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2·23 쿠데타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2·23 쿠데타는 1981년 2월 23일 스페인에서 일어난 군사 쿠데타 미수 사건이다. 스페인 민주화 과정에서 군부의 불만을 배경으로, 안토니오 테헤로 중령이 이끄는 시민 경비대가 국회 의사당을 점거하고 레오폴도 칼보 소텔로 총리 선출 투표를 방해했다. 쿠데타는 후안 카를로스 1세 국왕의 단호한 대처와 국민적 지지 속에 실패로 돌아갔고, 스페인 민주주의를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쿠데타 전개 과정과 배후에 대한 의문이 남아 음모론이 제기되기도 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981년 스페인 - 1981년 동계 유니버시아드
    1981년 동계 유니버시아드는 1981년에 개최되었으며, 소련이 금메달 8개로 1위를 차지했다.
  • 스페인의 극우 정치 -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는 스페인 파시즘 운동을 이끈 팔랑헤당 창시자이자 정치인, 변호사로, 스페인 내전 중 사형당한 후 프랑코 정권에서 숭배받았다.
  • 스페인의 극우 정치 - 팔랑헤주의
    팔랑헤주의는 좌우를 거부하는 제3의 입장을 취하며 국가적, 초계급적 사회를 지향하고 계급 협력을 옹호하는 이념으로, 스페인 내전 당시 포르투갈 합병을 주장했으며 프랑코 정권 하에서 유일 합법 정당이었다.
  • 후안 카를로스 1세 - 스페인 왕대비 소피아
    그리스 왕족 출신으로 후안 카를로스 1세와의 결혼을 통해 스페인 왕비가 되었으며, 남편의 즉위와 퇴위 후 왕대비로서 사회 활동과 후원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 후안 카를로스 1세 - 포르 케 노 테 카야스
    "포르 케 노 테 카야스"는 2007년 이베로아메리카 정상회의에서 스페인 국왕 후안 카를로스 1세가 베네수엘라 대통령 우고 차베스에게 한 말로, 외교적 갈등을 촉발하고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2·23 쿠데타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안토니오 테헤로
안토니오 테헤로가 총 하원 회의장에 총을 들고 난입하는 모습
분쟁 명칭1981년 스페인 쿠데타 시도
부분 분쟁스페인의 민주화
날짜1981년 2월 23일 ~ 2월 24일
장소마드리드 및 발렌시아, 스페인
결과쿠데타 실패
헌법 질서 유지
군사 재판에서 스페인군 12명, 시민 경비대 17명, 민간인 1명이 쿠데타 혐의로 유죄 판결
레오폴도 칼보소텔로의 스페인 총리 취임 성공
스페인 민주주의 공고화
교전 세력
교전국 1스페인 왕국
시민 경비대 (주요 부대)

국가 경찰 군단
CESID
지원 세력:
EEC
교전국 2신프랑코주의 반군

시민 경비대 (반군)
지휘관 및 지도자
교전국 1 지휘관후안 카를로스 1세
아돌포 수아레스
마누엘 구티에레스 메야도
사비노 페르난데스 캄포
}}
}}
란델리노 라비야
프란시스코 라이나
교전국 2 지휘관안토니오 테헤로
하이메 밀란스 델 보쉬
알폰소 아르마다
병력 규모
교전국 1 병력반군을 제외한 모든 스페인 군대 및 경찰 부대
교전국 2 병력발렌시아: 1,800명
마드리드: 시민 경비대 200명
전차 및 기타 군용 차량 다수
사상자 및 피해
사상자없음

2. 역사적 배경

2·23 쿠데타는 스페인의 민주화 과도기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발생했다. 이 시기 스페인 사회는 여러 요인으로 인해 극심한 긴장 상태에 놓여 있었다.


  • 경제 위기: 약 20%의 실업률, 자본 도피, 16%의 인플레이션[2] 등 경제 위기가 심각했다.
  • 지역 갈등: 스페인 지방에 대한 통치권 이양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 테러 위협: 바스크 분리주의 단체 ETA의 폭력 사태가 증가했다.
  • 군부 반발: 스페인 군 내부에서는 갓 출범한 민주주의에 대한 반대 움직임이 있었다.


이러한 요인들은 집권 민주중앙연합 (UCD)을 억제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몰아넣었고, 사회 전반에 불안감을 조성했다. 특히 군부의 불만은 1977년 4월 해군 장관 피타 다 베이가 제독의 사임과 육군 최고 위원회 구성으로 표면화되었다. 이는 아토차 학살 이후 스페인 공산당(PCE) 합법화에 대한 반발이었다.[3] 1978년 11월에는 오페라시온 갈락시아 군사 쿠데타가 진압되었고, 그 지도자 안토니오 테헤로 중령은 7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았다.[3]

1980년에 들어서면서 정부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 문화부 장관 마누엘 클라베로 사임(1월 15일), 정부 개편(5월 3일), 스페인 사회노동자당 (PSOE)의 불신임 투표(5월 28일~30일), 부통령 페르난도 아브릴 마르토렐 사임(7월 22일) 및 새로운 개각(9월) 등 정치적 혼란이 이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돌포 수아레스 총리는 1981년 1월 29일 UCD 총리 겸 대통령직에서 사임했다.[4]

이후 극우 신문 ''엘 알카사르''에 반란 선동 기사가 게재되고,[5] 국왕 부부가 게르니카 방문 중 야유를 받는 등[6] 긴장이 고조되었다. 또한 레모이즈 원자력 프로젝트 수석 엔지니어 피살,[7] 산업가 납치[8] 등 사건이 발생하며 사회 불안이 심화되었다.

