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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의 무정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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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년의 무정부기는 유스티니아누스 2세의 통치 말기부터 레온 3세의 즉위까지 이어진 비잔티움 제국의 혼란기이다. 유스티니아누스 2세의 폭정과 찬탈자들의 등장으로 시작되어, 레온티오스, 티베리오스 3세, 유스티니아누스 2세의 재위, 필리피코스 바르다네스, 아나스타시오스 2세, 테오도시오스 3세에 이르는 일련의 황제 교체를 겪었다. 이 기간 동안 비잔티움 제국은 이슬람 세력의 침략과 불가르족의 위협에 시달렸으며, 내부적으로는 종교적 갈등과 군부의 반란으로 혼란을 겪었다. 결국, 테오도시오스 3세가 폐위되고 레온 3세가 즉위하면서 이사우리아 왕조가 시작되어 무정부 상태가 종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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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의 무정부기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개요
717년 20년의 무정부기 막바지의 동로마 제국
717년 20년의 무정부기 막바지의 동로마 제국
정식 명칭로마 제국
로마자 표기Basileia Rhōmaiōn
라틴어 표기Imperium Romanum
일반 명칭비잔티움
위치콘스탄티노폴리스
종교칼케돈 기독교
공용어중세 그리스어
라틴어
정부 형태군주제
통치자
황제레온티오스 (695–698)
티베리오스 3세 (698–705)
유스티니아누스 2세 (복위; 두 번째 통치) (705–711)
필리피코스 (711–713)
아나스타시오스 2세 (713–715)
테오도시우스 3세 (715–717)
역사
시작695년
종료717년
시작 사건유스티니아누스 2세의 첫 번째 퇴위
종료 사건테오도시우스 3세의 퇴위
이전헤라클리우스 왕조 치하의 동로마 제국
이후이사우리아 왕조 치하의 동로마 제국

2. 유스티니아누스 2세와 찬탈자들 (685년 ~ 711년)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독재적이고 폭력적인 통치로 인해 695년 레온티오스가 주도한 반란을 촉발했다. 이 반란으로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폐위되고 추방되었으며, 이후 22년 동안 7명의 황제가 통치하는 불안정과 무정부 상태가 이어졌다.[3]

레온티우스는 초기에는 인기가 있었지만 카르타고 함락으로 평판이 나빠졌다. 존 파트리키우스가 이끄는 해군은 698년에 패배했다. 군대는 레온티우스를 두려워했고, 같은 해 티베리오스 3세에게 전복되었다. 티베리우스 3세는 동부 국경을 강화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방어 시설을 강화했지만,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재기를 노리고 불가르족과 동맹을 맺은 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고 티베리우스 3세를 처형했다.

이후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705년부터 711년까지 6년간 더 통치했다. 티베리우스 3세와 그의 지지자들을 잔혹하게 다루었고, 계속해서 독재적이고 잔인한 방식으로 통치했다. 그는 티베리우스 3세가 동쪽에서 되찾은 영토를 잃었고, 교황에게 자신의 견해를 강요했다. 그러나 필리피쿠스 바르다네스가 이끄는 반란에 직면했고,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그의 아들이자 공동 황제인 티베리우스도 처형되어 이라클리오스 왕조의 혈통이 끊어졌다.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집정관의 역사적 역할을 폐지하고 이를 황제와 통합하여 황제의 헌법적 지위를 절대 군주로 강화함으로써 비잔티움 제국을 그 기원에서 더욱 멀어지게 했다.

2. 1. 레온티오스 (695년 ~ 698년)

레온티오스는 잔혹한 성격과 중과세로 백성들의 원성을 산 유스티니아누스 2세를 폐위시키고 황제가 되었다. 레온티오스는 청색당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3] 그는 콘스탄티노스 4세와의 친분 때문에 유스티니아누스 2세를 처형하지 않고 코를 잘라 모욕을 준 다음 크림 반도의 케르손으로 유배를 보냈다.

