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인조 (자유민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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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5인조는 2000년 4월 오부치 게이조 총리가 뇌경색으로 입원한 후, 아오키 간오 관방장관, 모리 요시로 자민당 간사장, 무라카미 마사쿠니 참의원 의원회장, 노나카 히로무 간사장 대리, 카메이 시즈카 자민당 정무조사회장 등 5명의 자민당 주요 인사들이 호텔 뉴 오타니에서 비밀 회동을 통해 모리 요시로를 후임 총리로 추대하고 아오키 간오를 총리 대리로 결정한 사건을 지칭한다. 이 결정은 당내 공식 절차를 거치지 않고 소수 정치인들에 의해 이루어져 밀실 협의라는 비판을 받았으며, 오부치 총리의 건강 상태가 불분명한 상황에서 아오키가 총리 대리로 지명된 과정에 대한 의혹도 제기되었다. 5인조는 연립 정권 유지를 위해 신속한 결정을 내렸다고 주장하며, 총재 선거를 통해 다른 후보도 참여할 수 있었기에 밀실 결정은 아니라고 반박했다. 이 사건은 이후 가토의 난으로 이어지는 등 일본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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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인조 (자유민주당) | |
---|---|
선거 개요 | |
선거 이름 | 2000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
선거 종류 | 총재 선거 |
진행 여부 | 아니오 |
이전 선거 | 1999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
이전 선거 연도 | 1999년 |
다음 선거 | 2001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
다음 선거 연도 | 2001년 |
선거 날짜 | 2000년 4월 5일 |
선거 시스템 | |
선출 방식 | 양원 의원 총회에 의한 선출 |
유권자 수 | 당 소속 중의원 의원: 271 |
후보 정보 | |
![]() | |
후보 1 이름 | 모리 요시로 |
후보 1 색상 | 556B2F |
총재 정보 | |
직책 | 총재 |
선거 전 총재 | 오부치 게이조 |
선거 후 총재 | 모리 요시로 |
관련 정보 | |
뉴스 기사 링크 | 생존 <15> 아카프리 5인조 오부치 총리가 쓰러져 모리 정권으로 전 자민당 정조회장 가메이 시즈카 씨(1936년~) |
관련 용어 | 5인조 |
2. 오부치 게이조 총리의 뇌경색 발병과 긴급 입원
2000년 4월 2일 오전 1시경, 오부치 게이조 총리가 준텐도대학 병원에 긴급 입원했다.[17] 한 시간 뒤, 후루카와 도시타카 총리대신정무비서관이 아오키 간오 관방장관에게 총리 입원 사실을 알렸다.[17] 오전 6시경에는 주치의가 아오키 관방장관을 방문했다.[17]
2000년 4월 2일, 오부치 게이조 총리가 뇌경색으로 준텐도대학 의학부 부속의원에 긴급 입원했다.[17] 정오에 아오키 간오 내각관방장관은 호텔 뉴 오타니 도쿄에서 이른바 '5인조'를 소집하여 총리 대리와 후임 총리에 대한 논의를 진행했다. 이 자리에는 아오키 외에도 모리 요시로 자민당 간사장, 무라카미 마사쿠니 참의원 의원회장, 노나카 히로무 간사장 대리, 가메이 시즈카 자민당 정무조사회장이 참석했다.
오후 11시, 아오키 관방장관은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오부치 총리가 컨디션 불량으로 입원했음을 공식 발표했다. 다음 날인 4월 3일 오전 11시, 아오키 관방장관은 정례 기자회견에서 오부치 총리의 병명이 뇌경색임을 처음으로 밝히고, 오부치 총리의 지시에 따라 자신이 총리 임시 대리에 취임했음을 발표했다.