2. 1. 프랑코 사후 민주화 과정

스페인 내전에서 인민 전선 정부에 승리한 프란시스코 프랑코 총통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도 장기간 스페인을 통치하며 군사 독재 체제를 유지했다. 1975년 11월 프랑코 총통이 사망하자, 그의 유언에 따라 후안 카를로스 1세가 국왕으로 즉위하며 왕정 복고가 이루어졌다.

후안 카를로스 1세는 프랑코의 군사 독재를 계승하는 대신 민주화를 추진, 서유럽형 의회 민주주의 및 입헌 군주제로의 급격한 전환을 시도했다. 1974년 1월부터 프랑코 정권 말기 수상을 맡았던 카를로스 아리아스 나바로는 1976년 7월 사임하고, 국민 운동 사무국장이었던 아돌포 수아레스가 후임 수상이 되었다.

수아레스 정권 하에서 스페인의 민주화는 가속화되었다. 1977년 6월 총선거가 실시되었고, 수아레스가 이끄는 국민 운동을 비롯한 여러 정당들의 연합체인 민주 중도 연합이 단독 정권을 수립했다. 이에 앞서 같은 해 4월, 의회는 새 헌법을 승인하고 공산당을 합법화하는 등 민주주의 체제로의 이행이 본격화되었다. 이처럼 의회 민주주의와 입헌 군주제로의 신속하고 순조로운 이행은 "스페인의 기적"으로 불렸다.

2. 2. 군부 강경파의 불만과 쿠데타 기도

스페인의 민주화 과도기 동안, 육군 내 강경파들은 여러 요인으로 인해 불만을 품고 군사 독재 부활을 모색했다. 이들은 민주화로 인해 자신들의 지위가 하락하고, 아토차 학살 이후 스페인 공산당(PCE)이 합법화(1977년 4월)된 것에 반발했다. 스페인 공산당스페인 내전 당시 인민 전선 정부의 중추를 담당했던 정당이었다. 또한, 바스크 분리주의 단체인 ETA의 테러 활동 증가와 20%에 달하는 실업률 등 경제 불황도 이들의 불만을 키웠다.[2]

이러한 배경 속에서 군부 강경파들은 쿠데타를 모의했다. 1977년 11월, 하이메 미란스 델 보쉬 육군 중장(제3군관구 사령관)과 가브리엘 피타 데 베이가 해군 중장(전 해군 장관)은 하티바에 모여 수아레스 정권을 무너뜨리고 '구국 내각'을 설립하여 의회 권한을 축소하며, 국왕을 옹립한 군사 독재를 부활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를 '하티바 회동'이라고 한다.

1978년 11월에는 과르디아 시빌의 안토니오 테헤로 중령과 사엔스 데 이네스트리야스 중위 등이 '갈락시아 작전'을 계획했다. 이 작전은 수아레스 정권에 대한 쿠데타 계획이었으나, 실행 전에 발각되어 테헤로 중령은 군법 회의에서 11개월의 금고형을 선고받았다.[3]

'갈락시아 작전'이 좌절된 후에도 군부 우익에 의한 새로운 쿠데타 계획은 끊이지 않았고, 군부 우익이 문제 삼았던 상황들이 개선되지 않았기 때문에, 쿠데타 계획은 계속해서 소문으로 떠돌았다.

2. 3. 정치적 긴장 고조

스페인의 민주화 과도기 동안, 집권당인 민주중앙연합(UCD) 내부의 갈등과 여러 사회적 문제들로 인해 정치적 긴장이 고조되었다. 이러한 긴장 고조의 주요 원인은 다음과 같았다.[2]

  • 경제 위기: 약 20%의 실업률, 자본 도피, 16%의 인플레이션은 경제 위기를 심화시켰다.
  • 지역 자치 문제: 스페인 지방에 대한 통치권 이양 과정에서 어려움이 발생했다.
  • ETA의 테러: 바스크 분리주의 단체인 ETA의 폭력 사태가 증가했다.
  • 군부의 반발: 스페인 군 내부에서 새로 수립된 민주주의에 대한 반대 움직임이 나타났다.


1977년 4월, 해군 장관이었던 피타 다 베이가 제독의 사임과 육군 최고 위원회 구성은 군부의 불안감을 드러내는 초기 사건이었다. 이는 스페인 공산당의 합법화에 대한 반대에서 비롯되었다.[3] 1978년 11월에는 오페라시온 갈락시아 군사 쿠데타가 진압되었고, 주동자인 안토니오 테헤로 중령은 7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았다.[3]

1980년, 정부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 문화부 장관 마누엘 클라베로의 사임(1월 15일), 정부 개편(5월 3일), 스페인 사회노동자당 (PSOE)의 불신임 투표(5월 28일~30일), 부통령 페르난도 아브릴 마르토렐의 사임(7월 22일)과 새로운 개각(9월), 그리고 아돌포 수아레스 총리가 추진한 중도파 의원단의 대통령 공식 후보인 미겔 에레로 로드리게스 데 미뇬의 선출(10월) 등의 사건이 이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돌포 수아레스 총리는 1981년 1월 29일 텔레비전을 통해 UCD 총리 겸 대통령직에서 사임했다.[4] 2월 1일, "아르멘드로스 단체"는 극우 신문 ''엘 알카사르''에 공개적으로 반란을 선동하는 기사를 게재했다.[5] 2월 2일부터 4일까지 국왕 부부는 게르니카를 방문했으나, 바스크 분리주의 정당 에리 바타수나 대의원들의 야유와 여러 사건에 직면했다.[6] 2월 6일에는 레모이즈 원자력 프로젝트의 수석 엔지니어 호세 마리아 라이언이 납치 후 살해된 채 발견되었고,[7] 산업가 루이스 수네르의 납치 소식도 이어졌다.[8]