698년 이슬람 세력이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를 정복하여 북아프리카의 비잔티움 제국 영토를 모두 잃게 되자 레온티오스의 인기는 하락했다. 그는 카르타고를 수복하기 위해 대규모 함대를 편성하여 원정을 보냈으나, 패전에 대한 추궁을 두려워한 함대는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함대의 부제독 티베리오스 3세를 중심으로 하여 동로마 제국을 전복하였다.[3]

2. 2. 티베리오스 3세 (698년 ~ 705년)

698년 이슬람 제국 세력이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를 정복하여 북아프리카의 비잔티움 제국 영토를 모두 잃게 되자, 레온티오스는 대규모 함대를 편성하여 카르타고 수복을 위한 원정을 보냈다. 그러나 이 함대는 패전하였고, 패전에 대한 추궁을 두려워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함대의 부제독 티베리오스 3세를 중심으로 하여 동로마 제국을 전복시켰다.[3] 황제가 된 티베리오스 3세는 동생의 도움으로 아나톨리아의 육상과 해상 방어를 강화하고 700년에는 이슬람 치하의 시리아를 공격하여 잠시나마 아르메니아의 일부를 빼앗았다. 그는 703년704년의 이슬람의 침공을 물리쳤다.[3]

그러나 유배지에 있던 유스티니아누스 2세를 죽이려고 사람을 보냈지만 실패하고, 유스티니아누스가 탈출하여 불가르족과 동맹을 맺고 705년콘스탄티노폴리스로 쳐들어왔다. 티베리오스는 도망쳤으나 결국 붙잡혔고 자신이 폐위시킨 레온티오스와 함께 끌려나와 유스티니아누스 2세에 의해 처형당했다.[3]

2. 3. 유스티니아누스 2세의 복위와 공포 정치 (705년 ~ 711년)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불가르족과 동맹을 맺고 705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쳐들어왔다. 티베리우스 3세는 도망쳤으나 결국 붙잡혔고, 자신이 폐위시킨 레온티오스와 함께 끌려나와 유스티니아누스 2세에 의해 처형당했다.[3]

복위한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공포정치를 시작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처형하고 고문하며 죽였고, 수많은 장군을 처형함으로써 제국의 국방을 약화시켰다. 709년에는 갑작스럽게 라벤나를 공격하게 하였는데, 이는 대규모 시민 봉기로 이어졌다. 하지만 외적으로는 야만족들과 화평을 맺었고 이슬람과도 우의를 다졌다. 서방 교회와도 화해 정책을 펴서 퀴니섹스트 공의회의 문제를 매듭지으려 했다. 711년 교황 콘스탄티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직접 방문하였고, 황제는 교황의 발에 입을 맞추고 화해했다.

케르손은 하자르족과 연합했고 더 이상 유스티니아누스를 황제로 인정하지 않았다. 아르메니아 출신의 장군 필리피코스는 스스로 황제로 선포했다. 유스티니아누스 2세가 수도를 떠나는 실수를 하는 바람에 필리피코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였고,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붙잡혀 처형당했다. 필리피코스는 유스티니아누스 2세의 후손을 모두 죽여버렸고, 유스티니아누스 2세의 아들 6살의 티베리우스도 블라케르나이 성당에서 처형했는데, 이로써 이라클리오스 왕조의 혈통은 완전히 끊어졌다.

3. 필리피코스 바르다네스 (711년 ~ 713년)

필리피코스는 케르손의 세력과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켜 711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고 황제가 되었다. 황제가 된 이후에는 자신의 쾌락과 소모적인 신학 논쟁에만 몰두하는 무능력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단성론에 기울었지만 단의론을 부활시키려 하였으며, 이로 인해 교황 콘스탄티노와 갈등을 빚었다.[1] 712년 불가르족의 왕 테르벨은 유스티니아누스 2세 황제의 복수를 명분으로 제국을 침략했고, 필리피코스는 제대로 방어하지 못하고 옵시키온 테마의 군대를 불러들였다. 그 사이 우마이야 왕조의 이슬람 세력이 소아시아를 다시 침범하였다. 트라키아에 있던 옵시키온 군대는 반란을 일으켰고, 713년 6월 필리피코스는 폐위되어 눈이 뽑히는 형벌을 받았다.[1] 원로원과 시민은 궁정의 비서장 아르테미오스를 황제로 추대했고, 그는 아나스타시오스 2세로 황제 자리에 올랐다.

필리피코스의 반란은 정치적 영역을 넘어 종교적 영역으로까지 확대되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키로스를 폐위시키고 단의설을 재확립했으며, 제6차 에큐메니칼 공의회의 결정을 뒤집어 로마와의 관계를 악화시켰다.[2] 군사적으로는 불가르족이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에 이르렀으며, 수도 방어를 위해 군대를 이동시키면서 아랍 세력이 동쪽으로 침략할 수 있도록 했다.[2] 그의 통치는 군대 반란으로 인해 갑작스럽게 종말을 맞이했으며, 그는 폐위되고 아나스타시우스 2세(713–715)가 그를 대신했다.[2]

4. 아나스타시오스 2세 (713년 ~ 715년)

아나스타시오스 2세는 필리피코스를 폐위시키고 즉위한 뒤 국가 재건을 위해 노력했다. 제위 초기에 불가르족의 침입을 막아냈고, 이슬람의 침입에 대비하여 육로 성벽을 보강하고 식량을 비축했다. 그는 사라센을 선제공격하기 위해 로도스 섬을 발판으로 이슬람 침공을 계획했다.

