졌다. 이 협정은 미국 군인들에게 치외 법권을 부여하여, 범죄가 미군 기지 밖에서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용의자들을 초기 구금했다.[10] 일본 당국이 즉시 구금 및 재판을 요청했으나, 용의자들은 일본이 공식 기소한 후인 9월 29일에야 이송되었다.[10] 이러한 지연은 지위 협정에 따른 것이었지만,[12] 오키나와 주민들과 일본인들 사이에 반미 감정을 증폭시켰다.

오키나와현 의회는 미군의 행동에 항의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14] 1995년 10월 21일, 기노완시에서 사건과 미군 기지에 항의하는 대규모 집회가 열렸으며, 오타 마사히데 오키나와현 지사를 포함하여 약 85,000명의 주민이 참여했다.[15][16][17] 이는 1960년 조약 체결 이후 오키나와에서 열린 가장 큰 시위였다.[16] 오타 마사히데 지사는 미군 기지가 요구하는 서류에 서명하는 것조차 거부했다.[18]

오키나와현 경찰은 9월 7일에 체포 영장 발부를 청구했지만, 일미 지위 협정에 따라 기소 전까지는 미국이 피의자 구금을 계속하도록 되어 있어 일본 측 수사 당국은 즉각적인 수사를 진행할 수 없었다.[40][41]

이러한 미군 병사의 특권적인 대우는 오키나와현 주민들의 반기지 감정을 폭발시켰고, 오키나와현 내 여러 자치단체에서 미군에 대한 항의 결의가 채택되었다.[42] 10월 21일에는 기노완시에서 대규모 항의 대회가 열렸고, 오타 마사히데 지사를 포함한 약 8만 5천 명(주최 측 발표)의 현민이 참가했다.[44][45] 이는 미군 기지 정리·축소와 일미 지위 협정 재검토 요구로 이어졌다.[44]

항의의 결과로, 미국은 기소 전에 용의자를 일본으로 이송하는 것을 고려하기로 하는 양보를 했다.[11][19] 이는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과 일본 총리 하시모토 류타로 간의 회담에서 결정되었다.

같은 해 10월, 일미 양국 정부는 "일미 지위 협정 제17조 5(c) 및, 형사 재판 절차에 관한 일미 합동 위원회"를 열고,[47] 일미 지위 협정 운용 개선에 합의했다.[48] 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미국은 살인 또는 강간과 같은 흉악한 범죄의 경우, 일본이 요청하는 피의자의 기소 전 구금 이전에 대해 '''호의적인 고려'''를 한다.
  • 일본은 중대한 관심을 가질 때, 합동 위원회에서 구금 이전에 대한 요청을 제기한다.


미 해군 제독 리처드 C. 매케는 용의자들의 행동에 대해 "정말 멍청한 짓", "[범죄에 사용된] 차를 빌리는 데 지불한 돈으로, 여자 [일본의 매춘]를 살 수 있었을 겁니다."라는 발언으로 비난을 받고 계급 강등 및 조기 퇴직을 강요받았다.[20]

한편, 미군 기지 정리 축소 문제는 일본 본토 또는 으로의 기지 기능 이전이 제시되었으나, 일본 본토 내 반발과 이전 비용 문제 등으로 난항을 겪고 있다.

6. 사건 이후

사건 이후, 2008년 이 사건을 바탕으로 한 영화 ''레이, 첫 호흡''이 개봉되었다.[32]

2011년 12월, 이치카와 야스오 일본 방위상은 사건의 세부 사항을 알지 못했다는 이유로 자유민주당에게 불신임을 받았다. 이는 그의 부하인 타나카 사토시가 술집에서 기자들과 대화하면서 해병대 후텐마 비행장 이전을 논의하기 위해 강간을 완곡하게 표현한 후에 일어난 일이었다. 타나카 사토시는 오키나와 방위국장에서 해임되었고,[33] 2012년 1월 13일 내각 개편에서 타나카 나오키로 교체되었다.[34]

존 정커먼 감독은 오키나와의 미군 주둔과 관련된 논쟁적인 역사를 다룬 영화를 위해 생존한 두 명의 가해자를 인터뷰하려 했다. 길과는 연락이 닿지 않았고, 하프는 인터뷰에 응하여 사건과 그 주변 사건에 대해 2시간 반 동안 이야기했다.[35]