레오폴도 칼보 소텔로가 총리 후보로 지명된(2월 10일) 가운데,[9] 2월 13일, 바스크 민족주의 운동 ETA의 일원인 호세 이그나시오 아레기가 카라반첼에서 고문 끝에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긴장은 최고조에 달했다.[2] 그는 10일 동안 정보총국에 구금되어 연락이 두절된 상태였다. 바스크 지방에서는 총파업이 일어났고, 의회에서는 정당 간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정부는 여러 경찰서장들을 해임했고, 내무부에서는 고문자들과의 연대에서 비롯된 사임이 이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2월 18일, 칼보 소텔로는 정부 구성을 제안했지만, 20일 의회 투표에서 과반수 찬성을 얻지 못했다. 2월 23일로 예정된 새로운 투표일은 쿠데타 주동자들이 쿠데타를 시도하기로 선택한 날이었다.

3. 쿠데타 발생과 전개

바스크 민족주의 운동 단체 ETA의 일원인 호세 이그나시오 아레기가 카라반첼에서 고문 끝에 살해당했다는 소식이 13일에 전해지면서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다. 아레기는 열흘 동안 정보총국에 구금되어 연락이 두절된 상태였다.[2] 바스크 지방에서는 총파업이 일어났고, 의회에서는 정당들 간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정부는 여러 경찰서장들을 해임했고, 내무부에서는 고문 가담자들과 연대하여 사임하는 이들이 발생했다. 신문 ''엘 알카사르''는 정부의 이러한 조치를 연약함의 표출로 보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칼보 소텔로는 2월 18일 정부 구성을 제안했으나, 20일 의회 투표에서 총리 인준에 필요한 과반수 득표에 실패했다. 이에 따라 23일 새로운 투표가 예정되었고, 쿠데타 주동자들은 이날을 쿠데타 실행일로 정했다. 쿠데타 계획은 테헤로와 하이메 밀란스 델 보스크 장군을 주동자로, 알폰소 아르마다 장군을 부차적인 역할로 삼았다.

1981년 2월 23일 쿠데타 시도 당시 밀란스 델 보쉬 사령관의 명령으로 발렌시아 거리로 출동한 스페인 육군의 M47 패튼 전차 중 하나.

3. 1. 하원 의사당 점거

1981년 2월 23일 18시가 조금 넘어, 안토니오 테헤로 중령이 이끄는 약 200명의 무장한 시민 경비대 대원들이 하원 의회에 난입했다. 이들은 레오폴도 칼보 소텔로를 총리로 선출하는 투표를 진행 중이던 의원들을 인질로 잡았다.[10]

테헤로 중령은 하원 중앙 단상에 올라 "''¡Quieto todo el mundo!''" ("모두 꼼짝 마!")라고 외치며 바닥에 엎드리라고 명령했다.[11] 대원들은 기관단총을 난사했고, 대부분의 의원들은 좌석 아래로 엎드렸다.

하지만 아돌포 수아레스 총리, 마누엘 구티에레스 메야도 부총리, 산티아고 카리요 공산당 서기장은 자리에 앉아 저항했다.[12] 마누엘 구티에레스 메야도 육군 장군(이자 부총리)은 테헤로에게 물러나 무기를 넘길 것을 명령하며 맞섰다.[12] 아돌포 수아레스 총리도 이에 합류하려 하자, 테헤로가 공중에 총을 쏘았고, 이어 테헤로의 부하들이 기관단총으로 일제 사격을 가했다. 68세의 마누엘 구티에레스 메야도 장군은 굴하지 않고 두 팔을 벌린 채 저항하며 자리에 앉기를 거부했다.

본회의장 천장의 총알 자국

3. 2. 발렌시아 군사 봉기

하이메 밀란스 델 보스크 중장은 발렌시아에서 쿠데타를 실행했다. 그는 기갑사단에서 2,000명의 병력과 50대의 전차를, 발렌시아 항구에서 병력을 동원하여 거리와 시내 중심가로 배치하고 시청과 발렌시아 사법 법원을 점령했다. 투리아 작전으로 알려진 이 반란은 다른 군관구가 쿠데타에 가담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여겨졌다.[16]

오후 7시까지 발렌시아 라디오 방송국들은 밀란스 델 보쉬가 선포한 비상사태를 방송하기 시작했으며, 그는 다른 이들이 자신의 군사 행동을 지지하도록 설득하려 했다. 밤늦도록 발렌시아는 베테라와 파테르나 육군 기지에서 소집된 군용 장갑차와 다른 부대들로 포위되었다. 경찰 저격수들은 옥상에 자리를 잡았고, 군가 행진곡이 확성기를 통해 울려 퍼졌으며 시민들에게 야간 통행 금지가 부과되었다. 장갑차 호송대는 쿠데타를 지지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마니세스 공군 기지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기지를 책임지고 있던 제11 비행단 대령은 이에 따르기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공대지 미사일을 장착한 전투기 2대를 (엔진을 가동시킨 채 대기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밀란스 델 보쉬가 보낸 전차에 투입하겠다고 위협했고, 이로 인해 밀란스 델 보쉬는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 좌절은 마드리드 쿠데타의 임박한 실패를 암시했다.[16]