715년 초, 아나스타시오스 2세는 군대에 출병 명령을 내렸으나, 옵시키온 부대는 로도스에 도착하자마자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조세 징수관인 테오도시오스를 황제로 추대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했다. 결국 아나스타시오스 2세는 폐위되어 테살로니키의 한 수도원에 감금되었다.

아나스타시오스 2세는 전임자의 종교 정책을 뒤집었고, 714년에는 갈라티아까지 진격한 아랍의 해상 및 육상 공격에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대응했다.[1] 그러나 그를 왕위에 앉힌 옵시키온 군대가 반기를 들고 새 황제를 선포하면서, 6개월 동안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한 끝에 아나스타시오스 2세는 도망치게 되었다.[1]

5. 테오도시우스 3세 (715년 ~ 717년)

테오도시우스 3세는 716년 불가리아와 강화 협정을 맺고 아랍의 침입을 견제했다.[1] 717년 아나톨리콘 테마의 군사 총독 레온 3세가 반란을 일으켰고, 니코메디아에서 테오도시우스 3세의 아들을 격퇴시키고 포로로 잡았다.[1] 테오도시우스 3세는 협상을 통해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보장받은 후 제위에서 물러나 에페소스의 수도원으로 들어갔다.[1] 아나스타시우스 2세를 물리친 직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717–718)을 준비하던 아랍에 맞서기 위해 불가르족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했다.[2] 또한 같은 해 아나톨리콘 테마와 아르메니아콘 테마의 반란에 직면했고, 결국 사임하여 레온 3세가 뒤를 이었다.[2]

6. 20년 무정부 시대의 종식과 이사우리아 왕조

유스티니아누스 2세(685–711)의 독재적이고 폭력적인 통치는 695년 레온티우스(695–698)가 이끄는 반란을 일으켜 그를 폐위시키고 추방했다. 이 사건은 22년 동안 7명의 황제가 재위하는 장기간의 불안정과 무정부 상태를 초래했다.[3]

레온티우스는 초기에는 인기가 있었으나, 카르타고 상실로 평판이 나빠졌다. 존 파트리키우스가 이끄는 해군은 698년 카르타고에서 패배했다. 군대는 레온티우스를 두려워했고, 같은 해 티베리우스 3세(698–705)에게 전복되었다. 티베리우스 3세는 동부 국경을 강화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방어 시설을 강화했다. 그러나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재기를 모색하여 불가르족과 동맹을 맺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 티베리우스 3세를 처형했다.

이후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6년간(705–711) 더 통치했다. 티베리우스 3세와 그의 지지자들을 잔혹하게 다루었고, 독재적이고 잔인한 통치를 이어갔다. 그는 티베리우스 3세가 동쪽에서 되찾은 영토를 잃었고, 교황에게 자신의 견해를 강요했다. 필리피쿠스 바르다네스(711–713)가 이끄는 반란에 직면하여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체포되어 처형되었고, 그의 아들이자 공동 황제인 티베리우스(706–711)도 처형되어 헤라클리우스 왕조의 혈통이 끊어졌다.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집정관의 역사적 역할을 폐지하고 황제와 통합하여 황제의 입헌적 지위를 절대 군주로 강화했다.

군대는 새로운 황제로 테오도시우스 3세(715–717)를 선포했다. 테오도시우스 3세는 아나스타시우스 2세를 물리치자마자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717–718)을 위한 아랍의 준비에 직면하여 불가르족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했다. 그는 717년에 아나톨리콘 테마와 아르메니아콘 테마의 반란에 직면했고, 사임하기로 결정했다. 레오 3세 (717–741)가 그의 뒤를 이어 폭력과 불안정의 주기를 끝냈다.

비잔틴 제국은 내부 문제, 아랍의 위협에 대한 사산 제국의 빠른 붕괴, 그리고 두 전선에서 동시에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도 제국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는 제국 내 군사 조직의 강점과 아랍 세계 내 파벌 간의 갈등 덕분이었다.

참조

[1] 서적 1994
[2] 서적 1992
[3] 서적 Byzantium The Imperial centuries AD 610-1071 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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