6. 1. 가해자

일본 감옥에서 복역한 세 명의 남성은 2003년에 석방된 후 군에서 명예롭지 못한 제대를 받았다.[30] 로드리코 하프는 석방 후 일본의 감옥 환경을 비판하며, 강제로 해야 했던 전자 제품 조립 교도소 노동은 노예 노동에 해당한다고 말했다.[30]

소녀를 강간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던 레데는 2006년 미국에서 살인 후 자살 사건으로 사망했다. 그는 케네소 주립 대학교의 학생이자 지인이었던 로렌 쿠퍼를 강간하고 교살하여 살해한 것으로 보이며, 이후 칼을 사용하여 팔꿈치의 정맥을 베어 자살했다.[31]

2003년 (헤이세이 15년) 4월 15일, 참의원 외교 방위 위원회에서 오타 마사히데 위원(사건 당시 오키나와현 지사)의 질문에 에비하라 신 외무성 북미국장이 답변한 내용에 따르면, 범인 전원이 형기를 마치고 석방되어 귀국했으며, 불명예 제대(OTH, Other Than Honored discharge, 명예 제대 이외의 제대. 불명예 제대(DD)만큼 무거운 처분은 아니며, 퇴역 연금 등의 공적 서비스도 명예 제대에 비해 내용은 열악하지만 받을 수 있다) 처분을 받았다.[53][54]

2006년 (헤이세이 18년) 8월 20일, 레데트가 조지아주에서 여대생을 폭행, 살해한 직후 자살한 사실이 밝혀졌다.[55][56]

6. 2. 관련 작품

2008년, 시카고 출신 작가이자 감독인 에드 M. 코지아스키는 오키나와 사건을 바탕으로 한 영화 ''레이, 첫 호흡''을 제작하여 시카고에서 처음 공개했다. 『성조기 신문』에 따르면, 감독팀은 이 영화를 오키나와의 기지에서 상영하고 신병들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전했지만, 주일 해병대 홍보부장인 더글러스 파월 중령은 "그것은 우리가 볼 영화가 아니다", "적절하지 않다"라고 말했다.[60]

장 융커만 감독은 2015년 영화 ''오키나와의 비'' 세 번째 부분에서 사건을 일으킨 3명을 취재했다. 리디트는 앞서 언급한 대로 살인 사건을 일으키고 자살했고, 길은 취재를 거부했으며, 남은 하프만이 속마음을 생생하게 이야기했다. 이 영화는 아카데미상 기록 영화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다.

현지 출신 뮤지션인 키나 쇼키치는 피해 여아가 자신의 먼 친척이었기에, 사건 1주년이 되는 1996년 9월 4일, 피해 여아에게 바치는 시로서 「소녀의 눈물에 무지개가 뜰 때까지」를 만들어, 『니시니혼 신문』 오키나와 취재반에 맡겼다.[59]

이 사건은 일본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관심을 모았다. 해병대원의 모국인 미국의 텔레비전 드라마 『NCIS』에서는 1996년 제1시즌 『컴퓨터의 반란』에서 오키나와에서의 대미 감정 악화가 묘사되었다. 사건 3년 후인 1998년, 제4시즌 『요코스카의 악몽』에서는 이 사건을 모델로 한 에피소드가 제작되었다. 이 에피소드에서는 주인공인 미국 군법무관이, 일본 측 수사 당국이 가해자인 미국 군인에게 자백을 강요하기 위해 폭행을 가할 것을 우려하는 묘사가 있다. 피고인의 가족이 방일 후에, 일본에서는 배심원에 의한 재판이 이루어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배심원에게 좋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라고 발언한 것도 포함해, 일본의 재판 제도에 대한 미국 측 미디어의 오해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드라마 내에서 가해자는 무죄가 된다.

오키나와 작가 메도루마 슌은 2017년 소설 『기억의 숲』을 썼는데, 이 소설은 1945년 오키나와 전투 중에 발생한 성적 트라우마를 겪은 여러 등장인물들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으며, 1995년 사건은 2005년을 배경으로 하는 장에서 두 번 언급된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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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뉴스 命どぅ宝、沖縄96判決、県民投票=女児暴行事件から1年 西日本新聞 1996-09-05
[60] 웹사이트 Film inspired by rape of Okinawa girl by U.S. troops https://www.stripes.[...] 2020-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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