3. 3. 아르마다 장군의 개입

알폰소 아르마다 장군은 쿠데타 공모자 중 한 명이었으나, 이후 "온건한" 행동 방침을 옹호했다.[2] 그는 사르수엘라 궁전에 들어가 국왕에게 새로운 "구원 정부"를 이끌 것을 제안했으나, 국왕은 이를 거부했다.[2]

자정 직전, 아르마다는 국왕이 자신에게 정부 수반을 맡으라고 명령했다고 주장하며 스페인 하원에 들어갔다.[2] 그러나, 그는 테헤로가 기다려온 인물이 아니었기에, 테헤로는 "장군, 저는 이걸 위해 하원을 점령한 게 아닙니다"라며 그의 주장을 거부하고 무시했다.[2]

3. 4. 국왕의 대응과 쿠데타 진압

후안 카를로스 1세는 쿠데타를 지지하지 않았다. 국왕은 군 지도자들이 자신과 헌법에 충성하고 있음을 확인했다.[3] 쿠데타 발생 2시간 반 만에, 카탈루냐 자치 정부의 호르디 푸졸 대표에게 전화하여 상황이 통제되고 있음을 알렸다. 푸졸은 그날 저녁 스페인 전역에 평화를 촉구하는 연설을 했다.

2월 24일 01시 14분, 후안 카를로스 1세는 전국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육군 대장 제복을 입고 쿠데타와 주동자들에 반대하며, 스페인 헌법을 옹호하고 밀란스 델 보쉬의 권위를 부인하는 연설을 했다.[17] 그는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간결하고 명확하게 스페인 국민들에게 말씀드립니다.es

이러한 예외적인 상황에 직면하여, 여러분의 침착함과 신뢰를 요청하며, 저는 육군, 해군, 공군 대장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음을 알립니다.es

국회 의사당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을 감안하여, 어떠한 혼란도 방지하기 위해, 저는 민간 당국과 합동 참모본부에 법의 범위 내에서 헌법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하도록 명령했음을 확인합니다.es

군사적 성격의 어떠한 조치가 필요할 경우, 합동 참모본부의 승인을 받아야 합니다.es

국가의 영속성과 통일의 상징인 왕실은, 무력을 사용하여 스페인 국민이 국민 투표에서 승인한 헌법의 민주적 과정을 방해하려는 모든 사람의 행동이나 행위를 어떤 형태로든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es

이 연설을 기점으로 쿠데타는 실패로 간주되었다. 하비에르 솔라나 부대표는 사엔스 데 산타마리아 장군이 가져온 ''엘 파이스'' 신문의 특별호를 보고 쿠데타가 실패했음을 알았다고 말했다.[17] 밀란스 델 보쉬는 고립된 채 계획을 포기하고 체포되었고, 전투복을 입은 시민 경비대원들은 창문 밖으로 뛰어내려 도망치거나 정문을 통해 뛰쳐나갔다.[18] 국회의원들은 "자유 만세"를 외치며 풀려났다.[18] 테헤로는 2월 24일 정오까지 저항하다 체포되었다.

20시, 후안 카를로스 1세는 점거된 스페인 국영 텔레비전 방송국에 직접 전화하여 반란군을 설득하고 촬영팀을 사르수엘라 궁전으로 불러들였다. 23시 30분, 국왕은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서 쿠데타 불지지를 선언하고 밀란스 델 보쉬 중장에게 부대 복귀 명령을 내렸다. 소피아 왕비와 펠리페 왕태자(후일 국왕 펠리페 6세), 공주들을 배석시킨 국왕은 의연한 태도를 보였다. 왕태자가 졸자 "일어나라. 왕으로서의 의무를 지켜보아야 한다"고 타이르고, 밀란스 델 보쉬 중장에게는 "목적을 달성하고 싶다면, 나를 사살하라"고 강하게 말했다.

국왕은 밀란스 델 보쉬에게 "나는 현행 헌법의 질서 유지를 위해 이 자리에서 단호한 결의를 보여준다. 이상의 말 외에는 일절 통용되지 않는다. 국왕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쿠데타는 대역죄이다"라는 내용의 쿠데타 불지지 코멘트를 보냈고, 반란군은 전의를 상실했다. 다음 날 1시 23분, 국왕의 명령이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방송되었고, 국민들은 쿠데타 실패를 알게 되었다.

4시, 밀란스 델 보쉬 중장이 투항하고, 테헤로 중령은 인질을 해방하고 투항했다. 많은 과르디아 시빌 대원들은 하원의 뒷문 창문으로 뛰어내리는 등 무기를 버리고 도망쳤다.

4. 쿠데타의 결과 및 영향

2·23 쿠데타는 실패로 끝났지만, 스페인 사회에 다양한 영향을 미쳤다.

쿠데타 실패는 스페인 민주주의의 공고화에 기여했다. 군부의 정치 개입 시도는 좌절되었고, 후안 카를로스 1세 국왕은 민주주의 수호자로서의 위상을 확립했다.[3] 이후 스페인에서 군부의 정치 개입은 사라지고 민주주의가 안정적으로 정착되는 계기가 되었다.