3. '5인조'의 밀실 회동과 모리 요시로 총리 추대
5인조는 자정 무렵 다시 모여 아오키가 총리 대리를 맡고 후임 총리는 모리로 한다는 합의를 도출했다. 이들은 내각 총사퇴와 국회 본회의 등의 일정도 함께 결정했다. 4월 4일 내각이 총사퇴를 결의했고, 다음 날 자민당 양원총회에서 모리를 신임 총재로 선출했다. 같은 날 오후 국회 양원 본회의에서 모리가 총재로 지명받아 조각을 단행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당내 공식 절차를 거치지 않고 소수 유력 정치인들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점에서 '밀실 협의'라는 비판을 받았다. 특히 이케다 유키히코 총무회장은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전화로 모리를 후임 총리로 결정하는 데 동의를 구했다.[18]
모리 요시로는 훗날 "심야 회의에서 순식간에 '모리 씨, 후임자는 당신밖에 없다'라는 결론이 나왔다"라고 회고하며, 공명당과 가토 고이치도 자신을 지지했다고 주장했다.[19] 또한, 당시 연립 정권 유지와 법률안 통과 등 중요한 현안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해명하며 밀실 주장을 부정했다.[20][21]
모리는 분게이슌주와의 인터뷰에서 야당의 비판에 대해 "자민당 내부의 비판은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야당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은 없다"고 반박하며, 일본공산당 당직 인사의 불투명성을 지적하기도 했다.[21]
무라카미는 주간신조에 발표한 수기에서 "확실하게 당내 수속을 밟아 자민당 양원 의원 총회를 통해 총재를 선출한 것이니 밀실에서 정했다고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노나카 역시 회고록을 통해 모리가 후계자가 된 경위를 설명했다.[23] 가메이는 모리가 총리직에 대한 의지를 보였다고 회고하며, 5인조 회의가 각 파벌의 수장들이 모인 자리였고 양원 의원 총회도 열렸기 때문에 밀실 정치가 아니라고 주장했다.[24][25]
3. 1. '5인조' 구성원
오부치 게이조 총리가 갑작스럽게 쓰러진 후, 모리 요시로를 총리로 추대하기 위해 모인 5명의 정치인은 다음과 같다.[18][19][23][24][25]
직책 | 이름 | 소속 파벌 |
---|---|---|
간사장 | 모리 요시로 | 모리 파 |
내각관방장관 | 아오키 간오 | 오부치 파 |
참의원 의원 회장 | 무라카미 마사쿠니 | 에토·가메이 파 |
간사장 대리 | 노나카 히로무 | 오부치 파 |
정조회장 | 가메이 시즈카 | 에토·가메이 파 |
이들은 '5인조'라고 불리며, 심야 회의를 통해 모리 요시로를 후임 총리로 결정했다. 이 과정은 '밀실 정치'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19] 5인조는 당내 절차를 밟아 총재를 선출했으므로 밀실 정치가 아니라고 반박했다.[19][20][21]
4. 권력 승계 과정과 내각 총사퇴
4월 3일, 아오키 미키오 관방장관은 기자회견을 통해 오부치 게이조 총리의 병명이 뇌경색임을 발표하고, 자신이 총리 대리를 맡게 되었음을 밝혔다.[17] 4월 4일, 내각은 총사퇴를 결의했다. 4월 5일, 자민당 양원 의원 총회에서 모리 요시로가 신임 총재로 선출되었고, 국회 양원 본회의에서 총리로 지명되었다. 이후 제1차 모리 내각이 정식 출범했다.
5. '5인조' 결정에 대한 비판과 논란
오부치 게이조 총리가 뇌경색으로 쓰러진 후, 후임 총리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이른바 '5인조'라고 불리는 5명의 자민당 유력 정치인들이 모여 모리 요시로를 후임으로 결정한 것에 대해 많은 비판과 논란이 제기되었다.