캄파멘토 재판으로 알려진 군사 재판에서 쿠데타 주동자들은 처벌받았다. 핵심 주동자인 밀란스 델 보스크, 알폰소 아르마다, 안토니오 테헤로 몰리나에게는 징역 30년이 선고되었다. 전체 피고인 300여 명 중 30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17] 후안 가르시아 카레스는 유죄 판결을 받은 유일한 민간인이었다.

2·23 쿠데타는 한국의 민주화 운동 세력에게도 영감을 주었다. 스페인의 사례는 군부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쟁취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고, 한국의 민주화 운동가들은 스페인의 경험을 연구하여 민주화 전략 수립에 활용했다.

4. 1. 민주주의 공고화

쿠데타 실패는 스페인 민주주의의 공고화에 기여했다. 군부의 정치 개입은 실패했고, 후안 카를로스 1세 국왕은 민주주의 수호자로서 위상을 확고히 했다.[3] 이후 스페인에서는 군부의 정치 개입이 사라지고 민주주의가 안정적으로 정착되었다. 쿠데타 진압 과정에서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역할은 결정적이었다. 국왕은 헌법과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군부의 쿠데타 기도를 좌절시킴으로써 국민적 신뢰를 얻었으며,[18] 이는 스페인 군주제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4. 2. 관련자 처벌

캄파멘토 재판(스페인어: ''juicio de Campamento'')으로 알려진 군사 최고 법원은 쿠데타의 핵심 주동자인 밀란스 델 보스크, 알폰소 아르마다, 안토니오 테헤로 몰리나에게 징역 30년을 선고했다. 약 300명의 피고인 중 30명이 쿠데타 연루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17]

알폰소 아르마다 소장, 하이메 밀란스 델 보스크 중장, 안토니오 테헤로 중령 등은 국가 반역죄 등으로 재판을 받았지만, 아르마다 소장은 "이 쿠데타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후 유죄 판결을 받아 실형을 선고받았지만, 테헤로 중령은 옥중에서 1982년 총선에 출마하여 화제가 되었다. 테헤로 중령은 사건 발생 25년 후인 2006년 12월에 마지막 사건 관계자로 석방되었다.

쿠데타 계획에 대한 민간인 연루 정도는 철저히 조사된 적이 없다. 수직 신디칼(프랑코주의 스페인의 유일한 합법적인 노동 조합)의 전 지도자인 후안 가르시아 카레스만이 유죄 판결을 받은 유일한 민간인이었다.

4. 3. 한국에 미친 영향

2·23 쿠데타는 한국의 민주화 운동 세력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스페인의 사례는 군부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쟁취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었으며, 한국의 민주화 운동가들은 스페인의 경험을 연구하고 참고하여 민주화 전략을 수립하는 데 활용했다. 특히 6월 항쟁 당시, 시민들은 2·23 쿠데타 당시 스페인 시민들처럼 비폭력 저항을 통해 군부의 양보를 얻어냈다.

5. 논란과 음모론

2·23 쿠데타는 유혈 사태 없이 끝났지만, 혼란스러운 전개 과정, 쿠데타 주모자들의 군주제 충성심, 후안 카를로스 1세 국왕의 늦은 연설 등으로 인해 여러 의혹과 음모론이 제기되었다.[20][21][22][23] 이러한 의혹들은 재판 과정과 그 이후에도 계속 제기되었다.

이러한 음모론들은 국왕의 민주주의 옹호에 대한 진정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쿠데타를 강압적인 현실 정치의 연장선으로 보았다. 일각에서는 스페인 비밀 정보국, 국왕, 왕가, 주요 정당 및 언론 대표자들이 공모하여 쿠데타를 조작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이른바 '아르마다 작전'을 핵심 동기로 지목하는데, 이는 드골 작전을 모델로 한 "소프트" 쿠데타로, 아르마다를 수장으로 하는 국민 통합 정부를 구성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 작전의 첫 번째 목표는 아돌포 수아레스 총리를 축출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 목표는 스페인이 NATO와 EEC에 가입하고, 초당적이고 온건한 의회 군주제를 통합하는 데 필요한 기준을 충족하도록 서두르는 것이었다.[20]

또한, 1981년 5월 2일로 예정되었던 "하드" 쿠데타를 무력화하는 것도 목표 중 하나였다.[1][23][25] 이 쿠데타는 전 SECED 국장 호세 이그나시오 산 마르틴이 이끄는 '대령 그룹'이 주도했으며, 정보 연관성과 군 통제권 문제로 인해 위험하다고 여겨졌다.[21][23]

이러한 음모론에 따르면, 수아레스 총리는 '아르마다 작전'을 사전에 감지하고 쿠데타를 피하기 위해 사임했다. 그러나 계획은 예정대로 진행되었고, 테헤로의 의회 난입과 아르마다의 다당제 정부 제안 거부 등으로 인해 "하드"와 "소프트" 쿠데타 음모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23]

전 CESID 특수 작전 책임자 호세 루이스 코르티나 프리토는 이러한 음모론에서 중요한 인물로 묘사된다. 그는 모든 쿠데타 음모를 하나로 묶어 무력화한 핵심 인물로 여겨지기도 한다.[21][26][27] 그는 사라고사 육군 사관학교를 국왕과 같은 기수로 졸업하고, 카레로 행정부에서 합동 참모 본부 정보국에 임명되었으며,[28] 그의 형제는 주요 보수 정당의 기반이 된 씽크탱크를 설립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재판 중 코르티나는 검사의 심문에 압박을 느껴 [카레로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폭로하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27][29][30][31][32]

이러한 음모론은 laSexta의 방송, 헤수스 팔라시오스의 저작, 필라르 우르바노의 저서 등을 통해 알려지기 전까지는 주류 사회에 널리 퍼지지 않았지만, 암시와 함축은 드물지 않게 나타났다.[33]

5. 1. 쿠데타 배후 논란

쿠데타의 전개 과정은 유혈 사태는 없었지만 매우 혼란스러웠고, 쿠데타 전개에 대한 많은 의문점들이 제기되었다. 특히, 쿠데타의 두 주모자인 아르마다와 밀란스 델 보쉬가 확고한 군주주의자였다는 점과 국왕이 심야 텔레비전 연설을 하기 전까지 오랫동안 부재했다는 점은 '캄파멘토' 재판 과정에서 많은 의혹과 음모론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20][21][22][23]

이러한 음모론들은 국왕의 민주주의 옹호에 대한 진정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쿠데타를 강압적인 현실 정치의 연장선으로 보았다. 일부에서는 이 사건이 스페인 비밀 정보국이 국왕, 왕가, 주요 정당, 주류 언론 대표자들과 공모하여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이른바 ''아르마다 작전''을 핵심 동기로 지목하는데, 이는 드골 작전을 모델로 한 "소프트" 쿠데타로, 아르마다 자신이 이끄는 국민 통합 정부를 구성하여 모든 주요 정당의 장관들을 포함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 작전의 첫 번째 목표는 수개월 동안 언론과 정치 엘리트로부터 끊임없이 비판을 받았고, 심지어 국왕의 총애를 잃었다는 소문까지 돌았던 수아레스 총리를 축출하는 것이었다. 이는 수아레스의 야심찬 개혁 의제가 예상과는 다르게 진행되었기 때문일 수 있다.[24] "소프트" 쿠데타의 두 번째 목표는 스페인 공공 기관들이 NATO와 EEC 가입과 같은 국가적 과제를 수행하고, 초당적이고 이념적으로 온건한 의회 군주제를 통합하는 데 필요한 수렴 기준을 충족하도록 서두르는 것이었다.[20] 이 이론에 따르면,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군부 내 반동적인 세력을 제거하고 일반 유권자들이 군주제와 양당제를 제도적 "기본 입장"으로 받아들이도록 해야 했다.[20][23]

그러나 또 다른 구체적인 목표는 그해 말, 아마도 5월 2일에 계획되었던 임박한 "하드" 쿠데타를 무력화하는 것이었다.[1][23][25] 이 쿠데타를 주도한 세력 중 하나는 전 SECED 국장 호세 이그나시오 산 마르틴이 이끄는 ''대령 그룹''이었다. 이 음모가 특히 위험하다고 여겨진 이유는 산 마르틴의 정보 연관성과 장군이 아닌 대령과 중령이 군대를 직접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21][23]

이러한 이론에 따르면, 수아레스 총리는 ''아르마다 작전''을 오래전에 감지하고, 몇 주 후에 예정된 정부에 대한 불신임 투표 중에 쿠데타가 발생할 것을 우려하여 이를 피하기 위해 갑자기 사임했다. 이 계획은 수아레스의 사임에도 불구하고 진행되었지만, 테헤로가 그 여파를 이해하지 못하고 의회 회의장에 폭력적으로 진입하여 언론의 주목을 받고, 아르마다가 제안한 다당적 정부를 거부하면서 "하드"와 "소프트" 쿠데타 음모가 동시에 무산되었다.[23]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세 명의 군 장교 중 한 명인 전 CESID 특수 작전 책임자 호세 루이스 코르티나 프리토는 이러한 이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일부에서는 그를 음모 내의 주요 권력자이자 모든 다른 쿠데타 음모를 하나로 묶어 나중에 동시에 무력화한 사람으로 묘사한다.[21][26][27] 국왕과 같은 기수로 사라고사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한 코르티나[26]는 카레로 행정부에서 합동 참모 본부 정보국에 임명되었으며,[28] 나중에 그의 형제가 국가의 주요 보수 정당의 씨앗이 될 ''Gabinete de Orientación y Documentación S. A.'' 씽크탱크를 설립하는 것을 도왔다. 재판 중 점심시간에 검사의 강도 높은 심문을 받은 후, 코르티나는 전화를 잡고 "이 자식이 계속 이렇게 압박하면, [카레로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 다 폭로할 거야"라고 말하는 것이 들렸다고 한다.[27][29][30][31][32] 점심시간 후에 재판이 재개되었을 때 검사의 심문은 강도를 크게 잃었고 코르티나는 결국 무죄를 선고받았다.

laSexta에서 방송한 프로그램, 헤수스 팔라시오스의 저작과 필라르 우르바노의 저서 등이 나오기 전까지, 이러한 주장은 주류 의식에 파고들지 못했지만, 암시와 미묘한 함축은 드물지 않았다.[33] 호세 루이스 데 빌라롱가의 국왕 공인 전기에는 다음과 같은 인터뷰 발췌문이 포함되어 있다. "만약 내가 국왕의 이름으로 작전을 수행하지만 그의 동의 없이 작전을 수행한다면, 나의 첫 번째 조치는 그를 세상으로부터 격리하고 그가 외부의 누구와도 소통하는 것을 막는 것이었을 것이다.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내 거처에 마음대로 들어오고 나갈 수 있었고, 전화선과 관련하여 나는 한 달 동안 받은 전화보다 몇 시간 안에 더 많은 전화를 받았다! 나의 아버지로부터, 그는 Estoril에 있었고(나와 전화로 연락할 수 있어서 매우 놀랐다) 마드리드에 있는 두 누이, 그리고 저항하도록 격려한 우호적인 국가 원수들로부터." 사비노 페르난데스 캄포 왕가의 수장은 이를 스페인어 판에서 삭제했다.[20]