주요 비판 내용
- 밀실 결정: 국민의 의사를 묻는 절차 없이 소수의 정치인들이 밀실에서 후임 총리를 결정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특히, 오부치 총리의 의식이 불분명한 상황에서 아오키 미키오 관방장관이 총리 대리로 지명된 과정에 대한 의혹이 있었다.[2] 아오키는 오부치가 병상에서 자신을 총리 대리로 지명했다고 주장했지만, 사실 관계에 대한 의혹과 정당성 논란이 있었다.
- 야당의 반발: 야당인 민주당은 아오키의 총리 대리 취임을 관직 사칭 및 공문서 위조 혐의로 고소했지만, 불기소 처분되었다.[2]
- 권력 승계 문제: 5인조의 결정은 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나며, 국민의 의사를 무시한 채 권력을 승계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5인조 측은 위기 상황에서 신속한 결정이 필요했고, 당내 절차를 거쳤기 때문에 밀실 결정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5. 1. '5인조' 측의 반론
모리 요시로를 비롯한 '5인조'는 자신들의 결정이 당시 위기 상황에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자유민주당, 자유당, 공명당의 연립 정권 유지를 위해 신속한 결정이 필요했으며, 예산안 통과 이후에도 관련 법안 처리가 남아있는 상황이었다고 강조했다.[20][21] 또한, 당내 절차를 통해 총재를 선출했기 때문에 밀실 결정이 아니라고 반박했다.[19]모리는 "5명의 모임에서 이루어진 합의는 당 집행부로서 차기 총재 선거 후보로 나를 추천한 것입니다. 차기 총재 선거를 양원 의원 총회에서 진행하면 다른 사람도 입후보할 수 있습니다. 밀실에서 정한 것이 아니죠. 가토 고이치 씨도 나오고 싶다면 손을 들었으면 됐을 일입니다. 하지만 손을 들지 않고 모리가 돼도 좋다고 말하셨죠"라며 밀실 주장을 부정했다.[19]
모리는 분게이슌주와의 인터뷰에서 야당의 비판에 대해 "자민당 내부의 비판은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야당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은 없다"고 말했다. 이는 민주당 총재 선거에 입후보한 고미야마 요코와 가와무라 다카시가 당내 기류 때문에 출마를 포기한 점과 일본공산당 당직 인사가 투명하게 진행되지 않은 점을 지적한 것이었다.[21]
무라카미 마사쿠니는 주간신조에 발표한 수기를 통해 "확실하게 당내 수속을 밟아 자민당 양원 의원 총회를 통해 총재를 선출한 것이니 밀실에서 정했다고 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노나카 히로무는 회고록에서 "아오키 씨에게 그러한 설명이 있었고 잠시 무거운 침묵이 이어진 뒤에 무라카미 마사쿠니 씨가 '모리 씨, 당신이 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지 않은가'라고 말하고 가메이 씨가 동조하여 모리 씨가 후계를 잇는 것이 결정되었다"라고 밝혔다.[23]
가메이 시즈카는 "자민, 자유, 공명 3당 연립 정권은 (...) 오자와에게 휘둘렸다. (...) 자민당이나 정부 간부는 급히 (...) 얘기했다. (...) 무라카미가 '네가 하면 어떻겠나, 간사장도 하고 있으니까'라고 하자 모리도 싫지 않다는 태도를 보였다. 나도 '하고 싶지?'라고 등을 밀어줬다. 세상은 밀실 정치라고 말했지만 (...) 각 파벌의 수장격이 모여있었다. 양원 의원 총회도 열렸고 모의라고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25]
6. 한국의 관점에서의 분석
오부치 게이조 총리의 갑작스러운 사망과 '5인조'의 권력 승계는 한국 정치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은 대통령 중심제 국가로, 대통령 유고 시 헌법과 법률에 따라 권한대행 체제로 전환되어 권력 승계 절차가 진행된다.[1] 오부치 총리의 사례는 이러한 절차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1]
밀실 정치와 권력 암투는 한국 정치에서도 자주 비판받는 문제인데, '5인조'의 결정 과정은 이러한 문제점을 드러내며 정치적 투명성과 민주적 절차의 중요성을 강조한다.[1] 아오키 미키오가 총리 대리로 취임한 것에 대한 정당성 논란, 그리고 야당이었던 민주당이 아오키를 고소했지만 불기소 처분된 사건은 이러한 논란을 보여준다.[1]
7. 사건의 영향과 후일담
'5인조'의 결정은 이후 일본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모리 요시로 총리 내각은 정통성 논란에 시달렸으며, 이는 가토의 난 등 자민당 내 분열을 야기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오부치 게이조 총리 사례 이후, 일본에서는 총리가 갑자기 직무를 수행할 수 없는 비상 상황에 대비하여 총리 대리 예정자 5명을 미리 지정하는 관례가 생겼다.[17]
야당인 민주당은 아오키 미키오가 총리 대리 자격으로 양원 의장에게 내각총사퇴 통지서를 보낸 것에 대해 관직 사칭과 공문서 위조 등의 혐의가 있다며 고소했지만 불기소처분되었다. 하지만 일국의 총리 후임을 소수의 5명이 호텔에 모여 밀실에서 정한 것에 대한 국민적 비판은 끊이지 않았다.[18]
모리는 훗날 "심야 회의에서 순식간에 '모리 씨, 후임자는 당신밖에 없다'라는 결론이 나왔다"라며 밀실 주장을 부정했다.[19] 또한 당시 자민당은 연립 정권에서의 이탈을 막아야 하는 중요한 국면이었고, 예산안은 통과되었지만 부속 법률안들이 아직 통과되지 않았으며, 통상적인 절차를 밟았을 경우 한 달 정도의 시간이 걸렸을 거란 점 등을 들며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주장했다.[20][21]