호세 루이스 데 빌라롱가 후작 등 여러 평론가와 저널리스트들은, 은행가나 가톨릭 교회 관계자 등, 냉전 하에서 급격한 스페인의 민주화를 '좌경화'로 보고, 왕정 복고를 통해 이러한 경향을 억제하려 했던 우파 민간인과 조직이 이 쿠데타를 후원했다고 지적하고 있으며, 국왕 후안 카를로스 1세도 이를 명확히 부정하지 않았다.

일부 저널리스트나 정치인들은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왕정 복고를 노린 군사 쿠데타를 국왕이 스스로 진압함으로써 국민에 대한 국왕의 위신을 높이는 동시에 스페인에 민주주의를 정착시킨다"는 것과 동시에 "국왕의 위신을 높이는 동시에 민주주의를 정착시켜 냉전 시대에 기세를 올린 공산주의 세력의 기세를 꺾어 스페인의 좌경화를 막는다"는 것을 목적으로 국왕과 미국의 지원을 받은 군부 중도파가 일으킨 음모라는 음모론을 주장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의견을 지지하는 사람은 적다.

5. 2. 진상 규명 요구

쿠데타의 전개 과정은 유혈 사태는 없었지만 매우 혼란스러웠고, 많은 의문점을 남겼다. 특히, 쿠데타의 두 주모자인 아르마다와 밀란스 델 보쉬의 확고한 군주주의 충성심, 그리고 국왕이 심야 텔레비전 연설을 하기 전까지 오랫동안 부재했다는 점은 재판 과정에서 회의론과 음모론을 불러일으켰고, 그 이후로도 계속 제기되고 있다.[20][21][22][23]

이러한 의혹들은 국왕의 민주주의 옹호에 대한 진정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쿠데타를 강압적인 현실 정치의 연장선으로 보았다. 일각에서는 스페인 비밀 정보국이 국왕, 왕가, 주요 정당 및 언론 대표자들과 공모하여 쿠데타를 조작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이른바 '아르마다 작전'을 통해 드골 작전을 모델로 한 "소프트" 쿠데타를 일으켜 아르마다를 수장으로 하는 국민 통합 정부를 수립하려 했다고 주장한다. 이 작전의 첫 번째 목표는 수아레스 총리를 축출하는 것이었는데, 그는 수개월 동안 언론과 정치 엘리트로부터 끊임없이 비판을 받았고, 심지어 국왕의 신임까지 잃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두 번째 목표는 스페인 공공 기관들이 NATO와 EEC 가입, 그리고 효과적인 초당적이고 이념적으로 온건한 의회 군주제 통합이라는 국가적 과제를 수행할 수 있도록 서두르는 것이었다.[20]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무력 내 반동적인 세력을 제거하고, 일반 유권자들이 군주제와 양당제를 제도적 "기본 입장"으로 받아들이도록 겁을 줘야 했다는 것이다.[20][23]

또한, 그해 말(아마도 5월 2일) 계획되었던 임박한 "하드" 쿠데타를 무력화하는 것도 구체적인 목표 중 하나였다.[1][23][25] 이 쿠데타를 주도한 세력 중 하나는 전 SECED 국장 호세 이그나시오 산 마르틴이 이끄는 '대령 그룹'이었다. 이 음모가 특히 위험하다고 여겨진 이유는 산 마르틴의 정보 연관성과 장군이 아닌 대령과 중령이 군대를 직접 통제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21][23]

일부 이론에 따르면, 수아레스 총리는 '아르마다 작전'을 사전에 감지하고, 쿠데타를 피하기 위해 갑작스럽게 사임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수아레스의 사임에도 불구하고 진행되었는데, 테헤로가 그 여파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이 핵심적인 쿠데타 음모의 중심에 있다고 순진하게 믿었던 점, 의회 회의장에 폭력적으로 난입하여 언론의 주목을 받은 점(그리고 건물 내 마이크와 카메라에 포착되어 조롱을 받은 그의 거친 태도와 언어), 그리고 아르마다가 제안한 다당적 정부를 거부한 점 등이 "하드"와 "소프트" 쿠데타 음모를 모두 무산시키는 결과를 낳았다.[23]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세 명의 군 장교 중 한 명인 전 CESID 특수 작전 책임자 호세 루이스 코르티나 프리토는 이러한 이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일부에서는 그를 음모 내의 주요 권력자이자 모든 다른 쿠데타 음모를 하나로 묶어 나중에 동시에 무력화한 사람으로 묘사한다.[21][26][27] 국왕과 같은 기수로 사라고사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한 코르티나[26]는 카레로 행정부에서 합동 참모 본부 정보국에 임명되었으며,[28] 나중에 그의 형제가 국가의 주요 보수 정당의 씨앗이 될 ''Gabinete de Orientación y Documentación S. A.'' 씽크탱크를 설립하는 것을 도왔다. 재판 중 점심시간에 검사의 강도 높은 심문을 받은 후, 코르티나는 전화를 잡고 "''Como siga este tío así, saco a relucir lo de Carrero''" ("이 자식이 계속 이렇게 압박하면, [카레로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 다 폭로할 거야").라고 말하는 것이 들렸다고 한다.[27][29][30][31][32] 점심시간 후 재판이 재개되었을 때 검사의 심문은 강도를 크게 잃었고 코르티나는 결국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러한 주장들은 laSexta가 방송한 헤수스 팔라시오스의 저작과 필라르 우르바노의 저서 ''La gran desmemoria''가 나오기 전까지는 주류 의식에 파고들지 못했지만, 암시와 미묘한 함축은 드물지 않았다.[33]

참조

[1] 뉴스 Otros condenados que recibieron un polémico perdón https://elpais.com/e[...] El País 2021-06-22
[2] 웹사이트 El Gobierno nombra Comisario Provincial de Tenerife a un convicto por torturas http://www.elzapataz[...]
[3] 웹사이트 King Orders army to crush coup http://www.theguardi[...] 2020-08-11
[4] 뉴스 Suárez: "No quiero que el sistema democrático sea un paréntesis en la historia de España" https://elpais.com/d[...] 2020-08-10
[5] 뉴스 El diario "El Alcázar", investigado como posible soporte de ideas sediciosas https://elpais.com/d[...] El País 2020-08-10
[6] 뉴스 El Rey defiende en Guernica la democracia y las instituciones tradicionales vascas https://elpais.com/d[...] El País 2020-08-10
[7] 뉴스 ETAm asesinó ayer a José María Ryan, ingeniero de la central nuclear de Lemóniz https://elpais.com/d[...] El País 2020-08-10
[8] 웹사이트 Treinta años del secuestro de Luis Suñer https://www.levante-[...] 2020-08-11
[9] 뉴스 Leopoldo Calvo Sotelo: Post-Franco Prime Minister of Spain who survived an attempted coup and was determined to see the country join Nato http://www.timesonli[...] The Times 2008-05-13
[10] 뉴스 El Gobierno y los diputados, retenidos en el Congreso https://elpais.com/d[...] El País 2020-08-10
[11] 서적 23-F : crónica fiel de un golpe anunciado https://www.worldcat[...] Fuerza Nueva Editorial
[12] 웹사이트 23F los pinchazos del golpe https://www.youtube.[...] YouTube 2017-10-05
[13] 뉴스 "Al amanecer se derrumbarán" https://www.elcomerc[...] El Comercio 2011-02-20
[14] 웹사이트 Thatcher y su visión de España https://www.hoy.es/v[...] 2020-08-10
[15] 뉴스 Haig rectificó en Madrid su primera reacción al intento de golpe de Estado https://elpais.com/d[...] El País 2020-08-10
[16] 뉴스 Spanish Coup Attempt Ends in Failure https://www.newspape[...] The Tampa Times 1981-02-24
[17] 서적 Constructing democracy in Southern Europe: a comparative analysis of Italy, Spain, and Turkey. Routledge
[18] 뉴스 Spanish Coup Attempt Fails https://www.newspape[...] Iowa City Press–Citizen 1981-02-24
[19] 웹사이트 23–F https://variety.com/[...] Variety Media 2011-03-04
[20] 웹사이트 unrey.pdf http://win.cut-bai.o[...] 2017-10-05
[21] 웹사이트 Ultra Memorias – biografía de Ernesto Milá http://ernestomila.w[...] 2016-02-24
[22] 웹사이트 Coronel Martínez Inglés: "El golpe del 23-F lo dirigió el rey Juan Carlos" http://www.alertadig[...] 2016-02-24
[23] 서적 La Gran Desmemoria
[24] 웹사이트 Felipe González y el PSOE fueron quienes más avalaron al general Armada http://www.libertadd[...] 2016-02-24
[25] 서적 23-F: El Golpe Que Nunca Existio
[26] 뉴스 Los que quedan del golpe http://elpais.com/di[...] 2016-02-24
[27] 웹사이트 José Luís Cortina Prieto http://www.elespiadi[...] 2016-02-24
[28] 뉴스 El padre del comandante Cortina muere en un incendio ocurrido en uno de los pisos donde, según Tejero, se preparó el 23F http://elpais.com/di[...] El País 2016-02-24
[29] 웹사이트 Cortina, en el juicio del 23-F: "Como me jodan, saco hasta lo de Carrero Blanco": Crónicas del TEDAX-NRBQ del C.N.P. http://barbagris-ted[...] 2016-02-24
[30] 웹사이트 La verdad sobre el magnicidio de Carrero, al descubierto: Peculiaridades posteriores al atentado (5 de 7) http://www.alertadig[...] Alerta Digital 2016-02-24
[31] 웹사이트 Arbil, nº114 Claves para entender la España actual: El Asesinato de Carrero http://www.arbil.org[...] 2016-02-24
[32] 웹사이트 la CIA en España http://granmundo.net[...] 2015-07-02
[33] 서적 Mis almuerzos con gente inquietante (Ensayo-Cronica) Debolsillo
[34] 웹사이트 For Spaniards who remember 1981, the storming of the Capitol looked eerily familiar https://www.theguard[...] 2021-01-15
[35] 뉴스 Stanley Payne on Weaponizing the Past https://www.theameri[...] The American Conservative 2021-01-18
[36] Youtube LA IMAGEN DE TU VIDA - El 23F (1981) https://www.youtube.[...]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