오부치 내각에서 교육 문제 담당 보좌관으로 근무하던 마치무라 노부타카는 모리에게 "교육 개혁은 어차피 이번 정권에서는 힘들다. 자네가 다음 정권을 맡을텐데 딱 좋은 주제가 아닌가"라고 말했다고 모리가 훗날 밝혔다.[22] 오부치가 사전에 모리를 후임자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얘긴데 제3자 증인이 없어서 사실 여부는 불투명하다.
무라카미는 주간신조에 발표한 수기를 통해 "확실하게 당내 수속을 밟아 자민당 양원 의원 총회를 통해 총재를 선출한 것이니 밀실에서 정했다고 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노나카는 회고록에서 '5인조' 회의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23]
가메이는 '5인조' 결정에 대해 "세간은 밀실 정치라고 말하지만 굉지회 말고도 각 파벌의 수장격이 모여있었다. 양원 의원 총회도 열렸고 모의라고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24][25]
7. 1. 가토의 난과의 연관성
'5인조'에 의해 모리 요시로가 후임 총리로 선출된 것은, 차기 총리로 유력했던 가토 고이치가 옹립되지 못한 원인이 되었고, 이는 훗날 '가토의 난'으로 이어진다. 무라카미 마사쿠니는 "포스트 오부치를 노리고 있던 가토를 무의식 중에 경계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19]참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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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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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기타
2000年4月25の参議院予算委員会における津野修内閣法制局長官の答弁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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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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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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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일부 언론은 실제로 만났는지 의심하는 보도를 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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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 요시로 『자민당과 정권 교체』
아사히신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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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나카 히로무, 『노병은 죽지 않는다 - 노나카 히로무 전 회고록』
분게이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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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슈칸겐다이 2018년 12월 8일호, 가메이 시즈카의 정계 교차점 / 모리 요시로-오부치 게이조가 쓰러지도 모리 후계를 밀실에서 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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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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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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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마사쿠니, 히라노 사다오, 후데사카 히데요 『자민당은 왜 무너졌나 - 격동하는 정치를 읽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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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혼게이자이신문출판사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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